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의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주체39(1950)년 8월초 어느날이였다.
당시 내각 림산국의 한 일군도 전시생산보장을 위해 지방에 출장나가있다가 이 회의에 참가하라는 급한 련락을 받고 평양으로 올라왔다.
모여앉은 일군들을 둘러보시던
순간 회의참가자들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여서 서로 마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적아간에 치렬한 격전이 벌어지고있는 때 더구나 아직은 삼복더위가 한창인데 서울시민들의 겨울철땔나무문제가 론의될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사실 일제때에도 그러하였지만 미제강점하에서 서울시민들의 생활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먹을것도 문제였지만 설사 식량이 있다고 해도 땔나무가 문제였다. 겨울에는 땔것이 없어 농짝이며 빨래방치, 지어는 밥상까지 다 패때고도 모자라 얼어죽는 참상까지 빈번히 빚어지군 하였던것이다.
서울지역 인민들의 이러한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헤아려보신
《우리는 서울시민들이 해방되여 공화국의 품속에 안긴 오늘에 있어서도 그들이 이전과 같이 고통을 당하게 할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루빨리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여러모로 도와주어야 하며 땔나무문제와 같은것을 예견성있게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서울은 대체로 10월 중순이면 추위가 시작되는데 적들이 패주하면서 철길과 탄광을 다 파괴하였으므로 석탄을 보장하기는 어려울것이니 통나무를 생산해서 보내주는것이 제일 합리적이다. 서울시의 인구와 세대수를 따져보면 겨울나이용으로 40만㎥의 통나무가 있어야 한다. 서울이 가까운 태백산에서 나무를 하면 헐할수는 있으나 거기에서 일을 벌리면 지지리 고생하던 해방지역 인민들이 동원되여야 하겠는데 힘들더라도 북반부인민들의 손으로 나무를 해보내주자. 소나무와 참나무가 많은 설악산에서 나무를 해서 한강을 리용하여 류벌하면 서울까지 헐하게 운반할수 있고 소나무와 참나무는 분한있고 불담이 좋아서 때는 사람들이 좋아할것이다. …
계속하시여
그리하여 설악산일대에서는 때아닌 때 나무베기가 벌어지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적들이 다시 기여들게 된 서울에 한대의 통나무라도 보낼수 없다는 생각을 앞세우면서 나무들을 몽땅 불태워버리겠다는 그 일군의 대답을
들으신
전류를 타고 멀리서 울려오는
조국이 준엄한 시련을 겪고있는 때에 더구나 적들이 서울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들고있는 그 엄혹한 정황속에서도
이윽하여
그리하여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될무렵 한강으로는 쪼개여 불때기에 알맞춤하게 자른 통나무토막들이 떠내려오게 되였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땔것이 없어 고통을 겪던 서울지역의 인민들은 이런 뜻밖의 《횡재》를 하고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하였다.
그때부터 그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