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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석윤기(작가)

 

                      • 1929년 10월 22일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출생.

                      • 조국해방전쟁시기 의용군으로 입대.

                      • 1961년부터 현역작가로 활동.

                      • 1982년부터 4. 15문학창작단 단장, 그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임.

                      • 1989년 4월 28일 사망.

                      •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민족분렬의 비극을 안고 조국의 통일을 그리며 살던 작가 석윤기는 림종을 앞두고 아들 석남진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통일이 되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꼭 찾아뵈워라. 지금 살아있으면 할아버지는 89살, 할머니는 79살 됐을거야. 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술을 부어드려라.

내가 집을 떠난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네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를 위해 숱한 속을 썩였는데 난 한번도 효도를 하지 못했다.

나의 이 심정을 그대로 전해다오.

민족은 하나라는것이 분렬된 조국에서 사는 우리 작가들이 작품에 담아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남진아, 통일을 위해 민족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글을 많이 쓰거라.》

인간이 생의 마감에 남긴 유언에는 그가 한생을 두고 품고있던 모든 소원이 담기고 그가 일생동안 닦아온 인격의 진모가 비낀다고 하였다.

남녘땅에 계시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 근 40년, 가슴속에 오로지 조국통일의 일념을 안고 창작의 붓대를 벼려온 작가 석윤기는 자식들의 이름도 해를 따라 간절해지는 통일의 념원을 담아 남주, 남진, 남연이라고 달면서 애타게 그리던 통일의 그날을 끝내 보지 못하고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의 생애는 사회주의품속에서 한 인간이 누릴수 있는 영광과 행복의 절정에서 빛났다고 할수 있다.

영예의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4. 15문학창작단 단장으로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이 따사로운 사랑속에 받을수 있는 모든 믿음과 표창을 다 받아안고 영생의 길을 간 그의 생은 참으로 부러운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정말 행복하기만 했던가.

그는 한 인간이 누릴수 있는 모든 영광과 행복을 다 누렸지만 분렬된 조국에 사는 한 지성인으로서 인간이 겪을수 있는 고통과 불행의 눈물을 다 쏟아놓으며 살아온 사람이였다. 어떻게 되여 그는 이 운명의 제비표를 골라잡았는가. …

 

 

《회고와 신념》의 세계

 

소설가 석윤기의 고향은 락동강류역인 경상북도 달성군 동천면 불로동이다. 그는 여기에서 1929년에 가난한 농가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첫 자식이 아들일 때 가정은 끝없는 기쁨과 웃음으로 밝아지는 법이건만 석윤기의 출생은 오히려 집안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연약하고 가난에 쪼들릴대로 쪼들린 어머니는 아들을 먹여살릴 길이 막막하여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소리없이 울군 하였다.

하지만 그는 가난이 그대로 식량이 되였는지 병을 모르고 무럭무럭 자라났고 다섯살때는 어른들 틈에 끼워 서당공부를 하면서 무척 짧은 기간에 《천자문》을 떼여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이것이 가난한 집에서는 너무도 큰 기쁨이여서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목마태우고 동네방네를 다니며 자랑을 하였다.

하루는 동구앞 락동강가의 나루터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나온 5살난 그를 내리워 《천자문》을 외워보라고 요청했다.

그는 강뚝의 새파란 잔디밭에 무릎을 꿇고앉아 앞뒤로 몸을 약간씩 흔들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천자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하늘천, 따지, 감을현, 누를황…》

그 모양이 하도 기막히고 신기해서 눈을 껌벅이며 바라보던 땅꼬바지를 입은 안경쟁이가 어린것에게 만년필을 꺼내주면서 자기가 읊는 한자구를 써보라고 하였다.

안경쟁이는 제법 운까지 붙여가면서 《한래서왕이요, 추수동장하리라.》 하고 호기있게 뽑는것이였다.

모여있던 어른들은 《저렇게 어린것한테 너무 과하구만.》 하고 안경쟁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호기심이 동하여 만년필을 가누어쥔 어린 석윤기를 바라보았다.

어린것은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입을 옥물고 눈을 깜빡이며 잠간 생각하더니 힘있게 만년필을 놀리였다.

《寒來暑往, 秋收冬藏》(한래서왕, 추수동장)이라는 8개 한자로 4언절구를 써놓는것이였다.

글씨는 조금도 서툰감이 없이 몹시도 방정하였고 필순이 정확했을뿐아니라 획과 획의 맞물림이 여물어 아주 기백이 약동하였다.

