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권 원 한(음악가)

 

• 1920년 11월 25일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출생.

• 1945년부터 서울 한성중학교 음악교원, 서울교향악단 가수.

• 1950년부터 국립예술극장 독창가수.

• 1972년부터 모란봉예술단 성악강사.

• 1989년부터 문화예술부 예술인공로자협회에서 사업.

• 2006년 4월 6일 사망.

                                                           

 

 

지금도 우리는 2000년 11월 TV로 방영되였던 《권원한 독창회》를 기억하고있다.

80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맑은 청과 로련한 형상으로 노래를 부르는 로가수의 모습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화제에서 떠날줄을 몰랐다.

오랜 세대들은 수십년만에 다시 보는 녀가수의 낯익은 모습앞에서 감개를 금치 못해하였고 새 세대들은 호기심과 존경의 마음이 동하여 권원한이 누구인가고 어른들에게 저마끔 물어들 보았다. 로가수를 소개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고 그를 원형으로 한 장편소설이 출판되여 독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무릇 사람의 마음은 덮어놓은 책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몇마디의 추억담이나 한두권의 책으로 살아온 래력은 대략 간추릴수 있어도 고뇌와 환희로 뒤엉킨 한 인간의 곡절많은 내면사까지야 어찌 다 전할수 있으랴.

 

 

해님을 목메여 부른 소녀

 

1930년대 초 어느해 서울의 리화녀자전문학교에서는 녀자중학생들의 전국적인 성악콩클이 진행되였다.

앞날의 인기가수를 꿈꾸며 성악수업을 받아온 녀중학생들이 평양과 서울, 함흥과 부산 등 도회지들에서 뽑혀왔다.

세라복에 구두를 받쳐신고 도랑화장을 진하게 한 처녀들이 무대우에 올라 부르는 노래는 대개가 《안니로리》나 《로렐라이》와 같은 외국명곡들이였다. 자기의 음색이나 음역에는 관계없이 외국명곡을 잘 불러야만 일류급가수로서의 전망을 론하는것이 당시의 류행이였던것이다.

노래가 끝나면 의례히 있군 하는 박수나 꽃다발도 없었다. 오로지 심사석에 앉아있는 음악계명사들의 나직한 수군거림과 심사결과를 가슴조이며 기다리는 중학생들의 긴장된 숨소리만이 들려올뿐이였다.

그러던 장내의 분위기는 회령에서 온 13살의 소녀가 출연하겠다는 소개자의 말에 그만 흐트러지고말았다. 회령이라면 북관 6진중의 하나인 두메산골이 아닌가. 그것도 13살의 보통학교 학생이 중학생들과 겨루겠다고 나오다니… 게다가 부를 노래는 웬간한 전문가수들도 형상하기 바빠하는 이딸리아가요 《오 나의 태양》이란다.

자주색저고리에 까만 목세루치마를 입은 쌍태머리소녀애가 뭇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조심조심 무대우에 나섰다. 아직 촌티가 가셔지지 않은 소녀의 얼굴에는 불안해하는 빛이 력력히 떠돌고있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심사원들도 막간의 휴식이 찾아오기나 한것처럼 다소 풀어진 자세에 어지간히 비양조가 비낀 눈길로 무대쪽을 지켜보고있었다.

그러나 피아노소리가 울리고 소녀의 입에서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을 때 장내는 이내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오 밝은 태양 너 참 아름답다

폭풍이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류다른 소리색갈이였다. 이 나라의 가을하늘처럼 청아하고 산촌의 벽계수처럼 류창한 소녀의 목소리는 한순간에 사람들을 심취시켜버렸다.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오고

하늘에 밝은 해는 비친다

 

경연장이 불시에 극장으로 바뀐듯 모두가 숨을 죽이고 소녀의 노래를 듣고있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였다. 저렇게 체소한 몸안에서 어쩌면 저리도 풍만한 소리가 흘러나올수 있단 말인가. 과연 저애가 해빛 수려한 나뽈리의 하늘을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인제야 겨우 사춘기에 들어서기 시작했을 애어린 소녀가 태양에 비겨 애인을 찬양한 노래의 감정을 어쩌면 저렇듯 열렬하게 표현할수 있단 말인가.

허나 그 시각 소녀가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태양은 낯설은 이국의 태양이 아니였다.

소녀는 두만강물결을 불태우며 솟아오르던 고향의 태양을 그려보고있었다. 시원한 강바람에 실려오던 물비린내, 굼닐며 흘러가는 물이랑우에 무수한 빛가루로 부서져내리던 아침해살, 쏟아져내리는 그 해살에 한껏 미역을 감으며 즐거이 나래치던 조그마한 물새들…

소녀가 나서자란 곳은 북변의 산간고을 회령이였다. 예로부터 녀인들이 아름답고 살구맛이 으뜸이고 백토가 유명하다고 하여 《회령3미》로 소문난 고장이였지만 나라잃은 그 세월에 고향은 소녀에게 가난의 서러움을 때이르게 맛보게 하였다.

본래 소녀의 아버지는 강원도 양양이 고향이였다. 일찌기 할아버지를 여읜 아버지는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떠나는 외삼촌을 따라가던중 두만강을 건느지 않고 회령에 주저앉아버렸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어머니를 맞았고 여섯 자식을 보았다. 후날 서울에 가서 자식들은 아홉으로 불어났는데 아홉 남매의 맏이가 바로 소녀였다.

어려서부터 소녀는 《신동》이라고 불리울만치 노래를 잘 불렀다. 소녀가 노래를 부를 때면 어른들은 기가 막혀 혀를 차군 하였고 학교에서도 연예공연이 있을 때면 언제나 소녀부터 찾군 하였다.

하건만 소녀의 집형편은 어린 자식의 재능을 뒤받쳐줄만큼 여의치 못했다. 워낙 식솔이 많다는 사정도 있었지만 그보다 아버지가 집에 붙어있지 않고 늘쌍 떠돌아다니기만 하였던것이다.

소녀의 아버지 권학종은 강직하고 결패스러운 성격이면서도 부산스럽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다망하고 다채로운 사람이였다.

한때 청진부두와 정어리공장에서 일하다가 룡정에 건너가 중학을 나온 아버지는 회령지구의 서양선교사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는가 하면 교회합창단의 지휘자노릇도 해보고 신흥학교에서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통역일을 맡아달라는 서양선교사의 권고를 물리치고 구두수리를 하면서 알수 없는 일에 몰두하여 자주 두만강을 넘나들기도 하였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 시기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관여하고있었던것이다.

가장인 아버지가 집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방지축으로 나다니기만 하니 가세는 점점 기울어만 갔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아버지는 맏이인 소녀의 남다른 재능만은 어떻게 하나 키워주려고 왼심을 썼다. 철부지딸애에게 채찍까지 대며 악보를 배워주었고 일본에서 류학하고 온 보통학교의 녀교원에게 부탁하여 피아노기초와 성악창법을 가르치게 했다. 소녀의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알아본 녀교원이 서울에서 열리는 녀자중학생들의 성악콩클에 소녀를 데리고 가겠다고 나서자 온 식구가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형편이였지만 주저없이 가산을 팔아 려비까지 장만해준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소녀는 두려우면서도 더없이 고마웠다.

