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정 창 모 (미술가)
• 1931년 12월 16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
• 1950년 가을 인민군대 입대.
• 1957년 평양미술대학 입학.
• 1974년 6월 만수대창작사 미술가.
• 2010년 7월 12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인민예술가, 예술학박사.
재능은 타고난다는 말이 있다.
하여 이 세상 명인, 재사들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이야기하는 많은 일화들이 전해져오는것이다.
허나 아무리 뛰여난 재능과 비범한 용기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 재능과 용기가 다 빛을 본것은 아니다.
여기에 우리 나라의 이름난 조선화화가의 한사람이였던 정창모가 생의 말년에 남긴 말이 있다.
《좋은 종자도 비옥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태양의 열과 빛을 받아야 알찬 열매를 맺는다. 내가 미술가로서 성공했다면 특별히 재능이 있어서보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우리 민족의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였기때문이다.》
북녘땅에서 다시 찾은 어린 날의 꿈
미술가 정창모의 고향은 전라북도 전주이다.
민족의 머리우에 검은구름이 드리운 1931년 12월에 그는 가난한 로동자가정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정인성은 표구술에 능하였고 외할아버지 리광렬(호는 효산)은 전라도 300년 회화사에 이름을 남긴 서예가, 문인화가였다.
리광렬은 전주시내에서 전도유망한 젊은 화가들을 키우기도 하였는데 그중에는 민족회화사에 이름을 남긴 리응로도 있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였던지 정창모는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정창모는 같은또래의 아이들처럼 철없는 장난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어른스럽게 올방자를 틀고앉아 어른들의 그림시중도 들어주었으며 외할아버지가 그것을 기특하게 여기여 붓과 종이를 주어 그림을 그리게 하면 너무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어린 창모의 눈에 비껴지는것은 언제나 아름다운 산과 들, 꽃과 새들이였다.
어지러운 세월속에서 오직 그림만이 아름다웠고 그래서인지 그의 마음에도 미술이라는 아름다운 꿈이 조용히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어린 그는 때로 자기의 팔뚝보다 더 긴 붓을 들고 부지런히 무엇인가 그리군 하였다.
그의 재능을 제일먼저 알아보고 기뻐한것은 외할아버지였다.
리광렬은 외손자가 별로 배워주지 않았는데도 그림을 신통하게 그리는것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기였다.
그는 외손자에게 매일 붓과 종이를 주어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품들여 그것들을 보아주며 일일이 평가해주군 하였다.
비록 서당이 아니라 초라한 집안의 초가밑이라 해도 이것은 엄격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였다.
같은또래의 아이들이 장난으로 바지를 꿰치고 손발이 진흙범벅이 될 때 어린 창모의 손과 옷은 색감에 젖어있었다.
창모는 5살때에 벌써 그림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그가 그린 해돋이며 국화꽃, 앞산 등 고향의 산천과 꽃들을 보고 어른들은 혀를 찼으며 마을사람들로부터 《꼬마명인》이라는 칭호도 받군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유년시절에 잠시잠간 있었던 이야기에 불과하다.
정창모의 가정에서는 어린 창모가 그림에 애착을 가지는것을 재롱스레 보았어도 장차 이름난 미술가로 키울 결심은 하지 못했었다.
정창모가 7살 나던 해인 1938년에 전주 완산국민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였다.
그는 크레용화 《아침해》를 그렸는데 그림이 너무나도 신통하여 당시 아동미술전람회에 출품되였다.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은 정창모의 재능을 알게 되였고 그는 학교에서 《꼬마화가》로 불리웠다.
일찌기 시인 리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고 노래한적이 있다.
정창모라는 미래의 새싹이 미술이라는 푸른 하늘을 향해 아무리 잎새를 펴보려고 해도 일제에게 빼앗긴 이 땅이라 그 싹이 피여날 곳이 없었다.
언제인가 정창모가 소학교때 도화교과서의 그림을 모사한것이 있었는데 왜놈선생이 괜찮다고는 하면서도 얄밉게 쳐다보며 찢어버리였던 일도 있다.
조선아이가 재간이 있다는것이 심보사나운 일본놈의 심술을 다쳤던것이다.
부모들은 어린 아들이 기특하여 재능을 꽃피워줄 생각은 간절했으나 방도는 없었다.
외할아버지 역시 어린 외손자를 미술가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또 바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여러가지 리유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중요하게는 집처지가 그것을 용인할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탓이였을것이다.
가난은 어린 창모의 손에서 붓과 종이를 점점 멀리하게 하였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경치수려한 고향산천이건만 거기서 흘러보낸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은 정창모에게 눈물겹도록 아픈 상처만을 남기였다.
나라가 해방된 이후에도 정창모는 미술공부를 할 생각을 가지지 못하였다.
성인이 거의 다된 중학시절에도 그는 시내에서 열리는 미술전람회나 학교내의 미술소조에도 다닌 일이 없다. 전북중학교에도 유화가인 미술교원이 있었고 미술소조도 운영되여 소묘도 하고 수채화도 그리는것을 알고있었지만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박병수라는 대부호가 자기 돈으로 화구를 사서 미술애호가들을 받아들여 미술연구소를 운영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박병수는 드문히 거리나 학교마당에서 풍경을 그리였다. 정창모는 호기심에 이끌려 다 리해되지는 않았지만 화면과 대상을 번갈아보면서 기법도 생각하고 그림으로 표현되는 효과가 어떤것인가 하는것을 느껴보려고 하였다. 아마도 천성적으로 가지고있는 미술가로서의 재능이 고개를 쳐들었던것 같다.
그리고 미술연구소에 들어가 공부를 해서 미술가가 될수 없을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였으나 이내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고말았다.
그때 정창모는 형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과목에 열중하고있었던것이다.
