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김 승 구 (작가)

 

                        • 1914년 7월 12일 충청남도 아산군 령인면(당시)에서 출생.

                        • 1937년 5월부터 극단 중앙무대 문예부장.

                        • 1945년 9월부터 경기도 서울시 문화통신사 주필.

                        • 1946년 8월부터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예술과장.

                        •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작가로 활동.

                        • 1956년 2월부터 국립예술극장 총장.

                        • 1959년 1월부터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주필.

                        • 1981년 10월부터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원.

                        • 1994년 11월 29일 사망.                   

                                                           

 

 

누구에게나 삶의 태줄을 묻은 고향이 있지만 그 고향이 또한 누구에게나 보람찬 삶의 요람으로 되고 소중한 꿈과 재능을 꽃피워준 희망의 터전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하기에 나라잃은 수난의 그 세월 뼈아픈 고통과 절망만을 안겨준 고향을 등지고 참된 삶의 빛을 찾아 헤매인 재사가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의 주인공 김승구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한생은 절세의 위인들의 품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삶의 고향을 찾고 잃어버릴번 했던 청춘도 다시 찾아 조국과 더불어 빛나는 생의 자욱을 아로새긴 뜻깊은 인생행로였다.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체험은 중요하다. 생활의 학문을 다루는 작가에게 있어서는 더욱 중요하다.

누구나 인생의 모든 시기의 체험이 다 중요하겠지만 시대와 생활을 산 화폭으로 그려내는 작가에게 있어서 유년시절의 체험은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재산으로 된다. 아마도 어린시절의 체험은 인간의 성격을 완성시키는데서, 중요하게는 작가의 창작방법을 세우는데서 무시할수 없는 작용을 하기때문일것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니나》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레브 똘스또이나 23살의 젊은 나이에 력작 《고요한 돈》 제1부를 발표하여 세상에 《로씨야땅에 똘스또이와 같은 천재가 나타났다.》고 소문을 떨친 숄로호브의 경우를 놓고봐도 그들이 나름대로 겪은 유년시절의 체험이 작가의 성장과 창작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옛사람들도 《유년시절체험은 량식 지고 다니며 한다.》고 했던가싶다.

하다면 조선영화계의 첫 영화를 만들어낸 작가 김승구의 유년시절은 어떻게 흘러갔으며 그가 생활체험의 바다속에서 캐낸 진주는 과연 어떤것인가?

김승구는 1914년 7월 충청남도 아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충청남도 아산이라고 하면 조선문학의 재사들인 리기영, 조령출을 배출한 곳이다.

봄철에는 마치 눈이 내린듯 살구꽃이 하얗게 피여나고 앞벌에는 개구쟁이들을 못견디게 유혹하는 큰내가 시원스럽게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 고향산천은 더 말할나위없이 아름다왔으나 그의 어린시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에게서 꿈과 랑만을 사정없이 앗아갔다.

김승구가 네살 나던 해였다.

하루는 그가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는 엄마에게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고있는데 마을지주가 불쑥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가족들을 집에서 내쫓았다. 빚을 많이 졌다고 집을 차압한것이다.

졸지에 초가지붕대신 비꽃이 뚝뚝 떨어지는 하늘을 머리우에 인채 한지에 나앉은 가족들은 억울한 신세를 한탄하며 친척집으로 사방 흩어져갔다.

무정하기 그지없는 세상은 두해후에는 여섯살밖에 안되는 승구에게서 어머니마저 빼앗아갔다.

아버지를 잃으면 절반고아요, 어머니를 잃으면 완전고아라는 말이 있다.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모진 고생을 다 겪으며 자식들을 위해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승구는 빨간 주먹밖에 없는 알몸신세가 되였다.

집안의 기둥이였던 맏형마저 3. 1인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고향을 떠나가게 되자 너무도 억이 막힌 승구는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 하늘아! 나는 어떻게 살라는거냐?》

철부지소년의 연약한 어깨로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도 무섭고 아름찬 시련은 엊그제만 해도 동네아이들과 수수대총을 휘두르며 뛰여다니던 코흘리개를 일찌기 철들게 했다.

김승구는 차츰 자기의 가정에 들씌워진 가난과 불행, 사회적불평등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였다. 그런 가운데 그의 가슴속에 배움에 대한 열망이 불같이 자라난것은 불행이라면 불행이고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였다.

소년 김승구는 고마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재학과정이 여러번 중단되였지만 그는 평양선교보통학교, 아산둔포보통학교 등지로 학적을 옮겨가면서 이악하게 공부하였다.

어린시절에 겪은 방랑살이나 같은 고생은 그의 성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가족들의 눈물겨운 리별과 상봉, 숨막히게 죄여드는 빈궁…

그것은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으로 하여금 랑만적인 동심에서 벗어나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항거정신을 품게 하였다.

경성직업학교시절 진보적학생들의 영향하에 그는 비로소 선진사상에 눈을 뜨게 되였으며 자기와 같이 불행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유년기로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뼈저린 생활체험속에서 그는 순수한 문학이 아니라 정치적인 안목으로 사회를 투시할줄 아는 문학창작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문학의 신입생에게 흔히 차례지는 행운이 없었다.

리기영에게는 개화파인 아버지의 영향과 글방훈장의 훈시가 있었고 조벽암에게는 삼촌 조명희의 이끌음이 있었고 송영에게는 청렴한 학자였던 할아버지의 문학열이, 박세영에게는 서울 배재고보시절의 문학교원의 선도가 있었다.

그러나 어린 김승구에게는 슬프게도 환상과 랑만의 여유가 없었고 문학에로의 안내자도 없었다.

그 나날 그는 식민지민족이 처한 운명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울분과 항거의 정신을 품고있는 인간을 자기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게 하였고 하여 해방전 창작한 그의 작품들의 양상은 대체로 어둡고 비극적인 색채를 띠게 되였다.

류민의 신세를 면할수 없었던 김승구는 그후 일본땅에서 고학의 길을 걷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의 문학수업은 점차 본격화되였다.

그는 정치영어학교 속성과를 거쳐 명치대학 문예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교육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1년만에 중퇴하고 말았다.

