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능있는 연출가로 

 


박 학 (영화연출가)

 

                        • 1914년 12월 6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출생.

                        • 해방전 3. 1극장을 비롯한 여러 극단과 영화회사에서 배우생활.

                        • 1961년부터 영화연출가.

                        • 1982년 11월 11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배우.

                                                           

 

 

장장 100여년을 헤아리는 조선영화사의 갈피에는 배우로서, 연출가로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뚜렷한 이름을 남긴 인민배우 박학도 있다.

태양의 빛과 열이 있어 자연의 꽃들이 향기풍기듯이 절세의 위인, 위대한 스승의 손길이 있어 그는 명작, 걸작들을 창조해낸 영화연출부문의 공인된 재사로, 우리 인민의 재능있는 예술가로 될수 있었다.

 

 

민족예술을 갈망하여

 

리지적인 두눈과 체소한 몸에 항상 머리를 수그리고 걷는 사나이, 예술가라기보다 지성도가 푹푹 풍기는 세련된 대학교수를 방불케 하는 그가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박학의 모습이였다.

박학은 민족수난의 비운이 칠칠이 드리웠던 망국초기인 1914년 12월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봉건왕조말년에 어떤 우연한 연줄로 궁성에 들어가 나중에 오위장이라는 무관벼슬까지 지낸 사람이였다. 박학이 출생한 당시에는 경상골에다 자그마한 철공소를 차려놓고있었다. 그러고보면 어느 정도 부유한 가정이였다고 볼수 있다.

박학의 어머니는 순천에서 살던 농민의 딸이였다.

아버지는 박학을 늘그막에 본 아들이라 더없이 귀애하면서 그가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연개소문과 온달장군, 을밀과 솔개장군, 김응서장군과 계월향 그리고 임진왜란시기에 평양성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이야기와 미제침략선 《셔먼》호를 불태우는데 앞장서신 김응우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대동문과 칠성문, 창광산과 보통문에 대한 전설, 시인을 울린 련광정이며 성천에서 떠내려왔다는 릉라도와 갑자기 생겨났다는 청류벽, 도끼산과 귀성이야기, 대동강을 판 영특한 봉이 김선달에 대한 내용이였다.

아버지의 구수한 옛이야기는 박학의 동심에 은연중 자기 고향 평양에 대한 사랑과 귀중한 마음을 간직하게 하였다.

평양에서 숭인학교, 공업실습학교를 다닌 박학은 소년시절 공부에 전념하기보다는 장난과 놀음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는 낮에는 경상골안이 좁다하게 다니면서 뛰놀고 대동강가에 나가 미역감기를 즐겨하였으며 저녁에는 부벽루에 올라가 놀기를 좋아하였다. 거울같이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흐르는 청류벽우에 둥실 떠있는듯 한 루정이란 뜻에서 부른 부벽루, 해가 서산마루에 사라지고 밝은 달이 떠오를무렵의 이 일대 경치는 그야말로 황홀한것이였다. 여기서 그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꽃이나 풀들을 모아서 겨루는 꽃싸움과 풀싸움을 하면서 향토에 대한 애착과 긍지를 가지게 되였다.

박학은 그 시절에 구경도 무척 좋아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에 있던 해락관, 제1영화관으로 계속 다니며 조명희의 《김영일의 죽음》, 《파사》, 송영의 《백양화》, 진우촌의 《구가정의 끝날》 등의 연극작품들과 이 시기 손꼽히는 변사들이였던 김영환, 김조성이 출연한 영화인 《춘향전》,《흥부와 놀부》 그리고 프랑스빠데영화회사의 부류베르영화들을 즐겨 보았다.

또한 당시 련광정부근에서 열리군 하던 명창들의 음악회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가군 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민요들과 《황성옛터》, 《봉선화》 등 비가들을 듣군 하였다. 박학이 구경을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어머니가 국수를 사먹으라고 준 돈까지 연극과 영화를 보는데 소비하군 하였다. 아마도 이 시기의 흥미본위적인 구경들이 후날 박학을 예술계로 떠미는데 일정한 작용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학은 이때까지만 하여도 앞으로 자신이 예술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박학이 철이 들기 시작할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정의 기둥이 뽑히자 이때부터 콩나물장사, 물장사를 하면서 가난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청년기에 들어서며 향학열에 불타던 박학은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다가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명고옥동해상업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학급에는 1929년 가을에 있었던 광주학생사건참가자들이 여러명 있었는데 박학은 이들로부터 사건당시 일제가 저지른 야수적만행에 대해 듣고 치솟는 민족적울분으로 몸을 달구었다.

이때부터 박학은 좌익서적들을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동경에 있는 동아상업학교로 적을 옮긴 박학은 학교과정을 마치고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대학 예술과에 적을 두게 된것은 젊은 혈기에 다소나마 민족예술을 지향해서였다. 이미 상업학교시절부터 열혈청년 박학의 가슴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예술에 대한 지향이 은연중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그는 재학기간 극예술을 전공하는 한편 주영섭을 비롯한 진보적인 조선사람들이 조직하였던 3. 1극장(후에 조선예술좌로 개칭)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이 단체에서는 주로 《춘향전》과 《심청전》을 비롯한 민족고전물들과 《개척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그리고 외국의 진보적작가들인 체호브와 입쎈, 고리끼와 같은 경향성이 좋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창작공연하고있었다.

반식민지적, 반파쑈적인 성격을 띤 이 단체의 영향을 받으며 박학은 소부르죠아적인 자신의 과거생활과 결별하기 시작했고 망국노로 된 자기 처지에 대하여 깊이 깨닫게 되였다.

그리하여 박학은 공부가 끝난 오후가 되면 극단의 동료들과 함께 조선인거주지역으로 다니며 정열적으로 선전극활동을 벌려나갔다. 이렇게 그는 예술활동의 첫걸음을 내디디였다.

이 시기 박학의 집에서는 근근히 대주던 얼마 안되는 학비마저 생활난으로 보내주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부자집 학생들은 집에서 한달에 100원이상의 학비를 부쳐오건만 박학에게는 보잘것없는 적은 돈이 오군 하였다.

박학은 어머니의 지성이 담긴 돈을 쪼개가며 생활했는데 그 돈마저 거덜이 나자 그는 신문배달, 우유배달, 림시로동 등으로 힘겨웁게 고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사람들에 대한 민족적멸시와 차별도 걸음걸음 뒤따랐다.

하숙집 하나를 얻자 해도 어지간히 품을 들여야만 했다.

하숙집에 가면 문앞에 《하숙방 있습니다. 단 내지인에게만 한합니다.》라는 글이 나붙어있었다. 이런 식으로 조선사람들을 로골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했던것이다.

1935년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조국에 돌아온 박학은 어머니의 권고로 조인숙과 결혼을 하고 다시 현해탄을 건너갔으나 이듬해 여름 학비난으로 끝내 졸업을 몇달 앞두고 중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해 가을 조국으로 돌아온 박학은 서울에서 자신이 직접 동료들과 함께 연극협회라는 극단을 조직하였으나 극심한 재정난으로 얼마 못가 파산되고말았다.

1937년 평양에서 다시 연극단체를 조직하려던 박학은 갑자기 《불온사상》을 가졌다는 리유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류치장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후 극단연극좌라는 흥행극단에 망라된 박학은 함경도지방에서 순회공연을 하던중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승리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이때부터 박학은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경모의 정으로 가슴을 끓이게 되였다. 박학의 정신세계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름도 아버지가 지어준 한구라는 이름으로부터 자신이 스스로 학이라고 고쳤다. 그것은 민족을 위한 참다운 예술을 탐구하고 지향한다는 뜻으로서 그자신의 새 출발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박학의 가슴속에서는 민족예술에 대한 갈망이 불길같이 일어났으나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더 우심해지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말미암아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진보적예술작품은 물론 조선말로 된 연극이나 영화의 제작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지어 자그마한 장치물이나 광고에서조차 우리 글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극단들을 운영하거나 영화를 제작할수 있는 자금난은 더해만 갔다. 이런 형편에서 수많은 크고작은 예술단체들과 개인영화회사들의 무질서한 제작경쟁이 펼쳐지게 되였으며 그속에서 박학은 극단연극좌로부터 랑만좌로, 다시 조선무대와 국민좌, 청춘좌, 고협극단 등으로 명칭을 고쳐가며 심한 류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과정에 그는 당대 연극, 영화부문의 명사들이였던 문수일, 김태진, 강호, 주영섭, 라웅, 황철, 리규설, 심영, 림선규, 문예봉 등과 사귀게 되고 뜻도 함께 나누게 되였다.

특히 그는 주영섭, 라웅, 황철과 가깝게 지내였다.

주영섭은 같은 평양출신으로 일본에서 고학을 함께 한 사이로서 해방후에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사업을 한 사람이고 라웅은 그의 정신적인 선배로서 해방직후 박학이 조선로동당원이 되도록 이끌어준 관록있는 연출가였으며 황철은 이 시기 박학이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 무대배우로서 해방후 국립연극극장(오늘의 국립연극단) 총장 겸 교육문화성 부상으로 사업한 일군이였다.

당시 황철은 《이 땅에 저만 한 배우가 없다.》는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있었는데 그의 연기도 연기려니와 특히 음성이 기가 막혀서 무대에서 그가 내는 소리는 좋은 음악을 듣는것으로 착각할만큼 아름답고 류창한 음성으로서 참으로 매력적이였다.

