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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재다능한 예술가

 

 
강 호(화가, 영화연출가)

 

                      • 1908년 8월 6일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출생.

                      • 1927년 카프에서 활동.

                      • 1946년 북에 들어온 후 연극인동맹 서기장, 국립예술극장 총장, 조선화보사 사장, 국립영화촬영소

                        연출가 및 무대미술가, 평양미술대학 영화 및 무대미술강좌 강좌장으로 사업.

                      • 1984년 7월 3일 사망.

                                                                      

 

인간의 재능은 무궁무진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뛰여난 재능을 가진 재사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재능이 다 소중하고 값높은것으로 빛을 뿌리는것이 아니며 이름을 낸 재사들의 운명도 겨레와 민족앞에, 인류의 력사속에 모두 금문자로 새겨지는것이 아니다. 선이 아니라 악에, 진실이 아니라 허위에, 집단의 리익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에 바쳐진 재능도 적지 않다.

자기의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어디에 바쳐야 하는가. 바로 여기서 또 한가지, 운명의 선택에 관한 문제가 나선다. 외세에 의하여 강요된 분렬조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앞에는 언제나 2분법의 기로가 놓여있다.

조선영화와 미술계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재능있는 예술인 강호의 운명을 두고 그 참된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민족의 량심과 지조를 지켜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봉곡리의 어느 한 초가집에서는 늘 작은 총각애가 코물을 훌쩍거리며 쉬임없이 붓을 놀리고있었다.

서로 다툼질을 해가며 남동생을 업어키운 누이들은 멀건 죽밖에 차례지지 않는 끼니마저 감감 잊은채 그림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총각애를 똬리모양으로 둘러쌌다.

얼마후 종이우에 어린애의 귀여운 얼굴이 그려지고 그 다음은 아이의 손에 안긴채 금시라도 야웅!- 하고 새된 소리를 지를만큼 앙큼하게 생긴 고양이가 나타났다.

그 그림이 얼마나 방불했던지 식구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지금껏 몰랐던 총각애의 재능을 알게 되였다.

이렇게 태여난 묵화는 수십년세월이 흐르도록 벽지 한장 바르지 못한 그 집에 호젓하게 붙어있었다.

이 일화는 강호가 6살나던 해에 있었던 일이였다.

딸만 다섯을 줄줄이 내리낳던 소작농의 집안에서 아들이 출생한것은 가물에 단비온것 이상의 경사일수밖에 없었다.

강호의 부모와 누이들은 어떻게 하나 그를 공부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대대로 가난에 찌들려온 그의 집안에서는 어렵게 본 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던것이다.

그러나 서발막대기를 휘둘러도 별로 거칠것이 없는 집안의 형편으로서는 도저히 가당치 않은 희망이였다. 결국 강호는 혈육들의 아쉬움과 한탄속에 겨우 보통학교졸업증밖에 쥘수가 없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는 어머니배속에서부터 그림소질을 타고났던것 같다.

그또래 아이들이 빈 죽사발을 들고다니며 투정을 부리고있을 때 강호는 손에서 붓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그림그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의 부모들은 아들의 재능을 꽃피워줄 종이 한장 제대로 구해줄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때없이 눈굽을 훔치군 했다.

1920년에 강호는 서울의 한 사립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한학기도 넘기지 못한채 학교문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강호는 가난때문에 미술공부를 하려던 희망을 삭정이 꺾어버리듯 할 나약한 인간이 아니였다.

퇴학후 두엄냄새가 푹 배인 고향집에서 불끈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호미질을 하던 그는 한해도 넘기기 바쁘게 부모의 승낙도 받지 않고 혼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현해탄을 건느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아버지, 어머니, 내 꼭 성공을 해서 집안을 일떠세우겠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세상의 복잡다단한 리치를 알기에는 너무도 단순했던 그가 고향집쪽을 바라보며 다진 그 맹세는 실현될수 없었다. 그후로 강호는 끝내 고향에 가보지 못했던것이다.

일본에서 강호는 빵집의 심부름군과 우유, 신문배달 등을 하면서 고학으로 교또중학교와 교또회화전문학교를 간신히 나올수 있었다. 그는 재학기간에 뛰여난 미술실력과 놀라운 향학열로 일본교원들과 학생들의 찬탄과 시기심을 번갈아 받군 했었다.

졸업을 앞둔 어느날이였다.

수업이 끝난 뒤 일본인미술교원이 그를 찾았다.

《군은 확실히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있소. 유감이지만 일본학생들속에는 군과 같은 인재가 없거던. 장차 미술분야에 진출하고싶겠지?》

강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럼 우리 일본인으로 귀화하게.》

《예?》

교원의 작은 눈이 안경테속에서 묘하게 웃고있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미술계는 군을 환영할거요.》

그것은 세계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명화가들을 줄곧 숭배해온 강호에게 있어서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였다.

조선학생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심리적변화를 꿰뚫어본 교원은 그물을 바싹 조였다.

《남아라면 응당 운명의 선택에서 주저하지 말아야지. 결심이 섰으면 후지산을 멋지게 그려보게.》

하숙방으로 돌아온 강호는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득 고향에서 허리펼새 없이 농사일을 하고있는 부모와 누이들의 여윈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미술에서 성공한다면 가정에 행복을 가져올수 있지 않을가?

어느날 강호는 자기가 존경하는 선배와 함께 음식점으로 갔다.

그날따라 곤드레만드레 취한 선배는 양복주머니에서 와락와락 돈뭉치를 꺼내들더니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이건 왜놈 첩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받은거야. 결국 넋을 팔아 번 돈이지. 에익!》

그는 결김에 돈뭉치를 음식탁우에 내던졌다.

