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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박태원(작가)

                    

                      • 1909년 12월 7일 서울에서 출생.

                      •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작가로 활동.

                      • 1986년 6월 10일 사망.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과 더불어 우리 민족문학사에 재능있는 력사소설가로 알려진 박태원!

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또 다른 박태원이라고 할수 있는 그의 안해 권영희가 작가의 가장 믿음직한 일심동체의 방조자로 된 사연을 간단하게나마 먼저 말해야 할것이다.

그의 딸 정태은은 아버지 박태원과 어머니 권영희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갑오농민전쟁〉 제3부에는 박태원, 권영희 두 이름이 씌여져있다. 그러나 나는 1, 2부의 박태원이라는 이름밑에서 또 하나의 다른 이름 권영희를 본다.

엄마는 아버지의 절반이였다.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아버지는 한생을 문학에 종사하면서 많은 작품을 썼지만 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엄마가 없이는 불가능한 처지에 있었다. 창작은 고사하고 육체적인 존재자체를 유지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부부란 가위와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나는 엄마와 아버지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서로 필요로 하고 의지한다는것의 참의미를 알았다. 일반적인 부부의 의미를 초월한 더 높은 곳, 더 확실한 곳, 더 큰 곳에 살고있는 존재가 다름아닌 나의 엄마와 아버지라는것을 퍽 후에야 발견했다. 아버지는 력사소설과 함께 어머니라는 살아움직이는 창작품을 탄생시키였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안해였고 엄마였고 문우였고 제자였다. 그들은 둘이였지만 하나의 결정체였다. 그 결정체는 아버지의 죽음으로써만 쪼각났다.》

어느 정도 특이한 필체와 감정으로 엮어진듯 한 딸의 글에도 있는것처럼 박태원과 권영희는 분렬된 조국의 시련이 필연적으로 결합시킨 부부라고 할수 있다.

권영희녀성의 본남편 정인택은 해방전은 물론 해방후에도 남조선에서 쟁쟁한 소설가로 이름날리던 재능있는 작가로서 박태원과 가까운 사이였다. 처마를 맞대고 앞뒤집에서 함께 살아오면서 안해들끼리도 류다른 정을 맺고있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해방된 서울에서 새 제도, 새 세상을 받들어 일도 함께 했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공화국을 따라 북행길도 함께 떠났다. 남편들은 남편들대로 의용군대렬을 따라, 안해들은 안해들대로 자식들과 함께 험난한 후퇴의 먼길을 걸었다. 그런데 어찌하랴. 운명은 그립던 북녘땅에서 가슴아픈 리별과 상봉의 극을 펼쳐놓았다.

한 집에선 남편이 못 오고 또 다른 집에선 안해가 오지 못했다.

안해없이 문필활동에 피를 태우고있는 력사소설가 박태원과의 결합으로 권영희녀성은 인생의 두번째 장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것은 고뇌인 동시에 보람이였고 행복과 기쁨인 동시에 강의한 의지를 요구하는 강행군이였다.

만약 권영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소설가 박태원의 한생은 《갑오농민전쟁》과 더불어 문단의 별이 못되였을수도 있다.

박태원이 불의 인간이라면 권영희는 자기의 몸을 통채로 그 불길을 솟구는데 이바지한 헌신의 인간이였다.

이제 참된 인간의 력사를 찾아 그우에 보람찬 삶의 자욱을 아로새긴 박태원의 인생행로와 함께 그 길에 찍힌 믿음직한 안해의 자욱도 더듬어보기로 하자.

 

 

《순수문학》의 상아탑에서 벗어나

 

망국의 호곡이 터져올랐던 을사년의 그날로부터 4년째 되던 해에 서울거리의 한 집안에서 새 생명의 출생을 알리는 고고성이 울려나왔다.

금방 태여난 아기는 빨간 주먹을 귀엽게 내저으며 마치 방안에 푹 배인 고려약냄새에 취한듯 방그레 웃고있었다.

그가 바로 후날 우리 문학사에 큰 자욱을 남긴 력사소설가 박태원이였다.

약제사였던 아버지의 덕에 려염집자식들처럼 빈손을 빨지 않았지만 왜놈들의 게다짝소리에 이마살을 찡그리면서 성장한 박태원은 자식의 번성한 장래를 원하는 부친의 엄한 훈계로 일본의 법정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망국노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들쓰기마련인 굴욕적인 민족적모욕과 가증되는 학비난으로 하여 그는 중도에서 사각모를 벗고말았다.

대학생복에 묻은 섬나라의 먼지를 아무런 미련없이 툭툭 털어버리고 서울로 돌아온 박태원은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눈총을 뒤잔등에 받으며 원고지를 꺼내들었다.

14살때인 보통학교시절에 쓴 《입학》이라는 작문의 호평으로 문학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을 가졌으며 그후 똘스또이니, 듀마니 하는 작가들의 소설을 탐독하느라 푼푼치 못한 등잔기름을 어지간히 써버렸던 그가 창작의 붓을 닁큼 든것은 불가피한 운명이라고 할수 있었다.

1930년 잡지 《신생》 10호에는 박태원의 첫 단편소설 《수염》이 발표되였다.

문학의 초학도는 숨을 죽인채 자기의 첫아들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자 친구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나타났다.

《태원이, 소설을 잘 썼네.》

《축하하네. 앞으로 더 좋은 소설을 써주게.》

그제야 박태원은 자기의 자식이 미남이라는것을 알고 죽였던 숨을 후- 내쉬였다.

처녀작의 발표로 힘을 얻은 그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박태원은 24살 나던 해인 1933년에 정지용, 김기림, 리상, 리효석 등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9인회》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왕성한 정력으로 붓을 달렸다.

다음해 그는 단편소설집 《구보씨의 하루》를 발표하였다.

그 소설집 역시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일정한 평가를 받았다.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구보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들이 잘 따르지 않으면 지어 아첨하기도 했다.》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아마도 작가자신이였던것 같다.

실지로 박태원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웬만한 어른들같으면 열번도 손이 나갔을 일에도 그는 부드러운 말로 아이들을 타이르군 했다.

