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부 록

 

현세의 구세주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 삼가 드립니다

 

꿈결에도 달려가 안기고싶은 자애로운 어버이장군님.

저는 암흑의 이남사회에서 50여년간 살다가 해빛이 그리워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76돐이 되던 1988년 4월 15일에 태양조국의 품에 안긴 의거자 리우갑입니다.

인류의 경사스러운 명절인 태양절을 맞이하고보니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탄생일을 태양절로 제정해주시고 우리들에게 태양민족으로서의 값높은 삶을 누리도록 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 최대의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싶은 마음에서 삼가 이 글을 올립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영원한 태양으로 높이 모시려는것은 인류공동의 간절한 소원인 동시에 남녘민중의 일치한 념원입니다.

제가 4월 15일에 의거입북을 결심한것도 남녘인민들의 마음을 담아 인류의 태양이시며 민족의 구세주이신 위대한 주석님께 삼가 만수축원의 인사를 올리고 력사적인 그날로부터 태양민족의 일원으로 값높은 삶을 누리고싶어서였습니다.

공화국에서는 사선을 넘어 외국의 어느 한 도시에 머무르고있던 저에게 해당 부문 일군들과 비행기까지 보내주어 뜻깊은 4월 15일에 안전하게 새 삶의 닻을 내리도록 하여주었습니다.

남조선에 있을 때 통일운동에 관여했다는 죄아닌 죄로 하여 원쑤들의 테로와 감시속에서 한시도 마음놓고 살아보지 못한 제가 그처럼 안기고싶던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에 안겼으니 그때 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온 우주를 받아안은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긴 뜻깊은 날에 새 삶을 받아안았다는 의미에서 1988년 4월 15일을 저의 생일로 하였습니다. 그러고보면 지금 제 나이가 10살인셈입니다.

태양조국의 품에서 살아온 지난 10년간 저는 50평생 이남사회에서 맛볼수 없었던 삶의 기쁨과 행복을 받아안았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저에게 새 가정을 이루도록 하여주시였고 남조선에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고급살림집에서 아들딸 남매를 거느리고 근심걱정없이 살도록 하여주시였습니다.

그리고 남조선에서 돈이 없어 대학 박사원을 다니지못한 저를 조선체육대학 박사원에 보내주시여 4년간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박사원을 졸업하도록 해주시고 저에게 부교수학직과 학사학위도 안겨주시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남조선에서 치료비가 없어 고치지 못한 저의 중병을 돈 한푼 내지 않고 대수술을 세번이나 받으면서 말끔히 고치도록 해주시였고 오늘은 건강한 몸으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으로 통일사업에 전념하도록 하여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의 품에 안겨 저는 정말 인생전환을 했습니다.

10년전 반공교육의 때묻은 몸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긴 제가 오늘은 이남의 억만장자도 부럽지 않은 마음의 부자, 수령을 알고 수령에게 충정다할줄 아는 참인간으로 자라날수 있은것은 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을 떠나서 생각조차 할수 없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 정말 고맙습니다.

장군님께서 돌려주시는 사랑과 배려가 크면 클수록 그에 충정으로 보답하는것은 수령의 전사, 제자의 마땅한 도리이며 자식된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통일은 우리 수령님의 유훈이자 경애하는 장군님의 철석의 의지라는것을 저는 잘 압니다.

지금 온 민족은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여 조국통일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믿고있습니다.

저는 서울 남산에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높이 모시고 위대한 장군님을 통일의 광장에 모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이 한몸을 다 바치겠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

장군님의 안녕과 건강은 우리의 행복이고 사회주의의 운명이며 21세기의 미래입니다.

저는 장군님께서 제국주의련합세력의 끊임없는 반공화국압살책동을 물리치시고 몇해째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강행군을 진두지휘하시면서 쪽잠과 줴기밥으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신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면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고 밥을 먹어도 모래를 삼키는것만 같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님께서만 계시면 물건이 좀 부족하고 하루 세끼 배불리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장군님께서만 계시면 우리는 잘살게 됩니다.

자본주의이남사회에서 살다가 공화국의 따뜻한 품에 안긴 사람들은 장군님 이끄시는 내 나라 사회주의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것을 실지체험을 통해 잘 알고있습니다.

장군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의거자들의 간절한 소망인 동시에 7천만겨레의 념원이고 인류의 부탁입니다.

뜻깊은 태양절에 어버이수령님의 영생을 기원하면서 저의 운명의 구세주이시며 인류의 태양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부디 옥체건강하시옵기를 삼가 축원합니다.

 

주체87(1998)년 4월 15일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올립니다

 

24-2

 

바로 이북에 민중복지의 락원이 있다

 

남조선 군산실업전문대학 부교수이며 전북해양소년련맹

부련맹장이였던 리우갑이 국내외기자들과 회견

 

교사를 하다가 독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자격을 받았으며 1966년에 대학 부교수자격(체육부)을 받게 되였다.

그해부터 군산수산전문대학과 군산실업전문대학에서 대학교수생활을 해왔으며 1976년에 전북수영련맹을 조직하고 전문리사와 그후 회장을 하였으며 1981년부터 전북해양소년련맹 부련맹장을 해왔다.

 

암야의 등대불을 찾아

 

리우갑은 자기의 의거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월북의 길을 택하게 된것은 오랜 기간을 두고 심사숙고하던 끝에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 내린 결단에 의한것이다.

내가 이남사회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것은 군산수산전문대학에 있을 때인 1973년경부터였다.

그때 대학에서는 학장이 부정경리를 하여 학교예산을 사취하고 탕진하기때문에 교수들이 청와대와 대검찰청, 문교부에 이것을 고발하는 진정서를 낸 일이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가지고 가게 되였다.

그런데 진정서를 접수한 문교부에서는 조사를 한다고 내려와서는 학장을 처벌한것이 아니라 내가 몇해전에 하루 결근한것을 트집잡아 직무태만이라는 구실을 붙여 나를 직위해제시키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억울하여 《정부소청심사위원회》에 항소했는데 거기서 판결한다는것도 결국 나의 제의를 거부하는 기각이였다.

이놈들은 학장으로부터 뢰물을 받아먹고 이렇게 했던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이남사회가 권세와 돈이 있으면 유죄도 무죄로 되고 돈이 없으면 정의가 짓밟히는 사회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나는 미국그리스도교선교사의 후원으로 설립된 사립대학인 군산실업전문대학으로 옮겼으나 정의가 짓밟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나는 학과목점수까지 깎아내리며 학생들에게 례배를 강요하는 대학당국의 처사에 격분하여 학생들과 같이 데모를 하였다.

그런데 대학당국과 문교부측에서는 나를 학생운동의 선동자로 몰면서 정보형사들을 시켜 나를 감시하는가 하면 한밤중에 테로를 하여 나의 갈비대를 분질러놓기까지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이남사회가 거꾸로 된 부정한 세상이라는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였다.

나 같은 사람이 살수 있는 사회를 모색하던 나는 이남당국자들이 나쁘다고만 하는 이북은 과연 어떤 사회인가 하는 호기심에서 1979년경부터 이북방송을 몰래 듣기 시작하였다.

평양방송을 들어보니 이남에서 선전하는것과는 달리 이북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고 정의가 구현된 사회라는 느낌이 들었다.

반공선전만 들어온 나로서 혹시나 하는 의심이 있었지만 정의를 위하다가 탄압당한 몸이였기때문에 이북에 정의가 살아있다는데 마음이 끌렸다.

내가 이북방송에서도 제일 열성을 가지고 청취한 시간은 주체사상강좌시간이였다. 인간중심의 철학적원리라든가 그것이 자주, 자립, 자위의 원칙으로 구현된다는 내용 같은것은 참말로 내 마음을 틀어잡았다.

내가 주체사상에 대하여 집약적인 리해를 가지게 된것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선생님의 유명한 저서인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해설하는 방송을 들은 때부터였다.

나에게 있어서 주체사상을 알게 된것은 풍랑속에 조난당한 범선이 암야의 등대불을 발견한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전환의 방향을 비쳐준 구원의 등대불이였다.

내가 주체사상강좌를 들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한것은 주체사상이 세계적판도에 확산보급되여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주체의 조국으로 세계의 각광을 받고있는 사실이였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주체사상연구소조가 조직되여있고 주체사상국제토론회들이 진행되고있는 소식에 접할 때마다 나는 이처럼 위대한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창시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주체사상을 더욱 발전풍부화시키시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선생님의 위대성에 매혹되였으며 날이 갈수록 그이들에 대한 존경과 흠모심이 높아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또한 이북방송을 통하여 위대하신 김일성주석께서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선생님께서 나라의 대소사를 직접 현지에 나가시여 정력적으로 지도하신다는 소식을 련이어 들으면서 이런 령도자들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는가고 감탄하군 하였다.

이북을 동경하는 이남민중 특히 이남의 지성인들과 청년학도들속에서 위대하신 김일성주석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선생님에 대한 흠모심이 날을 따라 두터워지는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주체사상을 따르는 이남의 민심은 막을수 없을것이라고 나는 확신하였다.

진정한 내 조국의 품에 안기려는 강렬한 충동은 나의 발길을 북으로 이끌어주었으며 그리하여 나는 모든것을 다 버리고 이남사회와 결별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3월말 서울을 떠나 제3국을 거쳐 영광스럽게도 민족최대의 명절인 4월 15일에 평양에 도착하게 되였다.

 

이북은 참다운 정의사회

 

민주조선사 기자; 당신은 방송을 통하여 북과 남이 판이한 세상이라는것을 깨달았다고 했는데 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답; 이남과 이북은 많은 점에서 차이난다.

내가 보건대 이북과 이남의 가장 큰 차이는 북에는 민족적자주권이 철저히 보장되고 민족의 존엄이 빛나고있지만 이남에서는 그것이 유린되고있는것이다.

이남에 있을 때 나는 북에는 외국군대도 없고 자체의 결심에 따라 민족의 리익에 맞게 정치를 한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실지로 내가 이북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눈에 띄는것이 주체, 자주, 자립, 자위 이런 글발들이였고 TV에서 노래와 춤을 보아도 그렇고 거리에 나가 무엇을 보아도 민족의 얼이 살아있고 민족의 정기가 차넘치고있는것이였다.

정말 이북이야말로 주체의 조국이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조선민족이 제일이라는 긍지와 자부가 살아넘치고있다는것을 날이 갈수록 느낄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며칠전에 만년대계의 기념비인 주체사상탑에 가보고 단번에 깨닫게 되였다.

우리 민족이 5천년의 력사를 자랑하고있지만 이처럼 민족적존엄과 영예가 빛난적이 있었는가.

그러나 남쪽은 반대이다.

이남은 한마디로 말하여 미국의 지배와 예속하에서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유린당하고 민족적수모와 멸시를 당하고있다.

이남의 《대통령》이나 《정부》, 《국회》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원래 이남에서는 자주정치를 할수가 없다.

이남에서의 실제적통치자는 미국이다.

지난해에 있은 《대통령》선거때만 보아도 《직접선거제》요, 선거경쟁이요 하는것은 다 미국이 사전에 짠 각본에 의한것이였다.

야당의 《대통령》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못한것도 미국의 분렬공작때문이였다.

군사적으로 이남당국자들은 《국군》의 통수권을 가지고있지 못하고있고 그것을 미군장성이 틀어쥐고있다.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이남의 경제는 철저히 외자경제이고 예속경제이다. 외국자본가들이 차관을 주지 않고 원료를 대주지 않으면 이남경제는 며칠 못가서 다 서버리고만다.

이처럼 이남에서 정치, 경제, 군사 등 사회의 모든 분야가 미국에 완전히 예속되다보니 사회전반에는 미국의 퇴페풍조가 만연되고있으며 민족적인 미풍량속이 점차 사라져가고있다.

다음으로 내가 북에 와보고 느낀 점은 남에서는 인간의 가치가 돈에 의해 규정되지만 북에서는 인간의 가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가에 따라 평가된다는 사실이다.

이남에서는 인격도 명예도 지위도 모든것이 돈에 의하여 좌우된다. 말하자면 돈만 뿌리면 불의가 정의로 되고 돈이 없으면 도적놈을 고발한 사람이 오히려 피고가 되는 형편이다.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양이 도리여 피고가 되여 형을 진것은 그 한 실례이다. 한마디로 이남사회는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량심도 정의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그런 사회이며 돈을 위해서 남을 죽이는것도 서슴지 않는 썩고 병든 사회이다.

