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에서의 성장

 

주체103(2014)년 4월 15일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의 자기 생활의 기둥우에 행복하게도 스물여섯번째의 년륜을 새겨놓았다.

스물여섯해라면 한 세대가 새로 자라나는, 4반세기가 되는 기간이다.

짧다고 볼수 없는 이 기간이 나를 위해 어떤 기간으로 되였는가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새 인간으로 태여나 새롭게 성장한 기간이였다고 대답할것이다.

물론 나의 이 대답을 들으면 이남의 많은 사람들이 놀랄것이다.

우선 두고 온 사랑하는 처자들이 놀랄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매사에 사회정의의 편에 서기 위한 나의 모대김이 혁명전사로 되기 위한것이였음을 미처 몰랐기때문이다.

나에게서 배운 제자들도 아주 놀랄것이다. 그들도 강의시간에 내가 종종 로출하군 한 북의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동경심이 혁명전사로 되려는 나의 지향이였음을 알수 없었을것이다.

특히 나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허문도 같은자들도 몹시 놀랄것이다. 립신양명에 대한 나의 거부반응이 참다운 혁명전사로 되려는 나의 량심의 반영이였다는것을 전혀 포착할수 없었을것이기때문이다.

나는 정의와 량심을 귀중히 여기는 많은 남조선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암흑의 세계에서 압박에 고통받고 유혹에 희롱당하면서도 의식성을 가진 인간의 본성을 지키면서 자신이 알게 또 모르게 생활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에서 혁명가로 되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왔다. 그 준비가 결국 나를 광란의 바다로부터 정의가 있고 량심이 있는 뭍으로 떠밀어왔던것이다.

내가 방금 도착했을 때 공화국창건 40주기를 앞두고 200일전투장에서 당과 천만군민이 일심동체가 되여 기적과 혁신을 창조하고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금치 못하였으며 또한 이미 준공된 거창한 서해갑문의 자태를 보면서 높뛰는 가슴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하여 공화국에서 말하는 일심단결이라는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것을 똑똑히 알수 있었다.

나는 내가 참된 혁명전사로 되려면 배우는데서 초학도로서 공화국의 하루하루 생활일과부터 적응시키는것이 중요하다고 인정하고 그런 방향에서 생활을 지향해나갔다.

나의 생활방식은 조선체육대학 박사원에서 공부한 1989년부터 1992년까지의 4년기간에 조국에 적응되여갔다.

사실 당에서 나의 소망을 헤아려 체육대학 박사원에 보내주었을 때 내 나이 벌써 53살이였다. 그런 사람이 20대의 열혈체육선수출신의 학생들과 공부하자니 거북한 점이 없지 않았다.

이 과정에 나는 비교적 빨리 공화국의 생활에 적응해나갈수 있었다.

내가 조선체육대학 박사원을 졸업하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1993년에 나의 나이는 57살에 이르렀었다. 말하자면 60고개를 목전에 둔 때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나이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품, 조국의 품을 찾아온 사람답게 노상 사색하고 뛰고 또 뛰였다.

내가 입북해서 한달만인 1988년 5월 18일 평양체육관에서 영웅적광주인민봉기 8돐기념 평양시군중대회가 진행되였는데 나는 당의 신임에 의하여 이 집회의 높은 연단에서 미제와 그 주구들의 죄행을 성토하고 자기의 통일열망을 온 겨레를 향해 마음껏 토로할수 있었다. 이것이 입북후 내가 벌린 첫 정치활동으로 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나는 통협회원으로서의 기본임무는 통일성업을 위한 정치선전활동을 잘하는것이라고 자각하고 우선 조국통일성업과 관련한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로작학습을 생활화하면서 그에 기초한 정치선전활동을 적극 벌려나갔다.

만약 세상사람들이 나에게 공화국북반부에서 생활한 기간에 성취한것중에서 가장 고귀한것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나는 단 한마디로 그것은 이 리우갑이 조선로동당원이 된것이라고 대답할것이다. 참다운 혁명전사가 되기 위한 오랜 준비끝에 나는 마침내 그 고귀한 징표인 조선로동당원이 된것이다.

남조선에서 생활한 전기간 내가 보았던것은 출세와 그에서 얻어지는 재부와 지위에 던져지는 사람들의 선망의 눈길이였다면 내가 북에 와서 보고 감동을 금치 못했던것은 조선로동당원들에게 보내지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눈길이였다.

