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된 《경평대항경기》
주체35(1946)년 1월 어느날
이날
1930년부터 일제식민지통치속에서도
《경평대항빙상경기》를 다시 계속함으로써 체육을 통해서 북남간의 접촉을 강화하며 38 선장벽을 허무는데 이바지해야 한다고 하시는
싸락눈이 내리는 1월 하순 어느날 새벽, 평양의 스케트선수 36명은 미군의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38 선을 넘었다.
그들이 토성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수많은 남조선의 체육인들과 기자들이 마중나와 평양선수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선수들이 서울에 도착하자 역홈은 수많은 환영군중들로 붐비였다.
남조선의 수많은 출판물들은 평양선수들을 《38 선을 깨뜨린 영웅의 사절》이라고 하면서 앞을 다투어 보도하였고 수많은 청년들과 시민들이 그들을 부둥켜안고 기뻐서 돌아갔다.
그들의 이러한 기쁨은 미제에 의하여 분렬된 조국땅에서 미군의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찾아온 북반부형제들을 맞이한 기쁨이며 더우기는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두 도시의 빙상선수들은 서울 창경원에서 휘거, 호케이경기를 벌렸고 춘천 소양강에서 속도경기를 진행하였다.
관람군중은 경기장에서 북남 젊은이들의 약동하는 청춘의 힘과 기백을 보면서
크나큰
《경평대항빙상경기》가 있은 후
이렇게 되여 남조선인민들은 뜻깊은 《경평대항빙상경기》가 있은지 얼마 지나서 또다시 북반부에서 온 축구선수들을 맞이하였다.
3월 25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서울시민들과 곳곳에서 모여온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속에 전통적인 《경평축구경기》가 벌어졌다.
이 경기도 《경평대항빙상경기》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북남간의 승부를 겨루기 위한 경기가 아니라 민족의 힘을 합쳐 나라의 자주통일을 이룩하자는데 그 목적을 둔 경기였다.
하기에 남조선인민들은 한결같이 이 경기는 《경기가 아니라 조국의 통일독립을 바라는 조선사람의 단합된 힘을 시위하였다.》고 말하였고 남조선출판물들은 《38 선의 장벽을 넘은 남북건아, 철각에 약동하는 조선독립의 투혼》, 《해방후 감격의 재현! <경평축구>에 장안의 인기 고조》라는 표제밑에 이 경기의 소식을 크게 보도하였던것이다.
이 시기 남조선에서 발간된 《자유신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8. 15이후 최대의 축구경기인 이번 경평전에 량군모두 필승의 비책을 갖추고있거니와 이번 경기가 다만 승리만에 그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요 38 선의 장벽을 돌파하고온 체육인들의 그 장렬한 의지를 맞아 우리 민족의 통일합동을 의미하는 체육이상의 큰 정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