《뭘 그러오? 아이가 아니요.》 하고 그는 못된 장난을 친 개구쟁이의 엉덩짝을 철썩 갈겨주기 바라는 사람들에게 서둘러 말하군 했다.

이러한 그였기에 자기 딸이나 손녀라 할지라도 손찌검은커녕 언제 한번 반말을 해본적이 없었다.

1935년에 그는 첫 장편소설 《청춘송》을 발표하였는데 그 소설은 《조선중앙일보》에 련재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중견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였다.

박태원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중류급이하 사람들의 세태풍속을 그린 장편소설 《천변풍경》(1938년)을 내놓았으며 《명랑한 전망》(1938년), 《애경》(1940년), 《녀인성장》(1941년), 《원적》(1945년, 미완성) 등 장편소설들을 련이어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섬세한 세부묘사와 진지하고 치밀한 구성, 세련된 언어구사로 하여 이때까지 우리 나라 소설문학계에서 보기 힘든 높은 예술적기교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박태원은 자기의 창작에 대해 점차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부르죠아문단에서는 그의 작품을 두고 저저마다 찬사를 올리였지만 근로인민대중속에서는 별로 좋은 반향이 없었다. 오히려 랭담했다고 해야 할지…

사실 이때까지 박태원이 쓴 현실주제작품들에는 근로인민대중의 절박한 사회적처지와 격동하는 투쟁기세가 전혀 반영되지 못하였으며 부르죠아모더니즘의 영향밑에 중소부르죠아계급이나 최하층인간들의 저조한 세태생활을 자연주의적으로 그린 《순수문학》의 그늘이 짙게 비껴있었던것이다. 사회정치적문제에서 멀리 떨어진 그의 문학세계는 해방을 전후하여 류례없이 심각한 력사적사변을 겪으며 민족적 및 계급적각성기를 걷고있던 우리 인민의 사상감정에 맞을리 없었다. 차츰 짙어가는 번민속에서 그는 이웃나라의 력사소설과 민족고전들도 번역하고 또 직접 력사소설들을 쓰면서 새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박태원은 력사에 대한 예술적탐구를 시작하면서 장편력사소설 《홍길동전》, 《리순신장군》을 창작하고 중국력사소설들인 《삼국지》와 《수호전》을 우리 말로 번역하였다.

그의 력사소설창작에 하나의 리정표로 된것은 홍명희의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이였다.

《림꺽정》은 1928~1938년까지 《조선일보》에 련재되여오다가 그후 단행본으로 출판되였다.

당시 《림꺽정》의 인기는 대단했다.

글개나 아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장에 가면 장에서, 상점에 가면 상점에서, 역전에 가면 역전에서 의협심이 강한 림꺽정과 장기 잘 두고 하루밤에 천리를 간다는 황천왕동, 힘장사 곽오주와 얄미운 서림에 대한 열기띤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박태원도 열성적인 독자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며칠밤을 새우며 여러권의 《림꺽정》을 다 읽어버렸다.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페지를 덮은 박태원은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뒤졌다. 그리고는 지난날 자기가 썼던 장편소설들을 꺼내들었다.

벌컥벌컥 책장들을 번지던 그의 갸름한 얼굴에 쓰거운 미소가 그려졌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의 소설에는 《림꺽정》에 맥맥히 흐르는 인민들의 지향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자기의 몸을 서슴없이 바치는 영웅남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있다면 가정잡사에 빠져 돌아가는 못난이들뿐이였다.

무엇인가 잘못되였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던것이다.

그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돌이켜보면서 자기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떨쳐나선 인민의 지향을 외면한채 《순수문학》의 상아탑속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고있었다는것을 통절히 느끼였다.

(어떻게 해야 《림꺽정》처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진짜 소설을 쓸수 있겠는가?)

불현듯 자기가 쓴 일부 소설책들이 독자들의 랭대를 받고 서점에서 셈평좋게 잠을 자고있던것을 본 일이 생각났다.

그때에는 그 원인을 자기의 미숙한 기교상문제로, 어떤 때는 독자들의 몰리해로 밀어붙였었다.

하지만 《림꺽정》을 보고난 이상 더는 자신을 기만할수 없었다.

작가라면 마땅히 인민들의 리해관계를 반영한 작품을 써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사랑을 받고 널리 애독될것이다. 독자들이 어째서 림꺽정이나 곽오주, 길막봉이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반대로 그들을 탄압하는 봉건관리들을 증오하는가?

그렇다. 인민들은 삐뚤어진 조정을 뒤집어엎기 위해 목숨걸고 나선 림꺽정과 그의 의형제들과 같은 의젓한 호걸들의 형상속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영웅들을 바라고있으며 서림이와 같이 제 리익을 위해 친우들을 팔다못해 나라까지 왜놈들에게 서슴없이 팔아먹은 친일파들을 미워하고있다.

박태원은 웅글은 신음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홍명희의 《림꺽정》이 단순히 수백년전의 력사적인물들을 취급한 력사소설만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은것이다. 그것은 력사소설이기 전에 짓눌린 겨레의 넋과 민족의 존엄에 대한 심장의 호소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누구에 대하여 찬미해왔던가?

어리석게도 나의 문학세계는 인민들의 지향이라는 거대한 대하와 너무도 거리가 먼 심산속의 시내물처럼 도란도란 흐르고있었다.

그런즉 나의 소설들이 독자들의 버림을 받은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다음순간 그의 가슴속에서는 한가지 결심이 석고처럼 굳어졌다.

(이제라도 홍명희선생처럼 내 민족의 력사를 떠올린 인물들을 보여주는 력사소설을 쓰자. 이 길만이 진정한 애국자로 사는 길이며 참된 문인이 되는 길이다!)

결국 일생동안 그를 괴롭히기도 하고 기쁘게도 해준 그의 인생목표는 누에가 실을 뽑듯 소설들을 줄줄이 써내던 20대가 아니라 40대에 이르러서야 굳어진것이다.

