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쁨과 슬픔

반일인민유격대의 남만진출과 때를 같이하여 우사령부대에서도 200명으로 편성된 구분대를 통화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 구분대의 인솔자는 류본초선생이였다. 우사령이 자기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류본초참모장을 남만으로 보낸 목적은 당취오자위군과의 합작을 실현하며 자위군을 통하여 무장을 해결하려는데 있었다. 그 당시 우사령은 무기의 부족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료녕성에 본거지를 둔 남만지방의 자위군은 우사령의 구국군부대보다 좋은 무기를 많이 가지고있었다.

우리가 원정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소사하에 찾아온 류본초선생은 자기들도 남만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목적지도 같으니 이왕이면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자기네와 동행하면 당취오와도 만나게 해줄수 있고 당취오와 련계를 가지면 무기도 해결할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나는 류본초선생의 제의를 쾌히 받아들이였다. 사실 우리한테도 무기는 얼마든지 필요하였다. 구국군과 함께 남만으로 가게 되면 로상에서 중국인반일부대들과 조우하여도 충돌을 피하고 우리의 안전을 담보할수 있었다.

당취오는 원래 동변도 성방군 1련대장으로 있던 사람이였는데 9.18사변후 항일구국표방하는 료녕민중자위군을 조직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만여명정도의 병력이 있었다. 당취오의 자위군은 통화지방에 활동거점을 두고 남만일대를 중심으로 심양주둔 관동군부대와 힘에 부친 싸움을 하고있었다. 그 과정에 그들은 국민부산하의 조선혁명군 부대들과도 련합작전을 조직하군하였다.

조직초기의 료녕민중자위군은 기세도 높았고 전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대세가 일본측에 유리하게 기울어지고 난관이 중첩되자 당취오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국제련맹이 릿든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하여 9.18사변의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지만 일본군은 이에 별로 큰 구속을 받지 않고 계속적으로 전과를 확대해나갔다. 1932년 정초에 금주를 점령한 일제는 그해 1월 28일 음모적이고 강도적인 방법으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그들은 5명의 일본승려가 상해 홍구에서 구타를 당한것을 구실로 삼아 중국의 공장과 상점들을 파괴하고 경찰들을 살해하였으며 뒤이어 해군륙전대를 동원하여 상해시에 대한 대규모적인 무장공격을 개시하였다. 일본이 상해사변을 도발한 목적은 이 도시를 중국본토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만들려는데 있었다. 일본군부의 우두머리들은 전격전의 방법으로 상해를 점령하게 되면 그 전과를 타고 중국의 전 령토를 일거에 삼킬수 있으리라는 망상을 품고있었다.

상해의 군인들과 인민들은 즉시에 영웅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일본침략군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장개석과 왕정위를 수위로 하는 국민당반동정부의 배신적인 매국정책으로 하여 항전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상해사변은 굴욕적이고 반혁명적인 《송호협정》을 맺는것으로 막을 내리였다.

상해항전의 실패는 구국군과 자위군을 비롯하여 반일을 지향하는 모든 애국적군인들과 인민들의 사기를 저락시키였다.

상해사변과 《송호협정》체결과정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국민당정부의 반동적인 매국배족정책은 항일구국력량앞에 가로놓인 가장 큰 장애로 되였다. 국민당반동집단은 상해항전을 지원하지 않았을뿐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고 범죄시하였다. 장개석과 왕정위는 제19로군에 대한 군수물자보급을 의도적으로 중지하고 전국각지에서 상해로 보내오는 원호금을 압수하면서도 해군에 비밀지령을 내려 일본측에 식량과 채소를 공급하는 수치스러운 반역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국민당반동들은 자신들이 항일을 하지 않았을뿐아니라 인민들도 항일을 못하게 하였다. 그자들의 총구는 언제 어데서나 항일을 하는 사람들의 심장을 겨누고있었다. 항일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례외없이 국민당의 테로를 당하든가 그들의 교수대에 올라야 하였다.

