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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오향문(영화배우)

                   

                      • 1921년 3월 13일 강원도에서 출생.

                      • 1938년부터 서울의 여러 극단에서 활동.

                      • 1950년 조선인민군대에 입대.

                      • 1952년부터 국립연극단, 1971년부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활동.

                      • 2000년 10월 9일 사망.

                      김일성상계관인, 인민배우.

                                                                      

 

오향문은 우리 인민의 사랑을 받은 재능있는 화술배우였다.

어제날 나라잃은 식민지소년의 민족적설음을 안고 갈 곳 없이 방황하던 그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서야 참된 삶의 보금자리를 찾았고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천성적인 재능을 귀중히 여기시고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여 우리 나라 영화예술계의 손꼽히는 화술배우로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보살피심과 사랑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으로, 인민배우로 빛나는 삶을 누린 오향문의 한생은 우리에게 참다운 인생철리를 깨우쳐주고있다.

 

떠돌이생활에서 벗어나기까지

 

나라없던 세월에 누구나 겪은 생활이지만 오향문도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 불우한 생활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21년 강원도의 어느 한 오막살이집에서 태여난 그에게 차례진 운명은 처음부터 너무도 가혹한것이였다.

두살 잡히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이집저집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다.

사람들은 이런 오향문을 두고 저 어린것이 불행을 타고났다고 말하군 하였다. 사람들의 그 동정이 싫어서인지 아버지조차 말을 갓 배우기 시작한 오향문에게 어머니에 대한 말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5살 되던 해 봄이였다.

어머니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는 제 나이또래 아이들을 부러워하던 오향문은 아버지에게 자기는 왜 어머니가 없는가고 자꾸 물었다. 가슴아픈 사연을 말할수 없는 아버지는 계속 투정질하는 아들의 정상을 보기 딱했던지 하루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마을가까이에 있는 산비탈에 올랐다. 철쭉꽃이 피여난 한 봉분앞에 아들을 세운 아버지는 《여기에 네 어머니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아버지의 그 말뜻을 알기에는 너무도 어렸던 오향문은 다짜고짜로 봉분에 대고 어머니를 불렀다. 거듭 불렀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종시 대답이 없었다.

열번, 스무번을 소리쳐 부르던 오향문은 그만에야 땅에 털썩 주저앉아 고사리같은 손으로 땅을 허비며 《엄마, 엄마야, 내가 왔어. 이제는 나오려마.》 하고 울음을 터뜨리였다.

정녕 불러도 울어도 대답이 없는 어머니…

그날에야 그는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곳에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항시 배고픈 설음, 한지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내야 하는 설음, … 이런 설음, 저런 설음을 다 겪으며 그의 나이 어느덧 14살이 되였다.

아직 뼈도 굳기 전인데 그해에 오향문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한가닥 희망을 안고 서울로 갔다.

일자리를 얻겠다고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인파속에 끼여 다행히도 서울 종로거리에 있는 철물상점 배달부로 겨우 취직한 그는 온몸을 무겁게 누르는 철물밑에서 잔뼈를 굳히였다.

그런 피눈물나는 생활속에서 그에게 예술에 대한 꿈과 지향은 그야말로 우연히 찾아들게 되였다.

서울 종로거리 철물상점의 배달부로 일하던 오향문은 거래를 많이 하던 극단에서 철물장치를 운반해주는 대가로 연극을 무료로 관람하군 하였다.

그 나날에 그는 배우들의 연극창조에 흥미를 가지고 거기에 심취되기 시작하였다. 자기도 배우가 될 희망을 가졌던것이다.

그래서 그는 짬만 있으면 극단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빈번히 문전거절을 당하였고 어떤 때에는 극장무대뒤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훔쳐보다가 발길에 채워 문밖에 나딩굴기도 하였다.

쥐구멍에도 해들 날이 있다고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종내는 어느 한 극단의 심부름군으로 들어갔고 몇년후에는 연극배우가 되였다.

정식 배우가 된 그는 너무 기뻐 밤이 새도록 도로를 거닐며 무대우에 선 자기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였다.

희망의 상상봉에 오르기나 한듯 마음은 마냥 즐거움에 젖어들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채 가셔지기도 전에 오향문은 다시 절망의 나락속에 빠져들어갔다. 일제놈들의 항시적인 위협공갈과 탄압으로 운영난에 허덕이던 극단이 얼마 못 가서 해산되였던것이다.

자기의 소박한 꿈이 실현된것으로 하여 얼마간 희열을 느끼며 살아오던 오향문에게 있어서 이것은 큰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계급적으로 각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진보적예술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하여, 이 세상의 모순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해방을 맞은 서울에서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높으신 뜻을 받들고 진보적예술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도처에서 조직되자 오향문은 예술다운 예술을 해보려는 희망을 안고 그중 한 연극단에 소속되여 배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 희망 역시 꽃망울도 앉기 전에 된서리를 맞고말았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의 지령하에 리승만역도는 진보적예술단체들을 총칼로 해산하는 한편 그에 망라되여있던 예술인들을 감옥으로 끌어갔다.

