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유격대의 어머니

백두산에서 여러해동안 우리와 함께 고락을 같이한 전우들가운데는 《어머니》로 불리운 녀성유격대원이 한명 있었다. 그는 사령부작식대원 장철구였다. 부대에는 녀대원들이 수십명씩이나 있었고 작식대원들도 여럿이였지만 유독 장철구만은 《어머니》로 불리웠다.

나이는 우리보다 10살나마 이상이였다. 10살 정도의 차이라면 《누이》나 《동무》라고 불러도 무방할 나이이다. 그러나 나도 평시에는 그를 《동무》라 부르지 않고 《철구어머니》라고 부르군하였다. 장철구보다 나이가 어방없이 많은 《대통령감》까지도 《철구어머니》, 《철구어머니》라 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장철구가 사령부작식대원으로 된것은 우리가 1936년 봄 마안산에서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살라버린 다음부터였다.

나는 그때 김홍범이 뭉테기로 내놓은 《민생단》혐의자들의 문서를 검토하면서 장철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되였다. 무슨 까닭이였던지 그의 문서장만은 빨간색 잉크로 씌여져있었다.

그 문서장에는 연길현에서 당사업을 하던 남편이 《민생단》으로 판명되여 두해전에 처단되였다는것과 장철구도 연길현 왕우구에서 부녀회주임으로 사업할 때 군량미를 고의적으로 매몰하여 대원들을 굶기는 등으로 암해책동을 하였다는 몇가지 《죄상》들이 적혀있었다.

빨간색 글씨의 문서장과 남성의 이름을 가진 중년의 녀성이라는 특징만으로도 그는 벌써 나의 주의를 끌었다.

장철구는 외모도 어지간히 표가 났다. 녀대원들가운데서 키도 제일 작았고 눈섭도 매우 성글었다. 어찌나 성글었던지 눈섭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였다.

장철구는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혁명에 발을 들여놓은 녀자였다. 남편을 끔찍이 따르던 나머지 그가 하는 일까지도 사랑하게 되였다. 그는 남편이 하라는대로 삐라도 붙이고 련락쪽지도 나르고 사람도 숨겨주고 글도 배우고 비밀모임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혁명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그런데 그가 그처럼 믿고 따르던 남편은 부당하게도 《민생단》으로 몰려 처단당하였다. 장철구도 왕우구공작현지에서 체포되여 《민생단》감옥에 갇혔다. 언제인가 집에 와서 남편과 함께 더운 피쌀밥과 갓김치를 달게 먹던 《왕동지》가 그에게 몽둥이찜질을 가하고 머리칼을 잡아휘둘렀다. 그러나 유격대원들과 혁명군중은 심판장에서 그를 처단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장철구는 처단을 면했으나 《민생단》혐의자라는 오명만은 벗지 못하였다.

나는 신성한 혁명을 모독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참살하는 교형리들이 사람들의 목에 걸었던 《민생단》혐의자의 올가미를 벗겨주면서 장철구를 우리 사령부의 작식대원으로 임명하였다.

장철구가 작식을 맡은 때로부터 우리의 식찬은 한결 다양해졌다. 그는 장이나 김치를 속성으로 만드는 재간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지금 사람들은 하루이틀사이에 간장이나 된장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면 잘 믿지 않을것이다. 콩을 타지 않을 정도로 닦아서 뜨끈한 물에 담그면 시뻘건 물이 우러나는데 그 물에 소금을 넣고 졸이면 간장처럼 된다. 삶은 콩을 단지에 넣어 더운데 두면 뽀얗게 발효된다. 거기에 소금을 치고 끓인것이 썩장이다. 그 맛은 꼭 명태장국맛과 같다.

장철구가 속성으로 만들어준 썩장이나 참나물김치는 우리모두가 명절성찬처럼 맛나게 먹던 상등료리들이였다.

장철구는 강냉이눈을 닦아서 기름을 짜내군하였다.

언제인가 전령병이였던 백학림이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한 일이 있었다. 평시에는 나무껍질까지도 씹어삼키군하던 그는 푹 삶은 통강냉이죽조차 구역질이 난다면서 입에 대지 않았다. 장철구는 눈속에서 마른 산채잎을 뜯어다가 물에 불구어 우려내고 그것을 삶은 다음 강냉이눈으로 짠 기름에 볶아냈다. 그렇게 만들어낸 찔게에 학림은 입맛이 돌아섰다.

장철구는 말그대로 유격대의 《어머니》였다. 부대가 싸우러 나갈 때면 그는 나어린 대원들의 바지주머니에 슬그머니 가마치를 넣어주군하였다.

