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특전과 사후의 특대조치
남조선에서 대부호였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 회원 백상규선생으로 말하면 남조선《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있었으며 해방후 《민주의원》 의원, 2대《국회의원》이였다.
그는 련공애국대오의 지도급인사들과 함께 평양까지 후퇴하여
주체46(1957)년 6월 2일 통협의
그가 신중히 생각을 굴리는데
순간 안재홍선생은 저으기 놀라운 기색으로 그 사람은 이름난 대부호이고 또 다년간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니 믿을수 있겠는지 하는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날 안재홍선생은 백상규선생을 비롯한 통협회원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백상규선생은 무릎을 꺾고 주저앉으며 목메인 소리로 격정을 터뜨렸다.
그후 미제와 남조선당국자들의 반대로 백상규선생이 남조선으로 갔다오는 일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는 생전에 받아안은 절대믿음이라는 최상의 특전을 잊지 않고 련공통일애국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그가 불치의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그 고마운 조치를 전해들은 백상규선생은 남조선에서 가족들을 보내주는 인도주의적조치를 취해주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의 거부로 백상규선생은 끝내 가족과의 상봉을 이루어보지 못한채 주체46(1957)년 12월 26일 78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보고를 받으신
《백상규는 남조선에서 이름난 갑부의 한사람으로서 …적십자사 부총재를 하였기때문에 남조선사회계에 일정하게 알려져있습니다.
그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이후 비교적 량심적으로 살았습니다.…
백상규의 사망에 대한 부고를 평양방송으로 내보내야 하겠습니다. …
고인의 유해를 장례식전후를 막론하고 가족들이 운장하는것을 쾌히 승낙하였으니 어느때라도 가능한 시기에 판문점을 통하여 운구하여가기를 바란다는것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부고를 받은 선생의 처와 아들딸들로부터 고인의 시신을 운장하겠다는 답전이 왔으나 남조선당국자들은 국제적십자사를 통해서만 운장할수 있다는 식으로 까박을 붙이며 그것을 이렇게저렇게 방해해나섰다.
하여 공화국정부에서는 제 나라, 제땅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에 가져다묻겠다는데 국제적십자사가 무슨 상관인가고 남조선당국자들을 엄하게 추궁하는 성명을 내고 백상규선생의 장례를 크게 치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