오향문도 감옥신세를 면할수 없었다. 4년간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그는 이상하게도 석달이 지나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그때 그는 그것이 적들의 모략이라는것을 전혀 알수 없었다. 놈들은 혁명조직의 내부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전혀 련관도 없는 정치범들의 이름을 반동단체인 보도련맹명단에 써넣고 그들에 대한 석방놀음을 벌렸던것이다.

오향문은 그때 적들의 모략에 의하여 날조된 보도련맹가입자라는 오명이 수십년간 자기의 운명을 괴롭힐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후 출옥하기는 하였지만 놈들의 마수가 다시 뻗치는 바람에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에 피신하여 이집저집 숨어다니며 식객노릇을 하였다. 그것도 며칠이지 정말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였다.

아, 세상은 왜 이다지도 모질가. 그는 분노와 고민속에 몸부림을 쳤다. 그 나날속에 북으로 가야만 살길이 열린다는것을 절감한 오향문은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대의 서울해방과 함께 의용군에 입대하였으며 그리도 갈망하던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생 명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우리 나라에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영화혁명에 뒤이어 가극과 연극, 음악, 무용 등 문학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일대 혁명이 일어나고있었다.

이에 따라 예술인들앞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시대의 사명감을 더 깊이 자각하고 예술적기량을 끊임없이 높여 새롭고 특색있는 명작들을 창작하여야 할 임무가 절박하게 나서고있었다.

오향문의 번민은 남달리 컸다. 한것은 그가 연극계에서 이렇다하게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연극배우라고 하면 수백수천명의 관중을 직접 대상하여야 하는것만큼 성량이 풍부하고 음역이 넓은 소리를 가져야 한다는것이 예술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연극배우로서 오향문의 소리는 천성적으로 연약하였다. 연극계에서는 그가 배우로서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나 없었다.

오향문도 자기의 이런 약점을 잘 알고있었고 얼마 못 가서 자기가 무대를 떠나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감에 사로잡히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소년시절부터 품어온 꿈을 버려야 하는가?

바로 그러한 때인 1971년 11월 어느날 오향문은 뜻밖에도 귀가 번쩍 트이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자기가 번역영화화술배우로 소환되였다는것이였다.

오향문은 처음에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언제 한번 자신이 번역영화배우로 될수 있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기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가슴이 부풀어오르는것이였다. 무대와는 다른 분야이기에 혹 성공할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가 별안간 자기에게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인생행로가 열린듯 한 벅찬 감정으로 솟구쳐올랐던것이다.

그러나 오향문은 그때 아직 그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자기의 화술에서 남다른 재능의 싹을 발견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자기를 번역영화화술배우로 불러주셨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이날 저녁 집에 돌아온 오향문은 안해와 자식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가정에서는 경사가 났다. 맏딸이 아버지의 손목을 꼭 부여잡고 《아버지, 꼭 성공을 바래요.》 하고 온 집안식구의 진정을 담아 이야기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기대와 믿음을 받아안은 오향문은 다음날부터 새 초소에서 영화번역사업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외국영화번역사업은 오향문이나 번역영화창조집단에 있어서 너무나도 생소한 분야였다. 실천적인 경험은 물론이고 리론상으로도 준비되여있지 못하다보니 그저 대상이 외국영화라는데로부터 그 나라 말의 억양과 감정표현에 맞추어 해설하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가지고있을뿐이였다.

그러던 1972년 1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번역영화에 대한 일가견을 가지고있지 못하고있는 배우들의 고충을 헤아리시고 번역영화를 만드는 목적이 다른 나라 영화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참고로 볼수 있게 하자는데 있는것만큼 번역영화를 만들 때 우리 말의 고유한 특성을 잘 살려야 하며 그러자면 배우들이 훌륭한 화술로 인물의 대사를 성격과 정황에 맞게 자연스럽고 실감이 나게 형상할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번역영화도 우리 인민들을 위한것이기때문에 마땅히 우리 인민들의 감정과 정서에 맞게 창조해야 한다는 이 심오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오향문은 자책감이 가슴을 파고들어 절로 머리가 숙어졌다.

그도 역시 예술창조사업에서 주체적립장이 투철하지 못한 탓에 번역영화해설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감정과 생활성격을 살리는데 기본을 두고 형상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있었고 다른 나라 말의 표현방식을 체득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오향문은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분발하기 시작하였다. 워낙 정열적인 인간이였던 그는 대사 하나하나에 우리 말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온넋을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그가 대사형상을 한 영화들은 심의원들의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오향문자신도 이제는 형상이 그만하면 손색이 없다고 자부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너무나도 짧은것이였다.

어느날 그가 형상한 번역영화를 보아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번역록음을 잘하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우리 말 대사와 화면에 나오는 인물의 입놀림이 맞지 않는것은 번역록음에서 배우들이 선행하여야 할 기본공정인 영화의 내용과 화면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록음하였기때문이라고, 화면에 나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입놀림과 우리 말의 소리마디가 서로 다르기때문에 꼭 맞출수는 없지만 말의 시작과 끝은 맞추어야 한다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 말씀을 받아안고서야 오향문은 번역영화에서는 어쩔수 없는것으로 치부해왔던 이 문제가 결코 스쳐보낼수 없는 배우의 자세와 립장에 관한 문제라는것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날 오향문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결함을 지적해주신 영화, 자기가 형상한 영화를 다시 보면서 예술앞에 무한히 성실한 사람만이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예술인으로 될수 있다는 진리를 심장깊이 새겨안았다.

