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윤 복 진(작가)
• 1908년 1월 9일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출생.
• 1931년 일본에서 고학.
• 1964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
• 1991년 7월 16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우리 나라의 재능있는 수많은 작가들중에는 앞날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의 친근한 교양자로 동심의 향기를 풍기며 한생을 동요창작에 바친 아동문학작가 윤복진도 있다.
윤복진은 현대조선동요문학발전에 자기의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으며 창작생활 전기간 사상예술성이 높은 아동시들을 창작하여 후대교양에 이바지하였다.
그래서 동시대작가들과 시인들은 그를 《동요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해외에서 활동하고있는 아동문학작가들속에서도 그는 《동요할아버지》로 불리워지고있다.
남다른 존경과 사랑의 호칭으로 불리우고있는 《동요할아버지》 윤복진의 한생은 어떻게 흘러왔으며 인생의 마무리는 어떻게 지었는가.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1908년 1월 경상북도 대구시변두리의 한 가난한 가내수공업자네 집에서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여무지게 흘러나왔다.
풀이나 나무, 돌 같은 자연재료에 의거하여 고리도 엮고 솔이나 도시락도 만들어 팔아 연명해가는 미여지게 가난한 이 집에 태여난 아들애가 후날 우리 나라의 현대아동문학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는 인재로 될줄 그 누가 알았으랴.
타고난 재간은 귀신이 돌보아 빛을 내게 해준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모든 일을 성공시키는데서 천성이 중요하다는것을 강조해주는것이지 결코 타고난 재간이 있으면 성공이 저절로 온다는 말은 아닌것이다.
천성적인 재간을 가진 어린것들이 너무도 무참히 굶어죽고 맞아죽고 앓아죽고 한것이 해방전 우리 나라 실태가 아니였던가.
《고리쟁이》, 《솔쟁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는 아버지를 따라 산에도 오르고 들에도 나가고 장에도 나들며 어린 윤복진은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못사는것이 현실이라는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였다.
손톱끝이 닳도록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덕에 윤복진은 가까스로 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우리 글을 알게 된 그때부터 그는 즐겨 책을 읽고 글을 지어보면서 문학적소양을 쌓았다.
소학교를 마치고 계성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3학년때부터 아동시도 써보고 성인시도 써보았는데 그 과정에 점차 아동시문학에 마음이 끌리게 되였고 동요창작에 열중하게 되였다.
조숙한 윤복진이 처녀작으로 지상에 발표한 작품은 14살 나던 해인 1922년 봄에 지은 동요 《종달새》이다.
어느날 아침 그는 학교로 가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달새의 처량한 울음소리를 듣게 되였다. 가까이 가보니 길가집 추녀밑에 걸려있는 조롱안에서 한마리의 종달새가 애처롭게 울고있었다. 자유를 잃고 구슬프게 우는 종달새의 울음소리가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내 고향, 내 조국이 일제의 발굽밑에 짓밟혀 신음하고있구나 하는 생각이 못견디게 치밀어오르는것이였다.
그날 윤복진은 학교에 가서 그 종달새를 두고 눈물어린 동요를 썼다.
보리밭에 종달새
봄이 왔다고
은방울 흔들면서
노래하기를
누구든지 같이 와
놀고 가래요
처마끝 조롱속의
옛집 그린 새
보리밭을 보면서
슬피 울기를
갈래야 갈수 없는
맨몸이래요
동요는 이렇게 짧은 2련으로 되였다.
조롱속에 갇혀있는 새, 옛집을 그리며 슬피 우는 종달새는 어떤 새인가.
순수 자연의 새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종달새는 사랑하는 옛집, 조국을 원통하게 빼앗긴 우리 어린이들이였으며 우리 겨레였다.
동요는 세상에 발표되자마자 작곡이 되여 나라를 빼앗기고 봄마저 잃었던 이 땅의 아이들에 의해 즐겨 불리워졌다. 산골에서 나무하던 소년들도 지게를 지면서 부르고 도회지에서 공부하던 소년들도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불렀다.
윤복진의 처녀작은 이처럼 나라잃은 설음속에 흘리는 눈물의 동요로부터 시작되였다.
처녀작발표후 윤복진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수십편의 동요를 창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사랑과 설음,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노래한 동요들인 《두만강을 건느며》(1924년), 《고향집》(1927년), 《고향하늘》, 《강남가는 제비》(1928년) 등을 비롯하여 착취사회의 최하층에서 온갖 학대와 빈궁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와 비극적운명을 보여주는 동요 《쫓겨난 부엌데기》(1927년), 《팔려가는 우리 황소》, 《스무하루밤》(1928년), 《후여 딱딱 참새야》(1930년) 등 여러 주제의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작품들은 모두 망국의 비운이 드리운 땅에서 작가자신이 직접 체험한 나라없는 어린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심어린 눈물속에서 펼쳐보인것들이였다.
동요 《두만강을 건느며》는 그 대표작의 하나이다.
윤복진은 어렸을 때 정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수많이 보았다. 그때 윤복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거장이 있었다. 동무들과 함께 정거장에 나가보면 일본이나 만주로 떠나가는 사람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람루한 옷차림, 이고 진 보짐, 백발의 로인들, 배고파 칭얼거리는 어린것들… 조국을 떠나가는 류랑민들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여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 그들가운데는 이웃에서 같이 살던 사람들도 있었고 한마을에서 함께 놀던 어깨동무들도 있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저 늙은이들이 살아서 고향땅에 다시 돌아올 날이 과연 있기나 할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서글픈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정거장에 갔다온 날 밤이면 불쌍한 류랑민들의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리고 처량한 기적소리가 귀전에 울려와서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윤복진은 이 눈물겨운 두만강에 깃든 기나긴 력사의 이야기를 동요에 담아보려고 붓을 들었다.
눈보라는 펄펄
가는 길 막는데
보짐을 이고 지고
떠나야만 하나요
이 강을 건너서면
남의 나라 땅
돌아보면 내 나라
그리운 내 고향
언제 오나 묻지 말아
다시 올 날 있으려니
잘 있으라 내 나라
그리운 내 고향
동요 《두만강을 건느며》는 눈물속에 조국을 떠나가는 겨레의 모습과 그리운 조국산천을 돌아보며 해방의 날을 고대하는 서정적주인공의 심정을 생동하게 펼쳐보이고있다.