락화처럼 흩날리는 지페를 보면서 강호는 량심의 채찍질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조선청년의 고통을 통절히 느꼈다.

그렇다. 그것은 넋을 팔아 번 돈이였다.

그때로 말한다면 간또대지진이 일어난지 몇해가 지났으나 일제에 대한 조선민족의 원한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다시 타오를 재속의 숯덩이마냥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었다.

1923년의 간또대지진은 14만여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낸 일본력사상 피해규모가 가장 큰 지진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일본반동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아무런 구제대책도 취하지 않았고 일본인민들속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그들의 반정부적감정을 딴데로 돌림으로써 지진으로 인하여 조성된 심각한 사회정치적위기를 모면해보려고 하였다. 일본천황은 이른바 《칙령》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일본반동정부는 《조선사람들이 방화한다.》, 《조선사람들이 우물에 독약을 친다.》는 등 모략선전을 벌려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집단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대와 경찰, 재향군인, 자경단, 청년단, 우익반공단체들과 불량배들은 재일조선인들을 야수적인 방법으로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일제가 간또대지진때 학살한 재일조선인수는 무려 2만 3천여명에 달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야수성과 잔인성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으며 놈들이야말로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라는것을 온 세상에 다시한번 드러내놓았다.

그때 이 선배도 자기의 학비를 대주기 위해 현해탄을 넘어와 갖은 고생만을 해오던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잃었다. 그런 그가 철천지원쑤 일본놈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민족의 넋을 파는 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 강호는 나라없는탓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들이 자기를 지켜보는것만 같았다. 강호! 너는 넋을 팔려고 하고있다. 그들이 이렇게 웨치는것만 같았다.

며칠후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배에 올랐다.

운명의 키를 고국으로 돌리였던것이다.

강호의 본명은 강윤희였는데 이때부터 그는 자기 이름을 강호로 고치였다. 다시는 나약해지지 않으리라, 굳센 호랑이로 살리라. 강호는 이렇게 결심하였던것이다.

하지만 그앞에는 환향의 기쁨대신 왜놈장교의 초상을 그려야 하는 고통이 기다리고있었다.

《김군, 이를 어쩌면 좋은가. 섬나라에선 왜놈들이 후지산을 그리라고 하더니 조국에선 또 이 모양일세. 여보게, 난 붓으로 가족에 행복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통 보이지 않는구만.》

이것은 당시 그가 친구 김일영에게 쓴 편지의 한구절이다.

설사 목구멍에 거미줄이 쓴다고 해도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을 위해 붓을 잡을수 없다고 생각한 강호는 서울에 있는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강호는 연출수업을 받게 되였는데 이것이 후날 그를 다재다능한 재사로 불리워지게 한 계기로 되였다.

당시 조선영화계에서는 라운규를 비롯한 진보적인 영화인들에 의하여 사람들을 애국적인 문화계몽운동에로 추동하는 많은 영화들이 창작되였다.

강호는 1927년에 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동맹(카프)에 가입하여 김복진의 뒤를 이어 미술부를 책임지고 사업하였으며 영화부에도 관여하게 되였다.

강호는 라운규와 절친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 돕고 이끌며 민족영화의 넋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라운규가 창작한 거의 모든 작품에는 강호의 미술이 안받침되여있다.

강호는 라운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리규설, 라웅을 비롯한 카프인물들과 협력하여 경향성이 좋은 진보적인 작품들을 창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리기영, 한설야, 조명희, 송영, 리상화, 박세영, 박팔양을 비롯한 카프작가들의 작품들을 애독하면서 그들과 가깝게 지내였다.

이 시기 강호는 진보적인 미술창작활동을 지도하여 창작한 진보적인 주제의 작품을 가지고 수원에서 조직하는 프로레타리아미술전람회에 참가하였다.

이 전람회는 일제가 조직하는 어용미술전람회나 《서화협회》가 조직하는 미술전람회와는 내용상에서 큰 차이를 가졌다. 출품된 많은 작품들이 일제의 착취와 압박을 반대하는 로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을 형상적비유의 방법으로 그리였다.

이 전람회의 진보적경향은 강호의 오랜 벗인 정하보가 출품하였던 유화 《공판》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청색미결수복에 용수를 쓰고 공판장에 들어가는 애국자,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그의 의젓한 태도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유화는 강의한 의지를 지닌 혁명가의 풍모를 보여주었으며 반면에 그를 앞세우고 가는 일제경찰의 형상에서는 그 비굴성이 스스로 비쳐지게 그려내였다. 또한 모여든 군중들의 각이한 표정들을 통하여서는 혁명가에 대한 당대 인민들의 동경심과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비교적 진실하게 형상해내였다.

1930년 수원에서 열렸던 제1차 프로레타리아미술전람회는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비록 3일간이라는 짧은 기간이였지만 수많은 광산로동자들과 농민들, 청년학생들의 관심속에 진행되였다.

순수 회화보다도 적극적이고 실효성이 높은 예술창작을 희망했던 강호는 정열적인 창작활동으로 마침내 예술영화 《암로》(1928년)를 내놓았다.