이렇듯 경애하는 장군님의 비범하고도 구체적인 지도를 받으며 그는 번역영화배우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하나하나 갖추어나갔다.

우선 그는 번역해야 할 영화의 내용과 화면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을 다 기울이였다. 내용과 화면을 완전히 파악한다는것은 영화에 흐르고있는 사상과 정서를 해당 인물들의 처지와 립장에서 충분히 감수하여 자기의것으로 만든다는것을 의미하며 모든 대사가 기초하고있는 심리와 환경속에 실지로 자기를 세울줄 알게 된다는것이라고 그는 판단하였다.

오향문은 번역되는 매 대사를 해당한 영화화면들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기 위해 하나의 영화도 수십번이나 보면서 배우의 감정과 행동, 억양, 표정 등을 완벽히 자기의것으로 만들어나갔다.

길을 걸으면서도, 자리에 누워서도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그는 영화의 화면들을 그려보면서 그에 해당한 대사를 형상해보군 하였다. 그러다나니 동무들의 웃음을 자아낼 때도 있었고 어찌 보면 몽유병환자처럼 행동하여 안해를 걱정시키고 울린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번역영화에 대한 자신심을 가지게 되였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에 오향문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지적해주신 우리 말 대사를 외국영화에 나오는 인물의 입놀림의 시작과 끝을 일치시키는것은 물론 인물의 심리와 개성적성격이 번역되는 대사에서 완전히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러한 성과가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가르치심에 의해 이룩되였음을 절감하였고 그것을 통해 문학과 예술의 영재이신 장군님의 통찰력에 깊은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예술창조과정을 통하여 체험하고 깊이 느끼게 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비범한 예술적천품과 자질, 인민에 대한 끝없는 사랑은 오향문을 끝없이 매혹시켰고 그이를 직접 뵙고싶은 갈망으로 불타게 하였다.

그의 이 간절한 소원은 꿈만 같이 이루어졌다.

1972년 10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조선예술영화촬영소사업을 지도해주시기 위해 현지에 나오시였던것이다.

이날 오향문을 비롯한 번역영화화술배우들은 크나큰 흥분속에서 장군님을 모실 시각을 간절히 기다렸다.

마침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들에게로 오시였다.

순간 온 청사가 떠날갈듯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무들이 정말 수고한다고 하시면서 열광적으로 환호를 올리는 배우들의 손을 일일이 다정하게 잡아주시였다.

오향문은 가슴속에 차오르는 격정을 애써 누르며 경애하는 장군님을 우러르고 또 우러렀다.

만사람의 심장을 틀어잡는 해빛같은 밝은 미소와 우렁우렁하신 음성, 젊으나젊으신 그이의 모습에 그는 순간에 매혹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부문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 하시고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그이께서는 번역영화에서는 배우들의 화술이 기본이라고 하시면서 최근에 나온 번역영화를 보면 녀자배우들보다 남자배우들이 대사형상을 잘하지 못한다고, 남자배우들의 화술수준을 높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영화를 연구하고 인물들의 성격을 분석한 기초우에서 영화해설을 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너그럽게 하시는 말씀이였으나 오향문은 자책감에 휩싸이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배우가 역인물의 사상감정을 자기의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성격을 진실하게 창조할수 없다는것은 너무나 자명한 리치이다.

그러나 그는 한해에도 많은 영화를 창조해야 할 방대한 형상과제를 안고있는 형편에서 매 역인물의 성격까지 파고들 시간이 없을뿐아니라 번역영화인 경우에는 그런 문제가 례외로 된다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듣던바대로 당대에 없는 위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칠수록 그는 참으로 위대한 령도자의 품에 안기였다는 무한한 긍지감과 자부심에 휩싸이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구체적인 지도를 받으며 오향문은 높은 예술적기량과 자질을 갖추어나갔다.

이 나날에 오향문은 쏘련텔레비죤예술영화 《17일동안에 있은 일》, 쏘련예술영화 《직무상의 련애》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화들을 번역록음하였다.

어느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쏘련텔레비죤예술영화 《17일동안에 있은 일》을 보시고 오향문동무가 배역록음을 아주 잘하였다고 하시면서 오향문동무가 대사록음을 한 영화라고 하면 안심하고 보게 된다고 분에 넘치는 평가의 말씀을 하시였다.

오향문은 이렇듯 예술이라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세계에서 살고있었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늘 그늘이 져있었다. 적들의 모략에 의하여 날조된 보도련맹가입자라는 오명을 해명할 길이 없었던것이다. 행여나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건만 자기를 보증해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우기 자식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떳떳하지 못한 과거경력으로 하여 커가는 마음속불안과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수 없었다.

