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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조령출(작가)

           

                      • 1913년 11월 10일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출생.

                      • 해방후 서울에서 연극동맹부위원장으로 사업.

                      • 1948년 공화국의 품에 안겨 국립예술극장과 조선작가동맹 작가, 국립영화문학창작사 주필,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문학창작사 작가로 사업.

                      • 1993년 5월 8일 사망.

                      김일성상계관인.

                                                                      

 

 

누구나 원하는바이지만 살아있을 때 세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줌의 흙으로 된 후에도 사람들의 가슴속에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기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그것은 길다고 볼수 없는 일생을 훌륭하게 산 사람에게만 차례지는 특혜이며 력사의 공정한 평가이다.

하다면 그 행운아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여기에 그 물음에 대답을 주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그가 바로 생존시에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대해같은 은정속에 행복한 삶을 마음껏 누렸으며 사후에도 인민의 추억속에 훌륭한 노래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저명한 작가 조령출이다.

 

《집없는 천사》의 노래

 

하늘을 지붕삼고 떠도는 신세

동서남북 바람결에 갈 곳이 없어

찬이슬 잔디우에 쓰러져 울면

어머님의 옛사랑이 다시 그립다

 

비오고 바람부는 하늘밑에서

팔베개로 꿈을 꾸는 집없는 천사

운다고 옛사랑이 다시 올소냐

설음맺힌 가슴에도 희망은 있다

 

이것은 조령출이 해방전에 지은 노래로서 황량한 들판을 정처없이 헤매는 가련한 방랑자의 설음, 나라잃은 망국민의 슬픔을 담은 가요이다.

동서남북 그 어디를 둘러봐도 갈 곳이 없어 아득히 흘러가버린 어머니의 옛사랑을 새삼스럽게 그리며 목메여 우는 그, 밝은 해빛대신 찬비를 뿌려주는 그 하늘밑에서도 팔베개를 벤채 천사의 꿈을 꾸는 애젊은 방랑자…

그 천사는 작가의 상상속에 그려진 가요의 서정적주인공이 아니라 다름아닌 그 시절 조령출자신의 모습이였다.

하기에 그는 수기에서 해방전 자신의 신세를 가리켜 《집없는 천사》였다고 고백하였다.

작가 조령출은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구름이 더욱 짙어가던 1913년에 태여났다.

령출이란 이름은 원래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아명이였다. 조령출의 고향에는 령인산이라는 산이 있었는데 그는 이 산기슭의 수수한 초가집에서 빈손뿐인 부모의 눈물어린 축복을 받으며 출생하였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는 아들의 어릴적이름을 령인산의 첫자를 따서 령출이라 불렀던것이다.

조령출의 본래이름은 조명암이였다.

그러나 령인산기슭에서 어머니가 애정을 담아 조용히 부르던 아명이 작가의 진짜이름으로 되였다.

조령출이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1958년 위대한 수령님께서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주석의 초청에 의하여 정부대표단을 인솔하고 중국을 친선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교육문화성 예술국장이였던 조령출은 조선예술단 대표로 위대한 수령님의 중국방문을 수행하는 영광을 지니였었다.

어느날 그는 예술단지휘성원들과 함께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를 만났었다.

담화도중에 주은래총리가 문득 작가더러 이름을 어떻게 쓰는가고 물었다.

조령출은 《나라 조》자에 《신령스러울 령》자, 《날 출》자라고 대답했다.

주은래총리는 《그거 참 좋은 이름이요!》 하고 말했다.

옆에 있던 모택동주석도 동감인듯 빙그레 웃었다.

사람이란 이름에 따라간다고 그 범상치 않은 이름이 그를 력사의 행운아로 만들었던가?

아니, 다음의 이야기들이 결코 그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있다.

조령출의 부친은 마을에서 자그마한 약방을 차려놓고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가는 한미한 고려의사였다. 그는 한시읊기를 몹시 즐기였고 문장이 통하는 친지들과 함께 자주 시를 짓군 하였다.

조령출은 4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1921년부터 1년 반동안 한문서당과 다름없는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말았다. 불행하게도 부친을 잃었던것이다.

화불단행이라고 미래의 작가는 얼마후 어머니와도 생리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떻게 하나 아들을 공부시키려는 극진한 모성애는 어머니로 하여금 어린 자식을 남의 집에 양자로 들여보내는 모진 결단을 내리게 하였던것이다.

이것은 유년시절에 작가가 겪어야 했던 피할수 없는 숙명이였다.

불우한 그 시절에 우리 인민이 강요당하는 민족적멸시와 울분을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그는 자기의 가슴에서 고패치는 심정을 그대로 담을수 있는 문학수업에 뜻을 두게 되였다.

고학의 어려운 길을 걸어온 조령출은 그후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일본 와세다대학 프랑스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당시 그는 쉑스피어와 같은 유명한 극작가가 되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식민지노예살이를 강요당하던 그 시대에 그의 이러한 희망은 이루어질수 없었다.

그는 학비를 마련할 방책으로 잡지사에 가요들을 투고하기 시작하였다.

재능있는 조령출이였지만 그는 불우한 문인이였다. 인재도 때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는것처럼 나라잃은 문필가로서 그의 인생은 빛이 없었다.

작가는 창작의 첫걸음부터 시련의 광풍을 힘들게 헤쳐나가야 하였다.

1933년 그의 처녀작 《서울노래》가 신춘문예 1등당선작품으로 발표되였다.

 

한양성 옛 터전 옛날이 그리워라

무궁화가지마다 꽃잎이 집니다

 

한강물 푸른 줄기 오백년

앞남산 봉화불 꺼진지 오랩니다

 

잎트는 삼천리 꽃피는 삼천리

아시아의 바람아 서울의 잠을 깨라

 

하지만 이 노래는 불온하다는 리유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 인민의 높아가는 반일기세에 겁을 먹은 일제는 인민들의 투쟁기세를 막아보려고 그 어느때보다도 발광적으로 날뛰면서 탄압의 도수를 높이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할수록 그에 항거하는 우리 인민의 반일기운은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과 더불어 날로 높아가고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창작된 가사 《서울노래》는 무궁화가지마다 꽃잎이 지고 한강물 푸른 줄기에 《오백년의 꿈》이 잠든 조선을 깨우치면서 《잎트는 삼천리》, 《꽃피는 삼천리》를 부르고있었다. 가사는 비록 지금은 강대하던 옛 모습을 찾아볼수 없고 망국의 울분으로 몸부림치는 삼천리강산이지만 잎이 트고 꽃이 피는 새봄은 기어이 오고야말리라는 희망을 안겨주고있다.

