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김 수 조(연출가)
• 1931년 10월 2일 서울시 종로구에서 출생.
• 1950년 7월 남조선문학예술총동맹 무용가동맹 선전부장.
• 1950년 11월 10일부터 국립예술극장 무용단 단원, 단장.
• 1995년부터 피바다가극단 총장.
• 2010년 11월 30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공화국영웅, 인민예술가.
우리 인민이 자랑하는 예술가들중에는 피바다가극단 총장이였던 김수조도 있다. 그의 이름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들인 《백전백승 조선로동당》, 《아리랑》 등 세계를 경탄시킨 기념비적걸작들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있다.
그는 공화국공민으로서 받을수 있는 명예를 다 받은 복된 인간이였다. 김일성상계관인이고 인민예술가이며 문예인들중에는 흔치 않은 공화국영웅이다.
과연 그는 어떤 행운을 타고났기에 만사람이 부러워하는 영광의 절정에 올라설수 있었던가.
항쟁의 거리에서
그는 가난과 고생을 숙명으로 걸머지고 태여난 불우한 소년이였다.
김수조의 고향은 서울 종로구이다. 그가 태여날 때 아버지는 품팔이군이였고 어머니는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고있었다.
그가 8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할 무거운 짐이 어머니의 여린 어깨우에 들씌워졌다.
어머니에게는 올망졸망한 다섯 아들이 매달려있었는데 제일 큰아들이라야 그때 겨우 12살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혼자 힘으로 그 자식들을 먹여살리느라 죽을 고생을 다했다. 어찌나 고생했던지 목이 너무 가늘어져서 제대로 돌리지조차 못했다고 한다.
풋절이가 돋아날 때면 어머니는 광나루를 건너가 남의 집 남새밭에서 풋절이를 솎아주고는 품삯으로 솎아낸 풋절이를 한짐 이고 오군 하였다. 고추철이면 남의 집 고추를 따주고 나머지를 훑어오군 하였고 김장철이면 남의 집 김장을 해주고 대신 버린 배추잎들을 거두어와서 김장을 담그군 하였다.
다섯 아들중에 셋째인 김수조가 어머니일을 많이 거들어주었다. 어머니가 광나루를 건너갔다 올무렵이면 어린 수조는 어머니를 마중가서 이고 오는 짐을 넘겨받아 집까지 메오군 하였다.
겨울에는 흔히 큰 뚝배기 하나에 시래기를 넣고 끓인 된장지지개가 반찬으로 올랐다. 그러면 다섯 자식이 저마끔 덤벼들었는데 지지개우에 서로마다 경계선을 긋고 옆에서 침범할가봐 숟가락으로 방어하면서 순간에 요정내군 하였다. 어머니가 밥을 퍼가지고 들어설 때는 이미 뚝배기가 텅 비고난 뒤였다.
어렸을 때 김수조는 옹근연필을 한번도 써보지 못했다. 늘쌍 남들이 쓰다 버린 꽁다리연필을 똘똘 만 종이에 끼우고 공부하였다. 옷도 새옷을 사입는다는건 엄두도 내지 못했고 항상 형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군 하였다.
학교에 싸가는 밥곽에는 1년내내 간장에 담그었던 고추잎이 밥 한구석에 놓여있었다. 중학입학시험을 치르는 날 부자집 애들은 부모들과 함께 승용차까지 타고 와서 점심시간에 명절처럼 한상 차려놓고 먹는데 김수조는 자기의 초라한 밥곽을 남들이 볼가봐 산에 올라가 혼자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도 시험에서 합격되여 그가 경복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였을 때 어머니는 기뻐할 대신 학비를 댈 일이 아름차서 한숨만 쉬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가난속에서 자랐다. 후날 김수조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그리도 고생해오신 어머니를 하루라도 편히 모셔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외우군 하였다고 한다.
그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에 조국이 해방되였다. 해방을 맞이한 김수조의 가슴은 앞날에 대한 꿈과 랑만으로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해방의 환희는 분노로 변해버리고말았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상륙한 첫날부터 미군은 조선인민에게 불행만을 강요하였다.
미군정은 우리 민족의 리익에는 아랑곳없이 철두철미 자국의 리익만을 추구하였다. 왜정때와 다름없는 식민지통치가 실시되고 겨레를 참담한 수난속에 몰아넣은 민족분렬정책이 강행되였다.
미국이 두동강낸것은 단순히 삼천리강토만이 아니였다. 반만년세월 혈연을 맺고 살아온 겨레의 마음마저 두동강내버렸다. 어제날까지 한형제로 지내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반미냐, 친미냐를 따지게 되였고 좌와 우로, 애국과 매국으로 갈라서게 되였다.
준엄한 선택의 시대였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정해야만 했다. 김수조도 마찬가지였다.
상급생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소조에 들어간 그는 거기서 착취사회의 부패상에 대하여,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의 항일무장투쟁과 새 조국건설로선에 대하여 많은것을 깨닫게 되였다.
태여나서부터 착취사회가 들씌운 빈궁과 천대를 진저리나게 겪어온 그에게 있어서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장군님께서 세우시는 인민의 나라는 희망의 등대가 아닐수 없었다. 피눈물겨운 지난날의 생활체험이, 정의에 끓고 리상에 불타는 열혈의 심장이 그에게 주저없이 김일성장군님을 따라야 한다고 뜨겁게 웨치고있었다.
김수조는 투쟁의 대오에 들어섰다.