해님이 그리웠다. 묵묵히 딸을 떠밀어주는 아버지의 멍든 가슴에 빛을 부어줄 해님이 그리웠다. 고생살이에 쫓기우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따뜻이 품어줄 해님이, 캄캄한 어둠을 밀어내고 자기의 앞날을 곱게 비쳐줄 밝은 해님이 그리웠다.

하여 소녀는 자그마한 가슴속에 남몰래 담고있던 슬픈 고백과 가지가지 소망들을 담아 목메여 자기의 해님을 부르고 또 불렀다.

 

나의 몸엔 사랑의 별

오 나의 태양 비친다

오 나의 나의 태양 찬란하게 비친다

 

장내에는 정적이 깃들었다. 소녀가 부르는 노래소리를 타고 모두가 어디론가 떠나가버린듯 하였다. 몇순간이 지나서야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심사원들도 경연참가자들도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 나어린 소녀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연방 퍼부었다.

그날의 성악콩클에서는 관례를 깨고 벽촌에서 온 보통학교 학생에게 1등상이 수여되였다. 소녀의 이름은 권원한이였다.

돌이켜보면 그날 권원한이 부른 노래에는 앞으로 그가 걷게 될 인생길이 비껴있었던것만 같다.

성악콩클에서 1등을 한것이 연고가 되여 후날 권원한은 리화녀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할수 있었다.

그즈음에 그의 일가도 서울로 옮겨오게 되였다. 여전히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집안일을 떠맡기고 바삐 돌아다니고있었다. 권원한은 늘 학비걱정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전차를 타는 돈도 아까워 그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다니군 하였고 그러고도 어쩔수가 없어 한때는 학교를 중퇴하고 시골에 내려가있기도 하였었다.

그럴 때 리화녀전 음악과 과장이였던 김제식이 처녀를 다시 불렀다. 김제식은 우사 김규식선생의 녀동생이였는데 권원한의 인물과 목소리를 아깝게 여기고 그를 데려다 자기 집에서 양딸삼아 키우면서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시켜주었다.

파쑈일본의 광기가 극도에 달하고 식민지민족의 울분에 찬 곡성이 구천에 사무쳤던 세월이였다. 그 시절 권원한은 나라잃은 망국노의 설음을 한탄하는 《봉선화》와 같은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김제식의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홍란파가 살고있었는데 홍란파는 이따금 찾아와 권원한이 피아노를 타며 고음으로 부르는 《봉선화》를 듣군 하였다고 한다.

1944년에 리화녀전을 졸업한 권원한은 친구의 소개로 중국 동북에 건너가 심양의 선린녀중에서 음악교원이 되였다. 그러나 패망을 앞두고 온 동북땅을 피비린내나는 살륙장으로 만든 일제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그는 이듬해 다시 서울로 나오고말았다.

드디여 해방의 날이 왔다. 숨막히는 암흑의 장막을 찢으며 권원한의 가슴속에 태양의 서광이 비쳐온것이다.

날아옐 하늘이 없어 모대기던 작은 새는 밝아온 조국의 창공에서 마음껏 나래를 펼치고싶었다. 권원한은 한성중학교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서울교향악단 독창가수로 일약 무대우에 나섰다.

그의 남다른 소리색갈과 노래형상은 대번에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서울의 음악계에서는 프랑스류학파요, 일본류학파요 하면서 가수들이 저마끔 외국에서 배운것을 가지고 자기들을 내세우고있었다. 그런 가수들에 비해보면 권원한은 외국물이라고는 먹어보지 못한 순수 국내산이였고 그때문이여선지 서양의 고전성악을 해도 조선사람들의 미감에 어울리게 조선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밝고 청순한 그의 목소리를 좋아하였다. 거기에다가 권원한은 목소리로만 노래하는것이 아니였다. 조화로운 률동과 정찬 웃음을 담은 두눈으로 노래를 불렀기에 어떤 때는 관중들에게서 여섯번이나 재청을 받기도 하였다.

출발은 너무도 성공적이였다. 요란한 박수갈채와 꽃다발, 찬사의 목소리들이 신인가수를 구름처럼 싸고돌았고 새로운 명가수의 탄생을 남먼저 알리기 위해 기자들이 앞을 다퉈가며 펜을 내달렸다.

여기저기서 《노래의 녀왕》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녀가수에게 가극의 주역을 맡아달라고 발돋움하며 부탁해왔다. 그리하여 권원한은 《까르맹》과 《동백꽃아가씨》, 《파우스트》, 《리골레또》 등 여러 가극들에 주역으로 출연하게 되였다.

그무렵 가수로서의 권원한의 인기는 가극 《춘향전》과 관련한 일화를 통해서도 다소나마 엿볼수 있다.

해방후 남조선에서는 좌익계와 우익계가 제각기 단체를 무어가지고 예술활동을 벌렸다. 권원한이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대인기를 끈 《춘향전》은 좌익계에서 만든 가극이였다. 이에 우익계도 저들대로 《춘향전》을 만들어 좌익계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른것은 몰라도 춘향역을 맡을 배우를 고르는것이 제일 난문제였다. 우익계에서는 어떻게 하든 좌익계보다 못지 않은 주역감을 고르려고 3년동안이나 애를 썼지만 권원한만 한 기량과 미모를 갖춘 가수를 찾아낼수가 없어 결국 그를 자기네 가극의 주역으로 초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는것이다.

서울시민들은 권원한이 출연하는 가극을 보기 위해 시공관(극장)으로 밀려가군 하였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녀가수를 에워싸군 하였던지 공연이 끝나면 한성중학교의 힘꼴이나 쓰는 학생들이 자기네 음악선생을 호위하느라 진땀을 빼지 않으면 안되였다.

옥색갈의 모시저고리는 권원한이 제일 즐겨 입는 옷이였다. 연한 하늘색저고리에 검정색이나 자주색치마를 받쳐입고 흰 버선에 코고무신을 받쳐신은 그가 보기 좋게 큰 옥색리봉을 머리에 달고 거리를 지날 때면 미인가수를 구경하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군 하였다.

권원한의 앞길에 인생의 활무대가 펼쳐지는듯싶었다. 허나 어인 일인지 인기의 절정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는 점점 더 깊은 번민의 나락에 빠져들군 하였다.

(과연 나는 참다운 예술인인가?)

그는 예술을 사랑했다. 정치적혼란과 충돌이 온 남녘땅을 회오리칠 때에도 그는 예술이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맛보게 하고 감동을 안겨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초기에 그가 아무런 정치적편중이 없이 좌익이든 우익이든 자기를 불러주는 곳이면 그 어데건 달려가 노래를 부른것도 그때문이였다.