최금산이나 백학림과 같은 애숭이전령병들은 물론이고 오중흡이나 리동학과 같은 구대원들도 장철구앞에서는 배고프다는 소리까지도 무랍없이 털어놓군하였다.

장철구가 제일 사랑한 대원은 우리 부대의 막동이인 《가마치대장》 리오송이였다.

장철구는 그가 먼발치에 와서 얼씬거리기만 해도 치마폭에 가마치를 감춰가지고 나가서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군하였다. 리오송은 그 가마치를 자기 또래들과 함께 꼭같이 나누어 먹었다.

나는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녀자가 남자들보다 자식들에게 더 허물없고 친밀한 육친으로 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를 생각해보았다. 녀자들이 남자들보다 자식들에게 일생동안 더 가까운 육친으로 되는것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는 일을 주로 모성이 담당하고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후대를 먹여주고 입혀주는 일은 모성들에게 부여된 고정분공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라는 말의 참의미는 먹여주고 입혀주는 가장 은혜로운 보호자라는데 있을것이다.

이 보호자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한 장철구는 우리모두의 가장 친밀한 《어머니》로 되였다.

우리가 곤하게 잠든 깊은 밤에도 그는 다음날 식사준비때문에 산나물도 다듬고 망질도 하고 키질도 하였다. 밤중에 절구질을 해야 할 때면 눈보라가 사납게 울부짖는 한지에 나가서 쌀을 찧었다.

장철구는 노상 불앞에서 살다싶이 하였다. 그때문에 옷도 남보다 갑절 빨리 꿰지였다.

한번은 밀영에서 오락회가 벌어졌는데 그가 지명을 받았다. 전우들은 모두 그의 노래를 듣고싶어하였다. 음식솜씨는 대단한데 노래솜씨는 어떨가 하는 심정으로 다들 박수까지 쳐가며 그가 나서기를 고대하였다. 그런데 장철구는 훌쩍 일어나 숲속으로 달아나버리고말았다.

그 돌발적인 행동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나는 장철구를 변호하였다.

《철구어머니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다르게 생각할것은 없소. 그 어머니가 대중앞에 나서지 못한것은 옷차림때문이였을거요. 동무들도 보았겠지만 철구어머니는 기운 옷을 입고있소. 기운 자리가 열군데도 더 될거요. 그런 옷으로 군중앞에 나서야 할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보오.》

오락회에 모인 사람들은 그 말에 다같이 공감하였다. 사실 장철구자신도 후날 자기가 그때 달아난것은 옷주제때문이였다고 실토하였다.

그후 나는 소부대를 데리고 전장에 나갔던 기회에 장철구를 위해 좋은 옷천 한감을 마련하였다. 대원 한사람을 파견하여 값에는 구애되지 말고 제일 좋은것으로 고르라고 하였더니 중년기의 녀인들에게 꽤 어울림직한 회색목세루천을 사왔다. 천물계를 좀 아는 녀대원들이 겨끔내기로 만져보고나서는 좋은 천이라고 하기에 나도 마음을 놓았다.

나는 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에는 옷 한벌 장만해드리지 못했다. 소사하 갈밭속의 허술한 초가집에 앓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남만원정의 길을 떠날 때 어머니에게 드린 좁쌀 한말조차 우리 동무들이 마련해준것이였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준 일이 있다면 오직 한번 팔도구시절에 고무신 한컬레를 사올린것뿐이였다. 하지만 그때 고무신을 사느라고 쓴 돈도 실상은 운동화를 사신으라고 어머니가 준것이지 내가 마련한것은 아니였다. 나의 어머니는 자식의 성의는 단 한쪼각도 받아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시였다. 살아서 자식덕을 한번도 못보았고 돌아가신 뒤에도 아들의 흙 한줌, 눈물 한방울 받아보지 못하고 어머니는 소사하강반에 쓸쓸히 묻히였다.

철구어머니에게 옷감을 마련해가지고 갈 때의 나의 마음속에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자식덕을 못본 친어머니에 대한 련민의 정도 비껴있었다.

그런데 싸움을 마치고 밀영에 돌아오니 우리가 전장에 나가있는 사이 장철구가 김주현의 지시로 후방병원에 갑자기 옮겨갔다는것이였다. 그가 어째서 사령부작식대에서 일하다가 한적한 후방밀영으로 조동되여갔는지 그 리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그 소식을 듣자 동무들은 한사람처럼 서운해하였다. 나 역시 허전한 심정을 금치 못하였다.