그는 반미투쟁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미제가 식민지노예교육을 강요하기 위해 《국대안》이라는것을 조작했을 때에는 그것을 반대하여 경복중학교내의 학생조직을 책임지고 근 1개월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반동적인 학교당국은 그를 비롯한 진보적학생들을 강제로 출학시켰다. 출학후 김수조는 조직의 지시에 따라 경복중학교와 배화녀고 등 여러 학교들을 맡아 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투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졌다. 미제와 매국역적들의 망국적인 《5. 10단선》을 반대하는 거족적항쟁의 불길이 타오르자 그는 격노한 군중과 함께 매국노들의 선거사무실을 습격하는 등 과감한 투쟁에 서슴없이 뛰여들었다.
그 나날에 김수조는 여러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경찰에 체포된것은 1948년 6월경이였다.
원래 경복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경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수시로 거처지를 옮겨다니던 김수조는 그날 어느 정도 경계가 해이된줄 알고 잠시 집에 들렸다가 그렇게 되였던것이다. 경찰에 붙잡혀간 그는 경복중학교에서 있은 《국대안》반대 동맹휴학의 주모자로 치안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방생활을 하다가 40일만에 석방되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또다시 항쟁의 거리로 달려나갔다. 그 시기 남조선전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와 관련하여 인민의 대표들을 선출하기 위한 서명투표가 거세차게 벌어지고있었다.
마침내 자기의 운명과 미래를 맡길수 있는 참다운 조국, 인민의 새 나라가 세워진다는 소식은 김수조의 젊은 심장을 격정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그는 폭압의 광풍이 기승을 부리는 속에서도 학생들속에 들어가 새 생활이 창조되고있는 북녘의 현실을 널리 소개선전하였고 그들을 인민대표선거를 위한 서명투표운동에 힘차게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그는 아지트가 발각되는 바람에 다시금 경찰에 체포되였다. 출옥후 두달 남짓해서 당하는 두번째 체포였다. 전과 다름없는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지만 김수조는 끝까지 조직의 비밀을 지켜냈다. 결국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치안재판에 회부된 그는 40여일간의 옥고를 겪은 끝에 풀려나왔다.
몇달동안에 두번씩이나 체포되여 옥살이를 하다나니 그의 몸상태는 말이 아니였다. 출옥하여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도수장에 가서 사온 돼지꼬랭이로 탕국을 푹 끓여주었는데 어찌나 입에 맞았던지 김수조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그릇을 비워버렸다고 한다.
한달이 넘어서야 그는 겨우 병석에서 일어나 걸어다닐수 있게 되였다. 조직에서는 그에게 남조선연극인동맹에서 사업하면서 무용가동맹을 내올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그때까지 남조선의 진보적예술인들을 망라한 음악가동맹이나 연극인동맹 같은 조직들은 있었어도 아직 무용가동맹은 내오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김수조는 동지들의 소개로 함귀봉무용연구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평소에 전혀 꿈도 꾸지 못했던 무용과 연분을 맺게 된 계기가 된것이다. 후에 북에 들어온 그가 한다하는 안무가로 되였을 때 남에서 같이 싸운 그의 동지들은 김수조가 무용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고 모두들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함귀봉무용연구소는 서울 명동에 있던 무용전습소였다. 당시 서울에 그런 전습소가 적지 않았는데 수업료가 하나같이 록록치 않았다. 하지만 함귀봉무용연구소에서는 입소금만 내면 월사금은 그리 독촉하지 않았기때문에 돈없는 사람들이 그리로 많이 찾아갔다.
일본에서 무용을 배운 함귀봉은 명동유치원 원장과 사범학교 교원을 겸하면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고있었다. 그는 충청도 대지주의 아들이였지만 성정이 착해서 곤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혁명조직에 자금도 대주군 한 량심적인 사람이였다.
연구소에는 무용을 전문하려는 사람들뿐아니라 영화배우나 유한부인 같은 각이한 계층의 사람들이 몸매를 가꾸기 위해 드나들고있었다. 김수조는 그곳을 발판으로 하여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무용가들을 한사람한사람 규합해나갔다. 후날 일생의 반려자로 된 리규봉도 그 연구소에서 처음 알게 되였다.
리규봉은 원래 배화녀고 학생이였다. 그 역시 서울에서 살 때에는 흰쌀밥을 먹는게 늘 소원이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빈곤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목청이 고와 방송국에 가서 노래부른적도 있다는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합창단에 뽑혔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음악교원에게서 개별수업까지 받았다고 한다.
해방정국의 거센 돌풍은 리규봉에게도 들이닥쳤다.
혁명조직의 한 성원이였던 작은 오빠의 영향을 받아 북반부를 동경하게 된 그는 민청산하의 민주주의학생련맹에 가맹하여 학교내의 사회과학소조에도 참가하고 노래보급소조에서 북의 노래들도 배웠다.
그후 동료들과 함께 5. 1절기념행사에 참가하였다고 하여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나온 그는 학교당국에서 학생들의 행사참가를 주도한 5명의 학생들에게 퇴학처분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리규봉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측의 부당한 조치에 격분하여 진급시험도 거부하고 교장실앞에서 여러날동안 롱성투쟁을 벌렸다.
그 투쟁에 참가하였다고 하여 그는 퇴학을 당했고 압력을 받은 음악교원도 그에게 음악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음악을 배울수 없게 된 그는 이렇게 된바엔 유치원에서 률동교원이나 하자고 마음먹고 함귀봉무용연구소에 들어갈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는 입소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민관 맞은켠에서 여러달동안 신문팔이를 하였다. 쪼꼬만 녀학생이 세라복을 입고 신문을 파는 모습이 유표해서였던지 신문은 제법 잘 팔려나갔다. 그래도 돈이 되지 않아 어머니에게 힘들게 말했더니 어머니가 집안의 옷가지들을 있는대로 걷어모아 입소금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되여 리규봉은 낮에는 새로 입학한 보육사범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무용연구소에 가서 무용을 배우게 되였던것이다.
