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상 편

 

6. 조정에 몸 담그고

 

5

 

은천이 례부시랑으로 등용된지 세해째 되는 해인 991년 가을, 임금은 서희와 은천의 시종하에 평양성순행길에 올랐다.

몇해째 품을 들여온 서북방의 녀진인단속일이 그런대로 일단락 마무리를 지었다는 보고를 받고난 뒤 이를 위무하는 겸사로 행한 걸음이였다.

임금은 서경 도성안의 별궁에서 점심을 간단히 하고는 하루밤 묵지도 않고 내처 걸어 서포고개를 넘고 봉학고개를 넘어 평양성의 외성인 자주(평성)성에 와서 려장을 풀었다.

《이리하면 내사시랑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겠지?》

임금이 서희에게 한마디 던지며 게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곳도 평양성관할지라 마음놓기는 아직 이른듯 하오이다.》

이렇게 서희가 대답을 올리니 《걱정말게, 내 아무리 한창나이라도 순시길에 체신머리없이 해어화를 찾을손가.》 하고 대답하며 웃던 임금이 은천에게 말을 걸었다.

《례부시랑은 짐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하겠지? 서희 이 사람은 내가 평양성에만 온다 하면 색기를 다잡아주느라 그 수고가 여간 아니라오, 흠!》

《옛글에 이르기를 영웅호색이라 하였거니와 페하께서 꽃을 꺾는 일쯤 무에 잘못이라고 이러니저러니 한단 말이오니까.》

은천은 짐짓 모르쇠를 했다. 하지만 10년전 이맘때에 임금이 영명사로 밤재미를 보러 잠행하다가 서희로부터 충고를 받고 그만둔 앙천대소할 일화를 은천은 모르지 않았다.

그때 임금은 점심참에 금수산(모란봉) 청류벽우에 세운 루정에서 평양성안에서 제일간다는 관아기생의 술대접에 얼혼이 나간 모양 그를 루정밑 영명사에 데려다놓으라 하고는 오밤중에 호위군사도 없이 내시 하나만을 달랑 딸린채 북장대(을밀대)를 넘어가다가 황급히 뒤쫓아온 서희에게 발목을 붙들리였다. 서희는 임금의 앞을 가로막고 엎드리며 말없이 종이말이 하나를 받쳐올렸다.

임금이 내시가 비쳐주는 등불에 비쳐본즉 《지금의 임금행차는 적을 맞받아가는 진군길이온데 진중에 계신 몸으로 어찌 해어화따위에 헛눈팔수 있으리오. 천자의 옥체는 그 빛갈이 해빛과 같사와 야밤에도 대낮처럼 누구에게나 보이는것이로되 조금이라도 흉한 모양을 보이시면 민심과 군심이 다같이 실망할것이라 이에 류의하기 바라나이다.》라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서희는 이미 낮부터 임금의 거동을 보고 예견되는바가 있어 이를 제지시킬 궁냥을 하고있은것이였다.

크고작은 오랑캐무리들의 란무장으로 화한 서북방을 다스리기 위한 지극히 중대한 나라일로 궁성을 나온 임금께서 잠간이라도 녀색에 빠지면 존귀하신 나라님의 명성에 허물이나 질뿐 좋을것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준절한 충고였다.

아닌 말로 등극한지 한해밖에 되지 않은 임금께서 시초부터 제 내키는대로 때없이 향락을 추구한다면 그 결말이 결코 좋을리 없다.

무엄해도 분수가 있지, 어디라고 감히 참견질이냐? 이런 호통쯤 터져나올줄 예견하면서 다음말을 고르느라 가슴을 조이고있는 서희에게 임금은 례외로 부드럽게 나왔다.

《내가 그만 지나쳤도다. 도리를 알으켜주어 고맙노라. 그러나 임금의 길을 막은 죄는 지나칠수 없으므로 볼기 스무대를 칠것이되 시기는 차후에 정할것이노라.》

임금은 서희의 등을 두드리고는 돌아섰다. 하지만 그때 치겠다던 볼기 스무대는 아직까지 치지 않고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서희를 보는 임금의 눈은 더 믿음이 짙어갈뿐이였다. 그때 일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임금의 심중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이곳에서 임금은 청천강이북에 틀고앉아있는 장수들과 지방관리들로부터 구체적인 보고를 받았다.

