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제 11 장

 

1

 

리윤재의 성격과 생활은 이러나저러나 《한글》잡지에 반영되였고 잡지가 겪는 곡절은 또한 그의 생활의 안정을 깨뜨렸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한해는 리윤재의 생애에서 괴로움은 많았으나마 비교적 안정된 한해였다고 할수 있다. 왜냐하면 《한글》잡지가 대중계몽잡지로 개편된 2권 1호(1934년 4월호)부터 9호(12월호)까지 창간이래 처음으로 한호의 결호도 없이 나갔고 더구나 4호(7월호)부터는 발행날자도 드팀이 없이 매달 초하루날에 정상적으로 나갔기때문이다.

이것은 악전고투의 결과였지만 지나고보면 기쁨과 보람만이 리윤재의 마음에 가득히 고이는것이였다. 그러나 새해에도 과연 그렇게 될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는 자연 어두운 그림자가 비끼는것이였다. 노력이야 뼈가 부서져도 하겠지만 그럴만한 재정적담보가 없는것이 실로 안타까왔다.

이런 기쁨으로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근심으로 새해를 맞이한 리윤재는 정초에 먼 려행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어학회에서 재작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한 후 두번째 단계의 사업으로 착수한 표준말사정을 위한 회의를 1월 2일부터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온천리에서 가지게 되였기때문이다. 이번 회의에서는 사회의 인사들을 도별위원으로 인입하여 준비된 초안을 광범위하고 공정하게 심의 하자는것이였다. 리윤재는 경남위원으로, 김병제는 경북위원으로 뽑히였다.

리윤재는 아침 일찌기 찾아온 김병제와 함께 서울역으로 나갔다. 역에는 벌써 낯익은 사람들이 여럿 나와있었다.

일행은 오전 차편으로 떠날 계획이였는데 모이기로 한 40명의 위원가운데서 8명이 오지 못하여 부득이 12시 30분차로 떠났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피페한 농촌정경이 차창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겨울이라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나무도 시커멓고 해묵은 초가이영도 시커매서 마을들은 우중충하고 바싹 여위여보였다.

네시 반에 온양온천역에서 내린 일행은 그곳 유지들과 각 신문지국장들의 마중을 받았고 그들의 안내로 려관들에 숙소를 잡았다. 려로의 피로를 풀 사이도 없이 오후 5시에 모두 령천의원에 모여 표준어사정위원회 제1독회가 열리였다. 지난해 4월 21일 제14회 정기총회에서 간사장으로 뽑힌 리희승의 사회하에 곧 토의에 들어갔다.

표준어의 사정은 책임적인 일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이란 부단히 변화발전한다. 또 이것이 각 지역에서 사투리로 수많이 가지를 친다. 이 많은 말가운데서 가장 널리 쓰이는 민족의 공통어를 단 하나 골라 표준어로 정하는것이니 언어에 대한 옳은 인식과 함께 무한한 인내성이 요구되는 일이다. 게다가 지역적인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하여 각 도별로 위원을 뽑아서 광범히 토의하는 조건에서 간혹 도별위원들이 제 고장의 사투리를 고집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표준어사정은 더욱 시간을 끌고 힘들어지는것이다.

이튿날부터는 회의장소를 감리교 온천례배당으로 옮기고 매일 밤 10시까지 토의를 계속하며 4천개의 어휘를 예정일안에 토의를 끝마쳤다.

5일에는 이번 회의의 비용을 도맡은 장산사 사장 정세권이 서울에서 먼 이곳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민족어의 통일과 발전을 위하여 수고를 한다고 오후에 위원전원을 신정관온천으로 초대하여 만찬회를 열어 고무했고 그날 밤에는 당지의 유지들이 또한 표준어사정위원들의 위로회를 베풀었다.

그날 밤늦게 연회가 파한 후 숙소를 향하여 어두운 길을 리윤재는 리극로와 함께 걸어가고있었다.

《오늘 내가 정세권씨에게 어학희의 회관문제를 꺼내보았습니다.》 하고 리극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번 회의비용을 부담해준것만 해도 고마운데 거기다 집문제까지 근심을 끼치는건 좀 너무하군.》 하고 리윤재가 어이없는듯 웃었다.

