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의 신념
공해가 없어 그런지 북의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유난히도 총총하다. 그 별들을 쳐다보느라면 남에 두고온 동지들과 혈육들의 생각이 몹시 난다. 저 별들은 신통히도 인권의 동토대에서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생기를 잃지 않고 통일열망으로 가슴을 불태우는 남녘민중의 숨결과 같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월북의 길에 오를 때 그것을 그 어느 동지에게도 지어 한점의 혈육인 외동딸에게조차도 말하지 못하였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수도 없는 북행길에 오르면서말이다. 그네들이 나의 입북으로 인하여 고초를 겪지 않을가 하는 근심과 념려에서였다. 이러한 비인간적고통은 나와 나의 가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여러 형태의 억압과 탄압에 의해 남녘민중은 수난도 많이 겪었고 희생도 많이 당했다. 그러나 수난과 희생이 아무리 컸어도 민중은 좌절을 몰랐다. 좌절은 고사하고 민중은 어둠이 더욱 짙을수록 새벽별처럼 더욱 빛났다. 5. 16《군사쿠데타》가 있은 직후 1년여에 걸쳐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을 때에도 나는 그 빛나는 별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때 형무소에서는 이따금씩 아침식사에 《특식》이란것이 나왔다. 《특식》이라야 콩알 몇알이 더 섞인 꽁보리밥덩이에 자그마한 돼지비게 한쪼박이 둥둥 뜨는 멀건 무우국 한사발이였다. 사상범들은 그 《특식》을 목에 넘길수가 없었다. 그런 《특식》의 지급은 곧 사상범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을것이라는 예고로 되였기때문이다. 파쑈광들은 구속자들에게 정신적압박감을 주기 위하여 사형집행이 있는 날 아침이면 이런 《인도주의》를 베풀군하였던것이다.
《특식》이 제공된 얼마후이면 의례히 감방사이의 좁은 복도로 소위 《넥타이공장》으로 일컬어졌던 사형장으로 압송되여가는 사형수의 발걸음소리가
들리고 이어 형장입구에서
만세를 웨친 그 주소, 성명도 알수 없는 주인공들은 파쑈에 의해 육체적생명은 빼앗겼어도 정치적생명은 더욱 빛나게 살아있는것이다. 아니 그네들만 빛을 뿌리는것이 아니라 그 빛발로 만사람의 가슴가슴이 통일애국열의로 높뛰게 한것이다.
남조선의 법정에서는 종종 심판을 하는자와 심판을 받는자의 위치가 역전되군 한다. 내
그 내용의 몇 토막을 소개한다.
재판관:《평화통일이란 용어는 이북에서 쓰고있는 말인데?!…》
조봉암:《평화통일이란 말은 민중의 공동된 의사를 반영한 말이다. 민족의 통일방도를 모색한 적중한 말이다. 이북에서 평화
통일이란 용어를 썼다고 하여 우리가 그 말을 쓸수 없고 쓰면 처벌한다는 론리는 강박이며 웃음거리이다. 가령 북에서
〈밥〉이란 말을 쓴다고 해서 우리는 그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으며 또 〈밥〉은 〈밥〉이지
〈떡〉이나 〈죽〉이라고 할수 없지 않은가.》
검찰관:《진보당의 통일론과 정강정책은 〈반공국시〉에 위배되는데 인정하는가?》
조봉암:《나는 〈반공국시〉 그자체를 부정한다. 국시란 일반적으로 국가의 기조정책을 이름할진대 우리 민족은 과거에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며 민중이 자유를 찾고 행복을 누리는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 싸워왔다.
이 성스러운 조국광복투쟁에서 원쑤들의 감옥과 교수대도 두려움없이 피흘려 싸운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는가.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것은 그 누구도 부정 못한다. 그러니 공산주의자들은 적대세력일수 없다.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것은
론리이전의 문제이다. 더우기 〈반공〉을 자기의 정치적반대세력을 제압하는 발판으로 삼는것은 언어도단이고 용서를
바랄수 없는 정치적강도행위이다.