그 당시 우리 부대에서는 작식대나 재봉대, 병원, 병기창 같은 후방기관들을 모두 후방부관이 관할하고있었다. 그런것만큼 후방사업을 담당한 김주현이 자기의 관할하에 있는 작식대에서 사람을 뽑아 다른데로 보내는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였고 또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였다.

문제는 사령부작식대에서 만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온 장철구가 무슨 리유로 후방병원에 조동되였는가 하는데 있었다.

장철구와 함께 밀영에 남아있던 김정숙에게 알아보았더니 그도 그 동기가 무엇이였는지 몰랐다.

《후방병원쪽에서 철구어머니를 요구했거나 무슨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던가 봅니다. 철구어머니는 울면서 밀영을 떠났습니다. 어찌나도 섭섭해하는지 우리가 막 송구할 지경이였습니다.》

김정숙은 장철구가 후방병원으로 떠나가던 정경을 이야기하면서 슬그머니 눈굽을 훔치였다. 그가 눈물까지 흘리는것으로 보아 장철구와의 리별이 작식대원들에게 아픈 추억을 남긴것만은 틀림없었다.

나도 방금 리별을 당한 사람처럼 가슴이 알알해났다. 후방병원으로 보내더라도 내가 돌아온 다음에나 보낼것이지, 그러면 옷이라도 한벌 해입고 가게 했을것이 아닌가 하는 고까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분노한것은 김주현한테서 장철구의 조동리유를 들은 다음이였다.

《저는 조막도끼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사령관동지의 신변가까이에는 깨끗한 사람들만 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주현이 고백한 장철구의 조동리유였다. 그가 조막도끼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고 사령부호위를 잘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면 그것은 긍정할만한 일이였다. 사령부의 안전을 걱정하는데서 김주현은 부대의 모범으로 내세울만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각별히 신임하고 사랑하여주었다.

서간도전체가 참군열의로 끓어번지던 1936년 가을에 우리는 입대를 탄원하는 청년들로 몇개의 보충중대를 뭇고 교관들을 파견하여 곰의골밀영에서 그들에 대한 속성훈련을 조직하였다. 그런데 이 보충중대의 신병들속에는 조막도끼와 독약봉지를 가지고 나를 해치기 위해 침투한 적의 첩자도 끼여있었다. 출신으로 보아서는 적들에게 흡수될만한 건덕지가 조금도 없는 순박한 농사군청년이였는데 적들의 권모술수간계에 속아서 밀정으로 전락되였던 모양이였다. 하루는 인민혁명군복장을 한 적들이 그 청년의 집에 뛰여들어 《비적》행실을 하였다. 청년이 나무를 해다 팔아서 앓는 어머니의 약값으로 마련한 돈도 빼앗고 량식도 털고 닭도 잡고… 아무튼 눈에 걸리는것은 다 강탈해갔다. 그뒤로 선무공작반이라는데서 파견된놈이 나타나 청년이 당한 불행을 위로하는척하면서 그가 저들의 요구에 응해나설 때까지 집요반공선전협박을 들이대였다. 이렇게 되여 청년은 본의아니게 반혁명의 하수인으로 되여 우리 대오에까지 끼여들게 되였다.

그런데 그가 적에게 매수된 간첩이라는것을 누구도 몰랐다. 밀영으로 들어올 때 허리춤속에 찌르고온 조막도끼마저 사령부주변에 깊숙이 감추고 난 뒤여서 그를 간첩으로 볼만한 표적은 누구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어느날 나는 곰의골밀영에 갔다가 보충중대의 신병들이 며칠째 맨 시래기죽으로 끼니를 에우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고생을 각오하고 유격대에 입대한 사람들이라고는하나 집을 떠나온지 몇달 되지도 않고 아직 고난에 익달되지도 못한 신대원들인것만큼 사전에 교양을 잘하지 않으면 나약한 생각에 빠질수도 있었고 동요할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밤 신입대원들을 한자리에 모여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동무들이 부모처자가 있는 아늑한 집을 떠나 한지에서 추위에 떨며 시래기로 끼니를 에우자니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를 찾자고 나선 청년들이 큰뜻을 이루자면 이런 고생도 참고 견딜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고생스럽게 지내도 조국을 광복한 다음에는 싸운 보람을 느끼게 될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광복한 다음 삼천리강토우에 살기 좋은 인민의 나라를 세우자고 한다. 착취하는 사람도 없고 압박받는 사람도 없으며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골고루 잘사는 인민의 락원을 세우자는것이다. 공장도 땅도 인민의 소유로 만들고 모든 사람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켜주고 병치료해주는것을 국가가 책임지고 하는 민중제일의 나라를 세우자는것이다. 그때에는 세상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보고 부러워하게 될것이다.…

신입대원들중에는 적들에게서 간첩임무를 받은 그 청년도 섞여있었다. 청년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가 놈들에게 속아서 좋은 사람을 해치려 했다는것을 깨닫게 되였고 설사 엄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정체를 밝히고 깨끗이 자수하자고 생각하였다.

