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후시기부터 우리에 대한 《귀순공작》을 대대적으로 벌리였습니다. 그들은 이 공작에 학창시절의 나의 동창생들과 교사들, 《ㅌ.ㄷ》시절의 연고자들, 옥중에서 전향한자들, 친지들을 닥치는대로 끌어들이였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례의지국》으로 린방나라들에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조선민족이 례절바르고 인정이 많고 충효심이 높다는것은 옛날 우리 나라에 와본 서방사람들도 한결같이 인정하였습니다. 구한국말기 우리 나라를 편답한 제정로씨야의 학자들은 자기네 나라에 돌아간 다음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 조선은 례의도덕에서 으뜸가는 나라라는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적들이 우리 할머니를 《귀순공작》에 끌어들인것은 조부모님들에 대한 손자의 효성을 악용하여 우리를 좀 어째보자는것이였습니다. 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는 인정사정이라는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조선사람들의 미풍량속과 전통적인 륜리도덕까지도 다 자기들의 강도적인 전략에 악용하였습니다. 지난 세기 후반기에 양인들이 대원군을 굴복시켜 우리 나라의 문호를 개방해보려고 그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에 달려든것도 다 그런것이였습니다.
나는 부대를 데리고 몽강일대에서 활동할 때 우리 할머니가 장백현 가재수마을에 끌려와 연금되여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적들은 밤에는 할머니를 가두었다가 날이 밝기만 하면 매일같이 산으로 끌고다니면서 《성주야, 할머니가 왔다. 이 할미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산에서 나오너라.》하고 함화를 하라고 강박한다는것이였습니다.
가재수사람들이 보내온 쪽지에는 장백의 여러 마을들에 나붙었다는 적들의 방문내용도 첨부되여있었습니다.
적들은 빨찌산의 밀영이 있을만한 대수림지대와 맞다들릴 때마다 할머니더러 손자의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따위 요구에 응할 할머니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니 뒤따를것은 구박과 행패질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적들은 그 무슨 형사범이라도 다루듯이 총부리로 할머니의 등을 쿡쿡 찔러대며 위협도 하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그건 다 소용없는짓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할머니를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촌로친이니 한두번 발을 구르고 눈만 부라리면 겁에 질려 저들의 요구를 곰상곰상 들어주리라고 타산했겠는데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였습니다.
가재수의 지하조직성원들은 할머니의 정상이 말이 아니니 부대를 파하여 구출작전을 펴달라고 하였습니다. 부대를 파할 형편이 못되면 자기네 조직원들을 동원해서라도 할머니를 구원하겠으니 량단간에 결심을 내려달라는것이였습니다.
그런 기별을 받고보니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몸이 떨리고 속에서 불이 일어나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령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빙천설지에 60고령의 로인을 끌고다니며 고생시킨다는게 사람의 가죽을 쓰고 할 일입니까.
분한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부대를 끌고가서 적들을 요정내고 할머니를 구원하고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분을 누르고 참기로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혜산사건》이 터져서 서간도와 국내에 있는 혁명조직들이 한창 시련을 겪고있을 때였습니다. 수백명
전투를 조직하면 할머니를 일단 구출할수는 있었을겁니다. 그러나 자칫하다가는 적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수도 있었습니다.