장개석은 일찌기 중국이 제국주의의 손에 망한다면 우리들은 망국노는 될지언정 그대로 살아갈수는 있을것이지만 만일 공산당의 손에 망한다면 노예로조차 남아있을수 없을것이라는 망발을 하였다. 이것은 장개석과 그를 두목으로 하는 반동집단이 외래제국주의의 침략세력보다 인민혁명을 더 두려워하고 경계하였으며 그들자신이 제국주의자들의 철저한 노복이고 앞잡이였다는것을 증명해준다.

장개석의 매국행위는 국민당과 이러저러하게 련결되여있고 또 구군벌과 관료, 정객들의 리해관계를 대변하고있는 구국군과 자위군의 상층에 사상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였다.

확대일로의 궤도를 달리는 일본군의 위력도 구국군의 사기를 저락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되였다. 릿든을 필두로 하는 국제련맹조사단은 자기의 보고서에서 만주를 일본의 독점하에 두지 않고 국제공동관리하에 둘데 대한 제의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 제의를 무시해버리고 전투행동을 계속하였다. 일본군의 무력은 점차 산해관과 북부만주방향에로 육박하였다. 그들은 북만의 넓은 지역을 차례차례로 점령하면서 열하방면으로 력량을 집중하였다.

일제는 북만진공을 앞두고 관동군의 특무기관들을 발동하여 동북군을 정치적으로 와해시키며 특무들을 통한 매수, 음모활동으로 북만 동북군의 각 려단이 사분오렬되여 서로 의심하거나 권력쟁탈에 몰두하게 하였다. 적들은 마점산을 칠 때에는 소병문을 끌어당기였고 마점산이 패한 다음에는 소병문을 일격에 소멸하는 식으로 북만의 반일부대들을 손쉽게 각개격파하였다.

북부만주일대에서의 반일부대의 와해과정은 동만의 왕덕림이나 남만의 당취오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당취오는 인민들의 혁명적기세에 편승하여 항일구국의 기발을 들었으나 대담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리지 않고 대세를 봐가면서 조심조심 행동하고있었다.

그 당시 정초, 리두, 형점청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반일부대의 두령들은 적극적으로 항일을 해서는 안되며 국제련맹에 의거해야만이 만사를 해결할수 있다는 망상에 포로되여있었다. 그들은 지어 《장학량이 일본군에 저항하지 않는것은 공산비적을 숙청하기 위해서이다. 공산비적을 먼저 숙청해야 일본군도 쫓아낼수 있다. 공산당이 일본놈들을 끌어들였다.》는 엉터리없는 주장까지 하였다.

우리가 남만으로 떠나던 그해 봄에 주보중이 자위군에 잡힌적이 있었다. 주보증은 그때 자기를 체포한 지휘관들에게 당신네 부대를 왜 자위군이라고 칭하였는가고 문의하였다.

질문을 받은 자위군의 우두머리들은 자위란 자기 력량을 보위한다는 말이다, 자기 력량을 보존하기도 힘든데 무슨 힘이 있어서 일본놈을 치겠는가, 일본놈들이 우리를 치지 않으면 우리도 치지 않는다, 자위란 이런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위군의 사고방식이였고 정치적견해였다. 신심을 잃고 동요상태에 빠진 당취오는 산하부대들을 통솔하지 않고 방임상태에 두다싶이하였다. 이런 때에 우사령이 류본초를 자위군본부에 파견한것은 시기적절한 조치였다고 말할수 있다.

첫날 행군로정을 짧게 잡고 6월 초사흗날 오후에 소사하를 떠난 원정대는 사하(하소사하)농민협회 회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도강을 건너 류가분방이라는 마을로 행군해갔다. 우리는 여기서 하루밤 묵으면서 정치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이 마을이 류가분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한것은 류가성을 가진 사람이 제분소를 차려놓은 때부터였다고 한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나서 넓다란 제분소앞마당에 우등불을 피웠다.