그러나 이북은 이남에서와는 달리 민중모두가 자기 하나만 잘살아가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사회와 나라를 기본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회이다.

사회면에서 볼 때도 이북에서는 이남과는 판이하게 실업자를 찾아볼수 없고 세금을 모르며 누구나 무료교육, 무상치료의 혜택을 누리고있고 개인의 희망과 소질에 따라 예술활동에도 마음껏 참가하므로 사회의 전반적문화수준이 대단히 높다.

한마디로 이남은 부정의한 사회이고 이북은 참다운 정의사회이다.

 

급진전하는 반미감정

 

금성청년출판사 기자; 최근년간 남조선에서 반미기운이 급격히 높아가고있는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답; 해방후 이남을 강점한 미군은 지금까지 이남에서 판을 치고있다.

이와 반면에 이남민중의 반미의식화과정은 나날이 가속화되고있다.

미국의 교활한 신식민지통치수법으로 인하여 이남민중은 70년대전까지 미국을 《해방자》, 《원조자》, 《보호자》로 생각하고 《유신》통치반대에만 열중하면서 반미운동을 미세적으로, 부분적으로 진행해왔다.

70년대말까지도 박정희《정권》연장을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으로 반미투쟁을 소극적으로 벌려왔으나 미국이 민주화방해자, 통일방해자, 민족경제의 파괴자라는 인식 즉 미국이 침략자, 략탈자, 불행의 장본인이라는 확신을 이남민중이 가지게 되고 특히 광주참변의 배후조종자가 미국이라는것을 깨닫게 되면서 80년대에 들어와 반미투쟁이 적극적으로 진행되게 되였다.

로태우의 집권전후 상황을 보게 되면 이남에서 각계 민중이 자주화, 민주화의 구호를 더욱 높이 들고 통일론의를 광범위하게 벌리고있으며 특히 위대한 주체사상의 조류가 이남에 세차게 흐르고있음으로 하여 반미투쟁은 더 높은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힘차게 벌어지고있다고 말할수 있다.

미국놈들은 이남에서 좋은 땅들은 다 빼앗아 군사시설을 만들고 전쟁소동을 계속 벌리고있으며 온갖 추악한 비행으로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주고있다.

내가 살던 군산에 이남에서 제일 큰 미군비행장이 있다.

미군비행대가 매일같이 연습을 하고 군산앞바다의 무인도에 폭격연습을 하는통에 비행기소음과 폭음때문에 학교에서 수업을 못할 지경이고 건물이 움씰거리고 유리창이 깨져 막 심장병이 생길 정도이다.

미국놈들은 도덕도 례의도 없고 남의 나라에 와서 제멋대로 날치면서 입에 담지 못할 비행과 추행을 다 저지르고있다.

군산시만 보더라도 시내 영화동이 미군촌으로 되여 패륜패덕의 소굴로 화해버렸다. 눈뜨고 볼수 없는 미국놈들의 추잡하고 망측한 추행때문에 학생교육에 악영향을 미쳐 큰 문제점으로 되고있다.

우리 민족을 깔보고 모독하는 미군의 이러한 행위에 격분하지 않을 조선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죽기를 각오하고 반미구호를 웨치면서 이남민중이 계속 싸우고있는 한 미군은 물러가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것이다.

 

로태우《정권》은 단명《정권》

 

통일신보사 기자; 지금 남조선인민들이 로태우를 어떻게 보고있는가.

대답;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이남의 절대다수 국민들은 로태우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있다.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로태우가 38%의 지지표밖에 받지 못했다는것이 그것을 실증해주고있다.

이남의 절대다수 국민이 로태우를 반대하는 리유는 우선 그놈이 협잡과 모략의 주동분자이기때문이다.

로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박정희《정권》의 뒤를 잇기 위하여 12. 12숙군쿠데타주역을 담당하였으며 전두환이 먼저 《대통령》을 해먹고 자신이 그 다음 해먹을 심산으로 군부에 들어박혀 교활하고 악랄하게 책동하면서 전두환의 집권을 총칼로 뒤받침하였다.

로태우가 국민의 한결같은 반발에 부딪치고있는것은 특히 그놈이 광주사태의 주범이기때문이다.

광주학살에 투입할 공수특전대를 경상도출신으로 선발한것도 그리고 그들에게 환각제를 복용시켜 진압에 내몰아 무수한 국민을 살륙케 한것도 로태우였다.

광주사태당시 시민들이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총이 현재 3분의 1만이 회수되고 나머지 3분의 2는 기름종이에 포장되여 땅속에 묻혀있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광주사태의 진범인인 로태우를 끝까지 처단하려는 이남민중의 각오를 짐작할수 있으리라고 본다.

결국 광주사태는 지금도 계속되고있다고 말할수 있다.

이남민중이 로태우를 그토록 증오하는것은 또한 그놈이 《점잖은》 날강도이기때문이다.

전두환이 《대통령》자리에 올라앉자마자 로태우는 은밀히 선거운동준비를 시작하였다. 로태우는 국민의 인심을 사기 좋은 벼슬자리들을 차지하는 한편 선거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명성그룹을 리용하여 엄청난 수천억원을 가로채여 6년전부터 뿌리기 시작하였으며 그 규모를 점점 더 크게 하였다.

지금 전경환이가 부정축재로 사회적물의를 일으키고있지만 그것은 로태우가 먹은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로태우가 이남민중의 배척을 받고있는것은 다음으로 이놈이 양의 탈을 쓴 늑대이기때문이다.

로태우가 지금 《민주정책》이요, 《국민화합》이요 하면서 《미소전술》을 쓰지만 웃음뒤에 칼이라고 전두환을 찜쪄먹을 보다 교활하고 악독한 군부파쑈광이라는것을 이남민중은 다 알고있다.

이런 형편에서 로태우는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내나름대로 판단해본다면 로태우《정권》은 단명《정권》으로서 결코 오래 갈수 없다.

리우갑은 끝으로 이남민중에게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나는 나의 월북이 천만번 지당하였다는것을 확신성있게 말할수 있다.

이남당국자들의 북을 헐뜯는 온갖 선전은 완전히 거짓이며 날조이다. 이북의 모든것이 이남에서 듣던것과는 반대이다.

5. 1절날 나는 대성산유원지에 가서 휴식을 하면서 이북사회의 행복상을 보았다.

참으로 민중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내가 이남의 교수들과 학생들, 민중들에게 꼭 한마디 할것은 이북에 바로 이남민중이 그토록 바라고 원하는 민중중심의 인민적인 사회, 자유롭고 행복한 민중복지의 락원이 있다는것을 잘 알고 반공선전에 더는 절대로 속지 말며 우리 힘으로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더 힘차게 매진하자는것이다.

앞으로 나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해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성업에 매진할것을 다짐한다.

 

(《로동신문》 1988년 5월 5일부)

 

24-3

 

왜 련방제통일을 지지하는가

 

외세에 아부굴종하고 민족을 등진 남조선의 집권자들은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한 각계각층의 인민들의 의로운 투쟁을 가혹하게 탄압하고있다.

최근에만 하여도 그들은 범민련 남측본부가 련방제통일을 주장하고 그 실현을 위한 활동을 벌렸다고 하여 이 단체의 핵심성원 9명을 《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기소하는 파쑈적만행을 감행하였다.

파쑈교형리들의 이러한 탄압책동은 오늘 조선반도에서의 평화와 평화통일을 바라는 7천만 온 겨레의 커다란 분노와 격분을 자아내고있다.

범민련 남측본부 성원들을 비롯하여 련방제통일을 주장하는 남조선의 통일애국인사들은 절대로 탄압의 대상이 될수 없다.

남조선인민들이 오늘 련방제통일을 지지하면서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하고있는것은 지극히 정당한것이다.

그것은 우선 련방제방식이 조국통일을 실현하는데서 가장 믿음성있는 통일방도이기때문이다.

원래 신뢰와 믿음은 화해와 단합의 기초로 된다.

아무리 화해와 단합이 귀중하고 절실하다 하여도 신뢰와 믿음이 보장되지 않으면 이루어질수 없다.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전제로 하는 조국통일도 마찬가지이다.

신뢰가 보장되고 믿음이 있어야 해내외의 온 겨레가 통일애국의 길에 한사람같이 참여할수 있으며 거족적인 힘으로 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성취할수 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개 제도, 두개 정부에 기초한 련방제방식은 오늘 남조선인민들속에 조국통일에 대한 굳은 확신과 믿음을 주고있다.

남조선의 각계층 인민들은 련방제통일방안대로 민족적리념과 공통성을 앞세운다면 얼마든지 사상과 제도가 다른 사람들도 뭉칠수 있고 통일국가를 세울수 있다는것을 실지체험을 통하여 믿고있다.

그들은 1984년에 공화국에서 보내준 수재민구제물자를 직접 받아보면서 북남사이에 아무리 물리적장벽과 차이가 있다해도 혈연적뉴대와 정은 막을수 없다는것을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그 이후에 있은 북남통일축구경기와 범민족통일음악회, 북남유일팀탁구경기를 보는 과정에 다시한번 한피줄의 동족임을 확인하였다.

남조선인민들은 이러한 감격적인 계기들을 통하여 민족적리념과 공통성을 앞세운다면 북과 남에 있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도 얼마든지 련방제방식으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할수 있다는것을 체득하게 되였던것이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있기에 남녘의 겨레들은 파쑈와 매국이 살판치는 어려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련방제통일을 지지하면서 그 실현을 위한 애국활동을 광범히 전개해나가고있는것이다.

남조선인민들이 련방제통일을 지지하고있는것은 또한 그것이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서 매우 타당성있는 방식이기때문이다.

세인이 다 공인하는바와 같이 북과 남에는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존재하고있으며 호상 자기의 제도를 양보하려 하지 않고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하나의 제도에 의한 통일을 실현한다는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그것이 실현된다고 해도 언제 실현될지 예측할수 없는것이다.

만일 남조선당국자들이 떠드는대로 우리 나라의 객관적현실을 무시하고 《제도통일》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불피코 북남쌍방간에 대결과 충돌을 가져올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볼것은 우리 민족밖에 없다.

더구나 남조선에 외세의 핵무기가 조밀하게 배비되여있는 조건에서 만약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쉽사리 핵전쟁으로 번져질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무리 조국통일이 귀중하다 하여도 민족자멸을 초래할수 있는 이러한 길을 택할수 없다.

그러므로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길은 북과 남에 있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민족통일정부를 세우는 련방제방식밖에 없는것이다.

련방제통일방안은 그 내용으로 볼 때도 합리적인 타당성을 안고있다.

련방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북과 남의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대표들로 최고민족련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련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북과 남의 지역정부를 지도하며 련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하게 된다.

또한 이 제안은 련방국가의 통일정부와 지역정부의 지위를 옳게 규정하고있으며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민족공동의 리익과 북남 쌍방 및 각계각층의 리해관계에 맞게 처리해나갈수 있게 함으로써 민족앞에 지닌 사명과 임무를 훌륭히 실현할수 있게 하고있다.

이밖에도 련방제통일방안은 국가활동에서 자주성을 견지하고 자주적인 정치를 실시할데 대한 문제로부터 북과 남의 온갖 소유를 다같이 인정하고 보호하며 통일이전에 투자한 외국자본의 리권도 계속 보장할데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줌으로써 지난 시기 자기의 소유와 리권의 침해를 우려하여 조국통일을 방관시하거나 두려워하던 사람들까지 다 받아들일수 있게 하고있다.

때문에 오늘 남조선인민들은 《60, 70년대까지만 하여도 련방제통일방안은 최선의 통일방안이였지만 오늘날에는 최선의것이 아니라 유일한 통일방안》이라고 하면서 전폭적으로 지지하고있는것이다.

이처럼 련방제통일방안은 그 믿음성과 타당성으로 하여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남조선인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찬동을 받고있다.

김영삼괴뢰도당은 이러한 남녘의 민심을 외면하고 총칼탄압으로 인민들의 련방제통일지향을 막아보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련방제방식으로 조국을 기어이 통일하고 후대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줄것이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통일신보》 1996년 2월 3일부)

 

24-4

 

따사로운 해빛아래

 

뜻깊은 태양절인 올해 4월 15일은 민족의 대경사이고 온 세계가 환희로 들끓는 인류공동의 명절인 동시에 저에게 있어서는 이날이 공화국에 삶의 뿌리를 내린지 10돐이 되는 뜻깊은 날이였습니다.