그의 형은 미제와 리승만역도의 반인민적정치를 반대하여 지하투쟁을 하고있었는데 정창모도 그의 영향을 받아 계급적으로 각성하였으며 남조선민주학생동맹에 가입하여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차츰 철이 들면서 그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자면 미술이 아니라 무엇인가 실질적으로 사회에 이바지할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순수 미술만을 갈망하던 그는 참다운 사회가 없이는 배움도 없으며 설사 미술을 배웠다 하여도 진정한 삶이 없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의 세계관형성에서 전환적계기로 된것은 참다운 민주주의가 보장되고있는 북조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반부의 현실을 알게 되였을 때부터였다.
정창모는 공화국북반부의 출판물들을 통하여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령도아래 인민정권이 세워지고 사람들 누구나 참다운 생활을 누려가고있는 공화국을 동경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대에 의해 전주가 해방되자 제일먼저 인민군대에 찾아가 자기에게도 일을 맡겨달라고 제기하였다.
그는 전북중학교 민청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혁명적으로 더욱 각성되였으며 그후에는 빨찌산부대에 입대하였다.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려고 했건만 일제식민지통치시기 그것은 가슴속에 묻어만 두어야 했던 꿈이였다.
전쟁의 준엄했던 그날엔 붓이 아니라 총을 먼저 잡았던 화가에게는 아직도 화판이 너무도 멀리에 있었다.
이 땅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왔으니 그것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된것이다.
시련은 사람들을 검증한다.
승리에 대한 신념이 부족한자들은 남으로 갔고 오로지 김일성장군님 한분만을 믿고 따른 사람들은 북으로 향했다.
정창모도 추위에 새빨갛게 언 맨주먹을 움켜쥐고 북행길에 올랐다.
누가 그를 강요한것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이 이 민족이 살고 조국이 하나가 되는 참된 애국의 길임을 알고 스스로 후퇴하는 인민군대를 따라 멀리 강계까지 걸어갔다.
1950년 11월 정창모는 강계에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영웅적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 이렇게 그는 병사가 되였다.
그는 자기의 키만 한 장총을 메고 때로는 전호를 파고 피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영영 꿈을 버렸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화가는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것을 화폭에 옮기는 예술가이며 예술가의 심장은 사랑으로 불타야 한다고. …
그렇다.
병사시절은 그에게 있어서 미술가가 지녀야 할 가장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의 심장을 주었으며 강의한 의지와 담력을 키워주었다.
비록 아직은 화폭에 담아야 할 수려한 산과 들이 불에 타고 강물우에선 폭탄이 튀며 물기둥이 솟아올랐지만 화가의 심장에선 미래에 그리고 또 그려갈 아름다운 조국이 그려지고있었다.
그는 붓이 아니라 총대로 사랑하는 조국의 대지우에 자유와 평화라는 가장 아름답고 신성한 화폭을 그려가고있는 사람들이 바로 병사라고 생각하였다.
우연이라 할가, 뜻밖에도 포화속에서 그가 진짜 붓을 들 행운의 기회가 찾아왔던것이다.
치렬한 전투를 일단락 결속한 련합부대가 전선에서 후방으로 배비변경되여 어느 한 산골짜기에 있을 때였다.
그때 부대에서는 《정각 5시 30분》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병사들앞에서 공연하게 되였는데 이 연극의 창조과정에 한가지 큰 골치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부대안에 극작가와 배우 그리고 작곡가는 있었으나 유독 무대미술가만은 없었던것이다.
한동안 궁리를 짜내던 지휘관들은 무작정 그를 불렀다.
지휘관들은 별로 키가 크지 않고 단단하게 생긴 병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동문 부대직관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림을 그릴줄 알겠군. 이제부터 무대미술을 맡아야겠소. 명령이요.》
《알았습니다.》
그는 군소리없이 대답은 하였지만 정말 자신도 놀라웠다.
총포탄이 우박치는 전장에서 그림을 그릴줄이야…
하지만 화가의 심장은 벌써 흥분하였다.
지휘관들이 마련해준 자그마한 창작실안에 들어선 순간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하였다.
총을 메고 걸어온 조국강산의 수려한 산발들과 강들, 협곡들, 벌판들…
그 모든것이 눈앞에서 하나의 거대한 화폭으로 안겨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붓을 들어 무대배경을 그려나갔다.
승리한 조국땅에 펼쳐질 그 아름다운 조국산천을.
그가 그려나가는 험한 산발과 깊은 계곡, 수려한 수림과 언덕, 실실이 늘어진 나무잎새들과 맑은 개울물에 놓인 징검돌들, 가리마같이 난 오솔길들은 준엄한 현실과는 너무도 대조되는것이였다.
무대배경그림은 관람자들의 대절찬을 받았으며 이로 하여 그는 부대안에서 당당한 미술가로 인정받게 되였고 이때부터 정창모는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벽보발간과 속보를 맡아하던 정창모는 군무자미술전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창작하게 되였다.
그는 며칠간을 고심하다가 자기가 애독하던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을 련상하였다.
산비탈 바위우에
청년 한분 버쩍 올라선다
후리후리한 키꼴에
흰 두루마기자락이
대공으로 솟아오르려는
거센 나래같이 퍼덕이는데
온몸과 팔과 다리-
모두다 약진의 서슬에 불붙고
서리발 칼날의 시선으로
싸움터를 단번에 쭉- 가르며
《한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부르짖었다
바른손 싸창을
바위아래로 번쩍이자
마지막 발악 쓰던 원쑤 두놈이
미끄러지듯 허적여 뒤여진다-
《한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재쳐 부르짖었다
이는 이름만 들어도
삼도 왜적이 치떠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큰 산을 주름잡아 한손에 넣고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축지법을 쓴다고-
북천에 새별 하나이 솟아
압록의 줄기줄기에
그 유독한 채광을 베푸노니
이 나라에 천명의 장수 났다고
백두산두메에서 우러러 떠드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
그는 여기서 창작적령감을 받았던것이다.