박태원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항구를 일찍 떠난 기선이 반드시 건너편 대안에 먼저 당도한다는 법은 없다. 만일 그 기선이 항로를 잘못 정했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맴돌거나 처음의 항구로 되돌아올수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된 력사의 부두에 가닿지 못하고 도중에 주저앉는것은 일생을 기울여 실현할만 한 숭고한 목적이 없거나 혹은 그 실현을 위해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는 인민을 위한 력사소설창작이라는 정확한 항로가 있으며 불타는 심장이 있으니만치 비록 자기의 기선이 뒤늦게 항구를 떠났지만 남먼저 대안에 당도할수도 있다는 신심을 가졌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품고 력사소설창작에 달라붙었다.

얼마후 박태원은 장편력사소설 《임진왜란》을 신문에 발표하였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한주일, 한달이 지나도 소설을 잘 썼다면서 찾아오는 친구들은 없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는것을 모를만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였다.

실패, 그것도 완전한 실패였다.

인내성이 부족한 독자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갔다.

하루는 한 친구가 나타났다.

소설이 좋다는 사람도, 나쁘다는 사람도 없어 전전긍긍하던 참이라 박태원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친구가 거리낌없이 내뱉았다.

《자넨 력사소설가로 되긴 코집이 글렀네.》

박태원은 채찍에 가슴을 후려맞은것처럼 놀랐다.

돌아가는 친구를 바래줄념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소힘줄처럼 질긴 사람이였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성공한 인간으로 되기 위한 필수적요소-인민을 위한 참다운 력사소설을 쓰려는 뚜렷한 목표와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굴함없이 뚫고나가려는 강의한 의지가 갖추어져있었다.

그는 실패의 소용돌이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언제인가는 반드시 《림꺽정》과 같은 력사소설을 쓰리라는 결심만은 꺾지 않았다.

이런 연고로 그는 홍명희를 무척 존경하였고 장편소설 《림꺽정》을 읽고 또 읽으며 사색을 거듭했다. 뿐만아니라 자신에 대한 요구성을 늦추지 않기 위해 력작 《림꺽정》옆에 졸작 《임진왜란》을 나란히 놓아두었다.

그때 그는 섶나무우에서 불편스러운 잠을 자면서 쓰디쓴 쓸개를 맛보았다는 어느 한 왕을 그려보았을지도 모른다.

력사소설가로, 참된 애국자로 살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후날 응당한 결실을 가져왔다.

바위를 갈고갈아 바늘을 만들만큼 꾸준했던 그는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난 1965년에 장편력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제1부를 창작발표하였다.

소설에 대한 문단과 독자들의 반영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수십통의 편지들이 매일처럼 날아들었다. 어떤 독자는 소설을 보고 너무 흥분된 나머지 밤늦게 집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박태원은 처음으로 웃었다.

행복했다.

얼마나 좋은가. 바로 이런 멋에 피를 말리우고 뼈를 깎으며 소설을 쓰는것이 아닌가.

보름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우편통신원을 만난 안해가 큰일 난듯이 방안에 뛰여들어왔다.

《여보, 편지가 왔어요.》

박태원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독자들로부터 독후감을 적은 수백통의 편지를 받아온 그로서는 새삼스러울것이 없었던것이다.

《여느 편지가 아니란 말이예요. 홍명희선생이…》

박태원은 후닥닥 놀랐다.

《뭐요, 홍명희선생이? …》

안해가 편지봉투를 손에 쥐여주자 그는 눈을 쪼프리고 속지를 펼쳐들었다.

《…서울에서 동무의 〈천변풍경〉을 읽고 재간있는 사람이라는것은 알았지만 력사소설도 쓰는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수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잘 썼습니다.》

박태원은 흥분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기가 오래전부터 존경하던 홍명희가 이처럼 과분한 찬사를 보내올줄은 꿈에도 몰랐던것이다.

그는 그 일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듯 아픈 눈을 비비면서 편지를 두번세번 읽었다.

며칠후 그는 안해와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청사로 갔다.(당시 홍명희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고있었다.)

홍명희는 그날 박태원을 만나 담화하면서 자기는 서울에서 많은 력사자료들을 볼수 있어 《림꺽정》을 쓰기 쉬웠는데 전쟁으로 자료들이 다 없어진 지금 동무는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쓸수 있었는가고 물었다.

박태원은 그저 어줍게 웃었을뿐이였다.

《정말 수고했소. 소설을 잘 썼소.》 하고 홍명희는 다시금 칭찬했다. 그런다음 남편의 옆에 수집게 앉아있는 그의 안해에게 진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권영희동무는 참 훌륭한 방조자요. 그러고보면 박동문 안해복이 있소.》

그의 안해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다가 남편의 등뒤에 몸을 숨겼다.

홍명희는 헤여질무렵 박태원에게 확대경을 내주었다.

《받소. 동문 시력이 좋지 않으니 필요할거요.》

다른 사람 같으면 한번쯤 례절을 차리고는 주는대로 받았을것이다.

박태원은 사양했다. 확대경은 자기보다 80이 불원한 홍명희에게 더 필요할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허허, 그러지 말고 받으라니까.》

고지식한 박태원은 또 거절했다.

《전 일없습니다.》

이쪽에서 자꾸 사양하니 홍명희도 억지로 쥐여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박태원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궁싯거렸다.

안해가 보다못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박태원은 갑자르다가 말을 꺼냈다.

《거 확대경말이요. 그걸…》

미처 터놓지 못한 남편의 뒤말을 짐작한 안해는 어둠속에서 소리없이 웃었다.

박태원은 본시 물건에 대한 욕심이 꼬물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확대경을 선뜻 받지 않은것만은 몹시 후회하는것 같았다.

모름지기 물체를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하는 그 광학기구의 쓸모보다는 자기를 《순수문학》의 상아탑속에서 벗어나도록 해준 고마운 사람에 대한 친근한 감정을 두고두고 추억하기 위해서였을것이다.

물론 우의 이야기는 작가가 서울에서 《임진왜란》의 실패로 골머리를 앓고있던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있은 일이다.

 


비상한 노력가

 

해방만세의 우렁찬 웨침이 삼천리강산을 뒤흔들었다.