이들은 영화에도 함께 출연하군 하였다.

박학이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것은 1938년 천일영화사에서 발성으로 제작한 예술영화 《도생록》(8권, 연출 안철영)이였는데 그는 이 작품에서 라웅과 함께 주인공역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후 박학은 극랑영화사에서 역시 발성으로 제작한 예술영화 《어화》(8권)를 비롯한 여러편의 영화들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전망성있는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해방전 박학의 예술활동에서 기본을 이룬것은 연극분야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에 비해 연극이 보다 대중적인 예술로 되고있었다. 그때로서는 연극만큼 대중의 심장을 잡아흔드는 예술이 없었다.

무성영화가 발성영화로 발전되고 그것이 한 나라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적판도에서 보급되기 전까지 연극은 예술계에서 가장 위력한 감화력을 가지고있었던것만큼 우리 나라에서도 실태는 마찬가지였다.

일제침략자들의 조선강점후 우리 나라의 진보적예술인들은 일본도 영화업을 발전시키고있는데 조선사람이라고 해서 영화를 못 만들것이 무엇이냐, 우리도 선진국가들처럼 영화를 꽝꽝 만들어 영화예술에서도 자립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세계만방에 시위하자는 배심을 가지고 민족영화예술건설의 간고한 초행길을 개척해나갔다.

그리하여 요람기라고 할수 있는 1910년대의 활동사진시기를 경과한 우리의 민족영화예술은 1920년대 중엽 비판적사실주의를 거쳐 발성영화의 제작과 사회주의적사실주의작품창작에로 한껏 치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특히 라운규, 김태진, 강호를 비롯한 량심적인 영화인들은 《아리랑》, 《뿔빠진 황소》 등 민족적향취가 강한 작품들을 제작하여 우리 나라 예술인들의 실력을 힘있게 과시하였다.

그러나 해방전까지만 하여도 영화제작사업은 연극작품창작에 비하여 뒤면에 밀리우고있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영화의 력사가 연극의 력사에 비해 훨씬 짧은데도 있었지만 영화제작사업이 상대적으로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던 사정과도 관련된다.

이로부터 해방전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영화건수에 비해 창작공연된 연극작품건수는 훨씬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1920~1930년대)는 학생수가 50명쯤 되는 시골학교들에서도 연극을 한다고 떠들만큼 우리 나라에서 연극은 개화기, 전성기였던것이다.

이러한 시대적풍조에 편승하여 그리고 영화제작사업이 상대적으로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던 불가피한 사정으로부터 당시 우리 나라의 극예술인들은 대부분 연극운동에 심혈을 바치고있었다.

박학도 전문영화배우가 되고싶었지만 어쩔수 없이 연극창조활동을 벌리게 되였다.

이 시기 그는 풍자극인 《김삿갓》과 민족고전물들인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등 조선사람의 민족적의식을 고취한 진보적인 작품들에 많이 출연하면서 자기의 연기술을 부단히 련마하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박학의 생활은 언제나 애수와 비애에 젖어있었다. 그는 일제의 비위를 거슬린 대사 한마디때문에 공연후 순사놈들에게서 따귀를 얻어맞기도 하였고 무대와 극단을 빼앗기고 비내리는 거리를 방황하기도 하였다. 어느 한 지방순회공연때에는 밥값이 떨어져 려관집에 자기의 중절모와 극단의 배우를 인질로 떨구어두기도 하였으며 빌려입은 의상이 그만 말썽이 되여 공연도중에 옷을 벗기우는 일까지도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예술인으로 부평초처럼 살아왔으니 무슨 모욕인들 당하지 않았겠는가.

민족의 태양이시며 불세출의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에 의하여 조국은 드디여 해방되였다.

해방후 박학은 새 조선에서 연극활동을 마음껏 해보려는 열망으로 서울에서 당시 조선프로레타리아연극인동맹 서기장이였던 강호의 추동밑에 라웅, 태을민, 황영일 등과 함께 극단예술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첫 작품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을 형상한 장막희곡 《독립군》을 무대에 올렸을 때 박학은 연극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다. 이어 그는 조령출 작 《론개》와 한율 작 《옥문이 열린다》에서도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조령출 작 연극 《독립군》은 서울과 전주, 부산 등 여러 극장들에서도 공연되였다.

박학일행이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살판치는 남녘의 무대우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한것은 민족의 태양을 받드는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념원을 반영한 애국적인 거사였다.

당시 이 공연을 본 관중의 반향은 대단하였다. 관중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영웅적항일무장투쟁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면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만고의 영웅으로 높이 칭송하였다.

박학이 김대장역을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하였던지 당시 민족주의운동의 거두였던 백범 김구는 연극을 보고 흥분한 나머지 나는 아직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지 못했는데 이 무대에서 뵈웠다고 눈물이 글썽하여 말하였다.

한편 반동들은 첫날부터 이 작품의 공연을 파탄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놈들은 리범석의 《대한청년단》깡패들을 내몰아 박학을 비롯한 여러명의 출연자들을 구타하고 20일동안이나 구금하는 소동을 벌리였다. 언제인가 부산지방공연때에는 2층의 객석에서 수류탄이 무대에 날아와 터지는 바람에 박학은 왼쪽팔에 심한 부상을 당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박학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공연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박학은 팔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동료들과 함께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남북련석회의를 지지하는 예술공연을 진행하였고 계속 창조활동을 과감히 벌려나갔다.

이에 겁을 먹은 적들은 박학을 비롯한 극단예술좌성원들을 체포할 흉계를 꾸미였다. 거리와 골목마다에 현상금까지 건 체포령이 나붙어 박학일행은 더는 어쩔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였다.

실로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와 그 주구들에 의하여 예술인들의 처지는 날이 갈수록 험난해지기만 하였으니 예술적진실이나 량심은 곧 감시와 형벌의 대상으로 되였다.

인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진정한 예술을 위해서는 변변한 무대도 촬영기도 차례지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경성발성영화촬영소는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미군정에 압수되고 적지 않은 예술인들이 방안에 앉아있거나 나다니기를 주저하였으며 죽을고비에 이른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어쩔수 없이 생활전선에 나섰다.

박학도 극빈한 생활난으로 하여 감기에 걸린 둘째아들을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잃어야 하는 비극적운명을 감수하여야만 하였다.

이때처럼 그에게 해빛이 그리운 때는 없었다.

1948년 8월 드디여 박학은 동료들과 함께 진정한 삶의 품-어버이수령님의 품을 찾아 사선을 헤치고 공화국북반부로 향한 힘찬 걸음을 내디디게 되였다. 민족예술을 갈망하여 몸부림치며 키없이 흘러간 그의 예술활동은 마침내 끝장나게 되였다.

 

 

창작단의 사령관인 영화연출가로

 

재생의 기쁨과 희망을 안고 해방된 조선의 첫 영화예술인대오에 당당히 들어선 박학은 영화촬영소를 튼튼히 꾸리는 사업에 투신하는 한편 새형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력사적인 창조사업에 자신의 온갖 정열을 다 쏟아부었다. 그의 마음은 늘 창작적열정으로 불타고있었다.

하여 박학은 해방후 첫 예술영화 《내 고향》(1949년)의 력사적화폭에 주요인물로 등장하게 되였다.

문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연출, 연기, 촬영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위대한 수령님의 구체적인 지도를 받으며 창조된 이 영화에서 박학은 악질지주일뿐아니라 친일주구인 최경천의 아들 인달역을 아주 훌륭히 수행하였다. 영화에서 인달은 경찰의 앞잡이가 되여 경방단 단장의 자격으로 마을사람들을 징용에 내몰며 일제의 공출받이에 앞장서는가 하면 관필의 애인인 옥단이를 검질기게 유혹하려 든다.

그가 가증스러운 인달형상을 얼마나 생동하게 하였는가 하는것은 당시 길을 가던 청소년들이 그를 보고 《인달이 개새끼》라고 저주와 분노를 표시한데서 그리고 어느 한 나라에서 진행되고있는 영화축전에 참가하였을 때 그곳 조직일군들이 박학에게 《최인달선생》이라고 유모아적으로 호칭한데서 뚜렷이 표현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영화라고 높이 평가하신 이 작품은 항일혁명투쟁의 력사적의의와 그 위대한 생활력을 깊이있게 반영하고 해방후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적민족예술영화창조의 첫 개시를 선포하였다는 의미에서 획기적리정표로 되였으며 이후의 영화창조실천에 귀중한 디딤돌로 되였다.

박학은 이 작품에 이어 해방후 두번째 예술영화인 《용광로》의 주인공 최용수역을 그리고 세번째 예술영화인 분계연선 은파산일가의 생활을 취급한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주인공역에서도 성공하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창조된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 《비행기사냥군조》, 《정찰병》 등에서도 그는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관록있는 배우로 되였다.

전후시기에 박학은 예술영화들인 《다시는 그렇게 살수 없다》, 《형제》, 《준령을 넘어서》, 《동이 튼다》, 《두만강》 그리고 연극 《위대한 힘》 등에서 주인공 또는 주역으로 출연하여 진실한 역형상으로써 관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박학의 이러한 예술적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헤아려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소망대로 창작단의 사령관인 영화연출가로 내세워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신임속에 연출가로 된 박학은 첫 연출작품으로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를 맡게 되였다.