무용연구소에서 리규봉은 3기생이고 김수조는 4기생이였다. 연구소에서는 안무도 배워주어 전습생들끼리 무용구도를 그려가지고 이건 희망이다, 이건 새 출발을 상징한다 하며 서로 교환도 하고 춤으로 옮겨보기도 하였다. 그때 김수조가 하는걸 보니 환상이 있어보이고 남들이 생각 못하는 새로운것을 착상할줄 알더라는것이다.
하루는 김수조가 리규봉을 찾아와 주기적으로 열리는 전습생들의 작품발표회에 2인무를 함께 창작하여 내놓자고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둘이 같이 쌍무를 준비해서 내놓았는데 제목은 《남북통일》이였다. 그 작품이 작품발표회에서 제일 잘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두사람은 가깝게 지내게 되였다. 알고 보니 집들도 같은 방향이여서 전습이 끝나면 그들은 시국이야기랑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함께 집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그 과정에 리규봉은 자기가 다니던 배화녀고의 학생투쟁도 김수조가 뒤에서 지도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따금 김수조는 처녀에게 소설책들도 가져다 주었다. 그럴 때마다 처녀는 총각한테 축잡히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읽고는 퇴근길에서 독후감을 나누었다고 한다.
1949년 2월말경 김수조는 1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남조선무용가동맹의 전신인 무용반을 조직하였다. 예술인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고 대렬을 늘이기 위한 사업을 계속해나가던 그는 그해 10월 세번째로 경찰에 체포되였다. 미군첩보대의 앞잡이로 전락된 경복중학교시절의 동창 하나가 그를 밀고하였던것이다.
다행히도 밀고자는 김수조에 대해 경복중학교시기의 활동내용밖에 아는것이 없었다. 김수조는 14일간의 계속되는 고문속에서도 학교때의 활동이상은 없다는것과 그에 대해서는 이미 치안재판에서 형을 받았었다는것을 마지막까지 주장하였다. 결국 아무런 새로운 단서도 잡지 못한 경찰은 근거불충분으로 그를 석방하지 않을수 없었다.
투쟁의 격랑속에서 그는 점차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몸 바칠줄 아는 름름한 투사로 커가고있었다.
그가 안긴 품
마침내 그가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던 새 세상이 밝아왔다. 미제식민지통치의 아성이였던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해 해방된것이다. 김수조는 끓어오르는 환희와 격정을 안고 인민의 세상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일떠섰다.
서울해방후 상급조직의 지시에 따라 남조선무용가동맹 선전부장으로 임명된 그는 무용가들속에 들어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위대성에 대하여, 공화국정치의 정당성과 우월성에 대하여 열정에 넘쳐 해설선전하였다. 한편 의용군에 탄원해나선 수많은 예술인들을 적극 고무해주고 전선위문대를 조직하여 내보내는 사업도 활발히 벌려나갔다.
그후 그자신도 의용군에 탄원하여 남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일하던 맏형과 함께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에 들어가게 되였다. 리규봉과도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되였다.
조직된지 얼마후 협주단에서는 핵심적인 예술인들로 두개 소대를 편성하여 한 소대는 태백산줄기를 타고 령남지방으로, 다른 한 소대는 대전을 거쳐 호남방향으로 내보냈다. 김수조는 분대장으로서 진격하는 인민군부대들을 따라 안동, 포항계선까지 나가 전선위문공연을 보장하였다.
한달이상의 전선공연을 마치고 협주단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뜻밖에도 후퇴명령을 받게 되였다. 엄혹한 시련의 시각이 닥쳐온것이다. 사랑하는 부모형제들과 고향땅을 뒤에 남겨두고 먼길을 떠나야 하는 그들의 심정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리규봉의 회상담은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후퇴를 앞두고 협주단에서는 예술인들에게 두달분의 생활비와 담배 몇보루를 내주면서 집에 다녀오라고 외출시간을 주었다. 리규봉은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돈과 담배를 내놓았다. 이전에 월사금이나 책값을 어머니에게 부탁할 때마다 죄스러운 마음을 조이군 하던 그였으니 얼마나 기뻤으랴.
그런데 돈을 보고 어머니가 대뜸 《야, 이걸루 빚을 물게 됐구나.》 하는것이 아닌가. 리규봉은 기가 막혀 인젠 세상이 달라졌으니 그런 걱정 안하셔도 된다고 어머니를 일깨웠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천원짜리 한장만 남겨두고 어머니에게 내놓았던 돈을 도로 거두어넣고말았다는것이다. 정말 어머니가 딸자식이 처음으로 가져온 돈을 한푼도 쓰지 않은채 남에게 주어버리면 어쩌나싶어서였다. 리규봉은 자기가 그 돈을 건사해두었다가 어머니를 위해 쓰리라 생각하였다.
그날 그는 난생처음 어머니와 함께 음식점에도 가고 아이스크림과 생과자도 사드렸다. 허나 어머니는 생과자를 들지 않고 손자를 주겠다고 남겨놓는것이였다. 리규봉의 막내조카를 념두에 두고 그러는것이였다. 그 막내조카가 눈섭이 너무 고와서 언젠가 리규봉이 면도칼로 조카의 눈섭을 밀어주면서 이 눈섭이 다시 돋아나면 고모생각을 하라고 말한적도 있었다.
리별할 때 어머니는 전차가 사라질 때까지 떠날줄 모르고 딸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서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모습으로 남게 될줄이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기가 왜 어머니에게 그 돈을 다 내놓고 오지 못했을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여져온다고 리규봉은 말하였다.
