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리 단 (연극배우, 연출가)

                     

                      • 1918년 10월 8일 경기도 려주군에서 출생.

                      • 1940년부터 아랑극단 배우.

                      • 1950년부터 국립극장 연극배우.

                      • 1962년부터 국립연극단 연출가로 활동.

                      • 2004년 1월 3일 사망.

                      •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4기, 제7기~제11기 대의원.

                      김일성상계관인, 인민배우.

                                                                      

 

오늘도 우리 인민이 잊지 않고 사랑하는 인민배우 리단의 한생은 무대우에 뿌리를 내리고 거목으로 자란 한생이라고 말할수 있다.

해방전 무대에서 배우생활을 한 그는 참기 어려운 풍상고초도 겪어보고 온갖 희로애락도 맛보았으며 보통인간으로서는 오를수 없는 영광의 단상에서 인생을 총화지은 우리 나라 무대예술을 대표하는 배우들중의 한사람이다.

북과 남의 대조적인 정치를 페부로 절감하면서 인민의 자주적운명을 결정하는 근본요인이 무엇인가를 체득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무대우에서 흘러간 그의 생활은 민족분렬의 비극이 가져다주는 가슴아픔이 어떤것이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도 잘 보여주고있다.

경기도 려주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이 가져다주는 뼈아픈 눈물을 체험하였다.

그의 본명은 리정훈이였다.

해방이 되여 번역극 《폭풍의 거리》에서 주역을 담당하게 된 리단은 결혼식을 하는 날까지도 낮에 밤을 이어 공연에만 열중하였다.

어머니는 어이없어 말을 못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연극에 미쳐버린 그를 두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보게 정훈이, 아무리 바빠도 결혼식할 시간이야 내야지.》

친우들이 이렇게 권고하였으나 리단은 히죽이 웃기만 하면서 시간낼념을 하지 않고 계속 공연에만 몰두하였다. 그때 리단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하였다고 한다.

(열정이 없으면 정훈이가 아니지. 뜨거운 정열로 빛을 낸다는 뜻이 바로 정훈이가 아닌가. 나는 기어이 정열의 인간이 되련다!)

그는 후에 부모가 지어준 정훈이라는 이름대신 《붉은 단》자를 넣어 리단으로 자칭하였다.

연극으로 민족을 빛내이고 그 길에 자기 한생을 깡그리 바치겠다는 마음을 담은 그 이름자에는 정열의 인간-리단의 애국의 굳은 신념과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 용단을 정의롭고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만이 취할수 있는 행동으로 여기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리단은 한생을 이름에 담은 그 결심과 지향대로 살았고 우리 나라 무대예술사에 당당하게 자기의 자욱을 남긴 연극배우가 되여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무대에 운명을 걸고

 

리단은 어린시절부터 연극배우가 되기를 갈망했었다. 누가 가르쳐서도 아니고 먹고살아가기 위해서도 아니였다. 스스로 그것을 갈망하였다. 이것은 그의 천성이였다.

그는 문학에도 취미를 가지고있었지만 보다는 무대우에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울리기도 하는 예술인이 되고싶었다. 하지만 모진 세월 일찌기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네 자식을 먹여살려야 했던 어머니는 한가정의 맏이이면서 외아들인 리단이 배우가 되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배우가 되면 먹고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관념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구경거리로만 치부하는 천하디천한 배우가 되라고 내버려둘수가 없었던것이다.

《난 네가 배우가 되여 동물원의 짐승처럼 구경거리가 되는걸 바라지 않아. 그런 생각 제발 거두어라.》

어머니는 완고하게 반대하였지만 배우가 되고싶은 리단의 지향은 더욱더 불타올랐다.

가정생활이 어려워 다섯식구의 생계유지가 경각에 달하게 되자 리단은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하고 동아일보사 륜전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자기 혼자서 부지런히 배우수업을 하였다.

리단이 스스로 정한 배우수업무대는 서울시 성북동 옛 성터아래에 있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밑이였다.

도시의 소음을 피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늙은 소나무앞에 있는 잔디밭으로 모여들군 하였다.

리단은 이 나무아래에서 많은 소설이나 희곡의 주인공들과 만났고 또 주인공자신으로 되기도 하였다.

주인공들의 세계에 공감되여 그들과 같이 잔디밭을 딩굴기도 하고 그들의 비극적운명이 가슴아파 잔디를 쥐여뜯으며 함께 울기도 하였다.

리단이 언제나 이렇게 성북동 뒤산 조용한 곳에 가서 누구의 지도도 없이 소설랑독이며 시랑송, 역인물의 연기훈련을 하느라면 산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괴짜라고 부르며 혀를 찼다. 그럴 때면 리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히쭉 웃어보이며 (앞으로 두고봐라. 내가 어떻게든지 명배우가 되는걸…) 하고 속마음을 다지군 하였다. 배우라면 펄펄 뛰던 어머니도 아들의 정열적인 모습에 감복하여 그의 점심밥을 싸가지고 야외무대로 찾아오군 하였다.

리단의 야외무대에는 산새들과 내물소리 그리고 산울림이 유일한 벗으로 되였다.

야외무대에서 리단이 련습을 하다가 잔디밭에 누워서 공상에 잠겨있으면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자는줄 알고 먼발치에서부터 뛰여오며 《얘야, 바위에서 잠들면 입비뚤어진다. 어서 일어나 밥먹어라.》 하고 흔들며 일으켜세우군 하였다.

리단이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식사를 하고 중얼중얼 대사련습을 할 때면 어머니는 바느질을 멈추고 신기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하여 물끄러미 바라보군 하였다.

리단은 이렇게 독학을 하면서 피타는 노력과 정열로 배우로 되기 위한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의 배우생활은 20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였다.

그가 처음으로 찾은 극단은 《아랑》이였다.

배우들을 모집하던 극단의 단장은 소박한 리단이 과연 극단에서 연기를 해낼수 있겠는지 우려되여 그에게 력사극에 나오는 전쟁병역을 해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입직시험이였다.

연기시험문제는 그 연극에서 나오는 역인물의 첫 대사 《아병망료 아뢰오!》 하며 지금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알리는 대목이였다.

리단은 그 역을 어렵지 않게 인상깊이 해내였다. 연출가는 물론 거기에 참가한 배우들모두가 감탄해마지 않았다. 리단의 입직시험연기가 어찌나 명연기였는지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아병망료》 라고 불렀다 한다.

극단에서는 리단의 첫 연기를 보고 주인공역을 서슴없이 맡기였다.

어느 한 희곡을 창조할 때였다.

연출가는 리단에게 작품의 꿈장면에 나오는 도깨비역을 맡겼다.

총시연회가 진행되는 날 극단의 단장과 연출가는 리단이 자기가 맡은 도깨비역을 어떻게 할것인가를 흥미와 기대속에 지켜보았다.