물론 《서울노래》는 그러한 정서적지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는 못하였지만 마지막결구에서 《아시아의 바람아 서울의 잠을 깨라》고 비유적표현에 담았다.

작가는 후날 이 표현에 대하여 《당시 아시아의 대륙에 파동쳐오던 혁명의 풍운, 백두산에서 전하여오던 전설같은 이야기를 이 노래에 〈아시아의 바람〉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밖에 담을수 없었다.》 라고 회고하였다.

이 구절이 문제시되여 가사가 음판으로 나오자 일제는 불온하다고 하면서 금곡령을 내리고 모두 압수하여 깨버리는 망동을 부렸던것이다.

작가는 너무 분통해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때려눕힌자도 강하지만 다시 일어난 사람은 그보다 더 강한 법이다.

조령출은 그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가사창작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작가는 침투력이 강한 가요에 나라잃은 설음에 가슴을 치는 겨레의 운명과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담아보려는 욕망으로 모대기였다.

조령출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어떻게 담겠는가 하는 창작실천상의 문제에서 중요한 원천을 민요의 보물고에서 찾고 민요적인 바탕을 살려 민족적정서를 구현하였다. 이것은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고저 애쓴 측면에서 다른 시인들이 따를수 없는 특출한 점이였다.

고조선시기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민요로부터 삼국시기 고구려의 《동동》, 백제의 《정읍사》, 신라의 《서동요》, 고려시기의 다양한 민요들, 조선봉건왕조시기 각 도의 풍부한 향토민요들, 20세기 초엽 신민요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우리 민요의 유산은 민족시가의 풍부한 보물고였다.

그는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환경속에서도 명승지들에 대한 노래를 지어 조선이야말로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긍지높이 웨쳤으며 조선민족의 넋과 순결성 그리고 민족적인 자부심을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많은 작품들에는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신음하는 인민들의 생활처지, 빼앗긴 조국과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노예의 쇠사슬을 하루빨리 끊어버리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려는 희망과 락관의 감정이 맥맥히 흐르고있다.

철들기 전부터 어머니와 리별하고 이붓아버지의 슬하에서 응석 한번 부려보지 못한채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청년시절에는 학비에 목이 매여 고역의 설음속에 눈물을 흘려야 하였던 작가의 쓰라린 체험과 망국민의 처지는 그로 하여금 민족수난기 우리 인민의 눈물겨운 처지를 가요에 담게 하였다.

결국 작가가 쓴 수많은 신민요가사들과 대중가요가사들은 겨레의 울분과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반항의 감정이 짙은 서정으로 충만되여있다.

민족수난기 조령출의 처지는 그의 노래에도 있듯이 따뜻한 정 흘러넘치는 가정이 없고 마음편히 지낼수 있는 집마저 가지지 못한 방랑자의 신세였다.

가요 《울며 헤진 부산항》도 이러한 심정을 담은 노래들중의 하나이다.

후날 작가는 그 가요에 대해 회고하면서 《내 일찍 집없는 천사처럼 남의 나라에 가서 고학을 하며 현해탄을 오고갈 때 보았던 부산항은 리별의 항구, 슬픔의 항구였다.》고 말하였다. 조상의 뼈가 묻히고 송아지동무들과 뛰놀던 추억이 생생한 정든 고향과의 리별, 모진 고생속에서도 정을 나누며 사이좋게 살던 마을사람들과의 리별…

작가가 일본으로 고학을 떠나던 때에 겪은 자기의 체험을 토대로 하여 쓴 《울며 헤진 부산항》은 당시는 물론이고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이민을 가는 남녘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로 되였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생리별당한 집없는 방랑아, 그러나 천사의 넋과 심장을 지녔던 작가 조령출.

민족수난기 그의 가사들은 그대로 그의 인생이였고 그의 아픔이였으며 그의 설음이였다. 그리고 두번다시 겪고싶지 않은 그 체험은 당시 진정한 삶의 보금자리-조국을 잃은 우리 인민모두의 심정이였다.

《집없는 천사》,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먹구름 드리운 하늘밑에서 차거운 대지우를 헤매는 작가의 측은한 모습이 방불하게 안겨온다.

과연 집없는 천사가 그의 숙명이였던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그의탓이 아니였다.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긴탓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집은 아름다운 꿈과 자유로운 넋이 나래치는 맑고 푸른 하늘이여야 했고 따뜻한 대지여야 했으며 자기의 노래가 불리워지고 자기의 연극들로 하여 초만원을 이룬 화려한 극장이여야 했다. 하지만 봄이 없는 땅, 남에게 빼앗긴 땅은 한 아들의 소박한 꿈을 꽃피워줄수 없었다.

 

운명의 선택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따뜻한 보금자리를 꿈꾸던 조령출의 이슬맺힌 눈에 조국해방의 밝은 빛이 비쳐들었다.

허나 조국해방의 그 밝은 빛이 천사의 오랜 꿈을 깨우기에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했다.

아래에 조령출이 그때를 회고하여 쓴 수기의 일부를 그대로 적는다.

1945년 8월 15일 일제통치로부터 조선은 해방되였다.

하건만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어리벙벙하여 《해방이요, 해방이요.》, 《왜놈들이 그처럼 기승을 부리더니 망했소.》 하며 서로 뜨겁게 손을 잡고 말할뿐이였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그 악독한 총칼의 폭압밑에서 신음하다가 해방된 그 환희의 감정을 폭발시킬 계기가 없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겨레의 통곡이 사무친 이 하늘아래 3. 1만세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왜놈의 총칼앞에 피를 흘린 그 원한을 풀려 종로 한복판거리에서 조선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웨쳐 불러야 하겠는데 그 계기가 없어 부르고싶던 그 만세소리가 터져오르지 않았다.

1926년 주권의 상징으로나마 생존해있던 조선봉건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죽음은 망국의 비통한 감정을 우리 겨레의 가슴에 일시에 폭발시켰다. 이해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마지막 창덕궁을 떠나는 시각 참을수 없었던 망국의 비통한 울음이 일시에 터지고 그것은 6. 10만세시위투쟁으로 서울에서 왜놈의 총칼을 헤치고 터져오르고 애국적반일투쟁의 불길로 번져나갔다.