강호자신이 직접 영화문학과 연출, 영화미술을 담당하여 만든 이 영화는 비판적사실주의작품으로서 인민들속에서 반일애국주의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착취계급에 대한 비판적안목을 넓히게 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조선경내에서는 원산부두 로동자들의 총파업, 신흥탄광 로동자들의 폭동, 평양고무공장 로동자들의 투쟁, 룡천불이농장과 단천농민들의 투쟁 등 일제의 파쑈적폭압과 친일지주, 자본가들의 착취를 반대하는 로동자, 농민들의 투쟁이 더욱 강화되고있었으며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정책을 반대하는 진보적청년학생들의 투쟁도 련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현실은 정의와 진리를 갈망하던 강호로 하여금 불합리한 사회현실의 부정면을 비판폭로하는데 머무를것이 아니라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인민대중의 분격과 항거의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할 결심을 더욱 굳히게 하였다. 그는 비판적사실주의문학에서 프로레타리아문학창작에로 한걸음 더 전진하였다.

그는 1931년 영화문학 《늘어가는 무리》를 가지고 직접 연출, 영화미술, 주역까지 담당하여 조선에서 프로레타리아영화예술의 초기작품으로 되는 《지하촌》을 창조하였다.

영화는 자본가 김기택을 반대하는 빈민촌의 로동자들과 림철근을 비롯한 함남철공장 직공들의 파업투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함남철공장 자본가 김기택은 일본군부의 후원을 받는 민족반역자로서 경제공황의 위기를 막고 일제의 대륙침략에 맞게 군수공업을 확장할 목적으로 실업군중이 사는 빈민촌을 철거시키는 한편 그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한다.

이에 격분한 로동자들과 직공들은 파업투쟁에 진출한다.

그 앞장에는 주인공 림철근이 서있다.

그는 나이 30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가고 페병으로 공장에서 해고당한 남동생 성근이와 20살 난 누이동생 혜순이를 데리고 힘들게 살아간다.

가정의 참혹한 생활처지와 자신의 쓰디쓴 생활체험을 통하여 사회적모순과 불합리성을 인식한 그는 로동자들속에서 정치강좌를 조직하고 대중을 계몽하여 김기택을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선동한다.

그가 조직한 정치강좌는 철공장로동자들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고 특히 어용단체인 구령단의 허위성을 폭로하는데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작품에서는 로자간의 사회적모순을 제기하고 그것을 무산계급의 새로운 성격형상을 통하여 해명하고있다.

물론 이 작품에는 무산대중의 계급해방에 대한 지향이 적지 않게 추상적으로 그려져있고 주인공의 항거와 투쟁의식이 낡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혁명적리상과 밀접히 결부되지 못한 부족점이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 《지하촌》은 착취계급의 본성과 허위성을 폭로하고 자본가들을 반대하는 무산계급의 대중적진출을 보여준것으로 하여 해방전 조선영화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였다.

이 작품에서 강호는 조선인민의 비참한 생활과 일제와 그 주구를 반대하는 로동계급의 투쟁을 영화미술의 어둡고 무거운 색채와 간결하고 집약된 구도, 강렬한 색대조 등으로 부각시키였다.

이러한 경향성으로 하여 영화는 일제검열기관의 탄압을 받게 되였고 일반상영이 정지당하였다. 하지만 이 영화창작으로 진보적인 예술가로서의 강호의 명성은 당시 조선영화계와 사회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영화 《지하촌》에 대한 탄압으로 의분을 삭일수 없었던 강호는 보다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으로 미술부의 사업을 정하보에게 넘기고 카프직속극단으로 《신건설》을 내오는 사업에 전력하면서 영화 《도화선》창작에 달라붙었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영화부기관지 《영화무대》를 책임지고 편집하는 한편 비합법적인 월간잡지 《우리 동무》의 편집사업에도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리였다.

《도화선》이 거의 완성되여가던 1932년 강호는 카프사건으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갔다.

정의감이 강했던 강호는 자기의 뜻을 굽히려고 하지 않은탓에 카프성원들중에서 가장 오래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지만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냈다.

1935년 3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강호는 부산에서 간판점 화공으로, 신문사 광고부원으로 도안을 하면서 한쪽으로는 소설삽화도 하였다.

일제의 살기띤 폭압은 련속 그를 덮쳤다. 조선일보사에서 일하던 강호는 일제가 날조한 소위 공산주의협회자사건(일명 왜관농민야학사건)으로 체포되여 대구형무소에서 두번째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던것이다.

1942년 4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강호는 《불온분자》의 딱지가 붙은것으로 하여 더는 영화계에 나설수 없게 되였다.

그러나 생계는 유지해야 했다. 그러자면 영화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예술의 여러 방면에 손을 댄것은 천성적인 재능의 덕이기 전에 식민지예술인의 눈물겨운 처지가 가져온것이기도 하였다.

실지로 그가 전공과 무관한 무대미술에 발을 들여놓은것도 피할수 없는 생활난때문이였다.

그때 그의 생활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남의 집 곁방살이를 시작하였지만 집세를 물 돈은커녕 호구지책도 할수 없었다. 그런 속에서 그의 처가 임신을 했다.

조선중앙일보사 려운형사장의 서기로 근무한바 있는 안해는 외유내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웃들앞에서 가난을 드러내보이기에는 자존심이 높았던 그 녀자는 자기들이 굶는다는것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숯만은 사다가 마당에서 풍로에 물을 끓였다.

하루는 당시 무대미술을 하고있던 김일영이 강호의 집에 찾아왔다가 그들부부가 굶주림에 시달려 비틀거리고있는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강호군, 어떻게 그렇게야 살겠나? 더구나 아주머닌 혼자몸도 아닌데 … 참, 요즘 연극을 많이 하는데 무대미술을 해서라도 굶어죽지는 말아야지.》

강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무대미술을 전혀 몰랐던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었고 영화미술은 그럭저럭 해보았지만 무대미술은 난생 처음이였다.

