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3월 30일

2. 9.18사변

나는 안도의 혁명조직들이 자기 궤도에 들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성과를 확대하기 위하여 1931년 여름과 초가을 화룡, 연길, 왕청일대의 지방조직들에 나가 5.30폭동후 흩어졌던 대중을 묶어세우는 사업을 하였다.

내가 돈화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안도, 룡정, 화룡, 류수하, 대전자, 명월구 등지와 련계를 맺으면서 사업을 한창 전개해나가고있을 때 9.18사변이 터졌다. 나는 그때 돈화근처의 한 농촌마을에서 공청열성자들과의 사업을 하고있었다.

9월 19일 이른 아침에 진한장이 내가 머무르고있던 마을로 뛰여와 관동군이 봉천을 공격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쟁이요! 왜놈들이 끝내 불집을 일쿠었소!》

그는 무거운 짐을 걸머진 사람처럼 신음소리를 숨가쁘게 내지르며 토방우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전쟁이라는 그 한마디의 말은 진한장의 입에서 눈물겹도록 비장하게 울리였다.

오래전부터 이미 예견했던 사변이고 또 사변이 발발한 시기도 대체로 예상과 비슷이 맞아떨어졌지만 나는 조선민족과 수억만 중화민족이 당하게 될 재난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도 거대한 전환이 오리라는 예감때문에 가슴을 떠박지르는것 같은 충격을 걷잡지 못하였다.

그후 우리는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사태발전의 진상을 똑똑히 알게 되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심양 북대영 서쪽 류조구에서 일본만철회사소유의 철도가 폭파되였다. 일제는 장학량군이 철도를 폭파하고 일본수비대를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내걸고 불의의 침공을 개시하여 일거에 북대영을 점령하였으며 19일 아침에는 봉천비행장까지 차지하였다.

심양에 뒤이어 안동, 영구, 장춘, 봉성, 길림, 돈화와 같은 동북지방의 대도시들이 관동군과 압록강을 넘어온 조선주둔군에 의하여 련달아 점령되였다. 닷새도 못되는 사이에 일본침략군은 료녕, 길림 두 성의 광대한 지역을 거의다 강점하였으며 전역을 계속 넓혀나가면서 금주방향으로 육박하였다.

문자그대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진상을 오도하여 중국측에 사건의 책임을 전가시켰지만 세상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이 내돌리는 여론을 믿지 않았다. 잔꾀가 많은 일제의 본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후날 사건을 조작한 당사자들도 인정하였지만 만철회사소속의 철도를 폭파하고 9.18사변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장본인은 관동군특무기관이였다. 우리는 그 당시 출판물들에 글을 내여 류조구사건은 만주를 먹기 위한 일제의 모략이며 간계라고 폭로하였다.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앞두고 대기상태에 있던 1931년 9월 18일 아침 이 사건의 조작자의 한사람인 도히하라겐지대좌(심양특무기관장)가 갑자기 서울에 나타났다. 그는 조선주둔군사령부 고급참모 간다 마사다네를 찾아가서 신문기자들이 시끄러워 군에게 찾아왔다고 자기의 조선방문리유를 에둘러 설명하였다. 만주사변이 터지면 숱한 기자들이 자기에게 달려들어 성화를 먹이겠는데 그 성화가 싫어서 미리 조선으로 도피해왔다는 소리였다.

같은 시각 일본항공본부장 와다나베 죠따로대장은 서울을 방문하여 조선주둔군사령관인 하야시 센쥬로대장과 함께 백운장이라는 큰 술집에서 연회를 차리고 휴식을 하였다고 한다. 만주사변과 같이 어마어마한 불집을 마련한 사람들의 행사치고는 너무나도 안온하고 여유작작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 력사기록을 읽게 되면 어째서인지 조선전쟁이 발발하던 때에 트루맨이 별장에 가서 지내던 일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가 9.18사변과 조선전쟁이라는 서로 다른 두개의 전쟁에서 일맥상통한 점을 찾아보게 되는것은 두 전쟁 다 선전포고없이 돌발적으로 개시되였다는 거기에만 있지 않다. 그 두 사변을 도발한 인간들의 면모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고유한 교활성과 파렴치성,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성과 지배주의적본성을 다같이 찾아보게 되기때문이다.

