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만의 전우들과 함께

백두산일대의 여러곳에 밀영들을 꾸려놓고 압록강연안에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고있을 때에 있은 사실가운데서 또하나 인상깊이 회고하게 되는것은 우리 부대를 찾아온 항일련군 제1군 2사동무들과 함께 공동생활, 공동작전을 하면서 전투적우의와 련대를 두터이해가던 일이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국인공산주의무장부대들과의 협동문제는 이미 1935년 3월의 요영구회의에서 진지하게 론의된바가 있었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그후 우리 부대는 북만으로 두번째 원정을 갔고 다른 부대는 신개령을 넘어 남만으로 떠나갔다. 우리의 익측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중국인무장부대들로는 녕안지방에서 활동하던 주보중부대, 밀산지방에서 활동하던 리연록부대, 남만지방에서 활동하던 양정우부대, 주하지방에서 활동하던 조상지부대를 들수 있다. 당시 이 부대들은 제가끔 린접과의 공동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가고있었다.

남만에 진출한 동만의 독립1사는 1935년 8~9월 몽강현 나루훈에서 1군의 전우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그때 우리 부대는 로야령을 다시 넘어 주보중부대와 협동작전을 하고있었다.

남만에 파견되여간 대오속에는 왕청출신의 지휘관들인 오중흡과 김평도 있었다.

남만동무들은 솔대문도 세우고 기발도 띄우고 연탁도 차리고 환영사도 하는 등으로 동만사람들을 굉장히 환영했다고 후날 오중흡도 감격에 겨워 회상하였다. 그 행사가 참으로 장관이였다고 한다. 그날 남만부대를 대표해서 양정우가 환영사를 하고 동만부대를 대표해서 리학충이 답사를 했는데 두사람의 연설은 수백명이 보내는 박수갈채로 하여 자주 중단되였다는것이다. 그 당시의 장면을 재치있게 압축한 그림이 《인민혁명보》라는 신문호외에 실렸던 기억이 난다.

조국안이 사단의 주력을 이끌고 곰의골밀영으로 찾아왔을 때 우리는 전투를 하느라고 밀영에 없었다. 전장에 나가 돌아다니는 우리에게 남만부대의 도착소식을 알려준것은 김주현이 보낸 통신원이였다. 부대의 식의주문제를 맡아보는 김주현은 손님접대를 통이 크게 하느라고 무던히도 마음을 쓰는것 같았다. 우리는 남만에서 온 동무들을 빨리 만나보려고 싸움을 끝내기 바쁘게 밀영으로 돌아섰다.

린접부대의 전우들을 만나는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락으로 되고있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우리모두의 마음속에 항시적으로 자리잡고있던 귀중하고 강렬한 감정이였다. 인가와 멀리 떨어져있는 우리의 산중생활에 어찌 그리운것이 한두가지뿐이였겠는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혈육에 대한 그리움, 학우들에 대한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온갖 문명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그 모든 그리움중에서도 가장 큰 그리움은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이였고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이 그리움때문에 부대가 주민지대에 머무르는 날은 우리모두의 명절이였다.

조국안부대의 전우들이 우리 밀영에 와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와 나의 전우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통신원을 부둥켜안은것도 그와 같은 감정의 표시였다.

우리가 밀영에 돌아오자 남만에서 온 70~80명의 동무들은 병실에서 뛰여나와 겹겹이 우리를 에워쌌다. 우리는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포옹과 악수의 사태속에 파묻히였다. 그때의 그 광경을 딴 사람들이 보았더라면 남만사람들이 진을 치고있는 밀영에 우리가 가서 환영을 받고있는듯한 감을 느끼였을지도 모른다.

이 상봉을 계기로 나와 조국안사장은 처음으로 낯을 익히게 되였다.

조국안은 의지가 굳고 요구성이 강한 군사학교 교관 같아 보이였다. 그것이 조사장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였다. 그런데 며칠동안 침식을 같이하고나서는 인상을 달리하게 되였다. 그는 대단히 다심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였다. 나보다는 나이가 여라문살 더 든 듬직한 사람이였다.

그가 길림성 영길현 태생이고 길림사범학교 출신이라는데서 나는 동향인이라도 만나는것과 같은 친근감을 느끼였다.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다음 길림제1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적도 있었다고 하였다. 그후에는 산동군정대학에도 다니고 베이징에서도 공부하였는데 조국안이 맑스-레닌주의학습에 열중한것은 바로 이 두 학교를 다닐 때였다고 한다. 조국안은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후 1군 1사 7련대 정치위원을 하다가 1934년 가을부터 1군 2사 사장 겸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김사령, 협동하려는 상대가 이런 몰골을 하고 나타났다고 나무라지 마시오. 내가 부대지휘를 잘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것이니 널리 량해하여주시오.》

조국안은 우리의 주위에 겹겹이 서있는 부하들을 가리키면서 열적은 표정을 지어보이였다. 남만에서 온 손님들은 지휘관이건, 대원이건 할것없이 모두가 허름한 여름옷을 입고있었다. 속옷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해진 그 군복들에서는 사단이 걸어온 고난에 찬 장정의 흔적이 그대로 엿보이였다.

《김사령,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린 아직 대원들에게 겨울옷을 입히지 못했습니다.》

조국안은 우리 대원들이 입고있는 푹신한 솜동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그리였다.

《부끄럽다니요, 얼마나 싸움을 많이 하고 고생을 많이 했으면 옷들이 저 지경이 되였겠습니까. 북만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의 우리 부대 모습도 저랬습니다. 2사동무들이 나무라지 않는다면 우리 부대에 동복이 여유가 좀 있는데 그 수량이 얼마나 되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라도 먼저 갈아입히는것이 어떻겠습니까? 모자라는것은 새로 지어 입히기로 하구요.…》

내가 이런 말을 하자 조국안은 기뻐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밤잠을 편히 자겠습니다.》

나는 밀영에서 조사장과 함께 스무날가량 침식을 같이해가며 공동투쟁문제를 가지고 의견교환을 하는 과정에 그와 퍽 친숙해졌다. 우리는 두 부대의 협동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부대관리문제, 대내교양문제, 대렬보충방도문제, 군중공작방법문제, 유격전술문제, 조중 두 나라 혁명의 전도문제는 말할것도 없고 사사로운 가정잡사에 대한 견해까지도 허물없이 나누었다.