혀를 끌끌 차던 김일영은 친구를 자기 집에 데려다 이틀동안 재우면서 무대미술이 어떤것이라는것을 차근차근 가르쳐주고 극단으로 데리고 갔다.

강호가 처음으로 맡은것은 연극 《촌색시》였다.

강호는 무대미술의 묘리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무대우에 무대장치를 세운것이 아니라 진짜 기와집, 초가집을 짓고 토담, 벽돌담을 쌓은것처럼 하였다.

극단 경영주는 무대미술가가 돈을 많이 쓴다고 툴툴거렸다.

그러거나말거나 강호는 밭을 가는 황소처럼 부지런히 무대장치를 완성해나갔다.

드디여 서울 부민관에서 연극 《촌색시》의 첫 공연이 진행되였다.

무대막이 오르자 객석은 한동안 물을 뿌린듯 조용하였다.

강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실패로구나!)

다음찰나 장내에서 《야!-》 하는 환성이 들려왔다. 관중들은 무대우에 덩실하게 올라앉은 진짜 조선기와집을 보자 잠시 얼떠름했다가 뒤늦게야 감탄을 터뜨렸던것이다.

구경갔던 강호의 안해마저 남편이 만든 무대장치를 보고 신통하다고 기뻐했을 정도였다.

《사실은 내가 무슨 요령이 있거나 재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대미술을 전혀 몰라서 그렇게 되였다.》

강호가 후날 친우들에게 한 고백이였다.

첫 공연이 끝나기 바쁘게 무대우에 세워졌던 진짜 기와집과 초가집, 토담에 대한 소문은 강호의 이름과 함께 서울시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관객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그제야 볼이 부었던 극단 경영주의 입이 터진 팥자루처럼 헤벌어졌다.

새로 온 무대미술가의 근면성과 미술감각의 덕으로 그는 가슴이 알알하던 손실액을 보충한것은 물론이고 약차한 돈까지 벌었던것이다.

기실 강호가 무대미술에 손을 댄것은 임신한 안해와 매일처럼 독촉받는 집세때문이였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 분야의 권위자로 되였던것이다.

강호는 성공의 문을 통과할수 있는 출입증인 재능과 정열, 의지를 다같이 소유한 사람이였다.

얼핏 생각하면 예술계의 여러 분야에 관여한 강호는 마치 팔방미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진짜 모습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사회적모순을 반대하는 전선의 참호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굳센 인간의 자태였다.

용감한 사람은 후퇴를 모른다. 만약 그가 자기의 신념을 조금만 양보하였더라면 지겨운 감옥살이를 두차례나 하지 않았을것이고 넉넉치는 못해도 한 가정의 평안만은 근근히 보장할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같은 성미는 전향이라는 치욕을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는 일제에게 굴복한 일부 작가, 예술인들이 전향문학을 하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강호는 그 어떤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프로레타리아영화예술의 선구자로서 영화 《지하촌》, 《암로》와 더불어 자기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또다시 전선으로

 

조국해방은 누구에게나 환희와 열정을 안겨주었다. 강호 역시 해방만세의 메아리속에서 진정한 민족의 예술전선에 나설 결심을 안고 연극인동맹사업에 발벗고 나섰다.

그는 조선프로레타리아연극인동맹 서기장을 하면서도 연극 《3. 1운동》, 《폭풍우》, 《불길》에서 무대미술을 담당하였다.

허나 서울은 인민을 위한 진정한 예술전선에 서고싶어하는 한 미술가의 소원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이러한 그에게 어버이수령님께서 참다운 인민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애국적인 지식인들을 부르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것은 마치도 사나운 풍랑속에 길을 잃고 힘겹게 파도를 헤쳐가던 배길우에 마침내 희망의 등대불이 비쳐온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호는 송영, 박세영, 윤기정 등 진보적인 작가, 예술인들과 함께 진보적인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려는 자신들의 의지를 밝힌 성명서를 공동으로 제출하고 단호히 북으로 들어왔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북조선에 들어온 그에게 북조선연극인동맹 서기장, 국립예술극장 총장 등을 력임하도록 하시였다.

그 사랑, 그 은정속에서 강호는 가극 《금강산팔선녀》(1947년), 연극 《춘향전》(1948년)의 무대미술을 훌륭히 완성하였다.

민족적량심을 지켜 두차례의 감옥살이까지 겪어야 했던 강호는 비로소 인민을 위한 진정한 문화전선에 서게 되였다.

민주건설의 노래가 흥겹게 울려퍼지던 이 땅에 전쟁의 불구름이 몰려왔다.

강호는 전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1년후에는 예술영화촬영소에서 사업하면서 영화문학 《또다시 전선으로》를 창작하였다. 강호자신이 영화문학과 미술을 직접 담당한 이 영화는 전시 조선의 영화예술에서 처음으로 인민군대의 대중적영웅주의를 취급한 의의있는 작품이였다.

그 영화는 해방과 함께 시작된 그의 창작활동에서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영화창조의 나날은 그에게 있어서 어버이수령님의 지도를 받으며 인민의 문예전사로서의 참된 품격과 자질을 갖추어나간 영광의 시절이였다.

그 영화의 초기제목은 《조국을 위하여》였다.

소박한 갱도영사실에서 영화창작가들과 몇명의 지도일군들과 함께 영화를 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영화창작에서 나타난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영화가 제목에 비하여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고 하시면서 단지 싸움을 잘하는것만으로 영웅이 되는듯이 그렸는데 영화에서는 개인영웅주의가 아니라 집단적영웅주의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얼마나 심오한 말씀인가.