어른들은 너무도 희한하여 입들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였는데 특히 글을 쓰라고 하던 그 안경쟁이는 두눈이 뒤집힐듯 휘둥그래졌다.

잠시후 그 사나이는 그 뜻이 무엇인가고 묻는것이였다.

어린것은 꿇어앉은 자세를 꼿꼿이 펴고 챙챙한 목소리로 당돌하게 《예, 추위가 오면 더위는 물러가기마련이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깊이 건사한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이쿠, 이녀석 놀라운걸, 너 분명 아이가 맞느냐?》

사나이는 어린것을 덥석 그러안기까지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사람들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이 마을에 신동이 났구나. 경사로다!》

이처럼 석윤기는 어렸을 때부터 다문박식한 인재로 될수 있는 천성을 지니고있었다.

그러나 험악한 세월은 어린 그의 모든것을 여지없이 짓뭉개버리였다.

1938년 장마로 락동강이 범람하여 얼마 안되는 소작지를 묻어버리는 바람에 농사를 망쳐버린 그의 일가는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였다.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진눈까비 내리는 두만강을 건너선 그는 목단강에서 안타까이 찾던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중국소학교에 2년간 다니였는데 그는 이 기간에 이 지역에 주둔하고있던 관동군 6군관구 헌병대놈들의 주민학살만행을 목격하면서 치를 떨었다.

그곳에서도 살길이 막힌 석윤기의 일가는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와 그 원한서린 소작살이를 다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42년 석윤기는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 친척들의 피어린 후원으로 대구시 대륜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는데 인차 수재학생으로 공인되였고 학생회장으로까지 선출되였다. 이때 그는 학교당국이 강요하는 단체복착용을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석윤기는 16살 되는 해에 조국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는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기쁨과 격정에 넘쳐 동무들과 함께 태양의 열로 뜨겁게 달아오른 8월의 대지를 힘차게 구르며 목청껏 부르짖었다.

《아, 해방이다! 우리 세상이 왔다!》

열혈청춘이였던 석윤기는 자유와 해방이 도래한 현실에서 벅찬 감격을 체험하면서 자기의 앞날에 펼쳐진 새로운 대지를 보는것만 같았다.

정의롭고 자유롭고 더없이 아름다와보이는 그 대지를 향해 새 삶의 배가 출항하였다는 환희에 그의 가슴은 못견디게 부풀어올랐다.

작가는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담아 시 《출항》을 써서 발표하였다.

이때를 회상하여 석윤기는 자기의 수필 《회고와 신념》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민족재생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그처럼 어마어마하게 보이던 일제를 쳐물리치시고 조국을 해방해주시였다. …

나는 시를 썼다.

철부지 내 눈앞에는 찬란한 해빛아래 푸른 바다가 누워있었다. 사랑하는 조국은 창창한 항로를 앞둔 아름다운 배였다. 갈매기는 날고 물이랑은 끝없이 설레이는데 우렁찬 배고동소리가 울린다. … 그리하여 그 시의 이름은 〈출항〉이였다.》

하지만 작가는 이 세상에 보내는 청춘의 그 첫 속삭임으로 하여 상상할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를 대신하여 기여든 미제침략자들과 그 하수인이 된 민족반역의 무리들은 그를 공산사상을 퍼뜨린 《빨갱이시인》으로 몰아 경찰서감방으로 끌고가 무지하게 매질하였다.

그는 푸른 꿈을 안고 희망의 바다로 《출항》한 이 시작품 한편때문에 갈비 석대를 바쳐야 하는 무서운 참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반주검이 되여 들것에 실려나오던 날 그립고그리워 두번씩이나 찾아떠났던 평양의 하늘을 우러르며 부러진 갈비뼈밑에서 약동하는 심장에 불같은 결심을 새겨넣었다.

(내가 갈 곳은 평양이다. 거기에 청춘의 푸른 꿈도 꽃피우고 인간답게 살수 있는 모든것이 있다.

만고의 영웅,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펼쳐가시는 저 민주의 대지야말로 내가 찾고 뿌리내려야 할 운명의 땅이 아닌가!)

그의 이 결심은 전쟁이 일어나 인민군대가 서울을 해방하였을 때에야 실천으로 옮겨지게 되였다.

석윤기는 용약 정의의 총을 메고 북으로 가는 길-침략자 섬멸의 결전장으로 주저없이 뛰여들었던것이다.