우리의 풍운아는 움츠렸던 어깨를 쭉 펴고 장편력사소설 《세종대왕》, 《리순신장군》, 《갑오농민전쟁》을 쓸 준비를 다그치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것이 봄날의 꿈이였음을 깨달았다. 남조선에 상륙한 《해방자》들의 무거운 군화가 인민들의 총의에 의해 세워졌던 인민위원회의 간판들을 사정없이 으깨여놓고 10월인민항쟁에 떨쳐나선 인민들의 가슴을 마구 짓밟아버렸던것이다.

그와 함께 엊그제까지 일본기생들의 샤미센소리가 간지럽게 울리던 서울의 거리에 징그러운 양키문화가 오물처럼 범람했다.

그 와류속에서 력사소설을 쓴다는것은 투구에 갑옷을 차려입고 현대문명을 자랑하며 달리는 궤도전차에 오른것만치나 기이하게 느껴질 일이였다.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극도로 반동화되여가는 남조선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을 쓰는것이 급선무였다.

박태원은 당초의 계획을 접어놓고 《략탈자》를 비롯한 여러편의 장편소설들을 련이어 발표하였다.

그러던중에 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8일 괴뢰중앙청에 람홍색공화국기가 펄펄 휘날리는것과 함께 인민의 세상으로 전변된 서울에서 박태원은 난생처음 현실속에 살아움직이는 인간중심의 새 력사를 체험하였다. 정의와 량심이 떳떳이 머리들고 활보하는 벅찬 삶의 호흡속에서 그는 새로운 문학세계를 발견하였고 또한 자기의 붓대우에 실린 성스러운 사명을 새롭게 절감하였다. 하기에 조국앞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온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그는 서슴없이 북행길에 올랐고 용약 종군작가가 되여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그가 《림꺽정》의 안내로 들어섰던 희망의 오솔길은 인민을 위한 진정한 문학의 대로, 참된 애국의 대로와 합쳐지게 되였다.

그는 전쟁기간에 중편소설 《조국의 기발》, 《조국의 품》 그리고 많은 전투실화들을 써서 인민군군인들과 후방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조국의 하늘가에 승리의 축포가 터져오른 뒤 박태원은 화약내배인 군복을 자기집 말코지에 걸어놓기 바쁘게 력사탐구의 길에 들어섰다.

천세봉선생이 쓴 《작가수업 40년》에는 이런 글줄이 있다.

《나는 신문에 난 박태원의 앞머리를 내려드리운 사진을 보면서 나도 언제면 저처럼 유명한 작가가 될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함께 일하고있다.》

박태원은 초기에는 장편소설 《천변풍경》과 단편소설집 《구보씨의 하루》를 비롯한 현대물작품을 많이 써서 이름이 알려졌지만 원숙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서울에 있을 때부터 결심했던 력사물작품창작을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 시기 작가는 사회과학원의 력사연구소와 중앙도서관, 대학의 도서관들, 력사박물관, 민속박물관, 모란봉과 대성산, 개성과 해주, 구월산의 력사유적들과 운명적이라고 할수 있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때 그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후날 한치의 앞도 볼수 없고 한치의 걸음도 움직일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그처럼 훌륭한 장편력사소설을 써낼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방대한 규모의 《리조실록》과 《팔만대장경》 번역에서 큰 역할을 발휘한 언어학자이며 력사학자인 홍기문, 조선중세사 전문가로서 중세조선력사연구와 이 부문 후비육성에서 많은 공로를 세운 김석형, 동명왕릉과 안학궁의 발굴과 정리사업 그리고 단군릉, 동명왕릉, 왕건왕릉개건사업에 참가하여 학술적으로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조선력사를 주체적인 사회력사관에 기초하여 체계화한 박시형은 박태원의 가까운 벗들이였다.

그들은 서로 때없이 오고가면서 력사학계에서 론의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하군 했다. 그들모두가 뜨르르한 원사, 교수, 박사들인것만큼 그들사이에 진행된 대화들이 력사소설가인 박태원에게 큰 도움이 되였으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했다.

때로는 홍기문이 력사학계에서 론의되는 일련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들으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박태원은 자기의 작품이 출판되여나오면 그들에게 먼저 보냈고 그들도 자기의 저서가 출판되면 우선적으로 작가한테 보내주군 하였다.

력사탐구의 10여년간 박태원이 자료작업을 해놓은 책과 자료묶음들은 방 한칸을 차고 넘을 정도였다.

그는 력사소설은 력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없이는 쓸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으므로 력사학자이상으로 력사연구에 전념하였고 많은 지방들을 직접 편답하였다.

적지 않은 독자들은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읽고 작가가 혹시 전주사람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정도로 박태원은 전라도를 마치 자기의 고향처럼 속속들이 알기 위하여 지도작업을 열심히 하였고 그곳 전주의 마을이며 숲이며 정자며 큰 소나무며 하는것들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돌렸던것이다.

사실 그는 서울에서 나서자랐고 일본에 공부하러 갔다가 중퇴하고 돌아와 다시금 서울에서 살았으며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온이래 평양에서 줄곧 살았다. 그러므로 《갑오농민전쟁》의 무대로 서술한 전주땅은 고사하고 농촌생활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전라도의 농촌생활을 매우 방불하게 그렸다.

그통에 제일 혼난것은 순박한 그의 안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녀자는 어린시절을 충청북도 청주의 한 농촌에서 보냈었다.

작가는 틈만 있으면 안해의 농촌지식을 최대한 짜내여 자기의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고 불편한 몸이지만 동부인하여 주변농촌으로 가기도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소설창작에 바쳐진 작가의 피타는 노력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작가는 《대동여지도》연구에도 달라붙었다.

언제인가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의 민청원(당시)들이 그의 지리연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5만분의 1 지도를 보내준 일이 있었다.

지도의 가녁에는 《당 제4차대회에 드리는 선물로 창작하고계시는 선생님의 장편력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가 어서 세상에 나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작가동맹 민청원일동》이라는 글이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그 글을 본 박태원은 《허, 이거 내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구만.》 하며 소설창작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문우들과 마주앉을 기회가 있으면 《작가에게 있어서 지식의 축적과 함께 생활체험, 취재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말하군 했다.

그의 말처럼 박태원이 15년이나 누워있으면서도 창작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수 있은것은 두눈이 빛을 잃지 않았을 때 많이 보고 두다리가 성성할 때 많이 걸었기때문이였다.

