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에서 찾은 몇가지 교훈

 

나의 의거입북이 우연한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것이 아닌것과 마찬가지로 그 거사실현의 날이 력사의 날인 4월 15일로 되게 된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는것을 강조하고싶다.

이 모든 일들은 나의 인생의 교훈에 의해서 필연적인 일로 되였던것이다.

 

― 숙명에 대한 도전에서 찾은 교훈

 

나는 우리 나라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여 《시일야방성대곡》을 터친 때로부터 31년세월이 지난 해 다시말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만주의 천고밀림속에서 우리 나라의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를 창건하시고 그 10대강령을 발표하시여 짙은 어둠에 잠긴 삼천리조국강산을 진감시킨 주체25(1936)년의 바로 그 력사적인 5월에 세상에 태여났으니 시작부터 복을 타고난 인생이라고 할수 있으리라.

물론 내가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실제로 안기려면 1988년까지 반세기가 넘는 52년을 기다려야 하였으나 나에게 주어진 복은 결코 그 누구에게 양보할수도 없는것이였으며 잃어버릴수도 빼앗길수도 없는것이였다.

내가 태여난 고향땅은 전라북도 완주군 초포면(1957년에 전주시 호성동에 편입)이라는 곳이였다. 그곳은 농사가 잘되는 쌀고장이였다.

초포벌에는 그의 젖줄기라고 할수 있는 소양천이 감돌아흐르고있는데 그 강은 폭이 300∼500m나 되지만 물흐름이 완만하고 깊은 곳이라야 2∼3m정도이고 낮은 곳은 1m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고향산천을 생각할 때면 소양천부터 머리에 떠오르군 한다. 메기, 쏘가리, 잉어, 붕어를 비롯한 욱실거리는 물고기를 잡느라고 아이, 어른 지어 부녀자들까지 곧잘 뛰여드는 소양천은 성장과정에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문자그대로 여섯살 난 때부터 이 소양천과 깊은 인연을 맺었는데 매일 방과후에는 물론 일요일 또는 방학때이면 거의 모든 시간을 소양천에서 보냈다. 이 과정에 나는 자연히 잠수능수가 되였고 수영능수가 되였다. 마을에서는 종종 어른들이 소양천에서 수영경기를 조직하군 하였는데 이런 때면 나는 의례히 출전하여 어른이건 아이들속에서건 늘 1등을 하였으며 이후에는 이웃면, 이웃군들에서 조직되는 수영경기들에도 출전하여 1등을 독차지하군 하였다.

그통에 나는 초포벌의 《물개》라는 별칭도 가지게 되였다. 후날에 내가 남조선에서 수영선수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고 나아가서는 대학에서 수영체육과목의 교수로까지 발전하게 된것도 소양천과 떼여놓고는 생각할수 없다. 그래서인지 조국의 품에 안긴 그날 비행기가 압록강상공을 날고있을 때 기내시창구로 그 푸르른 물결을 굽어보았을 때 소양천에 대한 생각이 못견디게 머리에 떠올랐다. 허락만 된다면 이 비행기를 몰고 그대로 소양천상공에 날아가 그밑으로 잠수하고싶은 충동도 받았다.

물론 초포벌과 소양천에서의 나의 어린시절은 한때였고 그 즐거움도 오래갈수 없었다.

나는 어린 나이로 소양천에서 자맥질할 때까지만 해도 소양천과 그것을 젖줄기로 하여 곡창으로 된 초포벌이 민중의것이 아닌 남의것이며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마을의 많은 선량한 어른들이 우리 집의 윤두소마냥 남의 멍에에 매여사는 사람이란것을 미처 모르고있었다.

사실 나는 윤두소라는것이 우리 집에서 부리는 소의 이름인줄 알았었다. 그런데 차츰 커가면서 보니 이집저집의 소도 다 윤두소로 불리우고있는것이 이상스러워 왜 소이름을 다들 똑같이 지었는가고 할아버지에게 물었었다.

설명을 듣고도 리해할수 없었던 나는 아홉살에 잡혀서야 비로소 할아버지, 아버지가 하는 소작살이란 무엇이며 아버지가 일본기마대의 칼에 허리를 상한 기미년의 조선독립만세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또 초포벌의 농사군들은 굶는데 그들이 지은 옥백미는 왜 그대로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가는가 하는것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였다.