내가 조국안의 품성가운데서 매력이라고 본것은 솔직성과 소탈성이였다. 그는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솔직하고 겸허한 사람이였다. 그와의 담화에서는 10년쯤 되는 나이의 격차 같은것은 문제로도 되지 않았다. 조국안은 나이의 차이라든가 직위의 고하 같은것은 념두에도 두지 않고 상대가 일단 마음에 들면 자기의 속마음을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보이는 사람이였다. 조국안사장은 부대가 겪어온 곡절과 그 과정에 당한 인명손실에 대하여 나에게 서슴없이 다 말해주었다.

조국안이 지휘하는 1군 2사는 조선사람들이 반석에서 조직한 반일인민유격대를 모체로 하고 여기에 위만군 반변자들과 산림대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구성된 1사 1련대를 포함시켜 꾸려진 사단이였다. 사단의 기본활동구역은 반석현과 그 주변일대였다.

그런데 부대는 사단으로 편성된이래 군부의 작전계획에 따라 해마다 여름에는 휘발하 북쪽의 강북으로 원정을 갔다가 겨울이면 돌아와서 원정과정에 입은 손실을 메꾸고 력량을 보충해서는 다음해 여름에 다시 강북으로 출정한다는것이였다. 유격활동구역을 확장한다는 명목으로 한해에 한번씩 어김없이 진행해온 정기적인 이동작전이였다. 그런데 이 규칙적인 이동작전이 적들의 주의를 끌게 되였고 고정불변한 활동로정이 그들의 작전지도에 오르게 되였다. 적들이 길목을 지키고있다가 불의에 타격을 가하군하였기때문에 그 부대는 원정때마다 매번 막대한 손실을 당하군하였다.

그해(1936년) 여름에도 사단은 원정과정에 적지 않은 전투인원을 잃었다는것이였다. 조국안은 사단의 일부 력량을 거느리고 동만 1사부대들과의 협동으로 멀리 액목현 삼송까지 갔다왔다고 하였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화전현 회전잔일대에 집결하였다가 무송현을 거쳐 우리한테로 직행하다나니 1군의 후방기지가 있는 몽강현 나루훈에도 들리지 못하였고 그래서 여름옷을 동복으로 갈아입히지도 못했다는것이였다.

고민속에 모대기며 부대앞에 조성된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이리저리 모색하던 조국안은 어느날 무송현 삼도라자하일대에 나가 식량공작을 하다가 돌아온 송무선의 소부대성원들한테서 우리가 진행한 무송현성전투담을 듣게 되였다.

조국안은 그 전투담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남들은 새로 꾸려진 사단을 가지고도 련전련승을 하는데 우리 부대는 어찌하여 매번 고전만 치르어야 하는가, 원정을 갈 때마다 적지 않은 유생력량의 손실을 보면서도 어찌하여 여름이 오면 기계적으로 강북으로 떠나군하는가, 여기에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문제점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지휘관협의회를 열었다는것이다.

협의회에서는 부대의 군사활동에서 결정적전환을 이룩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들이 토의되였는데 그 대책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부대와의 공동작전을 한시바삐 하자는것이였다. 공동작전을 하게 되면 전술과 전법도 발전시킬수 있고 유익한 경험도 축적할수 있다는것이 협의회에서 론의된 공통된 주장이였다. 이 제안의 주창자가 송무선이였고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가 바로 조국안사장자신이였다.

사단은 곧 우리 부대의 소재지를 향해 화전현 대동구를 출발하였다.

짐작컨대 2사의 전우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싸움은 그닥 흥취나게 해본것 같지 않았다. 그들이 겪어온 시련과 고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나니 어쩐지 그 시련이 남의 시련같지 않고 그 고초 역시 남의 고초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세칭 남만유격대라고도 부르는 동북항일련군 제1군은 사실에 있어서 북만에 있는 유격대와 더불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주요한 린접이였다. 우리는 항일전쟁의 첫 시기부터 남만유격대의 성장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였고 그들과의 공동투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유격전쟁에서 단련되고 육성된 동만의 우수한 조선인간부들을 많이 파견하였다. 1932년 여름 남만으로 갈 때 우리가 리홍광, 리동광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그들과의 제휴를 실현하려고 한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과 함께 공동작전은 해보지 못하였다.

남호두회의 이전시기까지만 해도 우리는 주로 북만유격대와의 합작에 치중하였다. 그래서 원정부대를 이끌고 두번이나 북만에 갔었다. 우리는 거기서 공산주의자들과도 공동작전을 하고 반일부대들과도 련합작전을 펼쳤다. 가슴아픈 손실도 있고 희생도 없지 않았으나 린접과의 련합은 큰 생활력을 나타내였다.

우리가 간도에서 유격근거지에 의거하여 싸울 때는 남만보다 북만이 지리적으로 훨씬 더 가까왔던것도 사실이였다. 령 하나만 넘으면 북만이였다.

그러나 우리가 서간도를 새로운 활동무대로 삼고 싸우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기에 와서는 북만보다 남만이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린접이 되였다. 백두산서남부지역에서 우리가 매일같이 울린 총성은 남만부대들에도 인민혁명군과의 협동을 한시바삐 성사시켜야겠다는 강한 의욕을 안겨주었다. 남만부대들과의 련합은 더는 미룰수 없는 절박현안문제로 되였다. 조국안사단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나와 사단급에서 공동작전을 실현한 첫 대상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동만이나 북만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만에서의 유격투쟁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혁명가들에 의하여 개척되고 주도되였다고 할수 있다. 남만에서 활동하고있는 항일련군 제1군 소속의 1, 2, 3사의 민족별 구성을 보면 조선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있었다. 양정우, 위증민, 조국안과 같은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사정치간부들도 역시 조선사람들이였다.