석윤기는 수필 《회고와 신념》에서 다 피력하지 못했던 그 심정을 그후에 쓴 자기의 창작수기에서 펼쳐보이면서 자기가 선택한 그 길에 어떤 영광스러운 삶이 약속되여있었는지 그때는 알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다심한 믿음과 사랑속에 작가로 자라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세심한 보살피심과 이끄심을 받아 영광의 단상에 오른 자기의 오늘에 대하여 자자구구 새기였다.

만약 그가 북으로의 그 길이 힘들다고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그 영광과 행복의 절정에 서지 못하였을것이다.

그러고보면 그가 남조선에서 단행한 첫 《출항》은 끝끝내 진리의 대지를 찾았고 그 기슭에 닻을 내린것이였다.

하지만 작가로서 우리 인민들과 민족성원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기까지는 순탄치 않은 의지의 행군길이 놓여있었다.

 

 

병상을 박차고 창작의 활주로에로

 

풍치수려한 보통강반에 자리잡은 고층아빠트에는 작가 석윤기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생활한 살림집이 있다.

이 집에 들어서면 벽면을 꽉 채운 장서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단번에 끌어당긴다.

우리 나라 문학사에 올라있는 중편소설 《전사들》, 단편소설집 《폭풍시절》, 장편소설들인 《시대의 탄생》(1, 2부), 《무성하는 해바라기들》(1부), 총서 《불멸의 력사》중에서 장편소설 《대지는 푸르다》, 《봄우뢰》, 《고난의 행군》, 《두만강지구》 그리고 불후의 고전적명작을 장편소설로 옮긴 《피바다》 등이 그가 걸어온 창작의 보람찬 나날을 이야기하여주며 장서에 빼곡이 꽂혀있다.

거의 모든 책들의 장정이 호화롭다. 그런데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색갈이 바래여 누렇게 된 문학잡지 한권이 그 호화장정의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꽂혀있어 이채로움을 띠고있다. 그의 처녀작인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이 실려있는 잡지 《청년문학》이다.

1956년 3월 《청년문학》 창간호에 실린 이 단편소설은 창작의 첫 발자욱을 내디딘 신인 석윤기의 개성적인 얼굴을 단번에 뚜렷이 드러냄으로써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키였다.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을 쓴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사람들은 특히 작가들은 더더구나 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싶어하였다.

그가 남조선에서 의용군으로 입대하여 전승의 날까지 용감하게 싸운 20대청년으로서 병원침상에 누워있는 전상자라는것이 알려지자 그의 소설이 일으킨 파문은 몇배로 더 커지였다.

사실 그때 석윤기는 영예전상자병원의 어느 한 병동에 누워있는 몸이였다. 그 병동은 가장 위중한 환자들이 집결되여있는 호동으로서 의사, 간호원들의 관심이 각별하였다.

석윤기자신은 자기가 이러한 중환자의 처지에 떨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그는 전쟁 3년 전기간 자동차를 운전한 수송전사였다. 어떤 때에는 항공연유를 싣고 또 어떤 때에는 탄약, 포탄상자를 가득 싣고 불비속을 헤치며 맡겨진 수송전투임무를 어김없이 수행함으로써 《용감한 수송전사》, 《영웅적운전수》로 전선신문에까지 소개된 위훈자였다. 그런데 전승의 소식을 듣고 전우들과 함께 만세를 웨치던 그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 일어설수 없는 몸이 되여버리였다. 아마도 전쟁 전기간 긴장해질대로 긴장해졌던 마음의 탕개가 전승소식에 접하자 자기도 모르게 확 풀어지며 육체를 쓰러뜨리였을것이다.

의식을 잃은 석윤기를 진찰하던 야전군의소 군의들은 그만 아연실색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이런 몸으로 3년을 싸우다니?!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가?》

진찰결과에 의하면 이미 오래전에 갈비뼈가 온통 으스러졌던데다 석대는 아예 잘라낸 상태였다. 그리고 강한 외부적타격을 받은것으로 보아지는 척추는 당장 동강날듯 한 위험지경에 있었다. 분명 본인이 이러한 사실을 전쟁 전기간 숨기고 싸웠던것이다.

군의들은 사나이의 강인한 정신에 감동되여 눈물을 머금고 그를 지체없이 후방깊이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병원생활이 3년이나 흘러 1956년에 이르렀다.

예민한 감각과 판단력을 가진 석윤기는 자기의 몸은 이미 다시는 무장대오에 설수 없이 되여버렸다는것을 직감하였다. 반미성전에 몸을 내대고 총잡은 병사로 삶의 마감까지 싸우리라 결심하였었건만 원쑤놈들의 매질에 으깨여진 육체가 더는 지탱 못할 형편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통분한가.