제목은 홍산골전투였다.
큰 바위우에 서시여 싸창을 높이 드시고 전투를 지휘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을 화면의 중심에 크게 모시고 유격대원들이 돌격해내려가는 용감한 형상과 적들이 무리로 녹아나는 장면을 그리자, 이것이 그의 결심이였다.
작품을 그리느라고 그는 며칠밤을 새웠다.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은 신문, 잡지를 참고로 하고 대원들의 모습은 화보를 보고 골라서 배치하는 방법으로 그렸다.
부대내에는 이러한 전투장면을 찍은 사진이 얼마든지 있었던것이다.
이 작품은 려단전람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이름난 미술가도 아닌 그가 그런 대담한 창작을 한 그 밑바탕에는 백두산의 호랑이 김대장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견딜 충동과 흥분이 차고넘쳤기때문이였다.
청소한 공화국이 미제를 쳐부시고 승리한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령도가 있었기때문이라는것을 절감한 병사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깊이 체험하고있었기에 수령님의 령도업적을 형상하고싶은것은 그의 막을수 없는 신념이고 열망이였다.
그 시기 정창모의 기량이 물론 높다고는 볼수 없었다.
그러나 수령님에 대한 그의 흠모심과 열정이 하도 높았기에 그림에서 홍산골의 설경과 전투환경은 비교적 잘 형상되였었다.
그림속의 풍경은 병사생활기간 많이 보고 느낀 우리 나라 동해안의 험산준령을 그려넣었다.
정창모가 제대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심사숙고한 끝에 미술공부를 하겠다고 선택하게 된것은 아마도 군사복무기간과 많이 련결되여있다고 볼수 있다.
이렇게 놓고보면 그의 미술가로서의 생활은 포연이 자욱하였던 군사복무시절에 시작된것이 아닌지.
그러나 디딤돌이 마련되였다고 하여 저절로 미술가로 되는것은 아니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57년 9월 그는 미술대학 전문부 조선화과 2학년에 편입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미술전문공부가 시작되였다.
그러나 대학의 강의실은 그가 무대배경이나 그리던 부대의 자그마한 화실이 아니였고 대학의 교원들은 그의 속사만 보아도 입을 벌리던 단순한 애숭이들이 아니라 엄격하고 요구성높은 사람들이였다.
다른 학생들의 실력에 비해볼 때 그의 수준은 매우 낮은 상태였다.
희망과 포부는 컸지만 날이 갈수록 자기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고 화가가 되려던 어린 날의 꿈은 저 멀리 아득한 무지개로만 보이였다.
미술은 예술이고 기교였으며 그보다도 학문이였다.
천성 하나로는 이 거대하고 기묘한 학문을 달통할수 없는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강의를 받으면서도 미술이라는 거물앞에서 주춤거리고있었다.
난처한것은 그의 실기수준이 너무도 낮은것이였다.
그때의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그는 언제나 뒤떨어졌다는 자책감과 따라잡아야 하겠다는 분발심을 습관적으로 가지게 되였다.
실제적으로 그는 한번도 1등을 해보지 못한 달리기선수처럼 학급동무들의 맨 뒤꼬리에서 그저 남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가까스로 뛰는 학생이였다.
고민이 어찌나 컸던지 그가 한번은 미술을 포기하고 전공을 바꿀 생각까지 한적이 있었다.
이러한 그를 만난 소묘지도교원인 담임선생 김장환이 그에게 훌륭한 조언을 주었다.
담임선생은 그에게 미술의 기초공부를 다른 동무들보다 10년이 늦어서 시작했으니 남들보다 10배의 노력을 해야 따라잡을수 있다, 앞선 동무들이라 해서 전망이 확고하다고 말할수 없다, 지금 출발선에 서있는것이나 같은데 벌써 신심이 없으면 영영 뒤떨어지고만다, 1~2년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꾸준히 따라앞설 각오를 가지고 분발하고 또 분발하면 먼 후날 꼭 결실을 보게 된다, 미술이라는 학문을 배워 명예를 빛내일 생각에 앞서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주고싶어 하는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에 보답할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한다고 깨우쳐주었다.
김장환은 대학기간 그의 굳어진 손목을 풀어주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고 조선화를 그리려면 필력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권투를 할것을 권고하였다. 미술과 권투는 아무리 촌수를 따져보아도 공통점을 찾을수 없었다. 하지만 선생의 권고이고 조선화화가에게 있어서 권투의 순간속도, 강타의 힘이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는 말할수 없으며 또 화가 리석호도 유술 5단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던지라 정창모는 열심히 권투를 배웠는데 한때 대학선수로 경기에 나가기까지 하였다.
제대군인이고 남쪽에 고향을 둔 무의무탁생인 그에 대하여 학급동무들은 무던히 아껴주고 실기실력을 높이도록 의견도 주면서 실망하지 않도록 마음써주었다.
1960년대에 조선화에서 이름을 날린 리창은 정창모와 한학급이였는데 뒤떨어진 그의 소묘실력을 높여주기 위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정창모는 리창의 소묘를 참고로 하여 자기의 실기실력을 높여나갔다. 정창모가 리창과 보다 가깝게 지내게 된것은 그의 아버지 리용악이 쓴 시집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리용악은 일제통치시기부터 진보적인 문예활동을 한 애국시인으로서 해방후 서울에서 혁명적인 문학활동을 벌리던중 1949년 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다가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의 서울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그후 공화국의 품에 안긴 시인은 조국과 민족앞에 훌륭한 시들을 창작하여 내놓았다.