당시 그 대학에서는 《초계급적인 예술》에 예술의 본도가 있다고 설교하고있었는바 조선문학을 취급하는 경우에는 리광수, 김동인, 주요한, 김억 같은 사람들을 내세웠었다.

근로대중의 운명을 동정하고 불합리한 사회현실을 비판한 고골리, 똘스또이, 체호브, 고리끼의 작품들에 심취되여있던 김승구가 대학모자를 단호히 벗어버린것은 당연한 귀결이였다.

그후 그는 도꾜 시바우라항구에서 배짐을 싣고부리는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문학공부를 하는 한편 재일조선문화인들이 조직한 극단 조선예술좌의 성원으로 되였다.

김승구가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극단에 찍게 된것은 후일 그가 극작가로 성장하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19세기 로씨야 비판적사실주의작가인 체호브의 《와냐아저씨》, 《세 자매》, 《벗나무동산》과 같은 희곡작품들을 통해서도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이 극단에서 그는 박학을 비롯한 진취적인 문학청년들을 만났고 그들과의 열렬한 토론과 론쟁속에서 진정한 사실주의문학의 길을 모색하였으며 중요한 사회적문제를 제기하고 생활을 보다 진실하게 반영할수 있는 새로운 극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김승구는 처녀작인 희곡 《류민》을 세상에 내놓았다.

《류민》은 자신의 고달픈 부두생활체험에 기초한 작품이다.

소설은 돈을 벌어보려고 일본땅에 건너간 주인공 락현이가 오히려 막대한 빚까지 걸머지고 고심하던중에 고향에서 기다리기에 지친 아버지와 처까지 찾아오자 헤여날수 없는 고민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내용을 담고있다.

이 작품은 1938년 《동아일보》에서 조직한 신춘문예현상응모에서 1등으로 당선되였다.

그해 2월 《동아일보》에는 《류민》의 창작경위에 대한 작가의 소감이 실렸다.

《밤으로만 6일간에 120장을 썼으니 과연 열도 상당하였다. 밤 3시까지 전등을 써 하숙집에서 전기세를 초과한다고 쫓겨까지 났다.

할수 없이 12시부터는 초를 쓰겠다고 약속하고 이 작품을 썼다.

급한것은 아니였으나 자리에 누우면 〈류민〉에 나오는 인물들이 눈앞에 얼른거려 잠을 못자게 한탓이였다. 허나 뇌빈혈까지 일으키게 한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다니 한없이 즐겁다.》

미사려구를 싫어하는 작가의 극히 실무적인 수기이다.

살래야 살수 없어 자살의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주인공 락현의 운명은 곧 삶의 진정한 고향을 찾지 못한 불행한 작가의 운명이였으며 식민지청년들모두의 운명이였다.

결국 가슴아픈 유년시절로부터 시작하여 청년시절로 이어진 쓰라린 생활체험은 작가 김승구로 하여금 자기의 첫 주인공을 자살의 낭떠러지로 몰아갔던것이다.

일제는 회령철도공사 로동자의 자살을 내용으로 한 라운규의 연극 《철도공부의 죽음》을 중지시킨것처럼 연극 《류민》에도 탄압의 마수를 뻗쳤다. 하여 극단 조선예술좌는 강제로 해산되고 작가 김승구는 징역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희곡 《류민》이 좌절된 후 그는 조선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사실주의적으로 보여준 단편소설 《배꼽쟁이 박서방의 귀향》을 창작하였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주인공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를 통해서도 작가 김승구의 평범치 않은 체험세계를 가히 짐작할수 있다.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작가는 후날 수기에서 《유년시절로부터 청년시절에 이르는 과정에 겪은 일들은 아직도 이목에 생생하고 가슴에 사무쳐 그때의 이야기를 쓰려면 별다른 준비가 없이도 얼음판에 박밀듯 풀려》나간다고 하였다.

60이 넘도록 글을 써오면서 그때까지도 이목에 생생하고 가슴에 사무친것은 나라잃은 피나는 설음이였고 민족의 운명을 맡아줄 위인이 없어 당하던 인민의 고통이였다.

영화문학작가인 그를 평생 사랑한 안해는 좋을 때마저도 웃을줄 모르는 남편에게 노여워한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당신에 대한 불만은 전혀 아니고 그저 굳어진 인상이여서 그런다고 사죄하군 하였다.

작가에게 몹시 헌신적이였던 안해에게서조차 몰리해를 받은 그의 우거지상은 바로 눈물겨운 유년시절에 굳어진 고칠수 없는 인상이였던것이다.

김승구의 해방전 창작활동은 사회주의사실주의를 지향한 비판적사실주의문학이였다.

정의와 량심을 옹호하고 선도하는 작가라는 직업에 운명을 담도록 하고 그의 한생을 채찍질해준 중요한 바탕이기도 한 눈물겨운 유년시절 체험세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류민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정한 어머니조국- 참된 삶의 고향을 찾지 못한 작가의 재능은 묻혀버릴수 밖에 없으며 빛날래야 빛날수 없다는것이다.

사실상 청춘기나이에 있던 작가였지만 그는 푸르러지지 못하였고 가슴아픈 체험속에 정신은 이미 로쇠에 이른것이였다.

그렇다. 진정한 삶의 고향이 없는 작가에게 열정넘친 청춘이란 말도 되지 않는것이다.

자기 삶의 보금자리, 따뜻한 고향이 없는 인간에게 육체적인 젊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열정을 뿜어내지는 못하는것이다.

해방전 가슴에 쌓인 울분을 터치지 못해 문학의 길에 들어선 김승구의 체험은 바로 이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이것은 유년시절로부터 련련히 이어진 가슴아픈 생활체험이 그에게 가져다준것이였다.

 

 

《내 고향》을 찾은 류민

 

그렇게도 고대하던 조국해방의 날이 왔다.

김승구는 친구들과 함께 남조선에서 해방만세를 웨치며 문학창작을 위한 열기로 가슴을 끓이였다.

그러나 차츰 시일이 흐르면서 그처럼 끓어번지던 창작적열정이 자꾸만 식어가는것이였다.

그는 캄캄한 창밖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귀뚜라미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물음을 허공에 던져보군 하였다.

(이것이 정말 해방이란 말인가?)

