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협의 활약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기대와 관심, 뜨거운 사랑에 무한히 고무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성원들은 결성후부터 조국통일위업에 기여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리였다.

통협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남조선의 《정부》와 《국회》및 각 정당, 단체들을 상대로, 나아가서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과 단체들을 상대로 한 편지, 호소문 등을 채택, 발송하였으며 내외기자들과의 인터뷰, 출판선전물발간, 방송출연 등의 각종 형식과 방법으로 조국통일의 절박성을 해설하고 남조선괴뢰도당과 미제의 반통일행위를 폭로단죄하는 언론전을 힘있게 벌려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크게 고무하고 조선의 통일을 반대하는 력사의 반동들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1960년 4. 19인민봉기로 리승만괴뢰정권이 붕괴된 직후에 있은 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 남조선에 조국통일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된것과 관련하여 조국해방 15돐 경축대회에서 하신 력사적인 보고에서 사상 처음으로 되는 련방제통일방안을 제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남조선당국이 아직은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받아들일수 없다면 과도적대책으로서 남북련방제를 실시할것을 제기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가 말하는 련방제는 당분간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자는것입니다.

이러한 련방제의 실시는 남북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함으로써 호상 리해와 협조를 가능하게 할것이며 호상간의 불신임도 없애게 될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시면서 남조선당국이 이러한 련방제와 관련한 제안도 당장 받아들일수 없다면 북과 남의 실업계대표들로 구성되는 순전한 경제위원회라도 조직하여 정치문제와는 관계없이 경제적협조와 교류를 실현할것을 제의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이와 함께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 모든 분야에서 호상교류의 실시, 남조선으로부터의 미군철거, 남북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이하로 축소시키는 문제 등을 다시금 천명하시면서 이상의 모든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하여 평양이나 또는 판문점에서 남북조선의 대표들이 시급히 모여앉을것을 제의하시였다.

뒤이어 1960년 11월에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8차회의에서는 자주적평화통일을 다그치기 위한 문제를 토의하고 《〈대한민국국회〉 및 남조선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과 인민들에게 보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의 편지》와 《남북조선의 경제문화교류와 협조를 실현하며 남조선에서의 민족경제의 자립적발전을 도모할데 대한 의견서》를 채택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상기 문건들을 통하여 조국해방 15돐 경축대회보고에서 천명된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들을 밝혔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8차회의에서 채택된 2개의 문건에 전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여 이해 12월 2일 회원총회를 열었다.

회의과정은 실황록음으로 북과 남을 통털어 전국에 보도되였는데 그것은 남조선의 중간 및 혁신정당, 단체들뿐아니라 남조선 《국회》의원들속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경제계와 문화계, 각계각층 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특히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해방 15돐 경축대회보고에서 제시하신 새로운 획기적인 통일방안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8차회의에서 채택된 통일실현의 구체적인 대책들에 접하여 마음이 부풀어오르고있었던 남조선의 통일애국세력은 명망높은 재북인사들의 조직체인 통협의 적극적인 통일지향활약에 대한 소식에 접하게 되자 그에 발맞추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60년 9월 중순경에 있은 민족자주통일중앙협회(민자통) 발기준비위원회의 출현이 그것을 말해주고있었다.

민자통은 남조선의 각계 진보세력과 사회대중당, 사회당, 혁신당 등 남조선의 중간혁신정당들과 단체들,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등 지방조직들을 망라한 당시 남조선에서 자주적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가장 큰 통일전선적련합조직이였다. 특히 민자통의 중요인물들이 통협에 망라된 재북인사들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있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민자통의 주요간부 10여명중 4명(장건상, 조윤제, 안경근, 조시원)이 1948년 4월의 남북련석회의참가자들이고 안재홍의 맏아들 안정용을 비롯하여 3명이 통협성원들과 혈연관계에 있는 인사들이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한것이였다.

