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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제비》가 깃들인 곳

 

박세영(시인)

                    

                      • 1902년 7월 7일 경기도 고양군에서 출생.

                      • 1924년 9월부터 염군사의 동인으로 참가, 카프에 가맹.

                      • 1946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

                      • 1989년 2월 28일 사망.

                                                                      

 

박세영은 《애국가》와 더불어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행복한 시인이다. 키도 크지 않고 그리 잘난 사람도 아니지만 조국과 민족의 넋을 시줄에 담으며 비다듬고 자래운 그의 정신세계는 대단히 높고 아름다운것이였다.

1902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난 박세영은 어린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열정을 쏟았다. 그리하여 1922년에 문학수재를 많이 키워내는 학교로 이름이 났던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후 《새 누리》, 《자유신종보》 등의 동인지를 발간하였으며 염군사를 거쳐 카프의 성원으로 된 그는 우리 나라의 진보적시문학발전에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다.

지금도 우리 북반부만이 아니라 남반부에서 발간되는 문학사교재들과 해방전문학작품집들에는 반드시 박세영의 이름과 함께 그의 시 《산제비》가 오르군 한다.

혹시 박세영이란 이름은 몰라도 시 《산제비》라고 하면 동심에 새겨진 인상깊은 시구절과 함께 모르는 사람이 없는것이다. 그래서 뭇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산제비시인》이라고도 부른것이 아닐가.

 

땅이 거북등같이 갈라졌다

날아라 너희는 날아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구름을 모아는 못 올가!

날아라 빙빙 가로세로 솟치고 내닫고

구름을 꼬리에 달고오라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라

 

가난한 인민을 위해, 짓밟힌 조국을 위해 재생의 생명수를 속시원히 뿌려줄 변혁의 구름을 꼬리에 달고오는 산제비를 그리여 목메인 웨침을 터뜨렸던 시인은 자신이 곧 《산제비》가 되여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 시련많은 창작과 투쟁의 한길을 걸어왔다.

박세영이 걸어온 인생행로는 참문학의 길을 찾아 모대긴 사색의 련속이였고 불같은 심장을 현실속에서 태우며 우리 인민이 바라는 시와 가사를 창작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가요를 불러낸 보람찬 창조의 나날이였다.

아무리 머리가 총명하고 재간이 있다 해도, 제아무리 출중한 재능과 뛰여난 실력이 있다고 해도 해방전에는 나라없는 식민지인의 불우한 처지에서 벗어날수 없던것이 지난날 우리 나라 문인들의 한결같은 불행이였다.

박세영의 경우도 례외로 될수 없었다. 하기에 그에게 있어서 민족의 태양이 삼천리를 비친 해방의 날은 인생의 새 출발을 약속해준 아침이였고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그날은 이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난 운명전환의 출생일이였다.

박세영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 그 운명전환의 새날을 맞이할수 있었고 뜻깊은 날과 날들에 어떤 노래를 엮어 자기가 태를 묻어온 남녘의 고향땅에 보내였던가.

 

해방은 되였으나

 

조국해방은 온 조선땅에 환희와 격정의 파도를 몰아왔다. 누구라 할것없이 해방열에 떠서 웃고 떠들며 춤을 추었다.

악착한 왜놈들이 망하고 지지리 억눌리고 짓밟혔던 인생들이 네활개를 저으며 거리를 활보하였으니 정녕 암흑이 들어찼던 이 땅에 눈부신 광명이 찾아온것 같았다. 서울장안에는 이제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만고의 빨찌산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입성하신다는 소문이 퍼져 남녀로소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이를 손꼽아 기다리였다.

서울역은 며칠째 장군님을 기다리는 환영군중으로 꽉 들어차있었다. 그들속에는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박세영도 있었는데 그는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했다. 왜놈의 학정에 침을 뱉고 돌아서서 한동안 창작의 붓을 꺾었던 그의 가슴은 북받치는 시적흥분으로 하여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이처럼 해방의 은인이신 어버이수령님을 열렬히 흠모하였기에 그는 해방된 남조선땅에서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깡그리 바칠 각오를 가지고 서울시인민위원회에서 사업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시 《위원회에 가는 길》, 《휘날려라 붉은기》, 《산천에 묻노라》 등 여러편의 서정시들을 창작발표하였다.

자유출판사 편집원이기도 하였던 박세영은 《별나라》(해방전 아동문학잡지) 속간호를 발기하고 출판하는데 전심함으로써 남녘인민들의 애국심을 분발시키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그의 포부와 희망은 망망대해처럼, 푸르른 창공처럼 크고 넓었다.

하지만 미제침략자들의 남조선강점으로 하여 자유와 민주로 불타던 그의 넋은 여지없이 짓밟히고말았다.

서울시인민위원회는 강제해산당하였고 민주인사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일제때의 민족반역의 무리들이 애국을 가둔 철창우에서 또다시 제세상이 왔다고 춤을 추며 돌아쳤다.

해방의 물결과 함께 찾아왔던 환희와 열정은 소나기맞은 숯불처럼 사그라지고 독을 품은 검은구름이 사람들의 머리우에 배회하였다.

시인은 참을수 없었다. 진리와 사랑에 바치는 심장의 불길이 무한대한것도 시인이고 진리와 사랑의 원쑤를 단죄하여 서슴없이 단두대에 오르는것도 시인이다. 박세영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면상을 자기의 필봉으로 후려치는 격전에 들어섰다.

이 시기 그는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허위와 위선에 찬 반인민적인 정체를 폭로규탄하면서 원쑤들의 그 어떤 감언리설에도 속지 않고 투쟁의 길에 나설 확고한 사상적지향을 노래한 시 《그치라 요녀의 소리》를 창작발표하였다.

 

배고파 누운 인민에게

밥대신 맥빠진 노래나 들으라는가

 

굳건한 인민의 나라를 세우려는데

아니 북조선엔 이미 인민정권 섰는데

이곳은 배나 더 고파보라고 웨치는

악마의 주문같이도

어린애도 헛소리라 라지오를 끄거던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를 또 하느뇨

 

우리들의 갈길 뻐언 하거던

하필 구렁텅이로 가라는 심사는

건국의 뜻이 아니요

나라를 해치려는 반역의 뜻이거니

이제 너희들 소리엔 귀머거리가 되리라

 

샨데리야불은 밝고

안락의자의 단꿈에 행복이 노근할제

추위를 모르는 보료에서

늙었어도 애욕을 지근대는

오, 너희들은 흥이 나리라만은

너희들 거짓애국자들은

 

그리하여 늬들 역도들이 지어내는

모든 악법이 웨쳐나올 때

인민은 요녀의 소리로밖에 모르거든

그치라, 장송곡같은 모든 소리를

누가 알겠다느냐

누가 듣겠다느냐

 

항거하는 인민의 소리만이

피끓는 가슴에서 가슴으로

거짓전파를 덮어누르나니

묵묵히 새 력사를 하는

내 그 힘찬 소리 아노라

내 그 힘찬 소리 듣노라

                    (시 《그치라 요녀의 소리》)

 

시에서는 원쑤들의 온갖 회유기만을 잠꼬대와 같은 주문으로, 요녀의 소리로 단정하고 놈들의 반인민적매국행위를 폭로단죄하면서 《항거하는 인민의 소리만이/ 피끓는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하는 새 력사의 힘찬 소리임을 힘있게 강조하고있다.