동요 《쫓겨난 부엌데기》도 작가가 눈물나는 생활체험속에서 쓴것이다.
윤복진의 집옆에는 울타리도 없는 오막살이 한채가 있었다. 코구멍만 한 단칸방에 자그마한 부엌이 달린 집이였다.
그 집에서는 갓난이라는 아이가 어머니와 단 둘이서 참으로 가난하게 살고있었다. 해빛이 들지 않아 방안은 대낮에도 어둑컴컴하였다.
어린 갓난이는 노닥노닥 기운 헌 치마를 입긴 하였지만 여간만 귀여운 아이가 아니였다. 일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하여 물도 긷고 밥도 짓고 빨래도 하였다.
복진은 갓난이와 세간놀이를 할 때마다 새각시, 새서방이 되군 하였다.
윤복진네 집도 살기가 어려웠지만 누룽지가 생기면 갓난이 손에 쥐여주고 어쩌다 떡을 치면 갓난이네 집에도 가져갔다.
그런데 하루는 웬 일인지 갓난이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되여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윤복진은 갓난이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붙잡고 가만히 물어보았다.
《갓난이는 어디 갔나요?》
갓난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무런 말도 없이 먼산만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그러고있던 갓난이 어머니는 옷고름으로 눈굽을 닦고나서 갓난이가 아버지의 빚값에 팔려 먼곳에 부엌데기로 끌려갔다고 말해주는것이였다.
윤복진의 두눈에서도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후 윤복진네는 멀리 성밖으로 이사를 하였다. 새로 이사한 집은 자그마한 초가집이였는데 앞에는 대궐처럼 요란한 고대광실 큰집이 솟아있었다. 그때 대구에는 잘사는 지주들이 많았다. 그가운데서도 앞집은 소문난 큰 부자집이였다. 집은 대문이 몇개나 되는지 몰랐다. 성문처럼 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깥문과 안문이 있고 중간문과 사랑문이 있었다. 그 집에서는 일년내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거들먹거리며 호화롭게 살았다. 이른새벽부터 고기를 굽고 지지는 냄새가 높은 담을 넘어 풍겨오고 《순아, 순아?》 하고 부엌데기를 찾는 소리가 연방 들려왔다. 밤이면 술판을 벌려놓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혀꼬부라진 소리와 함께 기생들의 간드러진 노래소리, 장고소리가 그칠줄을 몰랐다.
어느해 여름, 며칠동안 내린 장마비에 그 부자집 담장 한쪽모서리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때에야 복진은 지주집 부엌을 들여다볼수 있었는데 너렁청한 부엌에서 부엌데기들이 땀을 흘리며 눈코뜰새없이 돌아가고있었다.
높이 쌓은 담장너머에서 부엌데기를 찾는 지주녀편네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는 잊지 못할 소꿉동무 갓난이를 그려보군 하였다.
그애는 어느 집에 끌려가서 죽을 고생을 다하고있을거야, 살아있기나 한지…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길가에서 오돌오돌 떨고있는 한 소녀를 보게 되였다. 그 모습이 신통히도 갓난이같아 가까이 가보니 다행히도 아니였다.
집에 돌아온 윤복진은 그날 밤 들창밖에서 흩날리는 차디찬 눈을 바라보며 동요 《쫓겨난 부엌데기》를 썼던것이다.
바람불고 눈오는 추운 겨울에
가엾은 부엌데기 쫓겨났어요
심술궂은 마님한테 쫓겨났어요
솜옷을 입어도 추운 겨울에
가엾은 가엾은 부엌데기 쫓겨났어요
홑옷입고 발발 떨며 쫓겨났어요
바람차고 눈오는 추운 겨울에
쫓겨난 부엌데기 어디로 가나
집도 없는 부엌데기 어디로 가나
동요에서 보여준 쫓겨난 부엌데기의 모습은 착취자, 압박자들에게 짓눌려사는 불쌍한 우리 어린이들의 운명이였다.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밝은 희망의 앞날을 안겨주지 못한 부족점이 있기는 하지만 쫓겨난 부엌데기의 눈물겨운 모습을 통하여 독자들의 가슴속에 지주를 미워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뜨거운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윤복진의 눈물의 동요는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노래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일제의 가혹한 책동으로 해마다 수많은 우리 인민들이 살길을 찾아 남의 나라로 떠나갔다. 그 시절에는 한마을에서 살던 소꿉동무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의례히 부모를 따라 현해탄을 건너간것이였고 한학급에서 공부하던 동창생이 없어졌으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떠나간것이였다.
윤복진네 집살림도 점점 쪼들려갔다.
일제는 끈을 꼬아 장마당에 내다 파는 가내수공업자의 자그마한 기계마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아 나섰다. 하여 그런대로 밥술이나 먹던 살림마저 가랑잎처럼 흩날리고말았다.
집안어른들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살아갈 길을 걱정하였다.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는 《우리 집 형편에 공부가 당치 않다. 우리 대에 와서 책 한권이라도 뗀 사람이 있으면 좋기는 하련만…》 하고 말하고나서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자 복진이 아버지가 나앉으며 《이제 한두해만 고생하면 중학을 마칠텐데… 하나밖에 없는 손주가 아닙니까.》 하고 하소연하였다.
윤복진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가슴아픈 이야기를 더는 앉아서 듣고만 있을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도 고향을 등지고 북간도로 떠나가야 한단 말인가.
그는 울적한 마음을 달랠길 없어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발길 가는대로 걸었다. 그날따라 고향의 푸른 산과 넓은 들이 더더욱 유정하게 보이였다. 집앞을 감돌아흐르는 작은 시내물도 《가지 말아, 가지 말아.》 하고 속삭이는듯 하였다. 이 심정을 동요에 담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일어났다. 직접 당하는 일이라 붓만 쥐면 단숨에 쓸것 같았다.
윤복진은 논두렁에 앉아서 북받쳐오르는 시정을 동요 《고향하늘》에 담았다.