그런 심정은 김수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집에 장정이라군 한사람도 없었다. 맏형은 그와 함께 협주단에 있었고 둘째형은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여 청주형무소에서 피살되였다. 의용군에 입대하였던 넷째도 대전해방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오로지 늙으신 어머니가 철부지조카애들과 형수 그리고 나어린 막내동생을 데리고 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쓰라린 천대살이를 다시는 되풀이하고싶지 않았기에, 더우기 김일성장군님을 민족의 어버이로 끝없이 따랐기에 그들은 결연히 북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때 김수조의 나이는 19살이였고 리규봉은 17살이였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련속이라고도 볼수 있을것이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그런 수많은 선택들가운데서 설사 잘못된것이라 할지라도 뒤에 가서 얼마든지 바로잡을수 있는 선택들도 있지만 단 한번의 선택으로 한생이 결정되는 선택들도 있기마련이다. 하다면 19살에 북행길을 결심한 김수조의 선택 역시 그의 뒤날을 긍지와 보람으로 가득차게 한 운명적인 선택이였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생을 좌우하는데서 선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것이 자기가 결심한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신념이고 의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으로 간 그들의 길은 선택의 길인 동시에 신념과 의지의 길이기도 하였다.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의 간고했던 후퇴로정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전한바 있다.
후퇴도중 김수조는 내내 대오의 선발대로 행동하였다. 보총을 메고 먼저 앞서가서 숙영지를 정해놓고는 대렬이 도착하면 다시 떠나군 하였다.
후퇴대렬에서 제일 고생한 사람들은 녀성들이였다. 그중에서도 리규봉 같은 애어린 처녀들의 고생이 막심했다. 그렇게 먼길을 행군해보기는 처음이였던지라 춘천근방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리가 퉁퉁 붓고 자그마한 문턱조차 넘기 힘들어하였다. 처녀들의 발이 물집으로 부르튼것을 보고 박섭 등 나이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처녀들에게 이거 안하면 대오에서 떨어진다고 타이르며 딱총을 놓아주었다. 어찌나 힘겨웠던지 리규봉은 때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 엉엉 울기도 하였다는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오에서 떨어지면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따라가군 하였다.
피로가 극도에 이를 때면 걸어가는것이 아니라 마치 온몸이 둥둥 떠가는것만 같았다. 이따금 지쳐있는 처녀앞에 김수조가 나타나 자기의 배낭을 붙잡으라고 말하군 하였다. 그 배낭마저 놓치면 영영 대오에서 떨어질것 같아 리규봉은 총각의 배낭을 꼭 부여잡고 걷군 하였다.
김수조는 그러는 처녀에게 멀리 구름밑의 고개를 가리켜보이며 저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어디라고, 다음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또 어디라고 이르며 용기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고개, 한고개 아리랑고개를 넘으며 북을 향해 행군해간 그들은 끝끝내 그처럼 소원하던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기고야말았다.
그들이 지친 몸을 끌고 만포에 들어선것은 새까만 밤이였는데 그곳 사람들이 그들에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줴기밥을 쥐여주더라는것이다. 그때 뜨거운 눈물과 함께 줴기밥을 삼키던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리규봉은 추억하였다.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이 해산된 후 다른 무용가들과 함께 국립예술극장 무용단에 소환된 김수조는 전시예술공작대 제1대 대장으로 임명되여 재진격의 길에 오른 인민군대를 따라 황해도 옹진일대에까지 나가 공연활동을 진행하였다. 그후에도 그는 문화선전성 중앙이동예술단 무용부장으로 사업하면서 전선의 군인들과 후방인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그들을 전쟁승리에로 고무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쳤다.
그들은 결코 순탄한 조건에서 공연활동을 벌린것이 아니였다. 결전을 앞둔 전호속에서 공연하기도 하고 신해방지구의 해안연선에서 자체로 무장보초를 서가면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눈이 두텁게 쌓인 고지우에 올라가 공연한적도 있었는데 공병삽으로 고지우의 눈을 한군데 모아 다져 네모나게 눈무대를 만들고 그우에 가마니짝 둬개를 잘라 펴고는 공연을 진행했다. 군인들이 눈무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있었기때문에 가수는 나가면 눈무대주위를 빙빙 돌면서 인사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무용수들은 그들대로 눈무대우의 좁은 공간에서 적당히 움직이면서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도 아차하는 순간에 무용수들의 발이 가마니밖으로 나가면 영낙없이 무대우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럴 때면 관람하던 군인들이 벌떡 일어나 무용수를 부축하여 다시금 무대우에 올려세웠고 무용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듯 춤을 계속 추었다.
그들도 전투원들이였다. 전선과 후방의 가설무대를 전호로 삼고 춤과 노래를 무기로 삼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피로써 지켜낸 이 나라의 애국자들이였다. 김수조도 그들중의 한 사람이였다.
드디여 전쟁이 끝났다. 전후의 조국은 재더미를 털며 일떠서기 시작했다. 창조와 건설의 우렁찬 노래소리가 방방곡곡에서 울려왔다.
이 땅이 바로 새 삶의 터전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걸고 지켜낸 인민의 세상이였다. 하고싶은 일도 많고 이루고싶은 포부도 많았다. 김수조는 가슴벅찬 흥분으로 온몸을 끓이며 청춘의 나래를 한껏 펼쳤다.
그는 국립예술극장의 무용배우로 오늘은 중앙의 극장무대에서, 래일은 건설의 동음드높은 복구건설장에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안겨주며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였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에는 중국을 방문하는 예술단성원으로, 1955년에는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우리 예술단 성원으로 대외무대들에서도 영웅조선의 기상을 남김없이 떨치는데 이바지하였다.