김평은 자기가 데리고다니는 소부대를 동원해서라도 할머니를 구원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작지로 빨리 돌아가서 박달을 비롯한 조선민족해방동맹원들을 구원할 대책이나 취하라고 설복했습니다.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떠나가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가 떠나간 다음 사실은 나도 울었습니다. 할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참자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난날에는 몇포대의 쌀이나 몇자루의 총을 얻으려고 싸움을 한 때도 있었고 한두명의 애국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서슴없이 전투를 조직하군하였습니다. 그런데 친할머니가 별로 멀지도 않은곳에 붙잡혀와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있다는데 그런 소식을 듣고서도 참아야 했던 내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구원하고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억지로 묵새기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것이 바로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나로서는 가재수지하조직의 통보자료를 받아본 순간부터 도무지 마음의 안정을 이룰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그 아픈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에서 할머니는 어머니 못지 않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있었습니다. 내가
그럴 때면 나도 달달한 엿생각이 간절해서 군침을 삼키였지만 우리 집에야 돈이 있습니까, 고포가 있습니까, 헌 고무신바닥이 있습니까, 그때만해도 우리 동네에는 고무신을 신고다니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습니다. 우리 집안 사람들도 모두 짚신을 신고다녔지 고무신 같은것은 신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마을조무래기들이 엿장사의 목판이나 리야까를 둘러싸고 떠들어댈 때에도 나만은 그속에 끼우지 않고 뜨락에서 닭의 모이를 주든가 뒤울안의 장독대곁에 가서 개미들이 기여다니는 모양을 구경하는척했습니다. 우리 집안 어른들이 그러는 내 심리를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언제인가 할머니는 귀한 쌀을 퍼가지고 나가 엿을 바꾸어온적이 있습니다. 엿가락 몇개를 들고와서 내 손에 쥐여주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고마운 생각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타개죽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집안에서 몇가락의 엿때문에 쌀을 퍼들고나간다는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할머니의 정이 어린 그 쌀바가지와 엿가락들이 지금도 눈에 삼삼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잔등에 업혔던 기억보다는 왜 그런지 할머니나 형실고모한테 업혀다니던 일들이 더 기억에 생생합니다. 할머니는 친정집에 나들이를 갈 때에도 곧잘 나를 업고가군하였습니다.
남아의 나이 6~7살이면 철이 좀 들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 나이에는 부끄러움도 알아서 업혀다니는 아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봉화리에 올 때마다 우리 증손이가 그새 얼마나 컸나 보자고 하면서 내앞에 잔등을 돌리군하였습니다. 내가 쑥스러워하건말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등에 업히면 머리카락과 적삼에서 풀냄새 비슷한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런 냄새를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그것은 로동속에서
우리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부터 나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몇곱절 더 강해졌습니다. 할머니는
할머니가 품고있던 소박하나 간절한 꿈은 나라의 독립이였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기다리며 그 독립을 위해 싸우는 자손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의 뒤바라지를 성실하게 해주는것이 할머니의 일이고 락이였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많은 경우 나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표현되였습니다. 1926년이면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한 해입니다. 그해 여름 무송의 양지촌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를 찾은 할머니는 묘앞에 엎드려 슬프게 곡을 한 다음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증손아, 이제는 아버지가 메고있던 짐을 네가 메야겠구나. 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나나 어머니에게 효도를 못해도 좋으니 조선을 독립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거라.》
나는 할머니의 그 말씀에서 큰 충동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때 할머니가 조선독립이 아니라 앞으로 부자가 되거나 출세할 생각이나 하라고 하였더라면 나는 그다지 큰 감동을 받지 못했을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런것은 안중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할머니의 뜻이 아주 높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그 말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할머니가 나에게 나라의 독립과 같은 중대사를 부탁한것은 나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그후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의 특징은 한마디로 강의한 늙은이라고 표현할수 있을것입니다. 할머니는 그 나이의 녀성들치고 보기 드문 강자였습니다. 가난하고 불행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그지없이 상냥하고 부드럽지만 사람같지 않은자들에게는 추상같은것이 우리 할머니입니다. 그 어떤 강권이나 불의앞에서도 휘여들지 않는것이 할머니의 성미이고 기개였습니다.
할머니가 소심하고 나약한 로인이였다면 나는 가재수지하조직이 보낸 통보를 받았을 때 그처럼 큰 충격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을것입니다.
