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3월 30일

4. 혈전의 준비

명월구회의에서는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할데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우리가 이 사업에서 선구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해줄것을 요구하였다.

《첫 시작은 김일성 떼라. 무슨 일이나 표본이 있고 시범이 있는 법이 아니냐.》

동무들은 이런 말로 나와의 작별인사를 대신하였다.

나는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다 떠날 때까지 명월구에 남아있다가 동장영과 헤여져 안도에 갔다. 유격전을 하자면 어느 모로 보나 안도와 같은 고장이 좋았다.

12월 명월구회의에서도 론의된바이지만 우리는 무장대를 조직하는데서 선차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는 9.18사변후 만주각지에서 조직된 중국의 반일무장력인 구국군과의 사업에 착수하는것이라고 인정하고 조직의 기본력량을 안도와 왕청에 두기로 하였다. 안도와 왕청은 구국군의 집결중심지였다.

흥륭촌에 돌아온 나는 가족들과 함께 마춘욱이네 집에 얼마간 가있다가 소사하 토기점골 갈밭부락으로 이사하여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소사하는 조직화된 부락이여서 흥륭촌보다 주변환경이 대단히 좋았다. 지하조직이 든든하게 들어박힌 이 마을에는 밀정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였다. 주구들이 쏠라닥거리지 않으니 군경들도 소사하에는 별로 《토벌》을 오지 않았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처음부터 여러가지 난관에 부닥치였다. 사람문제, 무기문제, 교련문제, 식량문제, 군중적토대문제, 구국군과의 관계문제를 비롯하여 군사정치적으로 많은 난문제들이 제기되여 해결을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는 무장대오를 꾸리는데서 사람과 무기를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필수적요소로 보았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이 두가지가 다 부족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란 군사정치적으로 준비된 인간을 의미한다. 우리한테는 정치를 알고 군사를 아는 사람,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장기간 무장을 들고 싸울 준비가 되여있는 그런 청년들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한해반사이에 조선혁명군의 골간들을 거의다 잃어버리였다. 김혁, 김형권, 최효일, 공영, 리제우, 박차석과 같은 혁명군의 주력이 한해사이에 모두 전사하거나 감옥행을 한데다가 1931년 1월에는 중대장으로 활약하던 리종락이마저 조선혁명군과 관련된 소책자를 가지고 무기공작을 하러 가다가 김광렬, 장소봉, 박병화와 함께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였다. 군사물계에 밝은 김리갑도 감옥에 끌려갔고 백신한은 전사하였다. 최창걸과 김원우는 어떻게 되였는지 소식조차 알길이 없었다.

혁명군의 나머지력량가운데 군사경험이 있다는 대원들은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는 정도였는데 얼마 안되는 그 대원들마저도 군중정치공작에 돌리다보니 무장대오에 망라시킬수 없었다. 내가 안도에서 유격대를 내오느라고 바쁘게 뛰여다닐 때 내곁에 있은 조선혁명군출신의 청년은 차광수 한사람뿐이였다.

국가권력을 쥐고있는 사람들 같으면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으로 필요한 군사인원들을 손쉽게 충당할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집할수 없었다. 법적장치나 물리적힘으로써는 대중을 혁명에 동원시키지 못한다. 한때 상해림시정부는 모든 국민들이 납세, 병역징발에 응할 의무를 지닌다는 조문을 헌법에 박아넣었지만 인민들은 그런 법이 채택되였다는것조차 모르고있었다. 국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남의 나라 조계지 한구석에 앉아 국권을 행사하는 망명정부의 법이나 지령이 효과를 낼수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리치이다.

식민지민족해방혁명에서는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적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총을 메울수 없다. 이 혁명에서는 혁명을 령도하는 수령과 선각자들의 호소가 법을 대신하며 매개 사람들의 정치도덕적자각과 전투적열정이 참군을 결정하게 된다. 대중은 그 누구의 요구나 지령이 없어도 자기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총을 멘다. 이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여있는 인민대중의 본성적행위이다.

우리는 이런 원리에 기초하여 안도와 그 주변에서 유격대에 망라시킬 대상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적위대, 소년선봉대, 로동자규찰대, 지방돌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에는 참군을 요구하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 추수, 춘황투쟁의 폭풍속에서 반군사조직들은 급속히 확대되였고 그 폭풍의 한복판에서 청년들도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대중이 참군을 요청한다고 하여 그 준비정도도 고려해보지 않고 아무 사람이나 망탕 유격대에 받아들일수는 없었다. 동만의 청장년들은 아직 군사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유격대의 인적원천을 확보하자면 적위대와 소년선봉대를 비롯한 반군사조직들에서 청년들에 대한 정치군사적훈련을 강화해야 하였다.