력사를 비반복적인 사건들의 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개개의 사건들사이에 존재하는 류사성과 공통적인 경향성을 우리는 또한 전혀 무시할수가 없는것이다.

일본이 9.18사변과 같은 사변을 도발하여 만주를 먹어치우리라는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확고한 기정사실로 되여왔었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장작림폭사사건을 조작했을 때에도 그것을 예감하였고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여 조중인민들사이에 험악한 대결상태가 빚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예감하였으며 《농학사》의 신분을 가지고 간첩활동에 종사하던 관동군 참모본부소속의 나까무라대위의 《실종》사건이 꾸며졌을 때에도 그것을 예감하였다.

나는 특히 만보산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만보산은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70~80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자그마한 농촌마을이다. 만보산사건이란 바로 이 마을에서 수로문제를 둘러싸고 조선이주민들과 중국원주민들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말한다. 조선이주민들이 논을 풀려고 이통하물을 끌기 위한 물길을 팠는데 그것이 그만 중국원주민들의 밭을 침범하게 되였다. 이통하를 막으면 장마철에 또한 강물이 범람할수 있었다. 그래서 원주민들이 이 공사를 반대해나서게 되였다.

이런 때에 일본인들이 공사를 강행하도록 조선농민들을 사촉함으로써 분쟁은 확대되고 조선국내에까지 파급되여 인명과 재산피해까지 내는 결과를 빚어냈다. 농촌에서 흔히 있을수 있는 지방적인 분쟁을 민족리간책략에 솜씨있게 리용한것이다.

만일 그때 일본사람들이 리간질을 하지 않았거나 조중농민들중에 선각자가 있어 리성적인 사고를 조금이라도 하였더라면 분쟁은 간단한 언쟁으로 그치고 그이상 확대되여 서로 마스고 두들겨패는것과 같은 양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을것이다. 이 사건으로 하여 조중인민들사이에는 더 큰 오해와 불신이 생기고 반감이 조성되였다.

그때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때문에 비슷한 불행을 겪고있는 두 나라 인민들이 무엇때문에 서로 주먹질을 하면서 피투성이싸움을 해야 하는가, 항일이라는 대전제밑에 두 나라 민족이 손을 굳게 잡고 공동투쟁에 나서야 할 때 물길 하나를 놓고 서로 악에 받쳐 《골육상쟁》을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꼴인가, 무엇때문에, 누구때문에 이런 참사가 빚어졌는가, 과연 이것이 누구한테 리롭고 누구한테 해로운 일인가 하고 거듭 생각하였다.

나에게는 문득 이 사건이 미리 꾸며진 연극으로, 박두해오고있는 어마어마한 사변의 전주곡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장춘령사관놈들이 농민들의 우발적인 충돌에 끼여들어 조선사람들의 리권을 《옹호》해나선것부터가 미심쩍었다. 《토지조사령》과 같은 략탈적인 법령으로 조선의 농토들을 빼앗고 살인적인 농정을 실시해온자들이 갑자기 보호자로 둔갑하여 우리 농민들을 《옹호》해나선것은 사실상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수 있는 하나의 정치만화였다. 장춘의 《경성일보》지국이 본사에 서둘러 만보산의 분쟁을 통지한 일도 그렇고 국내에서 신문호외를 찍어 조급하게 배포한것도 모두 수상하게 여겨졌다.

조중 두 나라 인민들을 리간시키기 위하여 일제의 영악한 두뇌들이 지방적인 자그마한 분쟁을 민첩하게 악용하여 엄청난 모략을 꾸몄는데 그것이 성공한것이 아닐가. 그렇다면 놈들한테는 무엇때문에 그런 모략이 필요했는가.

우리가 간도오지에서 혁명조직들을 재정비하고있는 사이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분명 무엇인가를 다급하게 준비하고있었다.