유격대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린접부락의 사람들까지 류가분방으로 찾아왔다. 마을의 조직책임자들은 이집저집에서 멍석도 모아오고 이웃마을손님들이 걸터앉을 강대며 서까래도 끌어왔다. 제분소마당에 모인 군중은 수백명 되였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우등불두리에 빽빽이 앉아 자정이 넘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밤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다. 한평생 인민들속에 들어가 조직사업도 많이 하고 정치사업도 많이 해왔지만 그때처럼 무더기질문을 받아본 날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목이 갈려서 말을 할수 없을 정도로 밤새도록 군중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되였다.

처음에 사람들이 나에게 물은것은 유격대가 어떤 군대이며 유격대와 독립군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는것이였다. 그들도 소사하에서 한달전에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직된 사실을 알고있었다. 단순하고 평범한 질문같지만 거기에는 새로 탄생한 무장력에 대한 기대와 그 힘에 대한 반신반의의 감정이 깔려있었다. 독립군도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군대이고 반일인민유격대도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군대라면 복잡하게 유격대라는것을 따로 내올 필요는 무엇인가? 독립군도 어쩌지 못하는 일본군대를 유격대를 새롭게 만들어낸다고 해서 꺼꾸러뜨릴 승산은 있는가? 승산이 있다면 그 담보는 무엇인가? 독립군에게서 시달림도 많이 받고 독립군의 실패에서 암담절망감도 수없이 맛보아온 류가분방의 군중들이 알고싶어하는것은 요컨대 이런것이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될수록 쉽고 간명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반일인민유격대란 별다른 군대가 아니다. 말그대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싸우는 인민의 군대이다. 이 군대는 바로 여러분들과 같은 로동자, 농민의 자식들과 청년학생, 지식인들로써 무어졌다. 반일인민유격대의 사명은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청산하고 조선민족의 독립과 사회적해방을 이룩하는데 있다.

반일인민유격대는 의병과도 다르고 독립군과도 다른 새형의 군대이다. 독립군의 지도사상이 부르죠아민족주의라면 항일유격대의 지도사상은 공산주의사상이다. 공산주의사상이란 쉽게 말하여 빈부귀천의 차별을 모르고 만사람이 다같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수 있는 세상을 세운다는 사상을 말한다.

돈있는 사람들이 주인된 사회를 세우는것이 독립군의 리상이라면 근로하는 사람이 주인된 세상을 건설하는것이 반일인민유격대의 리상이다. 독립군이 여러분과 같은 평백성들을 광복운동의 협조자로, 동정자로 보아왔다면 우리는 당신들을 항일혁명의 담당자로, 주인으로 보고있다. 독립군이 외부세력에 많은 기대를 걸고 그들의 힘을 빌어 나라의 해방을 이룩하려고 했다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힘을 더 믿고 그 힘으로 나라를 찾으려고 한다.

의병의 뒤를 이어 독립군이 그동안 만주산야와 조국의 북부지대에서 수십년동안 일본침략자들과 혈투를 벌리느라고 수고를 많이 한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립군의 군세는 점점 허약해지고 지금은 그 존립마저 위기에 처해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였다. 독립군이 이루지 못한 조국광복의 성업을 우리가 완수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조직한것이 바로 반일인민유격대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마을의 한 청년이 반일인민유격대의 병력이 몇천명쯤 되는가고 물었다.

나는 아직 초기여서 몇천명까지는 되지 않고 수백명 된다, 지금은 유격대가 수적으로 많지 않지만 조만간에 수천수만명으로 불어날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청년은 내 말을 듣고나서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고 물었다.

나는 특별한 절차나 격식은 없다, 싸울 각오가 되여있는 청년들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수 있다, 그러나 육체적준비는 좋아야 한다, 입대는 혁명조직의 추천을 받는 방법으로 할수도 있고 부대를 찾아와 직접 청원하는 방법으로 할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있던 여러명의 마을청년들이 즉석에서 나를 에워싸고 우리가 입대를 청원하면 이자리에서 받아주겠는가고 물었다.