어린 나의 가슴속에서는 적개심이란것이 서서히 타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초포국민학교 2학년시절에 8. 15를 맞았다. 해방소식을 소양천에서 수영련습을 하다가 듣고 내 먼저 알았는가 하여 한달음에 마을로 달려갔는데 동네사람들도 어느새 알고 모두 회관마당에 떨쳐나와 만세를 웨치고 농악을 울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야단법석들을 하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너나없이 왜놈세상이 망했으니 조선세상이 왔다고 생각하며 둥둥 떠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누구라 없이 《어둡고 괴로와라 밤이 길더니/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네…》 하는 《해방행진곡》이란 노래를 부르며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사람들은 8. 15가 자기들의 운명전환의 계기로 되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며칠 못 가서 마을사람들의 그 높뛰는 가슴들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였으며 경복궁을 압도하고 서울중심가에 똬리를 틀고앉은 일제의 조선총독부건물의 국기게양대에는 조선기발이 아니라 미국의 가증스러운 성조기가 펄럭이고있다는것이였다.

이 소식에 접하여 마을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으나 곧 분노를 터뜨렸다. 이 땅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미국의 식민지로 탈바꿈하였단 말인가. 사람들은 저저마다 이렇게 물으면서 울분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였다. 해방의 감격은 일장춘몽에 불과하였다. 지주도 그대로 있었고 소작인도 그대로 있었으며 윤두소들도 자기들을 아껴주고 먹여주는 그 착한 사람들을 주인으로 삼지 못하고 그들속에서 본래의 이름그대로 불리우고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대신하여 기여든 미군은 서울뿐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땅들에도 둥지를 틀고 세상의 모든 불행을 몰아오고있었다.

그런 속에서 5년세월이 흐른 뒤 양키들에 의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대의 강력한 반격으로 3일만에 서울이 해방되였다는 소식이 회오리바람처럼 우리 고향마을에 들려오더니 7월 20일에는 드디여 대전이 해방되고 이어 우리 고향 전주땅도 해방을 맞게 되였다.

정말 꿈같은 일이였다. 곧 새 생활이 시작되였다. 군, 면, 리들에서 인민위원회선거사업이 진행되고 농민들의 비등된 열의속에서 1946년 봄 공화국북반부에서 실시된것과 같은 토지개혁사업이 진행되였다. 우리 고향마을 같은데서는 토지분배사업이 8월 10일에 벌써 다 끝났다.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김일성장군 만세!》의 함성이 그칠줄을 몰랐다.

그러나 격동적인 사변은 석달밖에 가지 못하였다. 인민군대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 오르게 되였던것이다.

정전이 실현된 1953년에 나는 3년제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인간의 고뇌라는것을 체험하였다.

사회적부조리를 척결하고 나라의 역군이 되려면 배워야 하고 배우자면 대학공부까지 해야겠는데 대학공부를 할수 있는 길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으니 소년으로서 나의 고민은 거기에서 발단되였던것이다.

나의 향학열은 할아버지의 신념에서 받은 영향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할아버지는 대대로 소작살이를 한 농민한학자로서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배달민족이 남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자면 신지식을 습득하여 개화해야 한다면서 서당을 다니던 어린 나의 아버지의 상투를 단호히 잘라버리고 무작정 전주에 있는 상상소학교에 입학시켰던분이였다. 당시 신식학교를 다닌 학생은 우리 아버지까지 포함하여 초포면적으로 셋밖에 없었다고 한다.

직심스레 공부하여 높은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전주사범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어렵게 합격했다. 1:17의 경쟁률 즉 800명의 지망자속에서 47명을 뽑는 시험에서 합격했던것이다.

그러나 나는 훈장노릇 하기가 싫었다. 사회적부조리를 척결하고 부정의한 사회를 바로잡자면 검사나 판사가 되여야 한다고 천진하게 생각한 나는 사범학교시험합격증을 주머니에 되는대로 쓸어넣은채 고집스레 전주고등학교입학시험에 응시하여 또 합격증을 받아냈다. 그러나 나는 자기의 희망대로 할수 없었다. 병약한 아버지와 형은 집이 가난하여 대학에 갈수 없으니 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교사노릇이나 하면서 동생들도 돌보고 집안살림도 돌보아야 한다고 애타게 설복했던것이다.

