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민족의 통일기치
나는 입북후
나는 배달민족의 피가 혈관속에서 흐르고있는 사람이라면 《조국통일의 앞길에 그 어떤 난관과 장애가 가로놓여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나는 이남의 당국자들에게도 다소나마
나는 외세를 제 할애비처럼 섬기고 받들었던 사람들이 결국 외세로부터 어떠한 대접을 받았었고 또한 어떻게 운명을 마쳤는가에 대해 외세의존의 치욕의 력사를 통하여 심각히 돌이켜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세란 한마디로 말하여 내가 아닌 남이다.
우리 나라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비록 혈연관계에 있는 친척, 인척이 아니더라도 서로 이웃을 하고 살면 가까운 사이가 되고 어려운 때이면 이웃끼리 친척이상으로 서로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말이였다.
그러나 《이웃사촌》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존재하고있는 동족사이에서 이루어질수 있는것이지 외세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질수 있는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몇개의 생활적인 실례를 들어보자.
우선 단재 신채호선생이 《완벽한 매국노》라고 지탄하였던 리승만은 미국을 자기의 《제2의 조국》으로 극찬했던자이다.
미국이란 나라는 겨우 200여년전에 유럽땅의 산지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가 되여서 그런지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조국이란 개념은 모호한 상태에 있다. 그런데도 리승만은
그런데 그가 할애비처럼 섬긴 그 미국이 사실 애초부더 그를 어떻게 대접했던가.
1919년 빠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있었다. 외세의존사상이 골수에 꽉 들어찬 리승만은 그때 거기에 출석하여 렬강들에 《독립》을 호소하려고 시도하였다.
바로 그 12년전인 1907년 헤그에서 있은 만국평화회의에서 고종의 밀사 리준이 렬강들에 《독립》을 호소하다가 실패하고 모멸당한 그 울분으로 할복자결한 력사의 교훈이 있었음에도 이 사대매국노는 애오라지 미국을 믿고 미국의 후원하에 빠리만국평화회의에 가려 하였다. 물론 그는 여차직하는 경우에 배를 갈라 자결할만한 의지라고는 조금도 가지고있지 못한 작자였다. 다만 어떻게 하나 빠리만국평화회의연단에 한번이라도 등단하여 이름이라도 남겨보려 했던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기도는 미국에 의해 보기좋게 거절당하고말았다.
당시 민족자결론을 제창한것으로 소문을 낸 미국의 28대 대통령 윌슨으로 말하면 리승만이 《은사》로 떠받들던 사람이다. 그는 리승만이 미국의 프린스톤대학 재학시에 이 대학총장을 지냈던 사람이기도 하였다. 대학총장으로서 리승만에게 《박사》학위증서를 수여했던 사람이 바로 윌슨이였던것이다. 그 《스승》이 일본식민지에서 온 《제자》의 국제평화회의 참가요청을 거절하였을뿐아니라 자기가 《민족자결론》을 언제 제창이나 했느냐는듯이 빠리만국평화회의에 가서도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하여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미국으로서는 일찌기 일본과 가쯔라-타프트밀약으로 식민지를 나누어 먹는 판에 조선의 독립문제같은것에 관심할리 없었으며 그러니 그런 국제회의에 리승만을 참가시켜 일본과 마찰을 일으키는것을 원치 않았던것이다.
리승만은 이처럼 자기의 외세상전으로부터 처음부터 배신을 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미국의 대조선정책의 충견 식민지주구로서 이 나라를 동강나게 한 그 《공》이 거대했음에도 4. 19항쟁이 일어나자 상전으로부터 외면당하여 민족분노의 분화구에 던져지고말았다.
유신도당은 리승만보다 한술 더 떠서 《성조기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할것》을 상전에게 밀약했으나 미국의 식민지위기 수습책으로 력사의 제단에 《희생양》으로 바쳐지고말았다.
외세에 의존했다가 파멸당한 망국노들의 비극이 어찌 남조선땅에서만 존재했다고 볼수 있겠는가. 어느해에 남조선의 《신동아》지에 남부윁남의 느고 딘 디엠괴뢰가 미《씨아이씨》의 모략에 의해 비참한 운명을 당한 긴 글이 실린바 있었다.
나는 그 글을 보면서 그것이 결코 흥미거리로 실린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 위정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실린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어떤 경우에도 결코 《보호자》로 되여줄수 없는것이 외세인것이다.
신다가 낡아지면 헌신짝처럼 버림받게 되는것이 외세의 주구노릇을 하는 사람들의 운명인것이다.
인민들은 외세를 섬기는 매국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디에서든지 외세에 의존하는 매국노들에 있어서 파멸은 타고난 운명이다.
그런데 이남에는 민족의 념원을 외면하고 시대의 추세에 역행하는 사람들이 있어 유감이다.
반통일분자들은 무엇을 믿고 분렬과 대결의 길로 나가려고 하는가. 그들은 두말할것 없이 미국을 믿고 하는것이다.
일러두거니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래 2000년 현재로 55년동안에 미국을 통치해온 10명의 대통령들과 차례차례로 겨루면서 적어도 큰 사변들을 통하여 다섯번이나 미국으로 하여금 흰기를 들게 한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강자가 다름아닌 우리의 공화국이다.