이날을 맞으며 저는 태양민족의 한 성원으로 값높은 삶을 누리도록 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 감사를 드리고싶은 마음에서 삼가 편지를 올리였습니다.

지난 4월 8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나라일을 돌보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이름없는 한 의거자의 미흡한 편지까지 몸소 보아주시는 한없는 영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시절부터 피타는 고학과 독학으로 가파로운 인생길을 톺아오르며 대학교수까지 되여 자수성가했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제가 쉰두살에 극적인 인생전환을 하여 입북한것은 단 하루를 살아도 태양의 품속에서 인간답게 살아야 생의 가치와 보람을 누릴수 있다고 확신했기때문입니다. 하많은 날들중에 제가 어버이수령님의 탄생일인 4월 15일에 공화국의 품에 안긴것도 뜻깊은 이날에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나 인생을 다시 살고싶은 간절한 소원때문이였습니다. 저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이 간절한 소원을 이루었으며 사람을 가장 귀중히 여기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제도에서 보람찬 삶과 행복을 누리고있습니다.

제가 의거한 이듬해였습니다. 남조선에서 오래동안 대학교단에 서있으면서도 돈이 없어 박사원을 마치지 못한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였던 저는 평양체육대학 박사원에서 공부할것을 희망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저의 이 마지막소원마저 헤아려 박사원에 입학시켜주었고 4년동안 많은 장학금까지 받으며 마음껏 공부할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장학금을 받을 때마다 저는 남조선에서 학비가 없어 고학을 하던 때의 가슴아픈 일들이 떠올라 뜨거운 눈물을 남모르게 흘리군 하였습니다.

전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8남매중의 둘째아들로 태여난 저는 열두살때부터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을 했습니다. 30리 밖에 있는 학교에 다니며 신문배달을 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다 사나운 개에게 물리고 신문이 늦었다고 억울한 매를 맞은적도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이런 제가 반백의 나이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편안히 공부하게 되였으니 그 감회를 무슨 말로 표현할수 있겠습니까. 나라에서는 박사원을 졸업한 저에게 부교수학직과 학사학위를 안겨주었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저는 세차례에 걸쳐 입원치료를 받고 건강한 몸으로 다시 태여났습니다.

의거한 이듬해인 1989년에 기관지가 파렬되여 두달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1996년에는 김만유병원에 석달동안 입원하여 담낭적출수술을, 1997년에는 조선적십자종합병원에 두달동안 입원하여 신석제거수술을 받았습니다.

따지고보면 이 병들은 제가 남조선에서 상류층이라고 할수 있는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엄청난 수술비와 입원비를 감당할수 없어 신고를 하면서도 고칠수 없었던 오랜 질병들이였습니다.

저는 1986년에 시위투쟁에 떨쳐나선 대학생들을 후원하다가 전투경찰들의 폭행에 갈비대 두대가 부러져 45일동안 입원치료를 받은적이 있습니다. 그때 입원비가 로동자들의 20개월의 임금과 맞먹는 200여만원의 거금이였습니다. 저의 누님도 입원비를 마련할 길 없어 34살에 급성취장염으로 병원문턱에도 못가보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제가 공화국이 아니라 남조선에서 일곱달 남짓한 기간 병원에 입원하여 그런 대수술을 받았다면 그 입원비와 수술비만 해도 수천만원에 이르렀을것이며 모름지기 입원비와 수술비때문에 누님처럼 한많은 생을 마쳤을것입니다.

그런데 공화국에서는 나라에 아무것도 보탠것 없는 저에게서 돈 한푼 안 받고 오랜 질병을 말끔히 고쳐주었습니다.

우리 인민이 누리는 무상치료의 혜택을 생각할 때마다 아들 통일을 생각하군 합니다.

저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새 가정을 이루고 어린 아들과 딸을 키우는데 아들 통일은 30주 조산아로서 태여났을 때 몸무게가 1.3㎏밖에 안되였습니다.

늦게 본 자식이라 더없이 소중했지만 자식이 그 꼴이다보니 살지 못할것이라 생각했고 기적적으로 산다 해도 사람구실을 못할것이라고 단념하고있었습니다. 남조선에서라면 도저히 살릴 가망이 없는 아이였기때문입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통일은 최신식설비를 갖춘 평양산원의 보육기속에서 정상아로 자랐고 6개월 반동안 의사들과 간호원들의 지극한 정성과 간호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나 오늘은 씩씩하게 뛰놀고있습니다.

오늘 저는 건강한 몸으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며 보람찬 삶을 누리고있습니다.

참으로 행복과 보람찬 삶으로 이어진 지난 10년은 태양의 품을 찾아 인생의 새 출발을 한 10년전 내 삶의 선택이 백번 옳았다는것을 말해주고있습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통일신보》 1998년 5월 2일부)

 

24-5

 

[수기]

《내 나라의 선거날은 명절입니다》

 

나는 1988년 4월 15일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다섯번째로 대의원선거에 참가하여 땀이 나도록 실컷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나니 불쑥 눈물이 솟구쳐올랐습니다.

(어떻게 내가 춤을 다 추었나? 사람들이 망녕했다고 웃지 않았을가. 아무러면 어때. 추고싶으니 추었지.)

아마 자나깨나 존경해마지 않는, 내 삶의 은인이시며 우리 민족의 구세주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공화국의 최고수위에 높이 모시고 력사적인 김일성헌법을 세상에 선포한 후 처음으로 맞는 선거여서 이렇게 흥분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투표하고 나오는 사람마다 너도나도 뛰여드는 춤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성황을 이루어 선거장이 그대로 하나의 큰 춤판이 되여버렸습니다.

우리 공화국에서 선거날은 곧 명절입니다.

매번 선거때마다 내가 제일 감동한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되여 공화국에서는 선거날이 명절처럼 되고있는가. 어떻게 선거장이 이토록 즐거운 춤판으로 될수 있을가. …)

공화국의 품에 안겨 첫 선거에 참가했을 때만 이런 의문이 떠올랐는데 이제는 리해가 됩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습니다.

《… 수령님께서는 우리의 인민정권은 인민의 복무자이며 나라살림살이를 책임진 호주라고 하시였습니다.》

이번에 우리 선거분구에서는 대중의 한결같은 지지와 찬동속에 선출된 사람들을 시와 구역인민회의 대의원후보자로 등록하였습니다.

구역인민회의 대의원후보자로 등록된 만경대옷공장 초급당비서만 놓고보아도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인민들의 입는 문제를 추켜세우기 위해 밤낮을 가림없이 뛰고 또 뛰는 인민의 충복입니다. 바로 나자신과 나의 가정, 우리 인민반과 우리 구역안의 모든 사람들을 더 잘 입히려고 아글타글 애쓰는 이런 사람을 어찌 내가, 우리가, 인민이 지지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모두가 지지하는 사람, 위대한 장군님과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해 충실하게 일할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인민의 대표자로 선출하는 날이니 어찌 명절처럼 즐겁지 않고 춤과 노래가 절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불현듯 남쪽에서 겪은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느해인가 괴뢰국회의원선거때 나는 군산시선거위원회로부터 여당후보자당선을 위해 선거운동에 나서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나는 군산전문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전라북도수영련맹 회장 겸 남조선수영련맹 리사로 대학생들속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모으고있었던것 같습니다. 그자들에겐 교수 리우갑이보다 대학생들속에서의 이 영향력이 필요하였습니다. 이것을 리용하여 광범한 학생대중의 지지표를 획득하자는것이 그들의 진의도였습니다.

나는 벌써 그 여당후보의 인격적가치가 짐작되였습니다. 그가 사회와 인민에게 절실히 필요한 인간이라면 구태여 무엇때문에 이런 비렬한 놀음을 벌리겠습니까. 정의와 진리를 귀중히 여기는 대학생들에게 거짓과 불의를 설교하라고 강요하는 이런 인간쓰레기들이 내세운 후보가 설사 《국회》의원이 된다한들 진정으로 나라와 인민을 위해 일할수 있겠습니까. 교육자의 량심이 그것을 허용치 않았습니다. 지정된 선거유세장에 모인 대학생들앞에서 오히려 량심적인 투표를 선전한것으로 하여 나는 그후 안기부(당시) 지하실에서 졸경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그때 선거장안에서는 또 야당패와 여당패간에 후보자들을 놓고 서로 욕설과 비방중상이 오가다 못해 나중에는 밀치고 닥치는 몸싸움질이 벌어져 선거장이 온통 개싸움판, 란장판이 되여버리는 추태가 빚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남조선의 선거입니다.

선거때마다 이 꼴이니 매번 투표률을 보면 50%도 되기가 힘들어 발표하기조차 부끄러운것이 남조선의 선거결과입니다.

꼭뒤에 부은 물이 정갱이로 흐른다고 웃대가리정객들부터가 밥먹고 하는 일이란 밤낮 《국회》에서의 싸움질과 부정행위뿐이니 온 사회가 그 본을 따르는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로 남조선사회제도가 사람들모두를 싸움군으로, 사기협잡군으로 만들고있다고 해야 옳을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지긋지긋한 땅에서 50여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나는 오늘 공화국의 당당한 공민으로서 온 세상에 소리높이 자랑합니다.

전체 인민이 자유롭게 웃으며 사는 세상,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현세의 지상천국이 바로 여기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사회주의 내 조국이라고 말입니다.

위대한 장군님을 통일조국의 단상에 높이 모실 그날은 멀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나의 모든것을 다하겠습니다. 이번 선거에 참가하고나니 이런 결심이 더욱 새로와집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민주조선》 1999년 3월 10일부)

 

24-6

 

[수기]

장군님 모시여 우리 조국의 존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는 지구상에서 자존심이 특별히 강한 나라로 불리우고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나라, 이 말을 되새겨볼 때마다 저는 10여년전 제가 남조선의 군산전문대학 교수로 있을 때 제자들로부터 받았던 잊을수 없는 질문을 늘 생각하군 합니다.

1980년대말, 그때 남녘대학생들속에선 이북바로알기운동이 한창이였습니다. 어느날 제자들과 함께 이북바로알기를 위한 모임에 참가했던 저는 뜻밖에도 제가 가장 사랑하고있는 한 제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게 되였습니다.

《선생님은 현재 이북이 국제사회에서 무시할수 없는 존재로 인정받고있는 그 비결이 어데 있다고 보십니까?》

불의의 질문은 일순간 저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기대에 찬 눈동자들이 저를 주시하고있었지만 저는 선뜻 입을 열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껏 사회적정의와 량심을 주제로 한 모든 문제들에는 언제나 자기나름의 주장을 어려움없이 펴온 저였지만 공화국에 대한 견해에서만은 아직 확고한 주견이 서있지 못했기때문이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지독한 반공교육으로 인하여 당시 저뿐아니라 남조선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 새 세대들이 지구상에서 소위 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고있는 서유럽 개별적민족들의 성격과 취미, 풍속세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고있었어도 동족인 공화국의 인민들에 대해선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도 모르고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날 제자의 질문에 묵묵부답하고말았습니다.

그날 밤 저는 잠들지 못했습니다. 스승으로서 제자의 질문에 대답을 주지 못했을 때처럼 괴로운 때는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제자의 그 질문은 송곳처럼 귀속을 파고들며 저의 교육자적량심에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저는 평양방송에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화국출판물과 록화물… 그 무엇이든 공화국과 관련된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손에 넣었습니다.

그 과정에 공화국에 대해 참으로 많은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특히 공화국을 령도하고계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정치지도력이 저를 흥분시켰습니다.

저의 마음은 공화국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천출위인들의 탁월한 정치를 제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싶었습니다. 온 민족이, 온 세계가 우러르는 위인들의 정치하에서 단 하루라도 살아보고싶었습니다.

그 간절한 소원이 사정없이 저를 떠밀어 마침내 1988년 4월 15일 공화국에 대한 의거를 단행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어느덧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 저는 공화국의 당당한 공민으로서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진정 인간다운 삶을 누려왔습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습니다.

《민족의 위대성은 령토의 광대성이나 력사의 유구성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 민족을 이끄는 수령의 위대성에 있다.》

위인의 품속에서 살아온 13년은 정녕 제가 이 세상에 다시 태여나 성장해온 나날이였습니다. 이 나날 저는 어느 한순간도 사랑하는 제자의 그 질문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사회에 나가 그 어딘가에 몸담그고있을 제자들에게 늦게나마 그날에 주지 못한 스승의 대답으로서 이렇게 이야기하고싶습니다.