아버지와 형의 말씀은 사실 무리가 아니였다. 몇평 안되는 전답에 매달려 열식구가 사는 집안에서 둘째인 내가 그때 겨우 만 16살이였으니 아래 다섯 동생들은 그때 아직 올망졸망한 아이들이였던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대학에 갈수 있겠는가. 결국 나의 꿈은 망상이였다. 이놈의 세상에서 향학열이 다 무엇이고 머리가 좋아서는 무엇하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울분을 터쳤다.

울분이나 터친다고 부조리한 사회가 알아줄리는 만무한것이고 오히려 나의 머리우에는 더 큰 불행만 들씌워졌다. 그것은 전주사범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여 불과 한달만에 아버지가 기미년의 3. 1인민봉기마당에서 일제경찰에게서 당한 치명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끝에 49살을 일기로 그만 별세하고 말았던것이다. 그리하여 아직 10대에 불과한 어린 나의 두어깨우에는 가정적부담이 더욱더 무겁게 얹혀지게 되였다. 가정의 방조를 받아야 할 어린 학생이 도리여 무거운 부담을 안고 공부하게 되였던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머리속에는 저도 모르게 일종의 도전의식이 싹트게 되였다.

나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1956년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학교 1급정교사자격을 취득하였다. 당시 우리 가정형편에서 20살안팎의 나이에 그만한 자격을 취득한것은 대단한 출세라고 말할만도 하였다. 하기에 어머니도 못내 기뻐하시였고 동네사람들도 내 등을 다독여주면서 혀를 찼었다.

국민학교 교사나 된것이 포부가 컸던 나에게 있어서 그닥 만족스러운 일이 못되였으나 교사생활의 첫시작을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에 있는 고부국민학교에서 하게 된것은 나에게 상당한 긍지감을 안겨주었다. 고부라면 1894년에 발발된 갑오농민전쟁의 발원지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니 나의 도전의식은 머리속에서 자기의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시작부터 6학년을 맡게 되여 힘에 부쳤으나 나는 마음을 다 잡고 열심히 정력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는 조절하여 얻어내는 시간으로 《척양척왜》와 《보국안민》, 《페정쇄신》의 구호밑에 전개된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많이 들려주었다. 나는 갑오농민전쟁이 우리 나라 력사상 보기드문 규모가 큰 농민전쟁이였다는것, 배달민족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강의한 투쟁기개, 용감성과 희생성, 민족적단결을 과시한 전쟁이였다는것을 이모저모로 강조하군 하였다.

학생들이 나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고 무엇인가를 체득하는것이 감지될 때마다 나는 교사로서 내가 지녀야 할 사명과 임무가 어떤것으로 되여야 하는가에 대해 갈수록 깊이 깨닫게 되였으며 불의에 도전하고싶은 욕망은 날로 더욱 커갔다.

나의 도전의식은 무엇보다도 내 비록 정규대학은 못 나와도 독학의 방법으로 기어이 고등학교 교원자격도 취득하고 나아가서는 대학교원자격도 취득하여 청소년학생들을 정의의 투사로 키우는 참된 교육자로 되여보자는 결심으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괴뢰군에 징집되였다가 1958년에 제대된 후 국민학교에서 계속 교편을 잡는 속에서도 직심스럽게 공부하여 고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준비에 이악하게 달라붙었다.

나는 한차례의 락방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또 시험에 응시하여 1960년 12월 문교부로부터 기어이 중학교, 고등학교 교원자격시험합격증과 중학교, 고등학교 교원자격증을 한꺼번에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첫 도전이 성공하였던것이다.

이에 따라 나는 일약 금산농업고등학교 체육교원으로 배치되였다. 국민학교 교사로부터 중학교를 뛰여넘어 일약 고등학교 교사로 승급되였으니 나의 가슴은 성공으로 인한 흥분으로 또 높뛰였다.

그때 나의 흥분은 비단 성공에서 온 흥분만이 아니였다. 운명의 추동이라고 해야 할지 국민학교의 첫 교단을 갑오농민전쟁의 발원지인 고부땅에서 서게 되였더니 이번에는 고등학교 교단을 반일의 사적이 깊이 아로새겨져있는 금산에서 서게 되였던것이다.

금산으로 말하면 100여년전 우리 나라에서 침략적이며 매국적인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되지 못한 유일한 고장인것이다. 일제의 압력에 따른 순종황제의 칙령으로 1910년 8월 29일 정오 나라의 모든 지역들에서 원(군수)들이 일제히 백성들앞에서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하게 되였었는데 이 고장의 군수인 홍범식이 자결로 그것을 거부해나섬으로써 금산고을에서는 이 조약의 공포가 무산되고말았다.