푸른 산 저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그리운 하늘
언제나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저 산 넘어 하늘만 바라봅니다
처음에 그는 동요의 첫머리를 《푸른 산》으로 하지 않고 《백두산》으로 떼였다. 그때 두만강에 피눈물을 뿌리며 북간도로 떠나간 사람이나 관부련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간 사람이나 그 누구 할것없이 백두산을 바라보며 내 고향, 내 조국의 앞날을 그려보군 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검열때문에 《백두산》이라는 표현대신에 《푸른 산》이라고 쓸수 밖에 없었다.
빼앗긴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동요는 발표후 몇해가 지나 윤복진이 일본으로 가려고 도항증을 떼는데 애를 먹였다.
그가 대구경찰서를 찾아갔을 때 여우같이 생긴 고등계 주임놈은 차마 입에 담을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것이였다.
《우리는 대구소년회때부터 네놈을 주목해왔다. 어린 놈이 그때부터 배일사상이 강했다. 민요 〈우리의 마실〉을 비롯하여 우리를 반대하는 노래를 적지 않게 썼지. 그리고 두해전에는 고향을 노래하는척 하면서 조국을 노래했지. 〈푸른 산이란 무슨 산이야? 그것은 백두산을 두고 하는 말이지? 우리가 모를줄 아는가! 너 같은 놈은 공부를 하면 더 나빠질수 있다. 어디 한번 된매를 맞아보아야 정신이 들겠는가?》
윤복진은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참을수 없는 분한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으나 그 자리에서 당장 어찌할수 없었다.
그 이듬해 봄에야 그는 겨우 현해탄을 건너갈수 있었다.
윤복진은 도꾜에서 고학을 하면서 없는 시간을 짜내여 조선인류학생회가 운영하던 야학을 찾아다니며 우리 말과 글을 가르쳤다.
빈민굴로 소문난 후꾸가와 혼죠, 스미다가와 마라기와 기슭에 가면 재일동포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그들의 생활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
윤복진이 재일동포들과 그 자녀들에게 새로 나온 우리 나라 노래를 배워주고있는데 동요 《고향하늘》은 이미 그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고있었다.
서글픈 감정으로 노래를 지었건만 이국땅에서 조국과 고향이 그리워 부르는 동포들을 볼수록 나라를 빼앗은 일제놈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심이 더욱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1931년 봄, 도꾜에서 고학을 하며 창작활동을 벌리고있던 어느날 그는 조선에 갔다온 한 친구로부터 가슴뛰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인즉 백두산마루에 장군별이 높이 솟았는데 피끓는 조선의 젊은 용사들이 장군별두리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는것이였다.
그 친구는 두만강류역에 있는 친척집에 갔다가 들었다고 하면서 《백두산에 별이 솟네 장군별이 솟네》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윤복진은 이 소식을 혼자만 알고있을수 없어 몇몇 친구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들은 이미 알고있었다. 그들은 쉬쉬 하며 왜놈들의 귀에 들어가면 손에는 쇠고랑, 목에는 칼이 들어온다고 하면서도 신이 나서 수군거리는것이였다.
나래돋친 이 소식은 삽시에 도꾜와 요꼬하마 등 재일동포들이 살고있는 일본 각지로 날아갔다.
윤복진의 가슴은 환희와 격정으로 설레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백두산장군별과 그 용사들을 찬양하는 동요를 써야겠다는 욕망이 불같이 일어났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린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눈덮인 산발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백두산에는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을가. 빨찌산들은 눈속에서 나무잎을 덮고 자며 풀뿌리로 끼니를 에우겠지. 그러자니 고생인들 오죽하랴.)
동요에 그들의 생활을 담고싶은 심정은 절절하였지만 당시 일제가 우리 겨레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려고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까지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펴놓고 출판물에 대한 감시에 미쳐날뛰고있는 조건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놈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넘길수 있는 백두산에 대한 동요를 쓸수 있을가 하고 오래동안 궁리하였다.
왜놈들을 속여넘기려면 상징과 은유의 수법으로 써야 했다. 그러나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오래 신고하던 끝에 그는 백두산을 《흰눈 첩첩 저 산》으로 표현하고 우리 겨레가 애타게 갈망하는 희망의 날을 《꽃피는 새봄》으로 표현하기로 하였다. 잘만 쓰면 어린 독자들도 련상할수 있다는 신심이 생겼던것이다.
그렇다면 춥고추운 겨울에 누구보다도 꽃피는 새봄을 앞당겨오기 위하여 앞장서서 날고있는것이 무엇일가. 나비? 하지만 나비는 너무 연약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옳지. 산새, 산새이다. 산에 사는 산새는 작아도 얼마나 강한가. 사나운 눈보라가 기승을 부려도 봄맞이뜻을 굽히지 않고 앞서 날며 노래를 부른다. 그래, 산새를 그리자. 그러면 독자들은 그 산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것이다. 그 산새는 바로 백두산의 산새, 장군별님의 용사들이라는것을 알게 될것이다.
이렇게 되여 윤복진은 《산새는야 춥겠네》라는 제목을 달고 동요를 써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산새는야 춥겠네
정말 춥겠네
흰눈 첩첩 저 산에서
어떻게 사나
산에 사는 저 새는
불새인가봐
여기까지 쓰고나서 《불새》라는 표현을 두고 오래동안 생각해보았다. 굳센 의지의 상징인 불새란 말을 써서 검열관놈들이 또 트집을 걸수 있었던것이다.
하고싶은 말을 속시원히 하지 못하고 빙빙 에돌면서 쓰자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불새》라는 새의 이름을 놓고 거듭 생각해보던 그는 더 적중한 단어를 찾아낼수 없어 우리 나라 옛말에도 《불새》라는 말이 있으니 그대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산새는야 춥겠네
정말 춥겠네
꽃피는 새봄은
언제 오려나
기다리는 우리 봄아
어서 오려마
동요에서 《산새는야 춥겠네 정말 춥겠네》를 의도적으로 반복한것은 어린 독자들의 가슴속에 고생하는 산새의 표상을 강하게 새겨주자는데도 있었지만 놈들의 출판검열을 무사히 넘기자는데도 목적이 있었다.
동요가 신문지상에 발표되자 윤복진의 기쁨은 말할수 없이 컸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쓰고싶던 백두산에 대한 동요를 은유적인 방법으로 밖에 쓰지 못한것이 한스러웠다.