오늘 공화국이 국제무대에서 자기의 존엄을 당당히 떨치고있는 그 비결, 무시할수 없는 존재정도가 아니라 돌연 세계정치의 중심으로 인정받고있는 그 비결은 바로 민족적자존심을 생명처럼 지니신 탁월한 령도자를 수령으로 모시고 있기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실지 생활속에서 깨달았습니다.

1993년 3월 미제의 악랄한 《핵사찰》소동에 대처하여 온 나라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할데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명령이 하달되였을 때였습니다. 우리 장군님의 이 명령에 따라 그때 온 나라가 인민군대입대탄원으로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거기에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공화국정부성명까지 발표되자 세계는 죽가마 끓듯 하였습니다.

신문에서 이 소식을 읽는 순간 저는 솔직히 가슴이 선뜩했습니다.

사태가 어떻게 끝날것인가?!

저로서는 공화국에 의거해온 후 처음 겪는 일이였던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선 도대체 당황의 흔적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배심이, 확신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우리 장군님께서 결심하셨으니 무조건 이긴다는것이였습니다. 차츰 저의 가슴도 진정되였습니다.

다음순간 민족적리익의 사소한 침해도 허용치 않으시고 원쑤를 향해 단호히 맞받아나가시는 우리 장군님의 불굴의 그 자존심앞에 머리가 숙어졌습니다.

민족의 존엄을 건드리는자에 대해서는 상대가 누구이든 용서치 않으시는것, 이것이 바로 우리 장군님의 특출한 민족애였고 조국애였으며 그이의 자존심의 절정이라는것을 저는 알게 되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신 후 우리 공화국과 미국사이에 어마어마한 핵대결이 벌어졌을 때에도 저는 우리 장군님의 승리, 우리 사회주의의 승리를 믿어의심치 않았습니다.

(위대하신 우리 장군님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꺾지 못한다. 오히려 장군님의 자존심을 건드린자가 무사치 못할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되였습니다.

위협과 공갈, 악랄한 경제봉쇄로 우리 공화국을 압살하려던 미제는 민족의 존엄문제에선 한치의 양보도 모르시는 우리 장군님의 담력과 배짱에 눌리워 감히 우리를 어쩌지 못했습니다.

온 세계가 찬탄의 눈길을 우리 조선으로, 우리 장군님께로 모으며 엄지손가락을 내흔들 때 저는 승리한 나라 공민으로서의 터질듯 한 긍지속에서 목숨과도 같은 고귀한 진리를 심장으로 받아안았습니다.

(령도자의 자존심이자 곧 그 민족, 그 나라의 자존심이다. 세상에 없는 특출한 민족적자존심을 지니고계시는 존엄과 영예의 화신이신 우리 장군님, 인류력사에서 그 누구도 내놓지 못한 선군정치방식을 내놓으시고 그 어느 나라와도 견줄바 못되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내 나라를 세계제일의 나라로 이끌고 계시는 불세출의 위인을 모시여 내 조국은 오늘날 세계정치강국, 군사강국으로 그렇듯 위력떨치고있는것이구나!)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자존심은 핵무기와 같다고 하시며 높은 민족적자존심을 가질데 대하여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자존심은 핵무기와 같다. 이 얼마나 깊은 뜻이 담겨져있는 말씀이십니까. 이 한마디 말씀으로 위대한 장군님께선 지구상에서 《핵무기의 위력》을 떠들며 세계제패를 꿈꾸고있는 제국주의자들의 면상을 보기 좋게 후려갈기시였습니다. 약소민족의 설음을 론하며 의기소침해있는 세계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번쩍 정신차리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위인을 수령으로 모시고있기에 오늘 우리 나라로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류미래를 지향하는 세계 진보적인민들의 물결이 그칠새없이 찾아들고있습니다.

한때는 발전된 경제력을 뽐내며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건설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서방나라들 지어는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들까지도 우리 장군님의 한없이 고결한 민족적자존심앞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스스로 관계개선을 요청해오고있습니다.

위인의 품속에서 사는 우리 인민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 인민속에 저도 포함되여있다는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남녘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도 우리 장군님의 품에 안겼다면, 남녘의 전체 인민이 이처럼 위대하신 우리 장군님 정치하에서 산다면 정말이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날은 멀지 않았습니다. 21세기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통일의 광장에 높이 모시고 온 겨레가 장군님 품속에 안겨 세상에서 가장 존엄높은 인민으로 복락을 누릴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겨오기 위해 저도 몸과 마음 다 바쳐 통일사업에 이바지할 결심을 다시금 굳게 다지고있습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민주조선》 2001년 5월 17일부)

 

24-7

 

자주통일의 노래 《우리는 하나》를 높이 부르며

 

우리 인민 누구나가 다 그러하듯이 나도 민족자주통일시대의 명곡인 노래 《우리는 하나》를 즐겨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면 민족자주통일선언인 6. 15북남공동선언의 기치밑에 기어이 조국통일을 이룩하고야말 억센 의지를 안고 통일대행진을 과감히, 거족적으로 벌리는 온 겨레의 힘찬 모습이 눈에 보이는것만 같은 이름할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오랜 세월 갈라져 불행과 고통속에 눈물을 뿌리던 북과 남의 겨레가 통일만세를 목청껏 부르며 통일을 경축하는 격정의 광경이 눈앞에 우렷이 떠오르기도 한다. 끊어졌던 혈맥을 하나로 잇고 이 땅우에 주체의 강성국가를 보란듯이 일떠세우고 온 세상에 조선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더 높이 떨칠 우리 민족의 기상과 무비의 힘을 절감하는것은 또 얼마나 좋은가. 참으로 부를수록 부르고싶은 노래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민족은 하나이고 우리 조국도 하나입니다.》

노래 《우리는 하나》가 갓 불리워지던 지난 4월 어느날이였다.

하루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데 딸애가 동생과 함께 악보를 보며 손풍금을 열심히 타고있었다.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조용히 다가가보니 《로동신문》에 실린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악보였다.

나의 마음은 그 노래가사에 저절로 끌려들어갔다.

 

하나 민족도 하나 하나 피줄도 하나

하나 이 땅도 하나 둘이 되면 못살 하나

긴긴 세월 눈물로 아픈 상처 씻으며

통일의 환희가 파도쳐 설레이네

하나 우리는 하나 태양조선 우리는 하나

 

자식들의 노래를 따라부르니 가슴속에서 마냥 격정이 솟구쳤다.

《하나》라는 의미를 우리 민족의 운명이 걸려있는 조국통일 문제와 련관시켜 가슴속에 깊이깊이 새기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나날로 생각이 달려갔다.

나는 남조선에서 대학교수로 있다가 1988년 4월 15일에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여 가정을 이루고 복이란 복은 다 받아안았으며 그 이듬해 평양에서 진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크나큰 행운도 지니였다. 축전기간에 진행된 통일행사들에서 나와 나의 안해는 《조선은 하나다!》, 《조국통일!》구호를 목이 터질듯이 웨치고 또 웨쳤다. 그 당시 나의 안해는 임신중이였다. 그런즉 나의 첫 자식은 배속에서부터 《조선은 하나다!》, 《조국통일!》구호를 들은셈이다.

첫 아이는 딸이였다. 우리 부부는 그애의 이름을 하나된 조국을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라고 지었다. 1년이 지나 이번에는 아들을 보았는데 그애 이름도 역시 통일을 념원하는 마음에서 《통일》이라고 지었다. 《리하나》, 《리통일》, 우리 부부는 자식들의 이름을 썩 잘 지었다고 내심 자부하였었다.

자식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은정속에 세상에 부럼없이 무럭무럭 자라나고있다. 《하나》, 《통일》 하고 이름을 지어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언 딸 하나는 중학교 2학년생, 아들 통일이는 소학교 4학년생이 되였다.

그지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하나와 통일이가 자주통일의 명곡인 노래 《우리는 하나》를 손풍금에 맞춰 부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격정의 눈물을 지었다.

그러는 나에게 우리 하나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 노래 《우리는 하나》가 갓 나왔을 때였다. 우리 하나의 학급아이들은 《하나야! 네 이름과 같은 <우리는 하나>노래가 나왔어. 이 악보를 봐.》 하며 반겨주었다. 담임선생님은 《하나는 노래 <우리는 하나>를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잘 불러야 해요. 그래야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해드릴수 있어요.》라고 하면서 우리 하나를 학급의 합창지휘자로 내세워주었다. …

하나네 학교의 교직원, 학생들만이 그런것이 아니였다. 우리 동, 인민반사람들도 저저마다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이 집 딸이름과 같은 하나노래가 나왔다고, 하나네 집은 통일가정이라고, 노래 《우리는 하나》의 지휘는 응당 이 집 하나가 맡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 노래를 마치 우리 하나가 짓기라도 한것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나는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에게 당창건 55돐기념 전국우표전시회에서 1등으로 당선된 《나는 통일을 보았다》라는 나의 우표집을 보여주군 한다. 그 무엇을 자랑하자고 해서가 아니다. 조선민족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여야 살수 있다는 필연의 이 진리를 서로 다른 두 제도에서 살아본 나의 체험으로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원래 나는 광주사태직후부터 《나는 통일을 보았다》라는 제목으로 된 우표집을 만들기 시작했었다. 그후 공화국에 와서 1만 5 000매의 우표를 수집하여 남조선에서 쓰던 그 제목을 그대로 단 우표집을 만들어 전국우표전시회에 내놓았다. 나는 5개 장으로 된 이 우표집의 첫 장제목을 《조선은 하나다-하나의 민족》이라고 달았다. 그리고는 그아래에 1) 조상도 하나 2) 피줄도 하나 3) 언어도 하나 4) 강토도 하나 5) 문화도 하나 6) 기질도 하나-자주성과 애국심이라는 소제목을 설정하였다.

내가 남조선에서 우표수집을 시작했던것도, 공화국에 와서 1만 5 000매의 각종 우표를 수집하여 《나는 통일을 보았다》라는 제목의 우표집을 만들어 내놓은것도 다 하나된 조국을 꿈결에도 념원하는 겨레의 진정에 나의 마음을 따라세우기 위해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품에 안긴 후 나의 뇌리에 새겨진 하나의 조국에 대한 신념은 더더욱 굳어졌다. 심장속에 굳게 간직된 하나의 조국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있어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길수 있었고 민족자주통일위업수행을 위한 겨레의 진군에 발걸음을 같이할수 있었다고 나는 두고두고 자부하고있다.

노래 《우리는 하나》가사에 밝혀진바와 같이 우리 조선은 민족도 땅도 언어도 문화도 력사도 소원도 하나인 세상에서 찾아 보기 힘든 단일민족이며 둘로 갈라져서는 절대로 살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래 《우리는 하나》를 조선은 그 무엇으로도 가를수 없고 반드시 통일되여야 하며 또 통일될수 있다는 절대불변의 의지로 가슴 불태우는 우리 7천만겨레의 자주통일대행진곡이라고 명명하고싶다.

나는 지금도 올해 서울에서 진행된 8. 15민족통일대회 예술공연무대에서 한 북측예술단 소개자의 말을 되새겨보군 한다.

《여러분! 시간이 흐르고 오가는 정 깊어갈수록 우리는 불피코 하나임을 가슴사무치게 절감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이렇게 주고받는 인사법도 하나, 풍속도 하나, 언어도 하나, 피줄도 하나인 우리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겨레입니다.

지금처럼 이대로 둘이 되여서는 결코 살수 없는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

소개자의 이 말에 따라 전체 관중들이 일어서서 《조국은 하나다!》, 《조국통일!》구호를 힘차게 웨쳤고 통일을 절절히 바라는 하나의 마음, 하나의 음향, 하나의 목소리로 노래 《우리는 하나》를 우렁차게 합창하였다고 한다.

우리 가족들이 다 모여앉을 때면 의례히 우리 하나는 통일의 노래 《우리는 하나》를 선창하군 한다. 그러면 온 가족이 격정에 넘쳐 노래를 합창하군 한다.