그런데 리단이 도깨비역을 얼마나 재치있고 흥미있게 하였는지 그의 연기를 본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붙안고 웃음을 그치지 못하였다. 더욱 놀란것은 도깨비역형상을 해보지 못한 리단의 기발한 착상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깨비라고 하면 머리에는 뿔이 나고 눈은 동그랗고 몸뚱이는 빨간색모습으로 형상했었다. 리단이 형상한 도깨비는 뿔이 아니라 숯과 고추를 끼운 새끼를 머리와 목에 감고 여러색의 천을 매달아놓은 새까만 옷차림에 손짓, 발짓을 하며 나타났던것이다.

옛날에 아이를 낳은 집으로 사람들이 막 들어오는것을 막기 위해 대문우에다 새끼줄을 늘이고 거기에 고추와 숯을 끼워놓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들이면 고추를, 딸이면 숯을 매달아 표식하였었다. 사람들은 도깨비로 분장한 리단을 보고 어쩌면 저렇게 연기를 잘하느냐고 감탄하였다.

이렇듯 리단은 배우로서의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있었으나 일제의 압제속에서는 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은 리단의 가슴을 환희와 기쁨으로 설레이게 하였다.

나라를 찾았으니 조선의 예술도 찾을것이 아닌가!

리단은 커다란 기대와 포부를 안고 서울조선예술극단에 들어갔다.

극단에서 그는 번역극 《폭풍의 거리》(주역), 《향연》(참봉역), 번역극 《웨쳐라 대지》(대학생역), 《3. 1운동》(주인공역) 등을 맡아하였다.

그러나 일제를 대신하여 기여든 미제침략자들이 살판치는 남조선땅에서 진정한 예술은 꿈에 불과하였다.

정의와 진리를 위한 예술활동을 하려는 기미만 보이면 총칼로 탄압하는것이 미제강점하의 남조선땅이였다.

(내가 희망한 예술이 이렇게 짓밟힌단 말인가.)

리단은 생각할수록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정사를 펴나가시는 북조선에서는 새 조국건설의 노래소리가 높이 울려퍼지고있었다. 그는 높뛰는 가슴을 안고 북녘하늘을 우러렀다.

사람마다 전설처럼 이야기하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기면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고싶은 자기의 소망이 풀릴것 같았다.

리단은 용약 결심하였다.

드디여 1946년 어린시절 뛰놀던 고향마을과 배움터, 야외무대로 정다워진 성북동 옛 성터의 잔디밭과 늙은 소나무를 뒤에 남기고 손을 놓을줄 모르는 어머니와 기약없이 헤여진 그는 38 선을 넘어 공화국의 품에 안기였다.

 

위대한 스승의 품속에서

 

리단이 그토록 소망하던 보람찬 창조의 나날은 시작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방후 창조하여야 할 우리 문학예술은 민주주의적민족문화예술이라고 하시면서 작가, 예술인들을 나라의 귀중한 보배로, 새 조선건설의 용사, 민주주의기수로, 인민대중의 선도자로 내세워주시였다. 그리고 배우들에게는 무대옷을 좋은 천으로 해주어야 그들의 사기도 높아지고 보는 사람들도 좋을것이라고 하시며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배려를 받아안으며 리단은 높뛰는 격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 리단이 중앙예술공작단에서 처음으로 출연한 연극은 《봇돌이군복》(주인공역)이였다. 이어 그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활동을 형상한 연극 《뢰성》에 출연하였다.

이 연극에서 리단은 소위 혁명가로 자처하던 변절자역을 맡아 수행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새 조선건설의 바쁘신 속에서도 이 연극을 친히 보아주시였을 때 리단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컸다. 하루라도 더 빨리 공화국의 품에 안겨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지 못한 후회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창조의 나날은 흘러 리단은 연극 《심청전》에서 화주승역을 맡아하게 되였다. 역을 맡은 리단은 처음으로 고전문학작품에 출연하였다는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있었다. 예술창조자들도 또 한편의 연극을 만들어냈다는 기쁨으로 만족하고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연극이 얼마나 심중한 사상미학적과오를 범하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있었다.

《심청전》에서 룡궁이나 왕궁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같은것은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환상이라고 하면서 없애버리고 그것을 주인공의 꿈장면으로 처리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마치도 낡은 중세기적수법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적형상을 창조한듯이 자부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이 연극을 보시고 연극의 결함을 심중하게 분석하시면서 고전문학작품을 다루는데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교시를 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심청전》에서는 당시 인민들의 암담한 생활처지를 눈먼 심봉사의 형상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하시면서 심청이 왕비가 되게 하고 심봉사가 눈을 뜨게 한것은 당시 인민들의 한결같은 희망을 보여주는 동시에 반드시 그러한 희망찬 사회가 오리라는 신념을 표현한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이 《심청전》을 비롯한 고전작품을 사랑하는 리유는 그속에 자기들의 슬픔과 기쁨, 희망이 담겨져있기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룡궁이나 왕궁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을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하여 꿈으로 처리한것은 고전을 다루는데 있어서 좌경적편향이라고 지적하시고 인민들의 지향과 념원을 꺾어버린 이 연극을 인민들이 보면 《심청전》이라고 하지 않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밖에도 연극에서 비애를 너무 강조하지 말데 대하여서와 공양미 300석문제가 아니라 심청의 효성에 중점을 둘데 대하여 그리고 같은 계급적처지에 있는 배사공들이 심청에게 횡포하게 노는것으로 하지 말데 대한 문제 등 고전을 취급하는데서 견지하여야 할 일련의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리단은 그이의 비범한 예지와 령도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우리 민족예술의 창창한 앞날에 대하여 그려보게 되였다.

그후 리단은 시립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리순신장군》에서 리순신역을 맡아 출연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연극을 보시고 못내 기뻐하시며 공연성과를 축하해주시고 리순신역을 훌륭히 수행한 그에게 해방후 처음 공화국에서 제정된 공로메달을 수여하도록 은정깊은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리단은 벅차오르는 감격과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주역으로 출연하여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리단은 창조적열정에 넘쳐 연극 《향도》(승강기 지키는 늙은 로동자역), 《시집가는 날》(맹진사역), 《원동력》(덕극역), 《새로운 모습》(산업국장역) 등 장막극으로부터 소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작품을 창조하여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선 인민들의 힘찬 투쟁을 고무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미제가 일으킨 엄혹한 전쟁시기에도 그의 예술창조활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에 의하여 그는 전선종군길에 올랐다.

1950년 7월 서울에서는 서울해방을 경축하는 예술인들의 예술공연이 진행되였다. 여기에 리단도 종군예술인으로 참가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예술인들을 맞이한 남조선인민들은 수령님에 대한 뜨거운 흠모와 경모의 정을 안고 김일성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리단도 눈물을 흘리였다. 항상 그립던 어머니도 여기 어디 있으리라 생각하니 눈물이 더더욱 흘러내리였다.

서울해방경축공연무대에는 연극 《땅》, 《원동력》, 《리순신장군》, 《그 녀자의 집》, 《조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다채로운 작품들이 올랐다.

어스름한 저녁 리단은 연극 《리순신장군》을 가지고 극장에서 서울의 관중들과 상봉하게 되였다.

극장과 그 주변은 공연을 시작하기 여러 시간 전에 벌써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연이 끝나자 리단을 비롯한 출연자들은 관중들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무대에 나섰다. 그러자 관중들은 더욱 열광적으로 극장이 무너질듯 환호하였다.