북에서는 문자그대로 청년동맹원들, 직맹원들, 농근맹원들이 로동당원이 되는것을 열망하고있는것을 보았을 때 나는 생각이 깊었다.

로동당원이 되는것은 곧 김일성주의자로 되는것이고 혁명가로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나도 김일성주의자로 값있게 살고싶었고 혁명가로 불리우고싶었다. 그래서 남조선에서 입북준비과정에 벌써 《인생말년에나 조선로동당원이 되여 값있는 생활을 누리자.》고 생각하고 떠나왔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하겠는지…

2000년 1월 1일 아침 나는 드디여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초상화앞에서 정중히 조선로동당 입당청원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정작 입당청원서를 쓰자니 처음에 펜이 나가주지 않았다.

북의 동포들은 청년동맹원시절에 입당하는것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하기는 가장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에 입당하는것이 더 영광스럽다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64살이였다. 이 나이에 입당을 청원하는것이 너무나도 렴치없는 일이 아닐가.

거기에다 자신의 혁명화도 아직 미흡하다는 생각에 주저하던 나는 마침내 대담하게 입당청원서를 쓰고야말았다.

《해방전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나 독학으로 대학교수가 된 저는 모순으로 가득찬 부조리한 남녘사회에 대한 환멸을 안고 대학생들과 함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에도 나서보고 이북바로알기운동을 하면서 공화국의 방송을 듣군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건하시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로동당이야말로 사람들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는 위대한 당이라는것을 똑똑히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수령님께서와 장군님께서 계시는 공화국에 대한 동경과 조선로동당에 대한 매혹을 안고 당원이 되여 재생의 삶을 누리고싶은 마음에서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76돐이 되는 1988년 4월 15일에 은혜로운 조국의 품, 수령님의 품에 안기게 되였습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곡절많은 인생행로를 걸어온 저를 사랑의 넓은 품에 안아 남조선에서 50평생 이루지 못했던 소원을 다 풀어주시였습니다.

저는 공화국에서 보낸 10여년간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조선로동당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엄있고 위대한 당이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어머니당이라는것을 절감하게 되였고 그 당의 당원들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칠줄 아는 계급의 전위투사들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영광스러운 김일성동지의 당의 당원이 될것을 더욱 갈망하게 되였으며 입당을 꾸준히 준비해오게 되였습니다.

저는 우리의 운명이시고 미래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심을 안고 영원히 당과 생사를 같이할것을 굳게 다짐하면서, 장군님의 제일충신, 충직한 통일전사로 살것을 엄숙히 맹세하면서 조선로동당에 입당시켜줄것을 간절히 청원합니다.

주체89(2000)년 1월 1일 리우갑》

나는 이 입당청원서를 주저하면서 당조직에 내밀었는데 당조직은 뜻밖에도 반기며 접수하였다.

그런 속에서 한달이 지나고 두달, 석달이 지나 화창한 4월에 접어들었다. 그런데도 입당심의를 위한 세포회의가 소집되지 않자 나는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88돐을 하루 앞둔 2000년 4월 14일 다음날 15일 아침시간에 나의 후보당원 입당심의를 위한 세포회의가 소집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그만 세포당원들앞에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말았다.

당조직에서는 나의 후보당원 입당날자를 4월 15일로 정하기 위해 세포회의소집을 넉달동안이나 미루어왔던것이다. 이런 사랑, 이런 신임이 이 세상 그 어디에 또 있을가!

후보당 입당을 위한 세포회의가 있은 때로부터 꼭 1년후인 2001년 4월 15일, 수령님탄생 89돐이 되는 뜻깊은 력사의 날에 같은 자리에서 나의 조선로동당 입당심의가 진행되고 만장 일치로 나의 조선로동당 입당이 결정되였다.

그리하여 나의 당증에는 조선로동당 입당날자가 뜻깊은 4월 15일로 영원히 새겨지게 되였다.

나의 소망을 헤아려 의거입북날자가 4월 15일로 되도록 세심한 배려를 돌려준 조선로동당, 나의 입당날자도 력사의 그날로 기록되게 해준 은혜로운 우리 당, 이런 어머니당의 은총에 충정으로 보답하는것은 나의 필생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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