당시 영화창작가들은 주인공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그린다고 하면서 주인공 한사람만을 내세우고 그만이 싸우는것처럼 그려놓았던것이다. 인민군용사들의 대중적영웅주의가 전쟁을 이기는 기본힘으로 되고있던 전쟁의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형상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화에 나오는 지휘관의 형상이 잘 안된데 대하여서도 지적하시였다. 영화에서는 지휘관이 갱도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시면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휘관들은 저렇지 않다고,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지휘관은 선두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사실 전쟁시기 돌격전의 선두에는 언제나 지휘관들이 서있었고 그들이 웨치는 《나를 따라 앞으로!》의 돌격명령에 따라 승리의 진격로가 열려지고있었다. 그런데 창작가들이 전쟁의 이런 현실과 인민군대의 우월성을 깊이 연구하지 않다나니 그런 결함들이 나타났던것이다.

더구나 영화에는 애정문제가 있어야 흥미있다는 낡은 미학관에 사로잡혀 인민군전사와 간호원처녀와의 사랑관계를 진하게 끌고감으로써 마치 사랑문제가 전시의 기본문제의 하나인듯 한 인상까지 주었던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수령님께서는 병원에서의 사랑관계가 전사들의 교양에 그리 좋을것 같지 않다고 깨우쳐주시였으며 미국놈들의 폭격에 조선이 재더미가 되였다는것을 전세계가 다 아는데 병원을 왜 그렇게 화려하게 찍었는가고 지적하시였다. 놈들의 폭격속에서도 조선인민은 굴하지 않고 살아있다는것을 강조하기 위한 창작가들의 주관적인 생각과는 달리 진실을 외곡하고 현실을 미화분식한 결과를 초래하였던것이다.

모든것이 어려운 전시의 현실에서 국가의 물자와 재정을 많이 들여 찍은 영화가 이렇게 결함투성이가 되고말았으니 창작가들과 일군들은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락심하여 의기소침해있는 창작가들을 둘러보시면서 수령님께서는 일하느라면 오유도 범할수 있는데 잘못은 고치면 된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자책감에 모대기는 창작가들에게 영화의 내용과 인물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며 제목은 될수록 소박하고 내용에 맞게 달아야 한다는 등 구체적인 수정방향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영화시사를 끝내고 나오신 수령님께서는 최고사령부건물을 가리키시면서 나라의 최고사령부도 이런 집에 있는데 동무들이 만든 영화에 나오는 야전병원은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그러니 누가 믿겠는가,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시였다.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심장깊이 새긴 강호는 영화문학을 대담하게 재수정하고 제목도 《또다시 전선으로》로 고치였다.

그는 전선에 나선 일선용사의 심정으로 창작을 해나갔다.

진실한 세부묘사들을 위하여 현지답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형태의 전호, 전선지휘부, 야전 및 후방병원들에 대한 수백매의 자료를 취재하였다.

결과 실전의 분위기속에서 모든 극형상들이 창조될수 있었다.

그가 영화에서의 진실한 색채를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현장들에서 창조한 영화미술 특히 가렬한 전투를 형상한 화폭들에서의 색채는 작품성공의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고 볼수 있다.

폭탄과 포탄이 터지는 속에서의 강렬한 적색과 남색대조, 밤에 창문으로 스며드는 차고 흐린 광채와 전등불의 따뜻한 빛과의 대조, 부드럽고 정서적인 색채와 강렬한 색채, 어둡고 암담한 색채와 따스하고 청신한 색채 등의 조화는 영화의 예술적형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를 완성하여 다시금 어버이수령님께 올리였다.

영화를 다시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조국의 촌토를 지키는 우리 인민의 영웅적투쟁모습을 훌륭히 형상하였으며 우리 인민군전투원들의 영웅적기개와 혁명적락관주의를 잘 묘사하였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

그리고 이 영화창작에 참가한 일군들을 크게 표창하며 《로동신문》을 통하여 영화를 널리 소개선전하도록 하시였다.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는 우리 인민이 지닌 높은 애국심과 무비의 영웅성을 평범한 인민군전사의 형상을 통하여 감명깊게 보여줌으로써 제8차 까를로비와리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수여받았다.

강호는 해방전 프로레타리아문예전선에서 활약하면서 영화문학도 써보고 무대미술과 영화미술도 해보았다.

그는 조국이 없고 위대한 수령의 령도를 받지 못한 문예인의 운명이란 어떤것이였던가를 해방전 오랜 지우였던 라운규의 운명을 두고 생각해보았다.

조선영화계의 별로 떠받들리우던 라운규는 강의한 투지와 정신, 노력만 있다면 반드시 민족영화의 앞길을 열어나갈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민족적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도 쳐보았다.

허나 식민지문예인의 운명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라잃은 수난자의 끓어오르는 울분과 항거의 목소리마저 터쳐놓을수 없었던 그는 일제의 악랄한 박해와 탄압에 의하여 너무도 일찌기 스러졌던것이다.

라운규는 36살에 요절함으로써 영화인의 일생을 마쳤다. 《아리랑》의 노래에서처럼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났던것이다. 구만리 창공으로 훨훨 나래쳐야 할 한창나이의 라운규, 밝은 태양이 빛나는 새세상에서 진정한 민족영화의 푸른 꿈을 펼쳐보기를 그처럼 소원하던 그는 희망의 아리랑고개를 끝내 넘지 못하고 영화의 날개를 접었다.

강호는 비로소 자신이 공화국의 품에 안기였기에 자기의 오랜 지우가 바라고바라던 아리랑고개를 넘어왔음을 깨달았다.