리단은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무대 한복판에 나서 말하였다.

《여러분! 오늘의 이 행복 이 기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하여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합시다. 우리모두 전쟁이 승리하는 날까지 끝까지 싸웁시다.》

리단의 웨침에 관중들은 힘찬 함성으로 대답하였다.

이날 리단은 관객들속에 있는 그리운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투쟁의 함성에 자기의 목소리를 합치고있었다.

관객들은 모두 돌아갔으나 어머니는 홀로 극장에 서있었다.

리단은 어머니를 부르며 한달음에 달려가 자나깨나 보고싶던 어머니품에 와락 안겼다.

《어머니,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어머니가 보고싶었습니다.》

《리순신역을 하는 너를 알아보았다. 장하다 장해. 나는 네가 배우가 되겠다는 길을 막았댔지만 장군님은덕에 훌륭한 배우가 되였구나.》

일흔살에 가까운 어머니는 주름진 얼굴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리단에게 전쟁전에 평양방송을 통하여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목소리를 여러번 들었노라고 하는것이였다.

어머니와 아들은 통일되는 날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고 서로 헤여졌다.

연극 《리순신장군》은 인민군대에 탄원한 의용군들앞에서도 공연되였다.

연극은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로 여러번 중단되였으며 장내는 앙양된 투쟁분위기로 고조되였다.

공연이 끝나자 의용군들은 무대우에 뛰여올라와 배우들의 손을 잡고 연극을 보여준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자기들도 왜적을 물리친 선조들처럼 미제와의 싸움에서 용감하겠다고 맹세다지는것이였다.

이를 통하여 리단은 어버이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바대로 예술의 힘이 얼마나 크며 예술인들을 종군길로 세워주신 조치가 얼마나 정당한가를 가슴깊이 느끼였다.

리단은 전쟁시기 극장무대에서만이 아니라 적탄이 우박치는 고지에서도, 포연자욱한 전호가와 행군길에서도 시와 노래소품들로 공연활동을 맹렬히 진행하였다.

리단의 예술창조사업은 전후에 와서 어버이수령님의 구체적인 지도와 따뜻한 보살피심속에서 더욱 활발히 벌어졌다.

번역극 《크레믈리의 종소리》에서 리단이 레닌역을 하였을 때였다.

전후복구건설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수령님께서는 친히 이 연극을 보아주시고 레닌역을 아주 잘하였다는 과분한 평가의 말씀을 주시였다.

전후에 와서 출연한 연극에서 처음으로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리단은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쳐 더 많은 연극창조에 달라붙었다.

연극들인 《강화도》(주인공 장대성역), 《우리를 기다리라》(동해사령관역), 《우리 마을》(부기장역), 《불사조》(주인공 리두성역) 등에 이어 《우리는 행복해요》(당위원장역)를 창조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극 《우리는 행복해요》를 친히 보아주시고 연극을 잘 만들었다고 크게 기뻐하시며 당위원장역을 한 리단을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분에 넘친 평가를 받은 리단은 이날 밤 흥분에 겨워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자기가 출연한 연극을 보아주신것만도 더없는 영광인데 과분한 치하의 말씀까지 주시니 그 고마움을 뭐라고 표현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문득 리단의 머리에는 서울에 계시는 어머니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배우의 직업을 천한것으로 여기고 배우만은 시키지 않겠다던 그 어머니의 아들이 공화국의 품에 안겨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리고 치하의 교시까지 받아안았으니 기쁨이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으며 행복이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으랴.

생각할수록 리단의 가슴은 공화국의 예술인, 위대한 수령의 예술인이 된 긍지와 자부심으로 한껏 부풀어올랐다.

리단의 기쁨과 행복은 끝없이 이어졌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8. 15해방 13돐기념 국가연회때에도 예술창조에서 공로를 세운 리단을 부르시여 리단동무의 건강을 축하하여 잔을 들자고 하시며 손수 축배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시였다.

리단은 크게 한 일도 없는 자기에게 이렇듯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어버이수령님께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뜨거운 격정의 눈물만 흘리고 또 흘리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거듭되는 사랑을 받아안은 리단은 낮과 밤을 이어 예술창조의 날과 날을 보내였다.

1962년 리단은 중국번역극 《네온등밑의 초병》의 연출과 함께 정치지도원역을 맡게 되였다.

아름찬 과제를 맡고 모대기던 어느날 그는 뜻밖에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께서 계시는 집무실로 갔다. 거기에는 벌써 중국문화대표단성원들도 와있었다.

그이께서는 일군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서는 리단을 알아보시고 매우 반가와하시며 자신의 곁에 앉히시고 중국문화대표단과 함께 《네온등밑의 초병》형상문제와 관련하여 토론하자고 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연극을 완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고 은정깊은 동석식사도 마련해주시였으며 기념촬영도 하도록 해주시였다. 그리고는 리단에게 체험세계를 넓히라고 현지에도 가보도록 해주시였다.

집에 돌아온 리단은 이 감격적인 소식을 안해와 자식들에게도 알려주었다.

안해는 펄쩍 놀랐다.

《당신이 정말 어버이수령님과 동석식사도 하고 기념촬영도 하셨단 말이예요?》

안해는 믿어지지 않는듯 한 시선으로 리단을 바라보았다.

《그뿐인줄 아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나를 중국에도 가보도록 해주시였단 말이요.》

《예?!》

안해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시였다.

그후 리단은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번역극 《네온등밑의 초병》을 훌륭히 완성하여 내놓았다.

리단은 연극만이 아니라 예술영화에서도 많은 주역을 담당수행하여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리였다.

예술영화 《량반전》에서 량반역을 훌륭히 수행하여 수령님으로부터 량반역을 한 배우의 연기가 매우 좋다는 평가를 받은 리단은 이어 1964년 예술영화 《인민교원》에서 교장역을 맡아하였다.

리단이 출연한 예술영화에서 성공한 작품으로는 《한 의학자의 길》도 있다.

이 영화는 리단이 애착을 가지고 형상한 영화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담당한 역인 주인공 남호가 자기의 생활경위와는 다르지만 남조선에서 공화국의 품에 안긴 사람이라는 측면에서는 리단자신과 다를바 없었기때문이였다.

공화국에는 해방후 남조선에서 들어온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문화와 민족경제를 발전시키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다.

예술영화 《한 의학자의 길》 1, 2부는 민족적량심을 가지고있으나 《수술칼에는 사상이 없다.》고 하며 모순에 찬 남조선사회를 애써 외면하다가 공화국의 품에 안긴 주인공 최남호가 어버이수령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해빛아래 온갖 낡은 사상잔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인민의 사랑을 받는 참된 과학자, 의학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감명깊게 보여주고있다.

리단은 주인공 남호의 모습에 자기를 비추어보며 만일 자기가 공화국의 품에 안기지 못했더라면 남조선에서 예술 아닌 예술을 하면서 불우한 인생길을 걷게 되였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했기에 리단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이 영화를 보시고 주신 치하의 말씀을 받아안았을 때 너무도 기쁘고 감격하여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아뢰고싶어 편지를 썼다.