우리로서는 사실 큰 횡재를 하는것이나 다름없었다.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입대하더라도 당분간은 무기가 없이 지내야 하겠습니다. 무기는 전투마당에서 자체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도 입대할 용의가 있다면 우리는 그 청원을 이자리에서 그대로 수락하겠습니다.》

청년들은 무기가 없어도 좋으니 유격대를 따라가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렇게 되여 우리는 여러명의 마을청년들을 신대원으로 흡수하게 되였다. 그것은 류가분방이 청소한 우리 유격대에 준 예상치 않았던 선물이였다. 우리는 이 선물앞에서 모두가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혁명동지 한사람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두사람, 세사람의 동지를 잃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었던 당시의 형편에서 열명 가까운 청년들을 단꺼번에 대오에 받아들였으니 그때의 우리 심정을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생눈을 움켜먹으며 풍찬로숙의 어려운 길은 걷는 혁명가들에게는 부르죠아지나 시정배들이 맛보지 못하는 고유한 향락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전우를 얻게 될 때에 느끼는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정신적충만감이다. 어제까지는 생면부지였던 사람들이 사선을 헤치고 입대를 청원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총을 메워주면서 속세에서는 도저히 맛볼수 없는 참으로 숭엄하고 장쾌한 희열을 느끼였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식의 기쁨이고 향락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날밤 유격대원들은 신입대원들을 축하하는 오락회를 열었다. 나와 차광수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이처럼 품을 얼마 들이지 않고서도 큰 소득을 얻을수 있은것은 9.18사변직후의 민심이 그만큼 항일유격대에로 크게 쏠리고있었던데 기인된다. 일본이 만주까지 먹었으니 조선사람은 여기서도 마음놓고 살수가 없게 됐다. 만주에서도 기를 펴고 살지 못할바에는 죽든살든 한번 결판을 내보자는것이 그 당시 조선청년들의 공통된 심리였다.

우리는 밤새껏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이 다 되여서야 우등불곁에서 멍석과 삿자리를 펴고 유격대조직후 처음으로 되는 로숙을 하였다.

조선사람이 사는 동네에 와서 유격대가 로숙을 하면 류가분방백성들의 체면은 어떻게 되는가고 하면서 마을사람들이 막 야단을 하였으나 우리는 조직책임자들이 알선해주겠다는 농가들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로천에서 하루밤을 지냈다. 인민의 리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마을사람들의 청을 사양한것도 사실이지만 혁명가는 따뜻한 아래목의 보금자리보다 거치른 잠자리를 더 응당한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일종의 랑만적인 기분이 우리로 하여금 마을사람들의 성의를 마다하게 하였다고 본다.

우리는 남만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도 이 마을에서 하루밤 숙영하였다. 그때 우리가 숙영한 곳은 려수문이라는 중국로인의 집앞이였다. 그 집앞에 큰 감자굴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그 감자굴자리에 곡초를 엮어 바자를 두르고 그안에서 불을 피우며 하루밤을 지냈다.

우리가 자기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한지에서 밥도 해먹고 잠자리를 청하는것을 본 려수문로인은 나를 찾아와 부대가 다 움직이기 곤난하면 대장만이라도 자기 방에 가서 류숙하자고 권유하였다.

《성주선생이 나하구 생판 모르는 남남이라면 몰라도 우리야 구안도에 있을적부터 서로 낯을 익혀온 사이가 아닙니까.》

로인은 나까지 그렇게 에누리를 하지 않을줄은 몰랐노라고 하면서 한참이나 섭섭한 소리를 하였다.

사실 나와 그 로인은 서로가 구면이였다. 우리 집 식구들이 마춘욱의 객주집 웃방에 거처하고있을 때 나는 거기서 려수문로인을 두세번 본적이 있었다. 그때 로인이 보여준 활달하면서도 열정적인 기품이 내 인상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로인은 항일을 하려고 천리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군대가 한지에서 숙식을 하는데 자기가 어떻게 가벼운 마음으로 이불속에 기여들어가겠는가고 하면서 밤이 깊도록 우리의 말동무를 해주었다.

류가분방사람들이 대체로 그런것처럼 그도 시국에 민감하였다. 그는 9.18사변후 일본군대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조작해냈다는것과 장춘을 신경이라 고쳐 수도로 정하고 거기에 부의를 데려다 앉혔다는것까지도 다 알고있었다.

