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박 병 수 (촬영가)

 

                        • 1914년 3월 27일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출생.

                        • 해방전까지 미술부문에 종사.

                        • 1948년부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미술가, 촬영가로 활동.

                        •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촬영가로 활동.

                        • 1969년부터 백두산창작단 촬영가로 활동.

                        • 1973년 3월 1일 사망.

                        • 공훈예술가.

                                                           

 

 

우리 나라의 영화화폭들을 더듬느라면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인 《피바다》《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파는 처녀》를 영화로 옮긴것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들을 촬영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재능있고 성실한 촬영가, 공로있는 촬영가였다고 불러주시며 잊지 못하시여 자주 추억하신 공훈예술가 박병수도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난날 부유한 가정의 출신인 그를 순직하는 그날까지 굳게 믿으시고 한량없는 사랑과 은정을 베푸시여 인민이 아는 예술인, 영화인으로까지 내세워주시였다.

어떻게 되여 그가 재능있는 예술인으로 성장하여 불멸의 영화화폭과 더불어 영생하는 인생을 빛내이고있는것인가.

 

 

미술가로부터 촬영가로

 

박병수는 가정환경으로 보면 남조선에 그냥 있어도 남부럽지 않게 잘살수 있는 생활조건이 마련되여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되여 이처럼 유리한 가정환경을 뒤에 두고 공화국북반부로 넘어오게 되였는가.

바로 여기에 그가 품고 산 남다른 인생관이 비껴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는 1914년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여났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을 모르고 자랐다. 남들은 학비때문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지만 박병수는 자그만한 고생도 모르고 학교에 다녔다.

철부지 어린시절부터 그림그리기에 취미가 강했던 그는 중학교졸업무렵에 이르러 미술에 대한 지향이 더 강해졌는데 그가 제일 매력을 느낀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인물화들과 옛말과 같은 그의 경력이였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그림가운데서 세상에 소문난 《최후의 만찬》보다도 평범한 이딸리아녀성의 초상인 《몬나리자(죠꼰다)》에 더 관심을 두었다.

미소를 머금은듯도 하고 서글픔에 잠긴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것 같기도 한 그 모습은 너무도 생동하고 진실하게 생각되여 박병수의 심혼을 사로잡았다.

그는 력사에 이름을 남긴 우리 나라와 세계의 이름난 미술가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이 창작한 명화를 감상하면서 미술이야말로 자기의 리상을 화폭으로 실현할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실천적인 분야라는것을 확신하였다.

하기에 박병수의 중학시절 책가방에는 늘 속사, 사생화를 비롯한 소묘작품들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미술에 대한 아들의 열렬한 지향을 인생이 무엇이고 생활이란 어떤것인지, 세상리치를 전혀 모르는 철부지의 몰취미로 몰아붙이면서 《세상을 움직이고 운명을 결정하는 기본학문》을 성취하라고 꾸짖었다.

《이녀석아, 먹고 입는게 풍족해야 인간의 가치도 존엄도 있는거야. 리치를 따질라치면 사람들의 운명을 조종하는건 정치이고 정치는 경제에 뿌리를 두거던. 그래서 정치는 상부구조라고 하고 경제는 그 상부구조의 토대라 하는거야. 토대란 문자그대로 땅과 집이야. 우리 가문이 조상대대로 땀흘리고 푼전모아 많은 땅을 가지게 되였기에 남들이 부러워하게 떵떵거리며 살게 된거야. 미술이라는걸 싹 걷어치우고 경제든 정치든 기본학문을 배워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녀석을 아예 내쫓고말겠다. 너같은 아들놈은 필요없으니까.》

아버지의 추상같은 꾸지람에는 제나름의 론리가 있어 반박할수 없었다.

박병수는 종시 제 뜻대로 미술대학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요구에 굴복하여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그는 표면상 대학을 다녔을뿐 실지로는 어느 한 미술연구소에 들어가 직심스럽게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였다.