《어머니, 저는 오늘 나같이 남조선에 있던 의학자 최남호가 공화국의 품에 안겨 참된 인생길을 걷는 의학자, 인민이 사랑하는 의학자로 성장하는 예술영화 〈한 의학자의 길〉의 주인공역에 출연하여 어버이수령님께 보여드리는 영광을 지니였습니다.

어머니도 이 영화를 보시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리단은 이밖에도 예술영화들인 《백두산이 보인다》(빨찌산정치일군역), 《꽃피는 시절》(주인공역) 등에 출연하여 연기의 특기를 보여주었다.

오랜 기간 배우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고 재능을 발휘한 리단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에 의하여 창작단의 사령관인 연출가로 활동무대를 넓히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독창적으로 밝혀주신 창작단의 사령관-연출가! 이름만 불러도 영예롭고 긍지로우며 자랑스러웠다. 리단은 그 기간 수많은 연극작품들의 연기, 연출을 담당수행하였지만 창작단의 사령관이라는 부름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였다.

리단은 다시 불러보았다.

연출가는 예술창조사업과 제작조직사업, 사상교양사업을 다같이 틀어쥐고 창작단의 모든 성원들을 영화창작에로 이끌어가는 사령관이다.

전투의 승리가 사령관의 령군술에 달려있는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운명은 연출가의 지도예술에 달려있다.

리단은 생각할수록 맡겨진 임무의 중요성을 가슴뿌듯이 느끼게 되였다.

그런데 배우들은 흔히 배우출신의 연출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가 자기 역에 대한 창조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연출가가 연기형상을 앞질러 대주는데로부터 창조성을 발휘할수 없다는것이다. 때문에 배우들은 계발식, 유도적수법으로 배우들을 지도하는 연출가를 좋아한다.

리단은 배우출신이지만 배우들이 좋아하는 연출가였다. 그는 배우와 함께 해당 작품의 생활세계에서 호흡할줄 알았고 임의의 생활정황에 맞게 인물의 성격을 더 잘 살리자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하면서 이끌어주었다. 절대로 배우의 상상을 앞질러 제나름으로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결론하면서 내려먹이지 않았다.

배우들의 특성에 맞게 역인물의 형상적과제에 어울리게 연기가 진행되도록 아주 자연스럽게 이끌어주었으므로 그들은 리단을 무척 좋아하였고 존경하였다.

리단은 이러한 특기를 가지고 1960년대초에 연극 《대하는 흐른다》를 연출한데 뒤이어 《비류강의 노래》, 《돈화의 수림속에서》, 《림진강》, 《진격의 길에서》 등을 원만하게 연출하였다.

하지만 그가 자부하는 연출가로서의 자질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자면 아주 먼거리에 있었다.

연출가로서의 완벽한 자질을 소유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그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연극혁명의 불길속에서 가슴깊이 깨닫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연극연출을 진행하는 과정은 리단에게 있어서 연극세계의 새로운 리정표를 발견한 나날이였고 연출가로서 완전히 새로운 변혁을 가져온 긍지높은 전환의 나날, 성장의 나날이였다.

참으로 이 과정은 리단자신의 인생혁명이 이루어진 뜻깊은 나날이였다.

 

연극혁명의 불길속에 다시 태여난 인생

 

리단이 오랜 세월 굳어질대로 굳어진 낡은 연극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혁명적연극예술인으로 태여나게 된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연극무대에 올리게 된 때부터이다.

돌이켜보면 연극은 가극이나 영화와는 달리 그 력사가 아득한 고대에 시작되여 오랜 세월 예술의 제왕처럼 인식되여왔고 그만큼 연극예술인들의 머리속에 연극에 대한 낡은 관념이 집요하게 자리잡고있었다.

리단의 경우도 다를바 없어 연극무대에서 귀밑머리 희여졌지만 새로운 연극예술의 출로를 찾지 못하고 지난날의 연극울타리에서 맴돌고있었다.

그러던 1978년 뜻깊은 2월 16일 아침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을 파견하시여 인민배우 리단에게 영광스럽게도 혁명연극 《성황당》을 연출할데 대한 과업을 맡겨주시였다.

꿈같은 소식을 받아안은 리단의 가슴은 무어라 말할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설레였다.

(이게 정말인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낡은 연극의 틀에 매달려 별로 한 일도 없이 예순나이를 먹은 나에게 이런 크나큰 신임을 안겨주시다니…)

격정의 파도가 일렁이는 리단의 머리에는 언뜻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1970년대 초 평양연극영화대학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주신 연극혁명에 대한 가르치심의 깊은 뜻이 되새겨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조락의 운명에 처한 연극의 제한성에 대하여 분석하시면서 뜻깊은 교시를 하시였다.

《오늘 연극예술앞에는 지난날의 낡은 틀을 대담하게 마스고 주체시대의 요구에 맞는 새형의 혁명연극을 창조하여야 할 과업이 나서고있습니다.》

리단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모든것이 주체의 요구대로 변모되는 우리 시대에 맞게 연극예술도 새롭게 혁신된다고 생각하니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도 오래동안 낡은 연극에 인박혀온것으로 하여 무엇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리단의 마음속에는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받고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여러번 솟구쳐올랐다. 그것은 리단만이 아닌 연극단예술인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였다.

드디여 연극예술력사에 위대한 전환의 계기를 열어놓은 뜻깊은 날이 왔다.

1972년 11월 7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연극예술인들을 연극혁명의 담당자로 내세우시고 연극혁명에서 나서는 원칙적인 문제들을 밝혀주시기 위하여 친히 극장으로 나오시였다.

얼마나 뵈옵고싶던 경애하는 장군님이신가. 얼마나 기다리던 은혜로운 지도의 손길이였던가.

《만세! … 만세! …》

극장안에서는 감격의 환호성이 오래도록 그칠줄 몰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연극예술인들모두가 모여앉은 그 자리에서 국립연극단이 이룩한 창조적성과와 결함들을 분석총화하여주시고나서 연극혁명에 대하여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사대주의적이며 교조주의적인 연극교육과 낡은 연극에 인박힌 오랜 연극예술인들로 하여 연극무대에 전 세기 연극의 형식주의적인 틀이 남아있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낡은 극작술에 물젖은 희곡작가들이 무대적인 사건, 무대적인 대사를 만들어내는데다가 연극연출가와 배우들이 자기의 틀을 가지고 그것을 더욱 《연극화》하기때문에 연극은 생활의 진실을 잃고 인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연극의 낡은 틀을 마스고 그 운명을 구원하려면 사람들이 극장에 와서 연극을 본다는 인상을 주지 말고 거대한 생활화폭을 그대로 본다는 인상을 주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 순간 리단은 뜨거운것이 가슴가득 차오르는것을 느끼면서 좀 더 일찌기 자각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였다.

시대가 발전하여 위대한 주체시대에 이르렀고 사람들의 사상도 미감도 새로이 변하였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옛 시대가 안겨준 낡은 틀을 가지고 연극을 하려 하였던가.