그는 자기의 창조적지혜와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를 훌륭히 창조해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62년 1월 4일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를 보시고 영화가 결함이 없이 잘되였다고 하시면서 당정책을 정확히 반영하였으며 현실도 진실하게 반영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 영화에 인민상을 수여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박학이 처음으로 연출한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는 1962년 2월 2일 조선영화사상 처음으로 인민상을 수여받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학이 더 큰걸음을 내디디도록, 시대와 인민이 요구하는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내도록 세심한 지도와 각별한 은총을 베풀어주시였다.

박학은 예술영화 《혁명의 길》(《한 지대장의 이야기》)의 연출을 맡고 그 첫 필림을 완성하여 어버이수령님께 올린 후 영화에 대한 교시를 주시기만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있었다.

새해가 밝아 어느덧 보름이 지난 1월 중순의 어느날 박학과 창작가들은 해당 일군으로부터 수령님의 교시를 흥분속에 전달받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영화가 전반적으로 잘되였다고 치하하시면서 영화의 제목으로부터 인물의 대사, 혁명투쟁의 본질을 옳게 그리는 문제를 비롯하여 영화에서 수정하여야 할 몇가지 결함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특히 녀주인공이 지하공작에서 돌아오라는 지대장의 지시를 받고 기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몸단장을 하는것은 소시민적인 행동이라는것과 녀주인공이 적에게 체포될 때 인차 독약을 먹고 순순히 끌려갈것이 아니라 적들의 간담이 서늘하게 후려쳐야 한다는것을 지적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적어나가고있던 박학은 그 순간 죄스러움으로 하여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것은 두 장면 다 영화문학에는 씌여있지 않았던것을 연출가인 박학이 그렇게 만든것이였다.

사실 그 장면들은 영화연출가인 박학의 정치사상적준비정도를 집중적으로 드러낸것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녀주인공이 거울앞에서 얼굴을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말하면 연출가로서는 그 어떤 성격탐구의 시도라고 보았던것이다. 박학은 지하공작원이라 하더라도 녀성은 녀성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생활이 성격형상에서 풍겨나와야 하지 않겠는가고 생각하면서 그가 부대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거울부터 들여다보는 화면을 넣었던것이다. 이것은 박학이 혁명투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리해하지 못하고 또 지난날의 낡은 소부르죠아적미학관의 잔재를 극복하지 못한데서 나온 사상적과오였다.

녀주인공이 체포되는 장면을 놓고보아도 그러하였다.

박학은 녀주인공이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것을 설정함으로써 혁명가의 강의한 의지와 고상한 혁명적지조를 보여줄수 있으리라고 타산하면서 제딴에는 이것이 그 어떤 새로운 발견이라도 되는듯이 자부하였던것이다.

혁명가의 풍모를 심히 손상시킨 이 모든 연출상의 결함은 전적으로 박학이 아직 혁명적세계관이 똑바로 서있지 못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전달하고나서 해당 부문 일군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이 교시를 주시기까지 영화를 여러번이나 보아주시였다는것을 알려주었다.

박학은 고개를 떨군채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불과 보름동안에 여러번이나 보아주시다니! 그것도 상하편 18권을, 한번 돌리자면 3시간 반이나 걸리는 이 긴 영화를…

수령님의 은덕에 무엇으로 보답한단 말인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영화의 완성을 위하여 그토록 심려하고계시는데 연출가인 나는 과연 무엇을 하였던가!)

박학은 자책으로 하여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전달받고 집으로 돌아온 박학은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박학은 다음날부터 자신의 잘못을 채찍질하고 수령님의 교시의 구절구절을 되새겨가면서 영화의 수정작업에 달라붙었다.

혁명전통주제의 대표작으로 완성하라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는 박학의 심장을 무한히 격동시켰으며 모든 열정을 여기에 쏟아붓게 하였다.

박학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지적하여주신 그 장면들만 고쳐놓으면 영화는 완벽을 기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모든 노력을 거기에만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녀주인공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과 독약을 먹는 장면을 비롯하여 수령님께서 지적하여주신 장면들이 빠른 시일안에 수정되였으며 영화를 다시 어버이수령님께 올릴수 있게 되였다.

그로부터 얼마후인 1966년 2월 3일 저녁 박학은 뜻밖에도 어버이수령님께서 몇몇 영화창작가들과 함께 자기를 부르시였다는 통지를 받게 되였다.

박학의 가슴은 마냥 부풀어올랐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근 스무해, 국가적인 행사와 촬영소에 몸소 현지지도를 나오신 날들에 어버이수령님을 뵈올 때마다 더없는 영광과 행복에 눈물흘리던 자신이 오늘은 직접 그이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으니 그 감격과 흥분은 이루 다 말할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만나뵈올 그 순간을 생각하며 박학은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걱정만을 끼쳐온 이름없는 한 연출가를 친히 불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사랑을 생각하면 목이 메여오기만 하고 이밤따라 아득히 흘러간 천대와 굴욕의 지난날이 자꾸만 눈앞에 되살아나는것이였다.

어느덧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박학이 창작가들과 함께 차에 몸을 싣고 먼길을 달려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신 곳에 다달은것은 아침 9시경이였다.

우리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시느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침식을 잊고 현지지도의 바쁘신 나날을 이어가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영화예술이 걱정되시여 이렇게 불러주셨다고 생각하니 눈굽이 뜨거워지고 죄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이윽고 박학과 그 일행은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는 방으로 들어섰다.

문가에까지 걸어나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모두들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하시면서 일일이 그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다심한 어버이의 손길이런듯 한없이 따사로운 수령님의 사랑은 그대로 온몸에 스며들어 박학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너무도 행복하여 가슴이 높뛰였고 목이 꽉 메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몸둘바를 몰라하는 박학과 창작가들에게 어서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시며 과자도 집고 차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상우에 놓여있는 그릇들을 가리키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인품에 이끌리여 모두는 어느덧 단란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자애로운 미소를 담으시고 창작가들의 경력을 한사람씩 물어주시였다.

차례가 되여 박학이 간단히 경력을 말씀드리자 수령님께서는 경험들이 다 오랜 동무들이라고 하시며 박학동무는 30년이나 된다고 못내 대견해하시였다.

박학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하시는 그이의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것을 겨우 참았다. 예술년한이 대체 무엇이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토록 대견해하시는것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장시간에 걸쳐 피로도 다 잊으시고 창작가들에게 혁명적문학예술작품창작의 절박한 필요성과 그 과업에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그러시면서 근로자들에 대한 교양사업을 강화하여 그들이 혁명적세계관을 철저히 세우며 계급적원쑤들을 쳐부시고야말겠다는 높은 각오를 가지고 혁명투쟁에 떨쳐나서게 하는 작품이 많아야겠는데 그런 작품이 없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혁명전통주제의 영화들이 눈보라속을 행군하면서 고생하는 장면만 보여주거나 뚱땅뚱땅 총을 쏘며 전투하는 장면만 지루하게 보여주는것이 결함이라고 지적하시면서 혁명에 대한 인식과정, 혁명적세계관의 형성과정을 잘 그리는것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대하여 자신께서 몸소 체험하신 산 자료들을 가지고 이야기하여주시였다.

박학은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 한마디한마디를 새겨들으며 그이께서 어찌하여 한편의 영화에 그처럼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고계시였는가 하는것을 이날 비로소 심장으로, 온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혁명적작품창작이 그토록 중요하고 절박하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8권이나 되는 긴 영화를 보름동안에 무려 여러차례나 보아주시며 부족점을 일깨워주신것이 아닌가!

박학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이의 사상과 의도를 깊이 체득하지 못한 자신이 더욱더 뉘우쳐졌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오랜 시간에 걸친 말씀을 끝마치시였을 때에는 벌써 한낮이 기울기 시작할무렵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늘 이야기는 이만하고 우리 기념사진이나 한장 찍자고 하시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게 된 크나큰 행복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박학과 창작가들은 해빛밝은 앞뜰에 섰다. 계절은 립춘이라고 하나 아직도 날씨는 맵짰다.

어버이수령님을 가운데 모시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가만!》 하고 사진사에게 촬영을 제지시키더니 손님들이 외투를 다 벗었는데 주인이 입어서야 되겠는가고 하시며 자신께서도 외투를 벗으려 하시는것이였다.

창작가들모두가 날씨가 맵짠데 외투를 벗으시면 안된다고 간절하게 말씀드렸다.

창작가들을 둘러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이 정 그렇게 요구한다면 할수 없다고 웃으시는것이였다.

촬영이 끝나자 창작가들은 작별인사를 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창작가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라고 간곡한 말씀을 하시며 그들을 다정히 바래워주시였다.

박학일행은 차가 대기하고있는 정원의 굽인돌이로 걸어나왔다. 그런데 굽인돌이에서 돌아다보니 아직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현관앞에 서시여 박학과 그 일행을 바래워주고 계시는것이였다.

박학과 그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하시며 다정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 순간 박학은 불시에 쏟아지려는 뜨거운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다시한번 어버이수령님을 향하여 인사를 올리고는 차에 몸을 실었다. 가볍게 울리는 차의 시동소리와 함께 박학의 두볼에는 참고참았던 격정의 눈물이 콱 쏟아져내렸다.

달리는 차안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 한마디 없었으나 모두의 마음속에 꽉 차오른것은 하나의 생각, 오직 어버이수령님의 건강을 삼가 축원하고 또 축원하는 그 하나의 소원뿐이였다.

