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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어머니이며 삶과 행복의 요람입니다. 참된 삶과 행복은 조국의 품속에서 시작되고 꽃펴납니다. 조국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으며 이 세상에 조국보다 더 귀중한것은 없습니다.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합니다.》
새기면 새길수록
나는 북에 들어와서 《조국》이라는 이 말이 가지고있는 참의미를 똑똑히 깨달았다. 공화국인민들은 흔히 《조국의 품은 곧
공화국인민들은 어떻게 해서 조국에 대하여 이런 정의를 내리게 되였을가. 그것은 나라와 령토가 있다고 해서 참된 삶과 행복이 저절로
꽃펴나는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사실 반만년의 민족사에서 우리 조국땅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북아시아의 일각에 자리잡고있는 삼천리반도로서 북에서 남으로 뻗치여있다. 그러나 이 조국땅이 언제나 인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보금자리로 되여온것은 아니였다.
이 사람 개인의 생활과정을 놓고보아도 이것을 말할수 있다.
내 평생에 받은 가장 큰 정신적타격이 있었다면 그것은 열세살때에 체험했던 아버지(윤승원)의 학살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인민군대의 반격으로 고향땅인 전라남도 보성이 해방되기 이틀전인 주체39(1950)년 7월 23일 낮 아버지는 동행을 요구한 보성경찰서장이란자에 의해 그 어데론가 련행되여갔다. 사실 그때 당사자인 아버지는 물론 가족들도 이 련행행위를 두고 별로 근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50평생 살아오면서 해온 일이란 량심이 가리킨 일밖에는 다른 일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그러한 아버지가 그 이튿날에 민족주의적성분을 가지고있었던 보성군내 20여명과 함께 보성군 미력면의 산골짜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였다. 그것도 철사줄로 꽁꽁 묶여있은 상태에서였다. 변고를 전달받고 학살현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간 우리 가족들은 한걸음 먼저 도착한 마을의 김모씨가 뻰찌로 시신에 감겨있는 철사줄을 끊어내고있는 모습을 보고있을 때 억이 막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단 말인가. 《학산》이라는 호를 가지고있은데서도 볼수 있는바와 같이 아버지는 일찍부터 교육에 몸바쳐 온 사람이였다.
아버지는 전라남도 공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24살때부터 보성과 그 린접지역의 여러 보통학교들에서 교편을 잡고 교원생활을 하였다. 제자들이 아버지를 《민족혼을 심어준 은사》로 추억하고있듯이 아버지는 일본식민지당국의 관할하에 있는 학교들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도 줄곧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리 력사와 우리 글을 배워야 한다.》고 력설하며 이에 힘을 넣었다 한다. 그러한 아버지였기에 교원생활 14년만인 1938년에 돌변히 사표를 냈다. 당시 일제는 교원들을 회유하기 위해 근속년한 15년이 되는 교원들에게 《천황》명의로 된 《은급》을 받게 하였는데 아버지는 그 《은급》을 받는것으로 《천황》의 《신민》이 되는것을 거부하기 위하여 사표를 냈던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것으로 교육에서 손을 뗀것은 아니였다. 그후 아버지는 얼마 안되는 재산을 팔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돈을 장만하여 《양정원》이라는 사설강습소를 설립하고 돈을 받지 않고 교육사업을 계속하였다.
1947년까지 존속한 《양정원》에서는 2, 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8. 15후에 있은 리승만의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앞장섰었다.
과연 이런것이 아버지의 《죄》로 계산되였단 말인가.
아버지는 일찌기 몽양 려운형의 정치적립장에 동조하고 일제치하에서 그가 조직한 《건국동맹》에도 참여하였다. 이것이 또한 그의 《죄》로 계산되였단 말인가.
사실 아버지의 정치적립장에서는 제한성도 없지 않았다.
아버지는 《양정원》시절의 제자들이 리승만도당의 폭압에 반기를 들고 나왔을 때 《동족끼리 싸우면 절대 안돼》 하며 무작정 그것을 만류하기도 하였다. 어디 인민들이 느닷없이 싸우고싶어 싸우게 되는것이 아니지 않은가. 력사의 반동들이 총칼을 휘둘러대며 탄압하여 그에 맞서 싸우게 된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버지는 《동족상잔》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반항마저 자제할것을 제자들에게 설복하려 하였다.