나는 할머니가 내 심정을 리해할것이며
화성의숙시절의 나의 동창생인 박차석이 남패자밀영에 와서 나를 만나고 돌아간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양정우를 비롯한 1군, 2군의 간부들과 함께 중요한 회의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나를 찾아온것은 《귀순공작》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리종락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박차석은 자기가 진 죄를 솔직히 자백하면서 우리 할머니를 끌고 서간도땅을 돌아다니던 일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할머니는 내가 믿었던 그대로 적들에게 조금도 굽혀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할머니를 인질로 끌고다닌것은 《귀순공작반》패거리들이였습니다. 리종락과 박차석은 그 공작반에 속해있었습니다. 일본모략군들은 그들에게 우리 할머니를 《귀순공작》에 동원시키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리종락과 박차석은
할머니는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신문에 죽었다고 광고까지 난 손자가 살아있다니 웬 소린가, 그런 허튼소린 듣기도 싫다고 하면서 등을 돌려댔습니다.
리종락이 바빠나서 그 광고는 거짓광고다, 성주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런데 성공하지도 못할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험한 산속에서 공연히 헛고생만 하고있다, 동양천지가 다 일본세상이 됐는데 그런줄도 모르고
우리 할아버지는 성이 독같이 올라 이 천하에 고현놈들, 그래 우리보고 제 손자의 목숨을 돈과 바꾸라는거냐, 그런 개수작질은 싹 걷어치우고 당장 물러가라고 하면서 돈뭉치를 뜨락에 활 내던지였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우리 성주한테 일본군대장이 아니라 그 하내비자리를 준대도 데리러 안가겠다, 내 아들 형직이와 형권이 죽은것만 해도 가슴이 터진다, 내 눈앞에서 썩 물러들 가라고 호령했습니다.
판이 이렇게 되자 리종락과 박차석은 더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말이나 돈으로는 우리 집안 사람들을 움직일수 없다는것을 알게 된 적들은 총대로 할머니를 끌어내여 만주로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렇게 되자 할머니는 좋다, 너희들이 억지로 날 데리고가겠거든 가자, 그렇다고 너희들을 도와줄줄 아느냐, 그대신 나는 나대로 이 기회에 손자가 싸우고있는
《귀순공작반》특무들은 1년 가까이 서간도의 산악지방으로 돌아다니며 할머니를 고생시켰습니다. 그런즉 륙순이 넘은 로인의 몸으로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고된 신역을 치르었겠습니까.
한번은 박차석이 할머니의 발이 부르튼것을 보고 할머니, 이렇게 억울한 고생을 시켜서 죄송합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자니 사실은 우리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할머니야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하고 할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박차석이 비록 전향은 하였지만 동정심만은 있었던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힘들어도 내 손자가 싸우고있는 산천을 보니 기운이 솟는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이 총대로 몸을 쿡쿡 찌르며 손자의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할 때마다 할머니는 매번 《나는 그런 미친 소리는 할줄 모른다. 네놈들이 나를 죽이고 무사할줄 아느냐. 우리 손자의 총알을 받고싶거든 어디 네놈들 하고싶은대로 해봐라!》하고 맞받아 위협하군하였습니다.
사실 《귀순공작반》패거리들도 자기네가 하는 일이 승산없는 일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에 유격대의 습격을 받을지 몰라 벌벌 떨었습니다. 혁명군사령관의 할머니를 인질로 끌고다니는 자기네 행각이 어떤 보복을 받게 되리라는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귀순공작반》특무들은 어떻게 하나 유격대의 총알만은 면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자기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호해줄터이니 그대신 열댓살되는 사내아이를 시동삼아 데리고다니며 손자를 찾아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적들이 겁에 질려서 몸을 사리려 한다는것을 간파한 할머니는 왜 하필 불쌍한 아이를 데리고다닌단 말이냐, 나는 꼭 볼따귀에 살이 유들유들한 너희들과 같이 다녀야겠다, 혁명군이 겁나서 그런 생각을 한다면 너희들의 상관을 불러 사실대로 말해주겠다고 을러메였습니다. 그바람에 특무들은 할머니에게 도리여 코를 꿰워다니며 설설 기는 꼴이 되고말았습니다.