허나 오늘날 일본제국주의의 그 악독한 식민지통치기반으로부터 해방된 서울거리에서 어째서 《조선해방 만세!》, 《조선독립 만세!》의 환호성이 전인민적인 우렁찬 함성으로 터져오르지 못하고있는것인가.

만세의 폭풍이 일어날 계기가 아직 이르지 않은것으로 생각되였다.

나의 마음속공허는 스스로 마음깊이 흠모하여온 《나라님》을 기다리였다.

그렇다. 항일의 20성상 오직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항일혁명군을 이끄시고 백두의 눈보라를 헤치시며 일제 백만대군과 맞서 싸우시고 평양으로 개선하시였다는 소식!

더우기 장군님께서 기차로 서울에 오신다는 소식은 나의 마음도 서울시민들의 마음도 격동시켰다.

나는 문인들, 무대예술인들과 함께 서울역으로 나아갔다. 역전광장은 김일성장군님을 환영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로 흥성거리였다. 붉은 기발과 함께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영웅이신 김일성장군 만세!》 라고 쓴 프랑카드가 나붓기고 흠모로 기다리며 뵈옵고싶은 마음이 절절히 고동치였다.

목청이 터지도록 만세를 웨치고 또 웨쳐도 성차지 않을 그 감격은 작가의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서도 감히 형용할수 없을만큼 벅찬것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해방의 환희란 곧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게다짝에 짓이겨졌던 삼천리금수강산을 찾아주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열화같은 흠모의 분출이였다.

박세영, 리용악을 비롯한 진보적시인들은 시랑송모임을 가지고 해방된 격정을 터치였다.

이때 조령출은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를 랑송하였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백두산마루에 떨어지는 비방울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그 리치를 아느냐

오 동무여 조선인민이여

 

그렇다. 인민은 민족의 령수 김일성장군님을 그리고있었다.

장군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는 소식에 접한 조령출은 물밀듯이 흘러가는 인파속에 섞여 매일처럼 서울역에 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이를 만나뵙지 못하고 가슴속에 허전한 마음을 안은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어느날 그는 장군님을 만나뵈우려고 떨쳐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8월의 복더위속에서도 해가 저물도록 흩어지지 않고 모여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혹시 알겠소. 장군님께서 저녁차로 오시겠는지.》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들속에는 허연 수염을 길게 드리운 로인도 있었고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나온 철부지아이들도 있었다.

(저들의 가슴속에 쌓인 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만이라도 풀어줄수 없을가?)

이렇게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무릎을 쳤다.

《그래, 내가 쓰자.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연극을!》

하여 작가는 장군님께서 이끄신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내용을 취급한 장막희곡 《독립군》을 창작할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누구의 권고에 의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어떤 단체의 정식요청으로 착수한것도 아니였다.

당시 남조선에는 진보적연극단체로서 조선예술극장과 서울예술극장이 있었는데 그 어느 극장에서도 작가에게 이 주제의 작품을 써달라고 한적이 없었다. 온 겨레가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러받드는 백두산장군에 대한 그자신의 열화같은 흠모심이 낳은 열정의 발현이였다.

그러나 욕망과 능력의 불일치가 작가를 괴롭혔다. 무엇보다 안타까운것은 자신이 장군님에 대하여 잘 모르고있는 사실이였다.

해방전에 간도로 들어간 친구들을 만나면 장군님의 투쟁이야기를 들을수 있었겠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혹 해방후 서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파견된 항일투사가 있을수도 있고 혁명근거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을것이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도 만날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작가는 우연히 북간도에서 왔다는 한 로인과 30대의 젊은이를 만났는데 뜻밖에 그들을 통하여 김일성장군님의 투쟁사적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던것이다.

장군님께서 령활한 유격전법으로 왜놈들을 삼대쓸어버리듯 하신 이야기, 유격근거지에 있을 때 장군님 주신 땅에서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아동단학교에 보내던 이야기, 장군님께서 류창한 중국말로 위만군포로들을 감화설복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신 사실, 장군님께서 대원들앞에서 조국해방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을 하시고 포위공격해오는 왜놈《토벌대》를 족치신 통쾌한 전투이야기…

장군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들은 작가에게 절세의 애국자, 민족의 구세주가 어떤분인가를 잘 알게 해주었다.

그들이 밤가는줄 모르고 펼쳐놓은 꾸밈없고 감동깊은 이야기들은 작가의 심장에 좀전에는 상상할수 없었던 창작적흥분을 가져다주었다.

서울예술극장의 책임연출가 라웅을 비롯하여 많은 예술인들은 그가 창작하고있는 작품이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작품임을 알자 열렬히 찬동했다.

조령출은 그들의 고무에 힘을 얻으며 한장면한장면 써나갔다.

사람들속에 기쁨과 웃음을 안겨주던 랑만적인 명배우, 인민배우 김세영은 당시 새파랗게 젊은 극단의 신인배우였는데 그는 조령출의 집에 찾아와서는 작품대본 1막이 떨어지면 1막을 가져다 연기련습을 하고 또 2막이 떨어지면 2막을 가져다 련습하면서 3막 4장의 희곡 《독립군》을 말그대로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일안에 형상창조하였다.

후날 조령출은 그때의 열정에 대하여 여러번 회상하면서 그것은 창작가, 예술인들이 모두 젊은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이 땅에 해방을 가져오신 장군님에 대한 흠모심이 낳은것이였다고 곱씹군 하였다.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혁명군》이나 《빨찌산》이 아니라 《독립군》으로 달았다. 한것은 당시 국내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두고 김일성독립군》이라고 많이 불렀으며 이로하여 독립군이라는 말이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졌었다. 뿐만아니라 부산에서 일본으로 오가는 관부련락선에 김일성독립대장》이라는 글이 나타나 왜놈들을 당황망조케 한 사건도 있었다.

때문에 조령출은 독립군이란 이름이 더 인기있을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라웅이 연출을 담당하고 무대미술은 강호가 맡았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역형상은 박학이 담당하였다.

박학은 그 당시 진보적이며 학구적인 청년배우로서 북간도에서 나왔다는 한 인물에게서 장군님의 영걸하신 풍모와 활달하신 품성, 인자하신 덕성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고 깊은 연구끝에 장군님의 역을 정중히 형상하였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 북에 온 작가는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만나뵙고 또한 그이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전에 자기가 들었던 그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사실이였음을 다시금 알게 되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녀대원은 문정복과 남궁련이 담당하고 장군님께서 녀대원에게 파견한 로대원은 리재현이, 부현장집에 잠입하여 녀대원을 회유하려다가 오히려 규탄을 받고 량심의 가책을 받는 변절자역은 정리일이 맡았다.

