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분렬의 쓰라림이 교차된 북행길에서
《우리 인민은 력사적체험과 실생활을 통하여
나는
세상사람들은 보통 어머니라는 표현을 조국을 일컫는 대명사로 쓰고있는데 우리 인민은 조국을 생각할 때
전쟁전 4월남북련석회의를 전후한 시기에 남조선의 많은 인사들이 38 선을 넘어 평양을 찾아왔고 전쟁시기에도 전후시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만난을 무릅쓰고
솔직히 말해서 월북을 시도할무렵 나에게는 먹고 입고 쓰고 사는데서 걱정이 없을만큼 경제적토대가 어지간히 닦아져있어 남부럽지 않게 살수 있었다.
한편 나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북일보사의 의뢰를 받고 《근대올림픽-아테네에서 서울까지》의 제목으로 74회를 련재하였다. 또한 1974년부터 입북전까지 서해방송국에 매일 10분씩 체육프로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당시 나는 체육계인사로서 당면한 88서울올림픽사업에도 관련되여있었다. 나는 86서울아시아경기대회때와 마찬가지로 88서울올림픽에서도 《대한수영련맹》 연구리사로서 올림픽조직위원회 수영분과위원회에 소속되여 각국 수영선수, 임원 안내업무의 일단을 맡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88서울올림픽의 《남북합동개최협의》가 무산되자 나는 단호히 올림픽을 거부하고 그해 4월에 공화국의 품에 안기였다.
내가 월북결심을 내린 그때는 사실 객관적정치정세로 볼 때 동유럽사회주의가 호경기에 있는 때가 아니라 반대로 자체의 내적요인과 서방세계의 반동공세앞에서 좌절을 앞두고있던 때였다. 다시말하여 동유럽사회주의의 붕괴는 그때 이미 목전 몇년후의 일로 감지되고있었으며 나타나는 그 조짐으로 하여 남조선 곳곳에서는 벌써 흉흉한 여론이 돌고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런 때에 굳이 월북을 결심하고 실행한것은 이북식사회주의는 끄떡없을것이라는 나대로의 굳은 신념을 간직하고있었기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나의 월북이 그 어떤 일시적흥분이나 충동에 따른것이 아니라는것을 립증해주리라 생각한다.
진정한 조국의 품에서 깃을 펴고싶은 남아의 욕망이 나로 하여금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마침내 월북을 단행케 한것이다.
전쟁시기에 있은 재북인사들의 월북거사와 관련한 력사적사실이 나의 월북결심을 추동하고있었다는것도 여기에서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랍북》이니 뭐니 하는 악선전을 애당초 믿지 않았던 사람이였다. 그것은 내가 력사를 파고드는 과정에 통협에 망라된 인사들이 다 인격자들이며 결코 강박에 못이겨 움직일 사람들이 아니라는것을 똑똑히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나는 또한 그들이 남조선땅에서 크나작으나 자기들의 정치적지반도 있었고 많으나 적으나 일정한 재산도 있었으며 두말할것없이 사랑하는 혈육들이 있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모든것을 다 뒤에 두고 다른 때도 아닌 가장 어려운 전쟁시기에 년세도 이미 많을 때
나의 첫 월북시도는 보다 일찌기 1983년 8월 일본해양소년련맹의 초청을 받고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있었다. 나는 그때 제3국을 통해 월북을 실현해보려고 하였다.
두번째 월북시도는 6월인민항쟁후에 있었는데 그것은 엉뚱한것으로서 강화도의 교동도에서 북의 황해남도 배천군쪽으로 헤염쳐 건너가자는것이였다. 나는 나의 특기인 수영실력을 믿고있었다. 나는 군산대학교 수산대학의 근해도를 리용하여 수심, 물흐름속도, 거리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가지고 현장에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화재답사의 명목으로 당시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여있는 교동도로 가까스로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교동도를 순회하는 뻐스운전수의 신고로 경찰과 해병대에 단속되여 고생만 하다가 돌아왔던것이다.
두차례의 월북기도가 실패한것을 놓고 나는 스스로 총화해보았다. 실패의 원인이 작전이 치밀하지 못하고 행동에서 소극적이며 욕망만을 앞세운데 있다고보고 나는 치밀한 작전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월북을 성공시켜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입북날자 다시말하여
이렇게 결심을 내리니 심장이 더더욱 높뛰였다.
이런 결심을 내린데는 두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로, 자기의 두번째 출생일을 가장 뜻깊게 장식함으로써
둘째로, 나를 유혹하여 저들의 도구로 써먹으려던 력사의 반동들을 경악케 하고 그들에게 더욱더 큰 타격을 안기자는것이였다.
그러면 4월 15일,
정작
서울, 문산을 거쳐 개성, 사리원으로 해서 자동차로 달리면 4∼5시간정도면 족할것이요, 비행기로 그 상공을 날면 30∼40분이면 넉넉할것이나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길은 자고로 550리밖에 안되는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정작 지도를 펼치고 서울에서 올려다본 평양까지의 길은 우리 은하계에 속한 150억개에 달하는 미지의 별세계로 가는 길보다도 더 멀어보였다. 민족분렬의 비극이 새삼스레 실감되였다. 그 머나먼 길,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수도 없는 그 먼길을 떠나야 하면서도 사랑하는 처자들과 한마디의 작별인사도 나눌수 없다는것을 생각하니 더구나 슬픔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처자들이, 친지들과 친구들, 제자들이 언젠가는 나를 리해해주리라는 자체위안을 안고 나는 1988년 3월 28일 조용히 김포비행장에서 려객기에 몸을 싣고 남조선을 떠났다.
그후 나는 실패를 거듭하며 여러 나라들을 거치는 과정에 드디여 4월 15일 공화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비행기가 궤도에 들어섰을 때 기내방송에서 《우리 비행기는 조국으로 향한 궤도에 들어섰습니다.》 하는 안내원의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앞절에서도 쓴바와 같이 나를 실은 비행기는
나는 3월 28일에 서울을 떠나 4월 15일 평양에 도착한 그 20여일어간에 다섯번이나 울었다.
어렸을 때부터 좀처럼 울음을 몰랐던 내가 이렇게 50줄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울보가 되였던것이다. 사람은 기뻐도 운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했었는데 나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조국의 품에 안기면서 비로소 알게 되였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