해방만세의 웨침소리가 즘즘해진 남반부의 하늘가에 성조기가 거만하게 펄럭이기 시작한지 몇달이 지나갔다.

간사한 왜놈기생들의 샤미센소리가 흘러나오던 료리점은 어느새 카페로 변하고 술취한 미군병사들의 어지러운 휘파람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제는 바로 그 해방군의 탈을 쓴 미군이 인민들의 창의에 의해 세워졌던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자유와 민주주의싹을 군화발로 사정없이 짓밟아버리고있는것이였다.

미군의 발굽밑에서 신음하는 이 땅이 정말 내 조국, 내 고향이란 말인가?

살길을 찾아 헤매이던 김승구에게 해방이 가져다준것은 의혹과 불안뿐이였다.

이 땅 그 어디에도 자기가 바라는 고향은 없었다.

그럼 난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날 김승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라에 조성된 그 복잡한 정세와 중첩되는 난관속에서도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작가, 예술인들을 부르시여 문학예술인대오를 무어주시고 그들의 창작사업과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신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인생의 참다운 길을 찾아 그처럼 모대기던 그는 1946년 7월 남반부에서 창작활동을 하고있던 윤기정, 강호 등과 함께 공화국북반부로 오게 되였다.

김승구일행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 나라의 사정이 매우 어려웠지만 그들에게 여러칸이나 되는 훌륭한 살림집들을 마련해주시였다.

그때로서는 항일혁명투사들도 변변한 집이 없어 합숙과 려관에 거처하고있던 때였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을 위한 싸움에 자그마한것 하나 보태지 못한 작가들을 위하여 덩실한 살림집을 통채로 안겨주시였던것이다.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은 이뿐만이 아니였다.

그이께서는 남반부에서 들어온 작가, 예술인들이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배고픈 설음도 많았겠는데 우리를 찾아온 그들이 량식걱정을 하지 않게 해야겠다고 하시면서 옥백미도 보내주시였다.

김승구는 너무도 놀랍고 감격하여 어쩔줄 몰라하였다. 거듭되는 은정앞에서 그는 그만 눈물을 와락 쏟고야말았다.

(아, 이곳이 바로 내가 찾고찾던 고향이구나!)

그는 새롭게 찾은 진정한 고향,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아직은 욕망뿐이였다.

작가의 그 소원을 남먼저 헤아려주신분은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1947년 4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여러 작가들과 함께 김승구를 저택으로 불러주시였다.

수령님의 서재에 들어서던 작가는 그만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 넓지 않은 방안, 그가운데 놓여있는 흔한 나무책상과 걸상… 다른 점이 있다면 서재벽에 걸려있는 한폭의 풍경화뿐이였다.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찾아주신 희세의 위인을 모시기에는 너무도 검소한 방이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런 방에서 일을 보시다니…

그 심정은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정겹게 바라보시며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작가들의 요청을 받고 시간을 냈으니 저녁식사나 같이하면서 얘기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작가들은 수령님을 모시고 다른 방으로 옮겨앉았다. 그 방은 부엌과 잇닿은 크지 않은 온돌방이였는데 거기에는 수수한 식탁이 놓여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주방에서 올려보내는 국수를 작가들앞에 놓아주시면서 오늘 이 자리에서는 자신이 주인이니 손님들이 먼저 받아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작가들에게 저가락을 쥐여주시고 국수는 양념맛이 절반이니 양념을 골고루 치라고 이르시며 양념그릇과 고기접시들도 밀어놓아주시였다.

하지만 작가들은 감히 저가락을 들지 못하고 망설이였다.

왜놈들에게 빼앗겼던 조국을 찾아주신 장군님께 축배한잔 부어드리지 못한 자신들이 몹시 민망스러웠던것이다.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빛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시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통졸임통으로 국수분틀을 만들어서 국수를 눌러먹었다고, 가끔 민가에 들려서 언감자로 농마를 내여 누른 국수를 대접받군 하였는데 빛갈이 거멓고 별맛이여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시며 굳어졌던 작가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주시였다.

그바람에 좌중에는 한식솔사이에 오고가는 친근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밤깊도록 작가들과 무릎을 마주하시고 새 조선건설에서 차지하는 작가들의 사명과 임무를 깨우쳐주시였으며 초기에 화승대나 고추가루를 가지고 왜놈들의 무장을 빼앗던 일을 비롯하여 항일무장투쟁의 간고하고도 영광스러운 나날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려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사향가》도 불러주시며 새벽 5시까지 거의 10시간이나 작가들과 함께 계시였다.

김승구의 일생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영광의 그날은 우리 나라 문학예술의 귀중한 리정표가 세워진 뜻깊은 하루였다.

이날이 있어 장편서사시 《백두산》, 유화 《보천보의 홰불》을 비롯한 유명한 걸작품들이 세상에 나오게 되였던것이다.

동틀무렵 집으로 돌아온 김승구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 작가들에게 훌륭한 집을 안겨주시고 자신께서는 비좁은 서재에서 밤늦도록 일을 보시는 어버이수령님!

해방이 되였지만 아직 인민들의 생활형편이 어렵다고 하시며 소박한 생활을 하시는 우리 수령님.

바로 그런분이시기에 항일의 피어린 길을 걸으시여 잃었던 내 조국을 찾아주신것 아닌가.

김승구는 두어깨를 크게 솟구며 심호흡을 하였다.

그래, 쓰자. 김장군님께서 찾아주신 조국에 대하여, 조국을 찾기 위해 피흘려 싸운 항일투사들에 대하여.

그렇게 하는것이 장군님의 하늘같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치던 류민에 불과한 무맥한 작가였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자기가 마치도 새 인간으로, 새 작가로 태여난듯 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여 김승구는 창작의 붓을 들었다.

그때 그가 잡은 그 붓은 지난날 《류민》을 쓸 때의 항거와 현실부정의 붓이 아니였다. 잃었던 고향을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 삼가 드리는 보답의 붓이였다.

얼마후 원고지우에는 《류민》의 주인공 락현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극적반항아가 아니라 수난과 곡절앞에 굴하지 않고 맞서나가며 항일혁명투쟁의 거센 흐름에 합류해나서는 혁명적인 인간들이 그려졌다.