만보산사건의 여파가 채 가셔지지도 않은 그해 여름의 나까무라대위 《실종》사건은 중일관계를 전쟁접경에로 이끌어나갔다. 이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일본본토에서는 련일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있었다. 도꾜의 청년장교들이 야스구니진쟈에 모여 나까무라의 위령제를 지내고 자기들의 피를 뽑아 일장기를 그렸는가 하면 그것을 신사사두에 높이 띄워놓고 국민들의 전쟁열을 고취시키였다. 형형색색의 만주관계단체들은 만몽문제 각파련합대회라는것을 열고 실력행사로써만 만몽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귀가 아프게 떠들어대고있었다.

나는 그때 일제의 만주침략은 시간상문제라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확정할수 있었던 근거는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조선을 먹은 다음에는 만몽을 먹고 만몽을 먹은 다음에는 중국을 먹으며 중국을 먹은 다음에는 아세아를 제패하려는것은 《다나까상주서》에도 규정되여있는바와 같이 일본의 기본국책이였다. 동아의 맹주가 되려는 야망에 사로잡힌 군국주의일본의 강철바퀴는 이 국책에 따라 거침없이 움직이고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나까무라대위의 《실종》사건을 구실로 삼아 관동군병력을 심양에 집결시키고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진한장은 그때 일본군대가 당장 만주를 먹겠는데 우리는 모두 적수공권이나 다름없으니 어쩌면 좋은가고 하면서 몹시 불안해하고 안타까와 하였다. 그는 국민당의 장학량군벌에 일정한 기대를 걸고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는 우유부단했지만 일단 국권을 건드리는 사태가 벌어지면 중화민족앞에서의 체면유지와 수억만 민중의 압력때문에 저항해나서지 않을수 없으리라는것이였다.

나는 진한장에게 국민당군벌이 저항하리라고 기대하는것은 망상이라고 말했다.

장작림의 폭사사건때를 상기해보라. 관동군의 모략이라는것이 명백했고 엄연한 증거도 나타났지만 동북군벌은 그때 진상규명도 하지 않았고 관동군에 한마디의 책임추궁조차 하지 않았다. 지어는 일본조객들까지 고인의 령전에 받아들이였다. 이것을 그 어떤 신중성이나 취약성, 우유부단성으로만 보겠는가. 국민당은 공산당의 박멸과 로농홍군에 대한 《토벌》에 광분하여 수십만 대군을 강서중앙쏘베트구에 투입하고있다. 일제에게 국토의 일부를 떼여주는 한이 있더라도 공산당과 로농홍군을 박멸하자는것이 국민당의 속심이다. 외적을 치기전에 공산주의세력을 숙청하고 국내의 정국부터 평정하자는것이 국민당의 로선이다. 자기 선친이 폭사한 다음 국민당쪽에 아주 기울어진 장학량은 그 저주로운 로선에 맹종하고있다. 때문에 저항은 없을것이며 거기에 기대를 거는것은 허황한 일이다.

진한장은 신중하게 내 말을 들었으나 공감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장학량군벌이 아무리 국민당로선에 추종한다 하여도 자기 군벌의 정치, 군사, 경제적지반인 동북땅을 완전히 잃게 되는 마당에 이르러서까지도 침략자들에게 저항해나서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종시 군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9.18사변이 터지고 수십만을 헤아리는 장학량군대가 아무 저항도 없이 심양을 내주었으니 진한장도 주먹을 부르쥐고 사색이 되여 나한테로 뛰여오지 않을수 없었다.

《성주동무, 나는 어리석은 몽상가였고 철부지였소.》

진한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다음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기를 계속 타매하였다.