이 사변은 전국 각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인민들속에 반일의 불씨를 지피는데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홍범식은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애국지사로 이름이 오르게 되였다. 금산땅에는 지금도 그의 공적비가 세워져있다. 뿐만아니라 금산땅은 임진왜란때 왜놈들을 무찌른 의병들의 공적비도 세워져있는 고장이다.

그러니 나는 고부국민학교때와 마찬가지로 금산농업고등학교에 와서도 자연히 학생들앞에서 반일과 애국을 고취하여 기염을 토하군 하였다.

나는 고부국민학교에서 1년만에 이웃면의 이평국민학교로 조동되고말았는데 금산농업고등학교에 와서도 1년밖에 있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역시 조동의 명목으로 모교인 전주사범학교로 교단을 옮기게 되였다.

이 모든 일은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학생들속에서의 나의 이단적인 활동이 당국의 비위에 거슬려서 받은 일종의 제재조치였던것이다.

그런데 나는 전주사범학교로 가서 얼마 안되여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될 처지에 빠져들게 되였다. 그것은 당국이 학제를 개편하여 사범학교를 교육대학으로 승격시켜놓았기때문이였다. 그러니 나처럼 대학교수자격을 못 가진 사람은 실직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였다.

당시 《교육법》에 의하면 교수자격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 또는 박사학위를 가진자와 대학을 졸업하고 적어도 3년이상의 대학조교경력을 가진자만이 가질수 있었다. 그러니 나의 실직은 피할수 없는것이였다.

대학졸업학력을 못 가진것이 역시 원통하였다.

그런데 이때 박정희군사《정권》은 그 무슨 《교육대학 교수선발을 위한 림시특례법》이란것을 제정공포하였다. 이 《특례법》의 주요골자는 당시의 《교육법》대로 하면 전국적으로 적은 인원의 교수를 선발하는데 많은 희망자들이 몰려들어서 《정실》과 《금권》의 《부정인사처리》가 있을수 있으니 고등학교 교원자격이상 소지자는 모두 《선발시험》을 통하여 실력있고 참신한 교육대학 교수를 선발하겠다는것이였다.

그때 나는 《이젠 살았구나! 박정희군사〈정권〉은 나 같은 불우한 독학자도 교육대학 교수선발시험에 응시할수 있는 기회를 주는구나.》 하고 매우 기뻐하였다.

나는 6개월동안 국어, 영어, 전공과목을 직심스럽게 공부하여 1962년초에 서울에 올라가서 선발시험에 응시하였다.

시험장에 들어가보니 체육교수 7명을 뽑는데 무려 79명의 응시자들이 모여들어 실로 경쟁률은 1대11이였다.

나는 그만한 경쟁률은 개의치 않았으나 시험장에 출석한 순간 모닥불을 뒤집어쓰게 되였다. 엄연하게 《수험번호 104》로 되여있는 수험표를 지참하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관(문교부 고등교육국 국장 김태식)이 내 리력서를 대충 보더니 못마땅하다는듯이 《당신 같은 젊은이도 교육대학 교수시험에 응시하러 왔단 말이요?》 하고 내뱉듯이 한마디 하는것이였다. 이 《신성한 시험장》에 가난뱅이농군출신이 앉을 자리가 없다는 투였다.

나는 하마트면 리성을 잃을번 하였다. 당장 수험표를 빡빡 찢고 그자의 상판에 쥐여뿌리고싶었으나 나는 자제하였다.

《아니다. 그런 무례한 행동이 도전이 아니라 실력으로 이 시험에서 통과하는것이 도전이다.》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으며 나는 시험을 치르었다. 시험지의 본문제에서도, 시험관의 기습적인 구답시험세례앞에서도 일사천리로 막힘이 없는 나를 보고 결국 그 매몰스런 시험관의 입에서는 《대단하오. 100점 만점이요!》라는 탄성이 튀여나오고야말았다.

나는 또 한차례의 도전에서 이긴것이였다. 몇달후에 남조선 중앙신문들의 사회면에 《교육대학 교수선발시험 합격자명단》이 게재되고 관보에 공시되였으며 내 손에 합격증서가 날아들고 전주교육대학에 합격통보가 전달되였다.