이런 사실은 남조선사회에 미치고있었던 통협과 재북인사들의 커다란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고있었다.

실로 민자통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의 통일애국세력이 1961년에 들어서면서 벌린 일본경제시찰단의 남조선행각반대공동투쟁, 남조선미국《경제 및 기술협정》반대공동투쟁, 반민주 2대악법반대공동투쟁,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민족자주통일촉진을 위한 공동투쟁 등은 남조선인민들의 반미, 반일, 반《정부》투쟁의 위세를 과시하였으며 통일은 배달민족에게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수 없는 유일무이의 신념임을 세상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다.

통협소속 재북인사들은 남조선 각계 인사들과 광범한 인민들을 고무하기 위하여 집필활동도 정력적으로 벌렸다. 그들이 쓴 글들은 빈말과 공리공담이 없고 미화분식과 미사려구가 없으며 오직 진실을 담은것이 특징적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그들이 쓴 글 몇편의 제목을 여기에 소개해본다.

말년에 통협의 최고위원, 서기국장을 한 조헌영선생은 《또다시 받아안은 크나큰 영광》, 《한없이 넓은 품》, 《나의 학구생활을 더듬어》, 《조선전쟁을 해부한다》 등과 같은 좋은 글들을 남겼다.

남조선의 초대《국회》에서 극우파에 속했던 사람으로서 소장파의원들의 《미군철수안》에 맞서 《미군장기주둔요청안》을 기안했던 조헌영선생 같은 사람이 통협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전쟁을 해부한다》는 글을 발표하여 비수처럼 미제의 조선전쟁도발을 낱낱이 발가놓은것을 보았을 때 세상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그의 인생전환에 탄복하기도 하였다.

박렬이라고 하면 무정부주의자로서도 유명하였지만 《반공투사》로서도 이름난 사람이였다. 그런 박렬도 통협에서 활약하는 기간에 《나는 진정한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깨달았다》, 《공산주의자와 나》, 《진정한 자주독립의 길》 등과 같은 좋은 글들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경탄시켰다.

그는 미제와 《유신》독재자가 《랍북인사송환운동》을 벌려놓고 국제적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려고 꾀하였을 때에도 제일먼저 판문점에 나가 놈들의 모략을 폭로단죄하는 방송을 하여 원쑤들의 기도를 파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남조선의 초대《국회》의원이며 초대 내무부 장관이기도 한 김효석도 생전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나는 체험으로 말한다》, 《미제를 고발한다》, 《그날의 서울》, 《선입견과 현실》 등과 같은 많은 글들을 남겼다.

그는 이 글들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인생전환을 이룩하였는가에 대해서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인생말년을 어떻게 아름답게 장식하였는가에 대해 아주 생동하고 진실하게 썼다.

통협의 최고위원들중의 한사람인 안재홍선생도 입북후 15년동안에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높이 받들어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하여, 민족대단결을 위하여 심도있는 언론활동을 많이 벌렸다. 그가 쓰고 발표한 글들은 1965년 12월 별세때의 유언에 따라 《안재홍유고집》으로 묶어졌다.

한편 그리스도교목사인 권태희선생이 《문남견북》이라는 제목밑에 묶은 련속기행문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복음의 사도들의 정체는 바로 이렇다》, 《조국을 부인하는것은 매국노들이다》, 《그 조상, 그 후예》, 《나는 두 제도를 다 겪었다》, 《창성기행》 등의 기행문들에서 남조선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과 이북에서 자신이 목격, 체험한 일들을 실감있게 대비하여 글들을 전개해나가면서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전환의 당위성을 설득력있게 설명해주었다.

권태희선생은 1981년 여름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한 재미《한국인교회련합회》 고문 김성락목사와의 상봉석상에서 그로부터 《반공을 하던 자네가 어떻게 련공을 하게 되였나?》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이렇게 직선적으로 대답했다.