장군별님의 용사들을 뻐젓이 자랑스럽게 표현하지 못한 그는 망국노의 설음을 다시한번 통감하게 되였다.
그후에도 윤복진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지펴올리신 보천보의 불길이 온 삼천리강토를 붉게 물들였을 때 환희와 감격에 넘쳐 쓴 동요 《빛나는 사이다공패》(1937년)에서 항일유격대의 빛나는 위훈을 상징적인 사이다공패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여 쓴 또 어떤 동요에서는 왜놈병정을 《누렁병정》으로 에둘러 표현하여 발표하였다.
윤복진이 눈물의 나라에서 눈물의 동요밖에 쓸수 없었던 그 시기 강도 일제는 조선민족의 넋이 깃들어있는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일체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까지 제놈들의것으로 고칠것을 강박하였다.
윤복진은 1940년대에 들어와 유희동요 《솔잎침》을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설음속에 쓰던 붓대마저 꺾지 않으면 안되였다.
작가로서 붓을 꺾는다는것은 참으로 가슴아프고 괴로운 일이였으나 일본말과 일본글로 쓸바에는 차라리 자기 손으로 붓을 꺾는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것이다.
창작에서 물러난 그는 1943년 가을부터 강원도 화천군의 유령광산에서 일을 하며 어두운 귀틀집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사랑하는 부모처자가 있는 고향을 멀리 떠나 홀로 살아야 했던 그 나날은 윤복진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저녁이면 가물거리는 광솔불을 바라보며 (새봄아, 새봄아, 어서 오려마.)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군 하였다.
드디여 고대하던 해방의 날은 왔다.
서울에서 8. 15해방을 맞이한 윤복진은 다시 붓을 들고 창작의 길에 나섰다. 하지만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가 일제시기와 다름없이 진보적문학창작을 광란적으로 탄압해나서자 정의의 피가 끓던 그는 미제와 리승만역도를 반대하는 진보적인 문화인대렬에서 인민들이 지향하고 요구하는 문학창작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였다.
그러나 미군정하의 남조선에서는 지난날과 같은 눈물의 동요밖에 창작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은 그는 새 생활이 꽃펴나는 공화국북반부를 찾아 떠나간 박세영을 비롯한 문학예술인들이 부러웠다. 자기는 왜 그들과 함께 떠나지 못했는가 하는것이 생각할수록 안타까웠다.
(언제면 나도 공화국북반부로 갈수 있을가?)
1950년 가을, 그는 드디여 전쟁의 불구름을 헤치고 자나깨나 마음속에 그리던 공화국북반부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디게 되였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윤복진이 우유부단했던 자신을 박차고 스스로 선택한 운명의 길은 그에게 어떤 미래를 약속하여주었던가.
한생을 꽃봉오리로 살고싶어
공화국의 품에 안긴 윤복진의 가슴은 한없는 감격과 흥분으로 끝없이 설레였다.
보고 듣는 모든것이 그대로 시였다.
그러나 막상 붓을 잡으면 웬 일인지 작품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였을가?
어두운 눈물의 나라에서 헤매다가 갑자기 눈부신 웃음의 나라로 들어섰기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윤복진은 그때의 자기 심정을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어둠속에서 헤매던 소경이 눈을 뜬것과 같이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자기를 문학신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좋기만 하였다.》
이 시기부터 윤복진은 참된 삶과 진정한 문학창작의 길을 걷게 되였으며 인민들과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는 개성이 뚜렷한 아동문학작가로 성장하게 되였다.
전화의 나날 윤복진은 군복을 입고 조선인민군의 어느 한 부문에서 사업하면서도 동요창작과 문학공부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책을 읽다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린이들은 미래의 주인공이며 혁명선렬들의 뜻을 이어나갈 꽃봉오리들이라고 하신 내용의 교시를 접하게 되였다.
혁명의 꽃봉오리! 이 얼마나 뜻깊은 말씀인가!
세상에는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혁명가와 정치인, 유명한 문호들이 남긴 말이 적지 않지만 이런 명언은 찾아볼수 없다.
그때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꽃봉오리》라는 표현이 깊이깊이 아로새겨졌다. 외워보면 그 뜻이 그대로 시로 안겨왔다. 이 표현을 잘 쓰면 좋은 동요가 될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무렵(1952년) 우리 나라에서는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있었지만 승리할 조국의 미래를 확신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따라 후대교육을 위한 새 교과서편찬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으로 윤복진은 교과서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선발되였다.
그는 소학교 1학년용 음악교재의 첫머리에 넣을 동요를 창작하라는 영예로운 과업을 받게 되였다.
어떤 동요를 쓸것인가. 그는 늘 가슴속에 품고있던 꽃봉오리에 대한 노래를 쓰기로 하였다.
김일성원수님
넓으신 품안에
자라나는 우리들은
새 조선의 꽃봉오리
우리모두 그 품안에
씩씩하게 자라지요
김일성원수님
따사론 품안에
방실 웃는 우리들은
새 조선의 꽃봉오리
우리모두 그 품안에
즐거웁게 배우지요
윤복진은 이렇게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끝없는 행복과 높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동요 《우리들은 꽃봉오리》에 담았다.
후날 윤복진은 지금 와서 이 동요를 보면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동심세계를 좀더 아름답게 노래했더라면 좋았을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군 하지만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서 어린이들의 행복한 생활을 노래한 작품으로서 처음으로 쓴 동요이기때문에 각별히 사랑한다고, 두번째 처녀작이라고 은근히 자랑하군 하였다.
그후 30여년이 지난 1985년에 그는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창건 40돐을 맞으며 이 작품의 자매편으로 볼수 있는 동요 《우리들은 당의 품에 피는 꽃송이》를 창작발표하였다.
동요에서는 새 세대 어린이들이 눈바람 사납게 휘몰아쳐도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세상에 부럼없이 혁명의 꽃송이로 붉게붉게 피여나는데 대하여 격동적으로 노래하고있다.
윤복진은 준엄한 전쟁시기에도 승리의 신심에 넘쳐 밝고 명랑하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노래한 동요 《이 동네는 영웅동네》, 《학교길》, 《기차놀이》(1952년)를 비롯하여 우리 인민군대의 영웅성과 미제침략자들의 추악성을 그린 《미국놈병정 겁쟁이병정》, 《총알형제》(1951년), 《고추먹고 맴맴》(1952년) 등을 창작하였다.