이와 함께 시에서는 제놈들이 아무리 달콤한 말로 인민들을 회유기만해도 이에 속히우지 않고 항거의 길로 내닫고야말 인민들의 높은 정신세계가 격조높이 일반화되고있다.

시 《그치라 요녀의 소리》와 함께 시인은 해방직후 어중이떠중이들이 밀려드는 남조선의 현실을 폭로한 시 《아, 여기들 모였구나》(1946년)를 창작하였다.

시는 해방후 일제를 대신하여 서울에 기여든 미군이 창경원에서 《밤사꾸라》를 벌려놓고 서울시민들을 꾀여부른 교활한 책동을 소재로 하여 씌여졌다.

작품은 창경원앞에 모여든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기발을 들고 나아가던 인민들의 힘찬 행렬에 훼방을 놀다가 겁먹고 비실비실 달아나는 비겁한자들이라는것을 발가놓았으며 친일매국역도들에 대한 멸시와 조소의 감정을 더욱 심화시키고있다.

또한 시는 원쑤들의 정수리를 조기는듯 한 분노의 열정으로 하여 친일친미매국역도들에 대한 모멸과 조소로써 그의 멸망의 불가피성을 선고하고있다.

이외에도 시인은 《민족반역자》(1945년), 《너희들도 조선사람이냐》(1946년), 《나도 새 사람 되리》(1946년) 등을 발표하였다.

 

땅받은 고마움에 더 내려던 현물세도

아예 받지 않던 인민위원회

그러나 추수때면 아귀같이 달려들던

지주, 마름 그리고 농회놈들이 생각난다

 

학교문간도 못 가던 순돌이형제는

학교엘 가고

나는 밤이면 국문을 배우러 학교엘 갑네

 

살길을 밝혀주는 우리 글 모르고

살수가 있나

세상은 인민의 새 나라 나도 새 사람 되리

                                   (시 《나도 새 사람 되리》중에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반동적정체를 폭로규탄한 이 시기 박세영의 시들은 시인자신이 목격하고 체험한 사실들에 기초하여 창작된것으로 하여 시적정서가 보다 예리하고 강하게 울려나오고있으며 정론성이 강한것으로 특징적이다. 증오도 하고 규탄도 하고 사랑도 하는 시들을 쓰고 또 썼으나 미제가 주인행세를 하는 남조선에서 재능의 피방울이 뛰는 시인 박세영의 앞길은 갈수록 암담하였다.

《산제비》가 깃을 펴고 날을 창공은 과연 어디인가.

몸부림치던 박세영은 자유의 노래, 행복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북녘의 하늘을 우러렀다. 그곳이 《산제비》가 깃을 내릴 대지이고 하늘이였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공화국북반부를 동경할수록 마음은 한없이 설레였다.

마침내 인생전환의 날은 왔다.

1946년 6월 《산제비》 박세영은 38 선을 넘어 오매에도 그립던 공화국의 품,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기였다.

 

 

해볕에서 살리라

 

박세영이 자나깨나 그리워하던 공화국의 품에 안겨 전설적영웅이신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처음 만나뵈온것은 1946년 6월 어느날이였다.

한여름의 해볕이 류달리 따사롭던 그날 시인은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께서 계시는 청사로 갔다.

시인은 안내하는 일군을 따라 어느 한 방에 들어선 후에도 여전히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잠시후 후리후리한 체구에 안광이 영채롭게 빛나는분이 방안에 들어서시면서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였다고 인사를 건네시며 《김일성이올시다.》라고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는것이였다.

《아, 장군님!》

수령님을 만나뵙는 첫 순간 감격에 넘쳐 이렇게 부르짖는 시인의 가슴속에는 세찬 격정이 일어났다.

(이분이 바로 김일성장군이시구나! 이분이 바로 천리길을 주름잡으시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제침략자들의 머리우에 불벼락을 안긴 전설적영웅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김일성장군님이시구나.

일제교형리들의 횡포무도한 박해와 천대속에서도 오직 이분을 기둥처럼 믿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장군님, 자나깨나 장군님을 뵈옵고싶던 시인 박세영이 삼가 문안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목메여 말하며 허리를 깊이 숙이는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것이 흘러내렸다.

그이께서는 겸허하게 웃으시며 시인의 팔을 잡고 만류하시였으나 장군님께 큰절을 드리는 그의 마음은 더욱 뜨거웠다.

《장군님, 산에서 왜놈들과 싸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장군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시여 이제는 온 겨레가 내 조국, 내 땅에서 자자손손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박세영이 드린 심장의 목소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시인이 올리는 다함없는 진정에 고맙다고 뜨겁게 말씀하시면서 그를 친히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시인의 담차고 강직한 모습에서 일제의 모진 박해와 탄압속에서도 프로레타리아문학을 지향하여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서정시 《산제비》를 비롯한 수많은 시들을 창작하여 자유로운 새시대를 갈구하는 우리 인민의 마음을 노래한 그 애국적소행을 더듬어보시는듯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남조선에 조성된 정세에 대해 묻기도 하시고 가정형편에 대하여 일일이 알아보기도 하시면서 해방된 우리 나라에 민족문화를 빨리 건설하여야 한다고, 작가, 예술가들에 대한 당의 기대는 매우 크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말씀을 구절구절 새기며 격동된 심정을 어쩌지 못하고있던 시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군님, 장군님의 건국로선을 높이 받들고 새 민주조선의 민족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힘껏 일하겠습니다.》

시인이 올리는 말에서 작가, 예술인들의 충정의 마음을 읽으신듯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좋습니다라고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시인의 손을 다시금 힘주어 잡으시였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일을 하려면 우선 마음이 안정되여야 한다고, 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후에라도 이야기하라고 하실 때 시인은 북받치는 격정을 더는 누를길 없어 《장군님!》 하고 뜨겁게 부르짖었다.

그로부터 몇달후 시인 박세영은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의 품이 얼마나 깊고 따사로우며 수령으로서, 인간으로서, 어버이로서 그이의 천품이 얼마나 고결하고 거룩한것인가를 다시금 심장깊이 절감하게 되였다.

그해 10월초 어느날이였다.

함흥의 로동계급들속에서 현실체험을 하고있던 시인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한 일군으로부터 급히 올라오라는 련락을 받았다.

그가 평양역에 도착하자 홈에 나와있던 그 일군은 대기하고있던 승용차에 그를 태우고 곧장 경치아름다운 문수봉기슭으로 달리게 하였다.

이윽고 승용차는 벽돌담장을 두른 한채의 아담한 집앞에 멈추어섰다.