로인과의 대화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이다.

로인은 말하기를 조선의 렬사들가운데서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위인은 안중근이라고 하였다.

《안중근선생이야말로 동양의 거인이지요. 오죽하면 원세개대총통까지 안의사의 의거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겠나요.》

로인의 이 말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격살한 다음부터 만주지방의 중국인들속에서 그는 전설적인 존재로 알려지게 되였다. 어떤 중국인유지들은 집에 안중근의 화상까지 걸어놓고 신주처럼 모시였다.

《로인님은 조선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되여 안중근을 그리도 잘 아십니까?》

려수문이 안중근에 대하여 너무도 큰 애정을 가지고 말하므로 나는 슬며시 이렇게 물었다.

《만주에 사는 사람치고 안중근을 모르는이가 있습니까. 오죽하면 할빈역에다가 안렬사동상을 세우자고 말한 사람까지 있었겠나요. 나는 지금도 자식들에게 늘 말하군 합니다. 혁명가가 되겠거든 손중산선생과 같은 혁명가가 되구 대장부가 되겠거든 안중근과 같은 대장부가 되라구 말이웨다. 김대장님, 이왕이면 부대를 무은바엔 관동군사령관과 같은 거물들을 요정내지 못합니까?》

나는 로인의 순박한 말을 듣고 미소를 짓지 않을수 없었다.

《그까짓 관동군사령관이나 하나 없애버려서는 무엇하겠습니까. 이등박문을 죽이면 새로운 이등박문이 나오듯이 혼죠를 죽이면 새로운 혼죠가 또 나올게 아닙니까. 테로로써는 큰 일을 치지 못합니다.》

《그럼 대장어른은 어떤 방식으로 싸울 작정입니까?》

《관동군이 십만이 된다니 그 십만을 상대로 싸울 작정입니다.》

려수문로인은 그 말을 듣더니 몹시 감격하여 내 손을 꽉 그러잡고 놓지 않았다.

《김대장, 참으로 훌륭하시오. 대장어른이야말로 안중근과 같은분이 아니겠소.》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나는 안중근이처럼 훌륭할수는 없지만 망국노의 생활은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다음날 유격대가 마을을 떠날 때 려수문은 우리와 헤여지는것이 아쉬워서 멀리까지 대오를 바래주었다. 나는 류가분방을 생각 할 때마다 려수문로인을 만났던 때의 일을 뜨겁게 되새겨본다.

류가분방을 떠난 우리 부대는 이도백하 부근에서 다시 하루밤 숙영하고 도로를 따라 행군을 계속하다가 무송에서 안도방향으로 이동하는 일제침략군의 척후대와 불시에 조우하였다. 우리는 행군할 때마다 대오의 앞장에 3~4명의 인원으로 편성된 척후대를 배치하군 하였는데 그 척후대와 일본군의 경계구분대사이에 화력전이 벌어지고있었다.

솔직히 말하여 우리는 그때 몹시 당황하였다. 유격대가 창건된후 처음으로 당하는 조우전이였고 또 그것도 무적을 자랑하는 일본군대와의 첫 싸움이였기때문이다. 소영자령에서는 우리가 사전에 면밀히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매복전으로 적들에게 선제타격을 가하였지만 여기서는 문제가 달랐다. 상대는 어수룩한 위만군이 아니라 실전경험이 풍부한 영악하고 민첩한 일본군이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단한번의 전투경험밖에 없는 초학도들이였다.

우리로 말하면 아직은 조우전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때였다.

원정의 목적으로 보나 유격전의 기본원칙으로 보아도 장거리행군과정에는 될수록 아군의 행동에 불리한 영향을 줄수있는 무익한 충돌을 피하는것이 좋았다. 옛날 병서에서도 《피실격허》라고 하였다. 강한 적은 피하고 약한 적은 치라는 말이다.