그런데 내곁에는 교련을 맡아볼수 있는 인재가 한명도 없었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안도지구의 청년들을 모조리 군사화할수 없었다. 내자신도 화성의숙의 물을 좀 먹었다고는 하지만 새형의 군대, 유격대를 움직이기 위한 군사실천면에서는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책상물림인 차광수는 나보다도 군사를 더 몰랐다. 리종락이마저 감옥에 잡혀가니 이제는 기대를 가지고 쳐다볼 인물도 없게 되였다. 리종락과 같은 사람만 있으면 그에게 군사를 일임하고 나는 정치사업에 전적으로 시간을 바칠수 있으련만 그렇게 할수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였다.

어려운 고비에 처할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매번 동지의 부족을 느끼군 하였다.

우리가 이런 고충을 겪고있을 때에 박훈이라고 부르는 황포군관학교출신의 유망한 인물이 우리를 찾아왔다. 황포군관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가 하였고 정치부주임은 주은래가 하였다. 그 학교에 조선청년들이 많았다. 중국사람들이 광주폭동을 《3일쏘베트》라고도 하는데 이 폭동에서 주동적역할을 담당한것이 바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이였다.

박훈과 안봉은 광주폭동에 참가하였다가 폭동이 실패하자 관내에서 도망쳐나와 만주로 탈출해온 사람들이였다. 박훈은 체격도 건장하고 언행이나 몸가짐도 무인답게 활달하였다. 그는 조선말보다 중국말을 더 많이 사용하였으며 조선옷보다 중국옷을 더 자주 입고다니였다. 이 사람이 바로 나의 《군사고문》이였다.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4월 12일사변)한것으로 하여 국공합작이 파괴되고 제1차 국내혁명전쟁이 실패로 막을 내린후 남방지방으로부터 양림, 최용건, 오성륜(전광), 장지락, 박훈을 비롯하여 황포군관학교, 광동군관학교, 운남강무당과 같은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장개석의 테로를 피해 만주지방으로 많이 들어왔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때 황포군관학교라는 교명을 듣고 박훈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박훈은 전투장에서 권총을 량손에 하나씩 들고 쏘는 특기를 가지고있었다. 사격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는 총을 정말 《귀신》같이 쏘았다.

그가 가지고있는 다른 하나의 특기는 구령을 잘 치는것이였다. 박훈은 만명이나 이만명쯤 되는 대렬도 마이크가 없이 육성으로 쉽게 움직일수 있는 희한한 목소리를 가진 교관이였다. 그가 토기점골등판에서 소리를 한마디 지르면 온 동네가 다 들었다.

안도의 청년들은 모두 그 구령소리에 반해서 박훈을 황홀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소리가 저쯤 되면 동경판에 앉아있는 일본천황도 듣겠구만. 어디서 저런 복덩이가 굴러들었을가!》

적위대원들의 교련을 지도하는 박훈의 모습을 보고 차광수는 이렇게 탄복하였다. 박훈에게 제일 반해서 돌아간것이 바로 차광수였다. 두 사람은 리론투쟁을 많이 하면서도 매우 친근하게 지냈다.

박훈이 안도에서 훈련을 잘 주었기때문에 우리가 조직한 부대는 후날 왕청에 가서도 《대학생부대》라는 평판을 들었다. 우리 부대의 유격대원들은 항일전쟁의 전행정에서 언제나 질서가 있고 규률이 째이고 언행이 점잖고 옷차림이 단정한 사람들로 존경을 받았다. 양정우도 늘 우리 혁명군의 절도있고 생기발랄하고 문화적인 면모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박훈을 생각했고 토기점골등판에서 울리던 그의 구령소리를 생각하였다.

교관으로서의 그의 자질가운데서 다음으로 이채를 띠는것은 훈련생들에 대한 엄격한 요구성이였다. 그 비상한 요구성때문에 훈련생들이 빠른 속도로 군사지식을 터득해낸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박훈은 이따금씩 대원들에게 체벌을 적용하군 하였다. 제식동작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거나 규률을 어기는 훈련생들이 있으면 눈알을 굴리며 욕설을 퍼붓든가, 발길질을 하든가, 벌을 세우든가 하였다. 혁명군대내에서 체벌은 금물이라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날 나는 훈련끝에 목이 쉬여서 쉑쉑하는 박훈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물었다.