1983년 1월 어느날 오향문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친히 딸 오미란(4. 25예술영화촬영소 배우)과 함께 그를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던것이다.

천만뜻밖의 소식에 접한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 어려워 그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은채 한자리에 말뚝처럼 서있었다. 그러다가 일군의 재촉을 받고서야 그는 눈물을 삼키며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어느덧 승용차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렀다.

흥분과 긴장감으로 하여 오향문의 심장은 걷잡을수 없이 높뛰였다. 그는 가장 뜻깊은 자리에서 무슨 실수라도 할가보아 뒤설레이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그이께서 계시는 방으로 들어섰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여 기다렸다고 하시며 그들부녀의 손을 다정히 잡아 나란히 앉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윽한 눈길로 오향문에게 건강은 일없는가고 물으시고는 좌중을 둘러보시며 어느 한 예술영화의 제목을 드시고 이 동무가 그 영화에서 연기를 아주 잘하였는데 한 대목을 들어보는것이 어떤가고 하시였다.

장내는 삽시에 새로운 활기에 차넘치였다.

오향문은 잠시나마 그이를 즐겁게 해드릴수 있게 된것이 못내 기뻐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그는 용기를 내여 그 영화의 한 대목을 일인이역으로 그대로 펼쳐놓았다.

연기 첫시작부터 웃음을 참지 못해 하시던 그이께서는 배우의 연기가 절정에 오르자 그만 손을 내저으시며 크게 웃으시였다.

일군들과 예술인들이 모두 배를 그러안고 웃으며 돌아갔다.

오향문자신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치였다.

항상 바쁘신 시간을 보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잠시나마 이처럼 기쁜 시간을 보내시게 되니 참가자들은 모두 자기들의 소원이 풀리게 되여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으며 어느새 어려움도 잊고 경애하는 장군님의 주위에 촘촘히 둘러섰다. 장내는 아버지앞에서 막 웃고 떠드는 아이들모습 그대로의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윽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모임참가자들과 함께 아직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있던 오향문과 그의 딸을 정겹게 바라보시다가 동무가 그렇게 웃는것을 보니 내 마음이 놓인다고 말씀하시였다.

오향문은 그때에야 비로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자신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혀주시기 위하여 일부러 그런 연기를 시키시였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순간 오향문의 웃음어린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오향문동무는 무슨 역을 맡기여도 잘한다고 하시면서 화술에서는 그를 따를 배우가 없다고, 피곤하고 마음이 무겁다가도 그가 번역해설을 한 영화를 보면 피곤이 풀리고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말씀하시였다.

오향문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기가 출연한 영화들이 장군님께 그처럼 큰 기쁨을 드렸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흔히 배우의 연기형상에 대하여 말은 많이 하지만 화술에 대하여서는 별로 화제에 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화술배우들의 수고를 그토록 깊이 헤아리시고 높이 평가해주시는것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향문의 옆에 앉아있는 딸을 바라보시며 저 동무도 재간있는 배우라고 치하하시면서 딸의 예술적기량을 책임지고 높여주어 인민배우로 키워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향문을 다정히 손잡아 자리에 앉히고나서 동무가 지난날의 경력때문에 고민하고있다는것이 사실인가고 조용히 물으시였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정중한 자세로 그이께 사실이라고 대답을 올리였다.

이렇게 되자 봄날처럼 화기에 넘치던 방안의 분위기가 점차 바뀌여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리를 푹 떨어뜨리고 그린듯이 서있던 오향문은 마침내 《경애하는 장군님, 사실 저는 이런 영광의 자리에 참가할 자격이…》 하고는 다음말을 얼버무리고말았다.

그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놈들은 본인도 모르게 그런 명단에 동무의 이름을 적어넣은것이다, 해방직후 남반부에서 원쑤놈들이 많은 사람들을 자기들이 조직한 어용단체들과 예술단체들에 묶어세운듯이 떠들어댔지만 사실 그 내막을 빠개보면 본인도 모르게 날조한것이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각성되지 못한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끌어들인것이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모두가 더운 숨을 내쉬며 그이의 다음말씀을 기다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나는 당을 따라온 동무들을 믿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온 의용군전사들은 다 애국자들이고 혁명동지들입니다.》

그이께서는 장내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높이 드셨던 손을 힘있게 내리시였다.

오향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믿음어린 안색을 짓고계시는 장군님을 우러르며 그이의 존함을 목메여 부르고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위대하고 따사로운 품에 안겨 행복한 삶을 누리고있는가를 심장으로 절감하고있었다.

오향문은 자기들의 정치적생명을 다 맡아 안아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을 우러르며 영원히 그이만을 따를 심장의 맹세를 다지였다.

크나큰 정치적생명을 받아안은 오향문은 그 믿음과 사랑에 보답할 불같은 마음을 안고 예술창조의 길에서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쳐나갔다.

 

소망을 헤아리시고

 

(아, 어머니!)

오향문은 어머니없이 자란탓에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단 한번만이라도 받는것이 평생소원이였다.