《한때 숭미, 충미사대관에 물젖어 방황했던 나를 애국애족의 길로 이끌어주신 김일성주석의 은덕을 무슨 말로 형언하리까. 내 생이 진하는 날까지 미제의 교활하고 파렴치한 정체를 폭로하는데 심혼을 다 바칠 결의뿐입니다.》

권태희선생의 이 대답은 인생말년에 그가 벌린 애국활동과 모든 언론활동의 종자였다고 말할수 있다.

권태희선생을 비롯한 여러명의 재북인사들을 만나본 김성락목사는 지금 남조선당국자들은 북에서 재북인사들을 모두 《랍북창고》에 가두어넣고 방송할 때에만 데려내다가 써주는 원고를 읽게 하고는 다시 가두어넣는다고 선전하고있는데 당신을 만나보니 그 선전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하였다.

통협안에는 이채롭게도 두명의 녀성활동가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남조선의 이전 《녀자국민당》 부당수였던 박보렴이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이전 《대한부인회》 회장이였던 박승호였다. 그들도 통일언론활동에서 남정네들과 짝지지 않았다.

박보렴은 생전에 도서 《나는 진정한 애국자를 보았다》를 내놓았으며 박승호는 《남조선녀성들에게 하고싶은 말》, 《나의 체험에서》를 비롯한 많은 글을 집필발표하였다. 그는 《유신》독재자가 《랍북인사송환》문제를 유엔에 제소하였을 때 그 명단에 자기의 이름이 들어간것에 격분하여 판문점에 나가 남쪽을 향해 여러날동안 방송을 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막내딸과 시어머니인 박순천에게 편지를 보내여 자기의 심정을 알리였다.

재북인사들이 통협에서 활약하면서 쓴 책자들과 많은 글들은 공화국북반부인민들뿐아니라 남조선과 해외동포들속에도 널리 배포되여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그 파문들은 메아리로 되여 오늘날에도 7천만겨레의 귀전에 갈마들고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공화국북반부에 있는 단체들가운데서 구성상특징을 가진 단체라는것은 두말할것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규모가 매우 작다는것 그리고 뒤를 이어갈 후비자체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에서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통협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세심한 관심과 배려밑에서 이러한 조직체계의 제한성을 부단히 극복해가면서 노상 활기있게, 자기의 사명과 임무에 맞게 사업을 조직전개해나갔다.

통협은 1978년 11월 6일 회원총회를 열고 조헌영을 최고위원 겸 서기국장으로 선출하고 김칠성, 박보렴, 최태규를 상무위원으로 새로 선거함으로써 자기의 통일애국사업을 한층 활성화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통협은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제시된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과 통일국가의 시정방침에 접하자 곧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그 실현을 위한 과업을 토의하였으며 석상에서 격문 《남조선정치인들과 각계 인사들에게》를 채택발표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통협에 망라된 재북인사들의 고령화는 어쩔수 없는것으로 되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60청춘, 90환갑이라고 하신 수령님의 말씀대로 청춘의 열기를 안고 혈기왕성한 기력으로 통일전선사업의 일익을 담당하여 자기의 임무를 언제나 빛나게 수행하였다.

통협은 8. 15해방 37돐을 맞는 1982년에는 백서를 발표하여 남조선에서 감행한 미제침략자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고발하였으며 조국해방 40돐을 맞는 1985년 9월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련명으로 고발장을 발표하여 남조선강점 40년기간에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서 저지른 갖가지 죄행을 준렬히 단죄성토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 민족끼리의 새로운 자주통일시대를 열어주신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통협의 활동은 중단없이 진행되였다.

통협은 조국통일운동선상에서 격동적인 사변이 있을 때마다, 북남관계에서 그 어떤 충격적인 계기가 조성될 때마다 미제와 그 주구들의 죄행을 까밝히는 격문, 죄행록, 고발장, 호소문, 편지 등을 발표하여 내외여론을 조선인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지지하고 반통일반동세력을 고립약화시키는데로 선도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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