부두로동자 락현으로부터 항일혁명투사 관필에로의 성장, 이것은 다름아닌 김승구자신의 성장이였다.

고향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자신의 눈물겨운 체험, 식민지민족의 비극적운명을 뼈아프게 체험한 그는 작품의 제목을 《고향》이라고 달았다.

원고지우에서 그의 붓은 낮이나 밤이나 쉴새 없이 달렸다.

뇌빈혈을 일으키며 힘겹게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던 지난날과는 다른 창작적흥분이 작가의 심장을 쾅쾅 두드렸다.

그는 마침내 영화문학 《고향》을 탈고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올린 영화문학줄거리의 대목대목을 짚어가시며 되물어주시였고 영화에 담아야 할 기본사상과 구체적인 장면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잘 그릴데 대한 문제, 왜놈들을 머저리로 그리지 말고 그 침략적본성이 잘 나타나게 그릴데 대한 문제, 영화의 제목을 새 맛이 나고 주제사상에 맞게 달데 대한 문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향》이라는 제목이 많은데 이 영화의 제목은 《내 고향》으로 달자고 말씀하시였다.

내 고향, 내 고향!

작가는 그이께서 친히 지어주신 그 제목을 몇번이고 곱씹어보았다.

진정 어버이수령님 찾아주신 조국은 어제날 살길찾아 그렇게도 방황하던 류민이 찾은 내 고향이였다.

행복에 넘쳐있는 그에게 또다시 행운이 차례졌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으로부터 예술영화 《내 고향》창작지도를 받는 영광을 받아안은것이다.

《내 고향》영화제작이 한창이던 어느날 영화촬영소에 몸소 나오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작가를 비롯한 창작일군들을 만나주시고 걸린 문제들을 차근차근 알아보시였다.

배우들이 무장투쟁경험이 없다는것을 헤아려보신 어머님께서는 의상과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다.

이후에도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촬영소에 나오시여 예술영화 《내 고향》을 수령님께서 의도하시고 우리 인민의 사상감정을 정확하게 반영한 훌륭한 영화로 되도록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처럼 어버이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지도밑에 항일혁명투사들의 방조를 받으며 영화를 완성하던 나날은 김승구의 작가적성장에서 고귀한 정신적밑천으로 되였다.

예술영화 《내 고향》은 단순히 한편의 영화가 아니였다.

그것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말살정책으로 하여 기초가 없었던 우리 영화예술이 새롭게 태여났음을 알리는 선언이였고 새 조국건설의 장엄한 진군길에서 우리 인민이 가지게 된 귀중한 문화적재부였다.

또한 그것은 작가의 세계관과 창작방법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뜻깊은 작품이였다.

예술영화 《내 고향》을 완성한 후 영화문학창작위원회(오늘의 영화문학창작사의 전신)의 위원장사업을 하면서 토지개혁을 취급한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리기영의 장편소설 《땅》을 영화문학으로 각색하던 김승구는 전쟁이 일어나자 군복을 입고 전선으로 나갔다.

종군작가로서 서울, 수원, 대전을 거쳐 락동강까지 나가 취재활동을 벌리고 글을 썼으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고향을 뒤에 두고 다시 2천리 간고한 행군길도 걸었다.

그때 박아지, 엄흥섭, 박춘명, 김련실, 김선영 등 고향을 남반부에 두었거나 전쟁전까지 남녘땅에서 살며 예술활동을 하던 수많은 작가, 예술인들이 공화국의 품을 찾아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누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작가, 예술인들이 홑옷을 입고 신발도 변변히 신지 못하고 추위에 떨면서도 공화국의 품을 찾아온것은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있었기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높이 평가하여주시였다.

간고하였던 전쟁의 나날은 작가로 하여금 오직 수령님의 품속에서만 민족과 자기자신의 운명도 있다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하게 한 귀중한 날들이였다.

전후 작가는 국립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예술국장 등의 직무를 력임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열리는 작가대회, 청년학생축전들에도 참가하였다.

작가 김승구에 대하여 생각할 때 사람들의 눈앞에 먼저 떠오르는것은 그가 지닌 고결한 작가적품성이다.

김승구는 일생 량심과 진실을 생명처럼 간직한 작가였다.

생활에서 위선과 처세술을 경계하고 오직 진심을 중시해온 김승구의 인간됨을 떠나서 그의 작품들에 차넘치는 진실성에 대하여 말할수 없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린애처럼 순진했던 그는 《내 고향》을 창작하던 젊은 시절부터 로년기에 이르기까지 늘 진실하고 성실했다.

《심장은 거짓을 모른다. 손끝으로가 아니라 심장으로 쓰자. 심장이 달아오르고 무르익기 전에 의무감이나 명예욕에 떠밀려 붓을 들지 말자.》

이것은 그의 창작적신조였다.

현실을 대함에 있어서 그는 《수첩에 기록하기에만 서둘지 말고 그날의 생활과 견문을 깊은 사색을 통하여 가슴속에 간직하라. 건설장과 공장을 찾아가거든 신비한 현실과 기계에 눈을 팔지 말고 로동자들의 그 빛나는 눈동자를 주시하라. 그러면 심장에 안겨오는 그 무엇이 있을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붓을 들지 않았다.

그러한 작가였기에 영화문학 《돈화의 수림속에서》와 《뜨거운 심정》을 창작하면서 초고를 쓰는데는 그리 오랜 시일을 소비하지 않았으나 붓을 들기까지는 2년 가까운 세월을 모대기였다고 한다.

김승구는 남들이 평범하게 보는 현상들, 미담으로 그칠수 있는 이야기들속에서 시대의 본질과 참된 인간문제를 찾아쥐고 성격과 생활의 론리에 맞게 형상해내는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그는 현실을 극적으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극작가에게 있어서 중요한것은 극에 대한 리해와 관점을 바로가지는것이라고 하면서 작중인물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이 자기의것이 될 때까지 인물들의 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낡은 사회에서는 볼수도 상상할수도 없는 사회주의제도의 고마움, 천리마시대 인간들의 정신미에 심오한 극이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천리마시대와 그 시대 인간들에 대한 찬양의 감정으로 일관되여있다.