해방전 그가 창작한 영화 《지하촌》은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조차 사라져버렸다.

허나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를 받으며 창작된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는 국제영화축전에까지 나가게 되였던것이다.

강호는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다시 태여난 인민의 문예전사로서의 자기의 참된 사명을 다하리라 굳게 마음다지였다.

전후에도 그는 연극 《다시는 그렇게 살수 없다》, 《1211고지》, 《조선의 어머니》, 가극 《밀림의 력사》, 예술영화 《생의 노래》 등 수많은 작품들에서 무대 및 영화미술을 사상예술적으로 훌륭히 창조하였다.

강호는 마침내 자신이 진정한 민족문화예술전선에 굳건히 섰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하기에 그는 공화국창건 10주년을 맞으며 쓴 《불타는 의욕과 만만한 자신》이란 글에서 이렇게 피력했다.

《여러 전선이 나를 부르고있다. 보다 새롭고 성과있는 무대미술을 창작하고 수채화와 삽화를 더 충실하게 공부하고 미술사를 연구하고 영화문학과 희곡도 습작하고 기회만 있으면 영화연출도 하겠다는것이 공화국창건 10주년을 맞이하는 내 결의로 되고있다. 이것은 부질없는 욕심이 아니다. 모든 가능한 조건은 열려져있고 내 심장은 아직도 젊었다. 천리마를 탄 기세로 내닫는 사회주의조국과 함께 이것도 저것도 하는 내 창작생활도 성과있게 앞으로 전진할것을 나는 믿고있다.》

해방전 식민지예술인의 처지를 페부에 절감하며 살아온 강호는 이런 행복한 생활과 자유로운 환경에서 그리고 가능한 모든 조건이 마련된 튼튼한 예술전선에서 자기의 모든 재능을 활짝 꽃피우고 전진시키고싶었다.

무대미술이란 종합예술이라고 할수 있다.

무대미술은 독립된 한폭의 그림으로서 가치를 가지는것이 아니라 무대예술창조에 참가하는 다른 요소들 즉 극대본, 연출, 배우, 음악, 무용, 조명효과 등과의 유기적인 련계속에 놓여있으며 무대미술창조사업은 창작으로 끝나지 않고 재현과정과 무대적실현과정을 총체적으로 포괄한다.

카프시절부터 영화문학 및 연출, 배우연기와 무대미술의 모든 방면에서 남다른 재기를 보여주었던 강호는 문학예술부문의 중임을 맡아 수행하면서도 영화촬영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비상한 정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민주주의문화건설을 위한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가극 《금강산팔선녀》, 《춘향전》, 《온달장군》 등의 무대미술을 창작하였으며 《로동신문》에 련재된 리기영의 장편소설 《땅》의 삽화까지도 맡아하였다.

장편소설 《땅》의 삽화는 해방후 조선의 농촌에서 일어난 전변을 개성적인 인간형상발전의 계기에 맞게 삽화적으로 직관성있게 잘 처리한것으로 하여 이 시기 소설삽화발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영화미술 《생의 노래》는 조선로동당창건 20주년경축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으로 입상된 작품으로서 그의 풍부한 창작경험과 높은 예술적분석력, 조형적창조능력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그의 무대 및 영화미술은 생활환경처리와 의상 및 소도구해결에서 민족적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력사주의적원칙과 현대성의 원칙을 옳게 결합시킴으로써 생활적으로 진실하고 정서성이 잘 보장되여있었다.

작중인물의 소도구와 의상이 배우의 성격형상에서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은 그는 세부적인 모든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인공의 성격과 생활형상에 커다란 도움을 주게 하였다.

또한 민족적인 고유한 생활풍습과 정서적기분을 무대미술을 통해서 뚜렷하게 창조하였다.

강호는 자신이 언급한것처럼 민족문화건설을 위한 사업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무대미술창작에 나서서 성과를 올리던 그는 나라의 미술후비들을 키워내는 교육사업에서도 자기 의무를 다하였다.

그가 후대교육사업에서 이룩한 성과는 전적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강호는 평양미술대학에서 강좌장으로 있으면서 후비육성사업에 모든 힘을 다하였다.

허나 해방전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에 궁여지책으로 발을 들여놓고 무대미술을 리론으로가 아니라 실천속에서 파악했다고는 하지만 처음으로 교단에 서니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제일 난문제는 미술작품창작에서 유화와 조선화를 어떻게 구현하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유화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하면서 유화에 비해 조선화가 차요시되는 경향이 농후하였던것이다.

강호는 생각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의 미술은 인민의 생활감정과 정서에 맞는 참다운 인민적인 미술로 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미술교육에서 수령님의 이 가르치심을 구현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바로 이러한 때인 1972년 9월 6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로작 《문학예술작품창작에서 혁명적인 전환을 일으킬데 대하여》를 내놓으시고 미술분야에서 조선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향과 방도에 대하여 뚜렷이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금 미술분야에서 조선화를 차요시하는 편향이 나타나고있는데 앞으로는 조선화를 그리는데 중점을 두고 조선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힘을 넣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바로 그것이다. 조선화는 우리 민족이 창조한것으로서 우리 인민의 생활감정과 정서를 가장 훌륭하게 반영할수 있는 화법이 아닌가.

강호는 미술분야에서 조선화를 토대로 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기 위하여 조선화가 가지고있는 화법의 우월성을 하나하나 탐구해나갔다.

강호는 《무대미술의 민족적특성을 살리기 위하여》라는 자기의 글에 이렇게 썼다.