 

하나 소원은 하나 하나 애국은 하나

하나 뭉치면 하나 둘 합치면 더 큰 하나

찬란한 태양이 삼천리를 비치여

통일의 아침이 누리에 밝아오네

하나 우리는 하나 태양조선 우리는 하나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를 받기에 우리 민족의 통일은 필연적 이며 확정적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둘 합치면 더 큰 하나가 되는 우리 조국, 하나된 조국에 대한 꺾을수 없는 신념과 의지를 안고 나는 통일의 노래 《우리는 하나》를 심장으로 부르고 또 부르며 통일애국의 한길을 걸으리라.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로동신문》 2002년 9월 27일부)

 

24-8

 

절세의 애국자들의 위인상에 매혹되여

 

지금으로부터 15년전인 1988년 4월 15일 북의 동포형제자매들이 환희속에서 민족최대의 명절을 뜻깊게 기념하고있던 그 시각에 나는 평양비행장에 착륙한 려객기의 승강대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격정에 넘쳐 저도 모르게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 만세!》, 《위대한 김정일장군님 만세!》를 목청껏 웨쳤다.

얼마나 그리웠으며 얼마나 안기고싶었던 품이였던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가 펴나가는 광폭정치는 만사람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는 숭고한 인간애의 정치이며 민족의 모든 계급, 계층을 나라와 민족의 공동위업을 위하여 굳게 묶어세우는 가장 폭넓은 애국애족의 정치입니다.》

뜻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행복이란 누구에게나 다 있을것이다. 하지만 내가 체험했던 행복은 그 누구도 맛볼수 없었던 류다른것이였다. 나는 력사에 아로새겨진 날인 4월 15일에 의거입북을 단행할 뜻을 기어이 성취하고야말았던것이다.

깊은 감회속에서 태양절을 맞으며 기억을 더듬어 지나온 일을 적어본다.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의 자작농가에서 8남매중 2남으로 태여난 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성인이 되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꿈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나의 향학열을 충족시켜주기에는 우리 집사정이 너무나도 가난하였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고학과 독학으로 사범학교졸업자격과 대학졸업자격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회의 현실은 끝없는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그 의문들은 마침내 걷잡을수 없는 분노로 이어졌다.

1960년대말부터 의거입북하기 직전까지 군산수산대학과 군산실업전문대학에서 체육과목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직에 교학과장직책을 겸임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과정은 문자그대로 나에게 있어서 사회현실에 대한 의문과 분노가 커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 두개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기간 나는 어용학장의 부정행위에 항의하는 투쟁에 앞장섰다가 직위해제를 당하고 경찰들에게서 집단폭행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으며 외아들이 반파쑈민주화투쟁에 참가했다가 경찰폭행으로 생명을 잃는 참변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땅을 치며 울분을 터뜨렸다.

도대체 사회적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썩은 사회가 과연 내 보금자리로 될수 있으며 재산이 있다고 참된 삶을 누릴수 있겠는가.

울분이 치솟아오를수록 자연히 눈길이 쏠리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다름아닌 공화국이였다.

이무렵에 나에게 충격을 주는 몇가지 일이 벌어졌다.

그 하나는 군산에서 어민으로 있었던 김씨성을 가진 나의 먼 친척 한분이 풍랑을 만나 북에 갔다와서 룡궁에 갔다온것처럼 마을사람들앞에서 《이북은 듣던바와는 다르네. 김일성주석님께서와 김정일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이북은 실은 우리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천당이야.》라는 말을 했다가 《보안법》에 걸려 종시 생명을 잃은 사건이였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일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련방제통일방안을 지지하는 기운이 인민들속에서 높아진데 당황해난 당국이 반공련맹을 내세워 벌린 강연놀음에서 《련방제를 했다가는 사상이 있고 조직이 있는쪽에 3년안에 먹히운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불에 덴 망아지처럼 날친 사실이였다.

나의 심장은 높뛰였다. 천당이 있는 곳이라면 구세주가 계신 곳일것이고 사상과 조직이 있는 곳이라면 우리 민족의 얼과 힘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나는 평양방송에 귀를 강구기 시작하였다.

평양방송이 전한 모든 소식이 다 나를 매혹시켰지만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에 대한 소식은 완전히 나의 넋을 사로잡았다.

가시는 곳마다에서 사회주의경제건설의 앞길을 휘황히 펼쳐주신 위대한 수령님.

수령님께서는 로동자, 농민들의 살림집을 찾으시고는 친히 쌀독도 열어보시고 부엌의 솥뚜껑까지 열어보시며 다심하게 보살펴주신다니 정녕 그이이시야말로 인민들이 진정으로 애타게 찾던 구세주이시였다.

남녘의 민심은 북으로 달리는 나의 심장에 더욱 채찍을 가하였다.

1984년 공화국정부와 인민들이 동포애의 정으로 큰물피해를 입은 남조선인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주었을 때의 일이였다.

내가 잘 아는 군산시내의 한 로인도 북에서 보내여온 구제미를 받았다. 그런데 로인은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북의 구제미를 자기 가정에서만 소비하지 않았다.

그는 구제미대상자가 아닌 온 시내바닥의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북의 동포형제자매들의 손길이 어린 구제미를 한줌씩 나누어주었다. 한줌의 이북쌀을 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그것을 집의 쌀과 골고루 섞어 한끼 밥을 지어 온 식구가 둘러 앉아 먹었다. 그때 그들의 기분은 그대로 잔치를 치르는 기분이였다.

1986년 7월말경 군산의 어느 한 곳에서 《김정일장군님은 자주정치의 거장》이라는 제목을 놓고 여러 대학 의식화단체가 진행했던 공동토론회 또한 나의 가슴에 격랑을 일으켰다.

그때 토론회에 참가했던 전남대학교의 한 교수는 이렇게 열변을 토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와 김정일장군님께서 민족의 주체성을 굳건히 지키시여 겨레의 운명이 담보되고있다. 열렬한 애국자이신 김정일장군님 계시여 민족의 존엄이 있고 민족의 찬란한 미래가 기약되여있다.》

토론회에 참가한 우리 대학의 한 교수는 이렇게 힘주어 말하였다.

《이북을 민족존엄의 양지로 만드신 김정일장군님의 광망은 남쪽에로 이어지고있다. 민족자주권의 회복을 위해 그이를 높이 받들어나가자.》

또한 전주대학교의 한 학생은 이렇게 호소하였다.

김정일장군님은 우리 민족의 운명이시고 미래이시다. 불세출의 위인이신 김정일장군님을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굳게 믿고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성전에 힘차게 나서자.》

민심의 이러한 흐름은 나로 하여금 남조선사회와 결별하고 인민의 구세주에게 안겨 통일위업에 한몸바칠 결의를 다지게 하였다.

나는 여러차례 입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88년 봄 나는 민족최대의 명절날인 4월 15일에 평양에 가닿기로 단단히 작정을 하고 3월 28일 서울을 떠났다.

나는 마침내 어버이수령님탄생 76돐이 되는 날인 1988년 4월 15일 낮 12시 30분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기였다. 이날은 정녕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나의 새 생활이 시작된 뜻깊은 날이였다.

그때로부터 어언 15년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그간 사랑의 품속에서 조선체육대학 박사원을 나오고 공화국의 부교수학직과 학위도 받았으며 새 가정도 이루어 두 남매를 둔 아버지로 되였다.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에 입당하는 영예도 지니였다.

그러면 오늘 내가 누리고있는 행복은 어떤 행복인가.

우리 집을 방문했던 미국의 CNN TV방송기자단에 말해주었던것처럼 그것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태양의 품속에서 누리는 행복이다. 진정 나의 생활은 자주적인간, 창조적인간으로서 사람이 누릴수 있는 최대의 행복인것이다.

나는 지금 매일, 매 시각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품속에서 삶을 누리는 자주적인간, 창조적인간으로서의 긍지를 가슴뿌듯이 느끼고있다.

나는 지난 15년간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품속에서 받아안은 크나큰 은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필승의 보검인 위대한 장군님의 선군혁명령도, 선군정치를 심장으로 받들고 6. 15공동선언실현에 모든 힘과 지혜를 다 바쳐나갈것이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로동신문》 2003년 4월 11일부)

 

24-9

 

광주참극의 주범-미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국은 남조선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교살하는 장본인이며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학살만행의 배후조종자입니다.》

광주인민봉기기념일을 맞으며 나는 24년전 피의 광주사태를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꼭 하고싶은 말이 있어 펜을 들었다.

광주인민봉기가 파쑈살인마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후인 1980년 5월 28일이였다.

당시 광주에서 멀지 않은 군산의 어느 한 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나는 광주시에서 계엄령이 해제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시에는 나의 친척들과 동료들, 제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되였는지 불안스러워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차로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나는 광주시내에 들어섰다.

시내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무덤과도 같은 괴괴한 정적에 온몸이 오싹해났다. 금남로와 충장로는 말할것도 없고 류덕동과 신승동, 룡몽동의 거리바닥에도 랑자한 피자욱들이 생생히 남아있었고 골목골목마다에서도 죽음의 망령이 떠도는듯 하였다. 광주시내에 들어서면서 내가 받은 첫 느낌은 언론들의 평그대로 《망령이 배회하는 죽음의 도시》였다.

(그들이 무사했을가? …)

친척친우들과 제자들의 운명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안고 나는 무작정 가까운 곳의 병원들부터 찾아헤맸다. 병원들은 말그대로 인산인해였고 수라장이였다.

피투성이된 부상자들이 병원마당을 온통 뒤덮었고 처절한 신음소리에 내장이 얼어붙는듯 하였다.

(하나의 전쟁을 치르었다한들 이보다야 더하겠는가.)

동료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공정대놈들의 흉탄에 허리를 부상당한채 병원에 입원해있던 나의 한 친척은 내 손을 잡고 《우갑이, 이게 사람의 세상이 맞아? 어떻게 하면 그놈들 씨를 말리나. 응?》 하고 울분을 터뜨리는것이였다.

광주의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던 한 대학동창생은 나를 보더니 울음을 터쳤다.

《내 아들을 죽였어. 하나밖에 없는 그앨 그 악귀들이 바줄로 발목을 묶어 트럭에 매단채 금남로에서 역전광장까지 질질 끌고 다녔어. …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죽였단 말이야.》

여기저기서 피를 토하는듯 한 목격자들의 절규가 가슴을 쳤다.

공정대가 나어린 수십명의 중학생들을 철퇴로 때려죽이고 만삭이 된 녀성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 내동댕이치고 처녀들의 젖가슴을 도려내죽이고 총포로 쏴죽이고 수류탄을 던져죽이고 땅크와 장갑차를 내몰아 숱한 사람들을 깔아죽이고…

피의 악몽이였다. 아비규환의 지옥에 서있는듯 정신조차 흐려졌다.

시체우를 지나가는 장갑차, 소름끼치는 땅크의 발동기소리, 무한궤도의 련결짬에 껴묻혀 돌아가는 갈기갈기 찢어진 살점들이 귀전에, 눈앞에 마구 육박해왔다. 말그대로 전장을 보는것처럼…

그래 공정대에게는 부모형제도, 친척친우도 없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야수적으로 죽일수 있단 말인가. 그래 그네들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았던가.

말을 들으면서도 알수 없었고 눈으로 보면서도 리해할수 없는 현실이였다.

그로부터 몇달후 전주사범학교시절의 후배였던 륙군본부의 한 정훈장교가 나에게 무서운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광주봉기진압은 하나부터 열까지 미국의 지령에 따라 진행된것이였습니다. 진압기간과 방법, 규모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체적인 지령이 비밀리에 미국으로부터 날아왔지요. 군부독재자들은 바로 그 지령에 따라 움직이였습니다. …》

비로소 나는 세상을 전률케 한 피비린내나는 참변의 전모를 알게 되였다. 바로 미국이, 남조선당국자들이 《해방자》, 《원조자》, 《친근한 우방》이라고 추어올리는 미국이 살륙의 참극을 연출해낸 막후조종자라는것이였다. 그것은 사실이였다.

광주에서 파쑈도당의 5. 17폭거를 규탄하는 대규모시위가 일어나자 거기에서 불안을 느낀 미국은 그것을 무력으로 진압할 지령을 떨구었다.

광주가 애국적봉기자들의 손에 장악된 다음날 백악관에서는 비상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리였다. 미국무장관, 국방장관, 대통령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중앙정보국장 등이 참가한 그 회의에서는 전두환일당에 대한 《측면지원방법》이 토의되였으며 여기에서 광주시민들을 《무쇠주먹으로 진압하라.》는 살인폭압 지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미국은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의 관하에 있던 땅크와 비행기, 장갑차와 대포 지어 미싸일까지 광주봉기진압에 투입하였으며 살륙무기로 무장한 공수특전단의 5개 려단과 여러개의 보병사단, 기갑부대와 항공대 등 방대한 무력을 군사불한당에게 넘겨주어 봉기자들에 대한 대살륙작전에로 내몰았다.