시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안해가 나오고 뒤따라 아들딸 오누이가 달려나와 《아버지!》 하며 와락 옷섶에 매달리는것이 아닌가. 서울을 떠나던 날 문밖까지 따라나와 바래주던 혈육들이였다.

《장군님께서 일군들을 보내시여 우리 가족을 평양으로 불러주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집까지…》

안해가 울먹거리며 말해서야 시인은 모든것을 알수 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서재가 달린 집필실과 여러칸의 살림방이 있는 주택과 옥백미를 시인에게 배려해주시였던것이다.

이 모든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아, 사선을 헤치고 불원천리 달려와 안긴 품, 내 인생도 문학도 다 맡긴 그 품은 이다지도 넓고 따사로운것인가.)

시인은 어깨를 세차게 들먹이였다.

불우했던 지난날 이런 꿈같은 일을 생각이나 해보았던가. 해방전 저주로운 그 세월에 병마와 기아로 숨진 어린 세 아들과 딸 하나를 이름없는 산기슭에 자그마한 봉분으로 련달아 남겨놓고 피눈물을 뿌리며 땅을 치던 시인이였고 황토먼지 이는 이국의 방랑길에서는 단칸집 하나 마련할수 없어 눈보라치는 겨울날 찌그러져가는 다리밑에 거적때기를 두르고 거처해야 했던 시인이였다.

그 굴욕의 나날에 가슴속에 응혈로 박히고 쌓인 피방울을 씻어내듯 시인은 오늘 감사의 눈물, 행복의 눈물을 맘껏 쏟치는것이였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이 하해같은 은혜를 어찌 잊을수 있겠습니까.》

가족들도 오열을 터뜨리고 이 감격적인 소식에 접하여 모여온 마을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적시였다.

시인은 안해에게 목이 메여 말하였다.

《우리의 머리우에서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있소. 난 언제나 그 해볕에서 살리다.》

이렇게 말한 시인은 한손을 머리우로 번쩍 쳐들더니 격정에 넘쳐 시를 읊는것이였다.

 

설한풍 밀림을 집으로 삼고

때로는 불탄재로 식찬을 삼아도

동지들을 위해선 스스로 굶고 싸우던

영용한 애국투사들 있었거니

이날이 어찌 안 오리까

 

남의 강토에 도사리고

가난한 인민의 피를 빨며

모조리 파먹던 왜적에게

항거의 불길을 올리던 뜻

피끓는 이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목숨으로 지켜왔다 해도

어찌 당신처럼이야 싸웠사오리까

 

당신은 이름도 거룩한 김일성장군

정의의 칼을 뽑은지 몇해이며

조선인민의 살아날 리치를 펼친지

무릇 몇해시뇨

오 영명하신 장군 젊으셨어도

가뭇도 없이 빼앗긴 나라일엔

누구보다도 몸바치셨더라

 

번번이 왜적을 소스라치게 하던

당신의 위대한 전략전술이야

우리들이 모를 일이어든

해살같이 밝으신 삶의 리치

지금은 삼천리강산 곳곳마다

꽃으로 피여납니다

 

허나 가지가지 새로운 력사를

지어내시면서도

오직 소박한 사람으로 앞장서셨거니

우리 뜻을 다 바침이로다

그러기에 위대한 우리들의 장군이시로다

 

서정시 《해볕에서 살리라》(1946년)에는 김일성장군께 드림》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는 이미 세 제도를 살아본 사람이였다.

빛을 잃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두고 산천도 몸부림치던 조선봉건왕조 말엽의 소년시절을 거쳐 가혹한 일제통치의 식민지멍에를 벗어던지자 올가미를 조인것은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사회였다.

그 기나긴 칠칠암야의 질곡속에서 유린당했던 인생을 다시 찾은것도 장군님의 품이였고 문학의 노래를 마음껏 펼칠수 있은것도 장군님의 품이였다.

하기에 그는 시에서 잃었던 조국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업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영원히 어버이수령님의 그 해볕에서 살리라는 자신과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마음을 격조높이 노래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시인에게 베푸신 사랑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1946년 7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출판국장을 거쳐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사업을 맡겨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해 9월 27일 오래전부터 구상해오신 《애국가》창작과 관련하여 교시를 주시는 영광의 자리에 조기천, 리찬과 함께 박세영도 불러주시였다.

그날 시인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신 양복지로 지은 옷을 차려입고 감격에 겨워 어쩔줄 몰라하며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다. 수령님께서 꼭 석달만에 다시 시인을 불러주시였지만 오래 헤여져있던 옛 지기를 만나신듯 그렇게 기뻐하시면서 등을 다정히 두드려주실 때 시인은 그만 눈물이 글썽하여 몇번이고 입속으로 외워보던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였다.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신듯 그이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모두 바쁠텐데 이렇게 오시라고 한것은 다른게 아니라 인민들이 부를 노래에 대하여 의논해볼가 해서입니다라고 말씀을 떼시였다.

노래라는 말씀에 벌써부터 창작적흥분을 느끼고있던 시인은 다음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애국가창작에 대해 말씀하시는것이 아닌가.

그이께서는 지금 인민들이 해방된 조국땅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된 기쁨과 감격을 목청껏 노래하고싶어하며 애국가를 요구하고있다고 하시면서 하루빨리 애국가를 창작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애국가!》

그 이름 조용히 불러만 보아도 가슴 벅차올랐다. 해방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탓에 울밑에 선 연약한 봉선화를 부여잡고 한탄의 눈물을 쏟던 우리 인민이 아니였던가. 바로 그 인민에게 해방의 기쁨을 마련해주시고 오늘은 당당한 우리 조국의 국가를 안겨주시려고 마음쓰시니 창작가들의 마음이 어찌 격정으로 부풀어오르지 않을수 있으랴!

창밖에서는 9월의 가을볕이 물러가고있었다.

그이께서는 그것도 잊으신듯 두시간나마 이야기를 계속하시였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고 산들은 기세차고 장엄하며 전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지하자원, 금은보화도 무진장합니다.

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진 인민이며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인민입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에 대해 생생한 화폭으로 펼쳐보여주기도 하시고 우리 인민의 자랑찬 투쟁력사와 문화에 대하여서도 실례를 들어가면서 개괄해주기도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아름다운 조국과 슬기로운 투쟁전통을 가진 조선인민의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노래에 담아야 하겠다고, 인민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 자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욱 솟아날것이라고 하시면서 인민들에게 속히 애국가를 만들어주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시인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고있었다.

시인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걸어오신 혁명의 천만리길을 생각했다. 그것은 걸음걸음 혈전의 언덕을 넘어야 했던 간고한 길이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20여성상 백두산의 줄기줄기와 압록강의 굽이굽이에 피어린 자욱을 남기시며 애국의 길, 투쟁의 길을 앞장에서 헤쳐오지 않으셨는가.

