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백벌에 흘러든 사랑의 생명수
주체35(1946)년 봄, 해방된 삼천리 이 땅에 찾아 온 첫봄이였다.
남연백의 넓은 벌에도 봄은 찾아와 논두렁에, 산기슭에 냉이싹이며 풀들이 돋았다. 하건만 벌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물이 없어 농사를 지을수 없게 된것이였다. 남연백벌에 생명수를 대주던 구암저수지와 례의저수지의 물길을 저주로운 38 선이 끊어놓았던것이다.
벌은 남에 있고 저수지는 북에 있고…
미제와 그 주구들은 북에서 절대로 물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애간장이 타는 농민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였다.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농민들의 한숨소리에 종달새마저 지저귐을 멈춘듯 벌은 황량하기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토지개혁으로 농악소리 높은 북녘땅에서 별안간 물줄기가 사품치며 남연백벌로 흘러들었다.
언제나 남녘겨레들의 처지를 걱정하시던
사랑의 생명수를 마음껏 들이키며 남연백벌이 한창 푸르러가던 1946년 여름, 구암과 례의저수지는 례년에 볼수 없었던 큰비로 뚝이 무너지고 수문이 파괴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남연백농민들은 무너진 저수지뚝을 바라보면서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다.
당시로 말하면 일제가 파괴하고 간 경제와 문화시설도 복구하고 령락된 인민생활도 빨리 안정시켜야 했으므로 자금과 자재, 로력이 매우 귀중한 때였다.
그렇지만
그 물량은 두 저수지의 전체 물량의 99%에 달하였다.
은혜로운 동포애적조치는 남녘의 민심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자 미제와 그 주구들은 남조선인민들속에서
그리하여 남녘땅으로 흘러들던 물길은 끊어지고 남연백농민들앞에는 또다시 형언할수 없는 시련이 닥쳐왔다.
(이 마당에서 주저할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결단을 내린 남연백농민대표 800여명은 1948년 5월 초순 목숨을 걸고 38 선을 넘어 북으로 달려왔다.
그후
북조선인민위원회결정 제155호
구암저수지와 례의저수지의 관개용수를 남조선 연백지방에 공급함에 관한 결정서
38이북에 있는 구암저수지와 례의저수지는 38이남 연백지방의 수전 1만 3 600정보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있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수차에 걸쳐 관개용수공급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군정과 서한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측은 남조선관개용수공급에 관한 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려 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태공하여왔으며 더우기 38이남 농민들이 자진적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대표와 관개용수문제해결을 교섭하려는것까지도 방해하여왔다.
이와 같은 사정은 북조선인민위원회로 하여금 본의는 아니나 부득이 관개용수사용료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구암저수지와 례의저수지로부터 38이남 연백지방에 급수하는것을 당분간 보류하게 하였던것이다.
…
미군정이 남조선동포들과 남조선농민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하여 하등의 관심도 가지지 않고있으며 대책도 취하려 하지 않을뿐만아니라 도리여 남조선동포들의 처지를 악화시킬 목적으로 관개용수조절문제를 고의적으로 태공하며 속한 기일내에 관개용수사용료에 대한 부채를 청산하려 하지 않고있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남조선동포들의 비참한 처지를 구원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미군정측은 관개용수사용료에 관한 문제를 속한 기일내에 해결하려 하지 않고있으나 남조선동포들의 …요청에 의하여 1948년 6월 27일부터 구암저수지와 례의저수지의 관개용수를 38이남 연백지방에 급수할것이다.
1948년 6월 26일
북조선인민위원회
6월 27일 오후 6시 40분, 드디여 수문이 열리였다.
그 사랑의 생명수와 더불어 남조선인민들의 가슴마다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