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제 6 장

(1)

진대법이 실시되여 두번째의 년륜을 아로새기는 정축년(197년)의 새해가 왔다.

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달라붙으면 한가지 큰일을 성취할수 있다더니만 부국강병의 뜻을 지닌 을파소의 노력에 의해 고구려는 날로 강해지고있었다.

뭐니뭐니해도 인재들을 널리 찾아내여 고을과 군진에서까지 등용하여 쓰고있기에 조정의 정사가 아래에까지 미치고있는것이였다.

그리고 진대법으로 나라의 쌀창고도 채우고 성들도 개축하고 군사도 늘이고 토호들의 전횡도 막고… 뿐더러 농사가 잘되니 고구려는 먹을것이 넉넉한 나라이라고 세상에 소문이 나게 되였다.

정축년 벽두에 을파소는 또 하나의 큰 일거리를 맡지 않을수 없었다.

고구려에서 진대법의 혜택으로 풍작을 이루어 먹을것이 남아돌아간다는 소문이 후한에도 전해져 벽두부터 가난에 시달리던 료동의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왔던것이다.

삼삼오오 때로는 수백명이 무리를 지어 찾아오는 그들에게 삶의 터를 마련해주는것은 결코 헐한 일이 아니였다.

료동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다수는 단군성왕시기부터 그곳에 뿌리를 박은 동족들이였다.

그 땅을 아직도 후한에게 빼앗기고있는것도 통분한 일인데 그 땅에서 쫓겨오는 동족을 받아주지 않는다는것은 겨레의 강토를 하나로 이어놓으려는 고구려의 체모에 맞지 않을것이였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어전회의를 열고 살길을 찾아오는 동족을 차별없이 받아들이되 인구가 적거나 개간할 땅이 많은 고을들에 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

을파소가 직접 이 일도 맡아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을파소는 여전히 후한의 정세를 살피고있었다.

간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미 료동에 십만대군이 있다는것이였다. 물론 그 대부분이 료동태수 공손도가 긁어모은 군사라는것이였다.

보다 위험한것은 료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유주(베이징일대)에도 대군이 주둔하고있는 그것이였다.

유주의 대군을 조조의 심복장수들이 거느리고있다는 점은 후한조정이 고구려와의 싸움준비를 내밀고있음을 보여주고있는것이였다.

외적보다도 골치거리는 발기였다.

임금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이러한 때 나라를 받들 생각은 않고 룡상이나 넘보며 세력을 늘이는 일에 몰두하고있으니 이게 야단중에 큰 야단이였다.

내부사인 극실기가 연우의 시종이라며 음식을 가져온 그자들을 잡아들이지는 못하였지만 그대신 연나부의 평자 연노가까지도 발기의 심복이라는것을 들추어냈다. 바로 깊은 밤중에만 홀로 발기의 집에 드나드는 연노가를 알아낸것이였다.

그러니 연노가를 연나부의 평자로 추천할 때 벌써 발기는 그자를 자기의 심복으로 두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였다.

이로써 발기와 그의 세력을 한그물속에 몰아넣은셈이였다.

어느사이에 만산에 신록이 물드는 5월이 왔다.

국내성을 나선 호화마차 한대가 동쪽길을 달리고있었다. 을파소가 탄 수레였다.

지금 을파소는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이라는 뜻에서 국동대혈이라고 부르는 곳을 찾아가고있었다.

국동대혈은 도성에서 동북으로 40리가량 떨어져있는 큰 굴이였다. 그 굴에 동명성왕과 그의 어머니 류화를 형상한 신들이 모셔져있었다.

을파소로서는 그 굴에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시조의 신을 모신것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신도 아니고 시조의 신을 절로 생긴 굴에 그대로 모셔두는것이 무슨 성의란 말인가. 굴안도 잘 꾸리고 굴밖도 잘 손질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숭엄한 마음이 우러나오게 해야 하는것이다.…

수레에는 또 한사람 름름한 젊은이로 성장한 명림어수가 타고있었다.

노란색바탕에 검은 무늬를 수놓은 바지 그리고 붉은 바탕에 흰무늬의 덧옷을 입고 머리에 책을 쓴 명림어수는 당당한 벼슬아치의 모습이였다.