민주주의와 자주정신이 꽃피고 우리 민족이 참생활을 누리는 살기좋은 사회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공〉이 아니라
마땅히 민주주의를 국시로 삼아야 하는것이다.…》
죽산 조봉암선생은 사형수로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으나 언제나 락관적이였다. 그것은 그가 재판을 받으며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기간에 그에 의해 그곳에서 《죽산조》라는 새로운 새 이름이 생겨난데서도 알수 있다.
선생은 자기가 갇혀있는 감방의 창턱에 새들이 날아와앉는것을 발견한 이래 그 창턱에 보리밥에 섞인 콩알을 골라 갖다놓군 하였다. 그리하여 새들은 그와 친숙해지게 되고 늘 날아와 그 콩알을 쪼아먹고는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군 하였다. 죽산선생은 자기의 포부와 자기의 신념을 새들에 실려 창공에 날려보낸것이다.
그는 생의 마지막날인 1959년 7월 31일도 옥창턱에 콩알을 놓는 그 일과를 잊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새들이 콩알을 쪼아먹고 날아도는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감방문을 나서 형장으로 향하였다.
그는 아주 평온한 마음을 안고 교수대에 오르면서 이렇게 마지막말을 남겼다.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통일운동과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보안법〉은 조속히 철페되여야 할 악법이기때문에 내가 그것에 의한 마지막희생자가 되길 바랄뿐이다.…》
죽산 조봉암선생이 이 유언을 남긴 때로부터 벌써 40여년 세월이 흘러갔다. 우리는 1999년 7월 31일 그의 희생 40돐을 맞았다. 40년이 지나도록 조국의 통일도 실현되지 못하였고 《보안법》은 여전히 통일의 차단봉으로 살판치고있다. 그속에서 그간 각양각색의 모략사건이 조작되고 그 수를 헤아릴수 없는 애국자들이 여러 《사건》들에 련루되여 모진 고초를 당하거나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에 있은 이야기를 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가려 한다.
1989년 4월부터 8월 사이에 남조선에서 각이한 세대에 속한 두 사람이 반통일법위반으로 몰려 오라를 졌다. 그중 한 사람은 종교활동과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문익환목사였으며 다른 한사람으로 말하면 이해 7월 평양에서 있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치르어지면서 비로소 그 이름이 알려진 남조선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의 녀학생 림수경이였다.
당시 전자는 이미 71살의 로인이였으며 후자는 그때 겨우 21살의 꿈많던 처녀였었다.
문목사로 말하면 그는 강도적인 《한일합방조약》으로 온 겨레의 통곡이 강산에 차넘치고 비분의 눈물을 강물에 뿌리며 기미년독립만세를 터친무렵에 걸음마를 뗀 사람으로서 파란많은 민족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늙어온 사람이다. 그러나 림수경은 60년대의 4. 19도 체험하지 못하고 그 항쟁의 폭풍이 있은 때로부터도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고고성을 울린 새 세대이다.
문목사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뒤늦게 발을 들여놓았다고 하여
하여 그들은 과감하게 방북을 단행하고 통일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꼭같이 《잠입탈출죄》, 《회합죄》,《찬양, 고무, 동조죄》를 들씌워 중형을 적용하고 한사람에게는 《5001》호, 다른 한 사람에게는 《73》호의 수인번호표식이 붙은 꼭같은 색갈의 죄수복을 착용시키고 투옥시켰다.
그러나 이런 탄압으로 남녘겨레의 통일애국지향은 그 무엇으로써도 막을수 없다. 이미 타계한분이지만 방북후 법정에서 밝혔던 통일운동에 대한 문목사의 소신표명은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고 본다.
