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인생전환
주체37(1948)년 3월이였다.
김구,
그들은 놀라움과 우려를 표시했다. 한것은 그가 공산주의자와는 도저히 화합될수 없는 완고한 반공분자로 락인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해방후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은 친일지주, 자본가세력의 집단인 《한민당》이 림시방편으로 내세웠던 《림정추대》에 편승하여 민주세력과 정면대립해나섰는가 하면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이 전해졌을 때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리승만과 쌍벽이 되여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그의 휘하에 집결되였던 우익반동들은 그의 이름을 빌어 횡포한 백색테로를 감행하였다. 그것은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이였던 강량욱목사의 아들, 딸들이 그의 명함을 가진 테로단에 의하여 살해당한 사실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사태로 하여 그는 이무렵 《테로의 두목》으로 불리울 정도로 민주세력, 특히 북반부인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해방전 《림정》에서 활동할 때에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로를 서슴지 않았다. 그의 영향하에 《림정》과 기맥이 통하고있던 동북의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가는 청년들을 부당하게 살해까지 하였던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해방전부터 화해할수 없는 반공분자였다.
그러나
그런데 초청장을 받은 그자신이 선뜻 발을 내짚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에게 인식된 공산주의자들이란 민족은 안중에 없고 계급투쟁만 부르짖으며 덮어놓고 민족주의자들을 경멸배척하는 사람들이였다.
과연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질시하면서 테로까지 공공연히 감행해온 자기와 진심으로 손을 잡자고 한단 말인가.…
의심과 동요와 번민속에 모대기면서도 민족분렬의 현실을 외면할수 없었던 김구선생은 자기의
접견석상에서 《특사》는 김구선생의 의사를 이렇게 말씀올리였다.
간단치 않은 요구조건이였다.
하지만 민족대단결로 조국통일위업을 이룩해나가실 웅대한 뜻을 품으신
좋다, 백지다!
이렇게 되여 백범이 평양으로 오게 되였다.
백범이 평양에 체류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백범 김구는 이렇게 정중히 말씀드리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함을
《지난날 저는 해외로 돌아다니면서 크게 하는 일없이 <상해림시정부>의 법통을 지켜왔습니다. 적으나마 민족사에 흔적을 남긴 <상해림시정부>의 인장을 받아주십시오.》
참으로 뜻밖의 일이였다.
《상해림시정부》의 인장이라면 그가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겨오던것이였다.
그 인장으로 말하면 백범 김구와 그 동료들이 피어린 3. 1운동을 계승하는것으로 자부하는 《림시정부》의 법통을 상징하는것으로서 그것만
꺼내보이면 천하가 자기들을 《정부》로 인정해줄것만 같아 상해에서도, 머나먼 중경에로의 피난길에서도 그리고 귀국의 수천리길에서도 그가 애지중지
품고다닌 《옥새》맞잡이였다. 그것을 지금 제손으로
김구선생으로서는 하나의 결단이였다.
그것은 파란곡절많은 70고령을 넘긴 백범이 이제 민족의 운명과
그가 올린 인장을 바라보시던
그후 남조선에 돌아간 백범은 련공으로 돌아선 자기의 신념을 지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통일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