연극은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의 중심에 모시고 녀성정치공작원을 적구로 파견하시여 국내반일민족해방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나가시는 탁월한 령도자로서의 그이의 풍모를 훌륭히 창조하였다.

황영일, 류경애, 김세영 등 연극인들도 연극의 성공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독립군》은 곧 완성되여 동양극장에서 상연되였다.

서울시민들은 구름처럼 극장에 몰려들었다.

《무대우에서라도 김일성장군님의 모습을 뵈옵자!》

이것은 그때 사람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였다.

당시 한국독립당 당수이며 상해림시정부 주석인 김구가 공연을 관람하러 왔던 일도 있었다.

어느날 김구가 연극구경을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연극인들은 놀랐다. 극우익반공단체의 우두머리가 어떻게 김일성장군님의 형상을 창조한 연극을 보러 오는가?

그날 저녁 6시에 김구일행이 정말 동양극장에 왔다.

당시 어느 한 신인배우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때 나는 무대면막사이로 2층관람석을 바라보았는데 김구는 검은 안경을 쓰고있다가 연극이 시작되니 천천히 벗었다. 연극이 끝났을 때에는 일어나 무대를 향하여 열정적인 박수를 보냈다. 아마 반공인사였던 그도 그 연극에 대하여 매우 깊은 감동을 받은것 같았다.》고 말하였다.

김구는 다음날 사람을 보내여 조령출과 배우들에게 연극을 잘 보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참으로 이 시기 연극 《독립군》에 대한 반향은 대단했다.

서울에서의 공연이 끝나자 조령출은 서울예술극장측에 연극을 지방에 내려가 상연할데 대하여 제기했다. 물론 극장측에서도 적극 찬동했다.

연극인들은 전라도 려수, 순천에까지 나가 《독립군》을 공연하였다.

하지만 미군이 남조선에 들어온것으로 하여 사정은 점점 달라졌다.

미군정이 실시되고 해방후 인민들의 총의에 의해 세워진 인민위원회들이 강제로 해산되였다. 또한 일제가 만들었던 법조항들이 그대로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으며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친일파들은 미제의 앞잡이가 되여 활개를 쳤다.

조령출은 몹시 실망했다. 미국이 해방자가 옳긴 옳은가?

그 와중속에서 불온연극을 했다는 구실밑에 박학, 남궁련, 리재현, 정리일 등 《독립군》에 출연한 연극배우들이 경찰에 잡혀들어가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해방후 우리의 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미제와 반동들의 첫 탄압이였다.

연극 《독립군》은 비록 얼마 공연되지 못했지만 8. 15해방직후 남반부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무대우에 정중히 형상한 첫 작품이라는데서 의의를 가진다.

해방후 작가가 창작한 연극은 《독립군》만이 아니였다.

1946년에 조령출은 희곡 《론개》를 창작하였으며 그것은 극장들에서 성대히 막을 올렸다.

 

구차하게 살자 하니

더러운 욕 어이하리

이미 죽을 작정이면

왜적칼에 내 죽으리

 

임진조국전쟁시기 진주 촉석루에서 술취한 왜장을 붙안고 강물에 떨어진 론개의 애국적의거를 형상한 이 연극은 미군의 강점으로 신음하던 남조선인민들속에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작가는 그해에 또다시 가극 《청사초롱》을 썼다. 이 가극은 진보적가극인들에 의하여 널리 공연되였다.

작품창작의 나날에 작가의 세계관에서는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시기 토지개혁이 실시되여 농민들에게 땅이 차례지고 인민이 주인된 새 사회건설이 추진되고있는 북반부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날개돋친듯 서울장안에 퍼졌다.

북조선에 찾아온 새봄에 대한 동경심, 이것이 가극 《청사초롱》의 주제내용이였다.

이것은 당시 작가의 마음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1947년에 들어서면서 남조선정세는 더욱 복잡하고 긴장했다. 미제는 친미주구인 리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를 세우려 획책하면서 민주적인 단체와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작가는 자기의 붓을 점차 반미민주운동을 취급한 연극창작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작가는 이 시기 력사극을 창작하였다.

그 력사극은 1894년부터 1895년초까지 봉건통치배들과 왜적을 반대하여 일어났던 갑오농민전쟁을 취급한 작품으로서 남조선인민들의 반미반침략의식을 반영하여 현실적의의가 있게 창작한것이였다.

처음 장면에는 봉건통치배들의 학정으로 신음하는 농민들의 생활이 보인다. 연극이 관중들의 절찬을 받은것은 당시 미제의 강점하에서 멸시받고 학대받는 남조선인민들의 심정을 실감있게 반영하였기때문이였다.

력사극은 사람들속에서 폭풍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작가의 이러한 창작활동에 대하여 미제와 리승만도당이 팔짱을 끼고있을리 만무하였다. 탄압의 그물이 작가를 둘러싸고 조여들기 시작하였다.

조령출은 해방은 되였어도 이 세상은 여전히 자기의 진정한 집이 아니라는것, 결국 자신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집없는 천사라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자기가 밤을 새우며 쓴 연극과 노래가 마음대로 불리워지지 못하는 세상, 왜놈대신 미제가 주인노릇을 하는 식민지 이 땅에 더는 있을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새 조선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퍼지는 진정한 보금자리-인민의 세상인 북으로 달리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였다.

운명은 작가로 하여금 선택을 요구하고있었다.

당시를 회고하여 조령출은 자기의 수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고학할 때 영문과에는 손정봉이란 친구와 황순원이 있어 동창으로 우정을 두터이 하였다.

손정봉은 영어를 잘하여 앞으로 영어교원으로 일하며 문학작품의 번역가가 되겠다 하였고 황순원은 그 당시 시단에 이름있는 시인으로서 계속 시인작가로 발전할 희망을 가진 친우들이였다.

그들의 고향은 모두 평양이였고 도꾜에서 류학을 할수 있는 정도의 재산이 있는 집 아들들이였다.

당시로서는 문학동창으로 별로 사상적갈등이 없이 친숙하였다.

우리 세 친구는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나는 서울에, 황순원은 자기 고향인 평양에서 작가로 활동하였고 손정봉은 고향인 평양에 있다가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영어교원으로 활동해보려고 서울에 머물러있었는데 해방을 맞이하였다.