이런 오향문이 가장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게 되였으니 그 사랑을 주신분은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1981년 6월 10일이였다.

이날 오향문은 뜻밖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부르신다는 꿈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오향문은 승용차에 올랐으나 높뛰는 심장을 진정할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나라의 크고 많은 중대사로 중요직책에 있는 일군들을 만나주시자고 하여도 시간이 모자라실텐데 자기같은 평범한 배우를 불러주시였으니 정말 너무도 뜻밖이였다.

아직 남조선에 그냥 있었더라면 사람값에는커녕 길가의 조약돌신세가 되였을 자기를, 배우생활을 오래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예술계의 큰 재목감도 못되는 자기를 불러주시니 어찌 높뛰는 심장을 진정시킬수 있었겠는가.

그는 눈앞에 서려지는 뿌연 물안개로 하여 차창밖으로 흘러가는것을 아무것도 가려볼수 없었다.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달리더니 어느덧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에 도착하였다.

오향문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안내하는 일군을 따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그런데 방에 들어서는 첫 순간부터 오향문은 뜻밖의 충격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의 맏딸 오미란이 한발 먼저 와서 경애하는 장군님께 인사를 올리고있었던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나와 딸을 이렇게 불러주시다니…)

자기 한사람이 부르심을 받은것만도 그런데 한집안에서 두사람씩이나 이런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으니 너무도 꿈같은 일이여서 오향문은 그만 경애하는 장군님께 인사를 올릴 생각도 잊고 어리둥절해 서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들부녀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시면서 그동안 영화를 만드느라고 수고했다고, 건강은 어떤가고 정답게 물어주시였다. 마음속으로 흠모하여 마지 않던 어버이장군님을 몸가까이에서 뵙는것만도 분에 넘친 일인데 이처럼 혈육의 정을 부어주시니 그들은 너무도 감격에 겨워 대답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고 그냥 눈물만 흘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흥분된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시고 진정하라고 거듭 이르시다가 그래도 진정 못하자 조용히 방을 나서시였다.

그들부녀는 그냥 자리에 앉아있을수 없었다. 그처럼 바쁜 시간을 내시여 아버지와 딸을 함께 불러주시였지만 걷잡지 못하는 흥분으로 하여 장군님께서 방을 나서시게 하였으니 세상에 그런 죄스러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을 다잡으며 급히 방을 나섰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들이 진정하길 기다리시느라고 복도를 조용히 거닐고계시는것이 아닌가.

장군님께서는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으로 몸둘바를 몰라하는 그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좀더 앉아있지 왜 벌써 나왔는가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오향문에게 딸을 잘 두었다고, 영화에 처음 출연하는데 연기를 아주 잘한다고, 딸을 훌륭한 배우가 되도록 아버지가 잘 키워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의 딸에게도 아버지처럼 꼭 인민배우가 되라고 고무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들부녀를 미덥게 바라보시며 동무들은 당을 따라 영원히 변치 말고 한길을 가야 한다고, 아버지도 딸도 대를 이어 수령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앞에서 주책없이 행동하여서는 안되겠다고 강심을 먹었으나 분에 넘친 그 말씀을 받아안게 되자 그들부녀는 자신을 더이상 걷잡지 못하고 또다시 목메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그들이 흥분하여 너무 울기만 하자 더 하려던 말씀을 그만두시고 집에 돌아가 쉬면서 마음을 푹 가라앉히라고 이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오향문에게 돌려주시는 사랑은 끝없이 이어졌다.

오향문이 생일 일흔돐을 맞게 되는 해인 1991년 2월 17일이였다.

이날 오향문을 비롯하여 문학예술부문에서 공로있는 일군들을 불러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래간만이라고, 반가운 동무들, 보고싶은 동무들이 왔다고 하시며 자신께서 문학예술사업을 지도하시던 때를 감회깊이 회고하시다가 이 자리에 모인 동무들은 당을 받들어 충실히 일해온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나의 동지들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당을 받들어 충실히 일해온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나의 동지 이 고귀한 칭호를 받아안는 순간 오향문의 심장은 쿵쿵 높뛰였다.

장내를 일별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향문을 가까이 부르시고 건강상태와 나이를 물어보시다가 올해가 생일 70돐이 된다는것을 아시고 오향문동무의 70돐생일은 자신께서 직접 책임지고 본때있게 차려주겠다고 말씀하시였다.

바로 이렇게 되여 오향문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생일상을 받아안게 되였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오향문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뿐이 아니다.

뜻깊은 2월의 명절을 앞두고 온 나라가 명절분위기에 휩싸여있던 1992년 2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이날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술인들과 함께 계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감격에 목메여 눈물만 흘리면서 인사말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오향문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동무들이 보고싶어 찾았다고, 오늘은 식사나 같이 하면서 동무들과 함께 지내자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들모두를 식탁으로 이끄시였다.

이리하여 오향문은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차린것은 별로 없지만 마음껏 들라고 하시면서 손수 음식도 권하시였다.