할머니는 특무들에게 호령질을 해가면서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다하였습니다. 추우면 추워서 산에 갈수 없다고 하였고 피곤하면 피곤해서 쉬겠다고 하였습니다. 간혹 목욕탕물이 좀 미지근하거나 그 물을 일본놈들이 먼저 사용한 흔적이라도 있으면 김장군의 할미를 무얼로 알고 네놈들이 나를 이렇게 허술히 대하는가고 하면서 호되게 꾸짖었고 특무들이 끼니때에 일본음식이나 중국음식을 내놓으면 조선음식을 가져오라고 위엄있게 분부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귀순공작》에 동원된 놈팽이들은 할머니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쩔쩔매며 바삐 돌아치군하였습니다.
설명절때 《귀순공작반》을 맡은 일본인독찰관은 리종락과 박차석을 불러 김장군 할머니에게서 설인사를 받고싶은데 그 늙은이더러 와서 세배를 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독찰관의 말을 전달받은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상에 별소릴 다 듣는구나, 버릇없는놈! 그놈더러 와서 김장군 할미한테 세배를 하라구 해라!》하고 불호령을 내리였습니다.
독찰관은 그 말을 듣고 어찌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손에 들고있던 술잔까지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수틀리면 흉기부터 뽑아들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야료를 부리는 독종이였다는데 그날만은 기가 꺾여 아무 행패질도 못하고 《과시
그처럼 대바르고 도고하게 처신하는 우리 할머니앞에서 박차석은 매일같이 나약한 변절자로서의 죄를 문책받는것 같은 기분이였다고 솔직히 실토하였습니다.
《귀순공작반》특무들은 결국 헛물만 켜고 할머니를
나는 박차석을 통하여 그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귀순공작》정형을 들으면서 조부모님들을 더욱
나는 그에게 산삼 몇뿌리와 편지를 주면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가만히 가져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내가 산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가고 물어보니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산삼만은 받지 못하였다는것입니다. 아마 박차석을 우리 군영에 들여보냈던 일본인독찰관이 가로챘던것 같습니다.
혁명을 배신한 전향자에게 처벌이나 처형대신 밀서의 전달이라는 어려운 부탁을 하신 이 세상에 다시 없는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
조국해방위업에 대한 신념과 의리 앞에서 언제나 투철하고 락관적이였던 혈기왕성한 20
편지전문은 아래와 같다.
《할머니의 극진한 심정은 잘 알았습니다.
남아 한번 국사에 몸을 바친 이상 그 몸은 완전히 나라의것이요 민족의것인것은 두말할것 없습니다.
이제 멀지 않어 반가히 할머니앞으로 돌아갈 날이 있사오니 안심하시고 계십시오.》
그후
정전후
할머니가 두번째로 만주땅에 끌려와 고생하고있다는 소식을 나는 안도현 처창즈부근에 있을 때 들었습니다. 그때 우리 할머니를 데리고다닌 《귀순공작반》의 구성을 보면 일본인특무들이 대다수를 이루고있었습니다. 이 공작반에 우리 주력부대에서 참모장을 하던 림수산도 속해있었습니다. 그가 투항하면서 일본상전들앞에 어떻게 하나 나를 잡아보겠다고 단단히 맹세를 다졌다고 합니다.
이 공작반에서는 처음에 형록삼촌을 인질로 끌어가려고 했습니다. 할머니를 끌고갔대야 이가 들지도 않고 소득도 없을것이라고 판단했을것입니다.
형록삼촌은 우리 조부모님들 슬하에 남아있던 유일한 아들이였습니다. 놈들이
적들의 강압으로 결국은 할머니가 또 속절없는 만주걸음을 하게 되였습니다. 할머니한테는 네놈들이 아무리 지랄을 해도 김장군의 할미를 이길것 같으냐 하는 배심이 있었습니다. 형록삼촌을 대신하여 죽을 각오까지 품고 집을 떠난 할머니는 이번에도 북간도의 험한 산천을 몇달동안 강제로 끌려다녔지만 적들앞에서는 한번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림수산이 숙소나 로상에서 저들의 지령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다몰아댈 때면 할머니는 네놈은 내 손자를 배반했지만 나는 살아도 죽어도 내 손자편이고 조선편이다, 어디 네 명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두고보자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당시 할머니가 인질로 재차 끌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많이 조직하였습니다. 그것이 할머니에게 내가 건재해서 싸움을 계속하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최상의 방도였고 말로는 형용할 길이 없는 나의 만단심회를 담아 할머니에게 올린 인사이기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누가 곁에서 듣건말건 조금도 상관치 않고 《내 손자가 장하다! 어서 왜놈들을 다 잡아치우고 우리 나라 땅에서 왜놈들의 씨를 말려라!》 하고 기세를 올리였다고 합니다.