하지만 일본을 대신하여 미국이 종주국행세를 하는 남조선의 현실에서 그것은 한갖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의 감격속에 내걸었던 인민위원회간판들이 도처에서 내리워지고 민족을 반역한 어제날의 친일파들이 애국자들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왜정때나 다름없이 굶주림과 무권리에 시달리는데 저들의 부귀영달만을 꾀하는 매국배족의 무리들은 외세와 야합하여 하나의 강토를 두동강내려고 발악하고있었다.

먹을것에 주리고 자유에 주리고 정의에 주린 사람들이 항거의 길에 나섰다. 처음에는 피터지게 절규하고 다음에는 압제자들에게 돌멩이를 날렸고 나중에는 손에 총을 들고 일어났다. 그들속에는 권원한의 아버지와 남동생도 있었다.

애국이냐 매국이냐, 정의냐 불의냐 하는 갈림길에서 순수한 예술의 길이란 지상공론에 불과한것이였다.

더우기 남쪽의 뜻있는 문예인들이 북으로 갔다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권원한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군 하였다. 박세영, 송영, 조령출, 황철, 최승희, 문예봉… 남조선문예계에서도 한다하는 재사들로 알려진 그들이 사선을 무릅쓰고 찾아간 곳은 온 겨레가 민족의 태양으로 흠모하여 마지 않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이였다.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해 포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와 결사항전을 벌려오신 장군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시여 인민을 위한 바른 정치를 펴고계신다는 소식은 권원한도 여러 기회에 들을수가 있었다. 토지개혁법령, 로동법령, 남녀평등권법령… 정녕 그이께서 내놓으시는 시책들은 어느것이나 할것없이 이 나라 백성들의 세기적인 숙망을 담고있었다.

언젠가 권원한은 《산업건국의 노래》며 《산으로 바다로 가자》, 《밭갈이노래》와 같은 북녘에서 불리우는 노래들을 들으며 남쪽과는 판이하게 변모되여가는 북녘의 현실을 심장으로 감득한적이 있었다. 그 노래들은 하나같이 밝고 씩씩하고 환희로 충만되여있었다.

노래에는 시대가 비낀다고 했다. 어두운 시대는 암울한 노래를 낳고 밝은 시대는 흥겨운 노래를 낳기마련인것이다. 《산업건국의 노래》와 《산으로 바다로 가자》를 작곡한 리면상선생의 경우를 보아도 해방전에는 망국노의 쓰라린 가슴을 움켜잡고 비애와 설음만을 하염없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작곡가가 오늘은 그리도 벅찬 희열과 랑만에 넘쳐 온 세상에 소리높이 새 생활창조의 기쁨을 노래하고있는것이였다.

참된 정치가 참된 삶을 마련해주고 참된 삶이 참된 예술을 낳는 법이다. 이 땅의 만백성들이 진심으로 따르는 품, 이 나라의 의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려가 안기고싶어하는 품, 그 품이야말로 참다운 인생을 가꾸어주고 진정한 예술을 꽃피워줄 위대한 태양의 품이 아니겠는가.

권원한은 예술인이기 전에 량심인이였다. 하기에 화려한 무대와 명성속에서 개인의 안락을 누릴 대신 겨레를 위한 투쟁의 대오에 과감히 뛰여들었던것이다.

그는 애국적인 예술단체들에서 주최하는 공연들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사람들을 투쟁에로 고무추동하는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리원녕(공화국 초대보건상 리병남선생의 딸)은 당시 숙명녀고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참가하고있었는데 좌익계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권원한 등 가수들이 군중들앞에서 혁명적인 노래들을 부르거나 보급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였다고 한다.

해가 바뀔수록 남쪽땅은 애국과 매국의 치렬한 대결장으로 더더욱 화해갔다. 미제와 매국노들은 단말마적으로 발악했다. 려수의 항쟁자들이 피흘리며 쓰러졌고 4. 3의 제주도가 불바다에 잠겼다. 그야말로 온 남녘땅이 폭압과 학살의 암흑천지로 변해버렸다.

해빛이 그리웠다. 암흑을 불사르고 새날의 광명을 안겨줄 태양을, 동토대를 녹이며 새봄을 안아올 구원의 태양을 녀가수는 목마르게 기다리고있었다.

 

 

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해방되였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광명의 날이 왔던것이다. 만세의 환호성이 서울시내를 진감하였다.

서울이 해방되여 며칠이 지난 어느날 종로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가슴설레는 광경앞에 모두 걸음들을 멈추었다.

화신백화점 맞은켠에 《한청빌딩》이라고 불리우던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의 벽면우에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씌여진 커다란 현수막이 내려드리워지고 확성기에서 한 녀가수의 힘찬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고있는것이 아닌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그것은 권원한이 부르는 노래였다. 그토록 해빛을 갈망하던 녀가수가 해방된 서울거리의 한복판에서 가슴속에 끓어넘치는 격정을 터쳐 목청껏 태양송가를 부르고있는것이였다.

가장 크나큰 긍지가 이 노래와 련결되여있었다.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이 노래와 련결되여있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대렬을 지어 지나가던 인민군병사들도 후더운 심장의 박동에 맞추어 노래를 따라불렀다.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권원한은 해방된 서울의 가는 곳마다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무대가 따로없었다. 강당에서도 부르고 큰 길가에서도 불렀다.

전쟁이 일어나자 리원녕은 정치공작대로 서울에 파견되였었는데 그때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서울시민들에게 노래를 보급하던 권원한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있다.

그때껏 권원한은 그처럼 열렬한 청중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이름있는 가수가 심장으로 부르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에 매혹되여 김장군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학생들은 책가방을 멘채로, 로동자들은 밥곽을 든채로 용약 인민군대에 탄원해나섰다고 한다.

이전 국립예술극장의 명가수였던 공훈배우 김점순은 중학졸업을 앞두고 서울해방을 맞았다.

어느날 리상철이라는 수학교원(그는 의용군으로 공화국에 들어와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박사로 있었다.)이 찾는다는 련락을 받고 가보니 교원은 어느곳에 가서 노래를 배워와 학생들에게 보급하라는 과업을 주는것이였다. 어려서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이 있던 김점순은 중학교에서도 써클이 제기되면 선참으로 뽑히군 하였었다.

김점순이 수학교원의 말대로 그곳을 찾아가보니 뜻밖에도 거기에 권원한이 있더라는것이였다.

전쟁전 김점순은 권원한이 주역을 맡았던 가극 《까르맹》에 합창성원으로 출연했던적이 있었다. 그때 학교 음악교원이 《까르맹》의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그를 소개하였던것이다. 합창성원들중에서 유일한 중학생이였던 그는 대뜸 권원한을 비롯한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권원한도 그러한 점순이를 알아보고 몹시 반가워하였다. 그는 김점순 등 찾아온 사람들에게 인쇄한 악보를 나누어주고나서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 《민주청년행진곡》을 비롯한 노래들을 배워주었다.

그후 김점순은 권원한을 따라 남조선음악가동맹에서 조직한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공연은 시공관에서 여러날동안 진행되였는데 공연을 마친 후 출연자들은 그길로 의용군에 탄원하였다. 곧 그들을 모체로 하여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이 조직되였다.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못하다. 아마 전쟁시기에 무어져 전쟁시기에 존재를 마쳤기때문일것이다.

