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음이 없어진 《경무대》보이라공

 

 

주체39(1950)년 여름, 해방된 서울거리로 승용차가 달리고있었다. 서대문을 지나 태평로를 거쳐 차는 어느덧 북악산밑 《경무대》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리시는분은 바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이시였다. 해방된 서울시민들을 만나보고싶으시여 포화를 뚫고 먼길을 몸소 헤쳐오신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차에서 내리시자 근엄하신 눈길로 《경무대》를 바라보시였다.

1920년대에 세워진 후 력대 일제총독들이 들어앉아 우리 민족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던 악마의 소굴, 8. 15후에는 미군정장관이 들어앉아 예속과 분렬, 파쑈와 전쟁책동을 일삼았으며 며칠전까지만 하여도 리승만이 틀고앉아있던 복마전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경무대》안을 돌아보시였다.

그이께서는 이곳에서 일하던 로동자들이 있었겠는데 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들이 다 피난을 갔다고 말씀드리자 그이께서는 로동자들을 빨리 찾아오도록 하라고 이르시였다.

일군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아무리 인간이하의 버림을 받던 로동자들이라 해도 《경무대》에서 복무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제자리에서 일하게 하랴싶어 데려올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것이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든 남녘인민들의 처지를 깊이 리해하시고 그들을 동정하고계시는것이였다.

일군들은 이튿날 김포비행장근처의 어느 농촌에 가있던 한 보이라공을 데려왔다. 마흔여덟살 되는 그는 20년간이나 보이라를 돌린 로동자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가정형편도 알아보시고 《경무대》에서 천대받던 일도 물으시면서 리승만통치하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고 따뜻이 위로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이제는 로동자, 농민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자식들도 대학까지 얼마든지 보낼수 있다고 하시면서 주인답게 자기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으면서 그는 격동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더우기 자기를 동무라고 불러주시며 지난날의 쓰라린 처지를 너그러이 헤아려주시는분이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이시라는것을 알게 되였을 때 그는 솟구쳐오르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다. 얼음같이 차거운 세상에서 참아오던 설음을 봄날같이 따사로운 은정앞에서 어찌 터치지 않을수 있으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그가 가족이 많아 고생이 많을것이라고 하시면서 그의 집에 쌀을 자동차로 실어보내도록 하시였으며 또 어느날에는 그에게 몸소 통닭도 보내주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통닭이 오른 점심상을 받아안고 그는 《장군님!》 하며 감격에 목메여 그만 흐느껴울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경무대》에서 일하던 로동자에게 이처럼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고계실 때 서울시민들과 해방지역의 모든 인민들도 보람찬 새삶을 받아안고 그이의 은덕에 모두들 감격의 눈물을 짓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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