그런즉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전부대가 긴장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주시하고있었다. 나의 결심을 기다리는것이였다. 나는 적의 기본력량이 들이닥치기전에 유리한 지형을 먼저 차지하는것이 전투의 주도권을 틀어쥘수 있는 최선의 방도라는것을 간파하고 척후대가 총격전을 벌리고있는 고지 북쪽릉선으로 부대를 재빨리 이동시켰다. 그 다음 일부 력량을 도로 남쪽으로 진출시켰다. 부대는 도로의 남쪽과 북쪽에서 일제사격으로 척후대를 족쳤다.

적의 행군종대가 미구에 장구류들을 잔뜩 짊어지고 신작로로 달려오고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한개중대는 잘되였다. 적들은 척후가 녹아났다는것을 알고 우리를 포위하려 하였다.

나는 신호총을 울리기전에는 절대로 사격을 시작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고 적들이 화력권안에 들어올 순간을 기다리면서 전방을 감시하였다. 우리에게는 탄알이 얼마 없었다.

내가 신호총을 쏘자 전부대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나는 사방으로 터져오르는 총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대원들의 정신상태를 가늠하려고 애썼다. 그 개개의 총성에는 흥분되고 앙양된 상태에 있으면서도 분별을 잃고 헤덤비는 전사들의 기분이 그대로 반영되고있었다.

적들은 무리죽음을 당하면서도 력량상 우세를 믿고 신속히 전투서렬을 갖추면서 아군이 차지하고있는 진지량측으로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나는 도로 북쪽과 남쪽에 배치된 주력가운데서 일부 력량을 떼내여 아군의 량익측으로 재빨리 기동시키였다. 대원들은 진지를 차지하기 바쁘게 민속한 저격전으로 익측의 적들을 모조리 소멸하였다.

그러나 적의 주력은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이악하고 끈덕지게 아군이 차지한 계선으로 그냥 기여들었다. 우리가 릉선아래로 바위돌까지 굴리면서 완강하게 진지를 고수하였지만 적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을 계속하였다.

적의 공격이 조금 약화된 기회를 타서 나는 전부대에 돌격명령을 내리였다. 수림을 뒤흔드는 나팔소리와 함께 릉선을 번개같이 치달아내린 유격대원들은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여 사정없이 족쳐버리였다. 몇명의 도주자를 제외한 적의 한개 중대력량은 우리의 돌격앞에서 전멸을 모면할수가 없었다. 김일룡은 육박전을 하면서도 적이 쓰러지는것을 보면 《또 한놈 넘어간다!》하고 환성을 올리군하였다.

우리 유격대에서도 여러명의 전사자가 났다.

이름모를 산등성이에 전우들을 안장한 우리는 그들의 무덤앞에서 영결식을 가지였다. 나는 군모를 벗어쥐고 오열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영결사를 하였다. 그때 무슨 말을 했던지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는다. 다만 말을 끝내고 고개를 쳐들었을 때 대원들의 어깨가 세차게 떨리던 광경과 대오의 길이가 류가분방을 떠날 때보다 퍼그나 짧아진것을 보고 온몸에 전률을 느끼던 일만이 기억될뿐이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다음 나는 대렬에 다시 출발구령을 주었다. 모두가 길가에 정렬하였는데 차광수만은 무덤에 엎드려있었다. 주인없는 무덤, 칠성판 하나 깔아주지 못한 어설픈 무덤을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것이다.

나는 릉선으로 뛰여올라가 차광수의 어깨를 잡아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광수! 왜 이 모양이요. 일어나지 못하겠소.》

나의 고함소리가 어떻게나 크고 모질었던지 차광수는 무릎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음성을 낮추어 귀속말로 그를 타일렀다.

《대원들이 모두 우리 얼굴만 쳐다보는데… 칠전팔기기개는 다 어디 갔소?》

차광수는 눈물을 씻고 대렬앞장에서 묵묵히 걸음을 떼였다.

그후 나는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안도ㅡ무송현경전투를 치른후 넉달이 지나 차광수가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받았을 때 맨 선참으로 내가 상기한것이 바로 그때의 일이였다.