그리하여 우리 인민에게 잃었던 조국을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오늘은 성스러운 조국의 국가에 담아야 할 내용까지 가르쳐주고계신다고 생각하니 시인은 위대한 태양으로 칭송하여마지 않는 장군님이시야말로 진정 민족해방의 구성이시며 절세의 애국자이시라는 생각에 다함없는 흠모의 정을 금할수 없었다.

(장군님께서 품고계시는 애국심을 사상으로 삼고 그이께서 가르쳐주신 빛나는 구절구절을 가사로 옮기리라.)

번개인듯 번쩍하는 사상감정과 충동에 억제할수 없는 힘을 느낀 시인은 집에 돌아오기 바쁘게 책상에 마주앉았다.

조국을 례찬하는 주옥같은 시구들이 가슴에서 활화산처럼 터져나왔다. 고심어린 창작의 낮과 밤이 흘렀다.

이듬해 봄이였다.

이 봄도 시인은 먼 후날 어느 시에서 노래한것처럼 《만경봉 푸른 소나무에 볼을 비비며/ 아침해 빛나는 내 조국의 애국가 구절구절》을 고르느라 심혼을 쏟아붓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책이 시인을 찾아와 애국가의 창작정형을 알아보고 언제면 완성할수 있겠는가고 물었다.

그때 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두달후인 6월 27일에 애국가를 시청하여주셨으면 하는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날을 목표로 가사를 완성하여 작곡에 넘기겠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그날의 뜻깊은 사연을 김책은 모르지 않았다.

《장군님께 그렇게 보고올리겠습니다. 우리 그날 장군님께 꼭 기쁨과 만족을 드립시다.》

마침내 영광의 그날은 왔다.

1947년 6월 27일.

위대한 수령님께서 애국가의 시청회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회의실에 나오시였다.

시인은 그이를 우러르며 남다른 격정에 휩싸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한해전 이날 친히 만나주신것만도 더없는 영광인데 그날을 못잊어하는 시인의 간절한 소원을 헤아려 바로 오늘로 시청날자를 정하여주시고 친히 참석하여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그 다함없는 은정에 그만 자꾸 목이 메여왔다.

시인은 애국가를 작곡한 청년작곡가 김원균의 손을 꼭 잡았다.

《작곡가동무, 난 그저 꿈만 같소. 장군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내주시다니…》

그날은 날씨가 몹시 무더웠다. 그래서 한 일군이 선풍기를 가져다 설치하였다. 그런데 시원한 바람을 일구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좀 덥기는 하지만 새로 나온 《애국가》를 위하여 선풍기를 끄는것이 어떤가고 말씀하시였다.

선풍기는 멎고 장내는 물을 뿌린듯 조용하였다.

시인의 마음에서 세차게 타오르는 흠모의 분출인양 피아노의 반주에 맞추어 합창단이 부르는 애국가의 노래소리가 장내에 장중히 울리기 시작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장내에는 숭엄한 정숙이 깃들었다. 작곡가 김원균의 손을 꼭 잡은 시인의 두손은 땀에 질벅하게 젖어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정숙속에서 가끔 무엇인가 수첩에 적으시며 깊은 사색에 잠겨계시였다.

그러시던 그이께서는 노래의 2절까지 끝나자 환하게 웃으시며 못내 만족해하시더니 이 노래를 인민들이 좋아할것 같다고 하시면서 시인을 찾으시는것이였다.

한해전 시인을 처음 만나시던 그날을 그려보신듯, 그날의 시인이 오늘은 조국과 인민앞에서 《애국가》의 작가로까지 성장한 일이 못내 기쁘신듯 대견하게 바라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책상우에 놓여있는 가사를 손에 드시였다.

그리고 글줄을 짚으시면서 《애국가》에서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시행부터 그아래는 반복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우리 나라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유구한 력사를 가진 나라인데 어떻게 한번만 부를수 있겠는가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그러시면서 다시한번 부르면 선률로 보아서도 더 효과적이고 음악상조화도 잘될뿐만아니라 노래도 한결 장중해지고 부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긍지감과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실 때 문학예술에 대한 그이의 탁월한 식견과 비범한 예지에 장내는 감동의 파도로 설레였다.

그러니 시인의 감정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누구보다도 기뻐하신분은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이라는 부분부터 반복하여 다시 부르는 합창단의 노래를 들으시고 좋다고 하시면서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시여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 인민은 오래동안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애국가》를 부르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소리로 차넘쳤다.

모두가 애국의 뜨거운 열정이 흘러넘치고 민족의 숭고한 정서로 가득찬 우리 조국의 영원한 송가를 제정해주신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 솟구치는 감사의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수령님께서 오히려 손을 잡아주시며 수고했다고 감사를 주실 때 시인은 이 뜨거운 은정에 무어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애국가》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애국가》, 그것은 태양조선의 위대한 찬가였으며 우리 인민의 영원한 삶의 노래였다.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으로 내놓은 《산제비》로부터 악독한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된 새 조국땅에서 세계에 대고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슴터쳐 노래한 《애국가》! 이것은 박세영의 운명개척에서의 근본전환을 보여주는 인생행로의 대표작인 동시에 애국으로 살고 애국으로 조국을 받들어나가려는 신념과 의지의 결정체였다.

사람들이 《애국가》의 작가를 두고 찬사의 말을 할 때마다 박세영은 말하였다.

《〈애국가〉의 작가가 저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 모르고 하는 말이지요. 사실 〈애국가〉는 어느 개별적시인이나 작곡가가 창작한 노래가 아닙니다. 항일의 불비속을 뚫고 조국을 찾아주시고 민족을 구원하여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우리 인민들에게 안겨주신 조국찬가이며 조국송가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에게 〈애국가〉를 쓸데 대한 구체적인 상을 안겨주시고 시어 한마디, 시구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다듬어 완성시켜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민주조국건설에 이바지한 시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해방후 새로 제정한 첫 국기훈장도 남먼저 안겨주시고 문학예술부문앞에 중요한 과업이 나설 때면 박세영을 부르시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기도 하시였으며 식견도 넓히고 휴식도 하라고 외국방문의 길에도 내세워주시였다.

1959년 여름이였다.

보통강유원지건설장을 찾으신 수령님께서는 깊은 감회에 잠기시였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인생의 최하층에서 물로 하여 불행을 당해야 했던 토성랑사람들을 두고 생각많으셨던 그이께서는 한 일군에게 박세영을 비롯하여 작가들이 배를 타고 만경대와 보통강을 돌아보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현지지도의 길에서도 작가들을 잊지 않으시고 친히 이름을 불러주시며 창작의 무궁한 현실을 펼쳐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류다른 사랑과 보살피심속에서 일군들은 모두가 뜨거운것을 삼켰다.

이 뜻밖의 소식에 접한 시인은 보통강의 푸른 물결우로 달리는 배우에서 눈물에 젖어 수도의 일경을 바라보며 목이 메여 부르짖었다.