청년은 결심대로 우리앞에서 조막도끼와 독약봉지를 꺼내놓고 자기 정체를 밝히였다. 그가 솔직하게 고백하였기때문에 우리는 그를 관대하게 용서해주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지휘관들을 크게 각성시키였다. 그들은 자기나름대로 교훈을 찾았다. 어떤 지휘관들은 사령부호위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고 어떤 지휘관들은 입대심사를 실속있게 하여 우연분자들과 불순이색분자들이 대내에 끼여들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으며 어떤 지휘관들은 서간도전역에서 적의 주구들과 악질적인 반동들을 숙청하기 위한 투쟁을 군중적운동으로 벌려 한명의 간첩이나 밀정도 밀영에 범접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김주현의 생각은 이보다 좀더 복잡한 경지에 있었다.

《나는 그때 우리 사령부를 잘 호위하자면 안팎을 다 잘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이 외부에만 있고 내부에는 없다고 단언할수 없으며 외부의 적이 우리 내부에 보호색을 쓰고 숨어있는 반동들이나 동요분자들과 련계를 가지지 않는다고 장담할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경력이 복잡한 사람들을 사령부측근에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것은 이때문이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결국 장철구와 같은 《민생단》혐의자는 사령부작식대원으로 있을 자격이 없다는것이였다.

나는 분하고 격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오직 성실성 하나만을 가지고 혁명을 위해 애쓰는 순박하고 무던한 그 어머니를 어쩌면 그렇게도 몰인정하게 대할수 있단 말인가. 매사에 그처럼 대범하고 용의주도한 김주현이 이런 엄청난 실수를 하였다고 생각하니 더구나 참을수 없었다. 나는 그를 불같이 다불러댔다.

…동무가 우리의 안전을 위해 늘 마음을 쓰고있는데 대해서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은 내 동무에게 아픈 말을 좀 해야겠다. 장철구어머니에 대해서는 동무자신도 진실하고 근면하고 인정있는 녀성이라고 여러번 칭찬해왔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동무의 마음속에서는 그에 대한 믿음이 그처럼 쉽게 허물어질수 있었는가.

그는 우리모두의 어머니를 대신해왔고 누이를 대신해왔다. 우리에게 하루 세끼씩 누가 더운밥을 지어주고 누가 더운국을 끓여주었는가? 철구어머니였다. 만일 그가 나쁜 녀자였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우리를 해칠수 있는 기회야 얼마든지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철구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수백그릇씩이나 먹고서도 모두가 건재하고있다. 이것은 장철구어머니가 의심을 받을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좋은 녀자이며 지난날 그가 받았던 《민생단》혐의가 백번부당한것이라는것을 증명해줄뿐이다.…

김주현은 후날 그날처럼 땀을 많이 뽑아본적은 없었다고 나에게 고백하였다.

사실 나는 김주현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실책을 범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김주현은 오랜 혁명경력을 가진 로련한 군사정치일군이였다. 우리는 늘 한가마밥을 먹고 함께 지냈으며 한상에 마주앉아 사업을 의논하였고 늘 마음과 뜻을 같이해왔었다. 우리의 로선과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김주현이 공산주의자로서의 의리와 도덕을 떠나 인간의 운명을 그처럼 모질게 다룬것은 참으로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나는 김주현의 잘못을 계속 비판하였다.

…우리가 마안산에서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살라버린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상처도 거의다 아물었다. 그런데 동무는 무엇때문에 다 아물어가던 그 상처자리를 들쑤셔놓았는가? 이제라도 산에서 내려가기만 하면 장철구는 새 남편을 얻어가지고 뜨뜻한 가마목에서 더운밥을 먹으며 편안히 살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우리와 같이 고생스러운 산생활을 하고있다. 혁명을 하자고 결심했기때문이며 우리를 믿고있기때문이다. 그런데 동무는 그를 사령부에서 내보냄으로써 우리가 그에게 준 믿음조차 기만적인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래 우리가 여느때에는 믿는척하고 포섭했다가 위험할 때에는 서슴없이 배척해버리는 그런 용렬인간들이란 말인가? 믿음에는 가짜라는것이 있을수 없다.…

김주현은 그날로 후방병원에 가서 장철구를 데려왔다. 다음날은 재봉대원들을 다과대여 그에게 입힐 옷까지 한벌 지어왔다.