원쑤들이 끼친 불행과 고통을 가시기 위하여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고 하나같이 떨쳐나선 사람들의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격조높이 노래한 예술영화 《뜨거운 심정》, 어제날 모진 학대와 빈궁속에 고통스럽게 살던 보통강사람들이 사회주의제도의 품속에서 운명의 전환을 맞이한 력사적사변을 서사시적화폭으로 보여준 예술영화 《보통강반에 깃든 이야기》, 사회주의조국의 은혜로움을 소박한 생활적형상으로 설득력있게 보여준 예술영화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 공화국의 품속에서 성장한 농촌일군의 형상을 통하여 우리 시대 인간들의 고결한 충정의 세계를 감동적으로 보여준 예술영화 《그는 우리와 함께 있다》…

우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계렬에서 성공작들로서 조국에 대한 례찬의 감정으로 충만되여있는 김승구의 문학세계의 일단을 엿볼수 있게 한다.

원래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탐구는 그의 인간적지향이였으며 작가적요구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김승구는 고결하고 순결한 정신도덕적미를 가장 값높이 사고 열렬히 추구하는것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믿음속에 살았다.

전후 의용군출신의 문학청년을 집에 데려다가 친혈육처럼 돌봐주며 결혼식까지 치르어주고 자기 집의 방 한칸을 내주어 살림을 시켰다는 이야기며 함께 일하는 동무의 아들 병치료를 위해 발이 닳도록 걸음했다는 일화들은 그의 고결한 인간적미를 잘 알수 있게 한다.

유년시절을 거쳐 청년시절에 그는 인간의 진실성과 성실성이 용납되지 않는 비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일제식민지사회의 부패성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총칼과 황금으로 인간을 짓밟고 타락시키는 식민지사회에 대한 체험은 그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기였다.

이러한 그였기에 공화국북반부에 와서 그가 만난 사람들은 더없이 고결한 정신미를 지닌 선남선녀들이였으며 이 사회는 인간사랑의 화원으로 변모된 하나의 대가정이였다.

실로 이목구비에 사무치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선과 악이 대조를 이루는 두 사회, 두 제도에서 살아본 김승구는 사회적변혁의 의의, 인간개조의 의의를 사무치게 절감하였으며 그것을 옹호하고 노래하고싶은 창작적충동에 휩싸이게 되였다.

그의 붓에 언제나 힘을 실어준것은 수령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온 나라가 화목한 가정을 이룬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매혹이였고 일찌기 그 어느 문학예술작품에서도 그려본적 없는 아름다운 인간군상에 대한 공감이였다.

김승구는 창작의 전기간 어머니조국과 아름다운 인간들을 노래하는 작품창작에 주되는 힘을 돌리였다.

참으로 이것은 어제날 울분으로 피를 끓이던 류민이 그토록 찾고싶었던, 그래서 목놓아 터치고싶었던 내 고향에 대한 노래, 참된 조국에 대한 송가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작가 김승구는 왕성한 창작적열정을 지니고 《빨찌산처녀》, 《춘향전》, 《새날이 보인다》,《우리에게는 조국이 있다》 등 영화문학을 발표하였다.

그중 《돈화의 수림속에서》, 《뜨거운 심정》 등은 우수한 영화로 완성되여 위대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리였다.

작품의 사상은 작가의 세계관의 반영이며 작품의 지성도 역시 작가의 지성세계의 반영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새로운 철학의 세계, 미의 세계를 개척해나가야 하며 풍만한 생활형상을 통하여 인식교양적내용을 깊이있게 주어야 한다.

김승구는 현실을 반영한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창조하면서 자기 작품의 주인공의 형상에 이러한 내용을 체현시키기 위하여 애써 노력하였다.

정의롭고 대바른 《내 고향》의 관필이, 텁텁하면서도 웅심깊고 진실한 《뜨거운 심정》의 리홍기, 락천적이면서도 신중하고 과감한 《적후청년들》의 박영찬, 진실하고 량심적이며 고정한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의 관오, 《그는 우리와 함께 있다》의 만수 등 직업과 년령, 사회적처지는 서로 달라도 그들은 한결같이 시대의 전형들로서 깊이도 있고 품위도 있는 작가의 인간미를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그는 고령이 되도록 일기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 소설, 가극 등 문학예술과의 활발한 접촉, 다양한 생활과의 부단한 교감을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기에 김승구는 《나는 년령기와 더불어 식어가는 감수성과 투쟁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는체 하며 눈과 마음이 건방져지고 어린애와 같은 티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생활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하나 가슴깊이 간직하지 못하는것은 글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섭고 슬픈 일이다.》라고 하였다.

1978년 어느 여름날에 있은 일이다.

그날 김승구는 사람좋은 얼굴에 흡족한 웃음을 담은채 신이 나서 창작실창가에 놓인 화분을 가꾸고있었다.

좀전에 《춘향전》각색작업을 끝낸것이다.

화분손질이 거의 끝나갈무렵 날씨가 더워서 활짝 열어놓았던 출입문가에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관필이가 왔습니다.》

인민배우 유원준이였다.

우리 나라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에서 주인공 관필의 역을 담당했던 그는 김승구를 찾아올 때마다 늘 관필이가 왔습니다 하고 인사말을 건네군 했었다.

《내 고향》을 만들 때부터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고있었다.

김승구는 그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어서 오우.》

유원준에게 자리를 권한 김승구는 어떻게 왔는가고 물었다.

《〈춘향전〉을 탈고하셨다면서요.》 하고 량볼의 보조개가 움푹 패이도록 빙그레 웃고난 유원준은 예술영화 《춘향전》의 연출을 자기가 맡았다고 이야기했다.

김승구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평시에 과묵한 그인지라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가에는 한번 잘해보라는 고무가 어려있었다.

그날 유원준은 온종일 작가와 함께 있으면서 각색된 《춘향전》원고를 보았고 어떤 장면은 제 흥에 겨워 크게 소리내여 읽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악질관료인 변학도의 흉내를 내면서 너스레를 피웠다.

그러자 김승구는 능청스러운 유원준의 낚시에 걸린줄도 모르고 흥이 나서 입을 열었다.