박학에게 있어서 1966년 2월 4일은 이렇게 어버이수령님을 난생처음 몸가까이에서 만나뵈온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그 뜻깊은 날에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되새기며 박학은 연출가로서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가 하는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였다.

그는 열정에 넘쳐 이미 수정하여 수령님께 올린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의 화면들을 다시 더듬어보았다. 무엇인가 딱히 찍을수는 없었으나 빈구석이 자꾸만 느껴지고 다 만들어놓지 못한 미완성작품이라는감이 자꾸 드는것이였다.

초조감속에 날이 흘러갔다.

2월 4일의 감격과 흥분이 아직도 가슴속에 생생한 그달 23일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의 창작가들인 영화문학작가와 박학을 또다시 불러주시였다.

정말 뜻밖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온것이 바로 얼마전인데 나라일에 바쁘신 그이께서 또다시 자기들을 몸가까이에 불러주시다니?!

박학의 가슴은 끝없는 흥분으로 울렁거리기만 하였다.

이날 영화부문의 책임일군들 그리고 다른 몇몇 창작가들과 함께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박학은 수정하여 올려보낸 영화에 대하여 그이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려는가 하는 생각으로 누구보다도 마음이 설레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현관에까지 나오시여 그들을 따뜻이 맞아주시면서 영화를 만들기에 수고했다고 고무의 말씀부터 하시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박학과 그 일행을 아래층 휴계실로 친히 이끌고가시여 몸둘바를 몰라하는 그들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하시고는 어서들 편안히 앉으라고, 자기 집에 왔는데 마음을 푹 놓으라고, 오늘은 실지 영화창작가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합평회를 하자고 불렀다고 말씀하시였다.

합평회!

박학은 크나큰 충격에 그만 뜨거운것을 삼키며 머리를 숙이였다.

한편의 영화를 위하여 너무도 많은 시간을 바치시는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있는 부족점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영화의 결함이 총적으로 보아 아직도 형식적인데가 많고 혁명적세계관형성과정의 단계를 진실하고 깊이있게 우여곡절속에서 그려주지 못한 점이라고 하시면서 이러한 결함이 남아있게 된것은 창작가들자신의 혁명적세계관이 아직 확고히 서있지 못하고 1930년대 혁명투쟁을 잘 모르는데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자신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몸소 겪으신 사실들, 그때까지 아직 창작가들이 알지 못하고있던 귀중한 자료들까지 이야기해주시면서 영화의 완성방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변절자문제를 어떻게 결속짓겠는가고 창작가들에게 물으시면서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고 론의해보자고 하시였다.

창작가들은 저으기 당황하였다.

영화가 상하편 18권 되는것을 다시 돌리자면 3시간 반이나 걸릴것인데 여러번이나 이미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또다시 귀중한 시간을 여기에 바치시려는데 대하여 그냥 있을수 없었다.

창작가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미 여러차례 보시였으니 그만두는것이 어떻겠는가고 말씀드리였다.

그이께서는 인자하신 미소를 지으시면서 동무들의 요구가 정 그렇다면 다수가결로 결정짓자, 그러되 후편만은 꼭 보아야 한다고 하시였다. 결국 영화의 후편을 돌리게 되였다.

영화의 후편을 다 보고나신 그이께서는 창작가들이 그때까지도 놓쳐버리고있었던 한 화면에 대하여 상기시키시였다.

그것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사향가》의 노래가 나오는 산전막장면이였다.

그이께서는 주인공이 고생하는 로인의 생활을 보며 고향집을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는데 그것보다는 고통받는 인민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박학은 순간 전번에 녀주인공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에서와 같은 과오를 다시 범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제딴에는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잘 그려준다고 한것이였는데 자신의 세계관이 혁명가의 정신세계의 높이에까지 이르지 못하다보니 그렇게밖에 형상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그토록 간곡하게 가르쳐주시였건만 암둔하게도 또다시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다니… 무거운 자책의 회오리바람이 가슴을 쳤다.

그러나 그보다 더 엄중한것은 지대장과 변절자와의 대결장면에서 변절자놈이 반동선전을 하는데도 코대를 꺾어놓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내여 지하조직이 파괴되게 함으로써 영화를 수정했다는것이 전번보다 더 나빠진 그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이에 대하여 지적하시였을 때 작가도 박학도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창작에서 또다시 범한 오유로 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있는 창작가들의 심정을 헤아리신듯 웃으시면서 영화는 이만하면 잘된 영화라고 고무격려하여주시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박학과 창작가들을 둘러보시며 변절자문제는 지대장을 만나지 않게 하고 자기 처신을 경솔하게 하다가 적에게 체포되여 끝끝내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녀주인공을 부는것으로 하는것이 어떠냐고 수정대안을 제시해주시였다.

순간 이때까지 박학은 눈앞을 가리우고있던 안개가 걷히고 앞이 환히 트이는것 같았다.

박학은 흥분된 심정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버이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꼭 그렇게 잘 고치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이날 박학은 그이의 자애에 넘친 말씀을 들으면서 영화연출가에게 있어서 혁명적세계관을 확고히 세우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작가나 연출가인 박학이 범한 과오는 바로 이 문제에 귀착되는것이였다.

박학은 작품에서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혁명투쟁을 체험하지 못한 자기의 낡고 협소한 안목으로, 그 시대의 혁명투쟁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그 어떤 추상적인 세계에서 찾으려 하였던것이다.

만약 어버이수령님께서 영화가 가지고있던 이 모든 결함들을 그리도 명확히 지적하여주시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후의 창작에서 얼마나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계속 범하였을것인가!

박학에게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과정은 영화연출가가 되는 가장 첫째가는 조건이 바로 혁명적세계관을 확고히 세우는것이라는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는 과정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돌아온 박학은 며칠을 두고 자기의 지나간 예술활동 전과정을 검토하고 또 검토하여보았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자기의 세계관발전의 전환기로 될수 있는 제일 좋은 시기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지도와 육친적인 보살피심속에서 마침내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가 완성되여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한 영화연출가를 키워주시기 위하여 돌려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신임과 배려는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그때로부터 두해가 지난 1968년 11월 어느날 박학은 또다시 한 영화문학작가와 함께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동안의 혁명적작품창작실태를 료해하시고 영화창조사업에서 걸리고있는 문제들을 몸소 풀어주시기 위하여 창작가들을 불러주신것이였다.

두해만에 또다시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만나뵙는 박학의 가슴은 감격으로 하여 세차게 끓어올랐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전통주제의 영화예술창작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에 대하여 세세히 가르쳐주시면서 도중에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가 예술성에 치우친감이 있는것 같다고 또다시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창작가인 박학자신도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일정한 평가의 교시를 받고 영화가 세상에 나간 다음에는 그 작품에 대하여 더 연구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이께서는 두해전에 창작된 영화를 놓고도 그렇듯 깊은 애정을 가지고계시는것이였다.

이렇듯 어버이수령님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피심속에서 박학은 혁명적영화작품은 어떻게 창조해야 하며 창작단의 사령관인 연출가는 어떻게 준비되여야 하는가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박학의 창조활동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였으며 그가 모든 면에서 준비된 유능한 연출가가 되도록 친어버이손길로 이끌어주시였다.

 

끝없는 믿음과 사랑을 주시여

 

박학의 예술적재능은 또 한분의 위대한 스승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령도밑에서 더욱 활짝 꽃피여나게 되였다.

우리의 영화예술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로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던 1960년대 중엽의 어느날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연출가로 일하고있는 박학이 과오를 범하였다는 한 일군의 보고를 받으시고 그것이 마음에 걸려 밤깊도록 좀처럼 집무실을 뜨지 못하고계시였다.

박학과 관련하여 제기된 내용은 자못 심중한 문제였다.

그 내용인즉 박학이 견실치 못한 어느 한 자와 결탁되여있다는 간과할수 없는 문제였다.

한마디로 박학은 우유부단한 사람, 믿을수 없는 사람이라는것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 있어서는 실로 뜻밖의 일이였다.

그리하여 그이께서는 한생을 영화창작에 바치고있는 박학의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일찌기 영화예술발전에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새 조선의 첫 은막우에 나타났던 예술영화 《내 고향》의 경방단 단장 최인달을 기억하고계시였다. 그때 박학은 비록 부정인물인 인달역을 맡아하였지만 가증스러운 원쑤의 역형상을 인상깊게 수행하였다.

그가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지고 사랑을 받게 된것은 1953년에 예술영화 《정찰병》의 주인공인 사단정찰과장 리학철의 역을 한 다음부터였다.

그가 수행한 인민군정찰병의 슬기롭고 영웅적인 투쟁모습은 우리 인민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였다.

때문에 당시 인민군대에 입대하는 청년들속에서 많은 청년들이 정찰병을 지망하였다. 그만큼 박학의 연기는 우리 청소년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던것이다.

그후 그는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 《비행기사냥군조》, 《준령을 넘어서》, 《진실한 사람들》, 《두만강》 등에서 주인공역을 훌륭히 수행하여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0년대초부터 박학은 영화연출가로 활동하면서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 《붉은 선동원》, 《장자강반에 핀 꽃》 등을 성과적으로 연출하여 우리 나라 영화예술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때문에 그가 연출한 영화에 조선영화사상 처음으로 1962년 2월 2일 인민상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963년 2월에는 박학에게 인민배우칭호가 수여되였다. 이것은 당과 인민에 대한 박학의 성실성을 보증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학의 생애에서 귀중하게 여기시는 다른 측면이 또 있었다.