협주단의 정치사업은 백인준이 맡아보았고 단장으로는 후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으로 있은 백민이 임명되였다. 그외에 협주단에는 부단장들과 작곡가, 지휘자, 연출가들이 있었고 각 부문별로 조장, 파트장들도 있었다. 권원한은 20여명으로 이루어진 녀성성악조를 책임지고 중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군복이라고는 난생처음으로 입어보는 예술인들인지라 모든것이 생소했다. 한번은 권원한이 대렬앞에서 《구보로 갓!》 해야 할것을 《답보로 갓!》 하고 구령을 치는 바람에 웃음보가 터졌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협주단예술인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자기들이 부르는 한곡한곡의 노래가 천만사람의 심장을 움직인다는 자부심을 안고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공연활동을 진행하였다.

권원한도 그 대오속에 서있었다. 얼마동안 서울에서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부대들을 위한 공연을 진행하고나서 예술인들은 전선과 해방지구들을 돌며 순회공연을 벌려나갔다. 당시에는 그러한 공연활동을 《전선위문공작》이라고 불렀다.

장편소설 《녀가수》에서는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하고있다.

《이때부터 협주단은 낮과 밤이 따로없는 위문활동을 벌리기 시작했다. 화물자동차로, 기차로, 도보로 전선과 후방을 돌며 멀리 전라북도의 중요항구 군산의 해안방어부대까지 나갈 때도 있었다. 때로는 바다가 모래불에서 모기와 싸우며 야숙을 하고 몇끼씩 굶기도 했다. … 전선이 멀어져가고 행군길도 늘어만 갔다. …》

9월 중순 맥아더의 대부대가 인천으로 밀려들었다. 조국앞에 엄혹한 시련이 닥쳐온것이다.

권원한은 소편대에 망라되여 인천방어전투에 참가한 전투원들을 고무해주었다.

전선의 형편은 시시각각으로 긴박해졌다. 후퇴대렬이 북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생사를 가늠하기 힘든 운명의 갈림길앞에서 매개인들은 자기가 갈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일시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따라나섰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렬에서 떨어져나갔다. 허나 권원한은 그리할수가 없었다.

해방된 서울거리에서 그리도 열렬하게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던 그였다. 장군님의 정치가 고마워 감격에 울고웃던 남녘겨레들의 모습을 뜨겁게 새겨안고있는 그였다. 자신의 인생도 겨레의 밝은 앞날도 오로지 위대하신 장군님의 품에 안길 때에만 꽃펴날수 있다는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기에 권원한은 태양의 품을 찾아 주저없이 북행길에 올랐다.

비단 그만이 아니였다. 후날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재사들로 자라난 김린욱, 리정언, 홍승학, 김영규, 박섭, 김수조 등 수많은 예술인들이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의 후퇴대렬에 속하여 북행길에 올랐다. 그들속에는 김점순이나 리규봉과 같이 이제 금방 중학문턱을 넘어선 애어린 처녀들도 있었다. 하늘땅이 뒤집힌대도 끝까지 김일성장군님을 따라가겠다는 하나된 지향이 나이도 각이하고 살아온 경력도 제나름인 그들을 한대오에 서게 하였던것이다.

간고한 행군이 시작되였다. 그들이 가야 할 앞길에는 넘어야 할 산도 많았고 건너야 할 강도 많았다. 얼마 못 가서 사람들이 지쳐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장편소설 《녀가수》의 한 대목을 또다시 펼쳐본다.

《끝없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밤이면 굶주림과 추위에 잠을 이룰수 없었다. 날을 따라 북풍이 몰아치고 황이 든 잎사귀들이 우수수 흩어져내렸다. 홑옷을 입고있는 사람들이여서 바람이 차질수록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였다. 고향이 멀어져갈수록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발을 힘들게 옮기군 하였다. …》

믿음이 없이는 끝까지 가낼수 없는 길이였다. 자신과 동지들에 대한, 승리에 대한 믿음을 목숨처럼 부여잡고 그들은 한걸음한걸음 북으로 행군해갔다.

휴식구령이 내리면 그 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아 배낭을 멘채로 곯아떨어지군 하였다. 행군도 힘겨웠지만 그에 못지 않게 견디기 힘들었던것이 배고픔이였다. 다행히 가을철이였던지라 벌판에 들어서면 김장배추며 무우들이 한창 자라고있어 밑둥이 실한 무우들을 골라 툭툭 털고는 이발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리고는 10분도 지나기 전에 여기저기서 아이구, 아이구 하며 배를 그러안고 돌아갔다. 텅 빈 속에 매운 무우를 먹었으니 상처에 고추가루를 뿌린것처럼 위가 쓰려났던것이다. 그렇게 몇번 혼나고난 다음부터 무우는 다치지 못하고 배추잎만 뜯어먹었다. 행군을 하면서 먹어야 했으므로 따로 고를새도 없이 배추잎을 한줌 뜯어서는 고갱이를 골라먹으며 대오를 따라가군 하였다.

간혹 폭격에 맞아죽은 가축들을 보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무리 허기진 몸들이였어도 소금이 없으니 한점도 먹을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생하며 행군하다가도 인민군군인들을 만나면 다섯명이고 여섯명이고 앉혀놓고 공연을 하군 하였다.

초기에 평양을 목적지로 삼고 떠나온 그들이였건만 평양이 강점되였다는 소식에 접하고는 다시금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정세가 날로 준엄해지고 갈길이 더욱 험해지자 대렬속에서는 동요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렬이 순천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군비행기들이 날아와 맹폭격을 퍼붓더니 이상하게도 하늘에서 흰 눈송이같은것들이 떨어져내리는것이였다. 자세히 눈여겨보니 미군락하산부대가 아닌가.

너무도 급작스레 들이닥친 정황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대렬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권원한을 비롯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의 행방을 찾아 울며 헤매다녔다.

그럴 때 연극조 조장이 권원한을 찾아와 본심을 털어놓았다. 재간만 있으면 예술이야 아무데서 해도 될텐데 고생을 사서 하지 말고 함께 남으로 나가자는것이였다.

권원한은 그러는 그를 억이 막혀 바라보았다.

한때 남조선영화계에서 인기를 끌던 그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인민군대의 혁혁한 전과에 현혹되여 협주단에 뛰여든 그였지만 워낙 정치적신조가 뚜렷치 못하고 승리에 대한 믿음이 허약했던지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가리시각에 처하자 마음이 흔들리고있었던것이다.

자기가 걷는 길에 대해 신념과 긍지를 갖지 못한 인간만큼 불행한 존재는 없을것이다. 지조도 량심도 없이 시세에 맞춰 저 하나의 안일만 쫓아다니는 삶이라면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부평초의 신세와 다를바가 뭐겠는가.

그가 되돌아가자고 애원하는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돈이 모든것을 좌지우지하는 사회, 예술도 돈에 팔리워야 하고 인간의 존엄마저도 돈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 황금만능의 사회가 아니던가. 과연 그런 곳에서 무슨 참다운 예술을 운운할수 있단 말인가.

