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족제비사냥군

우리가 마당거우밀영에서 군정학습을 진행하는 기간에도 적들은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의 행방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다 썼습니다. 인민혁명군의 주력이 백두산지구를 떠나 몽강지구로 진출했다는것을 때늦게나마 내탐한 일제의 첩보모략기관들은 조선혁명의 수뇌부를 해치기 위한 음모를 끊임없이 꾸미였습니다.

그 시기에 있었던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하루는 김주현이 소부대공작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지난날 독립군에 들어가 활동하던 모모한 령감이 몽강에 살면서 족제비덫을 놓으러 다니는것을 만나 선전사업을 했는데 경향이 좋더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 족제비사냥군령감한테 흥미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우선 독립군출신이라는 말에 귀가 당기였습니다. 그때가 어떤 때였는가 하면 중일전쟁발발후 일본군대가 중국본토를 막 들이쳐서 북경을 먹었다, 상해를 점령했다 하는 바람에 대가 약한 사람들이 혁명을 거의나 포기하고 바람이 잠잠한 안방이나 뒤골목으로 몸을 사릴 때였습니다. 한사람의 애국지사가 그리워 옛날 독립운동을 좀 했다는 사람만 만나면 반갑다고 무작정 손을 잡아 흔들던 때였습니다.

더구나 몽강에서 독립군출신 령감과 접촉했다고 하니 그 령감을 통해서 심룡준의 행처를 알아낼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도 가지게 되였습니다. 심룡준은 만주땅에서 정의부니, 신민부니, 참의부니 하는 독립군 3부가 세력다툼을 할 때 참의부에서 거물급으로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그 심룡준이 참의부시절에 휘남, 화전, 몽강 일대에서 활동했고 3부가 국민부로 통합된후부터는 몽강 어디에선가 살고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심룡준을 알게 된것은 그가 우리 아버지의 친지였기때문입니다. 중학시절에는 길림의 상의가에 있는 복흥태정미소나 삼풍려관에서 그를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 당시 만주지방의 독립운동자들과 독립군지도자들은 3인1당, 5인1파, 8단9회의 란립상태해소하고 각당, 각파, 각계 력량의 집결을 목적으로 하는 3부통합을 모색하고있었는데 바로 그 회합의 중심지가 길림이였습니다. 정의부와 신민부, 참의부를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기 위한 대표회의를 할 때 심룡준은 참의부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나는 김주현에게 족제비사냥군에 대해 더 알아보고 그 령감이 심룡준을 아는가, 안다면 지금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가를 료해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김주현은 밀영밖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족제비사냥군령감을 다시 만나보았는데 령감이 비록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만두기는 하였지만 애국심만은 버리지 않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심룡준의 주소와 생활에 대해서도 잘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족제비사냥군은 심룡준이 독립군에서 물러난후 색시를 얻어가지고 몽강에 와서 살지만 변한것은 없고 뜻은 여전하다는것까지 자신있게 보증해나섰다고 합니다.

나는 김주현의 말을 듣고 심룡준이 나이는 많지만 독립운동에 나설 때의 초지를 버리지 않았다면 거기다가 줄을 좀 달아서 몽강일대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늘일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의주장은 다르지만 그도 애국심을 간직하고있는 이상 우리의 통일전선에 꼭 합류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심룡준이라는 인물을 그처럼 중시하고 그와 접선하기 위한 방도를 그토록 적극적으로 추구한데는 다른 리유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일본군대가 중일전쟁의 수렁창속에 깊숙이 빠져들어가는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의 반일력량과의 공동전선을 강화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림정계통의 반일력량과의 통일전선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였습니다. 림정계통의 반일력량과 손을 잡자면 우리와 림정사이에 줄을 놓을만한 사람들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심룡준이 바로 그런 사람이였습니다.