올초에 을파소는 룡만현에 내려가있던 명림어수를 제곁으로 소환하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보내였다.

수레를 끄는 다섯필의 준마들은 소나무가 우거진 산을 끼고 펼쳐진 넓은 길로 호호탕탕 달리고있었다.

열려진 창문으로 언뜻언뜻 지나치는 산발을 바라보며 을파소가 입을 열었다.

《네가 고을에 내려가 고생을 했는데 그중 인상에 남은게 뭐냐?》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을파소의 습관을 아는 명림어수는 흥미거리가 될만 한 일화를 생각해냈다.

《룡만관가에는 세그루의 배나무가 있소이다. 국상어른이 소인에게 룡만을 맡기고 떠나간 그해 가을 관가의 뒤뜨락에 있는 세그루의 배나무에 주먹같은 배가 주렁주렁 달렸소이다. 배맛을 보니 한그루는 꿀맛같고 다른 두그루는 시고 떫었소이다.

전 세그루의 배를 한꺼번에 따서 관속들에게 나누어주었소이다. 했더니 다들 얼마나 좋아하던지…

이전 루초는 그 배마저 혼자 독차지했다나보오이다.

이듬해 초봄 한 늙은이가 저를 찾아와 하는 말이 루초어른이 준 배를 손자애들이 잘 먹었다고 하면서 맛이 좋지 못한 두그루의 배나무를 맛좋은 배가 달리도록 만들겠다는것이 아니겠소이까.

그래서 전 승낙했소이다.

그날 늙은이는 톱으로 맛이 없는 두그루의 배나무를 베버리더니 맛좋은 배가 달리는 나무의 아지를 잘라다 그 두그루의 그루터기에 붙이였소이다. 어떻게 붙이였는가 하면 먼저 그루터기에 작은 도끼로 내리찍고 그렇게 생긴 틈에다 아지를 꽂고 그다음 물에 이긴 흙을 붙이고 천으로 꽁꽁 싸맸소이다. 그때 난 그게 리해되지 않았소이다. 사실 전 과일나무에 대해서는 깜깜이였소이다.

놀라운 일은 나무그루터기에 접한 아지에서 움이 트고 잎이 피여나고 하얀 꽃까지 피는것이였소이다.

그해 여름 한길이나 자란 아지에 잎도 무성하고 몇알이였지만 배까지 달려 크고있었소이다. 늦가을에 배를 따서 맛보니 기이하게도 꿀맛이였소이다. 아마 올해에는 많은 꿀배가 달릴것이오이다.》

을파소도 감탄해마지않았다. 그의 고향집 과일나무들에는 맛좋은 열매만 달리였다.

그것은 애초에 맛좋은 열매가 달리는 과일나무들에서 씨를 받아 심었기때문이였다.

을파소도 어린 과일나무에 접을 붙이는 방법을 알고있었지만 한창 열매가 달리는 큰 과일나무를 베여버리고 그 그루터기에다 접을 붙일수 있다는것은 알지 못하고있었다.

세상에 기이한 재간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수레는 국동대혈앞에서 멈춰섰다.

국동대혈을 돌아보는 을파소는 느끼는바가 새삼스러웠다.

천정높이가 서너길되는 굴은 가로폭이 무려 열보를 넘었다. 이런 거대한 굴이 천지의 조화로 생겨났다니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태고적에 벌써 하늘이 고구려를 위해 이 굴을 마련해준듯싶었다.

이런 신기함이 있기에 천기를 헤아렸다는 류리명왕이 국내성으로 천도를 한것이고 여기에 시조의 신을 모시게 했을것이였다. 이 굴에 을파소 자기의 조상의 자취도 어려있을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잘 꾸려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국동대혈을 꾸리는데 소모되는 석재며 보물이며 로력을 타산하고 밖으로 나오니 갑옷차림의 중리도독 락도상이 깍듯이 절을 하는것이였다.

을파소는 대뜸 가슴이 후두둑 높뛰였다.

왕궁의 호위를 맡은 사람으로서 잠시도 임금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데 여기까지 찾아온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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