《수령님, 해방의 봄언덕에서 위대한 태양의 빛발로 저의 인생을 꽃피워주시고 문학의 광활한 앞날을 열어주시고도 10여년세월 이렇게 걸음걸음 보살펴주신단 말입니까!》

그는 솟구치는 격정에 넘쳐 어버이수령님을 처음 만나뵙고 썼던 시 《해볕에서 살리라》를 마음속으로 읊고 또 읊었다.

 

그 빛 해살같이 온 땅에 비쳐

우리를 행복에로 이끌어주나니

무엇을 서슴으오리

우리 다 그 해볕에서 살리라

하여 밝으신 그 령도따라 나가리라

빛나는 민주의 새 나라로

 

 

태양의 빛발이 날개가 되여

 

예로부터 은혜에 보답할줄 아는 사람만이 인간이라 하였다.

시인은 한생을 보답의 길에서 살았다.

믿음이 곧 힘이 되고 지혜가 되여 《애국가》를 창작한데 이어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내놓아 주체시문학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였다.

시인은 생존의 말기에 남긴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나와 같이 문학의 길을 걸어온 옛 동료들은 나를 두고 인생도 문학도 훌륭한 결실을 맺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의 부러움에 찬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나의 한생을 돌이켜보며 저절로 솟구치는 감사의 눈물을 어쩌지 못한다. 하늘에 태양이 있어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탄생하듯이 나의 인생을 걸음걸음 손잡아 키워주고 문학을 꽃피워준 그 품, 위대한 태양의 품이 아니였다면 내가 어떻게 90살 가까이 살면서 시창작의 길을 자랑스럽게 걸어올수 있었겠는가.》

이 글은 기구하였던 그날의 《산제비》 박세영이 어떻게 수령이 알고 조국이 알며 인민이 사랑하는 시인으로서 우리 조국의 시문학과 아동문학발전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원로의 한사람으로 되였는가를 잘 알게 한다.

시인은 태양의 빛발속에서 조국의 년대와 더불어 잊혀지지 않는 시들을 창작하였다.

그중에서도 참된 삶을 주고 운명을 지켜준 태양을 노래한 시, 영광스러운 조국을 노래한 시들을 많이 씀으로써 변심없는 인간으로, 참된 충신으로 생을 빛내일수 있었다.

시인은 송시 《인민의 태양》(1967년)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

우리같은 행복이 또 있는지

 

인민의 태양으로 우러르는 당신이 계시여

아이들은 세상에 부럼없다 노래하고

젊은이들은 나래치는 희망으로 기개 떨치고

로인들은 구십이 환갑이라 성수 나오니

당신을 수령으로 모신 우리 자랑

그 무엇에 비하오리까

인민은 당신을 우러러 노래합니다

세기의 영웅으로 절세의 애국자로

아름다운 이 노래 온 강산에 울려퍼집니다

 

시에서는 인민의 태양, 위대한 수령이 계시여 인민의 행복이 있고 자랑이 있으며 찬란한 래일이 있음을 격조높이 노래하고있다.

어버이수령님을 노래한 작품들중에서 장편서사시 《밀림의 력사》(1962년)는 시인의 가장 큰 대표작이다.

이 서사시는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50돐에 드린 송가로서 인민들속에서 널리 보급되였다.

서사시는 항일무장투쟁시기 간삼봉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신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김일성장군님의 령활무쌍한 전략전술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시인은 어느 한 기자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하여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는 나이두 있지 않나. 그래두 평생을 시를 써왔는데 시인으로서 자기 조국의 가장 위대한분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시인이겠나. 이것은 나의 평생가는 소원의 하나이네. 이 소원을 푼다고 생각하니 잠이 막 오지 않더군그래.》

민족재생의 은인이신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시인의 절절한 흠모심은 바로 이러하였다. 하기에 그는 해방후 처음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옵고 그 위대한 풍모에 감동되여 그이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를 구가하는 장편서사시를 쓸 결심으로 1949년부터 구상을 무르익히고 줄거리까지 토의하였는데 그만 그 자료와 원고들을 전쟁시기에 몽땅 잃어버렸던것이다.

전후 다시 서사시를 쓰려고 항일혁명투사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그는 밤낮없는 창작전투를 벌려 한달동안에 작품을 완성할수 있었다.

평생소원을 이룩한 시인은 서사시에서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의 고매한 풍모를 다면적으로 형상하였으며 그이께 충직한 전사들의 모습도 감동깊이 그리였다.

 

나는 김일성장군의 전사다

헐벗고 굶주리고 천대받던 나를

길가의 조약돌처럼 채이던 나를

아동단원으로 키워주신분도 김장군

나를 유격대원으로 받아주시고

불굴의 용맹 심장에 심어주시며

키워주신분도 김장군

 

그분께선 식량이 떨어졌을 때도

몸소 굶으시면서도

우리 어린 대원들에게만은

식사를 굳이 권하시였거니

내 열번 죽은들 장군님의 뜻을 저버리랴

 

이 간단한 시련을 통하여서도 어버이수령님께서 지니신 위인적풍모와 그이를 우러러 흠모하며 따르는 항일유격대원들의 충정의 세계를 엿볼수 있다.

서정시 《광휘로운 당의 기치여》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이룩된 빛나는 혁명전통을 그 뿌리로 하고있는 조선로동당은 우리 인민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이끄는 믿음직한 향도자임을 찬양하고 그에 대한 흠모의 감정을 노래하였다.

이 서정시는 1958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창건 13돐에 드리는 송시로서 당의 뿌리와 오늘에 이르는 빛나는 로정을 칭송하였다.

 

 

당의 혁명전통 눈동자처럼 지키며

당이 부르는 길에서 서슴없이 나서리

사회주의락원을 건설하는 전사로

가로막는 원쑤 박차고 승리에로 나가리

 

시인은 이밖에도 어버이수령님과 당에 드리는 시를 많이 창작하였는데 그것은 은혜로운 해발속에서만이 참된 삶도 행복도 미래도 있다는것을 생활체험을 통하여 절감한 시인자신의 마음의 분출이였다.

시인은 해방된 첫날부터 우리 조국을 노래한 작품들도 많이 창작하였다.

《애국가》에 이어 《빛나는 조국》을 비롯하여 《번영하는 조국이여》 등 시편들에서는 삶과 행복의 요람인 조국의 귀중함과 그를 빛내여가려는 시인의 뜨거운 사상감정을 노래하고있다.

시인이 창작에서 뚜렷한 자욱을 남긴것은 준엄한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50대의 종군작가로서 인민군용사들의 영웅적위훈을 노래한것이다.

서정시들인 《숲속의 사수임명식》(1951년), 《나팔수》(1952년)는 인민군전사들의 무비의 용감성과 전투적위훈을 감동깊이 보여주고있다.

서정시 《숲속의 사수임명식》은 영웅의 넋이 깃든 사랑하는 중기 《민청호 조군실중기》를 새 세대에게 넘겨주는 사수임명식을 통하여 영웅의 중기가 전사들속에 남아있는 한 그것은 제2, 제3의 조군실의 가슴속에서 복수의 불길로 타번지고있음을 노래하고있으며 서정시 《나팔수》에서는 나어린 인민군전사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순간까지도 돌격나팔을 불고 또 불어 전사들을 승리에로 불러일으킨 영웅성을 높이 찬양하고있다.