그다음 이들에게 내린 임금의 어명은 간단했다.

《압록강밖에 잔류하고있는 녀진인들을 매모조리 색출하여 불함산(백두산)너머로 몰아내라. 그들을 저들의 본거지인 송화강이북 흑수류역에 정착하도록 할것이다.》

지금은 송도, 거란도 지칠대로 지쳐서 주저앉은 현계선을 경계로 해서 서로 마주보며 일시 숨을 돌리는 상황이였다. 송나라도 이젠 모든게 시끄럽다는 태도여서 머쓱해진 녀진족들은 기가 쑥 들어가버리고말았다.

송나라가 거란에 떼운 땅뙈기를 한절반 찾아쥔것에 만족하며 잠시 쉬고있는 동안 거란도 같은 모양으로 상처나 처매고앉아있는 꼴이여서 고려는 일순 안도감에 취해있었다. 그렇다고 탕개를 풀어놓고있을수는 없는 일이고 경계를 늦춰서는 더욱 아니되는 일이여서 변방방비에 더 힘을 넣어주려는 목적에서 임금의 서경순행이 거행된것이였다.

임금은 년초에 최승로의 시무책에 건의된대로 그동안 골라낸 조정의 관료들로서 각 도에 안위사를 파견하였었다. 지방호족들이 백성들을 편안히 살도록 하고있는가를 살펴주고 바로잡아주는 소임을 맡은 관리들이였다.

올해에는 류달리 가물이 오래 끌어서 농사작황이 말이 아니므로 임금은 감옥을 열어 죄수들을 풀어주어 집에 가서 농사일을 도우라 하기도 하고 수라상의 반찬가지수를 줄이게도 하고 제자신이 절에 가서 기우제를 하기도 하면서 북방이 조용해진 기회를 리용하여 내정을 추켜세우는데 골몰하고있었다. 나라방비에서 군사일과 못지 않게 중요한것이 농사를 잘 지어서 량곡저축량을 늘여야 한다는 점을 임금은 놓치지 않고있는것이였다.

은천은 달포전 패서도 안위부사로 파견되여 내미홀에 갔다가 강조와 부딪쳐 그에게 골받이를 당했던 일을 생각해보고는 허거픈 웃음을 짓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패서도 안위사로는 상공부 시랑이 임명되고 은천은 부사로 되여 례성강너머 내미홀일대를 맡았었다. 실태를 알아보러 내려간 은천에게 강조는 처음부터 삿대질이였다.

《기우제란것이 비가 안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농사군들스스로가 하는것인데 조상전래의 그 풍속을 몰라서 조정의 령으로까지 기우제를 하라 말라 복닥소동인가 말이요. 그런것이나 생각해내는게 조정관리들소임이라면 서당훈장을 데려다 앉혀도 되겠소.》

강조는 임금은 슬쩍 피하고 조정 신하들이 무능하다며 질책을 련발했다.

하지만 은천은 강조의 진짜불만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있었다. 지난해 중앙군 6위를 통솔하는 병부의 시랑자리를 놓고 강조가 물망에 올랐다가 미끄러진것이 속에서 내려가지 않아 그러는것을.

강조는 반갑다며 은천을 술상에 초청해놓고서도 대장쟁이 메 휘두르듯 은천을 두들겼다.

은천은 강조의 기분을 아는지라 탓하지 않고 그의 혀바닥이 두들기는대로 듣고앉았다가 《그래도 고을의 장자분께서 손수 기우제를 하면 하늘이 더 감복하야 비를 당겨내릴수도 있는것 아니요.》 라고 한마디 퉁을 주었는데 이에 반발하듯 튀여나온 강조의 욕설이 그만에 사달을 내고말았다.