주보중은 1945년 12월 길림의 어느 한 집회에서 한 보고에서 1932년도에 건립된 억센 동만유격대와 1933년에 건립된 반석유격대, 주하유격대, 밀산유격대, 탕원유격대는 모두 조선동지들과 혁명적인 조선군중에 의하여 창건되였는데 그것이 후에 항일련군의 여러 군으로 발전하였으며 제5군에도 적지 않은 우수한 조선동지들이 있었다고 하면서 항일련군 각 군의 군장, 정치부주임으로부터 소대장, 지도원에 이르는 각급 군정간부들중에는 조선동지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반석유격대가 바로 남만유격대, 항일련군 제1군의 전신이다.

반석유격대라는 통속적인 명칭자체가 말하여주고있는바와 같이 남만유격투쟁의 발상지는 반석지구였다.

반석현당위원회가 처음으로 조직되였을 때 그 위원회에 소속된 공산당원은 40명 정도였는데 그들도 모두 조선사람들이였다고 한다. 여기서 리홍광이 10명 안팎의 조선사람들로 첫 무장대를 조직하였는데 그것이 남만유격대의 모체였다. 30여명으로 구성된 남만유격대의 첫 성원들도 모두가 조선사람들이였다. 반석유격근거지안에 조직된 반일회, 부녀회, 소선대, 농민위원회의 책임자들도 대부분이 조선사람들이였다. 남만의 유격운동개척과 그 발전에서 조선사람들은 선구적이며 핵심적이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국안의 사단도 조선사람들이 많은 부대였다. 송무선, 박순일을 비롯한 과반수이상의 지휘관들과 많은 대원들이 조선사람들이였다. 이것은 우리와의 공동작전, 공동투쟁을 보다 쉽게 실현할수 있는 조건으로 되였다.

남만의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우리와의 직접적인 련계밑에 또 때로는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과 행동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군사정치적으로 된타격을 안기였다. 그들은 때때로 압록강을 건너와 국경대안을 기습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는 우리가 동만에서 국내진출을 빈번히 하던 때였다. 인민혁명군의 소부대들은 1935년 1월 한달동안 온성 한개 군만 해도 네번이나 기습하였다. 그 소부대들이 온성군 남산리와 월파동, 세선동과 미산동 일대에 진출하여 적군경들과 교전을 벌렸을 때 서울의 신문들은 유격대가 함북 온성, 훈융 등지를 대거습격하였다고 떠들었다.

1935년 5월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부대가 무산군 삼장면 농사동일대에서 군중정치사업을 진행한 다음 안도현 대마록구부근에서 뒤쫓아오는 일제경찰들과 총격전을 벌려 적들에게 된타격을 주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 격렬해지는 국내진출의 흐름을 타고 압록강대안에서 싸움으로 조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던 리홍광이 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 후창군 동흥진을 습격하였다. 1935년 2월 15일 밤 그가 거느린 1군 1사의 3개 소부대는 경기관총 2정을 앞세우고 동흥진을 포위한 다음 경찰서, 금융조합 등을 습격하여 적들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인민혁명군의 거듭되는 국내진출에 당황망조한 적들은 국경경비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사변들이라고 하면서 아우성을 쳤다.

동흥진습격으로 내외에 전공을 크게 떨치던 남만의 부대들에서 어떻게 되여 조국안사장이 겪는것과 같은 그런 실패가 있을수 있단 말인가? 조국안의 꺼칠한 얼굴을 바라보는 내 심중에서는 어째서인지 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근에 린접과의 공동투쟁을 발전시키는 길만이 우리가 건재할수 있는 유일한 출로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훈을 너무 늦게야 찾아냈지요.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지난 기간 김사령과의 련계를 소홀히 한게 후회됩니다.》

조국안은 모든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한숨을 크게 내쉬고 두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조사장동무, 우리한테서 며칠간 푹 쉬며 원기를 회복하십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질 않습니까. 사람이 신이 아닌 이상 어찌 실수가 없겠습니까. 일시적인 실패를 두려워할건 없습니다.》

나는 사장에게 기아와 혹한과 적의 포위로 온 부대가 전멸의 위기에 처하였던 라자구등판에서의 시련과 촉한폭설과 거듭되는 적의 추격으로 하여 또다시 헤여날수 없는 역경에 처하였다가 귀인들의 도움으로 구원되던 1차 북만원정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상치 않았던 무리손님들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쳤기때문에 잠자리부터가 문제로 되였다. 나는 우리 대원들이 리용하는 귀틀집들을 손님들에게 모조리 내주고 주인들은 우등불을 피워놓고 천막에서 숙영하도록 하라고 지휘관들에게 지시하였다. 우리 대원들은 나의 지시가 떨어지기 바쁘게 재빨리 귀틀집을 내주고 천막도 치고 우등불도 피웠는데 그 기묘하고 날랜 솜씨에 손님들은 다같이 감탄하였다.

우리 대원들중에는 우등불명수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통나무우등불을 피우는 묘리를 발명하여 그것을 전부대에 보급하였다. 그 방법이란 아주 간단하면서도 신비스러운것이였다. 같은 길이로 알맞춤하게 자른 통나무를 밑에는 5~6대, 그우에는 4~5대, 또 그우에는 3~4대씩 피라미드식으로 층을 올리쌓고 2~3대를 올린 마감층우에 불쏘시개감으로 마른나무가치들을 놓고 거기에 불을 다는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등불을 피우게 되면 불이 오래갈뿐아니라 젖은 나무도 마른나무처럼 잘 타들고 불찌가 튀여나지 않았다. 그리고 화력이 세서 좋았다.

2사동무들은 처음에 저런 식으로 해서야 통나무에 불이 달리겠는가고 하면서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피라미드식으로 쌓은 통나무더미가 활활 타오르는것을 보자 신기해서 《야!》, 《야!》 소리까지 질렀다.

조국안도 대원들과 함께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이번에 만강에서 위증민을 만났는데 그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그는 우등불에 시선을 떨군채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이였다.

《뭐라고 했습니까?》

《김사령부대에 가면 우등불을 피우는 법부터 배우라고 했습니다. 불을 피우는 솜씨가 아주 신묘합니다.》

조국안은 우리 부대에 와서 받은 인상가운데서 가장 이채로운것중의 하나가 우등불과 통나무로 지은 귀틀집이라고 하였다. 우등불이 있고 귀틀집만 있으면 깊은 산중이나 무인지경에서도 부대가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다는것을 우리 밀영에 와서 처음으로 깨닫게 되였다고 솔직히 고백하는것이였다.