훌륭한 력사소설가가 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대단했다.

박태원은 《흐르지 않는 물, 고인물은 썩기마련이다. 강물은 마땅히 흘러야 한다. 강물이 흐른다는것은 바다로 간다는것을 의미하며 바다로 간다는것은 진보를 의미하는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바다는 크고작은 강줄기들을 다 자기의 품에 안아준다. 그것처럼 작가라면 지식의 바다가 되여야 한다는것이 작가 박태원의 지론이였다.

작가는 력사지식은 물론이고 예술, 미술, 음악을 비롯한 정치와 경제에 대한 학습에도 상당한 힘을 넣었다.

책은 지식을 주는 말없는 스승이며 거기에서 얻은 지식으로 두뇌는 필요한 사유를 감당하고도 남을만치 총명해지는것이다.

소설가치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박태원은 보기 드문 독서광이였다.

그는 날마다 꺼져가는 시력때문에 눈을 가느스름하게 쪼프리고 가족들이 잠든 깊은 밤까지 책을 열심히 보았다.

그러면서도 책을 무턱대고 본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과학적으로 읽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르기를 세월을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둘것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진행된 생활의 단편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분석하여 마음속에 쌓아두어야 한다고 했다.

박태원은 그 말처럼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복구건설에 착수한 조국의 벅찬 모습을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건설자의 눈길로 차근차근 뜯어보며 기억하군 했다.

그는 또한 음악과 미술에 대한 공부도 필수적인것으로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과 미술은 멋을 부리기 위한 취미가 아니였다.

박태원은 문학은 소리없는 음악이므로 문학작품의 매 글줄마다에서 음악이 울려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악적인 리듬을 타고 문장이 흐를 때 작품은 정서를 풍길뿐아니라 속도도 빨라질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유명짜한 소설들을 놓고보아도 잘 알수 있다.

박태원은 문학에 미치는 음악의 영향력을 잘 알고있었고 그 실현을 위하여 한평생 노력하였다.

그는 젊었을 때 바이올린을 즐겨 켜군 하였다.

그가 바이올린우에 뾰족한 턱을 슬쩍 올려놓고 우아한 자세로 활을 긋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였다.

이따금 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서 감정을 담아 지휘자마냥 한손을 부드럽게 흔들며 마치 무대에서 독창이나 하듯이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박태원에게는 민족음악을 전문하는 벗들도 많았다.

박동실, 정남희, 류대복…

그들은 자기의 음악을 리해해주는 박태원을 찾아와 오래도록 이야기하고는 거뜬한 마음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이처럼 그의 창작과 생활에서 음악은 더없이 귀중한 길동무였다.

박태원은 미술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회화는 소리없는 음악이라는것이다.

여느 사람들은 미술작품을 눈으로 보지만 박태원은 눈만이 아니라 귀로 듣기도 했다. 화폭에서 울려나오는 그 음정을 듣는다는것은 아마 미술가들의 최고의 경지중의 하나일것이다. 거기에는 문학적인 환상도, 사랑도, 생활과 사업도 있기때문이였다.

그의 동생 박문원은 우리 나라 미술계의 이름있는 사람이였으며 조선미술사 개척자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작품을 끝내면 박태원에게 먼저 보여주군 하였다.

작가는 그 과정에 그림에 대한 많은 지식을 배우군 했다.

행복의 순간은 너무도 짧았다.

1958년 어느날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시력장애로 안해와 함께 병원에 갔던 박태원은 량안시신경위축증과 색소성망막염이라는 치명적인 진단을 받았다.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그런 진단을 받고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병을 앓고 시력이 몹시 낮아졌었는데 그동안 창작을 하느라 눈을 혹사하는통에 상태가 더 악화된것이다.

그의 시신경은 위축될대로 위축되여 200자원고지에서 단 한자밖에 알아볼수 없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지만 검은 장막은 점점 넓게 퍼져왔으니 작가의 시력은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았다.

그는 미구에 자기의 시력이 영원히 꺼져버릴것이라는것을 알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력사사료들을 고증하며 써야 하는 력사소설창작은 하늘의 무지개를 잡으려는것처럼 불가능했다.

박태원은 붓뚜껑의 좁은 구멍처럼 줄어든 시야나마 더는 줄어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고증할 사료들을 입원실에 가져다놓고 한자한자씩 뜯어보며 머리속에 새겨넣기도 하고 더러는 안해를 시켜 발취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서는 점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명암만 겨우 구분할수 있게 되였다.

허나 박태원은 자기의 의사를 배반한 육체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이기 전에 조선의 작가였으며 로동당원이였던것이다.

문득 그의 머리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나라에서 농민전쟁전반과 계급투쟁의 전모를 보여줄수 있는 력사물주제의 소설을 쓸데 대하여 가르쳐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는 두주먹을 꽉 쥐였다.

(이대로 주저앉을수는 없다. 눈을 보지 못할 때까지 소설을 쓰자!)

박태원은 우리 나라 력사를 연구하는 과정에 력사적으로 이름난 세명의 인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형상할 구상을 세웠다.

농민전쟁지도자들중에서는 전봉준, 명장들중에서는 리순신장군, 왕들중에서는 세종대왕이였다.

그는 자기 소설의 첫 주인공을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였던 전봉준으로 정하고 농민전쟁전야의 이야기와 그 전쟁에 참가한 인물들의 대군상을 그릴것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전 16권에 달하는 방대한 창작계획을 세웠었다.

그는 조급해나서 창작을 다그쳤는데 장편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 2부가 발표된 후 시력이 급속도로 악화되여 1966년에는 거의나 보지 못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하여 작가는 부득불 초기의 창작계획을 바꾸어 《갑오농민전쟁》 1, 2, 3부를 쓰게 되였으며 그로하여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와 《갑오농민전쟁》간에는 수십년간이라는 공간이 생기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끝끝내 불행의 시각이 닥쳐왔다. 작가의 두눈에서 광명이 사라져버렸던것이다.

먹물처럼 캄캄한 세계가 그를 촘촘히 둘러쌌다.