그는 출신이 밥술이나 먹는 집에서 태여난 사람이였지만 이역땅 일본에서 첫 배우생활을 할 때부터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련민, 사회악에 대한 항거의 내용을 담은 작품들에 적극적으로 출연하였고 조국이 해방된 다음 서울에서 진보적인 연극인들이 창작한 연극 《독립군》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한 김대장역을 맡아하였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살판치는 남녘의 무대에서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한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대고 단행한 일대 장거였다. 박학은 이런 애국적열의를 안고 1948년에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왔다.

박학이 걸어온 길로 미루어보아 그가 나쁜 놈들과 의식적으로 불순한 교제를 가졌다는것은 도저히 믿을수 없는 일이였다. 더우기 박학이 자서전에 소기업가의 가정에서 부유하게 자라났다는것까지 솔직하게 밝혀놓은 이상 그것을 문제시하는것은 편협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학이 나쁜 놈들을 따라다니고 놈들의 지시에 맹종맹동했다는 자료도 쉽게 긍정할수 없으시였다. 그이께서 알고계시는 박학의 인간됨을 놓고볼 때 그는 생활에서 말이 없고 고지식하며 문학예술이외에는 그 어떤 일에도 나설줄 모르는 온순한 사람이였다.

그이께서는 박학의 과오와 관련하여 제기된 모든 자료들이 다 의문시되시였다.

자정이 되여올무렵까지 사색에 잠겨계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제기된 자료가 과장된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시고 한가지 단호한 결심을 내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즉시 전화로 해당 일군을 찾으시고 박학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시였다.

얼마후 일군이 들고 온 자료는 퍼그나 두툼하였다. 그것을 몇장 번지시던 그이께서는 문건을 되돌려주시며 이 동무에 대한 자료는 이미 다 알고있다고, 그 문건을 불태워버리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자료를 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태워버리기 위하여 요구하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이어 엄하신 어조로 나는 그런 자료를 보고싶지도 않다, 그의 어제날을 완전히 백지화해야 한다, 그 동무는 남녘땅에서 혁명에 대한 열정과 애국열에 넘쳐 우리를 찾아왔고 재능도 있는 동무이다, 그가 우리를 찾아올 때 품었던 그 뜻을 꼭 실현하도록 적극 도와주어 영원히 혁명의 한길을 걸어나가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믿음만이 충신을 낳는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 뒤를 캐고 결함자료를 잔뜩 긁어묶는것은 매우 유해로운 행동일뿐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져야 할 우리 일군들의 사명과 임무에 배치되는 아주 위험한 처사라고 강조하시였다.

하여 그날 밤 박학에 대한 자료묶음은 한줄기의 연기로 사라져버리고말았다.

박학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은 이처럼 불보다 더 뜨거운것이였다.

그로부터 얼마후인 1967년 2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의 발기와 지도밑에 영화예술부문에서는 백두산창작단이 새로 무어지게 되였다.

백두산창작단이 꾸려지기 시작하자 영화부문뿐만아니라 문학예술분야의 모든 창작가, 예술인들이 그 성스러운 집단에 망라되고싶어하였다.

박학도 례외가 아니였다. 당시 박학은 자신이 일제식민지통치시기부터 예술활동을 벌린 사람이라는데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일년치고 거의 절반은 병상에서 날을 보내는 병약자라는데로부터 이 성스럽고 영예로운 창작기관에 남먼저 선발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새로 조직되는 백두산창작단에 대한 선망과 혹시나 하는 미련이 떠날줄 몰랐다.

이렇게 몇달이 흘러간 어느날 박학은 한 일군으로부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몸소 자기의 이름을 찍으시여 백두산창작단 연출가로 소환하도록 하시였다는 믿음과 은정에 넘친 말씀을 받아안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받아안은 그날 박학은 좀처럼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베풀어주신 믿음만도 대해같고 보답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몸부림이라도 치고싶은 심정인데 병약하고 불민한 자기를 불러 이처럼 커다란 영예를 안겨주시니 현실이라 믿기에는 받아안은 믿음과 은정이 너무도 크고 뜨거웠다. 그의 가슴은 한없는 감격과 고마움으로 차넘치였다.

이렇게 되여 박학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믿음과 은정으로 작가들인 백인준, 리종순 그리고 촬영가인 박병수와 함께 백두산창작단이 조직되던 초창기부터 연출가로 사업하는 중임을 받아안게 되였고 그 과정에 한없는 영예와 긍지, 보람을 한껏 누리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박학에게 돌려주신 사랑에는 아래와 같은 뜨거운 이야기도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극진한 보살피심속에서 박학이 우리 식의 주체적인 영화창작에 전심하기 시작한 때는 벌써 그의 나이가 50고개를 넘어서고있었다.

나이도 나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젊어서부터 난치의 병이 있어 1년치고 반년은 병상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그가 40대에 이르렀을 때 그의 병을 진찰한 한 이름있는 의사는 절친한 동료에게 《재사단명이라더니 박학이라는 사람이 아깝소. 50을 못 채우겠구만.》라고 하며 유감을 표시하였다. 이 말이 그만 환자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가 그는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학의 이런 병세를 아시고 하해같은 은총을 끝없이 베풀어주시였다.

박학은 병약한 몸으로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의 창작을 끝내고 내처 앓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박학의 건강상태에 대하여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단호한 결심을 내리시였다. 그를 창조사업에서 뚝 떼여 치료에 전념하도록 할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던것이다. 그러시고는 박학의 병에 특효가 있는 약을 친히 물색하시고 공기가 좋고 치료조건이 좋은 병원을 고르시였다.

얼마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친히 박학을 자신의 곁으로 부르시여 최신의약품이 든 약함을 안겨주시며 신심을 잃지 말고 꼭 완쾌되여 돌아오라고 고무해주시였다.

약함을 열어본 박학은 그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한두대만 맞아보아도 원이 없겠다던 값비싼 주사약이 수십대나 들어있었던것이다.

그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친히 정해주신 병원에서 6개월이상 집중치료를 받았다.

자기의 건강에 대하여 거의나 자포자기상태에 빠졌던 박학은 다시 온몸에 새 힘이 솟구쳐오르는것을 느끼였다.

그는 병세가 호전되자 장군님의 따뜻한 사랑에 의하여 회복된 자신의 건강을 하루빨리 영화창작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병원에서 달려나왔다.

나오자바람으로 그는 예술영화 한편을 연출하였다.

어느날 그가 완성한 영화를 보아주러 나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학의 손도 만져보고 얼굴색도 살펴보시면서 안색이 좋지 않다고, 몸이 어데 불편한데가 있지 않는가고 다심히 물으시였다.

박학이 영화를 찍느라고 좀 무리해서 그럴뿐이라고 그이를 안심시켜드리자 그이께서는 미심쩍으신듯 머리를 가로 저으시고나서 그와 함께 영화를 보시였다.

영화는 성공작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내가 전번에 작업필림을 보고 의견을 준대로 영화를 잘 고쳤다고 하시면서 작품이 훌륭하게 완성된데 대하여 더없는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그러시면서도 박학의 얼굴색을 자주 살펴보시는것이였다.

이 영화가 위대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날 그이께서는 박학과 창작가 몇사람을 또다시 몸가까이에 불러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늘 영화창작을 위해 수고하는 동무들과 식사나 함께 하자고 이렇게 불렀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성과를 축하해주시였다. 박학은 영광넘친 이 자리에서 새로운 영화를 더 많이 창작하리라 속다짐하였다.

그러나 며칠후 그에게는 병원으로 갈데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엄한 분부가 내리였다.

그이께서 정해주신 치료기간은 석달이였다.

어쩔수없이 병원으로 간 박학은 다시 치료에 전념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박학이 누워있는 입원실로 의사와 간호원이 무엇인가 담긴 큰 사발을 들고 오더니 아직 온기가 식지 않았으니 단숨에 다 마시라고 하는것이였다.

《이게 뭔가요?》

《노루피입니다. 환자의 몸에는 노루피가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몸소 지방에 나가시여 노루를 산채로 사냥해가지고 보내주셨습니다.》

박학은 의사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때문에 노루사냥을?!)

박학은 자기때문에 높고낮은 산발을 오르내리셨을 경애하는 장군님을 그리며 격정의 눈물을 흘리였다.

박학은 그이께서 정해주신 기일대로 석달만에 몸을 추세워가지고 촬영소에 돌아왔다.

그는 곧 새 작품에 착수하여 배가의 열의를 내였다. 그가 새 영화의 연출대본과 배역안을 짜가지고 경애하는 장군님을 찾아뵈웠을 때였다.

그이께서는 박학이 가지고 온 대본을 다 보시고나서 연출대본대로 촬영해도 되겠다고 하시며 못내 기뻐하시였다.

박학이 그이의 집무실을 나서려고 할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잠간 기다리시오 하시며 정히 포장한 자그마한 함을 들고 나오시였다.

그이께서는 박학동무에게 주려고 이미 마련하여놓았는데 일이 바쁘다나니 오늘에야 주게 된다고 하시면서 동무의 병치료에 필요한 약인데 써보는것이 좋겠다고, 이 약은 빨리 병을 고치고 일을 더 잘하자는 나의 마음이라고, 어서 약을 써서 건강을 회복해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박학은 그이의 집무실을 어떻게 걸어나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사랑의 약함을 가슴에 끌어안은채 눈물이 앞을 가리워 그이께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것 같았다.