리단은 영화와 가극의 혁신적성과를 보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고있은 자신들이 암둔하기 그지없게 생각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자책에 잠긴 연극예술인들을 둘러보시며 연극이 낡았다고 하여 예술자체를 없애려고 하거나 연극을 노래이야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연극의 특성을 잘 살리는 방향에서 군중의 심리를 틀어잡을수 있는 기술적인 과제들을 해결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무려 3시간에 걸쳐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받고나니 그이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연극의 모습이 우렷이 떠오르는것만 같았다.

그후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연극예술인들을 만나신 자리에서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혁명연극의 전통으로 살려야 낡은 연극과 명백히 갈라질수 있다고 깨우쳐주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창작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혁명연극의 첫 작품으로 올리도록 하시였다.

비범한 예지로 연극혁명의 밝은 앞길을 가르쳐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의 나날을 돌이켜보는 리단의 가슴속에는 미숙한 자신을 그렇듯 믿으시고 연극혁명의 담당자로 내세워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에 보답할 맹세가 끓어번졌다.

(경애하는 장군님, 연극혁명을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여오신 그 높으신 뜻을 명심하고 주신 과업을 꼭 수행해내겠습니다.)

리단만이 아닌 연극예술인들모두가 비상한 결의를 다지고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우리 시대 혁명연극의 본보기작품으로 무대에 올리는 창조사업에 떨쳐나섰다.

이 시기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모자라는것이 시간이고 재능이였다.

리단이 그렇듯 모대기며 창조의 나날을 보내고있던 어느날이였다.

한없이 자애로운 스승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창조중에 있는 혁명연극을 보아주시기 위하여 극장으로 나오시였다.

낡은 방식으로 연극을 하면 자신부터 극장에 오지 않겠다고 하시던 장군님께서 이렇게 찾아주시였으니 리단은 가슴이 뭉클하여 솟구치는 격정을 누를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환호성을 높이 울리는 연극예술인들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다가 리단을 보시고 친히 건강을 물어보시였다.

이날 저녁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단을 몸가까이 불러앉히시고 연극을 보아주시였다.

리단은 연극의 막이 오르고 자막이 흘러갈 때부터 마지막 막이 내릴 때까지 한순간도 긴장된 마음을 늦추지 못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연극의 막이 내리고 장내에 불이 켜진 다음 오늘 무대에 올린 연극을 보니 그동안 창작가들이 노력을 많이 하였다는것이 알린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를 주시였다.

뜻밖의 과분한 그 말씀에 리단은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는 그를 인자하게 바라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작품을 더 잘 형상하자면 아직 많은 힘을 넣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원작의 종자를 그대로 살리면서 전반적인 생활의 폭을 시대적미감에 맞게 넓히기 위한 방도들을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리단에게 이번에 작품을 맡아가지고 창조하는 과정에 어떤 의견들이 제기되였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작품의 양상문제를 놓고 두가지 의견이 제기되였습니다.》

리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기되였던 문제를 그대로 말씀드리였다.

사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혁명연극 《성황당》 대본을 놓고 연출지도를 하면서 리단이 제일 애를 먹은것은 작품의 양상문제였다.

이 문제를 놓고 리단은 창작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몇번이나 협의와 론쟁을 거듭하여왔다.

원래 문학예술작품에서 양상이란 생활의 본색을 정서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형상의 독특한 색갈을 말하는데 낡고 부정적인것을 웃음으로 폭로비판하는 희극의 한 형태인 풍자극에서는 부정인물만 등장하는것이 특징으로 되고있었다.

이런 기성리론에 비추어 창작가들속에서는 혁명연극 《성황당》을 놓고 긍정인물들의 생활이 풍자극양상에 맞지 않기때문에 양상의 통일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그렇다고 하여 긍정인물인 주인공 돌쇠와 만춘이, 복순이와 그의 어머니를 어떻게 웃음거리대상으로 하겠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였다.

그러나 누구도 옳은 대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리단은 고심하던 끝에 원작이 풍자극인것만큼 작품전반을 풍자적인 양상으로 통일시켜 시종 조소와 야유로 일관시킬 결심을 내리고 배우들에게 매일 한가지씩 우스운 동작을 들고나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부정인물들은 물론 긍정인물인 만춘이까지도 어리무던한 행동을 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리단의 보고를 들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풍자극도 생활의 론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활의 론리를 따르는것은 작품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담보라고 하시면서 풍자극도 생활의 론리에 따라 웃음도 있고 사색도 있게 끌고나가야 한다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혁명연극 《성황당》은 원래 풍자를 목적으로 하여 창작한 작품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 작품은 당시의 시대적조건에서 인민들을 각성시키자고 하니 부득이 풍자극으로 될수 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이 작품에 복순이와 그의 어머니, 만춘을 비롯하여 천대와 멸시에 항거하는 긍정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생활에는 한가닥의 기쁨과 함께 고민도 있고 눈물도 있다, 생활을 무시하고 웃기기만 하면 그 풍자극은 벌써 잘못된것이라고 하시면서 생활이 있고서야 예술이 있는것만큼 양상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생활을 맞출것이 아니라 생활의 진실을 집중적으로 그리기 위하여 양상이라는 형식을 잘 리용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서야 리단은 지난날의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풍자극양상의 작품이니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웃겨야 한다고만 생각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느끼였다.

리단으로 말하면 어릴적부터 화술과 흉내내는 재간을 어지간히 가지고있는 밑천으로 류랑극단을 따라 방랑하다가 신파쟁이라는 비난과 조소를 받으며 천대를 받았고 해방후 어느 한때는 자기의 경지를 개척할 일루의 포부를 안고 세계적인 연극에 대하여 파고들기도 하였던 사람이다.

세계연극사를 더듬어보면 장장 2 400여년의 력사를 가진 희극은 태고적 고대그리스의 도리아에서 처음으로 발생하여 14세기이후 문예부흥기에 이르러 이딸리아, 영국, 에스빠냐, 프랑스, 도이췰란드와 같은 나라들에서 매우 번성하여 세계에 파다하게 퍼졌다. 문예부흥기의 유명한 대표적희극에 대하여 말한다면 영국희곡작가 쉑스피어의 《말괄랭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프랑스의 희곡작가 몰리에르의 《동 쥬앙》, 《수전노》, 《따르뜌프》 등을 들수 있다.

이 고전희극들의 인물관계를 보면 대부분 부정인물과 함께 긍정인물들도 설정하고 긍정에 의한 부정의 극복속에서 부정인물들을 풍자조소하는것이 상례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근대부르죠아연극예술에 들어와서 풍자극은 완전히 부정인물일변도의 풍자적형상에만 치중된 틀에 박힌 형식으로 전변되였다. 이리하여 희극은 오직 풍자적인 부정인물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야유, 조소로 관통되여야 한다는것이 하나의 법칙과도 같은 관례로 굳어지게 되였다.

근대연극예술무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이 고루한 기성관념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비범한 예지에 의하여 깨여져나가고 풍자희극이 사실주의연극예술의 본성에 맞게 자기의 참된 모습을 찾게 되였던것이다.