심룡준은 한때 상해림시정부에 드나들던 사람이다. 그가 속한 참의부는 륙군주만참의부라는 이름을 가진 림정의 직속산하단체였고 그안의 적지 않은 간부들은 림정에서 직접 파견되여온 사람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심룡준과 함께 독립군활동을 하다가 중국관내에 들어가있은 사람들은 이렇게나 저렇게나 림정과 관계되여있을것이고 중국국민당과도 기맥을 통하고있었을것이라고 하시였다.


이미 그때 우리 부대에는 왕덕림의 특사가 와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편제에도 없는 경위중대 교관이라는 직무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원들은 그를 보고 리교관, 리교관 하고 불렀습니다. 그가 중국장기를 잘 두었기때문에 나는 그와 자주 승부를 겨루었습니다.

왕덕림이 중일전쟁발발직후 혁명군사위원회 별동대 제2로군지휘로 있으면서 장개석과 련결되여있고 장개석이 또한 림정과 내통하고있는 조건에서 왕덕림과의 선을 잡아쥐기만 하면 림정과의 합작을 성사시킬수 있는 통로를 얼마든지 개척할수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왕덕림이 관내에서 리교관을 특사로 보내준것은 실로 예상치 않았던 행운이였습니다.

리교관의 말을 들어보면 왕덕림은 환갑나이가 다되였는데도 은퇴하지 않고 그냥 일선에서 항일을 하고있다고 했습니다. 진한장도 나에게 왕덕림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진한장은 구국군부대에 있을 때 오의성의 명령을 받고 천진에 가서 왕덕림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 왕덕림은 진한장에게 자기가 그전날 동북땅을 떠나 관내로 들어간것은 장개석이나 장학량의 도움을 받아 반일투쟁을 더 크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진한장이 왕덕림에게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무장투쟁실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을것입니다.

심룡준과의 접선을 위해서는 족제비사냥군령감을 더 검열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령감에게 몇번 과업을 주어보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주는 과업을 매번 착실하게 수행하군하였습니다. 우리는 몇차례의 검열을 통해 그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심룡준에 대한 공작으로 넘어갔습니다. 우선 족제비사냥군령감을 통하여 그에게 나의 명의로 된 편지도 보내고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창립선언도 보내주었습니다. 족제비사냥군령감은 심룡준에게 갔다와서 그가 나의 편지를 받고 멍해있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 무슨 다른 반응이 없던가고 물으니 편지회답을 인차 보내겠다고 하더라는것이였습니다.

나는 김주현에게서 이런 보고를 받고 심룡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가 나의 편지를 받고 멍해있었다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던바와는 좀 달랐습니다. 우리는 심룡준이 편지를 받으면 밀영으로 직방 찾아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반응만은 아주 크게 보이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좀 랭담하게 나온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선에서 총을 메고 돌아다니며 국권회복을 위해 힘쓰다가 가정에 묻힌 사람이니 왕년처럼 반일전선에 또다시 나서달라는 우리의 호소를 받게 되자 머리가 좀 뗑해졌을수는 있습니다. 반일전선에 나서달라는것은 이전처럼 독립운동에 몸을 적셔달라는 뜻인데 운동을 중도반단한 사람이 그런 제의를 받았을 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심룡준이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창립선언을 보고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은것은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혁명을 중도반단했던 사람이 혁명의 길에 두번 다시 나설 때에는 물론 결심을 인차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경우도 있을수 있습니다. 심룡준이 회답을 뒤로 미루는데는 제나름의 어떤 사정이 있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편지를 보낸 이상 회답을 기다리는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답장을 받아보아야 심룡준의 정신상태도 알수 있고 그 정신상태에 알맞는 처방도 내릴수 있었습니다.