만일 그 불행이 생활의 유쾌한 희롱에 지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작가는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이젠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의 가장 고귀한것, 창작능력을 상실한 이때에 과연 무엇을 할것인가?)

빛이 없는 암담한 나날들이 지겹게 흘러갔다.

면회온 친구들은 그를 동정에 찬 눈길로 바라보면서 작가가 더는 일어서지 못할것이라고 짐작했다.

그에게 지리연구에 도움이 되라고 5만분의 1짜리 지도를 보내주었던 작가동맹의 처녀들은 안타까워서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그러나 그들은 작가 박태원을 잘 모르고있었다.

차츰 절망의 나락속에서 헤여나온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목숨이 붙어있는 순간까지 소설을 계속 쓰자. 그것은 단순히 한편의 력사소설을 쓰는가 못 쓰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민의 의의있는 과거투쟁사를 가지고 력사소설을 쓰라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이기때문이다. 수령님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한 작가는 죽을 권리도 없다. 나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짜투쟁은 이제부터이다.)

그는 온몸에 힘과 용기가 샘처럼 솟구치는것을 느꼈다.

박태원은 생각끝에 간살을 도려낸 비닐판을 원고지우에 올려놓고 연필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자, 두자…

하루는 그가 화가 나서 연필을 뚝 꺾어버린적이 있었다.

무딘 손으로 더듬으며 글을 쓰다보니 한 글자를 쓴 우에 덧글자를 쓰고 또 써서 하루종일 한페지도 전진하지 못했던것이다.

《이렇게 해가지구야 언제 다 쓰겠나?》

한참동안 모지름을 쓰던 그의 머리속에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가?)

그 방법은 소설을 안해에게 불러주어 받아쓰게 하는것이였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안해는 즉석에서 만년필을 집어들었다.

이때부터 작가의 강행군은 구술의 방법으로 이어지게 되였으며 그속에서 유명한 《갑오농민전쟁》 1, 2부가 태여났던것이다.

혹 어떤이들은 구술로 창작하면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 이것은 퍼그나 어려운 일이였다. 왜냐하면 소설을 구술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의 머리속에 완결된 옹근 한권의 소설책이 들어있어야 하기때문이다.

그는 상상으로가 아니라 면밀히 연구되고 정확히 고증된 산더미같은 력사사료를 뛰여넘어 10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면서 창작의 환상을 펴야 하였다.

그가 선택한 생활범위는 우로는 봉건왕실로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을 포괄하고있는것만큼 당시 법제와 문물제도, 풍속과 의상, 음식류와 지리, 력사적사건들이 벌어진 정황들에 대한 세밀하고 꾸준한 연구와 고증이 선행되여야 했다. 그리고 소설의 매 장, 매 절은 물론 인물들이 등장하고 퇴장할 환경까지 환히 떠오르고 그우에 문장조직까지도 다 끝낸 후에야 구술에 착수할수 있었다.

그러자면 작가의 노력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가를 충분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고목에 핀 꽃

 

소설의 앞부분이 끝나가고있던무렵 그에게 또 하나의 불행이 닥쳐왔다.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였던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굴하지 않고 침대에 누운채 구술했다.

마치 전장에서 두눈과 두다리를 잃은 용사가 수류탄을 입에 물고 적진을 향해 한치한치 기여가듯이…

소설창작이 거의 마감에 이르렀을 때 세번째 다른 타격이 그를 덮쳤다.

혈전이 왔던것이다.

며칠후에 의식을 차리고 입을 열려고 하니 말이 나가지 않았다. 모진 병마는 용사의 마지막무기마저 그악스레 앗아간것이다.

이어 몸도 움직일수 없었다. 전신마비가 온것이다.

박태원은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완전한 고목이 되고말았다.

지금까지 웃음어린 얼굴로 남편을 받들어온 안해마저도 그 순간에는 맥을 놓고 울음을 터뜨렸다.

인간의 의지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는 절망의 심연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이젠 끝장이다!)

무엇보다 분한것은 소설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쓰러진것이다. 어떻게 하나 그 목적지까지 가닿으려고 했는데…

그러나 고목에도 꽃을 피운 위대한 사랑이 있었으니 그것은 어버이수령님의 육친적인 사랑이였다.

작가가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유능한 의사들과 귀한 약재를 보내주시고 그가 몸도 불편한데 창작을 하느라고 하지 말고 휴식을 하면서 병치료를 하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던것이다.

수십년세월 동고동락해온 안해도 대신할수 없는 그 사랑은 마비되였던 작가의 기억력과 청각, 잃어버렸던 유일한 무기-입까지도 열리게 해주었다.

입이 열리는 순간 박태원이 한 첫말은 《원고지!》 라는 단어였다.

그는 수령님의 하늘같은 은덕에 보답할 일념으로 또다시 소설을 구술하기 시작했다.

박태원의 막내딸 정태은은 자기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1975년 ×월 ×일

오늘 위대한 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한 일군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와 손을 잡고 마주앉은 그 일군은 일어설줄 몰랐다. 그 일군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렇게 하고 글을 쓰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는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눈물이 얼마나 고맙고 귀중하던지 우리는 다같이 울었다.

아버지는 어둠속에서만 사는것이 아니다.

아버지장군님의 따사로운 해빛은 아버지와 같이 실명한 사람에게도 밝음을 주신다.

이 세상은 밝다.

어버이수령님 찾아주시고 경애하는 장군님 빛내주시는 내 조선은 더욱 밝다.

눈뜨고 세상의 밝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으랴.

세상의 참다운 밝음에 대해서는 머리로만 알수 있는것이다.

바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항일혁명투사 최희숙동지는 두눈을 잃고 최후를 마치면서도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웨쳤던것이다. 신념이란 그렇게 강한것이다.

이처럼 넋은 육체를 이긴다.

 

완전실명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가 오직 의지로만 창작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했다.

그처럼 간고한 시련속에서도 변하지 않은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력사와 소설에 대한 박태원의 무한한 성실성이였다.

그의 좌우명은 성실성에 더하기 인간성이였다.

성실성과 인간성의 기초는 사랑이다.