《무대공간에 구성된 조형적형상-그것은 고전작품이거나 또는 력사에서 취재한 작품에서뿐만아니라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있는 오늘의 현실을 묘사한 작품에 있어서도 반드시 민족적특성을 반영하여야 할것이다.

고전적작품이나 력사에서 취재한 창극, 가극, 무용극 등에서 조선화의 수법을 도입함으로써 민족적특성을 반영하여야 한다.

조선화의 선의 강약은 무대미술을 생동하게 형상하는데 큰 도움을 줄것이며 조선화의 겸손한 색채는 무대미술을 우아하게 할것이며 조선화가 가지는 여백에서의 시적정서는 무대미술에 심오한 극성을 조성하게 할것이다.

무대미술에 조선화의 수법을 도입하는것은 민족적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의미에 있어서, 무대미술에 민족적특성을 부여하는 의미에서뿐아니라 우리 나라 무대미술의 형상성제고에 있어서도 막대한 기여를 하게 될것이다.

조선화의 여백이 가지는 서정적이며 시적인 풍부성은 무대미술에서의 민족적형식을 찾는데서뿐만아니라 무대미술의 예술성을 제고하는데 있어 또한 우리 나라 무대미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있어 막대한 기여를 할수 있을것이다.

또한 조선화가 가지는 색채의 소박성과 겸손성은 무대미술을 보다 우아하게 할것이며 조선인민의 고상한 생활감정과 전통적인 민족적품성에 부합하게 될것이다.

조선인민의 고유한 감정과 정서, 풍습과 기개를 진실하게 반영했을 때 무대미술은 참으로 인민적이며 생활적인 미학의 립장에 서게 될것이며 따라서 무대미술에서의 민족적특성도 여기에서 이루어질것이다.》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교수내용과 방법을 주체적립장에서 새롭게 세우며 리론교육과 실기교육을 결합시켜나가기 위해 자기의 열정을 깡그리 바쳤다.

강호는 학생들이 겸비한 재능을 중시하고 그것을 키워주기 위해 아글타글 애쓴 량심적인 교육자였다.

그는 대학으로부터 집으로 오가는 길에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형들의 존경어린 인사를 받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강호의 자식들은 훌륭한 아버지를 둔것으로 하여 긍지감을 느끼군 했다.

언제인가 그의 맏딸이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가고있었는데 미모의 한 처녀가 마주 오다가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것이였다.

《곱게 생겼군요. 누구예요?》

딸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강호는 빙그레 웃었다.

《오향문이라는 영화배우의 맏딸이란다.》

당시 어느 한 예술단체의 소개자였던 그 처녀가 바로 후날 예술영화 《축포가 오른다》(1978년)의 주인공역을 수행한 때로부터 영화계에 등장하여 예술영화 《도라지꽃》(1987년), 《생의 흔적》(1989년)의 주인공역을 비롯한 많은 역형상들을 훌륭히 해낸 인민배우 오미란이였다.

인민예술가인 김윤도 한때 강호의 제자였다.

김윤은 일찌기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고있었는데 앓고있는 어머니때문에 대학을 끝까지 졸업하겠는가 아니면 사회에 나가 어머니를 부양하겠는가 하는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하고있었다. 그는 생각다못해 사회생활을 하면서 통신으로 미술대학을 졸업하리라 마음먹게 되였다.

어느날 강호는 김윤의 집으로 갔다. 집안을 둘러보고난 그는 자기가 교원으로서 관심을 돌리지 못해 안되였다고, 자기네 집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와 서로 도우면서 공부를 계속하자고, 학습도 전투로 생각하고 하면 해낼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 김윤은 가슴이 찌르르하고 눈굽이 뜨거워났다.

《강좌장선생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모든걸 극복하면서 공부도 하고 어머니도 부양하겠습니다.》

김윤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몇해동안 강호의 집에 얹혀살면서 공부를 직심스레 하였다.

진실하고 능력있는 스승의 보살핌속에 대학시절을 마친 그는 지금 이름있는 가극단의 미술실 실장으로, 인민예술가로, 김일성상계관인으로서 값높은 삶을 누리고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호강좌장선생님은 엄격하고 요구성이 높으면서도 인자한 스승이였고 학생들을 다면적으로 준비된 미술가로 키우시려 전심전력하신분이다. 현지실습을 다닐 때에도 건물 하나, 나무 하나, 바위돌 하나 그저 스쳐지나지 않고 일반상식은 물론 그 지방의 기후풍토, 풍습, 건축양식 등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주군 하시였다.》 라고 회상하면서 스승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강호는 무대미술 및 영화미술교육사업에서 이룩한 공로로 하여 1961년 4월에 예술학 부교수의 학직을 수여받았다.

강호는 신병으로 교단을 내린 후 생의 말년까지도 영화촬영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영화촬영에서 가끔 이여의 문제가 제기될 때면 적중한 조언을 주군 하였다.

그 시절 적지 않은 영화배우들이 한창나이의 대학생들처럼 그의 집에 찾아와 이야기듣기를 즐겨하였다.

강호가 후대들을 위하여 남긴 유산중에는 두권의 참고서도 있다.

그는 영화 및 무대미술창작가들을 위한 참고서들인 《해방전 우리 나라 살림집과 생활양식》과 《해방전 우리 나라 옷양식》을 집필하였다.

도서 《해방전 우리 나라 살림집과 생활양식》에는 조선에서 살림집의 형성발전과 살림집들이 가지는 제반 특성, 조선건축물의 다양한 류형들, 조선살림집들의 지역별특성, 장식물과 생활도구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서술되여있다. 조선의 동부지대와 서부지대, 중부지대의 살림집과 부엌세간, 생활수단들이 직관적으로 명료하게 그려져있었다.