오향문은 어려움도 잊고 그이앞에서 음식을 맛나게 들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향문의 건강상태에 대하여 알아보시다가 자신께서 오늘 자동차를 주겠다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오향문은 펄쩍 놀랐다. 사업부담이 큰 간부도 아니고 한갖 배우에 불과한 자기에게 승용차라니…

그가 너무도 놀라와 할 말을 찾지 못하고있는데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건강하여 오래오래 앉아있어야 한다고, 자동차를 타고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으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오향문은 불시에 목이 꽉 메여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조국을 위한 성전에 몸바쳐 위훈을 세운것도 아니고 이름난 발명을 한 과학자도 아닌데… 지난날 생존을 위하여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제가 일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장군님!)

해방전 호구지책으로 서울과 철원사이를 메주밟듯 하며 행상을 하던 10대의 어린 소년, 고달픈 행상길에 맥이 진하여 눈무지에 빠진채 의식을 잃어 생을 마칠번 한 소년, 그 불우한 어제날의 소년인 자기가 지금은 이렇듯 영광의 단상에 오른것이다. 그는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오향문을 따뜻이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여기에 온 동무들은 자기 부문에서 오래동안 일을 잘하였다고, 앞으로도 자기 사업을 잘하리라 믿는다고 하시고는 잠시 사이를 두셨다가 자신께서는 오래동안 예술활동을 하다가 나이가 많아 집에 들어간 사람들과 공로있는 사람들을 한번 만나보자고 생각하고있는데 빠진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수첩을 드시고 한사람한사람 이름을 나직이 뇌이시였다.

이날 행복의 무아경속에 잠긴 오향문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지 못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헤여지기에 앞서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해 하는 그들에게 일들을 잘하여야 하겠습니다, 내가 동무들을 끝까지 돌보아주겠습니다라는 은정넘친 말씀도 해주시였다.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뜨거운 사랑은 그후 세월이 갈수록 더욱 열렬하고 다심하였다.

1994년 1월말 어느날 오향문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에 의하여 마련된 집중검진을 받게 되였다.

생각할수록 고마움만 가슴에 가득차올랐다.

병원에 입원하던 날, 그는 때이르게 활짝 핀 상두대우의 철쭉꽃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철쭉꽃은 그에게 류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꽃이였다. 오향문에게 있어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련상시키는 사연깊은 꽃이였다.

소담하게 피여난 철쭉꽃을 바라보느라니 5살 잡히던 해 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봉분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 피여있던 철쭉꽃이 떠오르는것이였다.

입원실창가에 피여있는 철쭉꽃을 보는 오향문의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아, 어머니의 젖조차 변변히 먹어보지 못한 내가 그 봉창을 하자고 이런 위대한 어머니의 품에 안겼던가?)

그후 오향문은 해마다 꼭꼭 입원치료를 받았다.

1998년 1월 2일 경애하는 장군님을 또다시 만나뵙게 된 오향문은 그이께 삼가 인사를 올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정말 보고싶었다고 몇번이나 말씀하시면서 그의 건강을 다정히 물어주시였다.

오향문은 장군님께서 깊이 관심하시며 배려해주시여 이제는 병이 다 나았다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올해 나이가 77살이면 아직 일없다고, 건강해서 한 15년은 더 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오향문동무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때문에 자주 부릅니다. 오향문동무를 비롯한 오랜 세대들은 수십년세월 당을 받들어 변심없이 일해왔습니다.》

그러시고는 일군들에게 오향문동무가 지금까지 많은 외국영화를 번역록음했는데 대사록음에서는 그를 따를 배우가 없다고 말씀하시였다.

년로보장을 받고 집에 들어가있던 자기를 다시 나와서 일할수 있도록 재생의 기쁨을 안겨주시는 그이께 오향문은 《장군님, 저는 지금 주역은 못해도 단역은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저를 록음에 꼭 참가시켜주십시오. 이제는 제 병이 다 나았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동무의 심정은 알만 하다고, 그러나 올해 상반년까지는 휴식하면서 몸조리를 더 한 다음 출연하는것이 좋겠다고 다정히 이르시였다.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그 은정에 목이 메여 그는 저도 모르게 격정의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격정에 흐느껴우는 오향문을 보시며 아무쪼록 건강하여 인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자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후에도 장군님께서는 그의 건강이 걱정되시여 보약도 보내주시고 관계부문 일군들을 만나시여서는 그가 건강하도록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이런 각별한 사랑속에 살았기에 오향문은 늘 마음속으로 시 《어머니》를 즐겨 읊었으며 경애하는 장군님앞에서도 이 시를 읊어드리였다.

 

내 이제는

다 자란 아이들을 거느리고

어느덧 귀밑머리 희여졌건만

지금도 아이적 목소리로 때없이 찾는

어머니, 어머니가 내게 있어라

 

기쁠 때도 어머니

괴로울 때도 어머니

반기여도 꾸짖어도 달려가 안기며

천백가지 소원을 다 아뢰고

잊을번 한 잘못까지 다 말하는

이 어머니 없이 나는 못살아

 

아, 나의 생명의 시작도 끝도

그 품에만 있는 조선로동당이여

하늘가에 흩어지고 땅에 묻혔다가도

나는 다시 그대 품에 돌아올 그대의 아들!