작품들은 풍부한 서정과 생동한 시적형상을 통하여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애국심으로 충만된 인민군용사들의 높은 정신세계를 일반화함으로써 이 시기 창작된 작품들가운데서 대표작으로 된다.

그것은 시인자신도 말한바 있지만 포연탄우속에서 인민군용사들의 영웅적투쟁모습을 직접 목격하였기때문이다.

시인 박세영의 창작적재능은 가사창작에서도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직접적지도밑에 창작된 《애국가》, 《빛나는 조국》을 비롯하여 《승리의 5월》(1947년), 《동백꽃》(1957년), 《림진강》(1957년), 《우리는 천리마타고 달린다》(1958년), 《번영하라 조국이여》(1962년), 《평양은 마음의 고향》(1960년) 등만 놓고도 그렇게 말할수 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빛나는 조국》, 《승리의 5월》, 《번영하라 조국이여》는 좋은 노래라고 하시면서 널리 보급하여 부르도록 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이 작품들은 모두 명가사로서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우고있다.

몇편의 가사를 상기해보자.

 

반만년 오랜 력사 문화도 빛나고

수령님 혁명정신 하늘땅에 넘친다

창조와 로력으로 피끓는 인민들아

찬란한 인민조국 길이길이 받드세

조선아 조선아 영원무궁 만만세

                            (《빛나는 조국》)

 

장하고나 우리들은 힘찬 근로자

새 세기를 창조하는 승리의 주인

자유기발 휘날리며 나아가나니

온 세계를 진감하는 단결의 웨침

동무들아 이 기세로 굳게 뭉치여

인민경제계획을 승리로 맺자

                            (《승리의 5월》)

 

아름다운 강산에 아침노을 붉은데

푸른 하늘 저 높이 나래치는 천리마

수령님의 높은 뜻 이 땅우에 넘치니

번영하는 나의 조국 영광속에 빛나라

                            (《번영하라 조국이여》)

 

읽을수록 곡상이 떠오르고 선률이 흐른다.

시인 박세영의 창작에서 아동문학은 큰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해방전 그가 잡지 《별나라》에 수많은 아동문학작품을 창작발표하여 무산계급아동들의 계급의식을 높여주는데 이바지하였다는것을 잘 알고있다.

해방후에도 그는 새 민주조선건설시기와 조국해방전쟁시기, 전후복구건설시기, 천리마대고조시기 등 시대와 시대를 이어가며 수많은 아동시작품들을 창작하여 《동요할아버지》라고 불리웠다.

해방전 시인이 창작한 아동문학작품에서는 주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에 대한 동정과 착취자들에 대한 증오와 새 사회를 동경하는 내용들을 반영하였다면 해방후 창작한 아동문학작품에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행복하게 살며 조국의 꽃봉오리로 씩씩하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밝은 모습을 동심에 맞게 생동하게 노래하였다.

동요 《보고싶은 원수님》은 해방후 시인의 대표적인 아동시작품이다.

 

원수님의 사진은

언제 봐도 기뻐요

우리들이 어느때나

보고싶은 원수님

 

나비같은 리봉에

아름다운 무용복

노래하며 춤을 추면

웃어주실 원수님

 

동요는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무한한 흠모와 경모의 감정을 동심세계에 깊이 침투시켜 진실하게 노래하고있다.

동요는 비록 어린이들의 동심에 담아 노래하였지만 언제나 어버이수령님을 뵙고싶어하는 시인자신과 전체 인민들의 심장의 토로이기도 하였다.

시인의 아동문학작품에는 《박세영동시선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비롯하여 수십편의 우수한 동요, 동시, 아동서사시, 장편동화시가 있다.

시인 박세영의 붓은 어린이들로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공장과 농촌, 푸른 잔디와 이름없는 산촌의 계곡 그리고 조국통일 등 수많은 대상과 령역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데가 없다.

이것은 사회주의조국에 대한 그의 열화와 같은 사랑의 표현이였다.

이 모든것을 어찌 제한된 지면에 다 피력할수 있겠는가.

우리 여기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겨레에 대한 그의 뜨거운 사랑과 통일의 열정을 보여주는 가사 한편을 보기로 하자.

 

림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 가니

림진강 흐름아 원한싣고 흐르느냐

 

강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바다 물결우에 춤추니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가사 《림진강》)

 

이처럼 가사 《림진강》은 남녘에 고향을 두고 온 그가 통일의 날을 애타게 갈구하며 부르던 심장의 노래였다.

시인은 해외동포들에 대한 관심도 누구보다 높았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한때 이역땅에서 참기 어려운 빈궁을 체험하였기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총련의 한덕수의장이 시인 박세영에게 여러번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가운데는 이런 구절을 담은 편지도 있었다.

… 총련결성 10주년을 축하하기 위하여 시인들이 축하의 집회를 가졌다는것과 거기에서 동지는 송가를 발표하여 총련의 사업을 찬양하였다는것을 듣고 감격하여마지 않습니다. …

의장은 계속하여 편지에서 총련에 대한 가사를 창작해줄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시인은 여기에 기꺼이 응하였으며 성의를 다하였다.

시인이 재일동포들의 첫 귀국선을 맞이하여 쓴 가사 《귀국동포환영곡》은 우리 인민이 많이 불렀으며 동포들이 귀국하여올 때마다 청진, 원산에서 하늘높이 온 세상에 울려퍼졌다.

시인은 귀국선이 올 때마다 현지에 달려가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백발의 시인은 자신이 지은 노래를 목이 쉬도록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목소리는 작아도 심장으로 부르고부른 그 울림소리는 누구보다도 컸던것이다.

시인은 이렇듯 태양의 빛발속에서 《산제비》의 리상을 활짝 폈다.

그 나날에 시인은 서정시 《해빈의 처녀》를 세상에 내놓은이래 장장 반세기가 넘도록 심장의 목소리로 쓴 《박세영시선집》을 비롯한 10여권의 개인시집들과 작품집 그리고 근 2 000여편의 동요, 동시와 서정시, 서사시, 가극들인 《불멸의 력사》, 《견우직녀》, 《춘향전》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내놓아 우리 문학의 화원을 만발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해볕 또 해볕에서

 

우리 인민모두가 그러하지만 시인 박세영은 남달리 해볕에서 또 해볕을 받아안고 사는 행운을 지니였다.

그는 해방후 공화국의 품에 안겨 어버이수령님의 따사로운 해볕속에서 《산제비》의 리상을 꽃피웠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또 한분의 위대한 태양의 해볕을 받아안고 인생의 말년을 청춘의 활력으로 살며 창작의 붓을 달리였다.

시인이 향도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처음으로 몸가까이 뵈옵게 된것은 1972년 9월에 있은 문예총산하 작가들의 모임에서였다.