하지만 장철구는 김주현의 지시를 매번 책임적으로 집행하면서도 그를 멀리하였다. 간혹 밀영의 소로길이나 식당에서 단둘이 만날 때에도 경례만 붙이고는 침묵으로 대하군하였다. 결론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기면 다른 작식대원을 내세워 김주현에게 보냈다.

장철구가 후방병원에서 보낸 며칠간은 시간으로 셈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며칠을 못잊어 장철구는 오래동안 마음속의 그늘을 지우지 못하였다.

참으로 불신인간관계에 미치는 파괴력은 엄청난것이다. 티끌만한 불신이 일생의 원망을 살수도 있고 10년 묵은 우정을 순간에 파괴해버릴수도 있다.

장철구가 사령부작식대에 다시 돌아오자 밀영의 활기도 부활되였다. 음식맛도 대뜸 달라졌다. 어쩐지 같은 통강냉이죽도 이전보다 한결 더 달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가 지성을 다하는 작식대원이였기때문이다. 사실 장철구는 솜씨있는 료리사는 아니였다.

장철구는 전보다 더 극성스럽게 일하였다. 우리의 구미에 당기는것이라면 100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구해오군하였다. 어느날 나는 19도구를 지나가다가 리훈네 집에서 병풍쌈을 먹어본 일이 있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그 쌈은 오히려 부루쌈보다 맛이 나았다. 밀영에 돌아와서 한담삼아 그 쌈맛에 대한 말을 꺼냈더니 장철구는 어느새 수십리나 되는 19도구에 달려가 병풍나물을 한임 가득 이고 돌아왔다. 그후에는 백두산밀영지에서 병풍나물을 찾아내였다.

장철구는 습기가 많은 작식터근처에 나무가지와 가랑잎을 펴고 늘 새우잠을 자군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그의 오른쪽팔이 점차 마비되였다. 엎친데덮친 격으로 얼마후에는 열병에까지 걸리였다.

우리는 병치료를 위해 장철구를 안도현 오도양차골안으로 보냈다. 그때 박정숙과 백학림도 《간호병》의 사명을 띠고 그를 따라갔다. 그후에는 김정숙이 그의 병간호를 맡아하였다. 그들이 장철구를 거들어주느라고 많은 수고를 하였다. 나도 지봉손전달장을 데리고 오도양차에 있는 장철구의 풀막에 한번 가보았다.

장철구는 수십일만에 열병을 털고 일어났으나 오른팔의 마비만은 고치지 못하였다. 그러다나니 작식도 변변히 할수 없었고 총도 제대로 다룰수 없었다. 자기가 부대의 짐으로 되였다는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장철구는 날마다 고민속에 모대기였다. 그러던 끝에 그는 자기가 부대를 떠나야 전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1940년대초, 우리가 무장대오에 그냥 세워둘수 없는 불구자들과 로약자들을 쏘련으로 후송할 때 장철구는 자청하여 그 대렬을 따라갔다.

작별을 앞두고 그는 자기가 늘 끼고다니던 은반지를 김정숙에게 주면서 조선이 독립되는 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장철구는 김정숙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만리타향에서 들었던것이다. 김정숙이 건사하였던 장철구의 은반지는 지금 조선혁명박물관에 진렬되여있다.

장철구와 함께 우리 사령부의 작식일을 맡아한 사람들가운데는 련합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인대원도 있었다. 그는 중국료리를 잘 만들었다. 장철구가 성실한 취사원이였다면 련합동은 솜씨있는 료리사였다. 그가 우리에게 온것은 1936년 겨울이였다. 련합동은 우리 부대에 입대하자마자 얼마동안 장철구의 곁에 있으면서 유격대료리법을 배웠다. 장철구는 련합동의 도움으로 중국료리법을 배웠다. 그러는 과정에 두사람은 아주 친밀한 벗으로 되였다.

장철구가 쏘련으로 파송되여갈 때 련합동은 몹시 허전해하였다. 그는 중국음식을 한보따리 만들어가지고와서 철구어머니의 배낭에 넣어주었다.

장철구도 그와의 리별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련합동이 우리한테로 오게 된 사연속에는 희귀한 상봉극이 있다. 그 상봉극의 주인공이 바로 길림에서 교의 계률을 어기고 술과 돼지고기를 잘 먹던 이슬람교도 마금두이다. 마금두는 길림육문중학교 시절의 나의 동창생일뿐아니라 팔도구소학교시절의 학우이기도 하였다.