《박훈동무한테서는 어쩐지 군벌냄새가 나는구만. 어디서 그런 군벌기를 배웠소?》

박훈은 군벌냄새라는 말에 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를 가르쳐준 교관이 아주 엄하고 독한 사람이였소. 그 독일인이 나에게 그걸 유산으로 넘겨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똑똑한 군인이 되자면 어쨌든 채찍맛을 많이 봐야지.》

독일식군사교육의 흔적은 박훈에게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그의 리론강의중에서 제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것이 바로 프로씨야군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박훈은 영국병사의 용감성과 프랑스병사의 신속성, 독일병사의 정확성과 로씨야병사의 완강성에 대해 많은 말을 하였는데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훈련생들에게 우리는 그 모든 자질을 다 소유한 만능의 군대가 되자고 호소하였다.

그가 집행하는 훈련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지향하고있던 유격전의 특성에 맞지 않는것이였다. 그는 나뽈레옹식종대대형과 영국식일선형서렬이 무엇인가를 납득시키고 스무명이 되나마나한 훈련생들로써 그런 대형을 지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교련을 참관하던 나는 휴식시간이 되자 박훈에게 조용히 말했다.

《박훈동무, 동무가 방금 집행한 그 영국식일선형서렬훈련은 간단히 설명으로 굼때고 생략해버리는게 어떻소? 우리가 여기서 와떼를로격전과 같은 전쟁을 한다면 몰라도 산악을 끼고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과 당장 유격전쟁을 해야 할 판인데 그런 구시대의 병법을 배운다고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하는거요.》

《전쟁을 하자면 어쨌든 그런 정도의 군사지식은 알아둬야 하지 않을가.》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낸 일반적인 군사지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장 써먹을것부터 선택해서 배워주어야 하오. 무관학교에서 배운것을 통채로 소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는것이 좋겠소.》

그날 박훈에게 내가 한 말은 훈련에서 교조주의를 경계하라고 한 말이였다.

박훈에게 적위대원을 여라문명 맡기면서 사격훈련을 시키라고 했더니 하루종일 평지에다 말뚝을 세워놓고 적이 나타나면 중심하부를 쏘라는 소리만 되풀이하였다.

나는 박훈을 보고 훈련을 이런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 실정에 맞지 않는것은 밀어던지고 유격전쟁에 필요한것부터 먼저 배워주어야겠다, 특히 산악전이 요구하는 훈련을 선행시켜야겠다, 우리한테 맞지 않는것은 대담하게 뜯어고치고 교범에 없는 병법은 우리끼리 지혜를 합쳐서 하나하나 만들어내자고 하였다.

박훈은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였다.

그후부터 우리는 유격전쟁에 필요한것들을 기본으로 하여 훈련을 진행하였다. 초보적인 제식동작이나 무기조작법은 말할것도 없고 위장법, 신호법, 창사용법, 적정탐지법, 산길을 타는 법, 곤봉을 다루는 법, 무기를 탈취하는 법, 야간전투시에 적아를 식별하는 법 등 당장 써먹을수 있는 군사지식부터 배워주었다.

박훈은 처음에 주먹구구식으로 이것저것 배워주다가 나중에는 과정안을 짜가지고 계획적으로 훈련을 시키였다.

박훈은 후날 이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자기가 황포군관학교에서 배운 군사는 모두 세계5대군사강국에 속하는 나라들의것이였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병법을 집대성한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군사지식이였다, 나는 현대중국의 군사교육의 전당이라고도 부를수 있는 유명한 황포군관학교에서 이런 지식을 배운데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고있었으며 동만에 와서 그것을 보급하게 되면 모두가 나에게 박수갈채를 보낼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오산이였다, 나는 박수갈채가 아니라 랭담한 반응에 부딪치였다, 청년들은 나의 강의를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상식으로만 받아들이였지 사활적인것, 필수불가결의것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지난 몇해동안 내가 섭취한 군사가 비록 세계적인것이기는 하지만 유격전을 위해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반편짜리 지식임을 통감하고는 그것을 무슨 만능의 법전처럼 절대시한 자기자신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였으며 유격전이 요구하는 군사론을 새롭게 창조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였다, 나는 그때부터 교조에서 벗어나 조선혁명에 적응한 우리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였다고 고백하였다.

안도지구의 《훈련도감》들 가운데서 박훈 다음으로 이채를 띤 인물은 김일룡이였다. 그는 박훈과 같이 현대전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었으나 독립군에서 싸울 때 터득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대원들을 꾸준히 훈련시키였다.