세계청년학생축전과 동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오자 극장집단에서는 그와 리규봉의 결혼식을 차려주었다. 북에 들어온 이후 그때껏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생활해온 두사람이였다. 전쟁의 불길도 함께 헤쳐왔고 전후의 무대들에도 함께 오르군 하였다. 합숙의 한지붕아래서 생활하면서 팥죽도 함께 쑤어먹군 하였다.
1955년의 한해가 저물어가던 어느날 그들은 칠성각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비록 고향을 멀리 떠나 부모들의 축복은 받지 못했어도 집단과 동지들이 두사람을 따뜻이 축복해주었다.
1958년 9월 8일 김수조는 그렇게도 뵙고싶던 어버이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뵙게 되였다.
그날 동평양체육관에서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3천명에 달하는 예술인들이 출연한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이 성황리에 공연되였다.
공화국창건 10돐을 계기로 우리 조국이 걸어온 승리와 영광의 력사를 천리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년대기적으로 보여준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은 해방후 우리의 음악무용예술이 이룩한 성과들을 집대성한 대규모의 종합예술공연이였다.
공연을 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창작가들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무용단 부단장으로 무용창작에 참가한 김수조의 손도 잡아주시며 이제는 신인창작가들이 이렇게 자랐으니 마음이 놓인다고, 해방후 예술인부대를 꾸리기 위하여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예술인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묶어세웠는데 이제는 3천명이라는 대부대로 되였다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신인창작가들이 절대로 자만하지 말고 당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시며 다시금 그의 손을 굳게 잡아주시였다.
그후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존함으로 된 표창장과 선물까지 보내주시였다.
김수조는 감격했다. 그토록 흠모하여마지 않는 위대한분을 만나뵙고 그분의 사랑에 넘친 축복까지 받아안았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에 있으랴. 참으로 하늘땅을 다 준대도 바꾸지 않을 영광이였다.
자기를 바라보시며 젊었다고 그리도 대견해하시던 수령님의 그날의 영상은 김수조의 가슴속에 어버이의 자애깊은 모습으로 한생토록 소중히 간직되여있었다.
1962년 11월 30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를 대극장에서 보아주시고 김수조를 비롯한 창작가들을 또다시 만나주시였다.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김수조의 손을 잡아주시며 수고가 많았다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신 수령님께서는 이 동무가 얼마전에 창작한 무용 《관개수는 흐른다》가 중국을 방문하는 우리 예술단의 공연종목에서 제일 인기가 있다고 한다는데 이번에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에서 무용 《홍수와 싸우는 청년들》을 또 잘 만들었다고, 이 동무는 《물박사》라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에 인민상을 수여할것을 제의하시며 김수조 등 창조성원들과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으시였다. 수령님을 모시고 찍은 그 기념사진은 대를 두고 전해가는 영광의 가보로 오늘도 김수조의 집에 정중히 모셔져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그는 안해에게 우리는 오직 어버이수령님 한분만 믿고 평양으로 왔는데 오늘 우리의 선택이 천백번 옳았다는걸 다시금 느꼈다고 긍지에 겨워 말했다고 한다.
진정의 고백이였다.
불과 서른해 남짓한 세월이였지만 암흑과 광명의 두 극단을 체험해오면서 참다운 세상, 참다운 품에 안길 때라야만 참다운 인생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한 그였다.
정녕 수령님의 품은 그의 청춘을 꽃펴주고 희망찬 미래를 안겨준 위대한 어버이의 품이였다.
은혜로운 품속에서 김수조는 그후 국립예술극장 무용단 단장으로, 국립무용극장과 국립가무단의 예술부총장으로 어엿하게 성장하였다.
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손길을 떠나 김수조의 성장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할수 없다.
1988년 6월 6일, 당시 조선예술교류협회 축전조직과장으로 사업하고있던 김수조는 위대한 장군님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도안을 해설해드리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그날 도안해설을 김수조가 한다는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그 동무는 자신께서 이미 알고있는 동무라고 하시며 잘하도록 하라고 이르시였다고 한다.
그 말씀을 전해듣는 순간 김수조는 눈굽이 달아올랐다.
지난 기간 여러모로 미숙한 그를 창작일군으로 계속 일하도록 크나큰 배려를 돌려주신 그이이시였다.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금강산의 노래》를 창조할 때에는 창조지도일군으로 망라시켜 주체적인 문학예술창조의 방법론을 터득하도록 이끌어주시고 공훈예술가 칭호까지 안겨주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얼마후 김수조는 그이앞에서 도안해설을 하였다.
흥분된 그의 기색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마음을 푹 놓고 해설하라고 거듭 고무해주시며 창작가들이 생각지 못한 부족점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였다.
평양축전을 주체성있게 우리 식으로 준비할데 대하여 강조하신 그이께서는 이어 개페막행사의 내용을 축전의 기본리념에 맞게 평화, 친선, 단결, 환영으로 일색화할데 대한 문제, 개페막행사를 예술화, 기교화할데 대한 문제, 현대과학의 첨단기술을 널리 활용할데 대한 문제 등 개페막행사를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할 구체적인 방도들을 뚜렷이 밝혀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김수조의 손을 힘있게 잡아주시면서 신심을 가지고 본때있게 해보라고 격려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가르치심과 뜨거운 고무를 받아안은 창조집단은 축전개페막행사를 종전의 틀과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화폭으로 형상해나갔다.
휘황하게 타오르는 봉화대의 홰불과 고구려무사복을 입은 신호악대의 장쾌한 축전개시신호악, 변화무쌍한 배경대와 극치의 황홀경을 펼치며 끝없이 흘러넘치는 바닥춤대렬…
실로 그것은 인류문예사와 세계청년학생축전력사에 일찌기 없었던 장엄한 예술적화폭이였다.