《그렇게 기우제가 중한것이면 그대가 한번 여기서 해보시오. 참, 그대는 성함이 제비모양 강자에 은혜 입을 은자하고 하늘모양의 천자를 쓴다 하셨지요?》

《그래서요?》

《하늘의 은혜를 입어 높이 나는 제비이신데 하늘과 잘 통하는분이 수범을 보이시라 그 말이요.》

《좋소이다. 내가 이미 페하께서 올리시는 기우제에 참석하였던지라 페하의 기운을 빌어 내미홀에 힘을 보태드리겠소이다. 하지만 제상은 장자께서 차리셔야 하오이다.》

《좋을대로… 하지만 그대 힘이 보태여질것 같지를 않소.》

《그건 왜서요?》

《제비라는건 낮추 날아야 비가 오는 법인데 그대는 너무 높이 나는 제비라서 하는 말이요.》

강조는 은천이 시작부터 조정에 발을 들여놓은 벼슬아치인것을 내놓고 시기하고있었다. 갈그락질이 천성인 강조에게는 정말이지 약이 없었다. 친하자고 하면서도 노상 꼬집고 비틀기였다.

《어서 제상이나 차려주시오, 내 낮추 날아줄것이니. …》

은천이 그만 말씨름하고 자리를 일자는 뜻을 비치자 강조는 그냥 앉아있으라는 손시늉을 하며 퉁명스레 내쏘았다.

《그런데 말이요, 내 이미전부터 말하려 했던것인데… 그대의 함자는 음미해볼수록 무엄하단 말이요.》

《뭣이라고요?》

《은천… 하늘 천자를 함부로 쓰셨단 말이요.》

《함부로 쓰다니… 내 성함은 우리 부친께서 늘그막에 본 자식이라 하늘이 은혜를 베풀어서 내리주셨다고 감복한터에 지어준것인데…》

《거듭 말하는데 하늘 천자를 함부로 쓰셨소. 예로부터 하늘 천자는 하늘이 땅에 내려주는 임금을 점지받은이만이 쓰는 이름자란 말이요. 보시오, 우리 태조께서도 아명이 약천이라 임금이 되신다는 뜻이였는데 그대로 되지 않으셨소. 그런데 그대도 은천이니 천자가 되신다 그 뜻이 아니요?》

《말씀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구려. 가만 듣고있자 하니까 나중엔…》

은천은 너무 놀라 기절할 지경이 되였다.

《아아, 너무 격하진 말고… 좌우지간에 그 함자가 편안치를 않소.》

강조는 우에서 내려온 놈팽이를 보기 좋게 골려준것이 그 이상 깨고소할수가 없는 모양 입귀를 벌쭉거리며 웃음을 참느라 억지 재채기를 해댔다.

하지만 아닌 말로 강조처럼 해석을 한다면 사정이 전혀 달라지는것은 사실이였다.

아닐세라 강조의 이 말이 어느새 조정으로 날아올라가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버리고말았다.

은천은 긴장해졌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 하면 덮어놓고 시기가 따라붙기마련인것이 조정세태가 아닌가.

다행히도 이 일은 서희의 입김으로 눅잦혀졌다. 당자가 아닌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고 부친이 꼭 천자가 되기를 바라서 지은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납득한것이였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즉시로 은천은 이름자를 베풀 은자에 내천 자로 고쳐서 호적에 등록하고 일상 사무문서에도 그렇게 표기했다.

은천은 강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작고한 최승로대감께서 늘쌍 강조를 경계하라 하던 말이 떠올랐던것이다. 그가 반역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는 남을 깔보고 헐뜯기 좋아하는편이였다. 그것이 그의 인격을 여지없이 떨어뜨리고있었다.

임금이 이번 서경순행길에 은천을 데리고온것은 은천이 혹여 그 일로 해서 주눅이 들지 않을가 걱정이 되여 왼심을 써준것일수도 있었다.

은천은 골머리 아픈 조정관리생활에 은근히 회의심이 솟구쳤다.

벼슬이란 해먹을것이 못돼, 말 한마디에, 행동거지 하나에 너무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놀음이야.

은천은 그만에 의기소침해져버렸다.

서희형님이 오래전에 말했었지. 실체를 잘 다지고 천천히 들어와도 된다고 했던가. 어린 나이때부터 조정일에 부대껴온 그로서 그도 조정관리가 얼마나 힘에 부친 일인가를 체험으로 알고있었기에 그런 말을 하였으리라.

엥이, 될대로 되여라. 적당히 량수거지하고 조용히 도사리고 사는 수다.

은천은 이렇게 생각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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