박병수의 화가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였다. 그럭저럭 년한으로 대학공부를 끝내고 미술에 대한 꿈만 가득 안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가 그토록 말했지만 그림그리기를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해방전 그의 화가생활은 보잘것없는 형식주의미술에 불과한것으로서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을만 한 그림 한점도 내놓지 못하였다.

조국이 해방되자 그는 미술재사들을 키워낼 커다란 꿈을 안고 자기 집 재산의 노란자위라고 할수 있는 과수원을 팔아 동광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외국에서 좋다는 화구들을 사들이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자기 민족미술의 앞날을 생각하는 애국적인 소행이였으나 일제를 대신하여 남녘땅에 기여든 미제침략자들의 폭압정치는 그의 이러한 소중한 꿈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리였다.

희망은 정의로왔어도 현실은 그 정의를 가혹하게 부정해버리였다.

박병수는 자기의 모든 정력과 재부를 깡그리 바쳐가며 전념하던 미술연구와 창작의 길이 천길낭떠러지에 이르렀음을 절감하고 가슴을 쳤으나 이렇다할 방책은 없었다.

그 과정에 박병수는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국에 개선하시여 새 조국건설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령도하고계신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였다.

특히 남조선의 저명한 인사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 공화국북반부로 넘어가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기도 어버이수령님을 찾아 떠나고싶은 충동을 억제할수 없었다.

희망을 꽃피워줄 재생의 빛발이 광활한 대지를 따사롭게 비치고있으나 자기는 그 해빛을 받지 못하고 어둠속을 헤매이는것 같았다.

그때의 그 심정을 박병수는 자기의 그림 《해바라기》에 담았다. 황량한 들판, 거치른 광야에서 멀리 비쳐오는 해빛을 향해 초연히 머리를 쳐들고있는 해바라기-그것은 바로 미술가인 박병수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였다.

그는 심중속에 온 민족이 누리고싶어 하는 광명의 빛을 안고 당시 조선문화단체총련맹 전라북도 전주시지부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참다운 인민의 세상인 공화국북반부를 동경하였고 자나깨나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태웠다.

바로 이러한 그에게 인생전환의 행운이 차례지게 되였다.

1948년 7월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방안을 열렬히 지지하는 남조선인민들의 마음을 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 참가하는 남조선대표로 추천되여 북반부로 들어오게 되였던것이다.

심장은 흥분으로 높뛰였고 기적적으로 찾아든 인생의 희열로 하여 그는 두려움을 몰랐다.

자기가 이제 북행길을 걷고나면 남조선사회를 통치하고있는 미제와 그 괴뢰들이 어떤 탄압을 가해오겠는지 모르는바 아니였으나 그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안해는 남편인 박병수에게 수많은 재부와 처자가 있으면 됐지 무엇이 더 바랄게 있어 위험한 북행길을 걷느냐고 하소연하였다.

인생이 자기만을 위하여 필요한 사람에게는 안해의 그 말이 백번 맞는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을 위해 민족의 태양을 받들어 자기를 바쳐야함을 사명으로 간주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안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기약 못할 길을 떠나자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하지만 이미 결연히 나선 길이였다.

그는 이를 사려물고 남조선대표일행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그리하여 박병수는 진정한 인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 첫 선거의 참가자로 되였고 공화국선포에 자기의 피와 땀을 바친 영예로운 공민으로 될수 있었다.

선거후 그는 남쪽으로 나갈수 없었다.

미군정과 괴뢰경찰에서는 이미 그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였던것이다.

박병수는 찢기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민족의 태양아래서 인생의 완전한 전환을 단행하리라 결심하고 평양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마음속에 격랑을 안고있은탓인지 그처럼 매혹되여 빠져버렸던 미술도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인가 보다 거대한것에 몸을 바치고싶었다.

그의 눈길은 점차 영화계에로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밑에 날에날마다 비약하는 새 조국건설의 벅찬 현실을 살아움직이는 화면에 담고싶은 욕망이 솟구치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것은 어제날의 미술가가 공화국의 품속에서 찾은 응당한 선택이였다.

그리하여 박병수는 화판우를 달리던 붓을 놓고 용약 촬영기를 어깨에 메고 민주조선건설의 한복판에 뛰여들었다.