적위대와 소년선봉대, 소년탐험대를 비롯한 반군사조직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대렬을 확대하는 과정을 통하여 정치군사적으로 준비된 견실한 청년들이 우리의 주위에 수십명 집결되였다. 우리는 두만강연안의 여러 현들에 나가서 사업하던 동지들과 추수, 춘황투쟁에서 단련되고 검열된 청년들을 선발하여 안도로 모이게 하였다. 안도, 돈화를 비롯한 동만각지에서 많은 청년들이 우리 한테로 찾아왔다.

우리는 그런 청년들가운데서 차광수, 김일룡, 박훈, 김철(김철희), 리영배를 비롯한 18명의 핵심들을 골라 그들로써 먼저 유격대소조를 조직하였다. 이와 함께 연길, 왕청, 화룡, 훈춘지방에서도 같은 형태의 무장대오를 꾸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현마다 10~20명안팎의 인원으로 되는 무장대들이 꼬리를 물고 태여나게 되였다. 적은 인원으로 무장대를 꾸려가지고 살금살금 활동하면서 무기를 확보하고 경험을 축적하고 대렬을 늘이다가 일단 조건이 성숙되면 매개 현별로 대규모의 무장대오를 꾸리자는것이 명월구회의에서 토의결정된 방침이였다.

유격대소조를 내오는 과정은 무장을 해결하기 위한 피어린 투쟁을 동반하였다. 곤난하다 곤난하다 하여도 무기를 해결하는 일처럼 그렇게 큰 난관은 없었다.

일제침략군은 본토의 군수산업이 계렬식으로 생산해내는 현대적인 무기와 장비들로 륙해공군의 전력을 끊임없이 강화하고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무기를 대줄 국가적후방도 없었고 총 한자루 사올 돈도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대포도 아니였고 땅크도 아니였다. 당장은 보총이나 권총, 수류탄과 같은 경무기만 있으면 되였다. 국내에 무기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으면 로동계급의 힘을 빌어서라도 해결할수 있겠지만 우리 나라에는 그런 공장이 없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자신을 무장하는데서 자기 나라 공업의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자!》는 비장한 구호가 나올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도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맡겼던 두자루의 권총을 땅속에서 파냈다. 그 두자루를 쳐들고 동무들에게 말했다.

《자,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아버지는 의병도 아니고 독립군도 아니였지만 세상을 떠나시는날까지 이 총을 가지고있었다. 왜? 무장투쟁이야말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있는 최고의 투쟁형태라고 인정하였기때문이다. 아버지의 총적인 지향은 무장투쟁을 하자는것이였다. 나는 이 두자루의 권총을 물려받을 때 아버지가 지향했던것을 내가 대신하여 실현시키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 이제는 때가 되였다. 이 두자루를 밑천으로 삼아 독립행군을 시작해보자. 지금은 이 두자루가 전부이지만 이것이 새끼를 치고 또 쳐서 200자루, 2,000자루, 2만자루로 될 날을 생각해보라. 총 2,000자루만 있으면 능히 나라를 해방할수 있다. 밑천이 있으니 이것을 자꾸 굴려 2,000자루, 2만자루가 되게 하자!》

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너무나도 일찌기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생각에 목이 메여 더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무기를 얻는 문제가 일정에 오르자 박훈은 나에게 소문을 들으니 무송에서 어떤 부자집자식이 당신네한테 총 수십자루를 희사한 일이 있다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였는가고 물었다. 그가 말하는 무송의 부자집자식이란 장울화를 말한다. 우리가 오가자에서 활동할 때 그는 자기 집 가병들의 총 40자루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온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그 총을 조선혁명군 대원들에게 모조리 나누어주었다.

박훈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몹시 아쉬워하면서 출로는 돈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꾸려놓은 혁명촌들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에게 호소하여 돈을 모아보자고 제기하였다.

우리는 그의 제의를 따르지 않았다. 부자들에게 호소하여 자금을 뽑아낸다면 몰라도 가난한 로동자, 농민의 주머니를 털어 무기를 산다는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수 없었다. 목숨을 내대고 총을 탈취하는것보다는 돈을 모으는 일이 훨씬 쉬울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택하였다. 나는 돈을 주고 총을 사는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그것을 그닥 장려하지는 않았다. 인민들에게 돈을 내라고 손을 내미는것은 독립군의 식이였지 우리 식이 아니였다.

설사 돈을 모았대야 그것은 큰 밑천으로 될수도 없었다.