결코 다시는 되풀이하고싶지 않은 생활이였다. 권원한은 단호히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남으로 가겠으면 너 혼자 가라. 난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겠다.》

그리고는 수습된 대렬과 함께 북으로의 행군을 계속했다.

북으로 가는 길에서 그들이 겪은 죽음의 고비는 그 얼마였던가.

묘향산줄기근처의 어느 강을 건늘 때였다. 폭격으로 인도교가 파괴되여 대오는 밤에 철교를 건너야 했다. 우에서는 미군폭격기들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걸어놓고 연방 폭탄을 퍼붓는데 밑에서는 사나운 물살이 와와 소용돌이치고있었다. 침목들을 밟고 건느자니 너무 급하고 아찔해서 녀성들은 어쩌는수 없이 철다리를 기여 건느기 시작했다. 폭음은 쉴새 없이 울부짖고 물기둥들은 몰방으로 솟구쳐올랐다. 여기저기서 적탄에 맞은 전우들이 강물속으로 떨어져내렸다.

대오가 철교를 다 건넜을 때는 날이 푸름푸름 밝아올 무렵이였다. 적기들은 여전히 교대로 날아들며 끊임없이 맹폭격을 들이대고있었다. 그들은 큰길에서 벗어나 다급히 산으로 올리붙었다. 푹푹 빠져드는 락엽을 헤치며 안전한 곳에 이르러 인원을 점검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희생된 사람들중에는 콘트라바스연주가 리경애도 있었다. 몸이 가늘고 키가 커서 《코스모스》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녀성이였는데 적기에서 날아오는 여러발의 기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적기들이 한바탕 폭격을 하고 물러가면 다른 적기들이 밀려올 때까지 몇분가량 동안이 있군 하였다. 그 틈을 타서 남자들이 산밑으로 내려가 희생된 동지들의 시신을 할수 있는껏 옮겨왔다. 그들은 조국의 이름없는 산기슭에 동지들을 묻었다. 적기들이 밀려오면 몸을 숨겼다가 적기들이 물러가면 다시 나가 흙을 덮어주고 하면서…

서울이 다시 해방되였을 때 백민이 거기에 나갔었는데 그때 리경애의 어머니가 딸에게 입히겠다고 솜저고리를 지어가지고 찾아왔더라는것이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차마 딸의 최후를 알려줄수가 없어 백민은 어머니가 지어온 솜저고리를 그대로 받아가지고 왔다고 한다.

신념과 의지의 힘으로 한걸음한걸음을 옮겨간 그들의 북행길이였다. 죽더라도 장군님의 품을 찾아가다가 죽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있었기에 그들은 사선을 뚫고 시련의 언덕을 넘어 드디여 12월초에 만포에 가닿을수 있었다.

그때 그들의 행색은 말이 아니였다. 떠날 때 입고있던 여름군복은 다 해지고 신발도 닳아떨어져서 새끼줄로 동여매고있는 사람들이 태반이였다. 하지만 간난신고를 이겨내고 끝끝내 장군님의 품에 안겼다는 긍지와 기쁨에 넘쳐 그들은 개선대오마냥 보무당당히 만포시내에 들어섰다고 한다.

만포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여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은 해산되고 권원한을 비롯한 대부분의 예술인들이 국립예술극장에 소환되였다.

1950년 12월 23일은 권원한의 한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로 새겨져있다. 그날 권원한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 축하공연에서 처음으로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노래를 불렀던것이다.

오늘에 와서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자강도 장강군 향하리에서 진행된 공연이였다.

긴장된 분위기속에 막이 열리는 순간 합창대가운데 서있던 권원한의 가슴은 후두둑 높뛰였다. 관람석에 앉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무대를 바라보고계시는것이 아닌가. 목이 꽉 메여왔다. 넘쳐흐르는 태양의 강렬한 빛에 온몸이 격정으로 떨려났다. 꿈결에도 뵙고싶던 그이를 우러르며 권원한은 가수들과 심장을 합쳐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목메여 불렀다.

서울해방의 환희에 겨워 서울의 한복판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엄혹했던 후퇴의 행군길에서 마음속으로 부르고 또 불러보던 노래였다. 소녀시절 자기를 덥혀주고 곱게 비쳐줄 밝은 해님을 그려보며 《오 나의 태양》을 부르던 그가 마침내 태양의 품에 안겨 태양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있으니 정녕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에 있으랴.

그것은 노래이기 전에 심장의 웨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터치는 열화같은 흠모의 환호성이였다.

그날의 공연에서 권원한은 독창도 하였다.

너무나 벅찬 흥분으로 하여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그자신도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노래가 끝나자 환히 웃으시며 선참으로 박수를 쳐주시는것이였다.

수령님께서는 곁에 있던 일군에게 노래를 잘한다고 하시며 처음 보는 가수인데 어데서 온 동무인가고 물으시였다.

남반부에서 온 가수인데 서울이 해방되였을 때 우리한테 왔다는 그 일군의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예술적인 재능이 있는 동무라고, 이런 배우는 어디서 찾으려고 하여도 찾기 힘들다고 하시면서 남반부에서 들어온 작가, 예술인들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그 말씀을 전달받으며 권원한은 북받치는 감격에 오열을 터치고야말았다.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겼다는 무한한 행복감이, 더없는 인생의 환희가 그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일렁이고있었다.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이듬해인 1951년 4월 30일 권원한은 또다시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된 5. 1절경축공연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날도 권원한은 독창을 하였는데 전선으로 떠나올 때 동구밖까지 바래주던 어머니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마친 그가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하려는데 인민군군관이 무대우로 올라와 꽃다발을 안겨주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시며 부관을 시켜 자신께서 받으셨던 꽃다발을 가져다주게 하시였다는것이 아닌가.

꿈같은 영광에 몸둘바를 몰라하며 권원한은 꽃다발을 가슴에 안은채 그이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다음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권원한을 비롯한 예술인들을 5. 1절경축연회장으로 불러주시였다.

그들이 연회장에 들어서자 수령님께서는 어서들 이리 와 앉으라고 하시면서 예술인들을 자신의 곁에 앉혀주시였다.

분에 넘치는 은정을 받아안고 권원한이 송구함을 금치 못해하자 그이께서는 제 집처럼 생각하고 편히 앉으라고 하시고는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있는가, 극장일은 재미있는가고 따뜻이 물어주시였다.

동무들이 서로 돕고 이끌어주니 극장일이 재미있다는 권원한의 대답을 들으시고 수령님께서는 그럼 됐다고 하시면서 손수 음식그릇들을 그의 앞으로 당겨놓아주시였다. 그러시다가 갓김치를 가리키시며 이 갓김치는 별맛이니 맛보라고 이르시고는 동무가 어제 《고향의 어머니》를 부를 때 자신께서도 몹시 감동되여 돌아가신 어머니생각을 했다고 추억깊이 말씀하시는것이였다.