풍자동요 《미국놈병정 겁쟁이병정》은 윤복진의 조국해방전쟁주제 작품창작에서 주목을 끄는 작품이다. 동요에서는 바스락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머리가 쭈빗, 다람쥐 보고도 가을바람소리 듣고도 놀라 헛총질하는 겁쟁이병정, 미국놈보초를 신랄히 풍자조소하면서 우리 인민군정찰병의 슬기롭고 용감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그의 창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은 동요 《아름다운 우리 나라》이다. 이 동요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동요는 윤복진이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 후퇴시기 남조선에서 인민군대를 따라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오는 과정에 자신이 직접 체험한것을 기초로 하여 창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윤복진은 자기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은혜로운 삶의 품인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오는 길은 미제에 대한 끝없는 증오심을 불태우는 길이였고 우리 조국의 아름다움을 가슴속에 새기며 익히는 길이였다.
비록 조국산천은 전쟁의 불길속에 휩싸여있긴 했지만 넓고넓은 들에는 오곡이 물결치고 높고낮은 산에는 푸른 숲이 설레이고있었다. 나는 해방후 불과 몇해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도 몰라보게 달라진 마을과 도시를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천리,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끝나자 림진강하류에 있는 고랑도까지 걸어갔다. 그곳에서 다시 평양까지 걸었으니 내가 걸은 그 길은 2천리도 훨씬 넘는 머나먼 길이였다.
나는 멀고 험한 길을 걸으면서 오각별 빛나는 조국을 더 잘 알게 되였고 더욱 사랑하게 되였던것이다. 이 과정에 나의 가슴속에는 조국찬가를 쓸수 있는 씨앗이 뿌리내렸다.》
동요 《아름다운 우리 나라》는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아름다운 우리 나라
참 좋은 나라
산에는 금은보화
바다엔 고기
넓고 푸른 들에는
오곡이 물결치는
원수님 세워주신
참 좋은 나라
아름다운 우리 나라
참 좋은 나라
누구나 다 일하고
글 잘 배우고
오각별 공화국기
푸른 하늘 높이 나는
원수님 이끄시는
참 좋은 나라
이렇듯 동요는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날로 륭성번영하는 아름다운 내 나라, 내 조국에 대한 다함없는 례찬의 감정으로 되여있다.
동요에서는 오곡백과 무르익는 어머니조국의 아름다움을 시적화폭으로 펼쳐보이면서 그속에서 혁명의 후비대로 억세게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의 한없는 긍지와 자부심, 자랑을 노래하였다.
그리하여 동요에는 누구나 다 일하고 배우며 오각별 공화국기 푸른 하늘 높이 휘날리는 고마운 어머니조국을 위하여 몸바쳐 싸울 우리 시대 어린이들의 굳은 결의가 흘러넘치고있다.
동요는 그 시기뿐아니라 오늘도 누구나 다 좋아하는 가요로 전해지고있다.
전쟁의 포화가 멎은 후 윤복진은 왕성한 창작적열정을 가지고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동요들인 《시내물》, 《학습을 다하고서》(1954년)를 비롯하여 《내가 심은 복숭아》(1955년), 《검둥아 멍멍》(1956년), 《자랑찬 우리 평양》, 《꽃가마 들어온다》(1957년), 《림진강기슭에서》(1958년) 등에서는 미제를 물리치고 승리한 그 기세로 전후복구건설에 떨쳐나선 우리 인민들의 벅찬 생활을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다양한 생활과 결부시켜 생동하게 노래하고있다.
이 시기 창작된 동요 《시내물》은 작가의 창작적재능을 보여주는 특색있는 작품중의 하나이다.
동요에서는 시내물이 졸졸 노래하며 흘러간다는 서정적정황을 펼치면서 한굽이를 돌아드니 불탄 산에 새봄 왔다고, 또 한굽이 돌면 새 목장이 생겨나고 물방아 돌던 곳에 전기방아 새로 돌고 또 한굽이 돌면 새 학교가 우뚝 서고 또 한굽이 돌면 봄밭갈이 한창인데 우르릉 뜨락또르 넓은 들을 갈아엎고 또 한굽이 돌고돌면 우뚝우뚝 영웅도시 평양이 일떠선다고 하면서 페허속에서 새 생활을 일떠세우는 전후복구건설의 영웅적현실을 생동한 시적화폭을 통하여 감동적으로 노래하고있다.
동요 《학습을 다하고서》는 작가가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겨 받은 강한 창작적충동에 의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남반부에서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보니 전쟁이 한창인데도 어버이수령님의 따사로운 사랑속에서 어린이들은 하루도 중단하지 않고 학교에 다니고있었다. 어디 가나 학교가 있었고 아이들의 랑랑한 글소리, 노래소리가 그칠줄 모르고 들려왔다. 책보를 메고 학교길을 오고가는 학생들보고 너희들의 첫째가는 임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조국을 위하여 공부를 잘하는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던 1952년 어느날이였다. 그는 평양교외에 있는 친구네 집으로 가게 되였다.
그 집에는 딸형제가 있었는데 맏딸은 소학교 1학년생이고 둘째딸은 유치원생이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와 마주앉아 회포를 나누는데 들창밖에서 이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언니야, 나하구 놀자.》
《안돼. 숙제를 아직 못다했어. 너 혼자 놀려무나.》
창밖을 내다보니 언니는 웃방에서 공부를 하고 동생은 혼자서 소꿉놀이를 하고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머리속에는 학습주제의 동요세계가 떠올랐다.
그날에 받은 충동으로 윤복진은 정전직후인 1954년에 《학습을 다하고서》를 창작하였다.
동요의 서정적주인공은 기껏해야 소학교 1학년생이다.
사실 꽃이 피고 새가 우짖는 봄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것없이 마음을 들뜨게 하는 계절이다.
작가는 아이들의 마음에, 아이들의 생활에 먼저 찾아오는 이 아름다운 계절, 봄바람 솔솔 불어오는 날을 시적계기로 잡았다.