력사소설을 쓰고싶던 자기의 평생소원을 풀어주신 수령에 대한, 안해와 자식들과 이웃들로 표현되는 인민에 대한 불같은 사랑은 박태원의 심장을 태우는 열원이였다.

사람마다 사랑의 표현방식은 나름이다.

박태원의 경우 그 감정은 인생의 목표인 력사소설창작에 대한 성실한 태도로 나타나군 했다.

그는 평시에는 딸과 손자에게 반말을 쓰지 못할만치 마음이 착했는데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항용 그러하듯이 평시에는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

특히 안해와의 관계에서는 타협적이였다. 그렇지만 일단 창작에 들어가면 절대로 자비심을 베풀지 않았다.

그때문에 그의 안해는 가끔 졸경을 치르군 했다.

어느날 박태원의 안해는 어느 기관에 가서 온종일 많은 량의 자료를 베끼다보니 마감에는 자기의 변변치 못한 한문지식으로 대충 그 내용을 번역해왔었다.

그것을 안 작가는 성이 나서 안해에게 소리쳤다.

《한문이란 점 하나를 잘못 찍어도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어디서 그런 용감성이 나오는가 말이요? 그런 비과학적인 태도로는 창작을 할수 없소.》

안해는 억울해서 눈물을 쏟았다.

사실 문학전문가도 아닌 그가 작가인 남편을 만나 남모르게 겪는 고생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졸지에 남의 도움으로만 살아갈수 있는 불구로 되여버린 남편의 시중을 들기도 헐치 않은데다가 해뜨기 전부터 별들이 조으는 깊은 밤까지 쉴새없이 불러주는 구술을 받아쓰느라고 손에서는 자개바람이 일고 뒤목이 뻣뻣하군 했다.

어디 그뿐인가. 쩍하면 부족되는 자료를 베끼고 확인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서면 온몸이 천길나락속으로 굴러떨어지는것처럼 노그라들었다.

그날도 저녁끼니때가 지났기에 남편이 걱정스러워서 허겁지겁 달려왔었는데 남편은 사연은 알아보지도 않고 욕설을 퍼부은것이다.

한참 훌쩍거리다가 얼결에 고개를 쳐들던 그는 깜짝 놀랐다.

뜻밖에 앞 못 보는 남편의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있었기때문이였다.

《?!》

가슴이 찌르르 했다. 남편도 자기에게 큰소리를 친것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서 울고있는것이다. 이런 사람을 노엽히다니…

그 녀자는 남편의 두손을 꼭 움켜잡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당장 그 기관에 갔다오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안해를 만류했을것이다. 이제는 늦었는데 래일 아침에 가도 된다고.

박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해 역시 그런 기대를 품지 않았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병마때문에 분과 초를 쪼개가며 일하는 남편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이윽고 집을 나서는 그의 뒤에서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오. 당신이 또 수고하겠구만.》

출입문을 닫는 안해의 눈굽에서 눈물이 샘처럼 솟구쳤다.

그 눈물은 아까와는 의미가 다른 따뜻한 눈물이였다.

이처럼 박태원은 삶의 매 순간마다 자기에게 인생의 참된 빛을 안겨주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앞에, 력사앞에 끝까지 성실한 인간이였다.

작가 박태원은 1977년 4월에 《갑오농민전쟁》 제1부를 세상에 내놓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그가 쓴 장편력사소설을 친히 읽어보시고 소설을 참 잘 썼다고 말씀하시며 박태원동무가 력사를 많이 알고있는것 같다고, 박태원동무와 같이 력사소설을 쓰는 사람이 귀하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계속하여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에 력사소설이 얼마 없다보니 사람들이 지난날 력사와 세상물계를 잘 모르고있다고 하시며 작가들이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력사소설을 많이 쓰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집에 찾아온 일군으로부터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내용을 전달받은 박태원은 감격해서 어쩔줄 몰랐다.

아,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지금껏 모진 시련을 의지로 이겨내며 강행군을 해온 내가 아닌가.

하지만 막상 어버이수령님께서 변변치 못한 자기의 소설을 높이 평가해주셨다니 꿈만 같았다.

얼마후 그 일군은 그 영광이 어떻게 마련되였는가를 알려주었다.

우리 작가들을 끝없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장편력사소설 《갑오농민전쟁》 제1부가 출판되자 작가를 표창하고 대를 두고 전할 귀중한 선물을 보내도록 하시였으며 소설을 어버이수령님께 올리셨다고 한다.

이 세상에 위대한 수령의 높은 치하를 받는 작품을 가지게 된 작가처럼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작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작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뢰였다.

《이 늙은것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되게 하여주신 경애하는 장군님!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때로부터 어느덧 두해가 지났다.

작가의 일흔돐생일이 다가오고있었다.

그의 가족, 친척들은 생일상을 차려주려고 분주하게 뛰여다녔다.

불구인 작가와 더불어 착실히 늙어온 그의 안해는 지금껏 고생해온 남편을 금방석에 앉혀놓지 못해 몸살을 앓았다.

하루는 박태원이 안해를 불러앉히고 엄하게 말했다.

《이제 겨우 〈갑오농민전쟁〉 2부를 탈고했는데 무슨 생일상이요? 난 3부를 완성하기 전에는 생일상을 받지 않겠으니 그리 아오.》

안해는 자기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주는 남편이 야속해서 눈굽을 몰래 훔쳤다.

《뭘 하오? 당신 우는게 아니요?》

《…》

《여보, 당신이야 나를 잘 알지 않소.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마오.》

안해는 그를 잘 알고있었다. 남편의 심중에는 단지 《갑오농민전쟁》을 다 완성하여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올릴 그날밖에 없다는것을.

작가인 그에게는 그것이 곧 생일이고 기쁨인것이다.

안해는 한숨을 길게 내그으며 원고지가 펼쳐진 책상을 마주했다.

그러던 1979년 12월 7일, 박태원의 생일 70돐이였다.

그날도 작가는 소설을 불러주고 그의 안해는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받아쓰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앙의 한 일군이 작가동맹일군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작가는 영문을 몰라했다.