《비위를 부릴 땐 부려야지요. 그랬더니 정세권씨 말이 돈을 한 4천원가량 대줄테니 집을 구해보라는겁니다. 그래서 내 생각엔 이런 기회에 아예 회관을 하나 지었으면 어떨가 하는데요.》

《빈땅이라군 없는 서울바닥에서 마땅한 터전이 있을가요?》

《그래서 환산선생에게 의논하는겁니다. 댁의 터전이 대단히 넓어서 뒤뜨락에 어지간한 집 한채는 들어설수 있겠더군요. 이런 판에 환산선생의 집도 아예 이개축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남은 집을 사주겠다는데 내가 터전이야 못 내놓겠어요. 내 집이 절반 헐리우는 한이 있더라도 응당 내놓아야 할 일이지요.》 하고 리윤재가 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럼 그런 방향에서 일을 꾸며 보겠습니다.》

표준어사정을 위한 제1독회도 예정대로 끝나고 하루밤을 즐겁게 지낸 일행은 모처럼 아산까지 온김에 기어이 백암리에 있는 충무공 리순신의 옛집과 현충사를 참관하자고 의견이 모아져서 기일을 하루 연기하고 이튿날 백암리로 떠났다.

충무공의 옛집과 현층사를 돌아보는 리윤재의 마음은 서글펐다. 제 나라가 있다면 충무공 같은 위인의 유적을 이렇도록 퇴락해가게 내버려두겠는가싶어서였다. 후예들과 당지유지들에 의하여 겨우 잔명이나 유지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현충사에 있는 리순신의 화상앞에 선 리윤재의 눈앞에는 이 애국명장, 뛰여난 인간의 거상이 떠오르는것이였다.

리윤재는 그날 저녁차로 일행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자리에 누웠으나 몸은 좀 피곤하지만 잠은 곧 오지 않고 눈은 더욱 새록새록해지는것이였다. 기차칸에서도 세시간이상이나 줄곧 충무공의 옛집에서 받은 감명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것이 원인인 모양이다.

그는 불현듯 일어나서 《충무공전서》에서 《란중일기》를 꺼내놓고 한참 읽다가 펜을 들고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다.

《조선 5천년력사를 통관하건대 조선봉건국가 5백년처럼 더 쇠퇴한 때가 없으며 조선봉건국가 5백년중에도 임진왜란때처럼 더 참담한 때가 없었다.

이 임진왜란 7년이란 오랜 시일을 경과하며 팔도강산이 유린되고 일반문물이 파괴되고 전국재력이 분탕되고 국민지리가 저상되여 다시 회복할수 없을만큼 정신상, 물질상으로 한군데 남김없이 큰 상처를 받았으니 이가 실로 조선유사이래 대국난이였다.

앞서 세종, 세조 량대에 문화와 무공으로 일시는 력사상 큰 광휘를 나타내였으나 연산군때로부터 사화란것이 생기여 전후 수차로 수백명의 참혹한 류혈극을 연출함에 이르렀으며 이를 이어 중종때에는 외척들이 정권을 잡아 서로 권리를 다툼으로 음험한 정쟁이 끊기지 아니하였었다. 이러한 다음에는 또 심의겸, 김효원 두사람사이에 서로 훼방하는 말끝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소위 동인, 서인의 당파가 갈라지더니 이러구저러구 하는 틈에 조선을 왼통 결딴내놓은 당론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정치상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이 시대에 유학으로는 적이 발달을 보게 되여… 출중한 인물이 다 이때에 나지 아님이 아니나 연방 기울어져가는 쇠운을 바로잡기에는 힘이 부족하였던것이다.

당시 전사회의 상태를 돌아보건대 자주심이 박약하고 사대사상이 팽창하기도 이때며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 할 일을 잊고 죽일내기로 서로 싸우는것을 즐기기도 이때며 노력을 피하고 안일만 도모하기도 이때며 비겁심이 늘고 남의 나라와 경쟁하는 마음이 감퇴하기도 이때였다. 더구나 국가에는 지금까지 있어본적이 없는 액운이 닥쳐와 혼란된 시국을 도저히 수습하기 어려운 이때에 오직 의기와 충의의 덩어리인 우리 충무공 리순신이 나시였다.》

여기까지 쓰니 어디선지 장닭이 첫홰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부리나케 쓰던것을 거두고 자리에 누웠으나 여전히 잠은 안 오고 다음의 쓸 내용이 자꾸 눈앞에 펼쳐지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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