며칠후 몽강현에 나갔던 소부대동무들이 족제비사냥군령감에게서 심룡준의 회답편지를 받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심룡준은 편지의 첫머리에서 산에서 얼마나 고생하는가고 문안인사를 간단히 한 다음 김형직선생의 자제가 이제는 사령관이 되여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잘 싸우고있다니 마음이 놓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항일무장투쟁로선이 아주 정당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동안 독립운동을 하다가 포기하고있은것이 량심에 가책된다고 하면서 나의 편지를 받고 독립운동에 다시 나설 결심을 했으니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던지 모릅니다. 심룡준은 나이로 볼 때 우리 아버지네 세대에 속한 사람이였습니다. 1937년이면 그 세대의 독립운동자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인으로 되였거나 해외로 망명했거나 감옥에 끌려간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투쟁대오에서 물러나 초부로도 되고 농사군으로도 되고 시정배로도 되였습니다. 내가 아는 독립운동자들가운데 이름난 인물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벌써 1920년대말이나 1930년대초에 길림일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런 사람들가운데는 중국관내로 활동지역을 옮긴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장투쟁을 시작하기전에 길림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본 아버지의 친지가 아마 손정도목사일것입니다.

무장투쟁을 하느라고 간도로 자리를 옮긴후에는 무송시절이나 길림시절에 자주 보군하던 3부소속의 독립군지도자들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데 가서나 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인이 된 아버지생각을 할 때면 아버지와 함께 인생을 론하고 도탄에 빠진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던 애국지사들의 얼굴도 눈앞에 그려보군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지사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는 그들의 행처조차 모르고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몽강에서 심룡준을 찾아낸데다가 그와 줄이 닿아서 새 출발을 다짐하는 편지까지 받았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 당시 우리는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여러 지역으로 확대할데 대한 방침을 내놓고 그 실현방도를 진지하게 토론하였습니다. 토론된 내용가운데서 일부는 대내신문에도 실었습니다.

몽강지방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확대한다는것은 곧 백두산근거지의 위력과 영향력을 이 일대에까지 확대한다는것을 의미하였으며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우리의 혁명력량을 여러 방면으로 더 늘여나간다는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우리는 족제비사냥군령감을 통하여 심룡준에게 돈을 좀 보내서 《동아일보》라든가 《조선일보》와 같은 정기간행물들을 사보내게 하였습니다. 심룡준은 며칠사이에 우리가 요구한 신문, 잡지들을 다 사서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우리와 심룡준사이에는 편지도 여러번 오갔고 돈과 물건도 여러번 왔다갔다했습니다.

이렇게 몇달동안 심룡준과의 사업을 하는 과정에 우리는 그를 지하조직활동에 빨리 인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사령부당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심룡준과의 사업을 더 판이 크게 벌리자, 그리고 그를 발판으로 하여 몽강일대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비롯한 혁명조직들을 광범히 꾸리자고 토의하였습니다.

나는 회의에서 이제는 심룡준에게 과업을 맡겨도 될것 같다, 몽강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하나 꾸려보라고 하자, 그리고 부상자치료에 필요한 약재도 부탁해보자, 이것은 그에 대한 최종적인 검토로 될것이며 동시에 그가 정치적생명을 되찾는 좋은 계기로 될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회의참가자들도 내 말에 동감을 표시하였습니다.

회의에서는 심룡준의 고문격으로 활동할수 있는 정치공작원으로 누구를 보내겠는가 하는 문제도 토의되였습니다. 심룡준이 한때 참의부의 거두로 활동했다고 하지만 조직건설경험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3부통합에 참가한것뿐이였는데 그런 정도의 경험으로는 비합법적인 지하조직을 건설할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심룡준에게 유능한 정치일군을 한사람 파견하여 뒤에서 그를 도와주기로 하였습니다. 그 적임자로 정치사업경험이 풍부한 김일동무가 선발되였습니다.

심룡준도 우리에게 자기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김장군의 부탁대로 조국광복회 조직을 당장 꾸려야 하겠는데 어떻게 할바를 모르겠다고 하면서 나와의 직접적인 상면까지 요구하였습니다.

나는 심룡준의 그 두가지 요구를 다 좋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몽강으로 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령부성원들이 다 반대하였습니다. 모험이라는것이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가 우리보다 곱절이나 많은 심룡준을 밀영에 불러올수도 없었습니다.