미술가로부터 영화촬영가로!

영화촬영의 초행길에 들어선 그는 비상한 탐구와 창조적정열로 촬영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리하여 첫 영화를 촬영한것이 예술영화 《용광로》였다.

공화국의 품속에서 재능을 꽃피우며 영화창조의 나날을 보내고있던 그는 미제가 도발한 준엄한 전쟁의 불길속에 뛰여들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으로 종군촬영가로 된 그는 락동강계선까지 달려나가 인민군용사들과 함께 싸우며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영웅적투쟁모습과 미제침략자들의 천인공노할 학살만행을 보여주는 많은 자료들을 현지촬영하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어려운 시기에는 불순분자들이 박병수의 출신성분을 악용하여 갖은 기만책동을 다하였으나 신념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어버이수령님을 따라 후퇴의 길에 올랐으며 인민군용사들을 전쟁승리에로 불러일으키는 촬영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이 시기 그가 촬영한 필림들의 대부분은 기록영화 《정의의 전쟁》(1950년), 《전세계에 고함》(1950년)에 편집되였다.

그의 영화촬영활동은 전후시기와 사회주의건설시기에 보다 왕성하게 진행되였다.

전후 예술영화 《산매》와 《빨간댕기》를 비롯한 여러편의 예술영화창작과정에 예술적재능을 키운 그는 1960년대에 《붉은 선동원》(1962년), 《백일홍》(1963년), 《대지의 아들》(1963년-1964년), 《최학신의 일가》(1966년)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영화들을 촬영하여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960년대초 우리 나라 영화촬영가들중에서 남먼저 공훈예술가칭호를 안겨주도록 하시였으며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한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지니게 하여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대해같은 사랑을 받아안은 박병수는 감격에 목이 메여 자기 수기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장울화는 행운아였다. 그는 우리 수령님같으신분의 영향을 받아 보람있는 삶을 살았다. 나는 늘 장울화가 부러웠다. 하긴 나도 수령님의 품을 찾아 진리를 깨닫게 된 사람이다. 그러니 나도 조선의 행운아라고 말할수 있다.》

이 글은 위대한 은인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와 충의로 끓는 심장의 연소라고 할수 있다.

 

어버이의 보증

 

박병수의 삶의 자욱자욱에는 한생을 두고 갚아도 못다 갚을 경애하는 장군님의 고귀한 사랑도 뜨겁게 깃들어있다.

그 가운데서도 박병수가 백두산창작단에 소환되던 때의 일은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잊혀지지 않으며 만사람의 가슴을 격동시키고있다.

1969년 어느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촬영가로 일하던 박병수는 전에없이 명랑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서며 큰소리로 안해를 불러찾았다.

안해가 서둘러 가방을 받아들었을 때 그는 형언할수 없는 격정에 휩싸여 누구에게라 없이 제 심중을 터쳐놓는것이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나를 보증해주셨소. … 백두산창작단 촬영가로 불러주셨단 말이요.》

박병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선자리에서 서성거리였다.

《무슨 일인지 좀 차근차근 이야기하구려. 혼자 흥분해하지 말구…》

안해는 무등 기뻤으나 어인 영문을 몰라 붉게 상기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배려로 내가 백두산창작단 촬영가로 되였단 말이요. 믿어지지 않소?!》

박병수는 흥분을 눅잦히고 그날 있었던 사연을 안해에게 이야기하는것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발기에 의하여 항일혁명투쟁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필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영화로 옮기는 창조사업이 시작되자 일군들은 그 창작단성원들을 정치실무적으로 준비된 우수한 창작가, 예술인들로 선발하였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를 예술영화화면에 재현하고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영화로 옮김으로써 우리 문학예술의 혁명전통을 고수하고 계승해나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때문이였다.

바로 이 책임적이고도 영예로운 사업을 수행할 성원으로 박병수도 상정되였는데 일군들은 심중히 토의한 끝에 그를 보류하기로 하였다. 리유는 그의 지난날 과거경력을 고려해서였다.