작품에서 보는바와 같이 동생은 천진하게도 봄놀이에 취해서 자꾸만 같이 놀자고 언니에게 졸라대지만 언니는 숙제공부 먼저 하고 놀아야 한다고 타이른다. 동요는 서정적주인공의 호소를 통하여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있다. 작품의 이 사상은 마지막련에서 잘 결속되고있다.
울긋불긋 꽃동산
꾸며놓고서
혼자서는 심심하여
언니보고 조르지요
정말정말 그만큼 공부하고
나구 둘이 꽃놀이 놀자요
오냐 그래 놀자꾸나
이젠 그래 놀자꾸나
학습을 다하고서
너구 나구 꽃놀이 놀자꾸나
이처럼 동요는 앞날의 훌륭한 일군이 되기 위하여서는 꾸준히 학습하고 배워야 한다는것을 힘있게 확인함으로써 어린이들이 학습의욕과 학습에 대한 옳바른 태도를 가지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뿐아니라 작품은 동요문학의 새 양상을 개척하는데 기여한 특색있는 성과작의 하나로 되였다.
윤복진의 동요창작에서 전성기로 되는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이다.
이 시기 윤복진은 참된 삶의 길로 이끌어주신 어버이수령님과 영광스러운 당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슴 불태우면서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윤복진의 창작생활에서 유서깊은 만경대에서 진행한 현지생활은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그것은 만경대에 깃들어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어린시절이야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혁명사적내용들을 누구보다 먼저 들을수 있게 된 행운이였다.
윤복진은 위대한 수령님의 삼촌어머님과 한집안식구처럼 가까이 지내면서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야 할 만경대의 혁명사적들을 수집정리하고 고증하는 일에 달라붙었다.
그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였다. 그가 이 성스러운 사업을 스스로 맡아서 진행할수 있은것은 그만큼 자기를 품에 안아 키워준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보답의 일념을 안고 노력하여왔기때문이였다. 하기에 그는 만경대현지체험작가로 있은 8년간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를 가슴깊이 새기고 어버이수령님의 어린시절을 노래한 동요동시집을 묶어내기 위한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여 《만경대는 우리 고향》, 《무지개》, 《군함바위》, 《하얀 물동이》, 《만경대의 등잔불》을 비롯한 총 18편의 동요동시들을 수록한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만경대》를 세상에 내놓았다.
동요동시집은 어린 독자들의 열렬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원수님 자라나신
아름다운 만경대
만경대는 내 고향
자랑많은 우리 고향
흘러가는 대동강
푸른 물도 노래해요
만경봉을 얼싸안고
춤을 추며 노래해요
원수님 자라나신
아름다운 만경대
만경대는 내 고향
자랑많은 우리 고향
푸른 하늘 종달새도
해만 뜨면 노래해요
만경봉을 날아돌며
하늘높이 노래해요
동요 《만경대는 우리 고향》은 보는바와 같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탄생하시여 어린시절을 보내신 만경대는 혁명의 성지로서 우리 인민모두의 고향이라는것을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 노래하고있다.
만경대현지체험작가의 큰 행운을 지닌 윤복진만이 만경대를 노래한 동요를 내놓을수 있었다.
혁명의 성지에 내세워준 어버이수령님과 당의 신임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런 큰 행운, 만경대동요의 첫 시인으로서의 영예를 생각지도 못하였을것이다.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만경대》의 발표로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는 뜻밖에도 바다건너에 있는 일본땅에서 한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나에게 온 편지가 옳긴 옳은가?)
그는 겉봉을 다시 살펴보았다.
자기에게 온 편지가 분명하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을 들여다보며 그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누굴가?)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편지를 읽고난 그는 깜짝 놀랐다.
총련의 한덕수의장이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만경대》에 씌여있는 작가이름을 보고 대구에서 살던 옛동무 윤복진이 아닌가 해서 펜을 들었는데 맞으면 인차 회답을 보내달라는 사연이 씌여져있었다.
(아니, 그럼 중학시절에 나와 한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던 그 옛동무가 한덕수의장이란 말인가!)
윤복진은 그날 밤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만경대》를 품에 꼭 껴안고 오래동안 잠들지 못하고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나의 기쁨, 나의 자랑인 아름다운 만경대의 노래야! 너는 나의 학창시절 옛동무를 만나볼수 있는 꽃다리까지 놓아주는구나. 고맙다!)
그가 쓴 회답편지는 인차 한덕수의장앞으로 날아갔다. 그후 그는 조국을 방문한 한덕수의장과 뜻깊은 상봉을 하게 되였다.
그들은 얼싸안고 감개무량하여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윽고 머리를 맞대고 앉아 축배잔을 나누며 아득히 흘러가버린 어린시절을 감회깊이 돌이켜보았다.
행복한 시간은 빨리도 흘러 어느덧 헤여질 때가 되였다.
다시한번 얼싸안고나서 윤복진이 그 자리를 떠나 퍼그나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급히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진아, 복진이! 이리 오라구.》
돌아보니 한덕수의장이 뒤따라오며 오라고 손짓을 하고있었다. 웬 일인가 해서 다시 들어가니 한덕수의장이 깜빡 잊을번 하였다고 하면서 어렸을 때처럼 서로 키 대보기를 하자고 하는것이였다.
그들은 돌아서서 등을 맞대고 키 대보기를 하였다. 그들의 입에서는 약속이나 한듯이 어린시절에 부르던 동요가 흘러나왔다.
누가 키가 더 큰가
어디 한번 대보자
올라서면 안된다
발을 들면 안된다
똑같구나 똑같애
래일 다시 대보자
한덕수의장은 키 대보기를 하고나서 아무래도 자기가 좀더 크다고 하면서 어렸을 때처럼 두어깨를 으쓱거렸다. 윤복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사이에는 자주 편지가 오고갔다. 윤복진은 새로 출판한 자기의 동요동시집 《시내물》을 보내고 한덕수의장은 자기가 쓴 가사와 시들을 보내며 의견을 달라고 하였다.
총련에도 유명한 작가들이 있는데 한덕수의장이 왜서 윤복진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였는가.
한덕수의장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 자네야말로 고지식한 인간이여서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고 사실그대로 말해줄 사람이기때문일세.》
이것은 윤복진의 인간됨을 말해주는 하나의 이야기인것이다.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만경대》를 발표한 후 윤복진의 생각은 깊어졌다.