열흘후 그가 혜산행 렬차를 타고 량강도지방으로 현지촬영을 떠나던 날이였다.

렬차가 기적을 울리며 막 떠나려는 참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몸소 역두에 나오시여 박학이 책임진 창조집단을 찾으시였다.

(아니, 역에까지 나오시여서?!)

박학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렬차에서 뛰여내렸다.

그이께서는 박학에게 촬영지가 너무 멀지 않는가고 물으시였다.

그이의 물음에 박학은 《괜찮습니다. 촬영은 거기서 해야 계절관계도 좋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지대가 촬영현장으로 좋다니 할수 없겠지만 멀리 가는것 같다고, 삼수지방에 가면 날씨도 차겠는데 건강에 주의해야 한다고, 추운 지방에 가서 촬영하겠는데 앓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시였다.

그이의 당부는 절절하시였다.

그이의 이런 따뜻한 보살피심속에서 박학은 건강치 못한 몸이였지만 북부지대의 험한 날씨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량강도에서 현지촬영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영화를 완성하였을 때 박학의 몸이 퍼그나 쇠약해진것을 느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번에는 그가 머리를 쉬우도록 기후가 따스한 나라인 알제리에 영화대표단을 데리고 가게 하시였다.

대표단이 조국을 떠나던 날이였다.

그날 비행장에는 비가 내리고있었다.

그런데 외국려행을 위하여 여러차례 만나도 주시고 사소한 불편도 있을세라 보살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학을 바래주시려고 친히 비행장으로 나오시였다.

그이께서는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어서 비행기에 오르라고 하시며 박학의 손을 잡아주시였다.

이윽고 비행기는 하늘로 날아올라 비행장을 선회하였다. 이때 시창을 통해 비행장을 내려다보던 박학은 소스라치며 일어섰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비행장 한가운데 그이께서 우산도 없이 서계시는것이 아닌가.

그이께서는 옷이 젖는것도 아랑곳 않으시고 그냥 박학에게 손을 들어 흔들어주시였다.

박학은 부실한 자식때문에 마음을 쓰는 부모인들 이보다 더하랴싶어 목이 꽉 메였다.

문득 그의 머리속에는 몇해전 자기의 조급한 행동때문에 경애하는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렸던 일이 떠올랐다.

영화촬영도중에 병원에 실려갔던 박학은 영화창작이 걱정되여 며칠만에 퇴원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즉시 촬영소로 나오시여 박학에게 병치료를 해야 한다고, 자신께서 찾을 때까지 절대로 병원에서 나오지 말고 병치료를 해야 하겠다고 엄하게 이르시였다.

박학은 그이의 엄하신 추궁을 받고 넉달동안 꼼짝 못하고 치료를 받았다.

박학이 이젠 되였다고 안심하고 퇴원했을 때에도 그이께서는 박학의 병색이 도는 얼굴을 보시며 아직도 얼굴색이 좋지 않은것 같은데 더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고 하시였다.

그토록 극진히 보살펴주시고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학이 잠시나마 창작에서 벗어나 휴식할수 있도록 오늘은 또 해외려행을 마련해주시고 비를 맞으시며 바래워주기까지 하시니 이 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수 있겠는가.

박학에게 기울이신 그이의 정성은 참으로 지극한것이였다.

돌우에 꽃을 피웠다고 할가.

박학은 난치의 병을 안고서도 그이의 품에서 오랜 기간 쓰러지지 않고 수많은 영화들을 창작하였다.

50고개를 못 넘기리라던 그의 생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은정속에서 근 20년을 더 연장하였으며 그동안에 그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성공적인 명작들을 창조할수 있었다.

 

영화계의 첫 영웅칭호

 

조선영화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예술영화들인 《붉은 선동원》, 《한 지대장의 이야기》 등을 훌륭히 연출한것으로 하여 박학은 관록있는 연출가로 인정받게 되였고 자신도 영화연출에서는 막히는것이 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박학은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지도를 직접 받게 되면서부터 연출수업을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이고 세심한 지도밑에 한편한편의 영화를 창조완성하는 나날은 박학이 알지 못하던 새롭고 독창적인 형상방법을 체득하는 보람차고 신비스러운 배움의 나날이였다.

1971년 6월초 영광스럽게도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의 연출을 맡았던 박학은 연출대본을 완성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 올리였다.

그때 박학은 자기나름으로 연출대본이 전례없이 잘된것으로 자부하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연출대본의 완성을 위하여 대륙을 넘나들며 일제식민지통치시기의 자료연구도 하였고 세계영화발전추세도 깊이 연구하였으며 또 작품의 무대인 1920년대 생활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였다는것으로 하여 어느 영화보다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그런 기초우에서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의도대로 이 영화를 사상예술적으로 완벽한 영화로, 세계에 내놓고 소리칠만 한 걸작으로 만들기 위하여 대본창작에 전심전력하였던것이다.

그는 원작에는 없지만 일본령사관놈들의 선, 목사의 선, 정치공작원의 선 등을 대담하게 설정하고 그들 호상간에 벌어지는 이야기선을 흥미진진하게 엮어나갔다.

그러나 박학은 잘못 생각하고있었다.

연출대본을 올린지 얼마후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학을 부르시여 대본의 결함을 명확히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우선 원작에 없는 일본령사관놈들의 선과 목사의 선, 정치공작원의 선을 다 뽑아버리고 꽃분이의 운명선을 깊이 파고들면서 인정심리세계가 짙은 영화로 되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박학은 원작에 충실하지 못하다보니 작품의 특성인 인정심리적인 양상을 깊이있게 그려내지 못하였던것이다.

그는 연출대본이 전례없이 잘되였다고 자부하고있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에 대하여 자책을 금할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서야 그는 원작의 기본양상이 인정심리극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일단 작품의 종자와 양상을 파악한 그에게는 힘이 솟구쳤다. 박학은 솟구쳐오르는 창조적열정으로 하여 며칠밤을 뜬눈으로 새워도 피곤한줄 몰랐으며 한두끼의 때식을 건늬여도 배고픈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드디여 박학은 심혈을 기울여 수정완성한 연출대본을 다시 경애하는 장군님께 올리였다.

1971년 9월 어느날 박학은 뜻밖에도 수정한 연출대본대로 촬영할데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친필서한을 받아안게 되였다.

박학은 친필서한을 받아안고 뜨거운 격정을 삼켰다. 아직도 미숙한 자신에게 거듭 베풀어주시는 장군님의 은덕이 하도 고마와서였다.

이제는 촬영만이 남았다. 연기형상지도를 잘하고 촬영만 끝내면 되는것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촬영에서 류의하여야 할 점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고도 일단 완성된 작업필림들을 여러차례 보아주시며 배우들의 연기형상과 화면의 문화성문제, 의상과 소도구를 바로 설정하는 문제 등 영화의 전반형상을 잘하도록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정력적인 지도밑에 박학은 두달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첫 작업필림을 완성하여 그해 11월 경애하는 장군님께 올리였다.

그이께서는 무척 기뻐하시며 박학을 친히 부르시여 작업필림을 함께 보아주시였다.

작업필림을 보시며 아무 말씀도 없으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학에게 영화를 만들기에 수고한다고 하시면서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가 아직도 원작의 사상을 충실하게 담지 못하고있다고 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결함은 꽃분이의 선이 살지 못한것이며 따라서 주인공에게 애착이 가지 않는것이라고 하시였다.

그이의 지적은 정확하였다. 대본에는 그 모든것이 제시되여있었지만 실지 화면형상에서 꽃분이의 행동선에 형상요소들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그에 따르는 감정조직을 예리하게 파고들지 못하였던것이다.

물론 그로서는 영화를 철저히 인정심리극으로 만든다고 하였지만 연출대본에 제시된 형상과제를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파고들면서 섬세한 작업을 해나가지 못하였던것이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930년대에 가극을 보고는 그때 사람들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혁명의 길에 나섰는데 그것을 각색한 영화를 보고 우리 인민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면목이 서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을 울릴수 있게 심리세계, 인정세계를 더 깊이 파고 감정조직을 잘하여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였다.

박학은 죄송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불후의 고전적명작을 세계적수준의 영화로 옮기시려는 그이의 높으신 뜻을 잘 받들지 못하고 걱정만 끼쳐드린다고 생각하니 감히 머리를 들수 없었다.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박학의 머리에는 창조의 환상이 나래쳤다. 다시 찍자, 다시 찍어 꼭 성공시키자!

박학은 마음속으로 그이께 더는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가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뜻을 다 받들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있었다. 장군님께 더는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으리라 그렇게도 결심하였건만 그가 여러차례에 걸쳐 올린 작업필림은 그이의 세심한 지도를 거듭거듭 받고서야 한장면한장면 완성될수 있었다.

후날 영화의 가장 기름지고 빛나는 장면들인 어머니의 죽음장면과 꽃분이자매의 리별장면, 감옥장면과 려인숙장면, 지주처가 미쳐날뛰는 환각장면에 대한 그이의 지도는 참으로 박학의 경탄을 자아내는것이였다.

감정조직을 잘할데 대한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고 박학이 노린 장면은 꽃분이 어머니의 죽음장면이였다.