이무렵 창작가, 예술인들의 사업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료해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박병수와 관련하여 제기된 이 사실을 아시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런 견해는 협애한것이라고 일깨워주시고 박병수동무는 재능있고 성실한 촬영가라고 하시면서 예술영화 《피바다》를 촬영한것을 보고 우리 나라에서 그를 따를만 한 촬영가가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영화촬영가로서 그렇게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당과 혁명에 이바지하면 되는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잠시 동안을 두시였다가 그이께서는 자신께서 직접 그를 보증하겠다고 하시면서 마디마디 뜨거운 은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는 반인민적인 남조선사회제도에서 유산계급인 자기 가정의 계급적장벽을 박차고 해방직후에 공화국의 품으로 찾아온 사람이라고 강조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는 조국해방전쟁때에는 종군촬영가로 락동강까지 진격해나가 인민군용사들과 함께 용감히 싸웠고 전후에도 우리 나라 영화예술을 발전시키는 사업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순간 박병수에 대해 잘 알고있는 일군들은 크나큰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떳떳치 못한 출신과 생활경력으로 하여 그의 마음속에 그늘이 질세라 다심하게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고결한 풍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던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날 박병수가 예술영화 《최학신의 일가》, 《마을사람들속에서》를 비롯한 여러편의 예술영화와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그대로 옮긴 예술영화 《피바다》촬영을 맡아 성과적으로 해낼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구체적인 지도의 결과였다.

《최학신의 일가》촬영을 마친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교시하시고 종자를 주신 새 음악영화촬영을 맡게 되였다. 그는 영화를 손색없이 만들 결심을 품고 지혜와 정열을 깡그리 바쳐 촬영대본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던 그는 그만 일부 사람들의 편견으로 따돌림을 받고 그 영화창작에서 제외되게 되였다. 그러지 않아도 말이 적은 박병수는 그 장대한 체구를 길게 늘어뜨리고 종일 가도 입 한번 열지 않았다.

그러던 이무렵 영화창작을 지도하시려 촬영소에 나오시였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이 괴로운 마음을 깊이 헤아려보게 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크나큰 믿음으로 그에게 중요한 영화촬영을 맡겨주시였으며 하나하나의 세부와 장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여 영화를 훌륭히 완성하여주시였다.

그리고 그후에는 그의 자그마한 재능을 높이 평가해주시며 불후의 고전적명작까지 맡겨주시는 신임을 다시금 베푸시였다. 그에게 어떻게 불후의 고전적명작까지 맡길수 있겠는가고 주저하는 일군들에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무들이 그의 토대를 보고 기웃거릴수 있는데 토대만 보고는 일을 못합니다, 그가 당을 믿고 성실하게 일하도록 하자면 우리가 그를 믿어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키웁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그가 촬영사업을 맡아하도록 해주시였던것이다.

박병수는 그이께서 안겨주시는 크나큰 믿음에 충정으로 보답할 일념을 안고 자기의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쳐나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이 열정을 두고 못내 만족해하시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뜨겁게 고무해주시였고 그의 창조사업을 걸음마다 이끌어주시였다.

1969년 8월 29일 예술영화 《피바다》를 촬영할 때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미 예술영화 《피바다》촬영형상문제며 화면구도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평양시교외의 한 촬영현장까지 찾아주시였다.

불타는 마을, 타래쳐오르는 연기, 고함소리, 비명소리로 가득찬 촬영장은 짙은 연막내와 연신 내려앉는 재티때문에 눈조차 뜰수 없었고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 모든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현장에서 오랜 시간동안이나 서계시면서 촬영을 지도해주시고 박병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시여서는 무더위속에서 정말 수고가 많겠다고 하시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이 영화에서 일제의 간도토벌을 폭로하는 장면을 잘 찍는것은 특별히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그 형상방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피바다장면에서는 무엇보다도 일제침략자들이 우리 인민들을 어떻게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는가 하는것을 력사적사실에 기초하여 진실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게 됩니다.