어떻게 하면 유서깊은 만경대의 이야기를 어린 독자들이 더 잘 알게 할수 있을가. 동요동시만으로서는 만경대에 깃든 이야기를 깊이있게 쓸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산문으로 쓰기로 하였다.
그는 한줄두줄 심혈을 기울여 장편실화문학 《김일성원수님 어린시절이야기》(1962년)를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장편실화문학 《김일성원수님 어린시절이야기》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만경대에서 탄생하시여 어린시절을 보내시며 민족의 태양으로 자라나신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면서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왜놈들과 싸우시던 아버님 김형직선생님께서 놈들에게 체포되시였다는 가슴아픈 소식을 받으시고 조선이 독립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은 맹세 다지시며 사랑하는 고향 만경대를 떠나신 이야기, 아버님께서 다하시지 못한 조선독립의 큰뜻을 자신께서 기어이 이어나가실 결심을 다지시는 이야기를 력사적사실자료에 기초하여 생동하게 서술하고있다.
장편실화문학은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고매한 풍모를 통하여 학생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만경대현지체험을 마친 윤복진은 1964년부터 1979년까지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현역작가로 있으면서 창작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리였다. 이 기간은 우리 아동문학이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주체문학예술의 대화원속에서 전면적으로 개화발전된 뜻깊은 나날이였다.
윤복진은 불타는 열정을 안고 만경대현지체험기간에 가슴에 새긴 위대한 수령님의 어린시절을 노래한 동요 《만경봉에서》(1967년), 《학습터에서》, 《해도 해도 뜨기 전에》(1978년)와 《봉화리의 배나무》, 《아름다운 삼지연》, 《사랑의 보금자리》를 비롯한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혁명일가분들의 고매한 풍모를 그린 작품들을 계속 창작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동요 《소년단림 고운 새》(1968년), 《꽃침대》, 《꽃피는 산골마을》(1975년) 등 학생소년들의 학습과 조직생활,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과 조국통일주제 등 다양한 내용의 동요들을 창작발표하였다.
특히 위대한 장군님께 드리는 송가창작에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였다. 그는 장군님의 위대성과 고매한 덕성을 노래한 수십여편의 동요동시들을 창작하여 우리 아동시인들이 해마다 묶어온 동요동시집 《온 나라 꽃봉오리 영광드려요》(1-10)에 꼭꼭 넣군 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동요 《우리들은 당의 품에 피는 꽃송이》, 《백두산고향집》, 《은방울꽃》, 《맑은 하늘》 등을 들수 있다.
윤복진은 년로한 몸에 건강이 좋지 못하여 1980년부터 자택에서 창작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가 집에 들어가서도 쉬지 않고 언제나 책상앞에 마주앉아 책을 읽거나 동요창작에 열중하는것을 보고 젊은 시인들이 윤복진에게 년로한 몸에 건강치도 못한데 어떻게 왕성하게 글을 쓰는가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헤아릴수 없이 은정깊고 뜨거운 사랑은 영원한 청춘과 창조의 생명력을 주는 장생불로약입니다. 이 불로약을 받아안은 사람은 결코 로쇠하는 법이 없습니다. 나는 일흔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은 청춘입니다. 청춘이란 말은 결코 젊은 나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밝혀주시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주체문학의 큰길을 힘차게 걸으며 우리 시대 꽃봉오리들의 행복넘치는 노래를 쓰고 또 쓰렵니다.》
그는 이런 열정을 안고 어느 하루도 붓을 놓지 않았다.
동요 《백두산》(1983년)은 이 나날에 쓴 우수한 작품중의 하나이다.
산 산 백두산
구름우에 솟은 산
지도자선생님
탄생하신 백두산
…
산 산 백두산
하늘끝에 솟은 산
지도자선생님
자라나신 백두산
…
동요는 생략과 함축의 수법을 재치있게 활용하면서 백두산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탄생하신 자랑높은 산이라는 작품의 심오한 사상을 밝히고있다.
윤복진은 이외에도 동요 《착하신 마음》을 비롯하여 어린시절 위대한 장군님의 고매한 풍모를 노래한 아동시가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하였다.
윤복진은 1980년대 후반기 병석에 누워서도 아동문학작가의 사명감을 잊지 않고 창작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동요 《저 하늘이 멀고멀어도》(1986년)는 작가가 병환속에서 창작한 성과작이다.
동요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과 아동들의 생활을 동심적으로 펼쳐보이면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회주의제도를 마련해주시는 절세위인들의 한없는 사랑을 감명깊게 노래하고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의 동심을 생동하게 노래한 동요는 높은 사상예술성으로 하여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여 출판되였다.
참으로 윤복진은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은혜로운 사랑의 품속에서 자기의 창작적재능을 마음껏 꽃피우고 삶을 빛내인 아동문학작가로서 오랜 창작생활기간 2 000여편의 우수한 동요, 동시들을 창작하여 어린이들의 사상교양과 우리 나라 현대동요문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동요할아버지》였다.
그의 삶은 영원하다
아무리 《작고도 큰 문학》이라고 하여도 동요는 역시 모래알과 같다. 어떻게 두터운 장중편소설이나 서사시와 비길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일부 사람들과 성인작가들속에서는 은근히 동요문학을 차요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 영향을 받아 몇몇 젊은 아동시인들은 한평생 동요나 써서는 크게 성공할수 없다고 생각하며 긍지감을 가지지 못하고 성인시문학을 넘보거나 지어는 방향전환까지 하였다.
그때마다 윤복진은 《요란한 명성을 꿈꾸는 아동시인은 좋은 동요를 쓸수 없습니다. 자기를 소학교, 중학교 교원이라고 생각하고 동요를 써야 합니다.》라고 말하군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에는 동요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있긴 하였지만 동요문학에 대한 그릇된 경향을 론박하는 주장이 강하게 울려나오지 못했기때문에 젊은 작가들의 심장을 크게 공감시키지 못했다.
그러했던 그가 어떻게 되여 문학의 높은 단상에 자기의 동요를 안고 당당히 오를수 있었던가. 누가 그의 창작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세상만복을 다 안겨주었으며 누가 그를 영생의 언덕에 높이 내세워 영원한 삶을 누릴수 있게 하여주었던가.