다음날 나는 귀틀집건설에 솜씨가 있는 몇몇 도끼목수들과 7련대 4중대원들을 시켜 2사동무들이 우리 밀영에서 지낼동안 그들이 옹색해하지 않도록 전용병영을 그날중으로 새로 짓게 하였다. 우리 부대의 집짓기명수들은 통나무를 찍어다 하루사이에 커다란 귀틀집을 번듯하게 지어놓았다. 2사동무들도 신바람이 나서 그들의 일손을 열심히 거들어주었다.

그와 같은 비밀병영들이 백두산일대 밀림속 곳곳에 건설되여있다는 말을 듣고 조국안은 또다시 부러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자기네는 지금까지 이 백두산과 같은 무인지경에서는 부대가 거처할수 없는것으로 생각하고 인가만 찾아다니며 숙식하였다, 산중에서 밀영을 짓고 지낸적은 거의 없다, 전번에 강북에 갔을 때도 집집을 찾아다니며 분숙하였다고 하였다.

남만동무들이 우리 밀영지에서 《자기 집》을 가지게 되자 나는 후방사업을 맡아보고있는 김주현과 김해산을 시켜 그들의 세간살이에 필요한 식량과 작식도구들을 넉넉히 갖춰주고 우리 부대의 후방부 창고에 있는 수십벌의 군복까지 내주게 하였다. 몇벌이 모자라서 군복분배를 만족스럽게 아퀴짓지 못하였지만 박수환이네 재봉대에서 밤을 패가며 돌격작업을 해주었기때문에 나머지사람들도 다음날에는 해진 여름옷을 우등불더미에 던져버릴수 있게 되였다. 야단스러운 덕행은 아니지만 우리는 주인으로서의 례절을 차린셈이였다.

2사동무들을 위하여 목욕과 리발도 조직하였다. 곰의골밀영에는 그 당시 큼직한 목욕가마도 설치되여있었다. 오중흡이네가 횡산목재소를 치고 구해온 소여물을 끓이는 대짜배기가마였는데 그것이 아주 요긴하게 쓰이였다. 손님들을 멀끔하게 닥달해놓은 다음에는 세면도구도 일식으로 안겨주고 담배도 몇갑씩 분배해주었다.

조국안은 우리 사령부에 찾아와 부대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표시하였다. 그는 김사령부대에 빈손으로 찾아와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신세만 지게 되니 미안하기 그지없다고 하면서 이 신세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모르겠노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 같은 목적과 리상을 가지고 싸우는 이웃끼리 신세고 뭐고 할게 있는가, 우리가 만일 조사장네 부대에 손님으로 간다면 사장이 그런 정도의 대접을 안해주겠는가, 남의 부대에 와서 신세를 진다고 생각지 말고 친척집에 왔다고 생각하라, 정 신세를 갚고싶거든 우리 밀영에 머무르는동안 재미나는 인생체험이나 많이 이야기해달라고 하였다.

조국안은 책상물림인 자기에게 무슨 김사령의 흥미를 돋굴만한 요란한 인생체험이 있겠는가고 하면서 좀 색다른 밑천이라는것이 있다면 산동군정대학을 다닐 때에 얻은 지식뿐인데 김사령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라도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그후 그는 우리 지휘관들에게 정규전과 관련된 전술강의를 여러차례에 걸쳐 해주었다. 그 강의가 대단히 심도있었다. 조국안의 강의는 적들이 적용하고있는 정규전의 전술을 보다 깊이 파악하고 그에 대처한 우리 식의 유격전술을 완성하는데 적지 않은 밑천으로 되였다.

그 답례로 우리는 조국안부대의 중대장, 중대정치지도원급 이상의 지휘관들에게 우리가 창조해온 유격전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생동한 실전경험담이 배합되였기때문에 남만에서 온 손님들은 퍼그나 흥미진진해하였다.

나는 2사동무들에게 옹군애민을 특별히 중시할데 대하여 당부하였다. 인민은 우리의 힘이며 지혜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민을 믿고 인민에게서 배우며 인민에게 의거하고 인민을 발동시켜 싸워야 한다, 인민의 덕을 입으려면 인민의 사랑을 받아야 하며 인민의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인민을 사랑하여야 한다, 하루밤 숙영하고 지나버릴 고장이라 하여 인민들에게 함부로 부담을 끼치면 인민은 그런 사람들을 시끄럽게 여길수 있다, 인민의 재물에 손을 대여 해를 끼치게 되면 그 후과는 더욱 치명적인것으로 될수 있다, 인민을 친혈육처럼 사랑하게 되면 인민은 스스로 그런 사람들을 따르게 될것이며 그러한 군사는 틀림없이 백전백승하는 군사로 되는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곰의골밀영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기간 남만동무들은 학습과 회의, 훈련을 비롯한 우리 부대의 일과생활도 여러번 참관하였다. 그들의 반영이 대단히 좋았다. 당신네를 대학생부대라고 하더니 과시 옳은 말이라고 하면서 한결같이 감탄하였다.

조국안은 진심을 담아 나에게 말하였다. 지금까지 자기는 강남으로, 강북으로 부평초처럼 떠다니는데 습관되여 밀영을 꾸리고 거기에 의거하여 자력갱생해나갈 궁리도 하지 못했고 밀영을 중심으로 한 유격활동지역에 지하조직망을 꾸리고 밀영과 지하조직망들로 이루어지는 근거지에 토대하여 투쟁을 확대발전시킬 생각도 못했다고 하였다.