《장학량과 같은 사람이 동북땅을 지켜주리라고 생각했으니 나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이였소. 장학량은 중화민족의 신의를 저버리고 항일을 포기한 겁쟁이고 패전장군이요. 전에 심양에 가보니 온 도시에 군벌군이 모래알처럼 쭉 깔려있더구만. 골목마다 신식총을 멘 군대가 씨글씨글했소. 그런데 그 많던 군대가 총 한방 쏘지 않고 퇴각하였으니 이런 분한 일이 어디 있소. 이걸 어떻게 리해해야 하오?》

매사에 침착하고 온화하던 진한장도 그날 아침만은 감정을 다잡지 못하고 목청을 돋구어 연방 고함을 질렀다.

장학량이 후에는 항일을 주장하고 국공합작에도 기여했지만 만주사변때에는 그에 대한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나는 진한장을 방으로 안내한 다음 조용히 그를 달래였다.

《진동무, 진정하오.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하라는것은 우리들이 이미부터 예견했던바가 아니였소. 그런데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떠드오? 우리는 이제부터 사태발전을 랭철하게 주시하면서 그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하오.》

《물론 그래야지. 그러나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그러오. 내가 장학량이라는 사람한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것 같소. 나는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소. 한잠도 못자고 고통에 시달리다가 곧장 이리로 달려왔소.

성주동무, 장학량이 통솔하는 동북군의 수효가 얼마인지 아오? 자그만치 30만이나 된다오, 30만! 30만이란게 간단한 수자요? 그런데 그 30만이 총 한방 쏴보지도 않고 하루밤사이에 심양을 내주었으니,… 아, 우리 중화민족이 그래 이렇게도 용렬하고 무력하단 말인가! 공자와 제갈량과 두보와 손중산의 조국이 이렇게도 망해간단 말인가!》

진한장은 가슴을 치며 통탄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피방울 같은 눈물이 연방 쏟아져내리고있었다.

그가 자기 민족앞에 닥쳐온 비운을 생각하며 그토록 분해하고 슬퍼하는것은 응당한 일이였다. 그것은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가질수 있는 순결한 감정이며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수 없는 신성한 권리였다.

나도 언젠가는 고향의 다박솔밑에서 왜적에게 짓밟힌 조국을 생각하며 남모르게 눈물을 흘린적이 있었다. 그것은 성안에 갔다가 일본경찰의 구두발에 만신창이 되여 꿈틀거리던 어떤 로인의 모습을 보고 돌아와 진종일 분을 삭이지 못하고 만경봉에서 하루해를 보내던 어느 일요일의 석양에 있은 일이였다.

나는 그날 진한장처럼 우리 나라 력사가 자그만치 5천년이라는데 그토록 자랑스러운 력사국이 어떻게 되여 하루아침에 망국의 수치를 당한단 말인가, 이 수치를 무엇으로 씻는단 말인가 하고 비분에 넘쳐 생각하였다.

그러고보면 나나 진한장은 똑같은 수치를 체험한셈이였다. 이전에는 리념의 공통성이 우리를 접근시켰다면 그날부터는 처지의 공통성이 우리의 우정을 배가해주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들은 불행한 때일수록 더 친밀해지고 우의와 사랑도 깊어진다고 볼수 있다. 지난날 조중인민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그토록 친형제와 같이 쉽게 가까와질수 있은것은 바로 처지의 공통성, 목적의 공통성, 위업의 공통성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제국주의자들이 리윤을 위해서 서로 일시적으로 결탁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은 공동의 투쟁목표로 되는 인간의 해방과 복리를 위해 공고한 국제주의적단결을 이룩해간다. 나는 진한장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받아들이였으며 중화민족의 수난을 조선민족의 수난으로 받아들이였다.

만일 수십수백만 대군을 움직일수 있는 위치에 있던 장개석과 장학량을 비롯한 정계, 군부의 우두머리들에게 돈화의 한 청년한테 있는 애국심이나 통찰력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것이다. 그들이 민족의 운명을 자기자신이나 자기들의 당파적리해관계우에 놓고 반공이 아니라 련공을 하며 전체 민중과 무장력을 항전에로 불러일으켰다면 일제의 침략을 그 첫 걸음에서 좌절시키고 령토와 인민을 영예롭게 지켜냈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도 민족도 다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일본이 만주를 치기전에 벌써 장개석이 장학량의 동북군에 《일본군측으로부터 도전이 있을 경우에는 신중성을 견지하며 백방으로 충돌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명령서를 하달하여 군의 저항을 사전에 억제한 사실은 그후 수억만 중국인민의 분노를 격발시켰다.