팔도구시절의 연고자들가운데는 인상깊은 사람들이 많았다. 팔도구경찰서장의 아들 려현장도 나하고는 범상치 않은 인연을 맺고있던 사람이였다. 그도 팔도구시절에 나와 소학교를 같이 다니였다. 려현장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한테 와서 병치료를 받던 단골손님들중 한사람이였다. 그 사람은 신세를 갚는다고 하면서 명절때마다 선물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 오군하였다.

나는 서간도지방에서 부대를 데리고 활동할 때 려현장의 소개로 팔도구경찰서장과도 련계를 가지였다. 그때는 려현장의 아버지대신 다른 사람이 경찰서장노릇을 하였다. 그 경찰서장도 려현장의 아버지처럼 량심적인 사람이였다. 그는 우리와 싸우지 않기로 약속한 다음부터 인민들이 혁명군에 보내는 원호물자들을 하나도 다치지 않고 다 들여보내주군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장백현내의 다른 고장들은 다 치면서도 팔도구만은 한번도 치지 않았다.

마금두는 성격도 특이하였지만 사생활도 남다른데가 있었다. 그는 중학교시절에 벌써 결혼을 하였다. 그것도 단꺼번에 두 녀성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의 두 안해는 자매간이였다.

처음에 마금두는 자매중의 언니와 련애를 하여 약혼까지 하였다. 그런데 언니의 심부름을 하던 동생이 마금두에게 반해서 상사병을 앓게 되자 자매의 부모들은 딸형제를 모두 마금두에게 맡겨버리였다. 돈부자인 마금두는 처부자로도 되였다.

나는 감옥에서 나와 길림을 떠난 다음에는 마금두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운명의 변덕이라고 할가. 이번에는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적으로 맞서게 되였다. 우리가 백두산에 나와 싸우던 첫해 겨울의 일이였다.

마금두는 이도강에 둥지를 틀고있던 위만경찰《토벌대》 대장이였다. 이도강은 곰의골밀영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적의 중요한 《토벌》거점이였다. 이고장에는 위만경찰《토벌대》의 무력과 함께 함흥 74련대에서 파견되여온 수백명의 일본군《토벌대》병력도 주둔하고있었다.

나는 처음에 마금두가 위만경찰《토벌대》 우두머리노릇을 한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그런데 그해 가을 두번째인가 세번째인가 이도강을 쳤을 때 우리 대원들이 도망친 위만경찰《토벌대》 대장의 집을 수색하다가 권총을 쥐고 숨어있는 대장의 처와 료리사를 데려왔다. 놀랍게도 그 대장의 처라는 녀자는 마금두에게 출가한 두 자매중의 동생이였다.

마금두가 길림에서 결혼식을 할 때 나도 초청을 받고 거기에 참가했었다. 그래서 그녀자를 인차 알아보았다. 그 녀자도 역시 나를 알아보았다. 아주 극적인 상봉이였다.

녀인의 말에 의하면 마금두는 어느새 네 아이의 아버지로 되였다고 하였다. 자기는 아들 둘을 낳았고 언니는 딸 둘을 낳았다는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기 남편이 지금도 길림시절이야기가 나오면 김성주선생을 외우군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되여 《김일성공비》무리에 끼여들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그는 어제날의 김성주가 바로 김일성이라는것을 모르고있었다.

나는 그 녀자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공비대장》이라고 말하는 김일성이란 바로 나다. 우리는 공비가 아니라 조중인민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싸우는 혁명군이다. 남편이 오면 내 인사를 전해달라. 지난날의 우정을 가지고 동창생으로서 진심으로 권고하는데 여기서 승산없는 싸움을 하느라고 하지 말고 슬그머니 피하라고 하라. 피할수 없으면 《토벌》에 내몰리더라도 흉내만 내라고 하라. 우리는 악질적으로 저항하는 위만군은 치지만 그렇지 않은 위만군은 너그럽게 처리한다. 나는 마금두가 왜놈들의 총알받이가 되는것도 바라지 않으며 혁명군의 총에 맞아 죽는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벗으로 되여야 할 사람이지 원쑤로 되여야 할 사람은 아니다.…

마금두의 부인은 《김일성공비단》이 위만군에 대해서는 함부로 총질하지 않는다는것을 남편도 잘 알고있다고 하였다. 인민혁명군의 야간습격조가 곰의골어귀전투때에 적숙영지를 기습하면서 일본군의 천막들만 답새기고 위만군의 천막들은 치지 않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토벌대》의 우두머리들은 그 분풀이로 싸움에 참가하였던 위만군장교들을 모조리 총살해버리였다.