적들은 이번에도 할머니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후 그들은 인질로 나를 낚기 위한 놀음을 더는 벌리지 않았습니다. 결과를 보면 우리 할머니가 총 한자루 없는 로인의 몸으로 적들을 이긴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향집 사람들에 대한 군경들의 박해와 수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우리
해방후
나는 20년만에 고향집에 오면서도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빈손으로 왔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 말에 할머니는 오히려 나를 타일렀습니다.
《왜 빈손이란 말이냐. 독립이 얼마나 큰 선물이냐! 네가 성한 몸으로 해방을 안고왔으니 나는
70이 다되여오는 촌늙은이의 말치고는 너무나도 호방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우리 할머니가 정말 대단한 할머니로구나 하고 탄복하였습니다.
일제의 총검통치가 절정에 달하였던 그때 할머니가 적들의 강권과 위협에 휘여들지 않고
나는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하군합니다.
할머니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직업적인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 집안 가풍이 그리고 혁명이 할머니를 그런 녀걸로 만들어준것 같습니다. 우리 집안 가풍이라는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것은 나라와 백성이니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와 같이 바친다는것, 한마디로 말하여 애국, 애민, 애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자손들한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아들이나 손자들이 모두 혁명을 하였기때문에 할머니도 영향을 받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혁명을 하는 집안에서는 부모들이 대체로 혁명을 하기마련입니다. 혁명을 하지 못하면 혁명의 동조자, 방조자로라도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식들이 훌륭한 부모를 모시고있으면 그 영향밑에서 쓸모있는 인재가 된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모들도 똑똑한 자식들을 두게 되면 계몽되고 각성됩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하는 일에 보조를 맞추게 됩니다. 이런 리유로 하여 나는 가정을 혁명화하는데서 젊은 세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것을 늘 강조하군합니다.
물론 선친들이 혁명을 했다고 하여 그 후손들도 저절로
할머니가 대적투쟁을 잘할수 있은 다른 요인의 하나는 우리의 힘이 강대했다는데도 있었습니다. 적들이 우리에 대한 《귀순공작》을 벌릴 때 조선인민혁명군은 전성기에 있었습니다.
혁명군의 위용과 명성이 할머니에게 힘을 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혁명무력을 건설한 다음 적들과의 대결에서 련전련승의 전과를 쌓지 못했거나 광범한 군중을 통일전선의 기발밑에 묶어세우지 못하고 현상유지나 하면서 산속에 배겨있었더라면 할머니는 그처럼 고압적으로 적들과 싸워이기지 못했을것입니다.
사회주의건설에서도 리치는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일을 많이 하고 힘을 크게 길러야 조국이 부강해지고 인민이 높은
1946년 6월 9일
할머니의 70돐 생일연이 큰 사회적인 관심속에서 성대히 벌어지게 된다는것을 전혀 모르고
할머니의 70평생의 생애를 몇마디의 말씀으로 집약하신 그 답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촌할머니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과 조카, 손자들이 혁명사업에 나섰을 때 조금도 반대하지 않고 도리여 격려해주었으며 그들이 혁명활동을 위해 슬하를 떠나서 혹은 원쑤들에게 잡혀죽고 혹은 옥에 갇히고 혹은 행처불명이 되였지만 할머니는 조금도 락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놈들한테 붙들려 만주에까지 가서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처음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것입니까? 그것은 할머니가 비록 글자는 모르지만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싸웠다는것을 말합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 앞을 내다보고 희망을 끝까지 간직하고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그 희망은 끝내 이루어졌습니다. 작년 8월 15일 조선의 해방이 그것이 아닙니까.