정창모는 리용악의 《평남관개시초》를 애독하였으며 시인의 창작에서 펼쳐지는 인민들의 창조적생활에 대한 기쁨과 랑만의 세계,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시적화폭을 자기의 미술작품에 담으려 하였다.
그의 학창시절은 참으로 감동적인 사연들로 엮어진 감격스러운 보람찬 나날들이였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학습과 생활에 필요한 침구류와 의복류 그리고 교과서를 비롯한 온갖 학용품과 미술기자재들은 물론 장학금까지 배려해주었다.
공화국은 그에게 진정한 미술가가 지녀야 할 모든것을 가르쳐주었고 사랑과 우정, 동지를 준 그의 집이였다.
참으로 그의 미술수업의 나날은 민족의 어버이의 뜨거운 사랑과 선생님과 동지들의 헌신적인 노력속에 흘러갔다.
이 나날에 그는 차호녀와 결혼하였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미술가가 안해를 선택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한다.
정창모는 외형미보다도 인간적미를 더 중시하였다.
결혼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리상적인 결합이 이루어져 창작에 도움이 되자면 어떤 녀성이 필요한지 그는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동서고금의 적지 않은 미술가들이 미인과 련관되여 명작들을 창작하였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렘브란뜨와 《사스키야를 무릎에 앉힌 자화상》, 크람스꼬이와 《미지의 녀인》, 고야와 《마하부인》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정창모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화가의 녀성관이라 할지, 결혼관이라 하겠는지 그는 녀성을 택하는데서 외적미만을 중시하지 않았다.
정창모는 자신이 일점의 혈육도 없는 형편에서 자기를 일생 끝까지 믿고 리해해줄수 있는 녀성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솔직히 화가자신도 키가 작고 녀성을 끄는 매력이란 별로 없는, 그래서 그자신의 말을 빌면 《못생긴 사람》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기는 특별히 고운 처녀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착한 마음에 복이 온다고 했던가.
그의 녀성관이 아마도 화가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1963년 6월 친구의 소개로 차호녀라는 처녀를 알게 되였다.
처녀는 건설전문학교를 나온 원림기사로서 신문에도 소개된 모범일군이였다.
만나보니 소박한것이 마음에 들었고 이야기해보니 속이 깊고 진실한것이 좋았다.
더 재여볼것도 없고 알아볼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만난지 한주일만에 복숭아 2kg와 술 1병을 사가지고 가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것으로 약혼식을 하고 한달후에 결혼식을 하였다.
그때부터 차호녀는 그와 동고동락을 하면서 서로 충실한 혁명동지로 사랑하였고 화가인 그가 창작에 전심하도록 가정을 꾸려나갔다.
결혼초기 부족한것이 많을 때나 유족하게 살 때나, 작은 살림집에서나 네칸짜리 고급살림집에서 살 때나 그들은 늘쌍 마음편하고 검박하게 살았다.
그들은 서로 리해하였고 자기 할 일에 몰두하였으며 가정에서 다툼질도 없었다.
안해는 30년나마 한개 단위를 책임지고 사업하면서 남편을 잘 공대하고 아껴주었으며 세 아이를 잘 키워 내세웠다.
화가가 평생 창작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은 밑바탕에는 이렇게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를 위해준 안해의 숨은 노력도 깔려있었다.
화가는 사랑하는 안해와 함께 고마운 공화국의 품속에서 살면서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집걱정을 모르고 지내온 행운아였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행복이였고 조국이였다.
보람찬 미술창작활동의 나날에
정창모가 훌륭한 미술가로 된 바탕에는 언제나 그의 높은 열정과 사색, 엄격한 창작적요구가 어려있다.
더 진실하게.
더 훌륭하게.
더 독특하게.
더 아름답게.
이것은 미술가로서 그의 창작적요구였다.
옛사람들이 말하길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인류력사가 흐르고흘렀어도 세계적인 명화들과 더불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레삔과 같은 재사들을 기억하고있듯이 우리의 주인공 정창모도 자기의 훌륭한 명화폭들과 함께 명망높은 조선화화가로 미술사에 뚜렷한 한페지를 차지하고있다.
정창모는 수령형상작품을 조선화로 훌륭히 형상해낸 이름난 미술가들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직업적인 미술가로서의 첫걸음을 위대한 수령님의 형상을 창조하는것으로 내디딘 대담한 조선화화가이다.
미술대학졸업을 앞둔 그는 생각이 너무나 많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로운 사랑과 따뜻한 보살피심속에서, 교원들의 세심한 지도와 방조속에서 꿈같이 흘러간 학창시절!
어느덧 졸업작품을 창작할 때가 된것이다. 사회와 인민앞에 미술가로서의 첫선을 보이는 졸업작품을 창작해내야 하는 그의 생각은 깊어만 갔다.
그럴수록 그의 뇌리에는 일제의 압제하에서, 미제의 폭정하에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헤매이던 자신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 먹여주고 입혀주고 따뜻이 이끌어주시여 어엿한 미술가로 키워주신 수령님의 하해같은 은정이 가슴사무치게 안겨왔다.
(어버이수령님이 아니시였다면 오늘의 나를 생각이나 할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버이수령님을 형상하자.
나라를 찾아주시고 우리 인민에게 자주적삶을, 창조적인 삶을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이 자애롭고 인자하신 그 영상! 만민의 태양으로 솟아오르신 어버이수령님의 영상을 형상하자!)
그는 자신의 사상예술적기량이 너무도 미약하다는것을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고심어린 사색과 탐구의 나날이 흘러갔다.
그는 현지습작으로 서해가의 어느 한 어항을 찾아갔다.
여기서 그는 이른새벽 이곳에 오시였던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름할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되였다.
갈매기도 아직 잠에서 깨여나지 않은 이른새벽 기슭을 치는 파도소리만이 들리는데 짙은 안개속 진창길을 걸으시며 이곳 해변가에 찾아오신 수령님.