긍정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혁명연극 《성황당》에서는 풍자적웃음만을 추구할것이 아니라 작품에 반영된 긍정인물들의 생활론리에 따라 풍자적웃음도 있고 정서도 있고 눈물도 있는것으로 진실하게 그려야 한다고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은 동서고금에 없었던 풍자극양상에 대한 새로운 해명으로서 우리 식 연극의 극작술원칙을 독창적으로 밝힌 고전적명제였다.

그리하여 주인공 돌쇠가 슬기로운 지혜로 황지주와 구장을 궁지에 몰아넣을 때에는 통쾌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만춘이와 복순이가 행복한 앞날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아름다운 정서를 느끼게 하며 복순이가 군수놈의 집으로 끌려가게 된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등 풍자적인것과 정서적인것을 조화롭게 결합한 독특한 양상의 《성황당》식혁명연극을 창조할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였던것이다.

리단은 그이의 빛나는 예지에 깊이 탄복하여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는 새형의 연극을 창조하게 된 기쁨으로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뜻깊은 자리에서 인물의 대사와 화술에 대해서도 많은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연극의 기본형상수단은 인물의 대사 다시말하여 말이라고 하시면서 대사조직에 의하여 성격발전이 이루어지고 종자의 사상도 밝혀지므로 연극에서는 무엇보다도 대사를 기본으로 하고 대사를 잘 조직하여야 감흥도 불러일으킬수 있다고 하시면서 부정인물들이 주먹싸움을 하는 장면같은데서도 말싸움을 하게 하라고 이르시였다.

그 순간 리단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에 얼마나 깊은 뜻이 담겨져있으며 자기가 얼마나 낡은 관념에 깊이 빠져있는가 하는것을 깨달았다.

리단은 지어 연극의 기본형상수단인 대사도 행동으로 보고 대사보다 행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침묵은 황금》이라고까지 하던 지난날의 낡은 연극리론에 사로잡혀 인물들이 말보다 행동을 많이 하게 하였고 부정인물들의 싸움장면 같은데서도 주로 주먹질을 하게 하였다. 말이 없이 주먹싸움을 하는것으로 관중의 웃음을 자아내려고 하면서 그것을 그 무슨 《연출기교》로 여기였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연극의 기본형상수단이 말이라는 원칙으로부터 출발하시여 배우들이 무선마이크를 쓰면 일부러 큰소리를 내여 대사형상을 과장하는 편향이 없어질수 있다고 가르치시였다.

사실 그 시기에 무대예술에서는 조명설비를 비롯하여 현대과학기술발전의 성과를 많이 도입하고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무선마이크를 연극무대에 리용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나니 배우들이 관중에게 대사를 전달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무대앞에 있는 마이크로 다가서거나 그렇게 할수 없는 경우에는 목소리를 과장하여 크게 소리쳐야 하는 진부한 대사형상방법을 개선할수 없었다.

리단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무선마이크를 쓰면 대사형상에서 신파를 없애고 내면독백과 귀속말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할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이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무엇인가 생각하시다가 연극이 어딘지 모르게 정서가 부족한것 같다고 나직이 뇌이시며 연출가인 리단에게 제일 좋기는 음악을 도입하는 문제인데 생각이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리단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 음악을 도입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였다.

그의 말을 들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연극을 시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려면 음악을 배합하여야 한다고,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경우에는 그의 감정세계를 노래로 보여주고있는데 연극에서도 음악을 쓰면 정서와 감정을 더 불러일으킬수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러워질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리단은 불시에 터져나오는 탄사를 금치 못했다.

무의미한 웃음을 자아내던 풍자극의 장면들에 음악의 깊은 정서를 깔아줄 때 얼마나 사람들의 심중을 울려줄것인가!

생각만 하여도 가슴벅찼다. 물론 연극에 음악을 배합한 력사는 매우 오래다. 그러나 이전시기 연극에 음악을 도입한것은 등장인물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자연정경묘사나 분위기를 위한 관현악토막을 장면들에 삽입한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와 같이 인물들의 감정과 미묘한 내면심리, 극적관계에 맞는 선률을 창작하여 극흐름의 공간을 극적정서로 충만되게 하는 특색있는 연극의 음악적형상방도를 천명하시였던것이다.

이것은 연극적인것만 노리면서 음악을 차요시하거나 어느 정도 분위기조성과 효과를 위하여 리용하던것으로부터 음악을 대사와 함께 연극의 기본형상수단으로 전환시켜 연극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하나의 사변이였다.

계속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흐름식립체미술을 연극의 특성에 맞게 도입하여 현실을 그대로 보는것처럼 펼쳐보일데 대한 문제 등 새로운 혁명연극창조와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세심히 일깨워주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혁명연극의 완전무결한 면모를 펼쳐주시고 극장을 나서신것은 밤이 퍽 깊어서였다.

이로부터 얼마후인 1978년 8월 31일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다가오는 공화국창건 30돐 기념행사를 앞두고 수많은 사업을 돌보셔야 하시였지만 연극을 보아주시기 위하여 극장으로 친히 나오시였다.

밤 10시 혁명연극 《성황당》의 막이 올랐다.

무대에서는 지혜있는 한 머슴군총각에 의하여 무지하던 한 녀인이 눈을 뜨고 사리사욕때문에 서로 앞을 다투어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굴던자들이 멸망하는 불후의 고전적명작의 철학적내용이 펼쳐지고있었다. 연극이 진행되는것이 아니라 생활이 그대로 펼쳐지고있었다.

사람들도 1930년대의 사람들이고 자연환경도 그때의 그대로였다. 등장인물들은 물레방아의 찌꿍거리는 소리며 강냉이따는 소리까지 그대로 들리는 생동한 자연환경속에서 생활에서처럼 울고웃으며 말하고 행동하였다.

아름다운 청춘남녀의 행복을 둘러싸고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고통과 희망, 지혜와 투쟁의 력사가 탐욕한자들의 허위와 위선, 시기와 질투, 모해와 멸망의 련속과정과 교차되면서 생활의 론리를 따라 흘러갔다.

거기에 연주와 완전히 융합된 음악이 생활의 정서, 생활의 극, 생활의 흐름을 잘 안받침하여주었고 흐름식립체무대미술이 그 생활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펼쳐보여주었다.

이렇게 하여 반세기전 위대한 수령님께서 인민들에 대한 혁명교양을 위하여 손수 쓰시여 거대한 생활력을 나타낸 불후의 고전적명작이 새시대 연극의 본보기로 다시금 무대에 올랐다.

연극을 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기쁨어린 음성으로 연극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시고 창조집단에 감사를 주시였다.

순간 장내에는 우렁찬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오르고 감격의 파도가 세차게 일어번지였다.

리단의 가슴속에는 연극혁명을 빛나는 승리에로 이끌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정이 한가득 차올랐다.

그후 리단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지도를 받으며 《성황당》식혁명연극 《혈분만국회》의 연출을 맡아 수행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불후의 고전적명작 《혈분만국회》를 각색한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를 무대에 올릴데 대한 영예로운 과업을 받은것은 1982년 11월이였다.

이때부터 창조집단은 낮과 밤이 따로없는 전투를 벌리였다.