그는 꽃분이 어머니가 마름놈의 등살에 못이겨 기절하며 쓰러졌을 때 그 죽음을 놓고 감정조직을 치밀하게 하느라고 촬영과 편집, 음악과 효과를 쓰는데 있는 재간을 다 부렸다.

그는 이 장면에서 꽃분이와 순희가 약을 사가지고 올 때 비가 억수로 내리게 하고 두 자매가 나무밑에서 비를 그으며 오돌오돌 떨게 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장면과 잇달린 이 장면을 이렇게 처리함으로써 불쌍하고 가련한 어린것들의 처지를 한껏 강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장면의 작업필림을 보아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인공이 약을 사들고 동생과 같이 돌아오는 장면에서 감정축적이 더 있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약을 산 꽃분이와 순희가 희망과 기쁨에 넘쳐 꽃을 꺾어들고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아기자기한 장면을 더 주어야 한다고,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게 하여야 더 절절하게 안겨올수 있다는 명철한 대안을 내놓으시였다.

그제야 박학은 어머니의 죽음장면에서 무엇을 놓쳤는가를 심각하게 깨닫게 되였다.

그것은 밝은것과 어두운것과의 대조를 강하게 주는것과 같은 수법상의 문제가 아니였다.

그이의 가르치심은 이 장면을 원작의 사상예술성에 맞게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처지를 더욱 깊이있게 부각하면서도 꽃분이자매의 아름다운 내면세계를 펼쳐보이는 장면으로, 어머니의 죽음장면에서 관중을 더 울릴수 있는 극적장면으로 될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 장면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이렇게 고쳐지게 되였다.

 

의원한테서 약첩을 받아들고 꽃분이와 순희가 흰구름이 두둥실 떠도는 언덕길로 기쁨에 넘쳐 걸어온다.

노래가 흐른다.

 

천송인가 만송인가 진달래꽃 송이송이

어머님께 바친 정성 꽃과 같이 피여났네

 

노래가 흐르는 속에서 기쁨에 넘쳐 강가로 걸어오는 꽃분이와 순희, 반짝거리며 흐르는 강물… 언덕에 피여난 진달래를 꺾어 동생의 손에 쥐여주는 꽃분이, 기뻐서 깡충깡충 뛰여가는 순희…

맑고 깨끗하고 희망과 기쁨에 넘친 이 화폭과는 대조적으로 짙은 어둠속에서 어머니가 숨지는 장면이 펼쳐진다.

캄캄한 하늘에 번개가 일고 비에 젖은 한그루 철쭉이 비바람에 떤다. 우뢰소리, 비소리, 《꽃분이 어머니!》, 《아, 아이구 형님. 형님!》 하는 간난이 어머니와 마을녀인들의 통곡소리…

화면이 바뀌면 멀리서 꽃분이와 순희가 다정하게 걸어온다. 그들은 이 광경에서 이상한것을 감촉한다.

간난이 어머니가 달려오며 《꽃분아, 너의 어머니가…》 하고 설음을 터뜨린다.

《어머니!》 하고 꽃분이가 달려간다.

진달래가 땅에 떨어진다. 순희가 달려간다. 약봉지가 떨어진다. 떨어진 약봉지를 찾느라고 손더듬하는 순희, 《엄마, 엄마, 약! 약! 엄마, 언니가 약 사왔어! 엄마! …》

이 불쌍한 어린것들을 보고 슬픔을 참지 못하는 마을사람들, 마을사람들이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꽃분이와 순희를 떼낸다. 하지만 꽃분이와 순희는 마을사람들을 뿌리치며 어머니에게 매달려 통곡한다.

《어머니, 어머니가 가시다니 웬 말이세요? 아버지도 오빠도 없는데 어머니만 믿고 살던 우리를 두고 어떻게 가요! 우린 못살아요! 눈먼 순희를 두고 어떻게 가요. …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그 다음은 어머니의 시체를 맞들고 나가는 마을사람들, 땅을 치며 통곡하는 꽃분이, 무덤앞에 서있는 꽃분이와 순희, 비장한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원작의 유명한 설화가 울려나온다.

《정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하였건만 꽃분이의 정성이 아직도 모자랐단 말인가!

애오라지 어머니의 병이 나아지라 간절한 희망과 념원과 기대를 안고 가시밭을 헤치며 츠렁바위를 톺아 한송이한송이 꺾어온 그 꽃들을 깔아놓으면 온 마을을 덮고도 남으련만 어머니는 그 한송이 꽃도 받지 않고 갔으니…

야속하다, 야속하다, 야속한 이 사연이 무슨 까닭인지, 원한은 쌓여도 풀 길없는 이 사연이 그 무슨 까닭인지 그 누가 대답해주랴!》

그칠줄 모르는 울음소리, 넋을 잃고 무덤을 바라보고 서있는 꽃분이와 순희, 계절조들이 하늘높이 무리져 날아간다.

이 비통하고도 애절한 화면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북받치는 설음과 슬픔을 참지 못하며 흐느껴운다.

치밀하고 격조높은 감정조직, 생활의 가장 비극적인 국면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이처럼 섬세하고 굴곡있게 보여주는 감정조직이 있음으로 하여 원작의 심오하고도 위대한 사상은 커다란 감동속에서 부각된것이다. 이렇게 하여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는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60돐을 맞으며 훌륭히 완성될수 있었다.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는 예술영화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과 함께 우리 영화예술의 3대명작들중의 하나로, 혁명적영화예술의 기념비적대작으로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972년 4월 27일 어버이수령님께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아주 잘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고 하시면서 이 영화는 사상예술적으로 완전무결한 대걸작이기때문에 그 어디에 내놓아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수 있다고, 볼수록 눈물이 나고 주인공의 정신세계에 끌려들어간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예언하신것처럼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우리 인민은 물론 세계 수많은 나라 인민들속에서 폭풍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그 심오한 사상주제적내용과 높은 예술성으로 하여 1972년 7월 이전 체스꼬슬로벤스꼬의 까를로비와리에서 진행된 제18차 국제영화축전에서 축전력사에 일찌기 없는 특별상과 특별메달을 수여받았다.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에 대한 반영은 대단하였다.

당시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사람들의 머리속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깊은 인상이 옹이처럼 굳어져 끝없는 회억을 불러일으키고있다.

단적인 실례로 이 영화가 창작된 때로부터 25년이 지난 1997년 7월 14일부 중국의 《종합신문》에는 《허밍안과 〈꽃파는 처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세계영화사에서 조선의 〈꽃파는 처녀〉처럼 수억의 관중들로 하여금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한 영화는 없을것이며 우리 나라처럼 많은 도시에서 며칠동안 밤낮 〈꽃파는 처녀〉만 상영한 나라도 없을것이다. 이 두가지 기록만 해도 영화사에서 세계에 제일로 될수 있다.》

신문은 계속하여 영화의 번역자인 허밍안에 대하여 소개하고 그가 영화를 번역하던 때의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계속하였다.

《…장춘영화촬영소의 통지를 받고 허밍안이 장춘에 도착한 날 그는 베이징에서 보내온 조선영화 〈꽃파는 처녀〉원판복사필림을 받았었다.

허밍안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있다.

장춘영화촬영소의 제8방영실은 사람들로 꽉 찼다. 그때는 장춘영화촬영소사람들도 외국영화를 보기 어려웠으므로 숱한 사람들이 일찌감치 방영실에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동시번역마이크앞에 앉아서 영화를 제대로 번역할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자신이 없어하였다.

영화를 돌리기 시작하자 그는 아주 순조롭게 번역하였으며 인차 영화내용에 말려들었다.

꽃분이와 눈먼 동생 순희의 비참한 운명때문에 그는 여러번 목이 메여 눈물을 흘렸다.

아무런 심리적준비도 없는 장춘영화촬영소사람들도 다 흑흑 흐느끼였으며 일부 녀성들은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영화를 한 절반 돌렸을 때 허밍안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범벅이 되고말았다.

〈꽃파는 처녀〉는 한주일만에 번역제작되였다.

영화는 인차 전국에서 상영되였으며 많은 지방에서 하루 24시간동안 륜번으로 이 영화를 돌렸다.

연변에서 이 영화를 돌릴 때 사람들은 손수레를 타고 현성에 모여왔다.

허밍안이 이 영화를 번역하였다는것을 안 현성의 사람들은 그에게 닭과 남새를 가져다 주는 제일 소박한 방식으로 그에 대한 자기들의 경의의 감정을 보여주었다.

〈꽃파는 처녀〉가 소문이 난음에야 허밍안은 명작의 원작가가 조선인민의 수령이신 김일성주석이시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에 대한 세계적인 경탄과 찬사는 전적으로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친히 발굴하시고 그것을 영화로 옮기도록 하시였으며 영화를 원작의 사상예술적특성을 그대로 재현한 대걸작으로 완성해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탁월한 령도의 결과였다.

실로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인정심리극의 세계적인 본보기로서의 이 영화의 매 장면들은 그 어느것 하나 장군님의 세심한 손길이 미치지 않은것이란 없다.

그런데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박학동무가 훌륭히 연출하였다고 보고드리였으며 그에게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배려하여주시였다.

영화인에게 로력영웅칭호! 이것은 우리 나라 영화계에서 처음으로 되는 경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기쁘신 마음으로 박학의 가슴에 손수 금메달을 달아주시며 축하해주시였다.