심룡준과의 대화를 성사시키자면 몽강시내도 아니고 밀영도 아닌 제3의 지점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장 리상적인 방안으로 보고 소부대를 파견하여 적당한 장소를 고르게 하였습니다. 장소만 고르게 되면 거기에 김일을 보내여 심룡준과의 대화를 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작전까지 짜놓은 다음 김주현소부대를 시켜 족제비사냥군령감을 밀영에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두도송화강쪽에서 사령부가 있는 밀영까지 들어오자면 여러곳을 거쳐야 했습니다. 강골로 얼음을 타고 들어오다가 벼랑을 기여오른 다음 7련대밀영, 8련대밀영, 경위중대밀영을 차례로 거쳐야 사령부로 들어올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령부에 오려면 반드시 이 통로를 밟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사령부가 정해놓은 엄격한 밀영출입질서였습니다.

밀영의 출입자들이 강골의 얼음을 타면 발자취를 남기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설사 눈우에 발자국이 찍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바람이 강판우의 눈을 다 날려버리기때문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눈우에 신발을 몇번 비비고 얼음강판을 걸으면 발자국이 남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찾아낸 겨울철행군법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마당거우밀영으로 들어갈 때에도 이 행군법을 적용했고 백석탄밀영으로 들어갈 때에도 이 행군법을 적용하였습니다.

우리가 몽강현 청강전자로부터 마당거우로 가던 날 그해의 첫눈이 내렸던것 같습니다. 밀영근처의 벼랑바위앞에 이르니 두꺼운 얼음강판가운데서 물이 솟아오르는것이 보였습니다. 그 물을 보고 그날 어떤 대원들은 두도송화강복판에 온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마당거우의 관문에 서있는 벼랑이 대단히 가파롭고 험했습니다. 전부대가 이 바위때문에 애를 먹었습니다. 대원들은 땀을 철철 흘리며 나무가지와 마른 풀뿌리들을 휘여잡고 한치한치를 힘들게 톺아올랐습니다.

눈섭에 성에가 불리는 추운 겨울날 두도송화강얼음판에서 샘처럼 솟아오르는 물을 보니 참으로 신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도송화강이 별난 강입니다.

족제비사냥군령감도 우리가 마당거우로 들어올 때 개척한 밀로를 리용하였습니다. 그는 소부대와 함께 7련대밀영의 보초앞을 지나다가 얼결에 보초병들이 요즈음 밀영에 데리고 들어오는건 간첩밖에 없는데 저 령감행색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령감이 정탐군이 틀림없다면 내가 한번 쏴봐야겠다고 롱삼아 한 말을 듣고 공포에 질리였습니다.

그해 겨울에는 밀영에 절대로 사민들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면 밀영밖에 나가서 만났지 밀영에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죄상을 조사하고 처리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만 밀영에 데려왔습니다. 이런 실정에 습관된 보초병들은 족제비사냥군령감을 정탐군으로 보았습니다. 보초병들이 그런 말을 마음놓고 할수 있은것은 그들이 족제비사냥군령감을 중국사람으로 보았기때문입니다. 그 령감이 그날 입은 옷은 조선옷이 아니라 중국옷이였습니다. 그가 왜 조선옷을 입지 않고 중국옷을 입었는지 알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우연이 보초병들로 하여금 족제비사냥군령감을 중국사람으로 잘못보게 했고 그가 들어서는 안될 말을 하게 했습니다.

족제비사냥군이 만일 죄가 없는 사람이였더라면 그런 말을 듣고도 꿈만해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초병들이 하는 말을 듣고 매우 당황해하였습니다. 유격대가 자기의 내막을 다 알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습니다. 우리가 심룡준과의 대화를 준비하던 시기에 족제비사냥군령감은 일본사람들의 위협과 공갈에 못이겨 본의아니게 사령부를 해칠 임무를 받았습니다. 소부대와 함께 밀영으로 들어오던 날 그는 우리를 해칠 때 사용할 흉기까지 휴대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마음이 태평스러울수 있었겠습니까.

