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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북반부로 의거하여온 남조선의 윤성식선생이
국내외기자들과 회견 주체87(1998)년 12월 29일
기자회견장소정면에는
기자회견에는 국내외기자들과 우리 나라 주재 여러나라 대사관 출판관계 일군들이 참가하였다.
윤성식선생은 남조선에서 조봉암선생이 당수로 있던 혁신정당인 《진보당》의 학생당원이였고 1960년 4월인민봉기에도 참가하였으며 1961년에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통일방안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인민의 기억에도 생생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를 내놓음으로써 조국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그후 《4월혁명연구소》 소장, 민중의 기본권보장과 량심수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민권공대위》) 감사를 비롯하여 재야통일민주운동권에서 활동하면서 남조선의 비전향장기수들과 량심수들을 석방하기 위한 투쟁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그 과정에 저술가로서 통일과 민주화에 관한 많은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기자회견에서는 먼저 윤성식선생이 공화국북반부에로 의거한것과 관련한 입북성명을 발표하였다.
나의 월북은 인생사의 획기적전환이고 영광의 순간이다
윤성식선생은 입북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남에서 40여년간 통일민주화운동에 몸 담아오던 내가 용약 월북하게 된것은 나의 인생사의 획기적인 전환이고 영광의 순간이라 아니할수 없다.
나는 일찍부터 북을 유일한 조국으로 생각하며 동경해왔다. 그 기저에는 아버지의 사상적영향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할수 있다.
부친은 일제통치시기 말부터 광복과 6. 25전쟁에 이르기까지 민족교육자로서 려운형선생과 함께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그 맹원으로서 조국의 광복과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해왔다.
광복직후 부친은 빈번히 서울에 올라와 려운형선생을 만났는데 그 과정에
부친은 몽양 려운형선생과 함께
한편 나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더우기 오늘
나는
나는 전도가 유망한 북에서,
월북한 저에게 온갖 보살피심을 아끼지 않으시는
이어 윤성식선생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보안법》철페는 통일대문의 빗장을 벗기는것이나 같다
로동신문사 기자:선생의 구체적인 경력에 대해 알고싶다.
대답:나이는 61살이고 출생지는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이다. 입북전 주소는 경기도 안산시 본오3동이다.
건국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2년졸업하였으며 일본 도꾜법정대학 대학원 1년 수료하였다.
월북전 직업은 자유기고가, 저술가였다.
《한겨레신문》, 《말》잡지, 《래일신문》,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회보와 남쪽의 188개 대학 학보사 등에 기고하였으며 저술한 책으로서는 단행본 《미국의 대중공봉쇄정책에 관한 고찰》, 《통일로 가는 길》이 있다.
《통일로 가는 길》은 지난해 11월에 출판되였는데 이 책의 주되는 내용은 《보안법》철페와 량심수석방문제, 《4월혁명》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 남쪽에서의 민간통일운동문제,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에 관한 고찰 그리고 《전대협》 간부들과 비전향장기수, 량심수들의 편지 등 45편의 글을 편집하여 묶은것이다.
조선중앙텔레비죤 기자:선생이 소장으로 사업한 《4월혁명연구소》가 어떤 활동을 하고있는가.
대답:이 연구소는 4. 19정신을 계승하여 투쟁하는 통일운동단체로서 자주, 민주, 통일을 정치적강령으로 하고있다. 정회원은 90명이고 자료회원이 1 000명인데 자료회원이란 자료를 받아보는 사람들로서 여기에는 비전향장기수, 량심수, 재야단체 인사들이 속해있다.
연구소는 매월 1회씩 《4월혁명회보》를 만든다. 지난 4월 명칭을 실천적으로 《4월혁명회》로 개편하였다.
《4월혁명상》을 제정하여 수여하는데 그
민주조선사 기자:최근 남조선의 통일민주운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어떤것들인가.
대답:통일운동의 선봉대들인 범민련 남측본부와 《한총련》에 대한 《리적단체》규정을 철회하고 이 단체들의 활동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있는것이다.
지난 9월 3일 남쪽에서 《민권공대위》가 결성되였는데 여기에는 《민주로총》, 《전교조》, 《한총련》, 범민련 남측본부, 《4월혁명회》, 《민가협》, 《유가협》과 종교계 등 수많은 재야민주단체들이 망라되였다.
《민권공대위》는 창립선언문에서 첫째로 범민련 남측본부와 《한총련》 등에 대한 《리적단체》규정철회와 자유로운 통일론의, 민간통일운동보장문제를 들고나왔는데 이것은 이 문제들이 범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있다는것을 실증해주는것으로서 남《한》의 통일민주운동에서 새로운 움직임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주목되는것은 또한 《보안법》철페와 량심수석방투쟁이 전례없이 힘차게 벌어지고있다는것이다.
사실 남《한》에서 반통일악법인 《보안법》이 철페되면 통일의 대문에 가로 질린 빗장을 벗기는것이나 같은것이다.
때문에 남《한》의 재야단체들은 여기에 모를 박고 투쟁하고있으며 이에 민중이 적극 호응해나서고있다.
남쪽민심은 북으로,
평양신문사 기자:남조선인민들이 망국적인 신탁통치로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있다고 하는데 지금 남쪽민심동향은 어떠한가.
대답:국제금융의 신탁통치이후 남쪽사회의 계급분화는 20:80으로부터 10:90으로 전환되였다. 10은 소수 반동부유층이고 90은 빈곤층이다.
남쪽의 10:90사회에서 90에 해당되는 근로민중의 마음은 자연히 북으로 쏠리고있다.
특히
제국주의자들의 끈질긴 압력과 봉쇄속에서도 끄떡하지 않고 공화국을 강성대국으로 만들어나가시는
지금 남쪽에서
박용길녀사는 방북하고 돌아온 다음 나를 비롯한 몇사람들과 같이한 자리에서
온 민족이 우러르는
하기에 정주영씨는 기자회견시에 계속
이렇게 지금 남쪽에서
북은 미래가 밝은 우리 민족의 조국이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공화국에 와서 느낀 소감은 어떤것인가.
대답:북에 온것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북은 미래가 밝은 유일한 민족의 조국이라고 확신한다.
우선 북의 전통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였다.
또한 애국렬사릉에서 내가 이미부터 알고있던 홍명희, 리기영, 허헌, 백남운, 김규식, 엄항섭, 리현상, 조봉암, 최백근 등 애국지사들의
생동한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영생의 언덕에 내세워주신
다음으로 공화국이 자주성이 있고 강한 주체의 조국임을 느낄수 있었다.
자주성을 지키려면 국력이 강해야 하는데 북은 힘이 강하기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의 고립압살책동이 계속되는 속에서도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있다.
북의 힘은 다름아닌
우리 민족의 조국은 강성대국으로 변모되는 공화국이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