갓김치를 시원하고 맛있게 잘 담그시던 어머님, 아들이 갓김치를 좋아한다고 늘 터밭에 갓을 많이 심고 가꾸시던 어머님을 회고하시면서 어머님이 담근 갓김치는 정말 별맛이였다고, 평생을 두고 그 맛을 잊지 못하겠다고 외우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권원한은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너무도 일찌기 사랑하는 혈육들을 잃으신 장군님이시였다. 눈보라만리, 혈전만리를 헤쳐오시며 장군님께서 겪으신 상실의 아픔은 그 얼마였으랴. 허나 그 모든 아픔과 괴로움을 조국과 겨레를 위한 크나큰 사명감으로 꿋꿋이 이겨가시는 그이의 로고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젖어드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연회가 끝난 다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다시금 권원한을 찾으시여 그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곁에 있던 한 일군에게 이 동무가 남반부에서 온 유명한 독창가수라고 소개하고나시여 당중앙위원회 제3차전원회의때 동무의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그때 노래를 아주 멋있게 불렀다고 다정히 추억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이미전부터 동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는데 좀처럼 시간을 낼수가 없었다고 하시며 녀가수의 지난날과 가정형편에 대하여 하나하나 물으시는것이였다.

권원한으로부터 13살에 성악콩클에 참가했던 일이며 서울에 가서 음악을 공부하고 무대생활을 하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주시던 수령님께서는 아버지가 적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였다는 사연을 아시고는 안색을 흐리시며 나라를 위해 잘 싸운 가정이라고,  동무도 애국의 심정을 안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평범한 가수의 가정을 두고 그토록 마음쓰시는 그이의 진정에 권원한은 눈앞이 흐려와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어버이수령님의 손길이 아니였다면 여직껏 생사조차 알길 없었을 그의 가족이였던것이다.

향하리에서의 공연이 있은 후 남반부에서 들어온 예술인들의 실태를 료해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권원한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이 후퇴의 다급한 정황속에서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는것을 아시고 즉시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그리하여 수령님의 명령을 받은 인민군소조가 남으로 나가게 되였다.

당시 권원한의 가족은 서울 중구 필동의 어느 한 집에 은거하고있었다. 경찰들이 서울, 인천지구에서 통일애국사업을 하고있는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었던것이다.

어느날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차리고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군견까지 끌고와 집안팎을 샅샅이 뒤지던 경찰들은 끝내 천정에 숨어있던 아버지를 찾아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북으로 가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그때 권원한의 다 자란 동생들은 의용군으로 나가고 집에는 어머니와 함께 나어린 네 동생들과 두살 난 권원한의 아들애가 남아있었다. 졸지에 가장을 빼앗기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있던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와닿을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인민군소조가 권원한의 집에 당도했던것이다. 인민군군인들을 따라 뒤문으로 빠져나온 가족들이 남산꼭대기에 올라가보니 북으로 들어갈 다른 가족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은 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울에서 몇십리정도 벗어났을 때 인민군군인들이 자기들은 계속 남으로 나가면서 다른 가족들을 찾아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들은 일행을 인솔할 책임자로 권원한의 녀동생인 16살난 권경한을 선정했다. 한 군인이 소형권총을 쥐여주자 그는 와뜰 놀라면서 자기는 그런 일을 못한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군인은 너밖에 맡길 사람이 없다고 타이르며 권총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되여 30여명의 행렬을 권경한이 이끌게 되였다.

그들이 인민군군인들과 헤여져 얼마쯤 걸어왔을 때 어디선가 방송에서 권씨성을 가진 쌍둥이형제가 북으로 가고있는데 신고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불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속에는 5살밖에 되지 않은 권원한의 쌍둥이남동생들도 끼여있었다. 아마 경찰은 얼굴이 똑같아 표가 나는 쌍둥이들을 발견하면 북으로 가는 행렬을 쉽게 잡을수 있을거라고 타산한것 같았다.

황급해진 어머니가 쌍둥이들더러 갈라져서 걷게 하였다. 별수없이 한 애는 어머니와 함께 가고 다른 애는 누이와 함께 10리쯤 떨어져서 논두렁길을 따라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게 갈라져서 걷다가 길이 합쳐지는데서 어머니를 만나면 떨어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그러다가는 다시 헤여져 걷군 하며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그들은 드디여 몇달후 평양에 있는 유가족소개위원회 집결소(지금의 3대혁명전시관자리에 있었다.)에 도착할수가 있었다.

조국의 운명이 판가름되는 준엄한 시절이였다. 누구에게나 가슴아픈 상처가 있었고 영영 만날수 없게 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한 때 한 가수의 마음속 괴로움까지 념려하시며 잃을번 한 혈육들을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은정이 고마워 권원한은 그이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녀가수에게 아들을 잘 키워야 하겠다고 자애깊게 당부하시였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의 후퇴과정에 대하여서도 상세히 알아보시였다.

권원한이 후퇴로정을 더듬어가며 말씀드리자 수령님께서는 장하다고, 그렇게 먼길을 걸어보기는 처음일거라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확신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보시오. 예술인들에게도 심장이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사람은 신념이 강하고 량심이 있어야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산에서 싸울 때 보니 평상시생활에서 변덕이 심하고 동지들과 한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인차 변절의 길로 굴러떨어졌다고 하시면서 그런 사람은 자기가 한번 먹은 마음을 돌려세웠기때문에 래일도 모레도 또 딴마음을 가질것이라고 근엄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이어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동무의 생활경력을 들어보니 곡절도 있고 고생도 겪어보았다고, 그야말로 소설감이라고 하시며 이제부터 로동당의 품속에서 부르고싶던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하고싶던 예술활동도 마음껏 하라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실로 그날에 하신 그이의 말씀은 녀가수의 심장을 한생토록 높뛰게 한 태양의 빛이였고 열이였다.

권원한은 1951년 7월 베를린에서 진행되는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게 되였다.

축전참가자명단에서 권원한의 이름을 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에게 그가 이번 축전에 가면 인기가 대단할것이라고 하시면서 국제무대에 처음 나가는것만큼 잘 돌봐주어야 하겠다고 이르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령님의 높은 신임을 받아안은 녀가수를 축하해주었다. 혁명시인 조기천도 그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수령님께서 권원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전해들을 때마다 조기천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달려오군 하였다. 열혈시인과 열혈가수는 서로의 세계에 공감하였다. 흥분하면 습관대로 땅바닥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가면서 자기가 목격한 인민군전사들의 투쟁모습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격정을 토로하는 조기천을 권원한도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하였다.

조기천은 축전장으로 떠나는 권원한을 바래주면서 싸우는 조선의 기상을 떨치고 돌아오라고 격려하였다. 권원한이 본 시인의 마지막모습이였다. 베를린으로 가는 렬차안에서 조기천이 희생되였다는 소식에 접하고 녀가수는 오래동안 슬픔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

베를린축전장은 영웅조선에서 온 사절들을 열광적으로 맞이하였다.