(이렇게 물러서야 하는가? 나는 이제 무엇으로 어머니조국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가?)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채였다.

그러던 그는 우선 병마에서 벗어나는 일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였다.

(당면한 나의 전투임무는 병마와 싸워이기는것이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기만 하면 할 일은 얼마든지 있을것이다.)

그는 병원의 요구에 무조건 복종하는 한편 몸을 추세우기 위한 치료운동을 부지런히 하였다.

어느 정도 몸이 호전되게 되자 그에게는 병원예술소조활동에 필요한 합창시, 재담, 촌극, 가사 지어는 소개자의 소개말까지 부탁받아 써주어야 하는 등 할 일이 매일같이 많이 생기였다. 이런 연고로 하여 그는 환자들과 의사, 간호원들 그리고 병원의 모든 관리일군들과 대단히 가까워지고 친숙해지였다.

당시 이 병원 원장사업을 하던 항일혁명투사 림춘추와 기술부원장사업을 하던 유격대군의 리봉수가 석윤기의 강직성과 소탈함에 감탄하군 하면서 그가 마음에 들어 자주 이야기를 나누군 하였다.

어느날 석윤기는 림춘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심장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1951년 6월 30일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안으신 그 바쁘신 환경속에서도 문학예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시기 위해 작가, 예술인들을 만나주시였다는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작가, 예술인들에게 작품에서 우리 인민의 숭고한 애국심을 잘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애국심은 그 어떠한 추상적인 개념인것이 아니라 자기 조국의 강토와 력사와 문화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며 그것은 또한 자기 고향과 고향사람들에 대한 애착심, 자기의 부모처자에 대한 애정에서도 표현되는것이라고 교시하시였다.

림춘추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석윤기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열화같은 흠모심이 가슴에 차넘치였고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수 있었던 기본요인이 무엇이였는가를 순간에 깨닫게 되였다.

그는 쓰고싶었다. 우리의 애국심과 그 무진장한 위력에 대하여 쓰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창작에 달라붙었다. 수송전사인 자기의 체험속에서 소재를 찾았고 종자를 탐구하였다. 그는 창작을 곧 조국을 위하여 병사가 벌리는 전투로 간주하였다. 이렇게 씌여진것이 그의 처녀작인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이다.

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그것은 이 작품이 전쟁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무기냐? 사람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생동한 형상으로 얻어내였기때문이였다.

포로된 미군대위 로버드슨은 수송임무를 수행하는 처녀군인 경희의 고상한 정신도덕적힘앞에서 전쟁의 운명을 결정하는것이 무기라고 하던 자기의 첫번째 대답을 포기하고 전쟁의 운명은 결코 기술장비에만 달려있지 않다고 두번째 대답을 한다.

군복입은 처녀의 용감한 모습과 백절불굴의 투쟁정신앞에 무릎을 꿇은 포로가 하는 두번째 대답은 곧 영웅적인 조선인민앞에 참패를 당한 미국이 찾아야 할 교훈적인 대답인것이다.

석윤기는 이처럼 자그마한 단편에 거대한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승패의 비결을 가장 생동한 형상으로 밝히였던것이다.

후날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을 읽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 작품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의 생활을 취급하면서 불과 몇시간동안에 두명의 등장인물들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거대한 힘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철학적깊이가 있게 밝혔다고 하시면서 현대전쟁의 운명은 무기나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대와 인민의 전투도덕적품성, 수령의 사상에 의하여 하나로 단합된 군민의 정치사상적단결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작가 석윤기는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을 내놓은데 뒤이어 중편소설 《전사들》의 구상을 무르익히고 불가항력적인 의지로 본격적인 창작전투에 진입하였다.

그러면 그가 무엇에 힘을 얻어 병상에 누워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중편소설 《전사들》에 대한 창작을 시작하였는가?

이에 대하여 석윤기는 자기의 창작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것이나마 〈전사들〉을 쓸수 있은것은 내가 바로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참가자였기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에 씌여진 전투나 혹은 인물들이 모두 내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것들인가 하면 그런것도 아니다.