이날 시인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고 돌아오는 저녁에 너무도 감격하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이의 가르치심은 우리 문학의 대백과사전이고 내가 한생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들은 위대하고 새로운 문학강령이요.

그분은 우리 수령님과 꼭 같으신분이요. 나는 붓을 쥐고 숨지는 순간까지 그이만을 따르겠소.》

그 열렬한 충정은 경애하는 장군님께 드리는 많은 시들중에서 서정시 《크나큰 믿음의 손길》 하나만을 펼쳐보아도 잘 알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나에게 묻더라

백발이 흩날리는 나를 두고

그 기백 그 열정이 어디서 오는거냐고

 

그러면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하여라

사람도 강산도 청춘이 나래치게 하는

은혜로운 당의 품을 두고

그 모든 따사로움을 두고

 

아 잊을수 없어라 영광의 그날을

꽃을 피웠다면 한낱 방울꽃일가

별로 기쁨을 드린적 없건만

 

받아안은 감격은 순간이여도

내 지닌 영광은 영원하여라

따사로운 그 손길에서 흘러드는 은정은

청춘을 불러 내 온몸을 끓게 하였거니

그것은 친애하는 그이의 자애로운 손길!

그것은 하찮은 나에게도 안겨주신

크나큰 믿음의 손길!

그것은 바위도 뚫고 솟구칠

창조의 샘을 터쳐주신 은혜로운 손길!

 

사람들이여!

내 늙었다고 생각지 말라

충성심이야 나이로 셀수 없는것

오직 그 한길에서 살려는 이 내 마음

저 맑은 하늘을 떠인 푸른 소나무같은데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서야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서야

내 어이 늙을수 있으리

 

시인이 청춘의 활력으로 더욱 큰걸음을 내딛게 된것은 80고령에 이르러 시단을 떠나 집에서 쉬고있을 때였다.

사람의 한평생에서 누구나 황혼기에 이르면 집에서 자식들의 시중을 받으며 사는것이 보통현상이라고 할수 있다.

《산제비》로 날아예던 시인 박세영도 어쩔수 없는 인생길이였다.

이날도 시인은 버드나무 늘어선 보통강가에 나와 붓대신 낚시대를 드리우고 (《산제비》의 날개가 이젠 부러졌구나!) 하는 서글픔과 함께 하는 일없이 나라의 혜택만을 받으며 사는 죄스러움이 가슴에 파고들어 무겁게 앉아있었다.

그러했던 그에게 다시 창공을 날으는 생의 기적이 생겨났다.

로작가의 심정을 헤아려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1985년 3월 7일 창작생활을 계속하면서 여생을 보람있게 보내도록 그를 다시 창작의 대오에 세워주시였다. 그것도 청춘의 기백을 안고 영원히 로쇠를 모르고 살도록 금성청년출판사에서 문학창작을 계속하도록 해주신것이였다.

새 청춘이 시작되던 그날 박세영은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기였다.

《나는 40대에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 청춘의 삶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80고령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품에서 영원한 청춘을 받아안았습니다. 나는 나에게 영생하는 삶을 주시고 시를 주시였으며 청춘의 심장을 주신 그 위대한 품을 숨이 지는 마지막날까지 노래불러 칭송하겠습니다.》

산제비를 자유의 화신으로 소리높이 구가하던 청년시인은 80대에 잠시 놓았던 펜을 이렇게 다시 들었다.

사색의 호수는 청춘기 못지 않게 출렁거렸고 육체의 힘도 왕성해졌다.

로작가들이 창작실에 나오는 날이면 제일선참으로 나오군 하였다.

눈내리는 어느날이였다.

모두들 이런 날에는 박세영선생이 못 나오리라고 생각하고있는데 그가 마당에 깊은 눈자욱을 남기며 씨엉씨엉 걸어들어오고있었다.

《이 눈길을 용케 오셨습니다.》

작가실의 동무들이 이렇게 말하자 그는 《동무들, 내 발자국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좀 보우.》 하고 빙그레 웃으며 눈우에 찍힌 발자국을 가리켰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정으로 자기의 생의 무게가 얼마나 값지게 무거워졌는가를 좀 보라는 뜻이였다.

그러면서 《문제없어.》 하고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하며 빙긋 웃었다.

청춘의 기백을 표현하는 《문제없어.》라는 그의 이 말은 로작가조에 나오면서부터 더 잦아졌는데 그는 서정시 《90청춘을 노래하노라》를 쓸 때도 이 말로부터 창작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영광의 기념촬영을 하고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은 감격을 안고 자기의 결의를 다진 그는 집에 가서 부인에게 《여보, 래일부터 점심밥을 좀 싸주우.》 하고 말하였다.

《무슨 회의라도 있는가요?》

《아니요, 광복거리건설장으로 생활체험을 나가야겠소.》

《광복거리라니요?》

부인은 놀랐다.

다음날 시인은 출판사에서 차를 내준다고 하였지만 차안에 앉아서야 무슨 체험이냐고 하면서 부인과 함께 부글부글 끓는 광복거리건설현장으로 나갔다.

자그마한 키에 은백색머리, 83살의 고령에도 정정한 걸음새로 그는 건설장을 걸었다.

하늘을 치받고 솟아오르는 고층건물들과 그 꼭대기에서 붉은기를 든 신호수의 신호에 따라 육중한 벽체들을 닁큼닁큼 들고 빙빙 돌리는 처녀기중기운전공.

긴 목을 빼들고 흙을 퍼담는 굴착기들과 쉬임없이 오가는 대형화물차들, 돌격대원들과 군인들, 지원자들을 돌아보며 로시인은 부인에게 말했다.

《내 늘그막에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는구려. 내 저 높은 꼭대기까지 올라가봐야겠소.》

《뭐요? 제발 그 위험한 곳에만은…》 하며 부인은 어쩔바를 몰라했다.

박세영이 취재를 나왔다는 소문이 건설장에 퍼지자 건설장에는 그가 쓴 노래 《천리마타고 달린다》와 함께 선동원의 흥분된 소개말이 고성기에서 울려나왔다.

《동무들! 〈애국가〉를 쓴 박세영선생이 건설현장에서 좋은 시를 쓰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건설장일군들이 박세영의 손을 이끌고 그의 소원대로 준공이 가까운 고층건물옥상으로 안내했다.

아득히 높은 고층건물우에서 내려다보니 어제날의 자취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눈뿌리 아득히 뻗어간 넓고 시원한 대통로, 금강의 메부리마냥 치받으며 일떠서는 고층, 초고층살림집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언듯 시인에게는 50여년전 우연히 충북의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 살같이 날아도는 산제비를 보며 시상을 고르던 그때와는 대비도 안될 숭엄한 감정이 부풀어오르는것이였다.

그 시절 《산제비》가 그리도 날아보고싶어하던 하늘은 번개치고 우뢰울며 먹장구름이 비꼈던 하늘이였다.