그이는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와 보살피심이 있었기에 그는 나이가 들어도 늙음을 모르고 아이들의 사랑을 받을수 있는 좋은 동요들을 련이어 창작할수 있었다.
그런데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와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한 높은 국가수훈을 수여하도록 하여주시였다.
어느덧 그의 나이가 일흔고개에 들어서게 되자 가정에서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가 모여앉아 70돐생일상을 차릴 의논을 하고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윤복진은 공연한 걱정들을 한다고 하면서 식구들에게 70돐생일에 대한 말을 밖에 나가서는 일체 하지 말도록 하며 집안식구끼리 조용히 쇠는것으로 토의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70돐생일상을 보내주시고 그의 가슴에 또다시 국기훈장 제1급과 사랑어린 보청기까지 안겨주실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그의 집에서는 큰 경사가 났다. 아래웃방이 축하하러 온 손님들로 붐비였다.
로작가들은 어서 새옷을 입고 사랑의 생일상이 차려져있는 아래방으로 내려가자고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윤복진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님, 이 몸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듯 분에 넘치는 크나큰 사랑을 안겨주십니까. 정말 꿈만 같습니다. 제가 만일 저 남녘땅에 있었다면 이미 무주고혼이 되였을것입니다.
… 이 사랑을 언제나 가슴깊이 새기고 동요창작의 붓을 더 힘껏 틀어쥐겠습니다.》
이어 며느리가 술을 붓고 아들이 그 잔을 아버지에게 드리였다.
이제는 다 자라서 어엿한 일군이 된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다가 윤복진은 《오냐, 고맙다. …》 하며 다시 눈굽을 적시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 순간 그는 남녘땅에 두고 온 안해 로연양과 두 딸자식을 생각하였던것이다.
어떻게 잊을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도 한생을 동요창작에 바쳐 위대한 장군님께서 아시고 온 나라 어린이들이 다 아는 그가 민족분렬의 력사와 함께 그처럼 크나큰 불행을 안고 가슴의 한쪽구석이 그늘져있는줄을 아는 사람들은 아마 많지 못할것이다.
며칠후 그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보청기를 끼고 창작실로 나갔다.
책상앞에만 앉아있을수 없어 그는 대동강가로 나갔다. 련광정을 안고 도는 유보도를 거니는 그의 귀에는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의 잔물결소리도, 꽃잎사이로 날아도는 꿀벌들의 나지막한 붕붕소리도 크게 들렸다.
한편 그 시각에 창작실에서는 한 녀류아동시인이 책상에 마주앉아 동시 《사랑의 보청기》를 쓰고있었다.
《쉬쉬, 이젠 이젠 우리 할아버지 들으신다》라는 인상적인 구절로 엮어진 동시에서는 사랑의 보청기를 보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은정이 동심적으로 재미있게 노래되여있었다.
녀류아동시인은 《동요할아버지》가 들어오자 자기의 동시를 소리높이 읊었다.
그러자 윤복진은 《아이구, 귀청이 떨어지겠다. 왜 그렇게 큰소리로 읊노.》 하고 웃으면서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담은 좋은 동시를 써주어 고맙다고 하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윤복진에게 돌려주신 사랑과 은정은 끝이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생일 80돐을 계기로 조선아동문학발전에 많은 공로를 세운 작가라는 높은 평가를 주시면서 공화국의 최고영예상인 김일성상을 수여하도록 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러시고 건강이 좋지 못한 그가 즉시 치료를 받을수 있는 대책까지 다 세워주시였다.
그날 밤 윤복진의 집 창가에서는 밤새도록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윤복진은 원고지를 정히 펴놓고 한자두자 정성을 담아 수기 《어버이수령님과 당에 큰절을 드리며》를 썼다.
그가 쓴 수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의 참된 삶의 첫걸음은 어버이수령님과 당의 한없이 자애로운 사랑의 품에 안겨 비로소 시작되였다.
…
일제식민지학정에서 피멍이 들고 남반부에서 미제의 악독한 구두발에 응혈졌던 나의 가슴에 흘러든 사랑의 해빛, 그것은 진정한 재생의 봄빛이였다. …》
그 이튿날 이른아침에 윤복진은 꽃다발을 안고 가족들과 함께 만수대언덕에 올라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우러러 감사의 큰절을 드리였다.
그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배려에 천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다시 젊어진 심장과 밝아진 귀로 동요창작에 자기의 여생을 고스란히 바쳤다.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로부터 창작의 걸음을 내디딘 후 우리 나라 동요문학창작의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성장한 《동요할아버지》 윤복진은 1990년대초에 들어서면서 자주 병석에 누워 운신하기 어려워하였다. 80고령에 이르자 로환이 그의 정신적인 지향을 무시로 방해하여나섰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마음껏 자라는 어린이들의 밝고 아름다운 마음을 동요에 담아 끝없이 노래하고싶었으나 로쇠한 육체가 자꾸만 그 간절한 마음을 막군 하여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운명의 마지막시각을 보내고있음을 깨달은 그는 있는 기력을 다 모아 펜을 가누어쥐고 또박또박 한생의 마지막글자들을 쪼아박아나갔다.
《수령님! 고맙습니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 통일되면 고향에도 가보고 장군님께 올릴 통일동요를 짓고싶었는데 못 드리고 갑니다.》
이렇게 쓰고 마지막점까지 찍고난 그는 펜을 떨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생을 동요의 세계에서 산 윤복진은 80고령 생애의 마지막시각에도 동요창작의 소원을 절세의 위인들앞에 아뢰며 숨을 거두었다.
그는 한생의 마감도 통일동요창작의 지향속에서 마치였던것이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윤복진이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아동문학계의 사랑하는 재사를 잃은것을 못내 애석해하시면서 그의 장례를 잘하도록 하여주시였다.
그와 영결하러 찾아온 조객들은 눈처럼 하얀 화환들속에 웃으며 누워있는듯 한 《동요할아버지》를 눈물속에 바라보며 태양의 품에 맡겨진 그의 삶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뜨거워짐을 금치 못하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 덕분에 윤선생은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나라 《동요할아버지》로 불리우며 꽃봉오리들과 함께 살게 될겁니다.)
이것이 조객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