… 그러나 소설에 담겨진것과 꼭같은 그런 이야기나 인물은 본적이 없지만 그 무엇인가 소중한것들을 많이 보고 많이 들었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느꼈던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원쑤들이 눈을 까뒤집고 갈겨대는 포연탄우속을 뚫고 전선과 후방을 오가면서 준엄한 시련속에 있는 조국을 온몸으로 느끼였다. … 어쨌든 그 시기에 나는 이 위대한 싸움에 대하여 반드시 세상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후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것을 막연하게나마 느꼈던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최초의 창작적충동이다. …》

작가는 이렇게 쓰면서 반드시 소설을 창작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펼쳐주신 제1차 5개년계획의 휘황한 전망을 접하고 5년후의 조국을 그려보면서 이날을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친 전우들과 전쟁의 시련에 대해 인민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것을 자각했을 때 떠올랐다고 서술하였다.

그는 일분일초를 쪼개가며 모든 넋과 열정을 중편소설 《전사들》을 창작하는데 쏟아부었다.

그는 병석에서 소설을 창작하였다.

그는 붓을 달리기 전에 이런 구호를 자기앞에 내세웠다.

《한편의 작품창작-이것은 한번의 돌격전이다.》

그는 침대에 엎디여 쓰기도 하고 모로 누워 쓰기도 하고 반듯이 누워 쓰기도 하였다. 반듯이 누워 쓸 때에는 만년필이 거꾸로 선 관계로 잉크가 내리지 않아 애를 먹군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일 많은 량의 원고를 써내군 하였다.

드디여 중편소설 《전사들》이 완성되여 출판배포되자 독자들과 문단에서는 또다시 파문이 일어났다.

석윤기의 처녀작 《두번째 대답》을 대할 때부터 신인작가의 작품에 비낀 명석한 철학적견해와 독특한 창작기교를 범상치 않게 여겨보시였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에도 중편소설 《전사들》을 깊은 관심속에 보아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962년 9월 22일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앞에서 장시간에 걸쳐 중편소설 《전사들》이 거둔 사상예술적성과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시는 중요한 담화를 하시였다.

작품에 그려진 시대적배경에 대하여서부터 소설에 심어진 사상적핵과 주제사상, 성격들과 사건들, 작품의 예술적견인력과 인식교양적의의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분석하여주신 이날의 교시가 바로 《중편소설 〈전사들〉은 인민군전사들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진실하게 형상한 작품이다》라는 제목으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문헌집에 수록된 유명한 담화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이러한 관심속에서 석윤기는 보다 더 광활한 소설의 대지에로 활보해갔다.

그는 1961년부터 그리도 열망하던 현역소설가로 되였다.

전쟁물주제의 새로운 소설을 내놓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던 석윤기는 장편소설 《시대의 탄생》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무렵 지금껏 말썽을 일으키던 척추결핵이 갑자기 악화되였다.

악화되는 증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매일과 같이 고름을 뽑아내였고 침대에 오래동안 누워있다나니 욕창까지 오게 되였다.

작가는 생명을 잃을번 하는 무서운 순간을 동반하는 대수술을 세번씩이나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형편에 직면해서도 창작의 붓을 절대로 놓지 않았다. 말그대로 초인간적인 의지와 열정을 기울인 창작과정이였다.

부인인 림정아녀성의 다심하고 꾸준한 지성이 그가 쓰러지지 않고 글을 쓸수 있도록 지탱하여주었다.

이처럼 천신만고를 강의한 혁명정신으로 이겨내면서 그는 끝내 장편소설 《시대의 탄생》(1부)을 1964년에 독자들앞에 내놓을수 있었다.

소설은 그것이 포괄하고있는 내용의 방대성과 생동하면서도 깊이있는 형상력으로 독자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였다.

더구나 작품전반을 포괄하고있는 작가의 창작적인 사색과 높은 지성도, 다문박식한 언어구사는 소설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예고하는 의미심장한것이기도 하였다.

장편소설 《시대의 탄생》 1부를 내놓은 다음 2부의 초고를 다 쓰고 추고하는 과정에 석윤기는 자기가 지금 무엇인가 분명히 놓치고있다는것, 놓쳤다기보다 모르고 작품을 창작하고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골몰하게 되였다. 민족의 위대한 력사, 민족의 존엄과 긍지, 민족의 창창한 래일을 형상함에 있어서 근본을 놓치고있는것 같은 허전함이 그를 괴롭히군 하였다. 몇달을 두고 그 대답을 찾아 모대겼지만 생각만 더 깊어지고 수없이 가지를 뻗는 상념속에서 헤여날수가 없었다.

그의 이러한 모대김은 탁월한 스승의 가르치심을 받고서야 풀릴수 있었다.