언제인가 최현동무는 산림대에 가서 기관총 한자루를 1,500원에 사온 일이 있다. 소 한짝에 한 50원씩 하던 당시의 시장가격으로 셈하면 소 30마리정도 팔아야 기관총 한자루를 살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우리는 이 수자를 중시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토론을 거듭하던 끝에 내도산쪽에 가서 독립군들이 묻어놓은 총을 몇자루 파왔다.

다른 현들에서도 독립군들이 사용하던 무기를 경쟁적으로 회수하였다.

홍범도휘하의 독립군은 청산리전투후 많은 량의 총과 탄알을 대감자일대에 묻어버리고 쏘만국경으로 퇴각하였다.

밀정을 통하여 이 사실을 내탐한 일본수비대가 자동차 수십대를 가지고 와서 그 총과 탄알들을 무데기로 실어갔다. 명월구회의가 있은 다음 왕청동무들은 대감자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일본수비대원들이 파헤치고 갔던 자리에서 근 5만발의 탄알을 회수하였다.

수중에 몇자루의 총이 생기자 우리는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적의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직접적인 전투행동에로 넘어갔다.

첫 공격목표로 쌍병준이라는 지주의 집이 선정되였다. 그의 수하에는 40명가량 되는 보위단이 있었다. 단장이 후날 《신선대》대장으로 악명을 떨치다가 최현동무네 부대에 녹아난 리도선이라는자였다.

보위단병실은 지주집 토성안에도 있고 토성밖에도 있었다.

우리는 사전정찰을 진행한데 기초하여 유격대소조성원들과 적위대원들로 습격조를 편성하고 소사하본부락에 있는 쌍병준이네 집을 불의에 기습하여 10여자루의 총을 탈취하였다.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투쟁은 두만강연안의 모든곳에서 군중적운동으로 힘차게 벌어졌다. 혁명군중들은 《무기는 우리의 생명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구호를 들고 유격대소조성원들과 적위대원들, 소년선봉대원들, 지방돌격대원들을 선두로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떨쳐일어나 일제침략군대와 일만경찰들, 친일지주들과 반동관료배들의 무기를 빼앗는 투쟁을 결사적으로 벌리였다.

《요창부요밍!》이란 그때에 나온 말이다.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총만 필요하고 목숨은 필요없다는 뜻이 된다. 세관이나 보위단이나 공안국이나 지주집 같은데 가서 총을 내들고 《요창부요밍!》하고 소리치면 겁많은 관리나부랭이들과 반동지주들, 경찰관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있는 무기를 다 내놓았다.

《요창부요밍!》란 말은 동만의 모든 혁명조직구들에서 하나의 류행어로 널리 사용되고 전파되였다.

오중화의 아버지(오태희)와 삼촌도 밥상다리로 만든 가짜 권총을 들고 《요창부요밍!》으로 경찰과 자위단원들을 위협한 다음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 적위대에 보내주었다. 그 소문이 안도에까지 퍼져왔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로인들의 기지와 대담성에 탄복하였다.

후날 왕청에서 오태희로인을 만나 《어떻게 되여 그런 멋있는 궁리를 하시였습니까?》하고 물으니 로인은 웃으면서 《밤에 보니 밥상 다리도 권총 같습디다. 우리한테야 총이 있습니까, 작탄이 있습니까. 그래서 밥상다리를 꺼내들었지요. 급하니까 그런 궁리도 납디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로인의 말이 과연 옳았다. 정말 우리는 그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무기를 탈취하는 싸움에 과감하게 몸을 내던지였다. 그것은 최대한의 창발성과 지혜를 요구하는 힘겨운 싸움이였다.

동만의 혁명가들과 혁명적인민들은 때로는 헌병으로, 때로는 구국군부대 군인으로, 때로는 일본령사관 관리나 대부호, 무역상 같은것으로 변화무쌍하게 자기를 위장하고 정황에 맞게 림기응변하면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어떤 고장에서는 녀성들이 빨래방치나 곤봉으로 군경들을 까눕히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무장을 얻기 위한 투쟁은 전민항쟁의 개시를 위한 서막이였고 예비적인 싸움이였다. 이 싸움에는 모든 혁명조직들이 다 발동되였고 전민이 다 동원되였다. 혁명이 무기를 요구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군중은 서슴지 않고 이 싸움에 떨쳐나섰다. 그 과정에 그들은 각성되였다. 자기자신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자각한것이다.

자기 무기는 자기가 해결하라고 한 우리의 구호는 도처에서 큰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물론 이러한 투쟁행정에서 우리는 많은 혁명동지들을 잃었다. 그때 우리가 마련한 한자루한자루의 총에는 혁명동지들의 뜨거운 피가 스며있었고 그들의 불타는 애국심이 깃들어있었다.