1차시연회에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연극을 잘 만들었으나 전반부에 아직도 결함이 많다고 하시면서 그 원인에 대하여 분석해주시고 해결방도를 명확히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인공의 성격발전과 시대적제한성을 구체적인 생활속에서 잘 보여주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생활축적이 없이 후반부까지 끌고오기때문에 이야기가 동강이 나고 인상에 남는것이 없으며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고 지적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주인공 리준의 성격발전과정을 잘 보여주어야 그가 만국평화회의장에서 배를 가르는 장면이 인상깊게 안겨올수 있다고 하시면서 주인공성격의 력사적제한성을 똑똑히 밝혀주며 리준과 안해와의 관계도 잘 보여주는것이 좋겠다고 명백히 가르쳐주시였다.

리단은 장군님의 비범한 통찰력과 명철하신 판단력에 감동되여 왜 자신이 그 문제를 보지 못하였는지 죄송한 마음에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력사적인물의 성격을 그의 제한성에 맞게 형상할데 대한 문제는 그이께서 혁명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비롯하여 벌써 여러 작품지도에서 가르치심을 주시였지만 이번처럼 그것을 전면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오랜 시간 상세히 말씀하신적은 없었다.

이 고귀한 가르치심을 받게 됨으로써 리단은 과거력사를 취급하는 일반력사물작품과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취급하는 작품의 계선을 명백히 알게 되였으며 사소한 편향도 없이 기념비적명작으로 완성할수 있었다.

그는 무대생활 50년동안에도 배우지 못했던것을 한순간에 다 깨달은것만 같았다.

그후 2차시연회에 나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작품이 거둔 사상예술적성과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는 세계연극계에 내놓고 당당히 자랑할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리단은 격동된 심정을 누를수 없어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그이께서는 이날 뜻깊은 기념사진을 찍으시면서 풍부한 무대경험은 오랜 기간의 예술활동과정에 이루어지므로 경험있는 배우들을 아껴야 한다고 하시면서 연극무대에서 로년기를 맞이한 오랜 배우들을 친히 몸가까이에 앉혀주시였다.

그 은정깊은 자리에 앉게 된 리단은 그만 때와 장소도 생각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흘렸다.

그는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가까스로 삼키며 심장의 목소리로 웨쳤다.

(아, 김정일장군님! 김정일장군님은 세계적인 문예사상의 거장이시고 예술의 천재이시며 우리 예술인들의 자애로운 스승이십니다.

장군님의 따사로운 손길아래 탄생한 혁명연극과 함께 우리들은 새롭게 태여났거니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혁명연극무대를 굳건히 지켜나가겠습니다.)

 

어머니를 불러, 통일을 불러

 

리단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곧 조국의 통일이기도 하였다.

남녘에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찢기는 민족분렬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더 통절히 체험하면서 자기가 하는 예술사업은 곧 조국통일과 잇닿아있는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온 그였다.

자기를 낳아 키워주었을뿐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아들을 깊이 리해해주고 보호해주고 떠밀어준 어머니를 리단은 한생토록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았다.

해방전 어느날에 있은 일이다.

리단은 인기있는 한 배우와 마주앉아 연기상 제기되는 문제들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론쟁을 하였었다.

한참 갑론을박하던중 상대방은 점점 약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감정상론리를 보아도 리단의 주장이 자기보다 옳고 우월하였으므로 말문이 막혔던것이다.

그 배우는 종시 리성을 잃고 악에 받쳐 손에 잡히는 단단한 물건을 리단에게 던지였는데 그것이 면바로 리단의 머리를 쳤다.

다른 사람 같으면 맞받아치며 싸움질을 하겠으나 리단은 상처입은 머리를 잠간 만져보고는 상대방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원으로 갔다.

그날 저녁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몹시 속이 아팠으나 아들의 순진성에 감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진성에 내재되여있는 완강한 자기 주견, 인내력, 식을줄 모르는 탐구열이 리해되였고 그것이 무척 귀중하고 사랑스럽게 생각되였다. 어머니는 한사코 반대해나섰던 아들의 희망을 찬성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30대에 과부로 된 어머니는 딸 셋을 시집보내고 외아들인 리단을 굶기지 않고 키우려고 삯빨래, 삯바느질 등 험하고 구질구질한 일을 가리지 않고 하였다. 손끝에 피가 나도록 일해 리단을 남만큼 먹이고 입혀서 무대에 내세우고싶었던것이다.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였으면 뒤뜰에 심은 감나무에서 따들인 몇알 안되는 감을 자기는 한알도 입에 대보지도 않고 곱게 곶감으로 만들어두었다가 지방공연에서 돌아오면 아들에게 내놓군 하였겠는가. 그런가 하면 어머니는 아들이 겨울동안 지방공연으로 나가있는 기간에는 춥게 지내고있을 아들을 생각하며 불을 때지 않고 자기도 찬방에서 그냥 지내군 하였다.

어머니는 이렇게 아들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쳤던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했듯이 리단 역시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리단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공화국에 들어온 이후 더욱 깊어만 갔다. 어느 하루한시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잊은적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대해같은 사랑과 배려를 받아안았을 때나 새로운 공연성과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기쁨을 드렸을 때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면 먼저 생각한것이 서울에 있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못 잊어 리단은 방송으로도 어머니를 불렀고 비록 보내지는 못하면서도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편지에 쏟아놓기도 하였다.

리단의 집에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썼던 편지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중 1965년에 리단이 가장 인상깊게 썼던 편지 하나만을 다시 펼쳐보기로 하자.

세월은 수십년 흘러 편지종이는 누렇게 바랬지만 또박또박 박아쓴 글씨만은 방금 쓴듯 또렷하게 새겨져있다.

《어머니!

세월은 흘러 어머님을 뵈온지 15년이 됩니다.

어머님께서는 그동안 안녕하신지요.

어머니!

혜경이가 벌써 열여덟살이 되였습니다. 올봄에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연극영화대학입학시험을 이미 쳤습니다.

둘째딸 남향이는 계속 최우등으로 소학교 3학년에로 올라가게 되였는데 지난해에는 저와 함께 〈인민교원〉이라는 영화에도 나갔답니다.

셋째딸 남희는 여덟살인데 벌써부터 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릅니다.

그리고 아들 명구는 올해 다섯살인데 아주 건강합니다.

어머니!

어머님 손에 가닿을지도 모를 이 편지에 어떻게 그동안 쌓이고쌓인 긴 사연을 다 말씀드리겠습니까.

다만 어머님이 예순나이까지 애지중지 키우던 정훈이가 지금은 공화국의 따뜻한 품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예술인의 최고영예인 인민배우로 몸성히 행복하게 일 잘하고있다는것만이라도 전해드리고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몇자 적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님께서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아들 하나 바라고 사시던 어머님이 아들의 소식조차 들을 길 없어 얼마나 가슴을 태우시며 조국이 통일될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셨겠습니까.

이 아들도 지난 15년간 어떻게 하면 저의 소식이라도 전해드릴가 하는 생각이 가슴에서 떠난 날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저의 머리에 흰 머리칼이 하나하나 늘어나는것을 발견할 때마다 저의 가슴은 몹시 쓰립니다.

그것은 저의 나이가 많아진다는것때문이 아니라 일흔이 이미 넘으시고 팔십고개를 몇해 앞둔 어머님을 생각하기때문입니다.