전쟁의 피해가 채 가셔지지 않은 선창에 오신 수령님께서는 출항을 앞두고 일손을 다그치는 나이지숙한 한 어로공에게 다가가시여 조용히 말씀을 건네신다.
미제와의 피어린 싸움에서 승리한 용감한 우리 인민, 허리띠를 졸라매며 전후복구건설에 떨쳐나선 우리 인민에게 더 많은 물고기를 먹이려면 어떻게 하는것이 좋겠는가고.
한없이 고결하고 인자하신 수령님앞에서 크나큰 감격에 목이 메여 자기의 속생각을 띠염띠염 말씀올리는 어로공.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화폭인가.
수령님은 인민을 믿고 인민은 수령님을 친어버이로 받들어모신 화폭, 이것이야말로 만민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고결한 풍모를 담을수 있는 숭엄한 화폭으로서 정녕 력사와 더불어 조국청사에 길이 전해야 할 대서사시적화폭으로 될것이다.
정창모는 이 화폭을 형상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창작사업에 모든 심혈을 기울이였다.
대학의 교원, 학생들모두가 그의 창작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였으며 지도와 방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미술대학에서 처음으로 조선화로 형상되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을 모신 작품이기때문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수령형상작품은 유화로만 형상할수 있는것으로 인정되여왔으며 산수나 화조를 위주로 한 종래의 조선화화법으로는 엄두도 못내는것으로 알고있었다.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조선화로 형상된 인물화들은 주로 선묘법을 위주로 하여 형상하였으므로 다양한 인간들의 성격과 섬세한 내면세계를 형상하는데서 부족점이 많았다.
벅찬 우리 시대, 자주시대를 향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하자면 종전의 고루한 형상방법을 대담하게 극복하고 새로운 조선화화법을 창조해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학창시절에 사색과 탐구의 고비를 넘으면서 연구한 조선화의 전통적인 화법인 몰골법을 기본으로 하고 산 인간의 성격과 내면세계, 현대적미감을 다 표현할수 있는 새로운 조선화화법을 창작실천에 구현할 결심으로 대담하게 창작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우리 시대 인간들의 미감에도 맞고 작품의 주제사상에도 부합되는 새로운 인물화법을 창조해냈으며 그 화법으로 수령님의 영상을 훌륭하게 형상해냈던것이다.
처녀작인 졸업작품 조선화 《배머리에 오신 수령님》은 이렇게 창작완성되였다.
그림은 부드럽고 유연한 색채로 조화통일되여있고 자그마한 부분과 세부까지도 빈틈없이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치있게 그려짐으로써 친근감을 줄뿐아니라 커다란 미적정서를 불러일으키였다.
그의 창작적성과는 우리 나라 미술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정창모는 이 작품의 창작을 계기로 미술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졸업작품의 창작으로 미술창작의 첫 출발을 장식한 정창모는 1966년에 조선화 《북만의 봄》을 세상에 내놓아 또다시 미술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에게는 오래전부터 소중히 간직해온 하나의 작품소재가 있었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을 반영한 작품으로서 원쑤격멸의 성전에 용약 떨쳐나선 항일유격대 녀대원을 형상하는것이였다.
대학생시절에 혁명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통하여 싹트고 무르익혀온 이 소재는 본격적인 창작생활에 들어선 그를 몹시도 흥분시켰다.
항일혈전의 준엄한 폭풍우속에서 한몸바쳐 나선 유격대녀대원, 남성들도 감히 나서기 주저했던 그 간고한 투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자기가 타고 온 군마에게 물을 먹이는 녀대원.
험산준령을 질풍같이 달려온 군마를 정겨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녀대원은 무엇을 생각하는것인가.
녀투사는 가렬처절했던 지나온 나날과 앞으로 있게 될 조국해방의 희망찬 앞날을 그려볼것이다.
일가식솔을 한날한시에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젖먹이 어린것을 남의 집 문턱에 남겨둔채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가까스로 옮겨디디며 투쟁의 길에 나선 녀대원.
그러나 그에게는 희망이 있다.
위대한 장군님만 믿고 따르면 조국해방의 려명은 반드시 밝아오리라는 드팀없는 신념이 확고히 자리잡고있는것이다.
그러기에 녀대원의 표정은 사색적이면서도 어두움을 모른다.
바야흐로 엄혹했던 겨울은 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알리는 자연환경은 녀전사의 소박하면서도 강의한 성격과 풍만한 정서속에 잘 어울리고있다.
그는 창작에 온 심혼을 다 바쳤다.
동평양경마장에 나가 말의 각이한 자세와 동작을 습작하고 상원군의 어느 산골짜기에 들어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눈석이물도 그렸으며 겨울을 난 버들개지의 싹트는 모양과 설레이는 갈대들도 놓치지 않고 취재하였다.
특히 녀주인공의 원형을 찾아내는 일에 그는 모든 정력을 다 바쳤다.
암중모색하던 끝에 드디여 그 원형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듯 하였다.
본격적인 작품창작에 들어가면서 정창모는 전통적인 조선화기법의 하나인 몰골법을 전면적으로 적용하였다.
물기흐르는 유연한 필치로 생동하면서도 간결하게 형상한 조형적처리는 녀대원의 형상뿐아니라 강의한 기질을 가진 말의 형상 그리고 시내가의 눈석이형상과 이른봄에 움터오는 버들개지와 갈대들이 진실하게 안겨오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조선화를 창작발표함으로써 그는 일약 신인화가의 대렬에서 벗어나 조선미술계의 당당한 중견으로 인정받게 되였으며 이 작품은 세상에 발표되자마자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선화 《북만의 봄》은 이전 쏘련과 뽈스까에서 진행된 미술전람회에서 높은 호평을 받았다.