《이제 유동무가 도령이역을 할수는 없는거구, 연출도 하면서 변학도역쯤은 할수 있지 않겠소?》

유원준이 무릎을 소리나게 내리쳤다.

《그것 참, 사실은 저두 그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선생님처럼 강력한 지지자가 생겼으니 인젠 됐습니다.》

그리하여 유원준은 자기가 연출한 영화와 함께 만사람의 증오를 자아낸 포악한 변학도의 모습을 화면에 남겨놓을수 있었다.

김승구의 붓은 80고개에 이르도록 결코 무디지 않았으며 원고지우를 줄기차게 달리였다.

그의 성공작들에는 혁명전통주제와 조국해방전쟁주제, 사회주의현실주제, 조국통일주제, 력사물주제 등 모든 부문, 모든 령역들을 다 포괄하는 각이한 작품들이 들어있다.

그는 체험과 취재, 창작의 모든 계기와 공정들을 대하면서 시대의 높이에서 생활을 투시하고 시대와의 련관속에서 생활의 본질을 해부하는 극작가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각이한 사회제도, 각이한 시대를 체험하면서 그는 생활의 모든것을 시대적높이에서 감득하고 해당 시대와 숨결을 같이하면서 작가적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모든것을 바쳤다.

로년기에 들어와 김승구는 력사물창작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어 영화문학 《춘향전》(백인준과 합작), 《달매와 범다리》, 《리순신장군》을 썼다.

고전소설 《춘향전》을 영화문학으로 각색할 때인 1978년 5월 어느날에 있은 일이다.

원작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는 그의 머리는 무거웠다.

《춘향전》에 반영된 해당 시대의 력사적환경에 맞게 생활을 풍부하게 그리자면 많은 탐구가 있어야 했던것이다.

한동안 그린듯이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창작실을 나섰다.

동료들은 여느때는 동작이 굼뜨던 그가 왜 그러는가 하여 의아해하였다.

그러거나말거나 한달음에 뻐스정류소에 뛰여간 그는 때마침 멎어선 무궤도전차에 올라탔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조선미술박물관에 들어섰을 때는 관람시간이 거의 끝나갈무렵이였다.

17~18세기에 창작된 미술작품들이 전시된 방으로 총총히 들어간 그는 그림들을 보면서 당대 시대상과 생활풍습, 의상들을 주의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관람시간이 퍼그나 지난줄도 모르고있었다.

아까부터 그의 진취적인 태도에 감동되여 한참동안 기다려주던 관리원이 참다못해 《손님, 문을 닫아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번 탐구의 바다속에 뛰여들면 옆사람들이 무안할 정도로 자신을 잊군 하는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채 다른 그림쪽으로 자리를 옮기는것이였다.

관리원은 그만 어이가 없었다.

《원 참, 별사람 다 보겠군.》

하긴 그 관리원이 시간가는줄 모르고 정신없이 옛날 미술작품을 들여다보고있는 손님이 해방전에 《춘향전》을 연극화하여 무대에 올리는데 기여하였고 전후에는 그 작품의 외국문번역에 참가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기에는 《춘향전》을 연극과 영화로 실현한 작가라는것을 알리 만무했다.

만일 김승구가 예술영화 《내 고향》을 쓴 작가라는것만 알았더라면 관리원의 입에서 《별사람》이라는 말대신 존경의 말이 흘러나왔을것이다.

위인의 품속에서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은 작가 김승구의 삶은 많은것을 말해주고있다.

참다운 작가에 의하여 참다운 문학이 태여난다면 참다운 삶의 요람속에서만 참다운 작가가 태여난다는것을.

 

 

위인의 사랑속에 청춘으로 산 작가

 

언제인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찾으신 어버이수령님의 영상을 모신 력사적인 사진을 보아주시면서 김승구는 오랜 작가라고 감회깊이 추억해주시였다.

오랜 작가!

이 말씀은 청춘의 열정으로 한생을 작품창작에 바친 작가 김승구에 대한 최대의 평가이다.

하다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처럼 잊지 못해하신 김승구의 로년기는 어떻게 흘러갔는가?

그가 60을 눈앞에 두고있던 1970년 8월 5일이였다. 그날 작가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나오신 경애하는 장군님을 몸가까이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그의 눈앞에는 20여년전의 잊지 못할 그날 불밝은 저택의 마당가에서 자기의 손을 힘있게 잡으시고 안부를 물어주시던 어버이수령님의 영상이 눈가에 생생히 어려왔다.

그의 가슴은 수령님과 꼭같으신 장군님의 령도의 손길을 접하게 된 행복감으로 후더워올랐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의 작업필림을 몸소 보아주시고 그들에게 영화를 훌륭히 완성하도록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작가는 그이의 가르치심을 자로 하여 영화를 차근차근 수정하였다.

1971년 2월 12일 김승구는 또다시 경애하는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그때로 말하면 예술영화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가 영화관들에서 상영된지 여러달이 흘렀을 때였다.

오랜만에 어버이를 찾아가는 자식마냥 한껏 부풀어오른 가슴을 안고 장군님 계시는 곳으로 달려간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우리 나라 영화예술부문에서 오래동안 함께 일해온 이름난 창작가들이 모두 와있었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감격을 금치 못하는 그들에게 지난 기간 영화창작에서 성과있는 동무들을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러지 않아도 크나큰 감격에 넘쳐있던 김승구에게 친히 축배잔까지 부어주시며 올해에는 꼭 두편을 받아내겠다고 이르시였다.

작가는 그 말씀에 그만 참고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고말았다. 이제는 눈도 어두워지고 머리도 반백이 된 자기에게 안겨주시는 그 믿음!

그는 두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장군님의 대해같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꼭 젊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삶의 목표가 없는 인간에게서는 청춘의 열정과 기백이 분출될수 없다. 청춘과 로화의 갈림길이 여기에서 시작되는것이다.

바로 우리 장군님께서 기다려주신다는, 그이께서 자신과 약속을 하시였다는 가슴치는 자각은 그의 심장에 청춘의 활력을 북돋아주었다.

그후 작가는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예술영화 《보통강반에 깃든 이야기》(1, 2부)를 완성하였다.