일제침략자들의 학살만행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우리 인민을 무저항주의적인 인민으로 그리지 말고 일제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인민으로 그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을남의 아버지가 화형당하는 장면을 잘 형상하는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피바다촬영장면에서의 형상의 력점에 대해서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창작가들이 타오르는 불길속에서 작업을 하자니 몹시 뜨겁겠다고, 특히 촬영가동무는 나이도 많은데 힘들겠다고 걱정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와 크나큰 사랑을 받아안은 박병수는 불같은 열정과 충정을 안고 하나하나의 장면을 옥돌다듬듯 촬영해나갔고 완전무결성이 보장되도록 하였다.

1969년 9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피바다》작업필림을 보아주시며 또다시 그에게 고귀한 가르치심과 분에 넘치는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

《예술영화 〈피바다〉는 촬영도 잘 하였습니다. 촬영수법이 좋습니다. …

어머니일가가 령을 넘는 장면을 비롯하여 매력있게 촬영한 화면들이 많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예술영화 《피바다》를 맡은 촬영가가 촬영을 잘한다고, 영화의 화면들을 보면 그가 극중인물의 세계에 깊이 파고들어가서 촬영을 하는것이 알린다고 과분한 평가를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처럼 그가 촬영한 화면들을 보실 때마다 매 화면들에 스며있는 그의 피타는 노력과 성실한 마음을 일일이 헤아려보시였으며 그럴수록 그를 더욱 아끼고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 촬영현장에 몸소 나오셨을 때의 일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박병수는 여느때없이 성수가 났다. 평상시에는 말이 없고 뚝한 그였는데 이날에는 노상 웃음을 거두지 못하며 신바람나게 촬영기를 다루는것이였다.

먼발치에서 촬영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저 동무가 더 늙지 말아야 하겠는데, 어데서 저런 재간둥이를 데려오겠는가고 하시며 그가 일에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잘 돌봐주라고 거듭 당부하시는것이였다.

그러신 다음 그들의 작업모습을 다시 지켜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연출가에게 좀 쉬였다 찍으라고 이르시였다.

곧 촬영이 중지되고 모두들 적당히 자리를 잡고 휴식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병수에게로 다가가시여 그와 나란히 자리를 잡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손수건을 그에게 내주시며 어서 땀을 씻으라고, 그러다가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찌겠는가고 걱정해주시였다.

그는 너무도 송구하여 얼른 제 손수건을 꺼내여 땀을 씻기 시작했는데 이마의 땀을 씻는것이 아니라 자꾸만 눈언저리를 닦는것이였다.

그제야 그가 울고있다는것을 헤아리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왜 이러느냐고 하시였다.

그는 머리를 숙인채 《아닙니다. 글쎄 이젠 늙어서 그런지 이렇게 주책머리없이…》 하고는 끝내 눈물을 쏟으며 흐느끼는것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가볍게 이르시고 그의 손을 끄당겨 자신의 무릎우에 올려놓으시며 아바이는 우리 영화계의 보배라고 말씀하시였다.

《아바이, 아바이는 우리 영화계의 보배입니다. 아바이의 촬영기술이 하도 훌륭해서 우리가 아바이를 그처럼 아끼는것입니다. 아바이야말로 실력가이고 로쇠를 모르는 정력적인 실천가입니다.

하지만 이젠 년세도 높으니 일하기 힘들것입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몸을 아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영화가 세상에 대고 큰소리를 쳐야겠는데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꼭 몸을 돌봐야 합니다.》

박병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손을 마주잡은채 격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올렸다.

《고맙습니다. 믿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

진정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사로운 사랑의 품은 그에게 있어서 순간도 떨어져 살수 없는 행복의 보금자리였으며 삶의 보람을 안겨준 은혜로운 어머니품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같은 두터운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에 그의 정치적생명도 재능도 빛을 뿌릴수 있었으며 예술가로서의 긍지와 보람도 한껏 누릴수 있었던것이다.

영화촬영가로서 그가 세운 공로는 다만 많은 영화를 촬영한데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천재적인 영화창조세계에 맞는 촬영기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독창적인 탐구의 길을 개척하였다.