《김사령부대는 어느 모로 보나 군대맛이 납니다. 김사령부대가 련전련승하는 비결을 이제는 알만합니다.》

어느날 저녁 우리 부대의 오락회를 보고나서 조국안은 숲속을 거닐며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남만의 전우들은 우리 부대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직심스럽게 노력하였다. 그들은 일과생활도 우리 식으로 고치고 학습과 훈련도 우리 식으로 하였다. 우리 밀영에 머무르는 기간 그들은 군력도 보강하고 규률도 더 엄격히 세워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제는 두 부대가 협동하여 큰 싸움을 치를 때가 온것 같습니다. 우리 서로 힘을 합쳐 〈동기대토벌〉에 날치는 적들을 좌우에서 족쳐봅시다. 도천리를 비롯해서 장백, 림강현경지대는 군중적지반도 매우 좋습니다. 우리가 조직해놓은 지하혁명조직의 적극적인 방조와 후원도 받을수 있으니 좋은 청년들을 받아들여 인차 대렬보충도 할수 있을것입니다. 우리 두 부대가 서로 손을 튼튼히 잡고 좌우에서 부단한 소모전을 진행하면 전투성과도 크게 올릴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안은 나의 의견에 기꺼이 동의하였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공동작전도 진행하기로 하였다.

2사의 전우들은 우리 밀영을 떠날 때 매우 섭섭해하였다. 우리 부대 지휘관들과 대원들도 다같이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여 눈굽을 적시였다.

작별을 앞두고 조국안은 나에게 이런 청을 하였다.

《김사령, 대원들가운데서 전령병감을 한명 골라주지 않겠습니까?》

나는 북만에 갔을 때와 꼭같은 경우를 당한셈이였다. 그때 주보중도 나에게 조선족출신의 대원들과 지휘관들을 요구했었다. 그 청을 받고 동만부대에서 박락권, 전창철, 안정숙, 박길송을 비롯한 많은 조선족출신 대원들과 지휘관들이 북만부대에 파견되여갔다.

《조사장이 우리 동무들을 그렇게 믿어주니 감사합니다. 조선사람들과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게 아닙니까?》

나의 이러한 물음에 조국안은 《특별한 인연은 없는데 리홍광, 리동광을 알게 된 다음부터 조선동무들에게 매혹되기 시작했습니다. 리홍광이 소본량을 료정냈을 때 우리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간도사람들은 아마 다 모를겁니다.》라고 대답하는것이였다.

소본량이란 류하현일대에서 안도의 리도선이나 무송의 왕가대장과 같이 인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략탈하던 위만군의 악질 고위장교였다.

바로 이 부대를 리홍광이 류하현 삼원포와 고산자, 량수하자 일대에서 녹여냈다는것이다.

리홍광은 소본량을 녹여낸 다음 량수하자부근에서 1군 지휘부가 적의 대병력에 의해 포위되였을 때 대담성과 높은 기지를 발휘하여 양정우를 구출하였다. 그때부터 양정우를 비롯한 1군 간부들은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용맹의 상징으로 총애하였다.

조국안은 리홍광이 전사했을 때 양군장이하 1군의 모든 간부들과 대원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다 말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결심하였다.

《내가 왕청때부터 몹시 사랑해온 기관총수가 한명 있는데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증룡이라고… 소대장인데 기관총수를 겸하고있습니다. 힘이 장사이지요.》

알고보니 강증룡은 조사장과도 구면이고 2사 조직과장 송무선과도 구면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2사에 편입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강증룡은 이 조치를 알게 되자 내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했지만 정작 조국안의 수하에 간 다음에는 2사지휘부 호위기관총 소대장으로서 잘 싸웠다고 한다.

그후 조국안부대는 장백, 림강현경지대에서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였다. 그들은 우리 밀영에서 나가자마자 곧장 도천리로 직행하여 거기서 한주일가량 머무르며 지하조직의 도움으로 대렬도 보충하고 밀영후보지도 탐색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나는 김재수에게 서면으로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발동하여 그들에 대한 후원을 잘해줄데 대하여 지시하였다. 도천리를 비롯한 하강구의 여러 마을들에서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꾸려놓고 원군사업을 활발히 벌리고있었다. 그 조직들이 발동되여 2사를 대단히 성의있게 후원해주었다.

남만부대는 그들의 지지속에서 도천리골안에 밀려든 정안군과의 싸움도 성공적으로 치를수 있었다.

1936년 11월중순의 어느날 인민들로부터 적정보고를 받은 부대지휘부에서는 적들을 야간매복전으로 소멸할 결심을 내리고 날이 어둡기전에 도천리 포대거리골안에 매복진을 쳤다. 매복지점은 마을 막바지에 있는 마지막집으로부터 불과 10여메터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적의 대부대는 마을에 들어서자 집집에서 인민들을 끌어내다가 유격대의 행처를 대라고 강박하였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유격대가 코앞에 매복한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결같이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실로 고마운 인민들이였다. 한순간의 실수로 비밀이 들장나게 되면 촌민전부가 앙갚음을 톡톡히 당할수 있는 위태로운 정황이였지만 그들은 생명을 내걸고 유격대의 행처를 대지 않았다.

인민들의 희생적인 성원을 받았기때문에 2사동무들은 이날의 매복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다음날도 그들은 인민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전날 전투에서 죽은 제놈들의 시체를 실으러 오는 20여대의 자동차편대에 집중사격을 퍼부어 적들을 전률케 하였다.

도천리에서 대렬을 보충하고 전과도 크게 올린 조국안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희샤즈거우(곰의골밀영)에 가서 지낸 덕을 벌써부터 톡톡히 보기 시작했다는것과 이 조국안은 김사령의 신세를 잊을수 없으며 당신들에게 앞으로도 좋은 소식만 보내게 될것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국안은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2사는 림강방향으로 진출하다가 장백현 7도구 목재소근처에서 적들과 불의에 맞다들었는데 이 전투에서 조사장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부대지휘를 당분간 송무선에게 맡기고 경위대와 함께 안전한곳에 떨어져 상처를 치료하였다. 그런데 변절자가 그의 거처를 밀고하였다. 적들은 조국안을 사로잡으려고 사면에서 그의 거처를 포위해왔다. 경위대는 사장을 구출하기 위하여 결사전을 벌리였다. 그러나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도 보람이 없어 조국안은 결국 몸에 여러발의 총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나는 조국안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나에게 하던 말을 상기하였다.