1989년 6월 29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을 이틀 앞둔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개페막행사의 최종시연회를 지도해주시기 위하여 5월1일경기장에 몸소 나오시였다.
개페막행사의 대예술공연을 처음부터 마감까지 주의깊게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시연회가 끝나자 김수조를 부르시여 행사준비가 잘된데 대하여 크게 만족해하시며 7만명을 헤아리는 인원들을 한사람같이 움직이게 한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제는 그에게 그 어떤 큰일을 맡겨도 잘해낼것이라고 하시며 인민예술가칭호를 주도록 하여주시였다.
분에 넘치는 은정의 말씀앞에 감격을 금치 못하는 김수조에게 그이께서는 오늘 검열시연회 사회를 누가 했는가고 다정히 물으시는것이였다.
원래 최종시연회의 사회는 중앙방송위원회의 방송원이 하게 되여있었는데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하여 김수조가 대신하였던것이다.
그가 이런 사연을 장군님께 말씀올리며 갑자기 준비없이 한데다가 목소리까지 석쉼하여 잘하지 못한데 대해 송구스러워하자 그이께서는 어쩐지 동무목소리같다 했는데 옳다고 하시면서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당일행사와 관련하여 미흡한 문제들을 세심히 일깨워주고나시여 차에 오르시던 그이께서는 다시 내리시더니 김수조에게로 다가오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미더우신듯 그의 두손을 잡아주시며 이번 행사에서 동무의 수고가 많았다고, 동무가 이젠 경험도 많이 쌓았겠는데 앞으로 있게 될 행사들도 잘해야 하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너무도 크나큰 믿음을 받아안은 김수조는 그이께서 타신 차가 멀리 갔어도 그 자리에 굳어진채 움직일줄을 몰랐다.
사실 그가 평양축전과 같은 큰 행사의 총연출을 감당해낼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장군님께서 벌써 오래전부터 큰 규모의 국가적인 예술행사들의 연출을 맡겨주시고 경험과 기초를 쌓도록 하여주셨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어버이수령님탄생 70돐과 사로청 제7차대회 행사들을 비롯하여 국가적인 큰 규모의 여러 예술행사들의 연출을 맡겨주시고 그 행사들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 과정을 통하여 담을 키우고 경험을 쌓도록 하여주시였으며 행사의 규모와 형식, 군중무용창작방향, 대렬배렬과 흐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여 행사보장의 묘리를 터득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때 진행된 대군중야회를 준비하던 과정만 놓고보아도 그것을 잘 알수 있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야회를 대공연형식으로 본때있게 준비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야회에 들어갈 군중무용의 종류와 합창형식, 연출대본에 이르기까지 비범한 예술적안목으로 구체적인 지도를 주시였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를 7만명의 대예술공연형식으로 한것이라든가 바닥춤대렬에 력량을 집중하게 한것 등 많은 점들이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지도와 가르치심에 의해 이미전부터 창조된 형식과 경험에 기초한것들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성과를 고스란히 전사들에게 돌려주시는 그이의 숭고한 인덕앞에 김수조는 뜨거운것을 삼키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예술의 천재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탁월한 지도에 의하여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는 축전력사가 알지 못하는 가장 성대하고 황홀한 화폭을 인류의 심장속에 새겨주었다.
1991년 어느날 김수조를 부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일군들에게 이 동무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개페막행사를 총지휘한 동무라고, 축전을 통하여 우리 수령, 우리 당, 우리 조국을 세계만방에 빛내이는데 기여한 동무라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있게 될 예술행사를 책임지고 한번 본때있게 해보라고 또다시 크나큰 신임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은인의 보살피심속에 그후 피바다가극단 총장으로 임명된 김수조는 주체예술의 대화원을 더욱 풍만하게 가꾸어가는데 온넋을 기울였으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의 총연출을 맡아안고 장군님의 의도대로 작품을 훌륭히 완성하기 위해 사색과 정열을 깡그리 바쳐갔다.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창건 55돐을 맞으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이 성과적으로 창조되였을 때 그에게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였다.
그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총연출을 담당한 피바다가극단 총장동무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시면서 그 동무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도 성과적으로 보장한 공로있는 동무라고, 고난의 행군을 헤쳐가는 어려운 때에 큰일을 한것만큼 정치적견지에서 볼 때 마땅히 공화국영웅칭호를 주는것이 어떤가고 일군들에게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김수조에게 공화국영웅칭호가 수여되였다.
바로 이러한 믿음과 사랑이 김수조를 키웠다. 어찌 그 한사람뿐이랴. 이 나라의 수천만 아들딸들이 그 품속에서 성장하였다.
김수조에게 있어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창조하던 나날이야말로 생애의 최전성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그가 위대한 장군님으로부터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90돐을 맞으며 진행할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준비할데 대한 과업을 받은것은 2000년 10월 어느날이였다.
창작집단은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90돐과 영웅적조선인민군창건 70돐을 계기로 작품이 창조되는것만큼 제목을 《태양의 노래》로 달고 수령님의 건당, 건국, 건군의 력사를 서사시적화폭으로 펼쳐보이는 식으로 연출대본을 준비하였다.
2001년 7월 중순 어느날 김수조는 위대한 장군님께 연출대본초안을 설명해드리게 되였다.
그의 설명을 주의깊게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일전에도 말했지만 자신께서 이번에 구상하는 작품은 단지 그전에 하던것과 같은 작품이 아니라 21세기를 대표할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수령님탄생 90돐과 조선인민군창건 70돐을 맞으며 진행할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1900년대로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옹근 한세기를 포괄하는것으로 내용구성을 고쳐 다시 완성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순간 뢰성같은 충격이 김수조의 가슴을 세차게 쳐왔다. 한아름에 받아안기에는 너무도 거창한 세계였던것이다.