영웅뒤에는 그를 키워준 훌륭한 어머니가 있고 성공한 인재뒤에는 뛰여난 스승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정녕 이끌어주고 떠밀어주시며 내세워주시는 위인의 탁월한 손길이 있었기에 박학은 명작의 연출가로, 세계일류급의 연출가로, 로력영웅으로 될수 있었던것이다.

 

수령형상영화의 첫 연출가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975년 6월 백두산창작단 창작가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력사와 혁명적가정을 반영한 첫 수령형상작품으로서 예술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창조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이 영화의 연출을 친히 박학에게 맡겨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박학이 비록 나이 60을 넘긴 몸이였지만 실력으로 보나 창작적개성으로 보나 모든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영화를 훌륭히 연출해낼수 있는 적격자로 보시였던것이다.

그렇게도 소원하던 중임을 맡은 박학은 이날 예술영화 화면에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기 위해 기울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를 생각하며 온밤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박학의 머리속에는 언뜻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병약한 자기를 친히 이름을 찍으시여 백두산창작단 연출가로 소환시켜주시던 일이며 잊지 못할 1969년 2월 16일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자신의 탄생일을 축하하러 온 박학을 비롯한 창작가들에게 우리의 영화예술이 그동안 적지 않게 발전하였다, 우리는 혁명적대작들도 만들었고 이제 곧 수령님께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친필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영화에 옮기기 위한 사업에도 착수하게 된다, 그러나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예술영화의 화면에 정중히 모시기 위한 사업만은 아직 시작하지 못하고있다는 심려의 말씀을 하시였다.

만민의 축원을 받으셔야 할 경사스러운 탄생일에도 우리 영화예술의 근본문제를 두고 그토록 심혈을 바쳐가고계시는 그이앞에서 박학은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이께서는 이어 나는 방금전에도 어떻게 하면 그처럼 위대하신 수령님의 영상을 예술영화의 화면에 모실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수령님께서 혁명의 길에 나서신지도 벌써 50년이 가까와오는데 아직도 수령님의 영상을 예술영화화면에 모시지 못한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은 절절하시였다. 박학은 그날부터 가슴에 연추를 매단듯 한 심정이였다.

그토록 갈망하던 공화국의 품에 안긴 때로부터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수많은 예술영화를 만들어낸 영화계의 원로로서 인생말년이 가까와오는 오늘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예술영화화면에 단 한번도 모시지 못한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민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들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고 감격에 목이 메여 흐느끼는 장면들을 수없이 형상하였지만 아쉽게도 그런 장면에서조차 수령님의 영상을 모시지 못한채 장면을 비약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박학은 시대와 인민앞에 죄를 진듯 한 심정이였다.

그렇게 놓고보면 자신을 우리 나라 영화계의 원로라고 자부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웠고 더우기 예술적으로나 정치사상적으로 아직 준비가 어린 영화인이라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 이 영화를 그이께서 의도하시는대로 만들어낼수 있을가.)

박학은 이러한 위구심을 안고 다음날부터 실재한 력사적사실을 어떻게 하나 예술적으로 진실하게 형상하기 위하여 진지한 창작전투를 벌려나갔다.

영화의 창조과제는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권동지와 조선의 어머니 강반석녀사의 혁명활동을 보여주면서도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형상을 창조하는 참으로 영광스럽고도 어려운 과업이였다.

처음엔 좌왕우왕이 없지 않았다.

혁명일가분들의 인간관계와 생활을 격식화하고 기록주의적으로 라렬하여 작품을 딱딱하게 만들어 경애하는 장군님께 걱정도 끼쳐드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첫 수령형상영화의 연출을 맡고 모대기던 박학에게 위대한 인간들의 생활을 잘 아는 창작가들만이 위대한 작품을 창조할수 있다는 뜻깊은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여러차례에 걸쳐 새벽 4시가 넘도록 영화의 부족점들을 하나하나 지적해주시고 수정대안까지 찾아주시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박학은 뜻밖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을 받아안게 되였다. 만경대일가분들의 전기도서인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 《조선의 어머니》 등 귀중한 책들이였다.

그때까지 박학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속에서 많은 선물들을 받아왔지만 이처럼 책들을 받기는 처음이였다.

이것은 중요한 영화창작을 맡은 박학에게 혁명일가분들의 생애와 활동에 대하여 더 깊이 연구하도록 하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정어린 사랑이 담긴 선물이였다.

박학은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집에서도 읽고 차안에서도 읽고 촬영현지에서도 읽으면서 위대한 인간들의 생애와 활동에서 사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깊이 새겨넣었다.

그리하여 박학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밝혀주신 이 작품의 종자인 죽을지언정 절대로 꺾이지 않는 혁명적신념과 불굴의 의지에 관한 사상을 형상하는 창조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나갈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77년 4월 15일을 맞으며 창작가들이 만들어올린 수령형상의 첫 예술영화인 《누리에 붙는 불》을 보시고 영화를 아주 잘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영화가 담고있는 력사적사건과 인물들이 모두 사실과 같으며 당시 우리 인민들의 비참상과 시대상이 진실하게 그려졌다는데 대하여 치하해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영화가 만족스럽게 잘되였다고 거듭 평가하시면서 영화를 창작한 일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달할데 대한 분에 넘친 말씀도 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높으신 평가는 수령형상의 첫 예술영화를 최상의 수준에서 완성시켜주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를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가 창작되던 첫 시기인 1975년 12월 한달사이에만도 여러차례 작업필림을 보아주시면서 작품이 담아야 할 기본이야기줄거리와 혁명일가분들의 투쟁업적 그리고 력사적사실자료들을 전형화하는데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일일이 가르쳐주시였을뿐아니라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무려 수십차례나 강령적가르치심을 주시여 수령형상영화의 첫 작품으로서 손색없는 완전무결한 영화로 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영화의 황수원숲속장면이라든가 토장장면 같은것은 장군님께서 직접 찾아주신 명장면들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에서 시대상과 비참상을 잘 그리기 위한 방향과 방도들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고 한마디의 대사와 행동, 표정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여 오늘과 같은 성과작으로 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영화는 그해 텔레비죤으로 전국에 방영되였다.

《오늘 새로 나온 영화 봤어?》

《봤어, 야! 우리 수령님을 뵈웠어. 그리구 강반석어머님도 뵈웠어.》

《정말 꿈같구만.》

그날 온 나라 인민은 감격에 넘쳐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만 2년이라는 고심어린 나날끝에 박학은 조선영화인으로서의 최대의 숙원을 풀었다.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예술영화화면에 모신 최초의 영화연출가로 되였던것이다.

그 나날에 그는 혁명적영화창조에 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상과 리론으로 무장하고 예술적으로 원숙해지고 대담해졌다.

혁명영화창조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확신을 가진 그는 이어 혁명영화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를 연출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영화는 혁명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창조할 때보다 훨씬 빨리 완성되였다.

그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성장한 박학의 모습을 보여주는것이였다.

그런데 이런 보람찬 혁명영화창조의 나날에 박학은 자기의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여 기울기 시작한다는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한 작품만 더 만들자.》

박학은 심하게 앓는 몸으로 또다시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김정숙어머님을 형상한 혁명영화 《미래를 꽃피운 사랑》을 만들었다.

혁명의 어머니 김정숙어머님을 뵙고싶어하는 우리 인민의 간절한 소망을 또 풀어주었다는 긍지로 하여 박학은 더없이 행복하였다.

그는 이어 숨돌릴새 없이 또다른 혁명영화창조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약한 육체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위험계선을 넘어선 병마는 종시 그의 육체를 무너뜨리고말았다.

혁명영화의 마지막편집작업을 하다가 새벽에야 집에 들어와 누웠던 그는 《한 작품만 더…》라는 마지막말을 끝맺지 못한채 숨을 거두었다.

 

*          *

 

재능있는 영화예술가는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일군들은 그의 사망에 대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 즉시 보고드리지 못하였다.

너무도 다망하신 사업으로 긴장한 시간을 보내시는 그이께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드려 마음을 아프시게 할수 없어서였다.

시간이 지나서야 박학의 사망을 아시게 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왜 이제야 알리느냐고 일군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영화혁명의 첫 시기부터 함께 일해오던 재능있는 전사가 영영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것이 정녕 믿기가 어려우시였다. 그토록 애지중지하였건만 68살을 일기로 떠나간것이 무정하게만 느껴지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프신 마음을 달래시며 박학동무는 해방후 첫 예술영화 《내 고향》에 출연한 때로부터 30여년간 좋은 영화들을 많이 창작한 재능있는 연출가였다고 그의 생애를 추억하시면서 신문과 방송에 부고를 내여 재능있는 영화연출가가 세상을 떠났다는것을 알게 하고 장의도 사회장으로 잘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의 령전에는 화환이 놓여있었다.

1982년 11월 12일 《평양신문》에 발표된 박학의 사망과 관련한 부고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있다.

《동지는 인민의 사랑을 받는 배우로서, 재능있는 연출가로서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사상예술성이 높은 많은 영화들을 창작하여 우리의 영화예술을 개화발전시키는데서 특출한 공로를 세웠다.

고인의 령구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된 화환이 진정되였다.》

오늘도 우리 인민들의 추억속에 소중히 자리잡고있는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배우 박학.

그는 오늘도 애국렬사릉에서 전진하는 우리 조국과 함께 영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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