일군은 그에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작가 박태원선생의 생일 70돐을 축하하여 은정어린 생일상을 보내주시고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신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작가를 생일상앞에 앉혀주고 진귀한 음식물들의 품목을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그 일군이 활짝 피여난 꽃처럼 늙지 말고 청춘으로 살기를 바라며 보내주신 모란꽃을 형상한 그림의 깊은 뜻에 대해서 설명해줄 때 작가는 그만 목이 꽉 메였다.

(아, 만약 나에게 번개의 섬광과 같은 순간의 광명이라도 온다면 그토록 뵙고싶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단 한번만이라도 뵈올수 있으련만… 그래서 그분의 영상을 머리속에 영원히 모시고 눈을 감았으면 원이 없을것 같구나.)

작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초상화를 삼가 우러러보았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

장군님께서 주신 의지와 힘과 슬기로 다시 붓을 억세게 틀어잡고 청춘으로 소생한 박태원이 삼가 인사를 드리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은 만물의 법칙대로 시들어가는 이 고목에 향기그윽한 꽃을 피워주셨습니다.

저는 심장이 고동을 멈추는 순간까지 장군님께서 쥐여주신 혁명의 필봉을 억세게 틀어쥐고 혁명가로 살며 일하겠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로부터 며칠후 작가동맹에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작가 박태원에게 보내주신 선물전달식이 정중히 거행되였다.

선물전달사가 있은 다음 작가가 구술한 토론문이 그의 안해에 의하여 랑독되였다.

《위대한 수령님!

저는 소설을 끝내놓고 초조한 심정에 싸여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버이수령님과 당에서는 변변치 못한 소설을 내놓은 저에게 수고를 했다고 분에 넘친 치하를 하시며 국가수훈의 높은 영예를 안겨주시고 선물까지 보내주시였으니 나는 더 무엇이라고 말씀드릴게 없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감격이며 최상의 영예입니다. 이제 더는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영광의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는것이 평생의 한이 될것 같습니다. …

그리운 혁명동지들! 몹시도 보고싶은 작가동지들!

우리모두에게 길은 하나입니다. 어버이수령님과 당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한목숨바치는 충정의 길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나는 내 심장이 고동치는 한 끝까지 이 길을 가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갑오농민전쟁〉을 3부까지 완성하고야말겠습니다.》

작가에게 돌려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이께서는 작가가 어려운 조건에서 창작하고있다는것을 아시고 그의 안해를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사업을 돌봐주도록 하는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뿐이 아니다.

《갑오농민전쟁》 제2부를 출판하고 제3부 창작을 시작하던 1981년에 작가는 의사소통의 유일한 방법이였던 구술조차도 할수 없게 되였다.

그때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많은 보약들을 보내주시여 그가 건강을 회복하게 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보약으로 며칠만에 의식을 회복한 그는 창작을 계속하지 못할가봐 몹시 걱정하였다.

그는 생각다못해 가장 가까운 혁명동지이며 방조자인 안해에게 장편소설의 제3부를 끝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나서 안해의 손바닥에 글자를 한자한자 그려서 《갑오농민전쟁》 제3부의 구상과 형상의도를 표현하였다.

작가는 계속해서 《고생하겠소.》 라고 쓰고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손목시계를 툭툭 쳤다. 장군님의 은덕을 잊지 말고 시간을 아끼라는 뜻이였다.

그때 한뉘 고생만 시킨 안해에게 또다시 수고를 끼치게 된 작가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으랴.

남편의 절절한 당부를 가슴에 새긴 그의 안해는 1984년에 원고배낭을 메고 우산장창작실로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74살이였다.

2년후인 1986년 봄 작가의 안해는 장편소설의 제3부 원고를 완성해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작가는 너무도 기쁘고 고마워서 안해의 손을 잡아흔들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로부터 몇달후 작가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숨을 거두었다.

그의 안해는 자기의 고생이 덜어짐을 한없이 슬퍼하였다. 작가를 몹시 사랑하고 존경했던 그로서는 불구인 남편을 위한 일을 전혀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남편의 시중을 들었고 욕창이 생길가봐 매일 목욕을 시켜왔었다.

그가 남편간호를 얼마나 극진히 했는지 병원에서는 그더러 간호학을 쓰지 않겠는가고 권고한적까지 있었다. 그속에서도 남편이 구술하는것을 팔이 떨어지도록 받아서 쓰고 자료를 확인하려고 다녔다.

그것은 결코 고생이 아니였다. 후날 돌이켜보아도 스스로 만족스러울만큼 아름다운 행복이였고 그 이상 바랄수 없는 희열이였다.

안해만이 아니라 딸들, 손녀까지도 10여년을 줄곧 누워있은 작가를 돌보면서도 행복해하였다.

그렇듯 훌륭한 안해에게,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작가는 그동안 수고했다는 시원스러운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채 두눈을 감은것이다.

그해 1986년 드디여 작가가 생전에 그토록 바랬던 장편력사소설 《갑오농민전쟁》 제3부가 출판되였다.

책표지에는 작가와 그의 안해의 이름이 나란히 찍혀있었다. …

부뚜막의 소금도 국가마에 넣어야 짠맛을 내는 법이다.

하물며 피타는 노력을 들이지 않고 어찌 인생의 높은 목적을 실현할수 있겠는가.

력사는 어머니처럼 너그럽지도 인자하지도 않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뚜렷한 목적과 비상한 노력, 강의한 의지로 하여 인민의 추억속에 남은 훌륭한 아들만을 선택하여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박태원은 력사의 항구에 닻을 내린 행운아였다.

1980년 8월 26일 《로동신문》 3면에는 작가와 그의 안해의 사진과 함께 옹근 한면에 걸쳐 《이런 사람이 바로 당원작가이다》라는 제목으로 박태원에 대한 기사가 실리였다.

작가가 우리의 곁을 떠난지도 10여년이 지난 1998년 어느날이였다. 그날도 선군혁명령도의 초강도강행군을 이어가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가던 박태원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사람들은 작가의 생존시에는 물론 사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앞에서 감사의 눈물을 머금었다.

참으로 우리의 주인공 박태원은 살아서는 당과 수령의 품속에서 행복한 생을 누렸으며 죽어서도 인민의 추억속에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는 영원한 행복자이며 참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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