그러나 그가 오늘 날아예는 하늘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밝게 펼쳐주시는 락원의 하늘, 만경대의 하늘이였다.

룡마의 날개에도 비기지 못할 마음의 나래, 창작의 나래를 활짝 펴고 행복과 긍지로 한껏 부푼 가슴에 노래를 가득 안고 광복거리를 날으는 《산제비》였다. 그만이 아닌 수천수만의 돌격의 《산제비》들이 기운차게 날아예는 광복거리의 하늘이였다.

낮에도 밤에도 위대한 태양의 빛발이 찬란한, 그래서 태양에서 제일 가까운 광복거리였다.

시인은 마침내 무릎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찾았다! 그것이다. 태양의 거리!》 하고는 건설장의 콩크리트부재우에 원고지를 펴놓고 필을 놀리였다.

태양의 거리!

고심어린 창작적사색과 탐구로 이 귀중한 시구절을 찾아낸 백발의 시인은 창작가만이 체험할수 있는 기쁨에 못이겨 울고있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눈물이 헤퍼진다고 하지만 이 시각 시인은 해방의 봄언덕에서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쓴 시 《해볕에서 살리라》를 생각하며 흐느낀것이였다.

새 삶의 첫 기슭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해볕에서 살리라》고 그처럼 절절히 웨치던 그 평생소원을 시인은 다 성취했다. 그는 한생을 해볕 또 해볕에서 살아오고있는 이 세상 가장 행복한 시인이였다.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해볕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았고 시의 만발한 화원을 아름답게 가꾸었으며 경애하는 장군님의 해볕에서 고목의 꽃을 피운것이였다.

시인은 가슴에 흘러든 청춘의 활력으로 광복거리건설장에서 마침내 련시형식으로 된 시초 《광복거리에서 부르는 노래》를 완성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부터 살아온 모질던 세상과의 대비속에 세인을 경탄시키며 웅장화려하게 솟는 광복거리의 위용을 노래한 시,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끄시는 조국현실을 드높은 긍지와 삶의 보람으로 엮은 그 시를 경애하는 장군님께 삼가 올려 기쁨을 드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것이 너무도 장하시여 한편한편을 다 보아주시고 여러 출판물에 싣도록 은정깊은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그의 로당익장의 창작적정열과 기백에 머리를 숙이였다.

그들중 한 청년대학생이 시는 정열의 산물인만큼 흔히 청춘의 힘과 기백이 약동하는 젊은 시절에 써야 하는것으로 알고있는데 시인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여 고령의 나이에 그처럼 훌륭한 시를 쓸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때 시인은 기쁨과 자랑에 넘쳐 이렇게 말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은 시의 대가, 문학의 대가이시오. 그분의 따사로운 해볕이 이 늙은 시인에게 청춘을 부활시켜주시고 정열을 부어주시였소. 그래서 나는 10년 또 10년 젊어지면서 시를 쓰고있소.》

이것은 시인이 언제부터 동시대인들앞에, 독자들앞에 하고싶었던 심장의 절절한 토로이기도 했다.

시인의 인생을 키워주셨고 그의 창작적재능을 꽃피워주시고 가꾸어주신 위대한 사랑의 손길은 세월의 한계를 넘어 끊임없이 이어지고있는것이였다.

그 은혜로운 사랑의 품속에서 시인자신도 잊고있던 가사 《승리의 5월》, 《빛나는 조국》은 해방직후에 창작되여 널리 불리운 노래, 감회깊은 노래라는 높은 평가속에 사회주의대건설로 들끓는 조국땅우에 더욱 높이 울리고 현대조선문학사의 갈피에 명작으로 빛나게 되였으니 시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과 행복이 그 어디 있을것인가.

사랑의 해볕은 시인의 생일 85돐을 맞는 날에도 비쳐들었다.

1987년 7월 7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애국가》의 작가이며 시문학의 로장인 그에게 생일 85돐상을 차려주는 크나큰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한편한편의 가사만이 아니라 생일까지 잊지 않고계시는 그이의 한량없는 은정에 시인은 끝내 격정의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많고도 많은 나라일에 그처럼 다망하시온데 백발신하의 생일마저 잊지 않고 계신단 말입니까!》

《산제비》시인은 어깨를 세차게 들먹거렸다. 빛나는 삶의 절정에서 오늘의 자신을 굽어보며 행복에 젖어 흘리는 눈물은 참으로 뜨거운것이였다.

(아, 대를 이어가시며 나의 인생도 문학도 더욱 꽃피워주시는 그 품, 이 세상 끝까지 따르고모실 하늘같은 그 품.)

시인은 마음속으로 뜨겁게 부르짖으며 사진사에게 생일상만 따로 잘 찍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생일상사진을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주겠소. 그리고 통일되는 날 남녘의 고향에도 가지고 가겠소.》

시인은 생일을 축하하러 온 친지들과 시인들, 문학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생의 언덕에

 

해볕 또 해볕속에 살같이 날으던 《산제비》 박세영은 불치의 병으로 침상에 눕게 되였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게 된것을 안 시인은 어느날 침상옆에 아들을 불러앉히였다.

《아마도 내가 이번엔 안될것 같다. … 수령님과 장군님의 사랑은 하해같은데 보답을 못했다.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아 수령님과 장군님께 충실하거라. 대를 이어 말이다. …》

이것은 시인의 마지막부탁이며 유언이였다.

시인은 반세기를 넘어 달리고달리던 붓을 조용히 놓았다.

이 비보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몹시 애석해하시며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시인의 서거를 알리는 부고가 중앙급신문들에 실리여 온 나라에 전해졌고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진행되였으며 시인의 령구는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였다.

그리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유가족들을 렬사가족으로 내세워주시고 생활에 사소한 불편이라도 있을세라 거듭 크나큰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시인은 갔으나 영광은 끝이 없고 그의 생명도 끝나지 않았다.

그후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카프작가편)의 창작사업을 지도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카프작가편)을 송영과 박세영을 중심인물로 그리는것이 좋겠다고, 그들은 아주 친한 사이였기때문에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수 있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시인에게 돌려주시는 해빛같은 사랑과 은정은 문화성혁명사적관에도 깃들어있다.

사적관에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애국가창작과 관련하여 박세영을 비롯한 작가들을 접견하시는 사진이 모셔져있고 시인이 조국해방전쟁시기 포연탄우속에서 사용하던 종군수첩과 그의 종군시집 《승리의 나팔》이 전시되여있다.

사람들은 그 접견사진과 전시품앞에서 시인 박세영의 한생을 다시금 더듬어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군 한다.

일제의 먹장구름속에서 마음의 산제비가 되여 애타게 구름속을 헤가르며 치솟고 내리꽂던 《산제비》, 원한과 분노의 피를 물고 구름속에서 울부짖던 《산제비》가 오늘 다함없이 비쳐내리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의 해빛! 삶의 한계도 초월하는 그 사랑, 그 은정의 빛발속에서 자기의 노래와 함께 영생하는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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