《김사령, 앞으로 조선을 해방하는 결정적인 작전이 시작될 때에는 나를 불러주시오. 그러면 부대를 데리고 김사령을 찾아가리다!》

그것은 그가 나와 작별할 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그러나 조국안은 그 약속을 실현할수 없게 되였다. 그는 조선해방은 물론, 사랑하는 자기 조국 중국의 해방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나는 그것을 못내 분하게 여기였다.

2사 군수부장 박순일이 조사장의 전사에 대한 편지를 가지고 우리 밀영으로 찾아온것은 1937년초였다.

송무선은 사장을 잃은 슬픔과 장차 부대지휘를 어떤 방향에서 했으면 좋을지 몰라 당황해지지 않을수 없게 된 안타까운 심정을 기탄없이 밝히고 자기들에게 활동방향과 관련된 조언을 줄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지휘관을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그들의 처지에 동정을 보내면서 그때로서는 대단히 수더구가 많은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글에서 내가 특별히 강조한것은 서로 단결하고 합심하여 부대앞에 조성된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것과 부대관리에서 집체적지혜를 높이 발양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나는 송무선에게 눈이 많이 내린 조건에서 적들이 쉽게 근접할수 없는 리명수산지에 밀영을 꾸리고 신입대원들에 대한 정치사상사업과 군사훈련에 주력하라는 의견을 준 다음 음력설이 지나 부대를 방문할 의향을 전하였다.

한사람의 평범한 조객으로서 그들을 찾아가 조의를 표시하는것은 생전에 고인과 류다른 친교를 맺어온 전우로서 응당 지켜야 할 도리이고 의무이기도 하였다. 사장을 잃은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곁에 가주는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될수 있었다.

홍두산전투가 있은 다음 나는 약속한대로 그들을 찾아 떠났다. 가는 도중에 도천리전투를 치르고 사문개정부락에서 하루밤 묵으면서 리명수상류와 팔도구방향에 정찰조들을 파견하였다.

2사동무들은 통신원으로부터 우리가 사문개정부락에 와있다는 련락을 받자 저녁도 먹지 않고 밤중으로 달려왔다. 자정도 훨씬 지난 깊은 밤중에 그 동무들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김주현을 불러 손님들에게 대접할 떡국을 끓여놓으라고 지시한 다음 전령병을 데리고 마중나갔다.

내가 먼발치에서 인사를 하자 지휘관들이 달려와 두겹세겹으로 나를 부둥켜안고 돌아갔다. 살가죽이 너무 얼어서 포옹을 할 때마다 볼에 큼직한 얼음덩이가 와닿는것만 같았다.

사장대리임무를 수행하는 송무선은 우리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사령관동지는 우리 부대가 큰 시련을 겪고있을 때 우리에게 힘을 준 은인입니다.》

《조직과장동무, 나는 그런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전에도 그랬지만 그날도 그는 나에게 류다른 친근감을 표시하였다. 내가 조국안을 동향인과 같이 생각했던것처럼 송무선도 나를 동향인과 같이 대해주었다. 그는 오리하자라고 부르는 길림근교의 농촌마을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사람이였다.

오리하자는 한때 리동광이 청년운동을 지도하던 고장이다. 그의 지도밑에 송무선을 비롯한 오리하자지방의 청년들은 혁신청년회를 조직하고 그 주위에 청년들을 집결시키였다. 그 당시 영길현일대에서는 신흥청년회, 전진청년회라는 간판을 가진 청년조직들도 활동하였다. 송무선은 혁신청년회의 조직위원이였다. 1928년 봄에 이 조직은 리동광에 의하여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되였고 후에는 다시 공청으로 개편되였다.

우리가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과 일화배척투쟁을 벌리자 오리하자의 청년조직은 동정시위를 벌리였다.

리동광이 오리하자일대에서 청년운동을 지도하던 시기는 우리가 길림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지도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송무선은 길림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정의부의 일부 간부들을 비난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수고하는 선배들을 비난하는것은 지나친 일이 아닌가고 내가 핀잔하자 그는 오히려 얼굴을 붉히면서 그보다 더한 말을 해도 체면에 어그러질것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어떻게 되여 정의부간부들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송무선은 그 대답으로 1928년 벽두 정의부가 소집한 길림지방회의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아마 이 회의에 송무선도 오리하자대표로 참석했던 모양이였다. 회의에는 쌍하진대표, 강동대표, 신안툰대표들도 참가하였다. 안건은 의무금징수에 관한 문제였다.

그날 고이허는 정의부를 대표하여 과격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관할구역 백성들이 의무금을 잘 납부하지 않기때문에 군대를 동원시켜서라도 받아내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연설이 발단이 되여 주최자측과 회의참가자들사이에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송무선도 오리하자를 대표하여 반박연설을 하였다. 그바람에 그는 회의가 끝난 다음 고이허가 파견한 테로분자들에게 매를 맞고 졸도하였다.

송무선은 왕청문에서 발생하였던 국민부의 테로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오동진이며 현묵관이며 고원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림과 관련된 생활이면 자그마한 세부까지도 다 말하였다. 곰의골밀영에서 함께 지내던 그 나날에야 길림시절을 두고 무슨 이야기인들 나누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여기 사문개정의 농가에서는 나도 송무선도 길림시절을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조국안사장만을 추억하였고 조국안이 없는 사단의 운명과 전망문제에 대해서만 론의하였다.

우리는 2사동무들에게 떡국을 대접하였다. 대식가로 알려진 한 중국인지휘관은 떡국을 세사발이나 먹었다. 그는 오늘에야 진짜설을 쇠는것 같다고 하였다. 고력보자목재소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적의 추격에 걸려 들다보니 점심식사도 하지 못했다는것이다.

우리 부대와 2사의 지휘관들은 새벽에 리명수전투를 위한 련합작전회의를 하였다.

나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적들이 새날의 정오경에는 우리한테 밀려오리라는것을 예감하였다. 우리는 적들의 주목을 우리한테 끌기 위하여 리명수쪽으로 이동한 자취를 일부러 많이 내게 하였다. 이도강쪽에서부터 오는 적들은 리명수골로 들어오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또 2사동무들이 고력보자를 치고 조우전을 하다가 리명수골로 들어왔으니 팔도구방면의 적들도 분명 여기로 들이닥칠수밖에 없었다.