문목사는 분단에서 오는 치욕을 벗는것이 통일운동이고 민족의 아픔, 민족의 비극을 청산하는것이 통일운동이며 민중을 해방시키는 일이 통일운동이고 흑백(분단)론의와 도덕력의 파괴를 극복하는것이 통일운동이며 또한 세계사적역할을 수행하기 위한것이 통일운동이고 우리 민족을 커지게 하기 위한것이 통일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어떻게 〈반공〉을 하겠는가, 반공을 한다는것은 통일을 안하자는 이야기밖에 안된다. 〈반공〉을 하면서 어떻게 통일을 할수 있겠는가》고 법관들에게 론박하였다.
림수경도 방북후에 있은 재판에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정권》에 통일을 맡겨놓을수 없기에 청년학도는 하나가 되여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에 의한 조국통일을 앞당기고저 한다고 하였다.
법정에서 울려나왔던 문규현신부의 항변은 사람들의 심금을 더욱 울렸다.
그는 반민족분자들이 《편견이라는 벽돌로 15척이 넘는 회색빛 감옥담장을 아무리 쌓고 또 쌓아도 자유로운 리성과 민중의 드높은 통일열망을 가로막을수 없다.》고 절규했었다.
문신부는
비전향장기수의 산생은 분렬과 파쑈에 대한 애국과 량심의 가장 집중적인 항거의 표시이다. 비전향장기수라는 술어는 남조선특유의 술어로서 그것은 파쑈적억압과 폭력을 휴지쪼각으로 만든 신념과 의지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한 비리성적폭력과의 대결에서 이긴 쪽은 언제나 비전향장기수들이였으며 지는 쪽은 언제나 부정의와 반통일세력이였다. 신념과 의지의 화신 리인모가 자기의 사상을 고이 간직한채 34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감옥문을 나서면서 그것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남출신의 비전향장기수 김선명동지의 경우를 보아도 그는 간단히 지장 하나만 찍으면 지척에 있는 어머니의 품에 안길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상과 량심을 지켜 70나이에 이르도록 45년간의 옥고를 이겨냈다. 이 45년간에 그가 받은 면회건수는 관선변호사의 면회를 비롯해 겨우 7회밖에 안된다. 평균쳐서 6년 3개월에 1회꼴로 면회를 받았다는 소리이다. 그통에 그는 언어기능마저 마비상태에 빠졌다. 원쑤들은 어떻게 하나 그를 세상과 철저히 격리시켰던것이다. 그러나 이긴것은 혁명적신념이였고 진것은 악의 폭력과 질서였다.
남조선민중의 기본항로는 이미 정해졌다. 남조선인민들은 자주, 민주, 통일투쟁의 기발을 높이 들고 승리의 대안을 향하여 힘차게 노저어가고있다.
재삼 강조컨대 어길수 없는 항로, 그것은 곧 자주, 민주, 통일의 항로인것이다. 남조선인민들이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하여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새 생활을 확보하기 위한 자주, 민주, 통일의 항로에 들어서는것은 응당한것이다. 그것은 남조선사회의 자주화, 민주화, 조국통일을 달성함이 없이는 도대체 식민지노예의 무거운 멍에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수 없기때문이다. 민중이 이 진리에 도달한것은 가장 의의있는 사변이다.
자주, 민주, 통일의 항로에 들어선 민중의 앞길을 밝히는 휘황한 등대가 있다. 그 등대란 자주의 나라 주체사회주의조국이다.
남조선인민들은 1990년대의 격변하는 세계정세를 통해 똑똑히 보았다.
나는 의거입북후에 가진 어느 기자회견석상에서 시종 주도권을 틀어쥐고 제국주의침략자들을 쥐락펴락하며 승전고를 련속 울리고있는 공화국의 기상은
신통히도 60년전의 고난의 행군때 《토벌》에 나선 《대일본》제국의 방대한 관동군을 피동에 몰아넣고 끌고다니면서 파멸적타격을 안긴
조선인민혁명군의 기상 그대로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이런 사실은 이남민중이 자주의 궤도에 확고히 들어서서 민주와 통일을 성취하려면 주체의 성지 북을 따라야 하며 자주정치의 화신이신
어둠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