《싸우는 조선의 벗들을 환영한다!》

《영웅적조선인민 만세!》

가수생활을 시작해서 처음 서보는 외국의 공연무대였다. 하지만 권원한은 민족적자부심을 가슴 벅차도록 느끼며 긍지에 넘쳐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공연은 가는 곳마다에서 절찬을 받았고 권원한의 독창을 비롯한 우리 예술인들의 여러 종목이 축전에서 1등상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축전이 끝난 후 우리 예술단만은 따로 떨어져 이전 쏘련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공연을 더 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하여 예술단은 3개월간에 걸쳐 외국순회공연을 하게 되였다.

우리 예술단의 공연을 본 외국인들의 반향이 대단했다. 그중에서도 권원한의 독창은 류달리 각광을 받았는데 그가 노래를 부르면 관중들은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면서 연거퍼 재청을 요구하군 하였다. 어느 나라에선가 그가 《우리 님 영웅되셨네》를 불렀을 때 그 나라의 한 청년작가는 무대에까지 올라와 조선의 예술이 이처럼 아름다운줄 몰랐다, 참으로 훌륭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중국에서 공연할 때에는 주은래총리가 직접 권원한에게 축배잔을 권하며 조선의 녀가수가 중국노래를 잘 부르는데 정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후날 권원한은 자기의 일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두번 있었는데 한번은 후퇴할 때였고 다른 한번은 전쟁시기 8개 나라들을 돌며 순회공연을 할 때였다고 회상하군 하였다. 사실 그때 해당 나라에 도착하면 다음날부터 공연인데 그 나라 노래를 그 나라 말로 불러야 했으므로 밤새워 준비하지 않으면 공연을 보장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여 어지간히 피로도 겹쌓였지만 어버이수령님의 한없는 믿음속에 사는 권원한에게 있어서 그 모든것은 행복한 《고생》이기만 했다.

예술단이 외국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1951년 12월 12일 수령님께서는 친히 연회까지 마련해주시고 이번에 독창가수들의 수고가 많았다고 하시며 권원한에게 국제무대에 처음 나가서 이름을 떨쳤다고 축하해주시였다.

은혜로운 어버이품에 안겨 시작된 권원한의 새 삶은 그후 더욱 활짝 꽃펴났다.

전후 그는 수많은 무대들에서 독창가수로 활약하는 한편 민족가극들인 《콩쥐팥쥐》, 《견우직녀》, 《금란의 달》에서 주역을 맡아 형상하였으며 《이완 쑤사닌》, 《청년근위대》와 같은 외국가극들에도 출연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부르는 노래를 즐겨 듣군 하였다. 지어 그가 출연하는 날만 골라서 구경가는 관중들도 많았다고 한다.

권원한이 인민들의 사랑을 받을수록 누구보다도 기뻐하신분은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실 때마다 노래를 잘 부른다고, 예술은 이처럼 아름다워야 한다고 거듭 치하해주신 수령님께서는 1955년 7월 12일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할 권원한의 독창을 들으시고 노래에서는 권원한동무가 확실히 관록이 있다고 하시면서 민족가극도 많이 했고 다른 나라의 가극과 노래도 한것만큼 축전기간에 그를 내세워 우리 나라 민족예술을 널리 소개하는것이 좋겠다고 값높은 신임을 안겨주시였다.

1958년 10월 23일에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권원한이 부른 노래를 들으시고 권원한동무는 성악가수로 력사가 있다고, 자신께서는 지금도 그가 부르던 《어뢰정의 노래》와 《고향의 어머니》, 《젊은 병사의 노래》가 인상에 남아있다고 뜻깊게 추억하시며 그를 잘 평가하여주어야 하겠다고 은정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참으로 수령님의 그 말씀들은 조선의 가수로서 받아안을수 있는 최상의 영예였다.

권원한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도 오래전부터 알고계시는 가수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공연을 본적이 있는 한 녀성은 권원한의 생일 80돐 독창회에서 이렇게 회상하였다.

《〈직녀의 아리아〉를 들으니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권원한선생이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가극 〈금란의 달〉과 〈견우직녀〉, 〈콩쥐팥쥐〉를 여러번 보셨는데 1957년 9월에 저희들은 장군님을 모시고 민족가극 〈견우직녀〉를 관람하였습니다. 그때 권원한선생이 주인공을 했는데 장군님께서는 주역을 담당한 배우가 선녀처럼 인물도 곱고 노래도 잘 부르며 률동도 좋다고 치하하시고나서 그런데 가극의 내용과 형식이 발전하는 시대의 요구와 우리 인민의 사상감정을 잘 반영하지 못하고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때 벌써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시대의 요구와 우리 인민의 사상감정에 맞는 새로운 우리 식의 가극을 구상하고계셨던것이다.

권원한은 행복했다. 크나큰 어버이사랑은 권원한의 가슴속에 마를줄 모르는 삶의 희열과 창조의 열정을 안겨주었다.

그는 《예술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대생활에 전념했다. 늘 기량훈련으로 낮과 밤을 보냈고 평양은 물론이고 멀리 지방과 먼바다어로선단에까지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인간으로서, 예술인으로서의 권원한의 면모는 후비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여실히 엿볼수 있었다.

공훈배우 강증녀는 권원한에게서 성악을 배운 가수이다. 전후에 그는 수업을 받기 위해 퇴근하면 권원한의 집으로 종종 다니군 했다. 어떤 때는 권원한이 밥을 지을 때 들어서기도 했는데 웬만한 사람 같으면 싫은 내색을 하거나 갔다가 후에 오라고 하겠건만 그는 그럴줄을 몰랐다. 오히려 집안사람들에게 밥은 좀 있다가 먹자고 하고는 하던 일을 밀어놓고 수업에 달라붙군 하였다는것이다. 후비들중에 앓는 사람이 생기면 집에서 별식 한가지라도 내가지 못해 안달아하였고 후비들이 기량발표를 하는 날이면 본인이상으로 마음을 조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그는 예술을 사랑했고 후비들을 제 자식처럼 소중히 여겼다.

권원한은 전형적인 녀성이라 할만치 마음이 곱고 순진한 성격이였다. 평소의 목소리도 부드럽고 조용조용했다. 항상 소박했고 남을 내려다보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고와하고 새와 짐승들을 고와하는 정서적인 성격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때 교원생활을 해서인지 리지적이였고 사고가 정돈되여있었다. 평소에 말하는걸 들으면 영화를 보는것보다 더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는 생활에서 리기적이고 지조가 없는것, 방탕한것을 싫어했다. 일신상의 괴로움이나 가정의 불행을 예술활동에서 표현하는 일이 결코 없었고 늘쌍 생기도는 눈에 웃음을 담고있었다.

사람들은 권원한을 두고 평생 조선치마저고리만 입고 살아온 녀성이였다고 한결같이 추억한다. 남에 있을 때나 북에 있을 때나 늘 치마저고리차림새였고 양복을 입으면 오히려 불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조선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언제나 고왔다. 문예인들가운데 권원한과 문예봉이 그런 측면에서 유표했다.

좀처럼 양장을 하는 일이 없던 권원한은 베를린축전에 갈 때 단체복을 입어야 했기에 어쩔수 없이 양복을 입은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는 사람마다 권선생은 조선옷을 입어야 어울린다고, 양복입은 모습을 보니 어색하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있다.