9.18사변이 폭발한후에도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중국인민과 중국군대는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고 평정과 인내성을 발휘할데 대한 투항주의적인 성명을 발표하여 군대와 국민의 사기를 저락시키였다. 만주의 운명은 벌써 9.18사변전에 결정된셈이였다. 지어 그들은 대표를 동경에 파견하여 일본정부와 비밀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이 교섭과정에 장개석은 일본이 중국의 다른 지역들을 차지하지 않는다는것을 조건부로 하여 쏘중접경지대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양도하는데 동의하는것과 같은 매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장개석이 수억만 인구와 수백만k㎡의 면적을 자랑하는 나라의 주석이라는 자존심마저 줴버리고 일본사람들에게 국토의 한부분을 큼직하게 떼주는것과 같은 망동을 꺼리낌없이 자행한것은 그가 일본의 대포보다 지주, 매판자본가와 국민당관료들을 반대하는 국내인민의 총구를 더 두려워한데 있다.

그리하여 동북변방군의 30만대군은 자기 무장력의 25분의 1도 못되는 관동군에게 밀려 무진장한 자연부원을 가지고있는 광대한 만주땅전체를 버리고 패주하게 되였다.

나는 망국의 비분에 젖어 통곡하는 진한장에게 말했다.

《이제는 그 어떤 군벌이나 정치세력도 믿을수가 없게 되였소. 오직 자기자신과 자신의 힘만을 믿어야 하오. 대세는 우리들자신이 민중을 무장시켜 반일전에 나설것을 요구하고있소. 살길은 무장을 잡는데 있소.》

진한장은 말없이 나의 두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나는 그날 진한장의 기분을 돌려세우려고 온 종일 그와 함께 보냈다. 망국의 설음으로 말하면 사실 진한장보다도 내가 더 많았다. 진한장은 조국의 일부를 떼운 사람이였지만 나는 하나의 옹근 조국을 송두리채 잃어버린 망국민의 아들이였다.

진한장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간청하는 바람에 나는 다음날 그를 따라 돈화로 향하였다.

9.18사변은 조선과 중국뿐아니라 온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 일본이 조선을 삼킬 때 경악을 금치 못했던 세계가 9.18의 포성에 다시한번 비명을 질렀다. 인류는 그것을 새로운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았다.

일본이 이 사변을 중일간의 교섭으로 해결할수 있는 지방적인 돌발사건으로 묘사했지만 세상사람들은 그것을 곧이 듣지 않았다. 공정한 세계여론은 일본의 만주에 대한 공격을 주권국가에 대한 란폭한 침략행위로 규탄하였으며 일본이 강점지역에서 철병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제를 선두로 한 제국주의자들은 일본의 창끝이 쏘련으로 돌려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국제련맹이 만주에 릿든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그 조사단도 정의의 편에 서서 흑백을 똑똑히 갈라내지 못하고 모호한 립장을 취하였으며 일본을 침략자로 규정하지 못하였다.

전쟁의 포성이 대륙을 뒤흔들고 일본군의 맹공격에 장학량군벌의 막강한 대군이 하루아침에 허물어져 총퇴각한 사실은 수억만사람들의 의기를 꺾어놓았다.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의 승리에서 생긴 《무적황군》에 대한 신화는 한갖 신화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되였다. 피눈물나는 분노와 함께 공포의 파도가 조선과 만주는 물론, 온 아세아대륙을 휩쓸었다. 그 공포의 파도속에서 모든 무장력과 정치세력, 혁명단체, 형형색색의 우국지사들과 저명인사들은 자기의 본색을 적라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9.18사변의 폭발은 붕괴상태에 있던 독립군잔여세력의 대부분을 산간오지로 몰아넣었으며 실력배양고창하던 사람들을 일제의 품으로 밀어던지였다. 독립군들이 손때묻은 총을 땅에 묻고 어깨를 움츠리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친일을 부르짖었다. 독립선언을 련발하여 구국항쟁을 웨치던 우국지사들이 《망향가》를 부르며 황황히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전날의 활동거점들을 버리고 퇴각하는 장학량군의 뒤를 따라 금주로, 장사로, 서안으로 달아나는 독립운동자들도 있었다.