량쪽에서 밀려올 적들을 족칠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매복지점은 리명수의 북수골물이 합치는 합수지점부근이였다. 우리는 이미 리명수골에 들어설 때부터 그 지점을 점찍어두었다.

나는 작전회의참가자들에게 새날에 있을것으로 예견되는 적들의 행동기도를 알려주고 두 부대가 련합하여 큰 규모의 적들을 요정낼수 있는 매복전투를 치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매복전투의 승패는 은밀성을 어떻게 보장하는가에 크게 달려있는것만큼 날이 밝기전에 조반식사를 끝내고 매복지점에 가닿아야 한다는것과 각 부대들이 매복진지를 차지한 다음에는 연기를 피우거나 말소리, 기침소리를 내거나 진지를 리탈하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며 명령없이는 사격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또한 적들에게 들이댈 함화 내용과 방법, 포로취급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뒤이어 각 부대들에 전투임무를 분담하였다. 정찰자료에 의하면 적정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나의 제의에 따라 출발준비를 갖춘 두 부대는 한자리에 모여 조국안사장의 추도모임을 가지였다. 나와 송무선이 각각 추모연설을 하였다.

리명수는 장백현 모두덕 분수령에서 서쪽으로 흘러 팔도구하에 합쳐지는 강이다. 사문개정은 이 강의 상류부근에 위치하고있는 마을이였다. 거기서 강줄기를 따라 15리쯤 내려가면 열대여섯호 될가말가한 순 조선사람들의 화전민마을이 있었다. 그것이 리명수촌이였다.

부대들은 날이 완전히 밝아지기전에 매복진지를 차지하고 전호들을 팠다. 주변의 가파로운 산비탈들은 깊은 눈에 뒤덮였고 리명수에는 얼음이 깔려있었다.

강추위로 뼈속까지 얼어드는 날이였지만 전투원들의 사기는 아주 높았다. 우리가 지휘한 전투는 언제나 승전한다는 소문을 들어온 남만동무들은 출전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이번 싸움은 대승할 싸움이라고 장담하였다.

나는 주력량을 합수목근처의 산등성이에 배치하였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새로 만든 밭들이 있는 등성이인데 골짜기를 향하여 내려쏘기에 편리한 위치였다. 고지의 중심에 나의 지휘처를 정하고 앞에 우리의 7련대와 경위중대를, 좌측에 8련대를, 우측에 2사전투원들을 매복시켰다. 골짜기 건너편의 나지막한 산등성이에는 륙칠십명의 용사들로 구성한 돌격대를 매복시켰다. 그 두 산과 마주서있는 높다란 건너편 산은 밀림으로 뒤덮인 험산이여서 그쪽으로는 우리한테서 얻어맞은 적들이 도망칠수 없게 되여있었다. 우리가 차지하고있는 매복구역 건너편은 100메터가량의 폭을 가진 평지로 되여있었는데 그곳은 적들을 전멸시키는데 적합한 집중사격구역이였다.

나는 이도강쪽에서 오는 적과 팔도구쪽에서 오는 적들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하여 량쪽방향에 각각 1개 분대가량 되는 방차대를 파견하였다. 방차대들에서 보내오는 수기신호를 받기 위한 받을초는 우리의 뒤산에 배치하였다. 전투원들은 전호속에 엎드려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점심때가 지나도록 적들은 얼씬하지 않았다.

《놈들이 안오는게 아닙니까?》

지루해난 백학림이 이발을 덜덜 맞쪼으며 귀속말로 물었다.

《너무 조급해마오. 이제 꼭 오게 될테니까.》

나도 사실은 이발을 맞쪼으며 온몸을 떨었다.

전투원들은 눈속에 엎드린채 꽁꽁 언 강낭떡을 꺼내 먹었다. 나는 백학림이 자기 배낭에서 꺼내주는 언 강낭떡 한개로 점심을 굼땠다. 날씨가 어찌나 맵짰던지 쇠붙이에 손이 닿으면 떡떡 얼어붙군하였다.

적들은 오후 2시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2월의 강추위에 한시간도 아니고 8~9시간이나 눈속에 엎드려있다는것은 조련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그보다 더한 간난신고도 참고 견딜줄 알아야 하였다. 여기서 치명상을 받게 되면 적들도 더는 우리에게 함부로 달려들려고 하지 않을것이였다.

오후 5시경에야 팔도구방향의 동남쪽고지에 나가있는 방차대로부터 적들이 나타났다는 신호가 왔다.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위만군장교가 인솔하는 척후대가 앞장에 서고 그뒤로 일본지도관이 거느린 기본대렬이 느릿느릿 따라오고있었다.

나는 전령병을 보내여 선두척후대는 지나보내고 본대의 뒤꼬리가 우리 매복권안에 들어선 다음에 사격명령을 내릴터이니 함부로 사격해서는 안된다는것을 다시한번 각 부대에 전달하게 하였다.

적들의 출현과 때를 같이하여 날씨가 급작스레 사나와졌다.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시꺼멓게 뒤덮이였다. 눈만 없었다면 음산한 저녁대지는 캄캄한 어둠속에 파묻혔을것이다. 차디찬 강풍이 북쪽으로부터 우리를 후려갈기였다. 눈보라때문에 적들은 눈도 바로 뜨지 못하였다.

나는 적의 기본대렬이 우리의 매복권안에 완전히 들어서기 바쁘게 신호총을 쏘았다. 400여자루의 보총과 여러정의 기관총들이 마침내 분노를 터뜨리였다. 사격에 이어 한익수에게 돌격나팔을 불게 하였다. 적들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고말았다.

전과는 컸다. 적 100여명을 살상하고 2개 중대를 투항시켰으며 3정의 경기관총을 비롯하여 150여정의 보총, 많은 탄알을 로획하였다. 살아서 도망칠수 있은것은 선두의 척후병들뿐이였다.