 

 

수령형상문학의 개척자로, 담당자로

 

시대적으로 절박하게 제기되는 사회정치적문제에 대한 형상적인 답을 두고, 인간의 정치적생명, 자주적운명에 대한 인간학적해명을 두고 작가 석윤기가 그 똑바른 방향과 방도를 찾지 못해 애쓰게 된것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여러차례 작가들을 만나시고 주신 교시들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작가들을 만나시여 주신 교시들에서 시대와 혁명앞에 지닌 작가의 사명과 임무에 대하여 거듭 일깨워주시였으며 오늘의 벅찬 현실을 반영한 좋은 작품들을 창작할데 대하여 간곡히 가르치시였다.

특히 어버이수령님께서 인민들의 혁명적세계관확립에 이바지하는 작품을 많이 써내며 문학부문의 사업을 새롭게 혁명적으로 개선해나갈데 대하여 가르쳐주신 교시에 접하고 석윤기는 과연 자기가 쓴 소설들이 사람들의 혁명적세계관을 확립하는데 얼마나 이바지하였겠는가를 돌이켜보게 되였으며 작가구실을 바로하지 못하고있다는 자책감에 깊이 빠져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무엇인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심을 놓치고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있었던것이다.

우리 조국에서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투쟁이 새로운 높은 단계에 이르렀고 당사상사업에서 혁명적전환이 마련되였던 1960년대 중엽, 당시의 현실은 문학이 인민들을 혁명적세계관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며 혁명대오의 통일단결을 반석같이 다지는데 이바지할것을 절박한 과제로 내세우고있었다. 하지만 주체문학건설에 대한 명확한 견해가 서있지 못했던 문학예술부문의 일군들과 창작가들은 리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그처럼 시급히 해결을 기다리는 이 과제를 옳게 풀어나갈수가 없었다.

석윤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러한 때 어버이수령님께서 지방현지지도의 길에서 작가들을 몸가까이 부르시여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시면서 장시간에 걸쳐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는데 수령님을 보좌하시며 동행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우리 문학이 해결하여야 할 근본문제가 무엇인가를 깊이 통찰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작가들을 만나주신지 얼마후인 1966년 2월 7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시 작가동맹위원장을 만나시여 새로운 혁명문학을 건설할데 대한 강령적인 교시를 주시였다.

《〈새로운 혁명문학을 건설하자!〉,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문학이 틀어쥐고나가야 할 전투적구호입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그 필요성과 의의를 로동계급이 창조해온 사회주의사실주의문학발전과정과 결부시켜 과학원리적으로 심오하게 밝혀주시였다. 그리고 그 방향과 방도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깨우쳐주시였다.

이 교시는 즉시에 석윤기를 비롯한 작가들에게 전달되였다.

작가동맹으로 급히 나오라는 련락을 받고 무엇인가 중대한 사변이 있다는것을 예감한 그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초조한 마음을 안고 기다리였다.

이윽고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를 전달하기 위하여 방에 들어온 작가동맹위원장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여있었다.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강령적인 교시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자자구구 힘을 주어 전달하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를 전달받는 순간 석윤기의 망막은 뿌옇게 흐려지였다. 가슴이 터질듯 한 흥분과 환희로 눈물이 치솟아올랐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하신 교시는 눈부신 빛발처럼 작가의 눈앞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수령을 형상한 새로운 혁명문학을 지난 시기처럼 단편적인 면을 내용으로 한 짤막한 시나 단편소설 같은것을 몇편 쓰는 식으로 창작할것이 아니라 대담하고 통이 큰 작전으로 수령님의 혁명력사전모를 볼수 있게 위대한 사상리론가로서의 수령,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으로서의 수령,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수령을 전면적으로 깊이있게 형상한 혁명적대작을 많이 써내야 한다고 하시면서 수령님의 위대한 형상을 문학작품에 담는것은 현시대의 성숙된 요구이고 우리 인민들의 한결같은 념원일뿐아니라 새로운 혁명문학이 수행하여야 할 사명과 임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이 가르치심을 전달받는 순간 석윤기는 지난 시기 작가로서의 임무를 다하느라 하면서도 창작사업에서 무엇인가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고있는것과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사실과 그 해답을 못 찾아 모대기던 나날들이 돌이켜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바로 이것이다!》 하고 속으로 탄성을 올리였다.

석윤기의 심정은 인생의 새로운 걸음을 떼게 된다는 환희로 하여 북받치는 흥분을 어쩔수 없었고 그처럼 책임적이고 영예로운 창작사업에 지혜와 열정을 깡그리 바치고싶은 열망으로 가슴을 불태웠다.