물론 이런 《선의》를 반민족분자들이 알아줄리 만무하였다.
1948년 12월 아침 옛 《양정원》앞마당에서 경찰들이 보라는듯이 백씨성을 가진 아버지의 한 제자를 려수군인폭동에 련루시켜 학살하였다. 이런 학살이 그후 《양정원》운동장 주변에서 빈번히 벌어져 아버지의 많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끝내 아버지도 량심을 지녔다는 하나의 리유와 많은 제자들을 애국자로 키워왔다는 다른 하나의 리유로 무참히 생명을 잃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찌해서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땅에서 이런 참변을 당해야 하였으며 어찌해서 이런 비극이 나의 가정에 강요될수 있었는가.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된 하나의 조국건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해서 학살을 당하여야만 하는가?!
이런 물음이 거듭 어린 나의 머리에 갈마들며 그 답을 찾고있었다.
아버지 사후 우리 가정의 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연약하신 어머님은 셋째인 나와 유복녀로 태여난 막내누이를 포함한 우리의 7남매를 도저히 먹여살릴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린 우리 7남매는 여기저기로 흩어져 친척들 집에 얹혀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가는것은 어지간히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였다. 이에 견딜수 없던 나는 1955년에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을 떠나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난생처음 가본 서울은 생존경쟁의 복마전이였다. 서울의 인파속에 뛰여든 나는 문자 그대로 풍랑 사나운 날바다에 뜬 쪽배와도 같은 신세가 되였다.
먹고 살기 위하여 신문팔이와 구두닦기 같은 일에 매달리지 않을수 없었다. 고달프기 그지 없었다.
그런중에 다행히도 나의 구두닦기 단골손님인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의 주선으로 나는 어느 회사의 사환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비록 하는 일이 잡일이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신문팔이와 구두닦기보다는 나을상 싶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여 갈수록 나의 의식속에는 그 무엇인가 본인도 모르게 새로운것이 싹터가게 되였다. 그것은 곧 썩어빠진 남조선사회에 대한 반항의식이였다. 서울에서 체험한 갖가지의 정치적, 사회적부조리는 아버지의 피살이 남긴 깊은 상처를 새로운 상처로 헤집으면서 당시 아직 20살 안팎의 나이에 있던 이 사람을 사정없이 항거의 길에 떠밀어넣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조봉암선생을 당수로 하는 진보당에 입당청원을 하러 간 일로부터 시작되였다.
내가 진보당에 마음이 쏠렸던것은 이 당이 1956년에 있은 《대통령선거》에서 평화통일강령을 들고나왔으며 반통일분자들의 《북진통일》론에 도전해나선데 있었다.
사기협잡과 폭압의 소용돌이속에서 200여만표를 획득한 진보당과 조봉암선생의 혁혁한 성과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당에 참여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였다.
하여 어느날 나는 서울 종로구 장안동에 있는 진보당청사로 찾아가 입당을 요망하였다.
고향은 어디이고 부친은 누구이며 라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하여 입당청원을 하게 된 사유를 루루이 써넣고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후 얼마 안되여 조봉암선생이 나를 찾았다.
뜻밖에도 선생이 나의 아버지를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잘 왔다고 애석하게도 학살된 부친을 대신하여 민중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 바란다고 격려해주며 손수 나의 입당을 보증해주었다. 이리하여 나는 유일하게 학생신분으로서 진보당 당원이 되였다.
회사에서 잡일도 하고 고학도 하는 바쁜 속에서도 나는 시간을 더 짜내여 자원봉사활동형식으로 진보당사에 나가 아무 일이고 맡아 수행하였다. 듣는 말이 다 새롭고 힘이 났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사 회의실에서 있은 모임에 참가하여 조봉암선생의 열변을 듣기를 즐겨하였다.