그대 정겨운 시선, 살뜰한 손길에

몸을 맡기고

나는 영원히 아이적 목소리로 부르고

부르리라-

어머니! 어머니없이 나는 못살아!

 

그 사랑이 힘이 되고 불사약이 되여 오향문은 비록 고령의 몸이였으나 청춘의 패기와 활력에 넘쳐 일하고 또 일하였다.

일상생활에서는 그처럼 선한 사람, 이제는 70도 훨씬 지난 로인이 일단 마이크만 잡으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젊은이들도 무색할 정도로 불같은 열정을 폭발시키군 하였다.

그가 예술창조를 하던 나날에 생겨난 하나의 일화가 있다.

어느해 명절날에 있은 일이다.

모든 가정들이 다 그러하듯이 그날 오향문의 가정도 명절분위기로 흥성거렸다. 아들, 딸 4형제를 키워 시집장가보낸 뒤라 적적하던 집안에 손자, 손녀들까지 다 모이고보니 집안은 여느때없이 활기를 띠였던것이다.

그러나 오향문은 집안의 이 세계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듯 자기 방에서 열심히 대본련습에 빠져있었다.

아들, 딸, 사위, 손자, 손녀들이 오향문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였으나 그는 머리만 끄덕일뿐이였다.

늘 그런 아버지를 보는데 습관된 자식들은 아버지일에 방해하지 말자고 하면서 다른 방으로 가서 명절을 즐겁게 쇠고 돌아갔다.

그런데 일은 저녁식사시간에 생겼다.

상을 물리기 바쁘게 담배를 꺼내 물던 오향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안해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보, 오늘은 명절인데 자식들은 왜 오지 않소?》

그 소리에 안해가 펄쩍 놀라며 따지고 들었다.

《아니, 이 령감이. 그래 딸, 사위, 손자들의 인사까지 다 받구두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요?》

안해의 말에 오향문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제서야 생각이 났던지 무릎을 철썩 치며 껄껄 웃었다.

이렇듯 오향문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에 보답할 마음을 안고 불타는 열정을 바쳤다.

하기에 언젠가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던 이전 쏘련의 유명한 녀류영화연출가인 따찌야나 리오즈노바는 오향문에 대해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나는 쏘련의 찌호노브를 세계적인 배우로 인정하고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와서 생각을 달리하였다. 조선의 영화인들이 해설한 〈17일동안에 있은 일〉은 우리가 이룩한 영화의 형상수준을 훨씬 초월한 영화이다.

그중에서도 슈틀리쯔역을 수행한 배우는 정말 재능있는 배우이다. 나는 여러 나라의 번역배우들을 대상해왔지만 이렇듯 세계적인 배우의 수준을 릉가하여 그의 연기를 원숙하게, 풍만하게, 재치있게 돋구어낸 그런 번역배우는 보지 못하였다. 그는 당당히 세계적인 화술배우라고 말할수 있다.》

아마도 그 녀류영화연출가가 오향문이 어떻게 되여 성공적인 명배우로 자라날수 있었는지, 그 바탕에 깔린 령도자의 세심한 지도와 한없는 믿음과 사랑, 그에 보답하려는 전사의 불같은 마음을 알았더라면 더욱 놀랐을것이다.

오향문은 2000년에 들어서면서 병세가 또다시 악화되여 병석에 눕지 않으면 안되였다.

자기의 생이 마지막단계에 이르렀음을 직감한 오향문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병에 포로되지 말고 남은 생을 보람있게 마치자.)

그는 자기의 병상태에 대하여 내비치지 않았다. 고열이 나고 숨이 차서 말을 할수 없으면 그는 몰래 약을 먹고 암실에 들어가 록음을 보장하군 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또 밤대로 꼬박 밝히면서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운명하기 사흘전까지 하루도 어김없이 집행한 일과였다.

오향문이 운명하던 날 사람들은 그가 늘 소중히 품고 다니던 수첩에서 그의 마음속진정을 토로한 이런 글을 발견하였다.

(나는 세상에 태여났지만 어머니를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다심한 어머니심정으로 나를 품에 안아 세상이 아는 인민배우로 키워주시였다.

이 은정, 이 사랑을 한순간이라도 잊는다면 나는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될것이다.

육체는 병들지언정 장군님 받드는 마음은 조금도 병들지 말아야 한다.

한생 장군님 사랑안고 순간의 쉼도 없이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리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시던 오향문은 이처럼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참된 삶을 빛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향문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고 그의 아들딸들을 모두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예술인으로 키우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저 남녘땅에서 불우하게 시작된 오향문의 생이 오늘은 세계적인 화술배우로서의 값높은 한생으로 되였다.

그의 한생은 사람들에게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은혜로운 품이 있어야 희망도 꽃피울수 있고 그토록 환희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수 있다는 귀중한 진리를 새겨주고있다.