족제비사냥군령감이 사령부에 나타났을 때 나는 왕덕림의 특사와 함께 장기를 두고있었습니다.

장기를 두다가 족제비사냥군을 만나주었는데 그 령감의 얼굴색이 왜 그런지 밝지 못했습니다.

후날 족제비사냥군령감도 고백했지만 그날 그는 보초병들이 하는 말을 듣고 《김일성장군이 석달천기를 내다본다더니 아마 우리끼리 꿍꿍이한것을 다 아는 모양이다. 나를 이런데로 끌고들어올수 없겠는데 이런데로 끌고 들어오는것을 보니 나는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고 지레짐작을 했습니다. 본의아니게 임무를 받고 가슴이 두근거리였는데 보초소에서 그런 말을 듣기까지 했으니 마음이 편안할리가 없었습니다.

족제비사냥군령감의 신색이 좋지 못한것을 보고 오히려 우리는 그를 동정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몽강과 같은 벽지에 들어와 족제비잡이로 생계를 이어가자니 얼마나 고달프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를 극진하게 대우해주었습니다. 대원들에게는 수수밥을 먹이면서도 그에게만은 기장밥을 해먹이였습니다. 어떤 날은 부대견학도 시키고 오락회며 강연회며 학습토론회도 구경시키였습니다. 이렇게 며칠동안 훈련도 주고 계몽도 시킨 다음 김일과 함께 심룡준과의 대화를 하게 되여있는 제3의 지점으로 보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 령감에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영향을 많이 주느라고 했지만 그에게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경위대원들은 그 령감이 기장밥을 해줘도 먹지 않고 한숨만 쉬면서 밀영에서 언제 나가게 되는가 하는것만 묻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족제비사냥군령감과 김일을 제3의 지점에 제때에 보내지 않은것은 적들이 마당거우일대를 포위하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지 다른 리유는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감시소조들을 여러곳에 보내여 높은 고지나 나무꼭대기우에서 망원경으로 주위를 세심히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감시소조들은 밀영부근의 산에서 연기가 나는것과 처처에 적들이 집결되여 있는것을 제꺽 알아내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낮에는 연기를 내지 않고 밤에만 불을 조금씩 피워 밥을 지어먹게 하였습니다.

어느날 나는 담화를 하려고 족제비사냥군령감을 사령부로 불렀습니다. 우리가 담화를 한창 하고있을 때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동무들이 사업보고를 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사업정형을 간단히 보고한 다음 공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탐군 두놈을 붙잡았다고 하였습니다. 한놈은 자기 정체를 솔직히 고백하기때문에 설복하여 그자리에서 놓아주었고 다른 한놈은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는데도 자기가 받은 임무와 죄과에 대해 전혀 실토하지 않고 숨기면서 반항하기때문에 처리했다고 했습니다.

나는 소부대책임자의 보고를 듣고나서 정체를 자백하지 않은 사람을 처리한것도 잘한 일이고 솔직하게 자백한 사람을 놓아준것도 잘한 일이라고 평가해주었습니다.

족제비사냥군령감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땅바닥에 두손을 짚고 엎드려 머리를 연방 조아리면서 밑도끝도 없이 《장군님, 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습니다. 나도 소부대책임자도 영문을 몰라서 령감의 거동만 지켜보았습니다. 령감이 용서를 빌 땐 필경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곡절인지는 가늠할수 없었습니다.