우리는 자력갱생의 구호를 들고 무기를 자체로 만들기 위한 투쟁도 동시에 벌리였다.

처음에는 야장간에서 쇠를 달구어 칼이나 창과 같은 도창무기를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권총과 작탄을 만들어냈다.

그런 권총가운데서 제일 정교하고 쓸모있게 만들어진것은 왕청현 남구반제청년동맹원들이 제작해낸 《비지깨권총》이였다. 함경북도지방사람들은 로씨야식으로 성냥을 《비지깨》라고 하였다. 그 권총을 《비지깨권총》이라고 한것은 딱성냥으로 총알화약을 만들어 약통실에 넣었기때문이다.

그들은 총신도 양철로 자작 만들었다.

동만의 병기창들가운데서 가장 유명한것으로는 화룡현 금곡에 있던 신성덕수리바위굴병기창과 왕청현 남구병기창, 연길현 의란구 남양촌의 주가골병기창들을 들수 있다.

수리바위굴에 있던 병기창에서는 연길현 팔도구광산의 혁명조직을 통해 얻은 폭약으로 폭탄까지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소리폭탄이라는 폭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폭탄은 소리만 요란했지 살상력이 별로 없었다. 그 약점을 퇴치하려고 만든것이 고추폭탄이였다. 소리폭탄보다는 효과가 좋았지만 이 폭탄도 역시 냄새만 지독했지 살상력은 거의 없었다.

화룡동무들은 그후 고추가루대신 쇠쪼각을 넣어 살상도가 높은 폭탄을 만들었다. 그 폭탄이 바로 유명한 연길폭탄이다. 연길폭탄이 세상에 나온 다음 우리는 화룡에 있는 박영순을 데려다가 소왕청 대방자에서 이틀동안 작탄강습회를 조직하였다. 동만각지에 작탄제조기술을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이 강습회에는 간도 여러 현들에서 온 병기창성원들과 유격대지휘관들이 참가하였다.

나는 첫날강습에 출연하여 화약제조방법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그 당시 유격대의 병기창들에서는 작탄을 만들 때 쓰는 화약을 광산에서 비밀리에 구입해오는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적들이 화약에 대한 통제를 엄격하게 하였기때문에 이 방법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였다. 우리는 민가에서 자체로 쉽게 화약원료들을 채취하여 그것으로 폭약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강습회에서는 그 비결을 전습시키고 각 지방에 일반화하도록 하였다.

박영순은 작탄제조법과 그 사용법, 보관취급법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그들이 화룡에서 자력갱생하여 개발해낸 폭탄제조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강습참가자들의 한결같은 찬탄을 자아냈다. 수리바위굴병기창을 주관한 박영순, 손원금동무들이 아주 재간있는 동무들이였다. 후날 이 병기창은 조선인민혁명군의 믿음직한 무기제조기지, 수리기지로 되여 항일전쟁에공헌을 하였다.

만일 어느 문필가가 무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 인민이 발휘한 무비의 희생성과 대담성, 림기웅변의 기지와 비상한 창발성에 관한 일화들을 종합하여 형상적화폭으로 펼친다면 그것은 아마 하나의 장엄한 서사시로 엮어질것이다. 수천수만년 력사밖에 값싼 로동력으로 밀려나 무지와 몽매속에서 헤매이던 인민대중, 망국민의 서러운 신세에 이를 갈고 피눈물을 뿌리면서도 그것을 숙명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던 소박한 인민대중이 마침내 자기 운명을 자기자신의 힘으로 개척하기 위한 성스러운 해방투쟁의 길에 들어선것이다.

지방조직들에서 로획했거나 제작해낸 무기를 볼 때마다 나는 자기 인민의 힘을 믿고 그 힘에 의거하여 조선혁명을 개척하려고 한 우리의 결의가 얼마나 정당하였는가 하는것을 재삼 자랑스럽게 확인하군 하였다.

우리는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인민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튼튼히 준비시키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수적요구였으며 광범한 대중이 자각적으로, 거족적으로 동원되는 여기에 바로 최후승리의 담보가 있었다.