선생은 어느 비공개회의에서 민족분렬을 반대배격하고 평화통일의 중요성에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친미, 친일파, 매국반역자들을 현해탄에 처넣고
선생은
8. 15직후
그때 나는 련락임무도 수행하고 포스터 붙이는 일도 맡아하고 아무튼 막내로 귀여워 해주는 진보당동지들이 맡기는 일이라면 아무 일이고 열성을 다 내여 수행하였다. 그러나 성수가 난 일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분렬주의자들이 반동공세를 취하여 《진보당사건》이 터지고 진보당의 당원들이 피검되였다. 애숭이 당원이였던 나도 례외가 되지 않아 붙잡혀가 졸경을 치르었다. 일은 이로써 끝나지 않고 죽산 조봉암선생이 끝내 《친북간첩》으로 몰려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야말았다. 기가 막혔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것만 같았다.
그후 진보당 부위원장이였던 김달호선생이 사회대중당을 결성하자 흩어졌던 동지들과 수많은 통일민주인사들이 거기에 모여들었다. 나도 그 대렬속에 있었다.
나는 사회대중당 중앙집행위원으로, 그리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의 통일방안심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4. 19의 열기가 계속 뿜어지는 속에서 정말 신바람이 났다. 우리는 시대에 역행하는 반통일세력에 압력을 가하면서 자주적평화통일의 구호를 계속 높이 들고나갔다.
그러던중 우리는 8. 15광복 15돐에 즈음하여
우리가 한 일은 보람있는 일이였다. 그것은 명실공히 겨레를 위하는 일, 인민을 위한 일이였다. 그러나 반인민적제도하에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차례지는것은 수난뿐이였다.
5. 16《군사쿠테타》가 터지고 통일을 향한 민중의 절규는 일시 좌절되고 자주통일의 흐름앞에는 차단봉이 내려졌다. 4. 19의 열매는 군화밑에 의해 유린되고말았다. 사회대중당도 《민자통》도 탄압당하고 3, 800여명의 각계 인사들이 파쑈적인 악법의 대상이 되여 옥고를 치르거나 정치활동이 10년간 금지당하였다. 나도 그 일원으로 난생처음 서대문형무소의 차디찬 감방에서 1년남짓한 옥고를 치르었다. 그리고 이에 이어 1980년의 5. 17폭거때에는 그 무슨 《조직사건》에 련루되여 또다시 감옥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폭압이 뒤따르는 속에서도 별로 뚜렷한 존재도 못 되였던 이 사람이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나 4. 19이후 40년동안 4월혁명연구소,
《민가협》량심수후원회, 《유가협》후원회, 진보와 지식인련대, 《민권공대위》 등 여러 인권단체 성원으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일에 적으나마
헌신할수 있었던것은
1970년에 있은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때
운동권에 들어선 그때로부터 세월은 흘러 나이 벌써 60을 넘기게 되였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북으로 더욱더 달리게 되였다. 이것은
어디인가 의지하고싶은
그리하여 나는 주체87(1998)년 11월에 드디여 월북의 길에 올랐던것이다.
공화국에 와서 내가 강렬하게 느끼게 된것은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조국땅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조국의 품으로 되는것이 아니라 안아주는
나는 우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루루이 서술하였는데 그것은 결코 보잘것없는 내 《자서전》을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공화국에서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수 있는가.
그것은
북에 들어와보니 《당은 어머니 모습》이라는 아주 서정적인 노래가 있다.
태여나 처음으로
눈에 익힌 어머니 얼굴
아기가 반기는
이 세상 기쁨이라네
아 어머니 있으면
아기는 언제나 어머니 있으면
마음을 놓네
이렇게 시작된 노래는 당의 모습,
나는 원쑤들의 고문만행으로 심장병을 얻은 사람이다. 그 후과로 심한 불면증을 안고있다. 그런데 서정적인 이 노래만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잠도 저절로 든다. 나도 조국의 품,
그렇다. 조국의 품은 곧
이제 멀지 않아 나만이 아닌 4, 500만 남녘겨레들도 이 품에 안기게 될것이다. 그것은 물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의미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