손정봉은 미군이 남조선에 들어오는것과 함께 영어가 시세를 만나 서울에서 활동할 전망이 더욱 클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허나 시일이 갈수록 나라의 북과 남은 상반되는 정세로 달라졌다.

남조선은 미군이 들어와 미군이 지배통치하는 미군정의 세상이 되였는데 평양에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민족의 새 국가를 창건하시고 인민을 위한 나라, 빈부의 차이가 없는 민주의 새 사회를 펼쳐나가기 위하여 나라의 인재를 구하신다는 소식이 들려와 우리를 감동시키고 흠모의 마음을 더욱 불타게 하였다. 이 소식에 접한 손정봉은 나를 만나 자기의 결심을 말하였다.

《나는 평양으로 가겠소. 새 사회건설에 헌신하겠소.》

나는 그의 손을 굳게 잡고 송별의 술을 들어 그를 축하하였다.

헌데 그가 떠난지 한달이 못되여 평양에서 황순원이 서울에 왔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우의 기쁨으로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나 이야기과정에 우리의 사상이 서로 다르게 지향하고있다는것을 감촉하였다.

나는 놀랐다. 손정봉은 평양을 향해 떠나갔는데 황순원은 자기 고향 평양을 떠나 서울로 온것이다. 과시 황순원은 그후 경향이 나쁜 소설을 써서 민족앞에 수치스러운 모습을 남기였다. …

운명의 선택!

그것은 말처럼 쉬운것이 아니였다. 선택이라는것은 순간에 불과한것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인생 그자체를 성공이냐 파멸이냐 하는 상반되는 결과에로 이끌어가는것이다. 이를테면 선택이라는것은 분명 가진다는 의미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는 가지고 다른것은 버려야 한다는 심각한 의미가 포함되여있는것이다.

조령출은 모대기였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어떻게 되여야 하는가.)

우리 인민들이 사랑하는 가요를 창작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가극을 창작하는것은 조령출의 꿈이였고 리상이였다. 지금껏 그는 해방이 되였으니 동서남북 갈 곳 없어 찬이슬 내리는 잔디우에 쓰러져 어머니의 옛사랑을 그리던 그 불행한 시절이 영영 끝장났다고 생각해왔었다.

했으나 남의 땅으로 변해버린 남조선에서 그의 꿈은 바다물이 다 말라도 실현될수 없는 공상에 불과했다. 해방전에도 금곡령을 면치 못했던 그의 희곡, 그의 노래들은 해방된 이 땅에서도 빛을 보지 못한것이다.

1948년 리승만은 남조선에서 단선을 강행하여 괴뢰정부를 수립하였다.

우리 인민의 앞에는 반만년의 력사를 가진 민족과 국토가 두동강이 날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당시의 정세를 명철하게 분석하신데 기초하여 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를 통하여 조선민족의 통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정부수립에 대한 문제를 성과적으로 토의하도록 이끄시고 민족분렬을 막기 위한 투쟁을 조직령도하시였다.

바야흐로 남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승리적으로 진행되고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이 내외에 엄숙히 선포될것이다.

작가의 심장은 세차게 고동쳤다.

(아, 우리 민족의 참다운 구세주는 김일성장군님이시다!)

마침내 그는 심장이 가리키는 곳으로 운명의 키를 돌렸다. 가자, 북으로, 김일성장군님이 계시는 곳으로!

작가는 1948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력사적인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 남조선대표로 선출되여 38 선을 넘어 평양으로 왔다.

그가 인민의 새 세상에 들어선 감격을 노래한 시초 《북조선으로》의 한 대목을 아래에 소개한다.

솔문 푸르게 서있는 동구

조국의 부강과 자유와 광명이 찬란한

새 나라 기발들이

꽃처럼 피여있는 마을!

집집의 기둥마다 벽마다

오색테두리단장 새로운 벽보들

가지가지

만세와 감사

인민공화국수립 만세는

나의 머리우에

프랑카드에 펄펄 날리는것이니

 

나의 조국은 이제

그 이름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강 불멸의 반석우에

영원번영하리라

 

정녕 그가 소리높이 읊은 이 시는 진정한 보금자리를 찾은 어제날의 집없는 천사가 목메여 부른 자유의 노래, 행복의 노래였다.

 

공화국의 품속에서 부른 참된 삶의 노래

 

작가 조령출이 어버이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것은 북에 온지 한해가 조금 지난 1949년 12월 7일이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을 령도하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그가 창작한 가극 《꽃신》을 보아주시였다.

시종일관 깊은 관심속에 가극을 보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조령출을 비롯한 창조성원들에게 작품이 아주 좋다고, 동무들이 많이 노력했기때문에 성과가 많았다고 하시며 그들의 수고를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앞으로 우리의 가극을 이런 방향으로, 민족적정취가 풍기도록 발전시키는것이 좋겠다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만면에 태양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신 그이를 삼가 우러르는 조령출의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이를 이렇게 만나뵈온것만도 기쁘기 그지없는데 변변치 못한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시니 이 은정에 무엇으로 보답한단 말인가.

조령출은 수령님께서 떠나가신 후 오래도록 자기의 손을 만지고 또 만져보았다. 그 손은 어머니가 낳아준 아들의 손만이 아니였다. 그 손은 자기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고 아들이 거둔 자그마한 성과를 크게 내세워주시는 친어버이께서 친히 만져주신 뜨거운 손이였다.

《동무들, 이 손을 좀 만져보오. 뜨겁지 않소?》

작가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자기의 손을 만져보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후 작가는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신임에 의하여 창작행정사업의 중요한 직무에서 활동하면서 혁명적내용에 민족적정서와 향취가 넘쳐나는 작품창작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전쟁도 끝나고 사회주의대건설이 힘있게 진행되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문학예술부문 일군들을 부르시여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인 민요를 우리 인민의 감정정서와 시대적미감에 맞게 재창조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 말씀을 전달받은 조령출은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전통적인 민요유산들을 로동당시대와 인민들의 사상감정과 지향에 맞는 민요로 개작하여 그것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계속 애창되도록 하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현실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례를 들어 〈양산도〉의 민요라 하여 〈심산은 반락청산이요, 이수는 중분백로주라〉 하는 지금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가사를 자꾸 부르기때문에 감흥을 줄수 없는것이다.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어 민요를 현대적미감에 맞게 새 사회 인민의 사랑을 받는 민요로 되도록 발전시키는 일에 창조적힘을 경주하였다.》

그는 민요화된 현대풍가요를 창작하기 위한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인 결과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민요곡조에 들끓는 사회주의현실의 사상과 정서를 반영한 가사를 붙여 수령님께서 좋아하시고 인민들이 즐겨 부르는 많은 노래들을 만들어내였다.