(그때 나는 왜 차광수에게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했던가. 다르게 말해서 일어나게 할수는 없었을가.)

하기는 내자신도 전우들을 잃은 다음 며칠동안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였다.

전사한 대원들은 모두가 《ㅌ.ㄷ》시절부터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의 길을 걸어온 골간이고 핵심들이였다.

희생이 없는 투쟁이란 물론 있을수 없다. 혁명은 항상 희생을 동반하는 법이다. 자연을 개조하는 평화적인 로동에서도 이러저러한 손실이 생기는 법인데 항차 모든 병기와 수단들이 총동원되여 승패를 다투는 무장투쟁에서야 어찌 죽음이 없을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안도ㅡ무송현경에서 당한 희생을 너무나도 잔혹하고 부당한것으로 받아들이였다. 혁명이 아무리 가혹한 희생을 동반한다고 해도 방금 첫 시작을 뗀 우리 대오에 이렇게까지 무차별적인 손실을 가져다줄수 있겠는가 하는것이 그 당시의 나의 심정이였다.

산수적으로 계산하면 그것은 열명미만의 유생력량을 잃어버린 그닥 크지 않은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단 한번의 싸움으로 전사자가 천명도 나고 만명도 나는 현대전에서 십단위의 인명손실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우들을 잃었을 때 그 손실을 산수적으로만 계산하지 않았다. 산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람의 가치를 환산하는 수단으로 될수가 없었다.

우리와 함께 투쟁의 길을 걸은 개개의 투사들은 이 세상에 무엇과도 대비할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이였다. 유격대원 한명과 적 100명을 바꿀수 없다는것이 우리의 신조였다. 적들은 국가의 법과 동원령을 발동하여 하루사이에도 수천수만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대량적으로 싸움터에 투입할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물리적수단이나 강권이 없었다. 설사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었다 해도 혁명동지 한사람한사람은 그대로 천금맞잡이였다. 뜻을 같이하는 한사람의 동지나 생사를 같이할수 있는 한명의 전우를 얻고 그런 사람들로 하나의 조직된 대오를 묶어세우자면 실로 고심참담한 노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항일혁명투쟁의 전기간 비록 그것이 100명의 적을 소멸한 승리한 전투라고 해도 아군에서 한명의 희생자가 나면 그 전과를 큰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력사가들은 안도ㅡ무성현경전투를 조우전을 령활하게 반공격으로 전환시켜 한개 중대의 적을 완전히 소멸한 성공적인 전투라고 평가하고있다. 물론 그것은 의심할바없이 승리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의의는 비단 청소한 반일인민유격대가 한개 중대의 정규군을 완전히 소멸해버리였다는 거기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유격투쟁사상 처음으로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일본군의 신화를 깨뜨려버렸다는 거기에도 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통하여 일본군이 강한 군대인것만은 사실이지만 결코 무적도 아니고 불패도 아니며 불퇴도 아니라는것과 우리가 유격전의 특성에 맞는 전법으로 전투를 능숙하게 진행한다면 적은 력량을 가지고서도 강대한 일본군을 얼마든지 타승할수 있다는 신심을 얻었다.

그러나 《ㅌ.ㄷ》의 첫 산아들을 열명가까이 잃어버린 이 전투에서 우리는 참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어야 했다.

(한개 중대의 적을 소멸하는데 열명가까운 전우를 잃어버렸다면 조선과 만주에 있는 10만이 넘는 일제침략군을 타승하는데는 얼마만한 희생을 당해야 하겠는가!)

초연이 채 가셔지지 않은 안도ㅡ무송현경의 전장을 떠날 때 나는 동지들의 유해가 묻혀있는 릉선을 뒤돌아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그때 첫 조우전을 치르고나서 유격전쟁을 하느라면 앞으로 고생도 많이 하고 희생도 많이 당하게 되리라는것을 한결같이 깨달았다.

안도ㅡ무송현경전투가 있은후 우리가 십수년동안 하여온 항일전쟁은 실지로 전쟁에 대한 인간의 기존개념으로써는 도저히 측량할수 없는 고통과 난관과 희생을 동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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