 

이어가는 참된 삶

 

오향문에 대해 말하자면 자연히 그의 딸 오미란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주로 막뒤에서 화술로 한생을 살아온 오향문보다 무대우에서 무수한 인생의 꽃바다를 펼쳐보인 그의 딸 인민배우 오미란을 더 잘 알고있다. 예술영화 《도라지꽃》, 《생의 흔적》 특히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홍영자편에서 그가 보여준 매혹적인 연기는 세계적인 명배우로서의 그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고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되여 인민의 사랑을 받는 명배우로 될수 있었는지 다 알지 못하고있다.

오미란은 원래 어릴 때부터 자신이 영화배우가 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부모들의 권고로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어느 한 예술단에서 화술배우로 소개나 맡아하는 정도였다.

한 연출가의 권고로 예술영화 《축포가 오른다》의 주역을 맡아하게 되였으나 심사결과는 그리 좋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새로 나온 예술영화 《축포가 오른다》의 작업필림을 친히 보아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전문가들도 발견하지 못한 오미란의 재능의 싹을 찾아주시고 그가 요구하면 영화배우로 발전시켜주도록 크나큰 믿음과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오미란은 이렇게 예술영화 《축포가 오른다》와 더불어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으며 그후 경애하는 장군님의 지도를 받으며 보람찬 성장의 길을 걷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영화배우들은 얼굴로만 연기를 하여서는 안된다고, 사업과 생활을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하여야 한다고, 그러자면 생활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배워야 한다고, 아는것이 적으면 산 인간을 형상할수 없다고 깨우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종군기자의 수기》, 《새별》, 《그들의 모습에서》, 《새 정권의 탄생》, 《곡절많은 운명》, 《도라지꽃》, 《생의 흔적》, 《비행사 길영조》, 《민족과 운명》, 《이어가는 참된 삶》 등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다 보아주시고 오미란동무는 처음부터 마감까지 관중의 마음을 쥐였다놓았다 하면서 작품을 잘 끌고가는 훌륭한 배우라고, 아무 역이나 다 맡아 수행할수 있는 실력있는 배우라고, 젊은 녀배우들가운데서는 제일이며 확실히 인민배우자격이 있는 간단치 않은 배우라는 과분한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느때인가는 영화에 출연한 그를 보시고 얼굴이 축갔다고, 건강이 좋지 않은것 같으니 그를 잘 돌보아주어야겠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의 권위있는 의료일군들로 강력한 의료진을 무어주시였으며 외국의 이름있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해당한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다.

사랑하는 혁명전사를 위해서라면 돌우에도 꽃을 피우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렇듯 은혜로운 사랑의 손길이 불사의 명약이 되여 오미란의 병세는 점차 호전되여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또 다른 병마가 오미란의 건강을 위협하였다. 그것은 현대의학으로도 어쩔수 없는 불치의 병이였다.

2002년 봄 어느날 오미란은 침상에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예술영화 《생의 흔적》의 속편인 《이어가는 참된 삶》을 만들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사실 예술영화 《생의 흔적》의 속편인 《이어가는 참된 삶》으로 말하면 어버이수령님께서 오래전에 친히 제목을 달아주시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줄거리까지 밝혀주신 작품이였다.

그것을 잘 알고있는 오미란으로서는 더는 침상에 누워만 있을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뜻밖에도 오미란이 촬영소에 불쑥 나타났다.

《저에게 연출대본을 주세요.》

오미란을 보는 순간 연출가는 깊은 감동에 젖어들었다.

《그 몸으로 꽤 역을 감당해낼수 있겠소?》

《걱정마십시오. 이 영화는 어버이수령님의 유훈이 깃들어있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관심하고계시는데 〈생의 흔적〉의 주역을 한 내가 살아있으면서 어찌 물러설수 있겠습니까.》

오미란은 이렇게 촬영기앞에 나섰으며 주인공의 역형상속에 이어가는 참된 삶을 살려는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담았다.

불치의 병으로 수술까지 받은 상태에서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다는것은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 그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기어이 보답하겠다는 불굴의 정신력이 낳은 기적이였다.

오미란은 모진 동통을 이겨내며 마침내 《이어가는 참된 삶》을 완성하고야말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이어가는 참된 삶》은 선군시대 영화예술의 본보기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미란동무가 수술후에 경과가 어떤지 모르겠다고 걱정어린 음성으로 뇌이시였다.

그토록 품들여 명배우로 키워오신 영화예술인, 이 세상 만복을 다 안겨주시며 애지중지 아껴오신 녀배우가 한창나이에 불치의 병에 걸린것이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각별히 마음쓰신것이였다.

날과 달이 갈수록 뜨겁게 이어지는 그 은정깊은 사랑의 손길아래서 생의 박동을 이어가던 오미란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조용히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의 사망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통함을 금치 못하시며 참 아까운 배우를 잃었다고, 그의 병을 고쳐주려고 많이 노력하였지만 종시 살려내지 못하였다고 그리도 애석해하시였다.

오미란은 갔으나 그의 아버지 오향문과 함께 그가 남긴 생의 흔적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절세의 위인의 품속에서만 인간의 재능도 활짝 꽃펴나고 죽어서도 영원히 생을 빛내일수 있다는것을 가슴뜨겁게 새겨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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