그 대표작은 조령출이 창작한 민요 《모란봉》이다. 《모란봉》은 우리 나라 중부지방민요인 《창부타령》을 우리 인민들의 생활감정에 맞게 개작한 민요로서 예로부터 명승지로 소문난 모란봉과 나날이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로 변모되여가는 혁명의 수도 평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긍지높이 노래하고있다. 민요는 혁명의 수도를 이 강산 좋은 곳에 두고있는 우리 인민의 자랑스러운 감정과 어버이수령님께서 마련하여주신 사회주의제도하에서 행복하게 살며 일하는 그들의 락천적인 생활정서, 민족적긍지감을 훌륭히 표현하고있다.

그가 가사를 짓고 그의 안해인 김관보가 편곡한 민요 《모란봉》을 들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노래는 아름다운 선률을 가진 노래라고, 그런 노래를 많이 지어야 하겠다고 높은 평가를 주시였다.

민요 《모란봉》은 민족적특성과 현대성을 훌륭히 구현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오늘도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면서 사랑을 받고있다.

조령출은 종래의 민요를 현대적미감에 맞게 더욱 빛내일 생각으로 해방전 한탄의 상징으로 된 가사들을 새로운것으로 창작하였다.

《황금산의 백도라지》(도라지타령), 《법성포배노래》, 《양산도》 등이 다 그런 민요들이다.

1993년 2월 12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친히 작가를 만나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아, 조령출이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시고는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나이는 얼마인가, 장수하자면 락관적으로 살고 또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장수의 비결까지 가르치시였다.

이날 뜻깊은 오찬에서 작가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장군님의 탄생 50돐에 즈음하여 지으신 송시의 운을 받들어 민족최대의 명절인 2월과 4월의 명절을 함께 노래한 헌시 《위대한 명절》을 읊어드리였다.

수령님께서는 작가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그 시를 자신께서 다시 보겠으니 두고 가라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그토록 평가해주신 그 헌시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어있는가.

여기에 수령을 받드는 작가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전해인 1992년 2월,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일을 맞으며 지으신 송시를 받아안은 조령출은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며칠밤 잠들수 없었다.

그는 다음해 4월의 명절에는 위대한 수령님께 올릴 헌시를 송시의 운을 받들어 쓰리라 결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일을 맞으며 진행되는 연회에 참가하라는 련락을 받은 그는 헌시를 정서하기 위해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며느리에게 흰종이와 붓, 벼루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의 창작실에서 수령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수령님과 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송시의 운을 받들어 헌시를 지어 붓으로 흰종이에 한자와 우리 말로 정서하였다.

먹 한방울 떨어질세라 조금이라도 틀리면 다시 쓰고 또 다시 정서하고 이러기를 그 몇번…

새벽이 되여서야 마음에 드는 헌시를 가슴에 품은 작가는 수령님을 모시고 열린 연회에 참가하였다.

작가는 수령님께 이렇게 말씀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지난해 2월의 뜻깊은 명절에 친히 지으신 송시에 제 너무 감격하여 외람되나 송시의 운을 받들어 민족최대의 명절인 2월과 4월의 명절을 함께 노래한 헌시 〈위대한 명절〉을 지었습니다.》

조령출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옥체건강하시기를 바라는 절절한 마음으로 시를 읊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언제인가처럼 수령님께서 잡아주신 손을 오래도록 쓸어만지며 생각했다.

(어버이수령님, 로신하 조령출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오직 수령님을 위해 모든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후 그는 자기의 결심대로 어버이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민요창작과 가극창조사업에 자신의 정열을 깡그리 바치였다.

조령출의 창작활동은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지도와 세심한 보살피심속에서 더욱 활짝 꽃펴나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은 가극혁명의 나날 작가에게 온갖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고 그가 인민의 기억속에 남는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스승이시다.

그가 처음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뵈온것은 1968년 6월 평양대극장에서 가극 《해빛을 안고》를 공연할 때였다.

그날 조령출이 창작한 가극공연을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작가를 몸소 불러주시고 가극의 형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조령출은 뜻밖의 말씀에 아무 대답도 드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비록 자기가 《해빛을 안고》를 썼지만 가극의 형식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하였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가극을 하나하나 분석해주시면서 이런 식으로 가극을 만들면 현시대 사람들의 미감에 맞지 않을뿐아니라 우리의 가극예술을 발전시킬수 없다고 지적하시였다.

조령출은 가슴이 조여들었다.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에 결초보은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본의아니게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린것이다.

허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작가를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자신과 함께 가극혁명을 해보자고 고무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많은 시간을 내시여 가극창조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고 혁명가극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밝은 태양아래에서》 등 수많은 가극창조사업에 조령출을 내세워주시였다.

1972년 11월 27일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지도해주신 장군님께서는 조령출에게 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문예총에서 맡아하라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조령출은 그 믿음에 더 큰 창작실천으로 보답할 일념으로 위인송가창작에 모든 정력을 바쳤다.

어느해 4월의 명절날 작가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사랑의 선물을 받아안게 되였다.

선물을 부여안고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북받치는 격정을 담아 가사를 썼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탄생하시여 어린시절을 보내신 혁명의 요람 만경대에 대한 우리 인민들의 깊은 동경과 사랑, 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흠모와 충정의 감정…

작가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인민반속보판에 붙여놓았다.

이것을 본 작곡가 김옥성이 흥분하여 그 자리에서 가사에 곡을 붙였다. 이렇게 되여 세상에 태여난것이 바로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만경대의 노래》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창작한 가요 《만경대의 노래》가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에서 제일 인상에 남는다고 하시면서 가극 《밝은 태양아래에서》를 만들 때 이 노래를 반드시 넣어야 하겠다고 은정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음악의 천재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속에 이 가요는 주체시대의 명곡으로, 가극의 주제곡으로 해마다 4월의 봄명절이 오면 불리워지는 추억의 노래, 위인칭송의 노래로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가를 만나실 때마다 그의 건강에 대하여 각별한 주의를 돌려주시며 왜 요사이 보이지 않았는가, 어데 아픈데는 없는가, 조선생은 앓지 말아야 한다고 다정히 격려해주시며 그의 생일 일흔돐상을 마련해주시였고 어느해인가는 인민들이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삼가 올린 산삼을 보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믿음의 품, 의리에 넘친 사랑의 품에 안겨 작가는 80고령을 눈앞에 둔 때에도 왕성한 창작적의욕을 가지고 새로운 작품창작에 온갖 심혈을 다 바치였다.