1930년의 전례없는 흉작과 그에 따르는 혹심한 기근은 우리가 동만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릴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 우리는 추수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군중의 투쟁기세를 늦추지 않고 일제와 친일지주들을 반대하는 새로운 춘황투쟁을 벌리도록 하였다. 춘황투쟁은 지주에게 쌀을 꾸어달라는 차량투쟁으로 시작되여 일제와 친일지주들의 량곡을 몰수하는 탈량투쟁으로, 일제의 앞잡이들을 청산하는 폭력투쟁으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춘황투쟁의 불길속에서 동만지방인민들을 혁명화하는 사업은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하였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공세가 그처럼 악랄해지고있는 환경속에서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인내성있게 그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였다. 대중단체들은 관문주의의 틀을 마스고 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부단히 단련시키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어디서나 순풍에 돛단것처럼 그렇게 헐하게 진행된것은 아니였다. 한 마을을 혁명화하는 과정에 여러명의 혁명가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수모불신을 당하면서도 자기가 혁명가라는것을 밝히지 못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푸르허마을에서 겪은 체험도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다.

푸르허는 안도에서 돈화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중요한 동네였다. 이 동네를 거치지 않고서는 돈화지방이나 남만일대로 자유롭게 왕래할수 없었으며 이 마을을 혁명화하지 않고서는 소사하, 대사하, 류수하를 비롯한 린접마을들의 안전을 담보할수 없었다.

조직에서 유능한 공작원들을 여러명 파견하였으나 가는족족 다 실패하였다. 거기에 조직을 당장 박아넣어야 하겠는데 누구든지 들어가기만 하면 다 잡혀서 목숨을 잃으니 묘책을 찾을수가 없었다. 김정룡은 푸르허를 반동동네라고 하면서 그 마을에 스파이나 무슨 백색조직이 있는것 같은데 도무지 정체를 밝혀낼수 없다고 분해하였다. 이 동네에 대한 말만 들으면 나도 이상한 생각을 버릴수 없었다.

푸르허에 송씨성을 가진 조직원이 한명 있었으나 그 동무의 힘만 가지고서는 반동분자를 색출해낼수도 없었고 동네를 혁명화할수도 없었다. 누구든지 목숨을 내대고 들어가서 잡아낼것은 잡아내고 조직할것은 조직하여 이 마을을 반동동네로부터 혁명동네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게 되여 내가 푸르허에 가겠다고 자원해나섰다.

나는 소사하에 송동무를 불러다놓고 미리 약속을 하였다.

《이제 마을에 돌아가면 동무네 집에 일손이 딸려서 머슴군총각을 하나 얻어온다고 소문을 퍼뜨리오. 그러면 내가 동무네 집에 가서 머슴군노릇을 하겠소.》

송동무는 눈이 휘둥그래서 반동이 심한 마을인데 어떻게 그런 모험을 하겠는가, 게다가 머슴군노릇을 하겠다니 말이나 되는가고 하면서 도리를 흔들었다. 내가 푸르허에 가는것에 대해서는 조직에서도 반대하였다.

나는 반대를 무릅쓰고 송동무와 함께 소발구에 앉아 푸르허마을로 들어갔다. 세수도 하지 않고 리발도 하지 않고 일부러 반편같은 용모를 해가지고 《반동소굴》에 침투하였다.

몇시간후 내가 송동무와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있을 때 난데없는 기마경찰대가 먼지를 일쿠면서 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련락이 닿았는지 벌써 안도에서 경찰을 급파한것이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이 기마대가 온다고 아우성치자 나는 마당에 나가 도끼를 들고 나무를 패기 시작했다. 교하의 이름모를 녀인네 집에서 겪은것과 비슷한 정황이라고 할가.

기마경찰들은 나를 가리키며 누구인가고 물었다.

그러자 송동무가 자기 집 머슴이라고 대답하였다.

한 기마경찰이 《공산당간부 한사람이 이 마을에 지도를 내려왔다고 하던데…》하면서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양복이나 쭉 뽑아입고 번듯하게 차려입은 간부를 념두에 두고 달려왔는데 허줄한 덧저고리를 입고 얼굴에 검댕이까지 묻은 나를 보고는 헛걸음을 했다고 실망한 모양이였다.

나는 그때 우리 대렬내에 혹시 적과 내통하는 불순분자가 있지 않는가 하는 의혹까지 품었다. 내가 푸르허에 침투하는것은 몇몇 책임일군들밖에 몰랐기때문이였다.

기마경찰들이 돌아간 다음 송동무를 돌아보니 얼굴이 새까매지고 이마에 식은 땀이 배여있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이른새벽에 일어나 주인집의 물도 긷고 나무도 패고 마당도 쓸고 소여물도 끓이였다. 그리고는 송동무와 함께 소발구를 타고 매일 산으로 갔다. 산에 가서는 문건도 보고 나무도 하고 사업토론도 하면서 송동무에게 한가지한가지씩 일거리를 주었다.