화면에 흐르는 사상정서적내용을 관객의 심리에 보다 깊이 침투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박병수는 화면구도의 결심, 그에 적응한 촬영지점과 거리선택, 촬영기의 이동방향과 속도결정, 내심세계의 개방과 부각을 기본으로 하는 화면내용의 상상, 전경, 원경, 근경, 국부촬영에서 각이하게 작용하는 촬영기교의 효과, 확대, 축소, 상징화를 기본으로 하는 화면기교의 설정 등 촬영가가 지녀야 할 자질의 여러 측면들을 실천적으로 개척하였을뿐아니라 리론적으로도 완벽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심지어 그는 촬영기로 화면의 색조와 명암관계를 조절하는것이 사상예술성보장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촬영실천으로 증명하기도 하였다.

박병수는 말그대로 자기의 혁명무기인 촬영기를 가지고 김일성조선, 김정일조국의 위대하고 다양하며 전투적이고 정서적인 인간생활을 생동하게 살아움직이는 화폭으로 그려 력사에 남긴 영화계의 재사였다.

이처럼 보람찬 창조의 세계를 펼치면서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오래오래 살면서 충정의 삶을 꽃피우겠다던 그가 그만 불치의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였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였다.

이 사실을 아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친히 치료대책을 세워주시고 여러차례에 걸쳐 환자의 병상태를 료해하시면서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박병수가 6개월동안 환자생활을 하였기때문에 사회보장으로 넘어가는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에도 일군들에게 그러지 말고 직제를 그냥 두고 치료를 계속하도록 하는것이 좋겠다고 또다시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처럼 박병수와 그의 가족은 헤아릴수 없는 은정을 받아안고 감격의 눈물속에 날을 맞고 보내였다. 하지만 수술후 차도가 보이던 그의 병은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에게 드디여 림종의 시각이 닥쳐왔다는것을 예감한 박병수는 자식들을 머리맡에 앉혀놓고 종이와 만년필을 가져다달라고 하였다.

생의 마지막시각에 하고싶은 간절한 이야기를 적으려는것이였다.

하지만 이미 전신이 굳어지기 시작했던 그는 딸이 몇번이고 쥐여주는 만년필을 끝내 손에 쥘수 없었다. 간신히 겨우 숨을 모두어들인 그는 물기어린 눈길로 처자들을 바라보더니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하고 부르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말았다.

받아안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겠다고 그렇게도 모대기던 박병수, 조국이 통일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자고, 그러면 온 동리가 자기들 가문에 없는 혁명가라고 떠받들것이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군 하던 그는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가고말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비보를 받으시고 사랑하는 전사를 잃은 비통함을 금치 못하시며 박병수는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영화화한 예술영화 《피바다》와 《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들을 촬영한 공로있는 촬영가였습니다, 정말 아까운 동무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그의 한생을 빛나게 총화지어주는 귀중한 말씀을 하시였다.

사실 그의 공로란 경애하는 장군님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였다. 정치적시련을 겪을 때에는 철석같은 신임을 안겨주시고 지혜가 모자랄 때에는 슬기와 용맹을 북돋아주시며 적극 내세워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은공을 떠나서 어찌 그의 공로를 생각할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성과와 영예를 고스란히 전사들에게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공로있는 촬영가라고 높이 평가해주시며 그를 혁명적예술인대오에 영원히 서있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전사는 받아안은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 갔어도 그를 키워주고 보호해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죽어도 영생하는 삶을 주시였고 끝없는 사랑을 안겨주시였다.

어느해 여름, 어느 한 예술작품을 지도하실 때에도 대형영사를 삽입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다가 박병수가 있으면 이럴 때 판을 치겠는데, 그가 살아서 늘그막에 이런 일이나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가슴뜨겁게 회고하시였으며 또 어느해에는 새로 창작한 영화를 보시면서 박병수가 촬영가들가운데서 제일 재간있는 촬영가였다고 거듭 값높이 불러주시였다.