그 끝없는 사랑에 떠받들려 작가는 《피바다》식가극형식으로 새로운 민족가극 《춘향전》을 완성하였다.

1988년 12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가극 《춘향전》을 보아주시고 사상예술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완성된 우리 식의 가극이라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문을 닫기 전에 창작한 작품은 가사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이다.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로동당에 대한 끝없는 충정의 마음, 절대불변의 의지적감정을 환희롭고 숭엄한 양상에 담아 노래하고있는 조령출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노래는 작가가 79살의 고령의 나이에 자기의 창작을 총화하며 얻은 진리와 신념을 집약하여 시화한 의의있는 작품이다.

가사는 수령, 당, 대중이 일심단결된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 어떤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답을 심오하게 밝히고있다. 가사는 우리 사회의 가장 참된 인간이 되려면 당의 뜻과 의도대로 사는 사람, 당의 사상을 신념화하고 순결한 량심과 의리, 변함없는 의지로 한마음 당을 받들어가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주체시대의 인생관에 관한 문제를 잘 반영하였다.

작가는 가사의 이러한 사상적내용을 우리 인민의 민족적정서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진달래, 목란꽃, 참대에 비유된 한없이 밝고 우아한 정서적색조와 함께 경건하고 숭엄한 양상으로 펼쳐보임으로써 예술적형상에서 세련미를 보여주고있다.

작가는 자기 한생의 총화이고 맹세이며 후대들에게 남기는 당부이기도 한 이 노래에 장군님을 따르는 우리 인민의 결곡한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

참으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은 지난날 설음과 울분의 노래만을 터치던 《집없는 천사》의 생을 아름답게 꽃피워준 자양분이였다.

 

영생하는 작가의 삶

 

영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소원이다. 그래서 고대에짚트의 왕들은 피라미드를 일떠세우고 그안에 미이라로 들어앉아 영원히 노예들을 통치하려고 했고 거룩한 명사나 장군들은 기념비들에 자기의 찬란한 공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민의 기억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때라야 참다운 영생을 누린다고 말할수 있다. 왜냐하면 피라미드나 기념비들은 덧없는 세월의 풍파속에 닳아지기도 하고 지어는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류실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닳지도 류실되지도 않기때문이다. 더우기 인민의 대표자인 령도자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인간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영생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조국과 우리 인민들의 추억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작가 조령출은 분명 력사의 행운아임이 틀림없다.

고령의 몸으로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을 형상한 희곡 《념원》을 구상하던 그가 인생의 마지막문을 닫은것은 1993년이였다.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못내 애석해하시면서 해당 일군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문학창작사 작가 조령출동무가 오늘 사망하였습니다.

그가 앓지 않았으면 좀더 살아있을수 있었겠는데 참 안되였습니다. 아까운 동무를 잃었습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본것이 영화예술인들이 출연하는 경희극 〈한마음 한모습으로〉를 볼 때였습니다.

조령출동무의 사망에 대한 부고를 〈로동신문〉을 비롯한 중앙급신문들에 다 내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조령출의 령전에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도록 하고 작가가 조국과 인민앞에 세운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아마 세상을 떠난 고인이 변함없이 베풀어지는 그 어버이사랑을 알았더라면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것이다.

세월은 인간들의 가슴속에 쌓인 슬픔의 덩어리를 풀어주는 명약이다.

날과 달이 흐르자 친지들의 발길은 뜸해지고 자식들의 가슴에 들어찼던 슬픔도 차츰 걷히기 시작했다.

그러던 1995년 5월 24일이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작가 조령출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5대혁명가극을 만들때 조령출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기본축이 되여 가극대본을 잘 썼다고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모두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였다. 사실 그때로 말하면 온 나라가 뜻밖에 어버이수령님을 잃고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고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은 전례없는 압력소동을 벌리면서 조선에서 사회주의붉은기가 내려지는것은 시간문제라고 떠들고있었다. 우리 인민앞에는 자주적인 근위병이 되느냐, 아니면 노예가 되느냐 하는 엄혹한 시련이 막아서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조국의 운명을 한몸에 안고 선군혁명령도의 길을 이어가고계시는 장군님께서 두해전에 사망한 작가를 잊지 않고 감회깊이 추억해주시였던것이다.

떠나간 전사를 잊지 못해하며 영생의 삶을 빛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마를줄 모르는 샘처럼 끝이 없었다. 2009년 피바다가극단에서는 몇십년만에 가극 《홍루몽》을 다시 창조공연하게 되였다.

때는 이미 작가가 세상을 떠난지 16년이나 되는 해였다. 사람들은 가요 《조국보위의 노래》나 《압록강 2천리》를 들을 때에야 비로소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조령출에 대하여 문득 생각하군 했었다.

하지만 동지애의 화신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만은 늘 작가를 잊지 않으시였다.

어느날 《홍루몽》창조과정을 지도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작가를 뜨겁게 회고하시면서 조령출선생은 확실히 대문호라고, 1960년대에 창작한 가극들의 대본은 거의다 그가 썼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새 세기에 재창조된 가극 《홍루몽》을 다시 보니 조령출선생이 생각난다고 하시며 그는 우리 사람들은 물론 중국사람들도 놀랄만치 각색을 잘하였다, 조령출선생이 대본과 가사를 참 잘 썼다, 그는 보기 드문 재사이며 훌륭한 작가이고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말씀하시였다.

보기 드문 재사, 훌륭한 작가, 민족의 자랑!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 말씀은 살아있을 때에는 물론 세상을 떠나서도 그이의 품에 영원히 살아있는 작가에 대한 최대의 평가였다. 그렇다. 바로 그 위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조령출은 생전에 영광과 행복의 절정에서 인생말년까지 국보적가치가 있는 작품을 창작할수 있은것이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잠시 영생의 언덕에 서있는 조령출의 인간상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조령출은 문학세계가 매우 폭넓고 다양한 작가였다.

아마 조령출처럼 창작의 령역이 넓은 작가는 드물것이다.

조령출은 조선의 근대, 현대시가문학에서 혁명적이고 민족적인 가사들을 많이 창작함으로써 자기의 지위를 뚜렷이 차지하고있는 재능있는 작가였다.