그러나 《특례법》의 기만성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나는 높은 성적으로 교육대학 교수자격을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들어앉아야 할 전주교육대학의 교수자리에는 교육대학 교수시험에 응시하지도 않은 박정희의 고향 대구출신의 녀자가 들어앉은것이였다.

박정희군사《정권》이 참신한 정치를 하겠다고 선전한 《림시특례법》을 믿고 그처럼 기뻐하며 응시했던 내가 너무도 어리석었다는것을 깨닫고 나는 땅을 치며 통탄하였다. 얼마나 억울하고 실의에 빠졌으면 이 세상에 태여나 처음으로 죽고싶다는 충동까지 일어났으랴.

그때에 전라북도교육위원회에서는 나의 가긍한 처지를 동정하여 군산수산초급대학 병설수산고등학교에 배치하였다. 이것은 나를 특기를 가진 우수한 수영선수로 키워준 소양천의 덕택이라고 할수 있었다.

수산대학의 교과과정에는 수영과목이 전공필수과목으로 되여 수영학점을 받지 못하면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군산수산초급대학 강사, 수산고등학교 교원을 하면서 또다시 일반대학 교수자격을 위한 론문을 피를 물고 준비해나갔다. 《누가 이기는가 두고보자.》는 심산이였다.

그리하여 4년간 준비한 론문 《체육과 시설용구불비의 요인분석 및 보충방안》을 문교부 교수자격심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것이 남조선의 혹심한 경제난으로 각급 학교의 체육시설용구가 매우 불비한 상태에 놓여있던 60년대당시 아주 적절한 론문으로 인정받음으로 하여 나는 1966년 12월 30일 《교수자격인정서》를 발급받게 되였다.

이렇게 나는 1967년 봄에 비로소 군산수산초급대학 교수로 임명받게 되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1956년에 국민학교 교단에 오른 사람이 대학문전에도 못 가보고 순 독학으로 10년어간에 고등학교 교단을 거쳐 대학교단에 올라섰으니 주변들에서 나를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올려다볼만도 하였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대학체육교수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자 학계, 사회계에서 안면도 넓어지고 사회적으로 유지의 지위도 차지하게 되였다. 그리고 소작농출신인이 일약 비약하여 생활도 펴지게 되였다는것은 더 말할것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날이 갈수록 나는 거듭한 도전끝에 성취한 나의 성공들이 진짜 성공으로 되지 못한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성공에 따라 오붓한 집도 생기고 교사활동을 하는 현숙한 안해도 생기고 귀여운 아들딸들도 생기고 사회적지위가 일정하게 오른 인물로 부상된것은 사실이였으나 남조선땅에서 달라진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남조선땅의 변혁을 가져오는데서 나의 자수성가가 그 어떤 작용도 할수 없다는것을 나는 깊이 느끼게 되였다.

내가 이남사회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것은 군산수산전문대학에 있을 때인 1972년경부터였다.

그때 대학에서는 학장이 부정경리를 하여 학교예산을 사취하고 탕진하기때문에 교수들이 청와대, 대검찰청, 문교부에 이를 고발하는 진정서를 낸 일이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가지고 가게 되였다.

그런데 진정서를 접수한 문교부에서는 조사를 한다고 내려와서는 학장을 처벌한것이 아니라 내가 몇해전에 하루 결근한것을 트집잡아 직무태만이라는 구실을 붙여 나를 직위해제시키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억울하여 《정부소청심사위원회》에 항소했는데 거기서의 판결이라는것도 결국 나의 제의를 거부하는 기각이였다. 놈들은 학장으로부터 뢰물을 받아먹고 그렇게 했던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이남사회가 권세와 돈이 있으면 유죄도 무죄로 되고 돈이 없으면 정의가 짓밟히는 사회라는것을 실감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고민하기 시작하였으며 커가는 번뇌속에서 교훈을 찾게 되였다.

그 교훈이란 과연 무엇이였는가.

세상에는 물론 숙명이란것이 없으며 사람은 있지도 않은 숙명의 포로가 되여 부조리한 사회의 노예가 되여서는 안된다는것, 자주적인 인간은 물론 숙명을 타파하여야 하며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여 숙명론에서 해방되여야 한다는것 그리고 인간개인의 《자수성가》로서는 민중에게, 가깝게는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깨우쳐줄수 없고 그들을 사회정의의 투사로 키워낼수도 없다는것이였다.

그러니 나자신부터 사회정의를 위한 진정한 투사가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나의 눈길은 자연히 북으로 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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