하기에 그는 창작실로 돌아오는 즉시에 어버이수령님의 고매한 풍모를 형상한 장편소설 《무성하는 해바라기들》창작에 달라붙었다.

이 시기 작가동맹에 위대한 장군님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령형상소설작품창작을 전문으로 하는 창작집단(오늘의 4. 15문학창작단의 전신)이 무어졌다.

이때 석윤기는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던 이 창작집단에 망라되여 창작활동을 벌리게 되였는데 참으로 이것은 작가인 그에게 있어서 영광이고 행복이였다. 그는 밤잠을 잊고 펜을 달려 짧은 기간내에 장편소설 《무성하는 해바라기들》을 탈고하여 심의에 제출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소설의 사상적내용과 이야기줄거리, 기본인간관계와 성격, 력사적사실과 허구문제 그밖에 중요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그는 가장 위대한분의 보살피심속에 자기가 창작생활을 하고있다는 행복감에 젖어 밤에 낮을 이어 완성작업을 다그치였다. 그리하여 1970년 여름 이 작품을 내놓을수 있게 되였다.

《혁명가의 사랑은 혁명을 하는데서 표현되여야 한다.》는 사상적알맹이를 틀어쥐고 위대한 수령님을 태양으로 우러르며 해바라기와도 같이 그이를 따라 항일의 대오가 결성되는 과정을 그리고있는 이 소설은 우리 혁명의 근본문제를 주제적과제로 삼아 풀어낸 혁명적인 작품이였다.

장편소설 《무성하는 해바라기들》은 설정된 주제사상적과제는 물론이고 그 전개방식과 묘사수법에 있어서도 종래의 소설들과는 대조를 이루는 혁신적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석윤기는 주인공 유철의 성격과 그 성장과정에 작가로서의 자기 리상과 념원을 풍부하게 체현시켜 혁명을 하려면, 사람답게 살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를 생활적으로 독특하게 형상해내였다.

작가 석윤기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은 날로 커만졌다.

1970년 가을부터 년말까지 석윤기는 간호원 안영애를 원형으로 하는 영화문학집체창작에 망라되여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의 운명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어느 한 회상실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태고의 인간들이 불을 발견한 그날도 외관상은 평범한 날일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 평범한 날이 있은 다음부터 인류의 생활은 거대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내가 나의 창작생활에서 그러한 불을 발견하게 된 그날도 아무런 예고없이 그리고 외관상 매우 조용하게 찾아왔던것이다.》

작가의 이 말은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고 자기 운명이 찬란한 향도의 빛을 따라 전환점을 이룩한데 대한 환희와 격정에 대한 토로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영화문학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가 가지고있는 결함과 그 극복방도에 대하여 차근차근 일깨워주시면서 우리 작가들이 무엇때문에 애쓰며 창작해야 하는가를 문학의 사명과 결부시켜 작가에게 깨우쳐주시였다.

그이의 교시 한마디한마디는 작가의 어두운 구석을 속속들이 비쳐주는 눈부신 불빛이였다.

그 뜨겁고 자애로운 빛발은 그 이후 작가에게 더더욱 가깝게 더 전격적으로 비쳐들었고 그것으로 하여 작가는 수령형상문학의 믿음직한 담당자로 새로운 혁명문학건설의 전초선에 설수 있게 성장하였다.

1971년 2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몇명의 일군들과 함께 작가 석윤기를 곁으로 불러주시였다. 그것은 작가에 대한 그이의 특별한 믿음과 사랑의 표시였다.

그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밤이 깊도록 열정에 넘치시는 목소리로 문학예술건설에 대한 문제, 조국통일과 혁명발전의 전망문제 등 참으로 강령적의의를 가지는 귀중한 교시들을 들려주시였다.

작가는 그렇듯 높은 신임을 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귀중한 교시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부지런히 받아적었다.

그러던 그는 문득 펜을 멈추었다. 그이께서 장편소설 《무성하는 해바라기들》에 대하여 교시를 시작하시였기때문이였다.

그는 놀라서 손이 굳어져버렸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 이 작품을 다 읽으셨는데 자신께서는 아직 완성된 작품을 다시 읽지 못해 유감스럽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꼭 읽어보겠다고 교시하시는것이였다.

(자신께서 하나하나 가르쳐주시며 그 작품을 이끌어주시고도 저렇듯 겸허하고 뜨겁게 교시하시다니…

나는 정말 너무도 행복하구나!)