늦어서 미술의 길에 들어선 그가 그 어떤 특출한 재능이 있어 조선화의 명화가로 자라났겠는가.
그것은 혈혈단신으로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그를 따뜻이 품어 공부시켜 내세워주고 재능을 꽃피워준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의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렬하였기에 그는 첫 졸업작품으로 수령님의 영상을 모신 조선화를 창작해냈고 항일혁명투사들을 형상한 작품도 성공시킬수 있었다.
정창모가 미술가로서 창작활동을 벌리던 초시기 우리 나라 미술분야에서는 조선화에 비해 유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고 유화가들의 실력과 년한이 조선화가들에 비하여 우위를 차지하고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72년 9월 6일 당시 우리 나라 미술계에서 나타난 편향들을 분석총화하시고 앞으로 우리의 미술분야에서는 조선화를 발전시키는데 힘을 넣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 방향과 방도들을 명확히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유화도 물론 그려야 하지만 그보다도 조선화를 더 장려하고 많이 그려야 한다, 미술가들이 우리의 원료와 자재를 가지고 조선화를 그리며 앞으로 미술작품을 세상에 들고나갈 때에도 조선화를 들고나가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정창모는 이때부터 위대한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를 받으며 조선화화가로서의 자기의 재능을 더욱 활짝 꽃펴나갈수 있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나라의 종합적인 미술창작기지를 꾸리실 원대한 구상을 안으시고 만수대창작사를 내오시고 유능한 창작가들을 망라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이를 계기로 미술부문에서는 혁명적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수령형상창조사업이 줄기차게 벌어지게 되였다.
이 격동적인 시기에 정창모는 만수대창작사에 소환되여 새로운 창작적열정을 안고 창조사업에 달라붙었다.
그의 보람찬 예술창조사업의 나날들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와 관심을 받으며 성장한 잊을수 없는 날들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그린 《설맞이에 오신 수령님》을 보시고 그림이 참 좋다고 하시며 외국의 수반들에게도 보여주시였다.
언제인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정창모와 여러 미술가들이 집체로 창작한 《꽃밭》을 보시고 그림을 참 잘 그렸다고 하시며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이렇듯 위인의 사랑속에서 정창모는 조선화의 권위있는 대가로 자라나게 되였다.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지도밑에 조선화 《남반부인민들과 담화하시는 어버이수령 김일성동지》, 《농민들의 영농사업을 지도하시는 존경하는 김정숙동지》를 비롯한 백두산위인들의 불멸의 영상작품들과 함께 《금강산계곡》, 《백두산》, 《동해의 아침》, 《용광로가 보이는 바다가》 등 주옥같은 풍경화들을 련이어 창작하였다.
그가 조선화 《흰구름피는 창성땅》을 창작하였을 때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작품을 보아주시면서 그림이 지나치게 연하며 중심에 있는 양몰이처녀가 말을 타고 채찍을 쥐고있는데 이것은 우리 식이 아니라고, 우리 인민의 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 현실에 철저히 발을 붙이고 미술작품을 창작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정창모는 우리 혁명실천에 복무하는 미술이란 어떤것인가를 똑똑히 알게 되였고 《흰구름피는 창성땅》은 명작으로 완성되여 그후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좋아하시는 금강산의 비봉폭포를 그리는 영예로운 과업을 정창모에게 맡겨주시고 초안과 본작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지도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정창모가 창작활동에서 거둔 성과를 높이 평가하시여 그에게 1976년에는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를 표창하여주시였으며 그 이듬해 2월에는 공훈예술가의 명예칭호도 안겨주시였다.
그 사랑 그 믿음에 보답하고저 정창모는 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려나갔다.
그가 창작한 수많은 미술작품들은 국보적가치를 가지는 명작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였으며 이전 쏘련과 중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열린 국제미술전람회에서 절찬을 받았다.
작품창작에서 구현된 그의 형상적특징은 색조가 부드럽고 여운이 있는것이다. 이러한 부드럽고 여운있는 정서적깊이는 독특한 창작방법에 의해서 실현되였다. 풍경을 그릴 때 그는 단필법을 중시한것이 아니라 몰골법에 의거하면서도 일정한 단계를 설정하고 점차적방법으로 자연을 그려냄으로써 필치가 거칠거나 생경하지 않으며 부드럽고 깊이있는 색조로 대상의 형태미와 색채미를 훌륭히 살려주었다.
실경 즉 실제의 자연경치를 보면서 실제와 같게 재현하는 실경산수의 론리에 충실하면서도 그는 궁극적으로는 거기에만 얽매이지 않는 회화적환상을 실현하였다. 형태해석과 표현에서도 고도의 숙련을 전제로 하면서 형태의 륜곽과 음영, 운동감 등을 잘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을 본 남조선의 한 미술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날카로운 선, 부드러운 색… 그의 작품은 기기묘묘한 경관을 신비경으로 이끌어가는 시각적인 효과를 가지고있다.
그의 몰골기법은 신묘하다고 할만큼 뛰여난데서 더욱 빛을 발휘한다.
형태해석의 그 세련미는 고도의 숙련된 필치에서 비롯된것이고보면 필법의 완성도를 론할 단계를 넘어섰음을 알수 있다. …
그는 거의 감각적으로 기운생동을 구현하고있다고 할수 있다.》
정창모의 창작에서 특기할 측면의 하나는 그가 조선화의 고유한 형상분야의 하나인 화조화와 정물화발전에 특출한 기여를 한것이며 조선화의 전통적인 기법의 하나인 몰골법을 계승발전시켜 그 력사적명맥을 이어놓은것이다.