절세위인의 거룩한 한생을 파란만장의 100년민족사를 배경으로 작품에 그대로 담으시려는 장군님의 무변광대한 사색의 세계가 기성의 틀속에 갇혀있던 그의 넋을 통채로 흔들어깨웠다.
끓어오르는 흥분을 안고 돌아온 김수조는 창작집단과 함께 그이께서 밝혀주신대로 작품을 새롭게 구성해나갔다.
그로부터 얼마후 또다시 그를 부르시여 창조정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준비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이전에 하던 형식과는 달리 내용도 형식도 제목도 새롭게 하여야 한다고 다시금 당부하시며 제목을 그대로 하려고 하는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제목을 그대로 《태양의 노래》로 하려 한다고 말씀드리자 장군님께서는 생각에 잠기셨다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제목을 《아리랑》이라고 다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뜻밖의 말씀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놀랍기도 하고 의아한 생각도 들어 한동안 그이를 우러르기만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러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작품에 지난날 우리 인민이 망국노의 피눈물을 뿌리며 부르던 토색민요 《아리랑》과 최근에 나온 《강성부흥아리랑》을 넣어야 한다고, 그러면 탁월한 수령을 모셔야 슬픔의 《아리랑》이 기쁨과 행복의 《아리랑》으로 된다는 심오한 철학이 심어진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김수조는 그이의 앞이라는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의 흥분된 심정을 후날 회상글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하였다.
《〈아리랑〉!
이 얼마나 단군민족의 유구한 력사가 담겨져있고 김일성조선의 찬란한 민족성이 비껴있는 제목인가.
흔히 지난날 대집단체조를 창조할 때 그 작품의 〈범주제〉, 〈범종자〉는 가지고있었으나 똑똑한 종자 특히 문학적인 종자를 바로쥐지 못하고 창조사업을 시작하는 실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 몸소 달아주신 제목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한세기 운명을 론할수 있는 력사적, 철학적종자로서 훌륭한 예술적화폭을 펼칠수 있는 발견이였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종자와 제목은 이렇게 태여났다.》
위대한 심장이 위대한 창조를 낳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안겨주신 크나큰 심장을 안고 김수조를 비롯한 창조집단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새 세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걸작으로 내놓기 위하여 모든 정력을 다 쏟아부었다.
그들앞에는 새롭게 해결해야 할 형상과제가 한둘이 아니였다. 창작의 번민속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들도 많았다.
그들이 형상안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할 때마다 장군님께서는 손수 명곡들을 골라주시며 작품의 음악적기둥을 세워주기도 하시고 민속무용의 춤가락들과 의상, 소도구들까지 일일이 보아주시며 민족적감정과 정서가 짙게 작품을 형상하도록 세심한 지도를 주기도 하시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옹근 한세기에 달하는 민족의 운명사를 한편의 무대예술작품에 집약적으로 반영할수 있도록 구성의 대도 매 장면들마다 하나하나 바로 심어주시였고 봉화대에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부터 레이자조명과 특대형영화화면 등 최신과학기술을 도입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명철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진정 세인을 경탄케 한 대걸작의 창작가, 총연출가는 다름아닌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창조집단이 《통일아리랑》장을 형상할 때였다.
전반부분에서 분렬의 아픔에 몸부림치며 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의 념원을 노래 《아리랑》에 담아 형상하였는데 그 후반부가 문제였다.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여 기어이 하나가 되려는 민족의 신념과 의지를 형상하는데 맞춤한 노래를 좀처럼 선정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이미 나온 통일주제의 수많은 노래들을 골라보았지만 새로운 맛이 없었다. 날은 흐르는데 신통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창작가들의 마음은 더더욱 조급해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김수조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부르신다는 련락을 받았다.
그가 서둘러 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자 그이께서는 동무의 안타까운 심정을 알고 찾았다고 하시며 자신께서 노래를 주겠으니 그 노래를 한번 써보라고 이르시는것이 아닌가.
김수조가 너무 기뻐 자리에서 일어서자 장군님께서는 흥분하지 말고 앉으라고 하시면서 이건 자신께서 아끼던 노래로서 《아리랑》작품에 쓰게 하려고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였다.
후에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그 노래의 가사와 곡을 받았을 때 창작가들은 너무 기뻐 환성을 올렸다.
하나 민족도 하나 하나 피줄도 하나
하나 이 땅도 하나 둘이 되면 못살 하나
긴긴 세월 눈물로 아픈 상처 씻으며
통일의 환희가 파도쳐 설레이네
하나 우리는 하나 태양조선 우리는 하나
…
들으면 들을수록 《통일아리랑》장의 전반부에 나오는 노래 《아리랑》과도 련결될뿐아니라 민족의 통일념원을 반영한 화폭의 조형적형상에도 어울리는 이 노래야말로 그들이 그처럼 찾던 음악이였던것이다. 노래 《우리는 하나》는 이렇게 되여 우리 겨레의 불같은 통일념원과 민족자주정신을 과시하는 통일찬가로 세상에 소리높이 울려퍼지게 되였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창조하는 나날에 김수조가 받아안은 사랑과 배려는 한량없는것이였다.
그가 건강한 몸으로 일하도록 외국의 병원에서 치료도 받게 하여주시고 창조사업을 끝낸 다음에야 70돐생일을 쇠겠다는 그에게 민족의 풍습대로 쇠여야 한다고 생일상도 보내주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어느날 그이께서는 김수조를 부르시여 일이 아무리 바빠도 이번에 남녘땅에 가서 오래동안 헤여졌던 친척들을 만나보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실로 뜻밖의 말씀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작품창조로 시간이 천금같이 귀중한 때였던것이다.