석윤기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후 한달이 지난 어느날 중앙의 한 일군이 긴장한 창작전투를 벌리고있는 석윤기에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시는 선물을 전달하겠다고 말하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석윤기선생의 약한 몸이 걱정되시여 여러차례 교시를 하시였는데 그의 치료에 알맞는 좋은 약들을 알아보시고 손수 구하시여 보내시면서 튼튼한 몸으로 훌륭한 작품을 완성하라고, 앞으로도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제기하라고 하셨다는것이였다.

석윤기는 동지들의 열렬한 박수속에 그 귀중한 선물을 받아안았다.

작가의 가슴속에서는 그이에 대한 흠모의 정이 대하처럼 굽이쳐흘렀고 감격과 격정이 쇠물처럼 끓어넘쳤다.

그리하여 그는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소설로 옮긴데 이어 총서 《불멸의 력사》에 속하는 장편소설 《고난의 행군》(1976년), 《대지는 푸르다》(1981년), 《봄우뢰》(1985년) 등을 련속 명작으로 창작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를 반영한 작품창작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웠으며 그 과정에 당의 크나큰 신임을 련속 받아안았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4. 15문학창작단 단장, 작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수령형상창조에 온몸과 넋을 다 태웠다. 하여 석윤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훈장인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고 김일성상계관인으로, 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으로 되였다.

석윤기는 그 누구보다도 병약한 몸이였고 고생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면 그에게 무엇이 잠재되여있었기에 그처럼 초인간적인 정력을 기울여 그리도 많은 작품들을 창작할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그가 남긴 한편의 시가 있다.

이 시는 그가 안고 산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있다.

 

                나의 소원

 

나의 소원은 …

죽어도 버릴수 없는 나의 소원은

밤이나 낮이나 그리움에 젖어 목메이는

간절한 간절한 마음이여라

 

 

고무풍선처럼 가슴부푸는 시절도 있어

발명가가 된다고 색종이에 청사진 흉내를 내고

때로는 월계수 머리에 두른 시인이 부러워

금박칠한 문호들의 선집을 끼고 다닌적도 있었더라

 

허나 싸움의 불길속에 철이 들고

고무풍선은 꺼졌나니

불비와 시체를 헤치며 쓸쓸한 광야를 걸어갈 때…

잃어진 내 어머니, 어린 동생을 생각하며

숯덩이가 된 내 가슴에 새로 움튼 소원은

… 통일된 내 조국에 펼쳐질

무수한 상봉을 바라보며

마음껏 울어보는것

 

나의 소원은

깨끗하고 소박한 나의 소원은

원쑤가 불태우고 짓이겨놓은 나의 소원은

친애하는 그이의 품에 안기여 소생의 봄을 맞이했나니

아, 나래치라 꿈이여! 희망이여!

한없이 부풀어오르라 나의 소원이여!

 

그리하여

자나깨나 잊을수 없는 나의 소원은

죽어도 버릴수 없는 나의 소원은

만민의 행복

조선의 영예

이 세상 모든 소원의 구심점이신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의 건강이여라!

 

이 시는 27년전인 1985년 2월 16일 아침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탄생일을 맞으며 작가가 그이를 우러러 쓴 시이다.

소설가의 심장속에 가득차 흐른 이 넋의 노래, 소원의 송가는 정녕 그가 살아온 전생애의 힘이였고 목적이였다.

다시한번 그 소원의 노래를 되새겨보자. 그는 자기 가슴에 새로 움튼 소원은 《통일된 내 조국에 펼쳐질/ 무수한 상봉을 바라보며/ 마음껏 울어보는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어린시절에 품었던 《깨끗하고 소박한》 그 모든 소원은 저 남녘땅에서 너무도 가혹한 세례를 받아 그의 가슴속에, 그의 온 육신에 처참한 상처와 고통만을 남겨놓고 사그라졌었다. 그러나 그 준엄한 생활의 언덕에서 그가 한 운명의 선택은 옳았다. 《원쑤가 불태우고 짓이겨놓은》 그의 소원은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기여 《소생의 봄》을 맞이했으니 그는 불의의 세상이 안겨준 그 모든 고통을 이기고 인간이 창조하고 누릴수 있는 보람과 행복의 절정에 올랐다. 이제 남은 소원은 단 하나, 통일이였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소원의 구심점》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기에 이 간절한 통일의 소원도 오로지 그이 품에서만 이루어질것을 확신하면서 그이의 건강을 축원하며 인생의 막을 내린것이였다.

평양시교외의 신미리에 자리잡은 애국렬사릉에서 석윤기는 그 소원의 날을 기다리며 저 남녘의 고향땅을 바라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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