당시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이였던 윅캄은 《정치를 위해 무기가 필요한것이다. 광주에서 몇십만이 죽어도 해로울것이란 없다.》는 폭언을 늘어놓으며 전두환군사깡패에게 대형수송기 《C-130》을 제공해주었으며 남조선주재 미국대사는 《이러한 때 공수특전단 병사들의 용맹성을 키워야 한다. 반항자들이 넋을 잃고 주저앉게 하는 묘책은 역시 무자비한 진압이다.》라고 떠벌이면서 살인악당을 동족살륙에로 부추기였다.

이뿐이 아니다. 당시 남조선에 둥지를 틀고있던 4만여명의 미제침략군부대들에는 《경계태세 제3호》가 내려지고 남조선주변 해역에는 항공모함 《코랄씨》호를 축으로 하여 미싸일구축함 2척, 순양함, 보급함 등 7척으로 구성된 기동타격무력과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급파되였다. 하늘에서는 공중경보통제기까지 떠돌면서 위협과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렇게 되여 광주의 류혈참극이 빚어졌다.

광주사태후 미국은 《인권유린행위가 있다고 해도 미국은 남조선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 《남조선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인권정책과 배치되는것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살인마들의 죄악을 두둔해나섰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의 함성으로 들끓던 광주를 《피의 목욕탕》으로 만든 저들의 범죄적정체를 가리우기 위한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갈증에 시달리다가 꿀꺽꿀꺽 물을 들이킨 사람이 갈증을 던 후에야 비로소 그 물에 독이 들었음을 알게 되였을 때의 심정을 생각해보자.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된 그때의 나의 심정이 그러하였다.

자주없는 이 땅에 민주를, 통일을 불러오려 했던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미국이야말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고있는 우리 민족의 최대의 원쑤이다.

미국을 믿는것은 죽음이다!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 미국과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

분노한 나의 가슴속에서는 이런 웨침이 끝없이 터져나왔다. 이것은 결코 나 하나만의 심정이 아니였다. 광주인민봉기를 계기로 하여 남조선인민들의 대미의식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은 우방이 아니다. 양키는 나가라!》

《광주학살을 조종한 미국을 몰아내자!》

광주인민봉기후 남조선인민들은 이런 투쟁구호를 웨치며 반미자주화, 반파쑈민주화투쟁에 과감히 떨쳐나서게 되였다.

오늘 남조선인민들과 온 겨레는 24년전 5. 18광주인민봉기의 교훈을 뼈아프게 되새기며 미국이야말로 민족공동의 철천지원쑤라는것을 다시금 절감하고있다.

오늘도 미제는 남조선에서 끊임없는 전쟁책동과 살륙만행을 일삼으면서 삼천리강토를 《피의 목욕탕》으로 만들려고 날뛰고있다.

나는 북과 남, 해외의 7천만 온 겨레가 미국의 악랄한 전쟁책동을 짓부시고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를 실천으로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 더욱 힘차게, 과감히 떨쳐나서자는것을 호소하고싶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로동신문》 2003년 5월 18일부)

 

24-10

 

친어버이의 사랑에 목메여 부른 심장의 노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김정일동지는 그가 지니고있는 령도력과 풍모, 그가 발휘한 충실성과 헌신성, 그가 이룩한 업적으로 하여 인민의 지도자로서 인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으며 높은 권위를 지니고있습니다.》

올해 들어 내 나이도 한생의 희로애락을 다 맛보게 된다고 하는 일흔을 가까이 하고있다. 흘러온 내 인생의 갈피마다에는 류다른 체험도, 잊을수 없는 추억도 많다.

백두광명성이 높이 솟아오른 민족대경사의 2월명절을 맞고보니 겨레와 인류를 위해 선군의 길을 억세게 헤쳐가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의 정에 눈시울 달아오름과 함께 나에게 인생전환의 디딤돌로 되였던 20여년전의 일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사람이 한생을 사느라면 종종 류다른 충격을 체험하는 계기가 있게 되고 또 그러한 계기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1984년 가을 어느날 군산의 어느 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내가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마을의 좌상인 백로인이랑 여러 어른들이 우리 집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가는 말을 들어보니 나를 친형처럼 따르는 명진이가 해변가에서 동네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보안법》에 위반되는것이여서 경찰에서 잡아갔다는것이였다.

그길로 나는 백사불구하고 경찰서에 찾아가 명진이를 데려내왔다.

경찰서를 나선 나는 명진이를 위로해줄양으로 그에게 집안형편이랑 물어보면서 두루 말을 붙였다. 그의 집에는 윁남전쟁에 끌려갔다가 페인이 되여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린 녀동생뿐이였다. 이태전인가 돈을 벌겠다고 집을 나간 어머니는 종무소식이였다.

《어머니소식은 아직 모르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진이는 《왔어요. 어머니랑 같이 이북쌀로 밥도 지어먹구요.》라고 하면서 어머니와 온 집안이 공화국에서 보내온 구호미를 안고 울었다는것이였다.

다 알다싶이 그때 공화국에서는 수재로 고통받는 남녘겨레들을 위해 구호미를 비롯한 막대한 구호물자를 보내주어 세상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었다. 그 구호미덕에 돈벌이를 갔던 어머니가 돌아오고 온 가족이 모여 공화국의 구호미를 붙안고 울었다는 그의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84년 여름 남조선에 들이닥쳤던 수재는 례년에 없는것이였다. 련일 무더기비가 멎을줄 몰랐고 범람하는 강물은 도로, 다리를 끊어버리고 숱한 사람들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등 이남땅의 모든것을 페허로 만들어버렸다. 수재는 날을 따라 더욱 확대되였으나 당국은 구제조치는 취하지 않고 집과 가산을 잃고 기아와 고통에 우는 수재민들더러 《자조정신》을 발휘하라는따위의 나발만을 줴쳤다.

어떤 곳에서는 100명나마 되는 수재민들에게 담요 5장을 던져주고는 《제비를 뽑아 나누어가지라.》고 하여 수재민들의 격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오죽하면 항간에서 수재를 두고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고 하였겠는가. 군산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악몽의 지옥에서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구세주의 해빛이 비쳐왔다. 불행에 우는 동포들의 아픔을 가셔주려고 공화국에서 막대한 식량과 천, 의약품과 세멘트를 비롯한 구호물자들을 보내주었던것이다. 그때 동네사람들은 구호물자를 제일먼저 받은 백로인의 집에 모여와 공화국에서 보내온 하얀 쌀을 움켜쥐고 격정의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백로인은 감격에 목메여 우는 사람들에게 《이북에는 김일성주석님의 대를 이으신 젊으신 령도자가 계신다우. 이 쌀도 그이께서 이남당국의 훼방을 물리치는 조치를 취하신 덕으로 우리에게 차례지게 된것이라고들 하더군.》라고 조용히 말하는것이였다.

후날 안데 의하면 그때 공화국에서도 련일 무더기비가 내렸는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비가 자꾸 내리니 남조선인민들이 걱정된다고, 이렇게 비가 계속 오면 남조선에 영낙없이 큰물이 나고 인민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심려하시였다. 남조선의 피해소식을 접하시였을 때에는 못내 가슴아프시여 아까울것이 없다, 우리가 저축해두었던것을 남조선동포들을 구제하는데 쓰지 않고 어디에 쓰겠는가, 뭐니뭐니해도 민족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수해를 입은 남조선인민들에게 세멘트와 쌀, 천, 의약품이 다 차례지게 구제대책안을 통이 크게 세우도록 세심히 보살피시고 몸소 그 사업을 진두에서 지휘하시였다고 한다.

그때에는 가슴뜨거운 그 사연을 미처 다 몰랐어도 사람못살 세상에 인간사랑, 겨레사랑의 빛발을 고이 안고 온 희디흰 쌀알들이 너무도 소중하고 알알이 그 쌀알에 어린 동포애와 혈육의 정이 사무치게 안겨와 사람마다 감격의 눈물로 두볼을 적시였다. 대국이라고 거드름 피우는 《우방》들도 고작 몇푼의 돈을 던져주었던 그때 크지도 않은 공화국이 세상을 깜짝 놀래울 엄청난 량의 구호물자들을, 그것도 동포들의 아픔을 하루라도 덜어주자고 단 며칠사이에 마련하여 보내준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겠는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 어려울수록 제 민족이 제일이다.

김정일지도자님이시야말로 온 겨레가 운명을 맡기고 따를 친어버이이시라는것이 구호물자를 받아안은 남녘겨레의 가슴마다에 세차게 파고드는 한결같은 생각이였다.

모름지기 명진의 집식구들도 뜨거운 혈육의 정, 어버이사랑에 목메여 눈물로 온밤을 지새웠을것이다.

나는 어쩐지 명진이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싶어 해방동 월명산공원으로 갔다. 마음속 격정을 터놓고싶었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나누고싶었던것이다. 그런데 명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것이였다.

 

시내물 굽이굽이 어데로 가나

넓고넓은 저 바다 품으로 가네

내 마음 훨훨 어데로 가나

구름너머 그리운 장군별님께

 

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명진이가 어떻게 이 노래를…

공화국에서 창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노래는 이북바로알기운동을 통하여 운동권에서 은밀하게 퍼지고있었다. 내가 놀란것은 그때문만이 아니였다. 명진이가 잡혀갔던것이 이 노래때문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어린 마음에 민족의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이 움터나고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놀라게 하였던것이다.

명진은 그 노래를 부른것으로 하여 이태만에 만난 어머니와 하루밤도 변변히 지내보지 못하고 경찰서에 끌려갔던것이다. 이제 돌아오는 길로 또 그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 큰 봉변을 당할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것을 모를리 없는 명진이였지만 세상이 다 들으라는듯이 큰 소리로 부르고 또 불렀다. 심장의 노래는 철쇄로도 묶을수 없다는 말의 진가를 나는 어린 명진이의 절절한 얼굴표정을 통하여 새삼스럽게 느끼였다.

그렇다. 그것은 심장의 노래였다. 가정의 운명을 지켜주고 불행을 가셔준 따사로운 어버이품을 사무치게 그리며 더운 피로 뿜어내는 심장의 노래였다. 장군별님의 손길따라 통일애국의 길에 한몸바치려는 남녘겨레모두의 심장의 노래, 태양을 따르는 충정의 노래였다. 나도 따라불렀다. 명진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를 합치면서 나는 인생의 새 출발이 시작됨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

그때로부터 스무해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오늘 북과 남의 우리 겨레는 21세기의 위대한 태양이시며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손길아래 펼쳐지는 민족자주통일의 새시대, 6. 15통일시대에 살며 투쟁하고있다.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으로 삼천리강토가 끓어번지는 오늘 남녘땅 그 어디에 가나 위인칭송의 열풍, 태양을 받들어 자주통일의 그날을 앞당기려는 신념의 열풍이 세차게 휘몰아치고있다. 그 거세찬 흐름과 더불어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통일의 단상에 높이 모시고 태양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빛내여갈 남녘겨레의 신념과 의지를 담아 장군님노래, 태양의 노래는 더욱 높이 울려퍼지고있다.

 

새들은 저 산너머 어데로 가나

보금자리 정다운 품으로 가네

내 마음 훨훨 어데로 가나

구름너머 그리운 장군별님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로동신문》 2005년 2월 25일부)

 

24-11

 

통일에 대한 희망을 북돋아주는 6. 15열풍

 

얼마전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크나큰 환희와 격정속에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발표 5돐을 성대히 기념하였다.

유서깊은 평양에서 북과 남의 당국대표들까지 참가하여 진행된 이번 통일행사에서 온 겨레는 6월 15일을 우리 민족끼리의 날로 정하고 공동선언의 기치밑에 온 민족이 대단결을 이룩하고 통일을 앞당기려는 굳센 의지를 담아 민족통일선언을 채택하였다.

서울에서 6. 15공동선언발표 5주년기념 걷기축전이 진행되고 천안종합운동장 앞광장에서 6. 15㎞시민통일달리기대회를 한것을 비롯하여 남조선에서도 6. 15공동선언의 기치따라 통일의 아침을 맞이해가려는 열망이 비낀 다채로운 축전과 행사들이 진행되였다.