팔도구쪽에서 온 적들을 한창 족쳐대고있을 때 이도강쪽에서 온 적들은 골짜기에서 울려오는 요란한 총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방차대성원들이 나가있는 산코숭이앞에 멈춰서고말았다. 우리의 방차대원들은 우물쭈물하면서 오도가도 못하고있는 적의 무리를 향하여 몰사격을 퍼부었다. 적들은 살상된 동료들을 그냥 내버린채 황황히 도망치고말았다.

나는 사문개정마을의 가가호호에 적의 부상병들을 업어들여다 치료도 해주고 식사도 시킨 다음 성한 포로들과 함께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우리에게 여섯번이나 붙잡혀 여섯자루의 총을 바쳤으니 자기는 유격대를 도와준 공로자취급을 받아 마땅하다고 한 위만군포로의 유명한 일화가 생겨난것이 바로 그때였다고 생각된다.

리명수전투로 인하여 팔도구방면의 적들은 《동기대토벌》의 주력을 잃게 되였다. 유격대를 전멸시킨다고 호언장담하던 적들의 위세는 땅바닥에 구겨박히고 《동기대토벌》놀음은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결국 우리는 리명수전투의 승리로써 적들의 《대토벌》작전에 종지부를 찍어놓은셈이였다. 그런 의미에서 리명수전투는 각별한 감회를 자아내는 전투였다. 2사동무들은 사기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나는 그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사단의 장래활동에 필요한 조언도 주고 그들이 도천리와 천상수 일대 조국광복회 조직들의 방조밑에 안전하게 활동해나갈수 있는 대책도 토론해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일러준대로 도천리골안에 깊숙이 들어가 밀영을 건설하고 따스한 계절이 올 때까지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을 하면서 조용히 지냈다. 도천리지하조직에서는 그때 그들에게 광목과 미투리와 큰 버선을 비롯한 수많은 원호물자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내가 남만동무들을 다시 만난것은 햇풀이 돋기 시작한 5월중순경 리명수마을에서 서쪽으로 좀 떨어진 어느 한 산등성이에서였다. 밀영에서 편안히 지낸 2사동무들은 혈색들이 좋았다.

그런데 나를 몹시 딱하게 한것은 그 부대에 속해있는 조선동무들이 좀처럼 내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것이였다. 그들은 나를 찾아와 우리 부대에 편입하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니 허락해달라고 성화를 먹이였다.

나는 그들을 설복하느라고 목이 쉴 지경이였다.

우리가 중국동무들과 련군을 편성해가지고 싸우는것은 순수한 조선사람들로만 부대를 꾸리고 싸우는것보다 중국인민들의 지지와 방조를 받는데 더 유리하다는것을 고려했기때문이다, 동무네 부대는 1군에 속하지만 조선사람이 절반나마 되는것만큼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별동부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라, 그런데 모두가 우리한테로만 오겠다고 하면 사면팔방의 적들과는 도대체 누가 싸우겠는가, 남만쪽의 적들은 동무네를 비롯한 1군동무들이 족치고 동만쪽의 적들은 4사동무들이 족치고 북만쪽의 적들은 북만동무들이 족치고 이렇게 해야만 우리도 백두산일대의 적들과 잘 싸울수 있다, 동무들이 사처에서 적들을 붙들어두지 않으면 그 적들이 몽땅 주력부대를 괴멸시키자고 벌떼처럼 덤벼들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게 육성한 우수한 군정간부들을 북만부대들에도 보내고 남만부대들에도 보내주고있는데 동무들은 모두 우리곁에만 와있겠다니 딱하지 않는가, 나라를 찾겠다고 부모처자곁에서도 떠나온 사람들인데 항일대전의 승리를 위하여 사적감정을 초월하자,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은 다음에는 우리모두가 한군데 모여살면서 옛말을 해보자고 설복하였다.

사실 나는 남만동지들을 돕기 위하여 그들이 요구할 때마다 사람들을 보내주군하였다. 그런 일은 한두번만 있지 않았다.

우리가 남만에 보낸 사람들은 하나같이 끌끌한 남아대장부들이였다. 리동광과 리민환도 경력을 따지면 동만에서 선발되여 남만으로 간 사람들이였다. 1937년 3월에 조국안의 후임으로 사장의 중임을 맡은 조아범이 너무나 욕심을 내기때문에 나는 전령병 김택만이도 그에게 붙여주었다.

1군 총무처장이였던 손용호는 길림사범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우리가 조직한 류길학우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학우였다. 그는 음악과 체육에 특별한 소질을 가지고있는 동무였다. 체격이 좋고 용모도 준수하여 길림바닥의 처녀들속에서 인기가 대단하였다. 그는 사범학교의 높이뛰기선수였으며 바이올린연주가였다. 손용호는 그후 공청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여 신의주감옥에서 얼마동안 시련을 겪었다. 출옥후 영길현 오리하자에서 농촌혁명화에 힘쓰다가 이듬해 남만 반석현에 가서 현당기관지인 《반일청년일보》의 주필로 있었다. 1937년 겨울부터 그는 1군지휘부에서 총무처장으로 사업하였다. 나는 1938년 겨울 남패자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손용호는 그때 몹시 반가와하면서 우리와 함께 있고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가 서너달후에 푸르허근처의 어느 한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받았다.

남만유격부대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의 이웃에서 활동한 1군 2사에 더 많이 돌려졌다. 그들은 보천보전투승리를 경축하는 군민련환모임때에도 우리를 찾아와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간삼봉전투는 우리 주력부대와 4사, 1군 2사의 련합으로 진행된 전투였다.

1군 2사와 우리 부대는 몇해동안 백두산서남부일대에서 공동투쟁을 잘하였다. 1930년대 후반기 적들의 경찰문건이나 신문자료들에서 나의 이름과 조국안의 이름이 나란히 놓이는 경우를 이따금 보게 되는데 이것은 조중 두 나라 혁명가들이 어깨를 겯고 공동투쟁, 공동작전의 어려운 길을 개척해온 산 력사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나는 지금도 우리의 혁명투쟁이 승승장구하던 그 나날들을 회상할 때면 1군 2사의 전우들을 추억하군한다. 조국안, 송무선, 박순일… 이름만 불러도 목이 메는 그 얼굴들이 눈보라를 헤치며 내 눈앞에 정답게 안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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