그는 미술가로서의 첫걸음을 떼던 시기에 리석호의 실기지도를 받았다. 리석호는 목적이 뚜렷하고 탐구력이 있으며 자기의 의사를 리해할줄 아는 과묵한 정창모에게 관심을 가지고 제자로 키울 생각을 하였다. 리석호는 미술박물관에 정창모를 자주 데리고 나가 조선봉건왕조회화 특히 오원 장승업의 몰골그림의 형상방법에 대하여 분석적으로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창작실에 돌아와서는 《련꽃과 물고기》, 《게》 등 장승업의 우수한 몰골그림을 묘사해보도록 하였고 조선화 몰골창작에서 해결하여야 할 붓다루기기술, 감성적으로 정화된 색채형상방법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인내성있게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리석호는 자기가 평생을 두고 숙달한 기술과 기교를 고스란히 넘겨주려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배워주었다.
리석호와 정창모가 함께 금강산그림창작을 위해 려행한 일이 있었다. 그때 리석호는 조그마한 수첩과 연필 하나를 가지고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습작했는데 실지 수첩에 그린것은 별로 없었다. 정창모는 가는 곳마다 커다란 화판을 펼치고 자연의 구체적변화까지 그리느라고 해저무는줄 모르고 열심히 습작하군 했는데 숙소에 돌아와보면 바람벽에 자기가 그린 작품보다도 더 훌륭하게 완성된 리석호의 그림들이 걸려있는것을 보고 놀라군 하였다. 리석호가 휴식하는 참에 그의 수첩을 몰래 훔쳐보니 거기에는 그림이 아니라 몇개의 선과 점으로 구도작업만을 해놓은것이 있었다.
이렇게 리석호는 많은것을 머리에 새겨넣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였는데 본질적인것은 놓치지 않고 화면에 담았기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늘 높은 경지에 이르군 하였다.
리석호는 하루 그린 여러점의 소품가운데서 마음에 드는것만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태워버렸는데 그때마다 정창모는 그의 등뒤에 서서 그림이 타는것을 지켜보면서 많은것을 생각하였다.
정창모의 창작생활에서 중요한 측면은 사색을 깊이하고 붓을 아끼는것이며 일단 붓을 든 다음에는 완전히 그 세계에 빠져버리는것이다.
한번은 그가 묘향산 상원동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좀처럼 그릴념을 않고 대상에 대한 관찰만 하는것이였다.
그러다가 몇개의 붓자리만 남기고 돌아왔다. 여러명의 후배들이 현지에서 돌아와 그가 그림을 그리는것을 보려 했으나 좀처럼 볼수가 없었다.
곁에 사람이 와서 지켜보는것도 모르고 깊은 사색에 잠겼던 그는 갑자기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려나가는것이였다.
한순간에 묘향산 상원동의 웅장하고 수려한 자태가 방불하게 나타났다.
그의 걸작품중의 하나인 《묘향산 상원동》은 이렇게 창작되여 세상에 발표되였다.
그는 자기 세대의 미술가들이 조선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현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켜야 할 사명을 지녔음을 깊이 자각하고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미술후비들을 양성하였다.
우리의것을 지켜내고 우리 인민의 감정과 기호에 맞게 조국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자랑하려는 애국의 마음을 안고 분계연선도시 개성과 판문점에서부터 백두산과 압록강, 금강산과 칠보산, 묘향산과 구월산, 약산동대, 몽금포 등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명승고적과 명소를 비롯하여 농촌과 어촌 그 어디라 할것없이 조국땅 곳곳에 발자국을 새겼다.
그 나날에 그는 수많은 명화들을 창작하여 나라의 재부를 늘였다.
풍요한 대지에 뿌려진 씨앗은 태양의 빛발아래서 락락장송으로 자랐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89년 정창모의 예술적재능과 미술작품창작에서 이룩한 성과를 높이 평가하시여 그에게 인민예술가칭호를 수여하도록 해주시였다.
인재는 나라의 재부이다.
허나 그 인재의 재능도 꽃피워주는 품이 있어야 빛을 낼수 있듯이 정창모는 공화국의 품이 있었기에 자기의 참다운 재능을 꽃피울수 있었던것이 아니겠는가.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싶다
언젠가 정창모는 기회가 있어 남조선에 있는 가족친척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싶다.》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통일된 조국이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행복이 커지고 명성이 높아질수록 혈육들이 그립고 기쁨을 나누고싶은 마음 간절했다.
의지가지할데 없는 홀몸으로 빈 배낭 하나만 메고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는 늘 통일의 날을 간절히 바라면서 자기가 누리는 행복한 생활을 그들에게 보여주고싶어 하였다.
통일을 그처럼 갈망하는 그였기에 외세에 의해 분렬된 조국의 아픔을 두고 그리도 가슴아파했으며 자기의 심정을 화폭에 그대로 담았다.
정창모의 통일주제작품들은 보면 볼수록 누구나 분렬의 아픔을 통절히 느끼게 한다.
개성에서 자동차길로 20분가량 남쪽으로 가면 판문점에 다달은다.
화가는 여기 림진강과 한강이 합쳐진 강이라 림한강이라 부르는 강기슭에서 그 옛날 아담한 농가였으리라고 생각되는 집터와 낡은 우물자리를 보았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심장은 솟구치는 격정으로 터질듯 아파났다.
(아, 어느 놈이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가.
나라의 분렬을 강요한 외세가 아니였다면 이 나라 백성의 꽃다운 보금자리가 펼쳐지는 곳일진대 이 림한강기슭의 오붓한 집은 간데 없고 황페한 집터와 우물자리만 남았구나.)
화가는 가슴아픈 정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분노의 뜨거운 웨침을 화폭에 담아 만천하에 고발하는 고소장으로, 미제를 단죄하는 판결문으로 삼으리라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3부작으로 된 조국통일주제의 풍경화를 구상하였고 평양에 들어와 창작완성하였다.