1972년 3월 25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학예술부문의 전반사업을 지도하시는 바쁘신 속에서도 작가를 친히 불러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창작가들의 결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영화의 구성을 회상식으로 바꿀데 대한 묘안을 찾아주시였으며 생활전개의 대안들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하여 영화는 건설부문 로동계급을 취급한 대서사시적인 예술영화로, 보통강사람들의 운명을 통하여 수도 평양의 세기적전변을 폭넓게 반영한 영화로 훌륭히 완성되게 되였다.

1970년대 후반기 예술영화 《춘향전》창작에 참가하였던 김승구는 또다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게 되였다.

영화를 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형식만 현대적일뿐이지 내용은 아직도 복고주의적으로 되였다고 하시면서 작품이 그렇게 된 원인은 창작가들이 《춘향전》을 다시 잘 만들데 대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영화문학을 쓴데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작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을 잘 받들지 못한 자신을 아프게 질책하며 수령님의 교시를 되새겨보았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에는 《춘향전》의 주제사상은 봉건적신분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라고 명백하게 밝혀져있었다.

작가는 외람되게도 《춘향전》을 이미 잘 알고있는 작품이라는데로부터 수령님의 교시사상에 기초하여 원작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하지 않고 붓을 들었기때문에 조선녀성의 고결한 품성인 절개를 작품의 기본주제로 제기하고 전편은 사랑편으로, 후편은 절개편으로 만들어놓았던것이다.

문학예술작품에서의 주제의 분렬은 치명적인 결함이였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이야기거리로 어떤 생활을 가지고 형상할것인가.

사색에 사색을 거듭했지만 도무지 좋은 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작가의 이런 고충을 헤아려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작품의 기본이야기는 춘향과 리도령의 사랑을 통하여 봉건적신분관계를 타파하여야 한다는것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진실한 인간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생활을 짓밟는 모순에 찬 신분제도를 철페해야만 참된 삶이 피여날수 있다는 투쟁의 진리를 밝혀주는데 이 영화의 철학성이 있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전달받은 작가는 붓을 들면 단숨에 절정에 치달을것 같은 환희로운 감정에 휩싸였다.

사상적대가 섰으니 모든 형상의 고리들이 척척 풀리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난관에 봉착하였다. 새로운 설계에 의한 새 집을 짓자면 그에 맞는 건축술과 자재가 요구되는것처럼 새롭게 제기한 주제사상적내용은 그에 맞는 형상수법과 생활이 탐구될 때 예술적화폭으로 펼쳐질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연구해도 좋은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창작에서 진통을 겪게 된 작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다시금 받고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헤여날수가 없었다.

작가의 이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리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몸소 창작가가 되시여 작품을 살려낼 방도들을 하나하나 찾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문학은 인간학이므로 등장인물들을 전형화하고 그들의 사회계급적처지와 성격론리에 맞게 개성적으로 형상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 영화에서는 신분관계를 보여주는것이 중요하므로 춘향과 리도령의 형상에서 생활상 대조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순간에 작가의 눈을 확 틔워주고 신심을 솟구치게 하는 명철한 말씀이였다.

작업필림에 형상된 춘향은 옷을 곱게 차려입고 가야금을 타며 그림이나 그리는 인물로서 량반통치배의 아들인 리몽룡과 아무런 차이도 없어보였다. 이것이 주인공형상에서의 본질적인 약점이였다.

이처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춘향이한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얼굴과 자연풍경만을 아름답게 찍어 관중들의 인기를 끌려는 《인상파》적인 결함을 제때에 찾아주시고 창작태도를 바로잡아주시였던것이다.

원래 《인상파》는 19세기 후반기에 발생한 문예사조의 하나로서 사물현상의 본질보다 외적인상을 더 중요시하며 그 어떤 매력만을 노리는 부르죠아적미학관을 주장하는 반동적인 류파인것이다.

주체적인 미학관으로 철저히 무장하지 못했던 작가는 본의아니게 《인상파》적인 경향에 말려들어 인간의 참다운 아름다움이 외모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도덕적풍모에 있다는 진리를 외곡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였던것이다.

작가는 춘향의 새로운 형상방도를 두고 고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창작지도일군들과 경험있는 작가들, 심의원들의 집체토론이 여러날 계속되였으나 본래의 춘향이를 새롭게 형상할수 있는 신통한 안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이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들의 막힌 생각을 또다시 틔워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춘향의 어질고 효녀다운 품성을 잘 형상하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마음이 곱고 효성이 지극하며 인품이 있고 어질고 례절바른 춘향의 모습을 잘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현대성의 원칙을 구현하도록 하신 이 가르치심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만이 찾아주실수 있는 새로운 형상방도로서 우리 시대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춘향의 성격을 창조할수 있게 하는 지침으로 되였다.

하여 오늘 우리가 영화에서 보게 되는 베틀에 앉아 삯베를 짜고 행주치마를 두르고 동자질을 하는 춘향이, 리도령과의 리별후에는 눈물속에서가 아니라 일로써 시름깊은 마음을 달래며 생활을 개척해나가는 춘향이, 자신이 짠 무명천으로 향단이의 첫날옷과 용쇠옷도 만들자며 마음고생만 시키고 해줄것이 없다고 하는 인정미 풍부한 춘향이, 변학도의 불호령을 받고도 사령에게 끌려가는것이 아니라 소복단장하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강한 춘향이가 태여나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춘향이는 리도령과 신분적차이가 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게 되였으며 안팎이 다 고운 새로운 춘향으로서 우리 인민들에게 친근감을 주게 되였다.

큼직한 매듭이 풀려서 거침없이 나가리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리몽룡의 형상에서 또다시 걸리고말았다.

새로 만든 영화에서 작가는 량반가정의 절도를 뛰여넘어 천한 기생의 딸과 백년가약을 맺는 리몽룡의 좋은 측면만을 그렸고 암행어사가 되여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인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개탄하는 장면을 설정함으로써 그가 마치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줄수 있는 선각자인듯 한 인상을 주게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몽룡은 봉건유교사상의 신봉자로, 봉건통치제도의 옹호자로 그려야 시대상을 체현한 개성적인 인물로 된다는데 대해서도 명철하게 깨우쳐주시였다.

또한 변학도를 옳게 형상하는것도 《춘향전》의 교양적목적을 달성하는데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면서 그 형상방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작가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감사의 정이 가득차올랐다.