민족수난기가요가운데서 그가 창작한 가사가 근 절반에 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당시의 출판물자료를 보면 조령출은 박영호와 쌍벽을 이루는 공인된 가사작가였던것이다. 그가 창작한 다른 형태의 문학작품인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자기가 즐겨하고 정통한 가사문학과 밀접히 련관되여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리순신장군》을 비롯한 여러편의 창극대본들과 《춘향전》 등 고전가극대본, 집체창조에 참가한 많은 혁명가극과 음악무용서사시 극대본들도 철저히 가사문학을 전제로 한 양식인것이다. 지어는 《심청전》처럼 자기의 창작생활에서 특이한 영화문학창작도 역시 일반영화들과 달리 노래를 기본형상수단으로 리용하였다.

조령출은 인간적으로 볼 때 고지식하고 결곡한 형의 인간이였다.

언제인가 조선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최현덕편)에서 박정희가 부른 노래 《락화류수》를 놓고 그는 속이 매우 언짢아하였다. 아무리 자기가 1930년대에 지은 가사라고 해도 민족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유신》독재자가 《락화류수》를 불렀다는것이 마음에 걸렸던것이다.

더우기 그때 일부 편협한 사람들은 민족수난기가요들을 부르지 못하게 하면서 마치도 노래에 문제가 있는듯이 여기고있었다.

며칠째 끙끙거리던 그는 영화문학창작사에 다니는 딸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해방전에 우리 나라에 《락화류수》라는 가사가 두개 있었다. 아마 그가 부른 노래는 다른 사람의 가사일것이다. 그러니 네가 잘 알아보고 가사를 바꾸도록 해라.

그러나 이미 예술영화가 세상에 알려진 뒤여서 그의 딸은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일때문에 작가는 속을 태웠다.

그러나 작가의 심정을 알아준분이 계셨으니 그분은 바로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시기에 류행가로 부른 노래들은 민족의 귀중한 문학유산이므로 앞으로 계몽기가요로 부르게 하고 그가 쓴 가사들이 TV와 방송으로 널리 불리워지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던것이다. 그제서야 조령출의 가슴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락화류수》에 대한 서운함은 말끔히 풀렸다.

조령출은 무척 겸손한 사람이였다. 그는 해방전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발전하는 시대상에 맞는 수많은 명가사들을 창작한 작가였다.

《조국보위의 노래》(1950년), 《압록강 2천리》(1952년), 《건설의 노래》(1953년), 《만경대의 노래》(1962년), 《천년만년 수령님만 모시고 따르리》(1979년),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1992년) …

그가 지은 노래들은 모두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치하를 받은 시대의 명가사들이였다.

생활에서 가끔 보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직위가 올라가거나 혹은 일정한 공적으로 하여 사람들의 이목이 자기에게 집중되면 어깨가 으쓱해서 제 자랑을 늘어놓군 한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이라고 할만치 겸손한 성미였고 언제 한번 자기 자랑을 할줄 몰랐다.

작가는 사람들의 초청을 받고 자주 결혼식장이나 들놀이에 참가하군 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을 나타낸적 없었으며 오락회에서 지명되면 천천히 일어나 지정곡인 《아리랑》을 부르군 하였다.

사람들이 《선생님, 선생님이 직접 지은 노래를 불러주십시오.》 라고 청을 하면 그는 어줍은 미소로 거절하였다.

집에 들어와서도 자식들이 자기가 지은 노래를 부르면 칭찬을 해주지 않았다.

친지들과 가족들은 그에게 자신의 일생에 대한 책을 써보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했으나 조령출은 눈을 감기 전까지 《우리 민족의 민요연구》 라는 제목의 도서집필에만 전념하였다. 뿐만아니라 력사의 이끼속에 묻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민요들을 발굴하고 그 예술성을 확증하는 사업에도 열정을 기울이였다.

조령출은 자식들에게 요구성이 높은 아버지였다.

그는 1993년에 어버이수령님께서 주신 교시를 언제나 잊지 않고있었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그가 읊어드린 헌시를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조령출동무는 물론 그렇겠지만 자녀들을 잘 교양하여 우리 당을 대를 이어 영원히 받들어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는 늘 자식들에게 수령님의 그 말씀을 이야기해주면서 경애하는 장군님께 충정을 다하도록 교양하였다.

그는 녀성에 대한 견해에서도 매우 고상하였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성이 류다른데서부터 잘 알수 있다.

어릴적부터 제 집을 떠나 이붓아버지의 손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공부한 그는 효도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안은채 어머니의 초상을 그려 자기의 책상우에 놓고 살았으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자기의 가사에 담군 하였다.

그러한 그였기에 어쩌다 자기 아들이 며느리에게 험한 일을 시키는것을 보아도 좋지 않게 생각하며 녀성들에게는 일을 시켜도 깨끗한 일만 시켜야 한다고 추궁하였다.

조령출은 나이를 묻는 녀성들에게 항상 열살을 내려 짚어주는 례절있는 남자였다.

하기에 그의 안해 김관보는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민족가극 《춘향전》의 주제곡이 나오면 남편을 회상하면서 자식들에게 너의 아버지는 정말 사랑을 아는 남자였다, 련애편지도 잘 썼는데 언젠가는 결렬될번 한 친구의 사랑을 편지 한장으로 이어준적도 있다고 말하였다.

조령출의 한생을 더듬어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것은 그가 생전에 재능있는 작가로서 많은 공로를 세웠으며 사후에는 영생의 언덕에 올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는것이 결코 타고난 팔자가 아니라는것이다.

《집없는 천사》에도 있듯이 그는 비오고 흐린 하늘밑에서 어머니의 옛사랑이나 그리던 불우한 인간이였다. 그러한 그가 세상을 떠난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영생의 언덕에 서있는것은 전적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은정때문인것이다. 고인도 그것을 잘 알고있었기에 림종의 순간까지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그토록 애쓴것이 아니겠는가.

령도자와 인민의 기억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작가 조령출!

그는 참된 보금자리-공화국의 품속에서 빛나게 살아왔으며 생의 마무리를 아쉬움없이 한 성공한 인생의 주인공이며 세인이 부러워하는 행복자이다.

작가 조령출의 인생은 위대한 령도자의 품에 안길 때 그리고 위인들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일할 때 영생의 삶을 누릴수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깨우쳐주고있다.

민족수난의 암담한 시기로부터 조국번영의 빛나는 시대에 이르는 기간 인민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가사들을 수많이 창작한 작가 조령출은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인 계몽기가요와 주체시대의 명곡들과 더불어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 영생의 모습으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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