나는 착실한 《머슴군》으로 동네에 소문났다. 그때 푸르허사람들은 나를 어리무던한 《머슴군》으로만 알았다. 우물터에 얼음이 얼면 동네아낙네들이 나보고 손을 까닥까닥 흔들며 얼른 여기 와서 얼음을 까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그런 부탁도 달게 받아들이였다. 마을사람들이 나에게 일을 많이 시킬수록 내 몸에는 《머슴》의 체취가 깊이 배일것이고 내가 그들의 청탁을 성실하게 들어줄수록 밀정들은 나에게서 혁명가의 표징을 쉽사리 찾아낼수 없게 되겠기때문이였다.

하루는 송동무네 맞은켠 집에서 잔치가 있었다. 그날 마을사람들이 밀려와서 나더러 떡을 쳐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머슴》으로 일하는 사람이니 의례히 그런 일은 본때있게 할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였다.

농사로 한생을 늙어온 우리 할아버지는 보습질, 작두질, 떡메질 세가지를 다할줄 알아야 진짜배기농사군이라고 늘 말씀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떡을 쳐본 일이 없었다. 우리 집 살림살이는 떡을 쳐먹으면서 호강하리만큼 풍족하지 못하였다. 마을사람들의 청을 들어주자니 내 정체가 드러날것 같아 걱정되였고 그 청을 거절하자니 《머슴》답지 않은 처사인것 같아 주저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집일이 바빠 가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번 찾아와서 자꾸 독촉하는 바람에 더 버티여낼수가 없었다.

내가 잔치집마당에 나타나자 그 집 주인들은 일손을 덜게 되였다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몸집이 강마른 앞집 중로인의 손에서 떡메를 빼앗아 내손에 쥐여주며 《이 사람, 오늘 떡맛은 임자의 솜씨에 달렸으니 한번 본때를 보이게.》라고 하였다. 남의 속내도 모르고 방금 찐 떡쌀을 함지박에 담아내오느라고 수선을 떠는 안주인의 거동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머슴》의 솜씨를 보겠다고 내 량옆에 진을 치고 서있었다. 농촌에서는 떡치는 솜씨를 구경하는것도 하나의 멋이고 생활이였다.

나는 떡메를 쥔 손에 침을 바르며 속으로 에라, 될대로 되여라, 힘 자라는껏 떡메를 휘둘러보자, 이놈의 일도 사람이 하는 노릇이겠지, 머슴이라고 만사를 통달하는 법이야 없지 않겠는가, 기껏해서 솜씨가 서투르다는 비난이나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때 내 심중을 알아차린 송동무가 나를 딱한 처지에서 구원해주었다. 그는 《이 사람, 그 팔을 가지고 어떻게 떡을 친다고 그래? 내가 팔을 잘 건사하라고 몇번이나 당부하든가.》하면서 일부러 위엄을 풍기며 나를 핀잔한 다음 잔치집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어제 나무하러 갔다가 팔을 상해서 떡을 치지 못해요. 이웃집 경사인데 내가 대신 쳐주지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마을 녀자들은 그날 손님들에게 떡을 나누어줄 때에도 《머슴군》대접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그릇에 떡을 담아주면서도 나에게만은 그저 손에다 쥐여주었다.

나는 마을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수모하는데 대하여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공작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푸르허를 혁명화하는 과정이 이처럼 간단치 않았다. 오가자를 혁명화하는 과정에 고초가 많았다고 하지만 이 고장의 혁명화과정에 비하면 식은죽먹기였다고 할수 있다. 나는 이 마을에 달반가량 있으면서 조직을 꾸리고 핵심청년들을 발동시켜 밀정도 청산하였다.

소사하에 돌아온 다음 동무들앞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 배를 그러쥐고 웃었다. 나는 그때 동무들에게 《어데든지 혁명가들이 배기지 못할 곳은 없다. 지금까지 배기지 못한것은 물우에 뜬 기름방울처럼 군중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신사식으로 혁명을 했기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한후 나는 부대를 데리고 푸르허에 간적이 있었다. 빨찌산대장이 되여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그 마을에 들려 군중대회를 열고 연설을 했더니 사람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나에게 얼음을 까달라고 손목을 까닥거리며 불러대던 젊은 녀인이 연설을 마치고 말안장우에 올라앉는 나를 보고 너무 놀라 《에구, 저 사람이 우리 동네에 살던 〈머슴군〉총각이 아니요? 저이가 혁명군대장이 됐구려.》하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우리앞에 가로놓였던 난관은 이렇게 극복되였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난문제는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있었다. 그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류혈을 가져다주었던 구국군부대와의 사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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