2006년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예술부문에서 오래동안 일해온 창작가들과 배우들을 언제나 잊지 않고있다고 하시면서 박병수는 재능있는 영화촬영가였다고, 그는 미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촬영대본도 그림을 그려 만들군 하였다고 뜨겁게 회고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박병수에게 돌려주시는 사랑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984년에 어느 한 나라에서 세계영화명인편람출판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의 이름있는 영화예술인들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였을 때에도 박병수를 잊지 않고 명단의 앞자리에 넣도록 해주시는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오래전에 떠나간 한 촬영가에게 두고두고 값높은 평가를 해주시는 장군님의 한없는 사랑은 온 가족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주었다.

하기에 박병수의 가족들이 경애하는 장군님께 올린 감사의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져있다.

《아버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추억속에 살아있습니다. 장군님의 품속에서 영생하고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박병수의 가정에는 세개의 명예증서가 귀중히 보관되여 있다. 그 증서들중 하나가 박병수의 아들 박세웅이 받아안은 인민예술가칭호증서이다.

박세웅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영화촬영가가 되여 인민예술가로 자라기까지에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남달리 베풀어주신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박세웅은 아버지의 천성적인 소질을 물려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미술에 취미를 가지고있었다.

이 자그마한 재능의 싹까지도 소중히 여겨주고 빛내여주신분이 있었으니 그분은 바로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어느날 일군들을 통해 박세웅의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당 일군을 찾으시여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시고 박병수는 재능있고 영화창작에서 공로가 있는 사람인데 그의 아들을 지망대로 대학공부를 잘 시켜 아버지의 대를 훌륭히 잇도록 하게 하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의 말씀을 전달받고 박병수의 온 가족은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온밤 잠들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여 박세웅은 대학입학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고 그처럼 바라던 대학교정에 들어서게 되였던것이다.

이날 박병수는 다 큰 아들을 어린애처럼 목마에 태우고 울고웃으며 온 방안이 좁다하게 빙글빙글 돌면서 경애하는 장군님의 배려에 꼭 보답해야 한다고 몇번이고 당부하였다.

절세위인의 축복속에 성장의 첫걸음을 뗀 박병수의 아들은 평양미술대학과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촬영가가 되였다.

날이 갈수록 깊어만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고저 그의 아들은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쳐 첫 작품으로 예술영화 《전초선》을 훌륭하게 찍어낸데 이어 예술영화 《도라지꽃》을 촬영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도라지꽃》을 보시고 박병수를 회고하시면서 그는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인 《피바다》,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예술영화 《피바다》, 《꽃파는 처녀》를 비롯하여 좋은 영화를 많이 촬영하였다, 미술가였기때문에 그가 촬영한 화면들은 하나의 유화작품같았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박병수는 얼굴이 길쑥하고 늘 말이 없었는데 그에 대한 인상이 깊이 남아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박병수의 아들도 촬영을 잘한다고 높이 치하해주시며 먼저 간 전사를 그렇듯 못 잊어 뜨겁게 추억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그가 예술영화 《음악가 정률성》(전후편)을 만들어내놓았을 때에도 영화를 보시고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만점짜리라고 하시며 《예술영화 〈음악가 정률성〉은 촬영도 잘하였습니다. 촬영가가 인물초상을 잘 찍었습니다.

영화의 모든 화면이 그림같으며 나무랄데가 없습니다. 촬영가 박병수동무의 아들이 영화를 찍었다는데 아버지 못지 않게 영화촬영을 잘합니다.

그가 미술공부를 한 후 평양연극영화대학 촬영과를 나왔다고 하는데 촬영가는 역시 미술을 잘 알아야 합니다.》라고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

박세웅은 아직 여러모로 미숙한 자기를 아버지의 곁에 세워주시며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1992년 2월초 어느날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제1, 2부를 함께 보자고 창작가, 예술인들을 부르시였다. 그 자리에는 박병수의 아들도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창작가, 예술인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며 그의 앞에 오셨을 때 한 일군이 촬영가 박병수의 아들이라고 말씀올리였다.

순간 경애하는 장군님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확 어리였다.