우리 할머니는 이날을 보기 위하여 오늘까지 살았으며 마침내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와 같은 연회가 오늘뿐아니라 앞으로도 여러번 있기를 바라는 동시에 할머니도 더욱 오래 사시기를 바라는바입니다.
광복후 14년을 제외한 이전의 근 70성상은 가난과 싸우고 불의와 싸우고 외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던 풍랑사나운 세월이였다. 총검의 압박하에 강행된 두차례의 만주행은 그 무엇에도 대비할수 없는 최악의 수난이였다. 그렇지만 할머니께서는 장장 수십년에 달하는 그 암흑의 시대를 적수공권으로 꿋꿋이 헤쳐오시여 손자분께서 안고오신 해방의 날을 맞으시였고 이 땅에 세워진 사회주의락원을 보시였다.
그 숨막히는 암흑의 시대를 거쳐 할머니께서 장수하실수 있은 비결은 무엇이였는가. 80여성상에 달하는 할머니의 수난많은 생애의 증견자이며 보증자이신
우리 할머니가 장수할수 있은 하나의 요인은 로동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일생을 로동으로 늙어왔습니다. 자손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한 중단없는 로동, 이것이 할머니의 육체와 의지를 단련시켜주었습니다. 육신을 부지런히 놀려 사람들의 생활에 유익한 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창조해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오래 사는 법입니다.
할머니는 마음속 깊은곳에 꿈을 묻어두고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값있게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생애가 속절없이 흘러간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걸음한걸음이 다 의의가 있고 목표가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할머니는 한평생 그 무엇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해방전에는 독립의 날을 기다렸고 해방후에는 나의 귀향을 기다렸으며 나를 만난 다음에는 만민이 잘사는 날을 기다렸고 조국이 통일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일생을 기대와 희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장수하는 법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시련도 잘 이겨냅니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혁명은 꿈이 많고 리상이 높은 사람들이 합니다. 꿈이 많고 리상이 높아야
할머니는 국가수반의 조모였지만 일생을 소박하고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조국에 돌아온후 당을 꾸리고 국가건설이나 끝내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평양에 데려다가 모시고 함께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만한 년세면 손자의 부양이나 받으며 여생을 편히 쉬여도 시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혁명렬사의 유가족들을 우대하는 제도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런 우대만 받아도 여생을 편안히 살아갈수 있는분들이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런 국록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니라.》, 이것이 우리 할머니의 소박한 철학이였습니다.
일생을 로동으로 늙어온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다문 얼마간의 휴식이라도 시키고싶어 나는 이따금씩 조부모님들을 우리 집에 모셔오군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조부모님들은 일감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제인가는 깨진 바가지를 갖다주며 그걸 기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손자며느리가 해주는 음식맛이 별맛이고 증손자, 증손녀를 안아보는 재미가 별재미라고 하면서도 할머니는 일거리가 없으니 갑갑해서 야단이고 흙을 밟지 않고 지내자니 속에서 불이 나 못견디겠다고 하면서 매번 한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간혹 우리가 살림에 보탬을 주려고 무엇인가를 해드리려고 하면 할머니는 이 할미걱정은 안해도 되니 백성들 걱정이나 하라고 하면서 노상 그것을 사양하군했습니다.
털어놓고 말해서 내가 만일
그러나 나는 국사에 파묻히다보니 할머니에게 솜옷 한벌 지어드리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증조할아버지대부터 내려오는 소박한 초가집에서 그냥 살았습니다. 나는 나라의 모든 마을들에 기와집을 지어주고 천지개벽을 일으키면서도 제 할머니한테는 새 집을 지어드리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를 위해 내가 해드린 일은 별로 기억에 남는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돋보기를 하나 사드린것뿐인데 그것만은 할머니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나라일을 돌보느라고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세월도 가고 할머니도 갔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고나니 후회되는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어머니앞에서도 그랬지만 할머니앞에서도 나는 역시 효도를 다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할머니생전에 솜옷 한벌이라도 변변히 지어드렸더라면 이다지도 가슴아프지는 않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