그러한 때 모든것을 다 뒤로 미루고 끊어졌던 혈육의 정부터 이어주시려는 장군님의 열렬한 인간애앞에 그는 목이 꽉 메여와 다른 말씀을 더 올릴수가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한생을 헌신하시는 장군님의 숭고한 덕망을 온몸으로 절감하며 김수조는 제3차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 성원으로 서울에 가게 되였다.
서울에서 그는 반세기가 넘도록 헤여져있던 조카들과 이모를 만났다. 어머니와 형수, 막내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헤여질 때 3살, 2살 나던 조카들이 어느덧 귀밑머리가 희여지기 시작한 50대의 장년이 되여 그의 앞에 나타났다. 삼촌은 그들에게 슬픈 소식부터 전해야 했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99년 11월에 병으로 돌아가셨단다.》
조카들은 모두 흐느껴울었다. 그러는 그들을 바라보는 김수조의 마음도 쓰리고 아팠다.
미군이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에 어머니는 그대로 있으면 죽는다고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시골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그 덕에 겨우 목숨을 건진 혈붙이들이였다. 월북자가족이라 하여 남쪽사회에서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핍박을 받아온 그들이 이렇게 또다시 상실의 아픔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민족분렬의 통분이 가슴에 사무쳐와 견딜수가 없었다.
김수조는 조카들에게 그들의 아버지이며 자기의 맏형인 김수희가 공화국의 품에 안겨 공훈예술가로,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으로 성장한 과정에 대하여 감회깊이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버이의 믿음속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등 큰 국가행사들의 총연출가로 자라난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반세기이상 쌓이고쌓여온 하많은 회포를 어찌 2박3일이라는 그 짧은 시간동안에 다 터놓을수 있었으랴.
헤여지기에 앞서 김수조는 자기가 안고 간 김정일화 3상을 조카들에게 안겨주었다. 그가 70평생을 살아오면서 확신한 생의 진리가, 열화같은 심장의 고백이 그 김정일화에 함축되여 담겨져있어서였다.
아버지와 삼촌이 걸어온 길을 알게 된 조카들은 김정일화를 받아안고 감동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그들의 모습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다함없이 흠모하는 겨레의 마음을 읽으며 평양으로 돌아온 김수조는 더욱더 용솟음치는 열정을 창조사업에 바쳐갔다.
철두철미 장군님의 말씀을 자자구구 따져가면서 드팀없이 구현하는것은 그의 어김없는 사업원칙이였다.
언제인가 그가 내놓은 작품의 수정대책안을 놓고 격렬한 론쟁이 벌어진적이 있었다. 보통관념에 비추어볼 때 너무도 놀랍고 대담하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바로 위대한 장군님의 의도이라고, 장군님의 의도야말로 우리가 들고나가야 할 유일한 자막대기이며 모든 창작적환상과 형상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침내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천만의 심장을 격동시키면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빛나게 완성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품창조에 참가한 수많은 창작가들과 출연자들에게 높은 급의 국가표창과 함께 선물을 보내주시였으며 김수조에게는 김일성상을 수여하도록 하시는 더없는 영예를 안겨주시였다.
그는 행복과 영광의 절정우에 올라섰다.
가난한 품팔이군의 자식으로 태여난 그가 절세위인들의 손길아래 김일성상계관인으로, 공화국영웅으로, 인민예술가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성장한것이다.
단지 김수조 혼자만이 아니였다. 함께 북행길에 올랐던 그의 안해도 은혜로운 품속에서 공훈배우로,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교원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로동계급편을 비롯한 여러 영화들을 훌륭히 만드는데 기여함으로써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는 영광까지 지니였다.
하기에 김수조는 생전에 늘 이렇게 외웠다고 한다.
《나는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인간으로서, 혁명전사로서 받을수 있는 모든것을 다 받아안았다. 삶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 그 사랑과 믿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것이 나의 소원이고 행복이다.》
그는 그후에도 이러한 념원으로 여생을 불태워갔다.
폭이 크고 대범한, 활력에 넘치는 류형의 예술가였던 김수조는 사생활에 들어가서도 덜렁덜렁할것 같았지만 실은 퍼그나 자상하고 세밀한 성격이였다고 안해는 회상한다. 젊은 시절엔 일기도 꼭꼭 쓰군 하였고 안해가 옷을 빨아서 개여놓으면 눈에 차지 않아 자기 손으로 다시 개여 비닐에 꼼꼼히 포장까지 해놓군 하였다고 한다. 그는 생활에서 절도가 강한 사람이였다.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아침운동을 번지지 않았으며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꼭꼭 들군 하였다.
창조현장에서는 《땅크》라고 불리울 정도로 내밀성과 배짱이 드센 그였지만 집안에 들어와서는 어질고 착한, 그래서 자식 한번 때려보지 못한 가장이였다. 자식들에게 정 화가 나면 기껏해서 안해에게 저거 좀 때리라고 이르군 하였다고 한다. 아마 진취성이 강하면서도 그렇게 유하고 빈틈없는 성격이여서 수많은 군중을 능란하게 지휘할수 있었던것 같다.
나이가 먹어가는것이 아쉽다고, 그러나 일없다고 고무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에 떠받들려 그는 지팽이를 짚고 간호원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생의 말년까지 창조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2010년 11월 일흔아홉해의 생을 마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며 고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시였다.
김수조의 한생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삶을 가꾸어주고 꽃피워주는 참다운 정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