오늘 6. 15공동선언은 북과 남, 해외 온 겨레가 한결같이 믿고 따르는 희망의 표대, 신념의 기둥, 투쟁의 기치로 되고있다.

공동선언을 새겨안은 7천만의 가슴마다에 새로운 신심과 열정이 끓어번지고 북남삼천리에 6. 15의 열풍이 거세차게 휘몰아치고있다.

얼마나 바라고바라던 환희의 시대이고 얼마나 험난한 피의 언덕을 넘고 헤치며 맞이한 오늘의 자주통일시대인가.

지금도 나의 눈앞에는 금남로와 충장로의 골목골목들에 랑자하던 사랑하는 제자들과 동료들의 피자욱이 생생하다. 자주, 민주, 통일을 부르며 쓰러진 그들의 붉은 피자욱이.

파쑈의 철퇴에 선지피를 뿌리며 통일을 부르던 혈육들의 부르짖음도 귀에 쟁쟁하다.

겨레가 피눈물을 뿌리며 바라고바라던 그 통일이 오늘 6. 15의 열풍에 실려 눈앞에 성큼 다가서고있다.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 그것은 어찌하여 사람들의 심장을 그렇듯 뜨겁게 울리며 자주통일의 열풍, 6. 15의 열풍을 세차게 일으켜주는것인가.

추연한 사색의 물결우에 숭엄히 떠오르는것은 민족의 통일운동사에 신기한 전설을 아로새긴 판문점이다.

감회도 뜨거운 1996년!

온 나라가 민족대국상의 비운을 안고 피눈물의 언덕을 넘으며 힘겨운 고난의 행군을 한창 하고있던 그해의 11월 24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전선시찰의 험준한 로정을 판문점으로 옮기시였다.

초긴장상태에서 적아가 맞서있고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에도 철화를 내뿜는다는 판문점에 결연히 나서신 위대한 장군님, 장군님의 안녕을 바라는 겨레의 마음인양 이날 판문점에는 흰 안개가 짙게도 내리덮이였다.

전설의 흰 안개발속에서 자주통일시대의 태동을 예고하는 백두령장의 위대한 선언이 빛발쳤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날 지금 조국통일의 앞길에 난관이 가로놓여있으나 우리 대에 통일은 이룩되여야 한다, 빨찌산의 아들인 나는 수령님의 뒤를 이어 민족의 통일위업을 반드시 성취할것이라고 엄숙히 선언하시였다.

치욕스러운 민족분렬의 력사를 하루빨리 불사를 백두령장의 기상이 어렸는가 안개서린 판문점은 제국주의의 아성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무서운 진원지로 되였다.

뒤늦게야 위대한 장군님의 판문점현지시찰소식에 접한 미국과 남조선반통일세력은 세상을 들었다놓는 뢰성벽력같은 그 사실에 기절초풍하였다고 한다.

그날 판문점에서 울린 뢰성의 메아리와도 같이 새 천년기의 기슭에서 6. 15공동선언이 고고성을 울렸고 무적의 선군우산밑에 6. 15시대의 약동하는 현실도 활짝 펼쳐졌다. 온 강토에 반미민족자주의 열풍, 민족화해와 단합의 열풍이 휘몰아쳤다. 이 강산에 끓어번지는 6. 15의 열풍, 그것은 정녕 필승의 선군정치가 안아온 선군열풍이라 해야 할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총대중시사상을 틀어쥐고 선군정치를 하여 이 땅우에 강성대국을 건설하고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할것입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선군정치를 애국의 보검으로 틀어쥐시고 강성국가도 건설하시고 자주통일위업도 실현하실것을 구상하고계신다. 선군이자 자주이고 통일이며 애국이다.

비운과 수난으로 얼룩진 지난 세기초 보총 몇자루를 갖추고 조선군대가 태여났었다. 허나 그것은 남의 나라 총으로 무장한 군대여서 이 나라의 대문은커녕 자기의 존재마저도 지켜내지 못하고 외국군대에게 강제해산당하는 치욕을 새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국권수호의 기둥이 그토록 허줄했으니 이 나라가 망국의 수난을 겪은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였겠는가. 자기를 지켜줄 총대가 없어 우리 겨레는 뼈저린 수난속에서도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릴수 없었다. 총이 없으면 자주도 없고 애국도 없으며 력사도 민족도 없다는것이 수난사의 피절은 교훈이다. 그것은 비단 우리 민족사에만 한한 교훈이 아니다.

오늘의 엄혹한 현실이 보여주는 총대의 진리는 무엇인가. 이전 유엔사무총장은 언제인가 기자회견에서 《유엔의 취약성은 초대국이 하나밖에 없다는데 기인된다. 보다 결정적인것은 주요국가들, 주요기구들이 미국주도를 용납하고있는것이다. 한개 나라라도 좋으니 <반대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면 모두가 달라진다.》고 하면서 《힘만능주의》가 살판치는 국제사회의 현실을 저주하였다.

《초대국》의 힘앞에서는 국제기구도 국제법도 맥을 추지 못하고 주권국가의 자주권도 휴지장처럼 구겨지고마는것이 오늘 국제사회의 참담한 현실이다. 진정 파란많은 민족사와 준엄한 현실은 총대와 더불어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가 좌우된다는 진리를 사무치게 새겨주고있다.

오늘 우리 민족을 보라. 선군의 기치밑에 민족자주, 민족공조의 위력으로 활기찬 6. 15시대를 펼쳐가는 북과 남의 전체 조선민족을, 우리 민족끼리 손잡고 떳떳하고 긍지롭고 환희에 찬 새시대를 얼마나 힘차게 열어가고있는가.

선군, 그것은 자주통일위업의 위력한 보검이고 6. 15시대의 승리의 담보이다.

하와이동서방연구쎈터의 수석연구원이 우리 공화국의 무적필승의 위력을 이렇게 평한바 있다.

《북조선에는 첫째로, 미국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기인 자폭정신으로 무장된 군대가 있다. 둘째로, 미국에 가장 두려운 공포감을 주는,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할수 있는 수단이 있다. 셋째로, 미국이 가장 골치거리차단물로 생각하는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의 함정이 있다. 넷째로, 미국이 가장 떠는 강군강민일치라는 보루가 있다. 다섯째로, 이 중심에 군사의 천재로 알려진 김정일장군이 계시여 선군정치를 펴고있다.》

나는 심장에 손을 얹고 생각한다. 5천년력사국으로 일러오는 우리 민족의 존엄과 위력이 오늘처럼 창공높이 치솟고 민족의 장래가 그렇게도 찬연히 빛난적이 있었던가.

정녕 그것은 민족의 세기적숙망과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펼쳐가시는 선군정치가 안아온 눈부신 현실이다. 하기에 6. 15열풍으로 삼천리가 들끓고있는 오늘 남조선 도처에서 선군정치에 대한 찬탄과 경모의 정이 뜨겁게 굽이치고있다.

나는 지금 강산에 굽이치는 6. 15열풍과 6. 15북남공동선언발표 5돐을 뜻깊게 기념하고 새로운 락관과 희열에 넘친 온 겨레의 모습에서 선군총대로 빛나는 조선민족의 한 성원이 된 긍지와 자부를 뜨겁게 느끼고있다.

우리 민족끼리리념으로 빛나는 통일강성국가는 위대한 선군정치가 안아올 래일의 조선이 아니겠는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로동신문》 2005년 6월 28일부)

 

-12

[수기]

우리 민족의 참다운 조국

 

흔히 인생후반기는 추억인생이라고들 한다. 일흔을 눈앞에 두고보니 때없이 생각이 많아지고 일단 생각에 쫓기우면 끝이 없다. 50이 넘도록 남쪽에서 살다가 공화국의 품에 안겨 17년, 이처럼 남다른 인생길을 추억할 때면 공화국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조국이고 우리 민족의 참다운 조국이라는 생각에 파묻히게 된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민족의 참다운 조국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세워주시고 이끌어오신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조국입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선조의 무덤이 있고 사랑하는 부모처자의 숨결이 배인 나서자란 땅을 조국이라고 일러왔다. 조국이라는 부름은 숭엄하고 애틋한 감정을 자아내지만 나서자란 땅이라고 하여 다 조국으로 되는것은 아니라고 본다. 외세에 의해 겨레의 운명이 롱락당하고 인간의 자주성이 짓밟히는 곳을 조국이라고 부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17년전까지 남조선에서 살아온 나에게도 그 당시에 대한 소중한 추억과 혈육의 정이 간직되여있다. 제일 추억깊은것은 당시 정의와 진리를 갈망하는 청년학생들이 당국의 눈을 피해가며 활발히 진행한 이북바로알기운동이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여 남조선전역에서 벌어진 이 운동바람은 내가 있던 군산실업전문대학에서도 세차게 일었다.

주로 공화국을 소개한 해외출판물들을 가지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운동이였지만 내가 어느 정도 신망이 있었던지 학생들은 거기에 참가할수 있는 기회를 가끔 만들어주군 하였다. 그때마다 이 가슴에 안아보던 공화국의 모습, 그것은 암야에 비쳐진 등대와도 같았다.

그전까지만 하여도 나는 체육을 가르치면서 때없이 울적한 마음에 시달리군 하였다. 학생들에게 체육으로 조국을 빛내이자고 할적마다 상반되는 감정을 느꼈기때문이였다. 가슴속 한쪽에서는 늘 이 땅이 어떻게 내 조국이란 말이냐 하는 항변이 꿈틀거리였다. 그것은 결코 근거없는 항변이 아니였다.

어려서 입은 가슴속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쉬이 아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해방직후 남조선에서는 친미사대분자들이 미국이 짜준 《단선단정》음모를 실현하려고 미쳐돌아갔다. 그에 분격한 인민대중은 통일적인 전 조선정부수립을 요구하여 대중적인 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렇게 되여 10월인민항쟁, 제주도4. 3인민봉기 등이 련이어 벌어졌다.

그러나 인민항쟁들은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의 총칼폭력으로 인하여 애국의 더운 피로 산야를 물들이고 좌절당하였다. 그 피바다속에는 시위투쟁때마다 《우리 나라는 일제를 쳐부신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을 령수로 하는 통일국가로 되여야 한다.》고 웨치던 오촌숙의 붉은 피도 스며있다. 비통하기 그지없는 현실은 10대의 내 작은 가슴에도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가슴에 어혈이 진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1970년대였다. 그 시기 고기잡이를 나갔던 친척 한분이 풍랑을 만났다가 공화국에 의해 구원되여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하였다. 후날 알게 된 일이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나누던중 공화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것이 《보안법》위반죄로 문제시 되였다는것이였다. 말 한마디에 목숨까지 잃게 되는 인권지옥이나 다름없는 남조선사회에 몸서리가 쳐졌다. 울던 아이도 《보안법》이나 중앙정보부란 말에 울음을 딱 그쳤다는 웃지 못할 희비극이 《유신》정권에서 생겨났다는것을 념두에 두면 그 시기 《보안법》의 칼날이 얼마나 서슬푸르고 중앙정보부의 《정보정치》가 얼마나 우심했는가를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이처럼 각종 상처와 어혈로 멍든 나의 가슴에 남조선이야말로 수난의 땅임을 다시한번 뼈에 새겨준것은 인간백정들이 미국의 배후조종밑에 감행한 광주대학살만행이였다. 광주대학살만행을 목격한 후부터 인간답게 살려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야 하고 민족의 존엄이 짓밟히는 남조선사회에 대한 원망이 날로 높아갔다.

반백에 이르도록 가슴에 맺힌 이 원한의 응어리들은 북의 모습에 매혹된 나로 하여금 하루빨리 수난의 땅을 박차고 마음도 몸도 다 공화국에 깃을 펴도록 떠밀어주었다.

사실 50대에 인생을 다시 정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뼈아픈 고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외세와 파쑈교형리들이 살판치는 남조선을 단호히 결별할 용단을 내렸다. 그것은 공화국이 민족의 운명도, 인간의 참된 삶도, 그 미래도 다 담보해주는 우리 겨레의 진정한 조국이라는 확신이 가슴속에 뿌리내렸기때문이였다.