예술영화 《춘향전》을 고전물영화의 걸작으로 만드시려고 장군님께서 바쳐오신 심혈과 정력적인 지도는 실로 끝이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춘향전》작업필림을 보시고 세부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또다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사랑선을 기본으로 끌고가는 《춘향전》을 보다 특색있는 영화로 만들자면 주인공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대목에서 시를 읊어 서로 의사를 주고받도록 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형상수법도 가르쳐주시였다.

 

오늘 광한루에서 봄향기에 취했으니

잠도 절로 꿈도 절로 단잠잘줄 알았건만

저 달이 기울도록 어이하여 잠 못 드나

그대 이름 춘향이라 내가 맡은 봄향기도

모조리 안고 가서 이밤을 못 자는듯

원컨대 한줄의 시에라도 돌려주면 내 잠들리

 

라고 써보낸 리몽룡의 시에 대답하여 춘향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보낸다.

 

잠 못드는 그 사연이 어이하여 내탓이랴

이밤엔 가야금도 잠 못 들어 설레이노니

아마도 봄바람이 얄궂은듯 하여라

 

이 장면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찾아주신 새 형상수법에 의하여 마련된것이였다.

이렇듯 경애하는 장군님의 천재적인 예지로 예술영화 《춘향전》은 훌륭히 완성될수 있었다.

이처럼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고도 장군님께서는 그를 국가적인 큰 대회들과 어버이수령님 탄생 60돐, 70돐 경축연회를 비롯한 영광의 자리에 빠짐없이 불러주시였다.

또한 그의 건강을 념려하여 여러가지 보약재들과 귀중한 선물들, 수령님의 존함이 새겨진 시계와 생일 70돐상, 80돐상을 안겨주시였다.

작가 김승구에게 돌려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을 다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친어버이의 그 사랑속에, 늙었다고 물러설 생각을 하지 말고 자신께서 책임지고 끝까지 데려가겠으니 힘을 내야 한다고 고무해주신 그 믿음속에 떠받들려 김승구의 여생은 사시장철 푸른 소나무처럼 싱싱하게 흘러갔다.

붓은 무겁지 않았고 열정은 젊은이들도 부러워할만큼 끝없이 솟구쳐올랐다.

언제인가 우산장창작실에서 김승구가 영화문학 《그는 우리와 함께 있다》의 마지막 창작전투를 벌릴 때 있은 일이다. 그는 창작도중 뜻하지 않은 병에 걸리였다. 구급차곁으로 떠미는 작가들에게 그는 괴로움을 참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한두시간 참느라면 아픔이 멎겠지요. 자, 그러지 말고 어서 창작실로 갑시다.》

이렇게 그는 참기 어려운 고통속에서도 펜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원고지와 마주앉았다. 동통을 참아가며 한자두자 작품을 써나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불비쏟아지는 전화의 그날 결전장을 누벼가던 1950년대 종군작가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 불같은 열정에 의하여 마침내 작품이 제기일내에 완성되였고 경애하는 장군님께 영화로 올릴수 있었던것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창작의 빛나는 전성기를 맞이했던 1970년대의 나날들에 있었던 한가지 사실에 불과하다.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안겨주신 청춘의 열정과 지혜로 시대와 력사를 폭넓게 그려낸 무게있는 작품들을 련이어 탈고하였다.

진정 력사가 알지 못하는 위대한 스승, 자애로운 어버이를 모심으로써 작가 김승구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로쇠를 모르는 청춘작가로 되였던것이다.

우리는 작가 김승구에 대한 이야기를 그가 림종 순간까지 잊지 못해한 생일 80돐상에 깃든 가슴뜨거운 사연으로 맺으려고 한다.

1994년 8월, 력사가 일찌기 알지 못하는 슬픔과 비애의 피눈물로 자자구구 젖어오던 우리의 신문들에 재미교포 손원태가 생일상을 받은 소식이 실려 세상을 놀래우던 때를 사람들은 기억하고있을것이다.

바로 그 8월의 어느날이였다.

이날 작가 김승구도 뜻밖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시는 생일상을 받아안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10년전에 그의 생일 70돐상을 보내주시였는데 또다시 80돐생일상을 안겨주신것이였다.

작가의 주름진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 그 누구보다도 상실의 아픔이 크실 장군님께서 이 불민한 전사의 생일날까지 잊지 않고계신단 말입니까.

그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펜과 종이를 찾았다. 80고령에 운신이 어렵던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기적이였다. 역시 작가는 괴로워도 글이요, 기뻐도 글이다.

그는 자신의 심신을 깡그리 모아 장군님께 삼가 편지를 올렸다.

《… 온 나라 만백성이 어버이를 잃은 비감에 잠겨있고 장군님께서 겪으실 상실의 아픔에 눈물짓고있는 때에 이름없는 작가의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몸소 생일상을 보내주실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작가는 수없이 많고 그가운데 뛰여난 재능가를 꼽으라면 이 사람이 설자리는 아마 없겠지만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과 맺은 인연, 받아안은 사랑에서 아마 제일일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은 터질듯 부풀어오릅니다. …》

얼마후 붓을 놓은 그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맹세다졌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 저는 여생을 로쇠를 모르는 청춘작가로 빛내이겠습니다.)

청춘작가!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 진정한 고향, 조국을 찾은 때로부터 경애하는 장군님의 손길아래 봄날처럼 싱싱한 열정과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고 빛내온 김승구의 례사롭지 않은 80평생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남긴 심장의 글에서 찾아볼수 있다.

《수령을 잘 만나고 수령을 잘 모셔야 나라가 흥하고 인생의 꽃이 핀다. 이것이 내 한생의 총화이고 내 한생의 문학적탐구로 얻은 진리이다.》

김승구의 한생은 작가의 청춘기는 위인의 품속에서 살 때 온갖 풍파에도 끄떡없이 푸르싱싱해진다는 진리를 남기고있다.

그렇다. 하늘에 찬란한 태양이 있어 만물이 소생하듯이 백두산3대장군의 따뜻한 손길이 있어 김승구는 오늘도 《내 고향》과 더불어 영원한 청춘작가로 우리의 심장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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