마금두가 그 끔찍한 참살을 가까스로 모면할수 있은것은 감기를 핑게로 《토벌》에 참가하지 않은 덕분이라고 하였다. 아마 마금두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의 대적방침을 어느 정도 깨달은것 같았다.

마금두의 부인은 김일성부대가 왜 위만군에 대해서 그렇게 관대한가를 이제는 알만하다, 성주선생이 학창시절에도 늘 조중친선을 강조하였고 중국의 학우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우리도 잘 안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 남편도 자주 말해왔다, 성주선생이 중국사람들을 그처럼 아끼며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위만군을 대해주는데 대해서는 고맙다는 한가지 생각뿐이다, 남편을 설복해서 두번 다시는 혁명군에 총부리를 돌리지 않게 하겠다, 남편도 김일성대장이 어제날의 김성주선생이라는걸 알면 심사숙고하게 될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마금두의 부인에게 력사에 오명을 남기는 역적이 되지 않도록 남편을 잘 설복하라고 거듭 당부한 다음 그와 료리사를 돌려보내고 이도강에서 철수하였다.

료리사는 그때 마금두의 처를 따라가지 않고 우리를 찾아와서 입대를 청원하였다. 그가 바로 련합동이였다. 그는 마금두의 안해들인 두 자매가 한 남편을 놓고 자주 싸움을 하는 짬에 끼워 시달림을 당하기에 지쳤다면서 혁명군에 받아달라고 청원하였다.

《나는 마금두대장한테서 김성주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김성주선생이 바로 김일성장군이라는것을 알게 되니 장군곁을 떠나고싶지 않습니다. 장군부대에서 싸우다 죽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의 청을 받아주었다. 그무렵에 위증민이 힁산후방밀영에 와서 병치료를 받고있었는데 그에게 중국료리를 만들어 줄수 있는 료리사가 생기게 된데 대하여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의 구미에 맞는 중국음식을 지을만한 작식대원이 없어서 사실은 나뿐아니라 김주현까지도 몹시 난감해하고있던터였다.

나는 련합동을 한동안 위증민의 곁에 가서 일하게 하였다. 위증민은 련합동이 일류급식당에 보내도 손색이 없을 재능있는 료리사라고 하면서 그를 몹시 사랑하였다.

련합동은 그때부터 1945년 9월,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가 조국에 돌아올 때까지 오래동안 우리곁에서 작식대원으로 일하였다. 그는 같은 감을 가지고도 별의별 료리를 다 만들어낼줄 아는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밥은 큰 가마에 해야 맛있다고 하면서 언제나 큰 가마를 지고다녔다.

1940년대 전반기 쏘만국경지대의 훈련기지에 가있을 때 우리는 중국동무들과 함께 쏘련동무들과도 련합군을 편성하고 종종 합동훈련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련합동의 료리솜씨가 얼마나 소문났던지 중국측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쏘련측 지휘관들까지 우리 부대의 야전식당에 뻔질나게 찾아들군하였다.

어느날 주보중은 련합동이 차려준 중국음식을 먹고나서 우리에게 그를 달라고 롱을 하였다. 그런데 안길동무가 마침 잘 되였다고 하면서 그 롱을 받아넘겼다.

이 말이 진담처럼 전달되여 련합동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련합동은 울상이 되여 나를 찾아와 자기를 중국부대에 넘긴다는게 사실인가고 하였다.

《어느 부대에 넘어가겠는지는 모르겠는데 동무를 탐내는 사람들이 많아서 야단났소. 쏘련동무들도 동무를 달라는구만. 만약 쏘련동무들이 더 조르면 쏘련측에 넘어갈수도 있소.》

나의 말에 련합동은 펄쩍 뛰였다.

그는 중국부대고 쏘련부대고 다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고집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빈소리가 아니라는것을 우리는 일본의 패망직후에 절실히 깨달았다. 해방된 조국으로 나올 때 나는 련합동을 불러놓고 10년 가까운 세월의 수고를 치하해준 다음 그를 주보중부대에 편입시키기로 한 당조직의 결정을 전달하였다. 주보중은 련합동이 자기 부대에 오면 련대장을 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련합동은 그 말을 듣자 자기를 꼭 조선으로 데려가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제는 장군님곁을 떠나서는 못살겠습니다. 내가 중국사람이라고 해서 꼭 중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습니까. 련대장이고 뭐고 다 싫으니 나를 장군님곁에만 있게 해주십시오. 왜놈의 총칼이나 만주바람도 끊지 못한 정인데 국적이 다르다고 그 정을 억지로 끊을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련합동의 말은 나를 감동시키였다. 그가 한 말에는 혁명의 길에서 동지를 위해 피도 흘리고 눈물도 뿌리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사람들만이 가질수 있는 인생관이 집약되여있었다. 그의 말과 같이 사람은 산천에 매여 사는것이 아니라 인정에 매여 산다고 할수있다. 백두밀림과 만주광야에서 항일투사들을 하나의 큰 가정속에 묶어세운것도 역시 정이였고 사랑이였다. 인간이 사는곳에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산천도 빛을 잃는 법이다.