《박병수의 아들이란 말이요? 신통하구만. 아버지와 꼭같아. …》

떠나간 전사를 다시 만나신듯 그렇게도 반가와하시며 뜨겁게 손을 잡아주실 때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을 뵈오면 올리려고 골라두었던 인사의 말씀 한마디 올리지 못하고 그만 흐느끼고말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깨를 들먹이는 그의 등을 다정히 두드려주시며 한동안 서계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창작가, 예술인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사진촬영후 창작가, 예술인들의 열광적인 바래움을 받으시며 걸어나가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촬영대의 뒤줄에 서있는 그에게 손을 내미시였다. 그는 어망결에 두손을 내밀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뜨겁게 잡으시고 아버지처럼 촬영을 잘해서 꼭 훌륭한 촬영가가 되라고 거듭 이르시였다.

그는 너무도 가슴뜨거워 《고맙습니다. …》 그저 이렇게 외우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내세워주시고 온갖 사랑과 배려를 다 베풀어주시였다.

그 나날에 그는 우리 나라 영화예술발전에 한몫하는 촬영가로, 인민예술가로 성장하였다.

 

안해의 추억

 

박병수의 안해는 영화계에서 소박하고 진실한 어머니역으로 이름난 공훈배우 손병옥이다.

그는 취재온 작가에게 남편이 자기를 깊이 리해하고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한번도 맞대놓고는 추어준적도 칭찬한적도 없고 또 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한적도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섭섭했느냐구요. 천만에요. 난 그래서 그이를 더 사랑하고 미더워했답니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한 말은 뜻밖이였다.

《그에겐 남쪽에 본처가 있었는데 한번도 내앞에서나 딴사람들앞에서 그를 흉보거나 헐뜯는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답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후처를 얻으면 어느 기회인가 한두번은 본처흉을 본다는데 그 사람은 전혀 그런것을 몰랐어요. 물론 내앞에서 본처자랑도 안했지만… 그래서 내가 언젠가 슬그머니 본처가 미인이였는가고 물어본적이 있었지요. 그랬더니 글쎄 그 무뚝뚝한 사람이 피씩 웃으면서 당신도 미인이 아니잖소, 이러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진실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 아닐가요.》

박병수의 인간됨을 말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첫 안해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사랑은 조국통일에 대한 열렬한 갈망과 결합되여있었다.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는 그리운 전라도 고향의 대나무숲이 설레이고있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벗들앞에서 고향자랑을 하군 하였다.

《우리 고향처럼 살기 좋은 곳은 아마 없을거야. 우리 고향 임실의 대는 소나무줄기처럼 굵지. 감은 또 어떻구. 보태지 않구 한알이 그저 주먹만 하다니까. …》

이 사실을 아시게 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기 고향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애국심이라고, 고향이 없이야 조국이 어디 있겠는가고 하시며 그의 애국의 마음을 소중히 여겨주시였다.

《그는 언제나 수령님과 장군님을 흠모하였으며 늘쌍 고향을 그리면서 살았지요.》

안해 손병옥은 이 말을 하며 손수건을 꺼내여 눈굽을 닦았다.

《그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믿음을 받아 안은 그 숱한 이야기는 다 아시는거구요.》

그의 추억담은 길지 않았다.

《한가지만 더 이야기한다면 어버이수령님께서 조국통일의 3대원칙을 내놓으시고 남측당국자들도 그것을 받아들여 7. 4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그가 통일이 다되는줄 알고 너무 좋아서 눈물을 흘리던 일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뒤로 북남사이에 좋은 일이 있을적마다 누구보다 기뻐하고 밤잠을 못 들군 했는데… 그인 저세상에 가서두 통일의 날만을 기다리고있을겁니다.》

그렇다. 남녘땅을 떠나 북으로 올 때 박병수는 결코 고향을 버린것이 아니였다. 고향에 두고 온 그 모든 소중한것, 소나무줄기같은 참대며 주먹같은 붉은 감 그리고 무엇보다 귀중한 첫사랑의 추억을 그는 길이길이 간직하였다.

그가 영화의 화면들에 남긴 아름다운 화폭들에는 보이지 않는 애국의 열망이 아로새겨져있었으니 그것은 조국통일이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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