나는 령감에게 무슨 사연인지 어서 차근차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령감은 그 말에 힘을 얻은것 같았습니다. 그는 《가만히 계십시오.》 하고는 밖에 나가서 봇나무밑에 감춰두었던 도끼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가에 대하여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첫째 죄가 일본놈들한테서 사령부를 해치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받은것과 밀영에 들어와 귀빈대접을 받으면서도 자기를 뉘우치고 사령부에 자수할 대신 도끼를 감춘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두번째 죄는 심룡준이 변절한것을 알면서도 사령부에 귀띔해주지 않은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심룡준이 변절했다는 말을 듣고 아연해졌습니다. 족제비사냥군이 일본사람들한테서 임무를 받았다면 그것은 그닥 놀라울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전에 백두산밀영에 있을 때에도 몇번 체험해보았기때문에 별로 새삼스러운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어제날의 참의부거물급인 심룡준이 변절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되였다면 그것이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였습니다.

3부시절의 심룡준은 명망도 높았고 민중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는 반일을 선동하는 씨가 박힌 말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일제의 개가 되였다니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나는 족제비사냥군령감에게 심룡준이 변절했다는것을 어떻게 알았는가고 물었습니다.

족제비사냥군령감은 심룡준이 일본놈들과 모의하는것을 보고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모의를 했는가고 물으니 사령부를 유인할 방도를 모의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심룡준에게 유격대대표가 가게 되면 우선 그를 억류하고 강박하여 사령관과 모지점에서 만나자는 내용의 편지를 사령부에 보내며 편지를 받고 사령관이 약속된 지점에 나타나면 포위해서 붙잡는다는것이 심룡준이 일본사람들과 함께 짜놓은 사령부유인방안이였습니다.

족제비사냥군령감의 고백에 의하면 심룡준이 우리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그가 뒤골방에서 일본사람들과 토의하고 쓴것이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거리를 하나씩 맡길 때마다 심룡준은 일본사람들한테 꼭꼭 찾아가서 혁명군이 무슨 부탁을 해왔다는것을 알리고 그들의 지령대로 움직였습니다.

족제비사냥군은 심룡준이 왜놈들에게 투항변절한 다음부터 장춘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적의 《토벌대》도 여러번 끌어들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족제비사냥군령감이 사전에 자백을 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김일도 녹아나고 나도 녹아나고 다 녹아날번했습니다.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는것은 때때로 이런 아슬아슬한 위기도 동반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화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것도 역시 믿음의 덕이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밀영에도 들여놓고 부대생활의 이모저모를 통채로 개방해놓고 마음대로 구경도 할수 있게 해주었기때문에 그 령감의 흑심인간본연의 량심으로 되돌아섰던것입니다. 인간심리의 변증법이란 참으로 묘한것입니다.

김정일동무의 주장가운데 믿음은 충신을 낳고 의심은 배신을 낳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명언입니다.

불신을 해서 덕을 볼것은 없지만 믿음으로는 많은것을 얻을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적아의 구별이 없이 염통까지 다 뽑아주라는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믿되 실천을 통해 검열해야 합니다.

령감이 자기가 알고있던 정보를 다 털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무들은 그를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령감을 관대히 용서해주었습니다. 자기 죄과를 솔직히 반성하는 사람한테야 왜 아량을 베풀지 못하겠습니까. 자기가 지은 죄를 량심적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과거를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이 사건을 겪고나서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사람에 대한 환상금물이라는 심각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혁명이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일수록 사람에 대한 환상은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어주고 사랑해주는것은 좋지만 환상적으로 대하는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상이란 고정불변한것이 아닙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며 래일이 다를수 있는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심룡준의 실례가 이것을 증명해주고있습니다.

사람은 리해관계로부터 혁명을 추동할수도 있고 훼방할수도 있습니다. 인민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사상은 금강석처럼 변하지 않지만 혁명의 리익과 인민의 리익은 안중에도 없이 개인의 안녕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상은 인차 변질되고맙니다. 어려운 때에 혁명을 제일 쉽게 배신하는것이 바로 개인주의와 리기주의에 중독된 인간들입니다.

나는 심룡준의 실례를 통하여 사람이 근본을 잊고 자기보신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면 얼마나 엄중한 배신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친구도 동지도 이웃도 민족도 나라도 서슴없이 팔아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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