공화국에서 보낸 17년은 그 확신이 얼마나 정당했는가를 현실로 립증해주면서 흘러갔다. 내가 공화국의 품에 안긴지 얼마 안되여 세계무대에서는 이전 쏘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이 무너지는 비극적인 사변들이 일어났다. 제국주의자들은 《북조선의 붕괴도 시간문제》라고 떠들면서 사면팔방에서 포위환을 좁히며 달려들었다. 미국이 《핵문제》를 구실로 조성했던 1993년의 정세는 세계가 제2의 조선전쟁을 기정사실화할만큼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전쟁전야였다.

민족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던 그때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조선이 없는 지구는 상상도 할수 없다는 배짱과 거대한 담력으로 이 전쟁위기를 단숨에 날려버리시였다. 지구가 생겨, 인류가 생겨 처음 보는 그 위대한 배짱과 담력앞에 우리 겨레는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경탄했던가. 우리 민족의 운명과 존엄은 바로 이 위대한 배짱과 담력을 바탕으로 하는 독창적인 선군정치에 의해 오늘도 래일도 굳건히 지켜지고 빛나고있는것이다.

선군으로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떨치는 공화국이야말로 인간의 삶도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보람찬것으로 되게 해주는 인간천국이다.

전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8형제의 둘째로 태여난 내가 남조선에서 대학교단에 설수 있었던것은 온 가족의 피나는 뒤바라지와 눈물겨운 고학에 의해서였다. 그러한 내가 50대에 조선체육대학 박사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여 부교수학직과 학위까지 받아안고 조선로동당 당원으로 삶을 빛내이고있다. 나 자신도 놀랍기만 하다.

어디 그뿐인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하는 나날에도 변함없이 실시한 공화국의 무상치료제혜택으로 나는 남조선에서라면 엄두도 낼수 없는 큰 수술을 5차례나 받았다. 거기에 든 수술비와 약값, 입원치료비가 얼마인가를 지금도 알지 못하고있다. 아마 남쪽에 있는 친지들과 혈육들이 이 사실을 알면 내가 특별대우를 받는가 하고 의혹을 품을수도 있지만 공화국에서는 평범한 로동자, 농민들도 다 나처럼 특별대우를 받고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아도 공화국의 품에 안긴것은 참으로 행운이였다.

하기에 남다른 인생길을 걸어온 나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이야기하군 한다. 김정일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공화국은 우리 민족의 참다운 조국이라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민주조선》 2005년 9월 27일부)

 

24-13

 

장군님은 통일의 태양

 

영국의 유명한 교육자이며 발명가인 로렌드 힐의 창안으로 이 세상에 우표가 출현하여 쓰이기 시작한 때로부터 170여년 세월이 흘렀다.

무릇 사람들은 우표를 《나라의 명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우표에 매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를 상징하는 특징적인 면모들이 반영되기때문이다.

나는 우표애호가의 한사람으로서 일찍부터 이남땅에서 우표수집을 해왔다. 그러던 내가 공화국의 우표를 처음 본것은 1970년대 중엽이였다. 당시 외국출장을 다녀온 동료들을 통해 수집한 이 이북우표는 수십매정도밖에 안되였지만 그 우표들에서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우표의 종류가 다양하고 인쇄기술이 섬세한것은 물론 그 우표를 통해 하나의 피줄을 가진 우리 민족의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새롭게 절감하였다. 특히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형상한 기념우표들을 보면서 그처럼 훌륭한 통일대강을 마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움을 금할수 없었다.

나는 그 우표들을 혼자 보는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래서 군산실업전문대학 교수로 일하던 1985년부터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일인 2월 16일을 맞으며 이북우표전시회를 가졌다. 반공교육만을 받으며 성장해온 대학생들이 이날 전시회에서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던지 다음 전시회때부터는 저저마다 수집한 우표들을 가지고 참가함으로써 이채로운 광경을 펼치였다. 참으로 우표를 통해 이북바로알기운동을 벌린것이 얼마나 의로운 일인가를 새롭게 느끼게 하는 과정이였다.

그후 나는 우표전시회를 통한 이북바로알기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리면서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아래 펼쳐진 이북의 현실을 더욱 잘 알게 되였다.

1988년 4월 15일, 뜻깊은 이날 나는 그처럼 동경하여마지 않던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으며 이때부터 우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나의 우표수집활동은 더욱 본격화되였다.

공화국의 품속에서 참다운 삶을 누려갈수록 나에게는 새 우표가 발행된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와 알려주군 하던 귀여운 딸들의 모습이 못견디게 그려졌다.

어느날 밤 우리 온 가족은 통일된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 그날을 그리며 딸들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봉투에 우표까지 붙인 그 편지는 보낼수 없었다. 분렬장벽이 아버지가 자식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를 막아나섰던것이다.

우표란 편지를 보내는 값을 지불했다는 표시로서 그 어디에도 갈수 있다는 통행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과 남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이때처럼 분렬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껴본적은 없었다. 내가 그토록 애용하여 수집하고있는 우표는 단순한 종이보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분렬비극을 절규하는 고발장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그저 우표수집가로서가 아니라 민족분렬의 수난자로서 우표를 통해 통일의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겨올 일념을 안고 우표수집에 나섰다. 그 나날은 나에게 있어서 어둡던 분렬의 장벽을 가시고 통일의 밝은 앞날을 눈앞의 현실로 펼쳐보게 하는 가슴벅찬 나날이였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를 기념하는 우표들과 조국통일상수상자들의 인물우표들 특히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의 마지막시기에 남기신 친필을 새긴 통일친필비기념우표를 받아안았을 때의 나의 감동은 형언할수 없이 뜨거웠다.

참으로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유훈을 기어이 실현하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확고부동한 통일의지와 천만군민의 맹세로 안겨지는 가슴벅찬 화폭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2000년 10월 당창건 55돐에 즈음하여 진행된 조선우표전시회에 우표첩 《나는 통일을 보았다》를 출품하여 1등으로 당선되게 되였다.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의 발표는 나의 우표수집의 절정기를 이루었다고 말할수 있다.

나는 6. 15북남공동선언의 기치밑에 전진해온 성스러운 5년에 펼쳐진 6. 15시대의 자랑찬 성과를 담은 우표를 통일의 환희에 넘쳐 정열적으로 수집하였다. 지난 3월 9일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표발행 60돐기념 조선우표전시회에 《장군님은 통일의 태양》이라는 제목으로 된 우표첩을 또다시 출품하였다.

《백두광명성탄생》이라는 소제목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다섯번째 제목 《통일의 태양 김정일장군님을 통일광장에 모시자》의 체계로 이루어진 우표첩을 보면서 관람자들은 한결같이 민족분렬의 비극과 조국통일의 절박성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위대한 장군님 계시여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될 통일의 그날은 머지않아 반드시 오고야말것이라는 확신에 넘쳐있었다.

우표를 통해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높이 3대애국운동을 힘있게 벌려가고있는 온 겨레의 거세찬 흐름을 뜨겁게 읽으며 나는 적은 힘이나마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한몸바쳐나갈 결의를 굳게 다지고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평양신문》 2006년 4월 27일부)

 

24-14

[수기]

공화국의 사회주의가 제일이다

 

인간의 생명을 첫자리에 놓는 세상

 

내가 남쪽에서 살 때 그곳에서는 해마다 녀대학생들을 상대로 《어느 직업을 제일 좋아하는가》라는 문제를 내서 여론조사를 하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1의 직업으로 당선되는것이 의사였다. 의학이 돈벌이를 위한 영업수단으로 되고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명예와 재부를 함께 얻을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의사라는 공통인식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래서 남조선사회에서 사람들은 의학대학에 입학하는것을 최고의 꿈으로 여긴다. 입학증을 받은 남학생은 즉시로 권력계층이나 부유한 기업가의 집으로부터 혼인신청을 받고 녀자측 집안의 뒤받침밑에 고스란히 대학을 졸업하며 졸업후에는 가시집에서 세워준 개인병원까지 가지게 된다. 그때부터 돈에 팔린 의사는 《고마운 가시집》을 위해 미친듯이 돈을 벌어 갚아야 하는것이다.

나는 공화국북반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의사직업을 택하는것을 보고 처음에 몹시 놀랐다. 그 의문은 후에야 풀리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나는 여러차례에 걸쳐 입원치료를 받았다.

의거한 다음해인 1989년에 기관지가 파렬되여 두달동안 입원치료를, 1996년에는 김만유병원에 석달동안 입원하여 담낭적출수술을, 1997년에는 조선적십자종합병원에 두달동안 입원하여 신석제거수술을 받은것을 비롯하여 지난 20여년동안 다 합해서 1년남짓이 입원생활을 하였으며 여러차례 수술을 받았다.

남쪽에서 나는 6월인민항쟁때 시위투쟁에 나섰다가 전투경찰들의 폭행에 륵골이 골절되여 45일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었는데 당시 입원비가 로동자들의 20개월분의 임금과 맞먹는 거액이였다.

그런데 공화국에서는 45일보다 열배나 많은 기간 그것도 대수술을 받으며 입원생활을 하였으니 그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것이겠는가 하는것은 더 론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모든 치료를 무상으로 해주었다. 그뿐아니라 남쪽에서 얻은 온갖 질병들을 말끔히 고쳐주었다.

그 나날 의사, 간호원들의 지극한 정성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친혈육의 정을 안고 피가 모자라면 피를 서슴없이 바치고 움직이지 못할 때에는 밤을 새워가며 곁을 떠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인정이 메마른 남쪽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현실이였다.

나의 누님은 돈이 없어 급성취장염으로 병원문턱에도 못 가보고 34살 한창나이에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나도 남쪽에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해왔지만 공화국에서 받아안은 의료적혜택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모름지기 내 로임으로도 갚지 못하고 누님처럼 생을 마쳤을것이다.

돈이 없어 병을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 높고낮은 사람이 따로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무상치료의 혜택을 누리는 나라가 바로 공화국이다.

비단 이뿐이 아니다. 나라에서는 나의 건강을 념려하여 담당의사도 붙여주었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집에 찾아와 보살펴주는 고마운 담당의사선생의 극진한 지성에 의해 나는 건강한 몸으로 지금도 통일사업에 전념하고있다.

내가 남조선에서 살 때 서울대학교 의학대학에 가정의학과라는것이 있었다. 《가정의》라는것은 쉽게 말하면 특권족속들의 가족을 전문치료하는 주치의사를 말한다. 남조선에는 가정의를 채용하는 특권족속이 1%밖에 안된다. 절대다수의 근로대중은 진찰이나 간단한 검사 한번 받자고 해도 지방에서 도시의 집중된 병원에 수백수천리를 달려와야 하며 그것도 돈이 없으면 문전거절을 당하기가 일쑤이다.

하지만 공화국에는 도, 시, 군은 물론이고 동과 리에까지 진료소가 있고 진료소에는 일정한 세대별로 담당한 의사선생들이 있어 주민들의 건강을 병이 나기 전에 책임지고 돌봐주는 예방의학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져있다. 남쪽식으로 표현하면 북의 주민전체가 자기의 가정의, 주치의사를 가지고있는셈이다.

나는 남쪽에서 대학교수로 있을 때 여러 대륙과 나라들을 돌아보았지만 병이 날세라 예방치료를 하는 공화국과 같은 나라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이 세상에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의술이 생겨나고 의사라는 전문직업이 생겨난지도 수천년세월이 흘러갔다. 또 인류는 질병을 모르고 건강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우월한 보건제도를 꿈꾸어왔다. 하지만 대학을 세워 의사를 키워내고 병원을 세우고 치료설비와 약을 만들어내여 수백수천만사람의 병을 치료한다는것은 거액의 자금이 동반되는 어려운 사업이다.

그러나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제일로 여기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력사상 처음으로 우리 인민을 질병의 구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해방할수 있는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보건제도를 세워주시고 그 우월성이 높이 발양되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오시였다.

절세위인들의 인민사랑의 정치에 의해 전반적무상치료제가 태여났으며 병이 나기 전에 예방하는 예방의학체계가 온 나라에 정연하게 세워져 공화국인민들은 무병장수를 노래하고있다.

인간존중의 세상에서 의사직업이야말로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는 가장 영예로운 직업이기에 누구나 의사의 직업을 그토록 사랑하고있음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딸 리하나를 의학공부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에 보냈다. 하나된 통일조국을 바란다는 이름그대로 내 딸이 조국이 통일되면 남쪽의 동포들도 무상치료, 예방치료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도록 작은 힘이나마 바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통일신보》 2010년 5월 15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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