공화국이 미국으로 하여금 첫번째로 흰기를 들게 한 사변은 두말할것 없이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만 3년 1개월 걸린 조선전쟁에서였다.
이 전쟁에 관여한 미국대통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인 33대 대통령 트루맨과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세계대전 참전자인 아이젠하워였다.
풍부한 전쟁《경험》을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방대한 물적, 인적, 기술적력량을 동원하고도 끝내 견디여 내지 못하고
1961년 초에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제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 케네디의 말은 의미가 있었다. 그는 《미국은 더는 전지전능이 아니다. 우리 인구는 세계인구의 6%밖에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의사를 인류의 나머지 94%에 강요할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조선침략전쟁을 통해 미국의 《강대성》의 《신화》가 박살난 사실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미국은 케네디가 한 이 말에서 모종의 교훈을 찾으려 하지 않음으로써 1968년에 또 한번 공화국앞에 흰기를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것이 바로 《푸에블로》호 사건이였다. 《푸에블로》호란 말이 나왔는데 지금 평양의 대동강반에 전시되여 있는 이 간첩선을 입북후 나도 참관할
기회를 가졌다. 이 간첩선이 전시되여 있는 곳이 1866년 미국침략선 《셔먼》호가 평양인민들의 투쟁으로 격침된 장소와 가까운데 있어 참
인상적이였다. 간첩행위를 하다가 나포된 《푸에블로》호의 해적무리 80여명이 항복표시로 두손을 쳐들고있는 장면의 사진을 보니
그러나 미국은 어쩌지 못하였다. 숱한 무력을 동원하여 위협공갈에 매달렸으나 미국은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것이라는
그무렵에 미국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선거운동이 벌어지고있었다. 그때 공화당대통령후보로 출마한 닉슨이 큰 소리를 쳤다. 닉슨이 대통령이 되자 석달만에 위세를 시위하려는듯이 고공전략정찰기 《이씨-121》을 공화국령공으로 띄워보내였다. 그런데 그 《이씨-121》은 조선인민군의 단 한방에 의해 박살이 나고 거기에 타고있던 놈들은 한순간에 동해바다에 수장되고말았다. 닉슨 역시 그때 선거운동때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감히 공화국에 덤벼들지 못했다.
닉슨이 안절부절 못하고있을 때 미국의 한 언론지가 《북조선은 사나운 말벌둥지와 같다. 말벌둥지는 쑤셔놓았다가는 걷잡을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말벌둥지와 같은 북조선에 대해서는 애당초 건드리지 말고 가만 내버려두는것이 제일 좋다.》고 썼는데 참 실감있는 야유라고 생각했었다.
미국은 그때 확실히 큰 실책을 범하고있었다. 그 실책이란 그들이 무엇인가 중요한것을 모르고있었던데서, 그래서 헤덤비며 공화국에 달려든데서
범한 실책이였던것이다. 나는 입북한 후 학습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미국이 당시 어떤 실책을 범하고있었는가를 알게 되였다.
미국은 그후 《판문점사건》을 일으켜 조선반도의 정세를 전쟁발발의 문어구에까지 몰아가다가 결국 공화국앞에 흰기를 들었고 1993년과 1994년사이의 《핵》소동끝에 공식적인 항복문서인 조미기본합의문에 도장을 찍는것으로 또 공화국앞에 흰기를 들었다. 미국은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후 여러번씩이나 공화국앞에 흰기를 들었다.
왜 이 글에서 이런 알려진 력사적사실을 루루이 다시 상기시키게 되는가?
새삼스러운감이 있겠지만 이남의 일부 무분별한 우익보수정치인들에게 교훈을 찾을것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1999년의 발칸전쟁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 미국은 제2의 조선전쟁을 도발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지겠는가를 알기 위해 콤퓨터의 건반을 두드려댄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전쟁발발 첫 3개월만에 미군이 5만 2, 000명이 죽을것이라는 산출결과가 나왔다. 미국은 3년 1개월 걸린 1950년대의 조선침략전쟁에서 죽은 미군의 수를 5만으로 공식발표하고있다. 그런데 제2의 조선침략전쟁을 도발할 경우에 첫 3개월동안에 벌써 그것을 릉가하는 수자가 콤퓨터의 화면에 나타났다. 그래서 백악관과 펜타곤의 전쟁상인들은 기절초풍하여 《아서라》 하며 콤퓨터앞에서 물러나 앉고말았다.
민족의
남조선정치인들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외세의 총포에 의지하여 공화국을 어째보려는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자살행위로 된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들자신도 서명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3대원칙을 실현하는데로 돌아서는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것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자주의 원칙을 지키려면 미국의 식민지상태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하며 평화통일의 원칙과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지키려면 동족과의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여 통일문제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 바로 여기에 이남정치인들의 출로가 있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3대원칙을 지키려면 련방제방식에 기초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
이 인덕정치야말로 조국의 통일을 위한 참정치이다. 나는 공화국에 영주하면서 이것을 더 깊이 깨달았다.
어느덧 21세기가 다가오고있다. 조국광복이래 벌써 여러 세대가 자랐다. 조국광복의 해에 태여난 사람들이 50대의 중년기가 되도록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 현실을 어찌 방관할수 있겠는가.
이남의 정치인들이 애국, 애족의 정신을 가지고 통일의 길에로 나갈것을 호소한다. 력사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