도서 《해방전 우리 나라 옷양식》에는 조선봉건왕조시기 조선의 복장, 조선봉건왕조 말기 조선에서의 옷형식변화와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조선의 옷형식 등이 자세한 글과 삽화로 구체화되여있다. 그리고 일본, 짜리로씨야, 미국, 영국, 도이췰란드,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옷형식자료들과 조선봉건왕조시기 왕으로부터 대신, 량반관료, 고을아전, 궁중악사, 평민, 군대, 경찰 등에 이르기까지 착용하였던 옷종류와 차림새들, 일제와 유미자본주의나라의 군대복장들이 세부적으로 그려져있다.

이 책들은 해방전 우리 인민들의 생활을 그리려는 젊은 창작가들에게 해당 시기의 생활환경과 각이한 인물들의 옷형식에 관한 생동한 자료를 제공해줌으로써 작품창작에서 력사적구체성과 진실성을 보장할수 있게 도움을 주고있다.

이 참고서들을 집필할 당시 강호는 70이 지난 고령의 몸이였고 오래동안 앓고있던 신병으로 운신조차 하기 힘든 처지에 있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한 자식들은 혈압이 높은 아버지가 고생을 사서 한다고 앞을 막아나섰다.

그러나 그는 참고서집필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하고 변천하는 세월과 더불어 후대들을 위해 꼭 해놓아야 할 자신의 인생과제로 여기였다.

그는 조선의 북부지대인 삼수, 갑산의 산간오지로부터 개성의 송악동에 이르기까지 지팽이에 몸을 의지하고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뙤약볕속에 쪼그리고 앉아 삽화를 그리고 밤마다 초인간적인 힘을 모아 집필에 몰두하였다.

정보시대인 오늘날처럼 영화화면을 콤퓨터로 만들어내는 시대라면 차를 타고 다니며 사진이나 찍는것으로 자료작업을 대치할수도 있었을것이지만 그때에는 그런 호사를 바랄수 없었다.

강호는 나라의 방방곡곡을 편답하면서 한편한편의 삽화를 얻었고 그것으로 참고서내용을 보충해나갔다.

70고령에 신병으로 신고하는 그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간고한 길을 걸으면서 헐치 않은 참고서집필을 진행하였다.

후대들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애정,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 강호의 참모습이다.

미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만이 후대를 위하여 큰것을 남길수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의 수명은 수백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지로 그런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뿐만아니라 인간은 한생 넓고 큰 세상을 다 볼수 없으며 무정한 시간은 한초도 멈춰서지 않고 끝없이 흐르면서 모든것을 지워버린다. 하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후대들의 눈에는 전 세대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들려오는것이다.

아마 이 세상에 미술가들은 많지만 자기가 사는 시대를 관통하는 민족의 살림집풍속과 옷에 대해 후대들에게 빠짐없이 알려줄 생각을 하는 사람은 쉽지 않을것이다. 력사와 후대들에게 성실한 사람, 보통사람들이 지닐수 없는 커다란 사랑을 지닌 참된 인간만이 이런 값진 참고서를 구상할수 있지 않겠는가.

강호는 그저 구상만 한것이 아니라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그 바쁜 나날에도 짬시간이나 실습기간의 여가를 리용하여 엄청난 정력으로 자료작업을 해나갔다. 지어는 자기가 해방전 감옥살이를 할 때 감옥간수들의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자기 눈에 비쳐진 외국군대들의 복장과 무기들에 대해서까지도 섬세하게 기억해냈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기억력이 대단히 좋았다. 참고서에는 남쪽지역의 집들에 대한 자료들도 적지 않다. 필경 그자신이 젊은 시절에 보았던것의 재현일것이다.

아득한 옛시절의 흔적들을 그가 어떻게 기억하고 삽입해넣었는지 감탄할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면 그는 수십년동안이나 도서를 위한 자료작업을 한셈이다.

해방전과 해방후를 관통하는 력사적시기의 자료들을 모아 귀한 책을 만들어놓은 그 노력은 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것을 뜨겁게 생각하게 한다.

강호는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둘로 갈라진 국토는 그 소원을 풀어주지 못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이다음 통일이 되거들랑 고향에 꼭 찾아가 아버지는 갔지만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것을 말해달라고 당부하군 하였다.

나이가 많으면 지나온 한생을 돌이켜보며 태를 묻은 고향땅에 찾아가 선산의 부모앞에 절이라도 하고싶어하는것이 인간의 성정이다. 하지만 강호에게는 보통사람들이 누리는 이런 행운이 차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의 그림을 동네방네 자랑하던 부모와 서로 자기를 업어주겠다고 싱갱이질을 하던 누이들을 그려보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썼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통일을 갈망하면서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친 그의 피타는 노력으로 우리 후대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무릎에 올라앉아 말로만 들어본 민족의 고유한 풍속들을 산 화폭으로 알게 되였던것이다.

참으로 그는 우리 나라 초기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진보적이고 다재다능한 예술가였으며 공화국의 품속에서 무대미술창작과 후비육성, 도서집필로 커다란 정신적유산을 남긴 정열의 인간이였다.

그는 지금 우리의 곁에 없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 그가 남긴 말을 되새겨보게 된다.

《아마 내가 북으로 들어오지 못했더라면 나도, 나의 재능과 유산도 없었을것이다.

나의 작은 재간이나마 민족을 위한 길에 바칠수 있었던것은 다 수령님의 품에 안겼기때문이다.

곡식은 땅을 잘 만나고 사람은 령도자와 제도를 잘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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