어느덧 1970년대가 시작되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밑에 가극혁명의 장엄한 포성이 온 세상을 경탄시키며 울려퍼졌다.

우리 식의 절가화된 노래와 방창, 무용과 무대미술로 이루어진 《피바다》식혁명가극은 인류가극사에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전혀 새로운것이였다. 더우기 가극의 노래 한곡한곡은 얼마나 사람들의 심장을 틀어잡는 명곡중의 명곡들이였던가.

권원한은 온넋을 뒤흔드는 충격과 감동으로 하여 진정할수가 없었다.

생일 80돐 독창회무대에서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 종래의 가극들은 모두 먼 옛날의 전설이야기를 담은것들이였습니다. 아리아라든가 대화창이라든가 하는 형식도 모두 우리 인민의 미감에 맞지 않는것들이였습니다. 수령님의 남다른 사랑속에서 성장한 저는 그때 주인공역을 하면서도 이 땅은 수령님의 력사로 흐르고 이 강산엔 수령님의 사랑이 꽉 차있는데 수령을 노래한 가극은 왜 없을가, 언제면 수령님을 노래한 가극이 출현하여 마음껏 노래할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군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군님께서 그 소원을 풀어주셨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몸소 창작하신 가극의 내용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맑고 유순한 선률, 절가화된 노래들과 방창들… 정말 그 형식도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저는 장군님의 믿음으로 가극혁명의 성악강사로 참가했는데 장군님의 비범한 예지와 위대한 령도에 대하여 절감할수록 그이의 지도를 받으며 혁명가극에 출연하고싶은 마음만은 금할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벌써 저의 나이는 이미 60을 바라보고있었습니다. 그때처럼 세월이 야속했던적은 정말 없었습니다. …》

우리 나라에서 창조된 동서양의 가극들에 출연했던 로가수로서, 종래 가극의 제한성과 《피바다》식혁명가극의 우월성을 직접 체험한 력사의 증견자로서 터치는 진심의 고백이였다.

권원한은 그 간절한 마음을 주체예술의 후비들을 키워내는 사업에 고스란히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금강산의 노래》의 녀주인공들을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을 훌륭히 키워냈다. 총련을 포함한 해외동포예술인들속에도 그에게서 성악지도를 받은 가수들이 적지 않다.

노래를 떠나서는 살수 없는 그였기에 나이가 많아 성악강사를 그만두게 되였을 때에도 로병기동예술선동대에 망라되여 노래를 계속 불렀다.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지난날의 가수들은 무대를 떠나고 새 세대 가수들이 등장했다. 어느덧 권원한의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거의나 사라져가고있었다.

그러나 어버이는 자식을 망각하는 법이 없다.

2000년 11월 25일.

수십년세월이 흘렀어도 권원한을 잊지 않고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80돐생일상을 보내주시고 로가수의 독창회를 열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권원한은 뜨거운 눈물속에 그 사랑을 받아안았다.

노래와 함께 시작한 인생을 노래와 함께 총화하고싶은것은 가수라면 누구나가 품게 될 마지막소망일것이다. 권원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건만 그때 침상에 누워 병을 치료하던 몸인지라 누구에게도 자기의 소원을 내비치지 못하고있던 그였다.

그런데 그 옛날의 녀가수를 마음에 새기시고 생일상을 보내주신것만도 그지없이 고마운데 이렇듯 가슴속에 품고있던 마지막소망마저 헤아려주시고 독창회까지 마련해주셨으니 정녕 장군님의 은혜로움에 80고령의 로인인들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있으랴.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그 사랑에 떠받들려 권원한은 백발청춘의 모습으로 독창회무대에 나섰다.

친지들과 제자들, 동시대인들과 수많은 새 세대들이 그의 독창회를 보았다.

로가수는 걸어온 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사연많은 노래들을 부르고 또 불렀다. 민족비운의 그 시절을 《봉선화》로 추억하기도 했고 가렬했던 전화의 나날을 《승리하고 돌아오라》에 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전후의 가극무대에 울렸던 《달미의 아리아》와 《직녀의 아리아》도 불렀고 꿈결에도 부러워하던 혁명가극의 주인공이 되여 《혁명의 꽃씨앗을 뿌려간다네》를 긍지높이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그대로 노래와 함께 돌이켜보는 녀가수의 인생사이기도 했다.

관중들은 후더운 감동속에 그의 노래를 들었다. 로가수가 로당익장의 열정에 넘쳐 《휘파람》을 흥취나게 부르자 만장이 감탄하며 떠나갈듯 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실로 가슴뿌듯한 광경이였다.

권원한의 생일 80돐 독창회를 보면서 이전 쏘련의 인민배우이며 유명한 가극가수였던 아브호바의 생일 70돐 독창회를 떠올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 아브호바의 독창회가 열린 오페라극장은 삽시에 울음바다가 돼버렸다고 한다. 그렇듯 명성높던 녀가수에게서 꺼져가는 초불마냥 가냘픈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관중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수 없는 세월의 무정함에 다들 구슬퍼지는 마음을 누를수 없었던것이다.

만일 그들이 활기와 랑만에 넘쳐 노래하는 80나이의 권원한을 보았더라면 이 세상에 세월의 힘으로도 막을수 없는 위대한 사랑의 힘이 있다는것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을것이다.

그날의 독창회에서 권원한은 자기를 축하하러 달려나온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한생 가슴속깊이에 간직하였던 심정을 터쳐 노래를 불렀다.

 

품고있는 생각도 모두다 말을 하고

움터나는 희망도 터놓습니다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장군님을 믿고 삽니다

천년세월 흐른대도 김정일장군님만을

 

저물어가는 20세기를 바래우며 로가수가 인생의 총화로 하고싶던 고백이 그 노래에 담겨져있었다.

독창회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창회에 참가했던 4. 15문학창작단의 로작가들은 흥분된 심정을 눅잦힐수가 없어 공연장소에서 집까지 먼길을 차도 타지 않고 우정 걸어서 갔다고 한다. 권원한의 빛나는 한생을 통하여 위대한 태양의 빛발이 자기들의 한생에도 비쳐든다는 생각이 갈마들어서였을것이다.

권원한은 그후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안겨주신 청춘의 활력을 안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아침마다 어김없이 발성훈련을 하군 하였고 그의 집으로는 성악수업을 받으러 다니는 후비들의 발길이 그칠줄을 몰랐다.

86살이 되던 2006년 봄날 어느 새벽에 권원한은 조용히 생을 마쳤다.

돌아가기 전날 그가 누워있던 방에서는 불후의 고전적명작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을 나직이 불러보는 로가수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들려왔다고 한다.

소녀시절 자기를 비쳐줄 해님을 그리며 무대생활의 첫 발을 뗐던 녀가수는 림종의 시각 자기의 운명을 빛내여주고 보살펴준 인생의 태양을, 사랑의 태양을 목메여 부르며 간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생을 태양을 노래한 태양의 가수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만 위대한 어버이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되기에 권원한의 한생은 그가 부른 노래와 함께 인민의 추억속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

이전페지차례다음페지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