련합동이 우리를 따라가겠다고 적극적으로 간청해나선것은 국제주의정신의 숭고한 표현이기도 하였다.

나도 역시 련합동을 떼여주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원이 정 그렇다면 동무가 하고싶은대로 하라, 난들 왜 동무와 헤여지고싶겠는가, 나는 국적을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동무의 립장이 딱해질가봐 심사숙고할뿐이다, 동무도 알다싶이 지금 중국은 내전전야에 있지 않는가, 우리는 중국혁명을 돕기 위하여 강건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 군정간부들과 투사들을 보내겠다는것을 주보중에게 약속하였다, 조선사람이 중국혁명을 도우려고 할 때 중국사람인 련합동이 자기 나라 혁명을 외면하고 조선으로 간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동무자신도 결코 마음이 편안할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련합동은 중국으로 가는 길을 택하였다. 그는 중국혁명이 승리한 다음 조선에 나가 살겠으니 그때에는 평양미인들중에서 색시감을 꼭 구해달라고 하면서 롱까지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청을 들어줄수 없었다. 그가 련대장이 되여 장개석국민당군대와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다가 전사하였기때문이다. 그 슬픈 소식을 듣고 나는 그를 조선에 데리고나오지 못한데 대하여 후회하였다. 그러나 련합동은 새 중국의 창건을 위한 혁명전쟁에 고귀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중국인민의 기억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사람으로 되였다.

련합동이 조선에 오지 못한 대신 먼 중앙아세아지방에 가있었던 장철구가 전후에 우리를 찾아왔다. 그가 온지 얼마 안되여 백두산시절의 옛 전우들이 한자리에 모이였다. 장철구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장군님, 옛날 백두산시절동무들이 다 모였는데 시간을 내여 와주실수 없겠습니까? 스무해만에 만든 통강냉이죽을 장군님께도 한사발 올리고싶어 그럽니다. 제가 만리타국에서 빈손으로 오다나니 장군님께 올릴것이란 통강냉이죽뿐입니다.》

나는 퍼그나 가고싶었으나 갈 형편이 못되였다.

《고맙지만 나는 지금 지방으로 떠나자던 참입니다. 인민들과 약속한 걸음이여서 어길수가 없으니 후날로 미루어주십시오.》

그날 옛 전우들은 백두산에서 그랬던것처럼 장작불로 끓인 통강냉이죽을 달게 들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나는 백두산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면 장철구에게 통강냉이죽을 쒀달라고 부탁하군하였다.

장철구는 우리 집 대문 맞은편에 있는 둔덕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는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나도 어쩌다 짬을 얻으면 장철구의 집으로 건너가군하였다.

조국에 돌아와 살면서 그가 한 주되는 일은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백두산에서 싸우던 옛 전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것이였다.

장철구는 1982년에 우리곁을 떠났다.

그의 사망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친어머니가 돌아갔을 때처럼 비통한 감정에 휩싸이였다. 그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나를 친동기처럼 극진히 돌봐주었다. 그것은 사실 친어머니의 사랑에 못지 않은 사랑이였다.

우리는 혁명무력건설에서 커다란 공적을 쌓은 투사들과 꼭같이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크게 치르었다.

그 평범한 녀성을 후대들이 길이길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대성산의 혁명렬사릉에는 그의 흉상을 앉혔으며 그를 원형으로 한 예술영화 《만병초》도 만들었다.

우리가 평양상업대학에 장철구의 이름을 달았을 때 우리 인민들은 한사람같이 기뻐하였다. 그들은 평양상업대학에 평범한 작식대원의 이름을 붙인것은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우리 인민의 생활상 편의와 식의주를 위해 로고를 바치는 봉사일군들과 숨은 영웅들을 높이 내세우는 우리식 사회주의제도하에서만이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평양상업대학을 장철구대학이라고 명명할 때 우리는 후대들이 장철구처럼 혁명임무에 충실한 일군이 될것을 바라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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