어머니! …》

이 편지는 어느 한 계기에 판문점에 들어가기 전에 쓴것이다.

리단은 판문점에 가면 남조선기자들도 올것이라 생각하고 한가닥 희망으로 썼던것이다.

다행히도 기자들중 리단을 알아보는 기자가 있었다.

기자는 리단을 보자 해방후 번역극 《폭풍의 거리》에서 주역을 맡아하지 않았는가고 묻는것이였다.

리단은 15년전 남조선에서 공연한 연극의 배우를 잊지 않고 인사를 하는것이 고마웠고 한편 반갑기도 하였다.

기자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MP》 한놈이 다가오더니 올빼미같은 눈을 흘기고 돌아가는것이였다.

기자는 위압을 느꼈는지 리단과 더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다.

리단은 기자와 헤여질무렵 외투주머니에서 어머니에게 보낼 편지를 주먹안에 꼭 쥐였다.

이때 《MP》가 또 남조선기자가 있는 곳으로 오더니 위협의 눈초리를 보내며 물러가라는것이였다.

리단은 가슴에 불덩어리가 솟구쳐올랐다.

이 털부숭이 미국놈때문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전할 마지막길마저 끊어진것이다.

리단은 손을 으스러지게 그러쥐였다.

돌아오는 자동차안에서 리단은 전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에 품은채 소리없이 웨쳤다.

(이 고통은 나만이 겪는것이 아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북남으로 헤여져 살고있지 않는가.

서로 만나고싶은 북남인민의 간절한 통일의 념원, 지금은 비록 미국놈들이 이 념원의 실현을 가로막고있지만 멀지 않아 네놈들은 이 땅에서 쫓겨날것이며 조국은 통일될것이다.)

그리고는 언제나 마음속에 안고 산 어머니를 떠올리며 간절히 말하였다.

《어머니, 오래오래 살아계십시오. 우리는 꼭 만날것입니다. 15년전에는 어머니가 국도극장에서 제가 분장한 리순신장군을 보셨지만 이제 머지않아 제가 분장한 조선인민의 영웅적형상을 보실것입니다.》라고…

리단이 어머니를 그리며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높았는가 하는것은 그가 매일매일 쓴 일기에 력력히 나타나있다.

 

××년 10월 19일(목)

오늘 예술영화 《불사조》에서 주인공 리두성역을 성과적으로 끝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강철같이 단련된 항일빨찌산 리두성.

수령님 따르는 신념과 의지, 의지가 굳건할 때 생명도 강하다.

문득 남조선에서 온갖 간난신고를 다 겪고계실 어머니생각이 간절해진다.

오매불망 나를 생각하고계실 어머니!

강한 의지를 가지시고 오래오래 사십시오.

어머니가 나를 만날 때까지 살아계시기를 바라옵니다.

윤숙아,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려라. 너도 40이 되였구나. 18살 처녀로 성북동고개를 넘어가고 넘어오던 너, 남매가 단 둘이 싸우다 울고웃던 성북동, 쓰러져가는 뒤뜰의 감나무집을 잊을수 없구나.

전쟁때 만난것도 어제같은데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내가 오늘 출연한 리두성빨찌산처럼 굳센 의지로 살며 싸운다면 조국통일을 맞이하고 한집안이 다시 모여 단란하게 살것이다.

나는 그날을 믿는다.

 

××년 8월 10일(금)

대학을 졸업한 아들의 모습을 보느라니 어쩐지 어머니생각이 절로 난다.

어머니가 손자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대견해하셨을가.

나를 그렇게 공부시키려고 삯바느질, 삯빨래를 하였어도 끝내 중학교도 못 졸업시킨 어머니, 림종의 시각까지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어두운 남녘땅에서 숨을 거두었을 어머니, 나를 위해 일생 혼자 살아온 불쌍한 어머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여지는듯 아프다.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맡겨진 예술창조사업에 심혼을 바치리라. 초불처럼 지혜와 열정을 깡그리 바치리라.

그러면 조국통일은 앞당겨지겠지…

 

××년 1월 2일(수)

밤새 새해의 첫눈이 내렸다. 흰눈은 펑펑 소리없이…

흰눈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충직하게 받들자. 그 길에서만 조국통일을 이룩할수 있다.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 내 쓰러지면 어떠리.

조국통일의 광장에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실 그날을 위해 내 비록 늙은 몸이지만 삶의 마지막순간까지 계속 혁명연극창조에 돌진하리라. 돌진!

리단이 이렇듯 어머니를 못 잊어 하는 마음은 곧 조국통일에 대한 갈망이였으며 예술창조에 바친 그의 지혜와 열정은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에 바친 애국적헌신이였다.

리단은 1965년 3월 5일부 신문에 실린 자기의 글 《남해가의 동백꽃을 두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째서 조국은 아직 통일되지 못하였으며 남조선인민들은 봄마저 빼앗기고 이날에 차디찬 서리만을 머금어야 하는가!

사고가 바르고 민족의 운명에 외면을 하지 않았다면 이제 더는 그 누구도 감히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고있을수 없을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국통일을 말로만 하고 실지로 발벗고 나서지 않는다면 조국은 통일될수 없을것이며 분렬된 조국이 후대에게 넘겨진다면 통일문제는 더욱 어려워질것이며 남조선인민들의 불행과 고통은 더욱 험악해질것이다.》

신문에 실리는 짤막한 글에도 리단은 이처럼 통일열에 불타는 자기 심장의 맥박을 심어나갔다.

돌이켜보면 리단은 조국통일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였고 자기 사업에서 성과가 이루어질 때마다 어머니를 그리며 통일이 앞당겨지는듯 한 기쁨에 물젖군 하였다.

그러던 리단은 우리측의 주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으로 하여 이루어진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차로 서울에 갔었다.

그는 자나깨나 그립고 보고싶던 가족, 친척들과 뜻깊은 상봉을 하였다. 서로 얼싸안고 볼을 비비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서로 지나온 생활을 이야기하였다.

리단은 가족, 친척들에게 자기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 인민배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시계와 경애하는 장군님의 표창장을 비롯한 많은 국가수훈과 선물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면서 가지고 온 명예증서와 훈장, 메달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가족, 친척들은 놀라움과 부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날 리단은 어머니가 살아 아들의 장한 모습을 보았으면 얼마나 기뻐하였으랴 하는 생각에 걷잡을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수 없었다.

리단은 헤여지는 가족, 친척들에게 조국통일을 위해 싸우고 더 많은 일을 하여 영원히 갈라지지 않고 살자고 신신당부하였다.

이 뜻을 안고 리단은 경애하는 장군님을 충직하게 받들어 주체예술의 화원을 꽃피우는 길에 한몸바치다가 그처럼 념원하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채 2004년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값높은 생을 살아온 재능있는 예술가 리단을 두고 몹시 애석해하시며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였다.

애국충신들이 안장된 다박솔 푸르른 신미리 애국렬사릉의 묘비에 새겨진 리단의 모습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대해같은 사랑이 있었기에 조선의 예술인으로서의 빛나는 삶을 누릴수 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이전페지차례다음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