먼저 《장벽을 넘어오는 철새》를 그렸고 두번째로 《분계선의 옛 집터》를, 세번째로 《림진강의 눈석이》를 그렸다.
《분계선의 옛 집터》에는 한가정의 보금자리였던 집터에 분계선이 지나가 수십년세월 황페화된채로 내버려진 비참한 정경이 생동하게 형상되여있다.
무너진 집터에는 기둥이나 서까래가 이미 썩어 없어졌고 토방의 대돌자리만이 알릴듯말듯 잡초속에서 얼굴을 내밀고있다. 허물어진 우물의 돌틈에 새로 돋아난 복숭아나무에서 봄이 온듯 꽃들이 피였다.
정창모는 자기 작품을 통하여 이러한 비극을 낳은 원쑤들에게 철추를 내리고 우리 겨레모두에게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한결같이 떨쳐나설것을 뜨겁게 호소하였다.
《장벽을 넘어오는 철새》 역시 이 땅의 허리를 동강내여 겨레의 비극을 가져오게 한 미제를 비롯한 분렬주의자들을 준렬히 단죄하면서 반세기가 넘도록 분렬의 쓰라림을 겪고있는 이 현실을 더이상 지속시킬수 없으며 반드시 조국통일은 성취되고야만다는것을 짙은 화폭의 형상을 통해 가슴뜨겁게 보여주고있다.
철새들은 인공적으로 구축해놓은 분렬의 장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데 어찌하여 같은 피줄을 가진 겨레, 부모형제들은 한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한단 말인가.
《림진강의 눈석이》에서는 분렬주의자들이 아무리 날뛴다 해도 굳게 얼어붙은 분렬의 장벽은 봄날의 눈석이처럼 조만간에 녹아 없어져버릴것이라는것을 형상적으로 확인시키고있다.
림진강은 그 물줄기가 분계선을 따라 내려와 서해로 뻗은 조국분렬의 상징적인 강이기도 하다. 하도 많은 가지가지의 멍든 사연을 안고 유유히 흐르는 림진강!
이 강을 낀 산야에도 해빛 따사로이 비쳐 눈석이가 시작되였다.
속절없이 사그라져 없어지는 겨울철의 엄혹했던 자취, 바야흐로 새싹들이 움트기 시작할것이다.
작품은 이렇듯 풍경화형식의 서사적화폭을 통하여 조국통일의 날은 반드시 오고야말것이라는 심오한 사상을 펼쳐보이고있다.
정창모는 이외에도 《남반부인민들과 담화하시는 어버이수령 김일성동지》, 《기러기떼》, 《분계선마을》, 《광야의 철새》, 《4. 19의 용사들》 등 많은 작품들에서 조국통일에 대한 우리 인민의 념원과 희망, 신심을 예술적향기에 담아 예리하고 강렬하게 호소하는 정서깊은 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하였다.
태양의 은혜로움은 만물에 빛을 주고 생을 주는데 있다.
인류가 높이 받들어모신 위대한 태양의 빛발아래서 풍요한 대지에 뿌려진 씨앗은 어느덧 락락장송으로 자랐다.
그에게 원이 있었다면 그것은 조국이 통일되여 고향에 있는 형제들과 만나는것이였다.
그는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 성원으로 남조선에 갔던적이 있다.
이때 이름난 조선화대가가 온것을 알고 남조선기자들이 정창모미술전람회를 하자고 건의해나섰다.
전시장이라고 만들어놓은데를 먼저 가보니 자기의 본작품은 대여섯편이 됨직하고 모두가 가짜그림들이였다.
그래서 그는 이런 그림을 가지고는 전시회를 할수 없다고 하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남조선에서 태여난 사람이다. 하지만 나를 세상이 다 아는 인재로 키워주신분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이시다. 인간의 존엄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참된 삶을 빛내여주는 고마운 사회주의제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내가 오늘과 같은 유명한 미술가로 될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결코 그 혼자의 심정만이 아닌 이 땅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열렬한 감정의 웨침이였다.
사랑하는 혈육들과 헤여져 살아야 하는 아픔을, 분렬의 고통을 늘 페부로 감수하며 살아온 정창모는 가슴속에 차넘치는 통일열망을 담아 누이동생들에게 《통일조국 만세!》라는 글발을 써주고나서 이런 말을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함께 모여살 통일의 날도 멀지 않았다.》
평양에 돌아온 그는 그날이 한시라도 빨리 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말하던 누이동생들의 간절한 눈빛을 정말 오래동안 잊을수 없었다.
이것은 전체 조선민족의 간절한 념원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정창모는 민족의 통일념원이 담긴 명작들을 훌륭히 창작해낼수 있었던것이다.
혈육들과 만나고 온 후 그는 새해가 시작될 때면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꼭 화폭에 담으려고 합니다.》
화가는 통일된 조국을 그리도 담아보고싶어했지만 일생토록 분렬의 아픔만을 그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화가가 바란 통일된 조국.
그것은 민족모두가 통일을 바라고 통일을 위해 투쟁할 때 반드시 오고야말것이다.
* *
어머니조국에 바치는 뜨거운 열정을 안고 정창모는 2010년 사망하기 전까지 근 40여년간의 창작생활기간에 불멸의 수령형상작품과 국보적인 작품을 비롯하여 수천여점의 미술작품들을 남기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사상예술성이 높은 미술작품들을 창작하였을 때마다 친히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아주시면서 못내 기뻐하시였다.
그 나날에 그는 김일성상계관인, 인민예술가, 예술학박사칭호와 함께 높은 국가수훈과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사랑의 선물을 받아안았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서 그는 이전 쏘련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 타이 등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진행되는 미술전람회들에도 참가하여 주체미술의 영예를 떨치였다.
어린시절 꿈으로만 간직되여있던 그의 미술적재능은 이렇게 위인들의 해발아래 활짝 꽃피여 열매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