애국과 매국, 반일과 친일, 자기 희생과 보신을 가르는 착잡한 분해과정이 9.18의 포성과 함께 민족내부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였다. 각자가 자기의 인생관에 따라 양극에도 가붙고 음극에도 가붙었다. 만주사변은 민족의 매 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하나의 시금석과도 같은 작용을 하였다.

우리는 그때 돈화에서 진한장과 함께 며칠을 두고 9.18사변에 대한 론의를 계속하였다. 우리도 처음에는 몹시 당황하였다. 무장을 들 때가 되였다는 판단은 쉽게 하였으나 일본군이 사태처럼 쓸어드는 정국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침착성을 인차 회복하고 사태발전을 랭철하게 주시하였다.

그 당시 나는 일제의 만주침략이 조선혁명에 끼치는 영향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일본군의 만주출병이 현실로 되고 만주점령이 기정사실로 됨으로써 우리는 자기곁에 적을 두게 되였다. 《미쯔야협약》과 같은것을 턱에 걸고 일본관헌들이 몇해동안 중국반동군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선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심하게 하였지만 조선땅에 있는 군경들이 월경하여 만주에 들어오는 실례는 드물었다. 중국과의 협정에 의하여 일본군경들이 넘어오는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여있었다.

만주지방에서 조선혁명가들을 색출하고 잡아가는것은 대체로 이 일대에 와있는 일본령사관 경찰들이 하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일대에 조선강점군이 들어오지 못하였다. 로씨야공민전쟁당시 씨비리를 들이쳤다가 철수할 때 중국측의 량해를 얻어 훈춘에 떨어진 두개 중대력량이 동북지방에 주둔하고있는 조선강점군의 전부였다.

그러나 9.18사변과 함께 만주는 일본군대의 란무장으로 전변되였다. 조선에서도 상해에서도 일본에서도 수만명의 일본군대가 떼를 지어 만주땅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만주대륙은 적아가 한데 엉켜돌아가는 최전선으로 되였다. 조선과 만주를 갈라놓고있는 국경은 사실상 일본군의 침공과 함께 제거된셈이였다.

일본군에 의한 만주강점은 의심할바없이 이 일대를 활동거점으로 삼아온 우리들의 투쟁에 험악한 난국으로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본심의 하나가 이 일대에서 앙양되는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을 교살하고 조선국내의 치안유지를 용이하게 하자는데 있는것만큼 우리는 금후 자기의 활동에서 여러모로 일본군경들의 위협을 받게 되리라는것을 각오해야만 하였다.

조선국내에서 적용되던 《신치안유지법》의 쇠몽둥이는 만주지방 조선사람들의 머리우에도 떨어지게 될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가를 세우게 되면 우리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커다란 장벽이 될수 있었다. 실지로 그후 일본이 조작해낸 《만주국》의 존재는 우리의 활동에서 막대한 장애로 되였다.

일본의 만주강점은 이 일대에 울짱을 박고 살아온 수십만을 헤아리는 조선사람들의 생활을 도탄에로 몰아넣을것이였다. 왜적이 없는 고장에서 총독정치의 멍에를 쓰지 않아도 되였던 조선이주민들의 자유는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인정풍토생소이역의 삶의 터전을 옮긴 류랑민들의 리향은 무의미한것으로 될것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9.18사변을 두고 불리한것만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불리한 점들만을 따져보면서 비관영탄에 빠졌더라면 일어서지도 못하고 절망에 짓눌려 주저앉았을것이다.

나는 그때 어째서인지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는다.》는 조선속담을 생각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을 두고 터득하고 정식화해놓은 그 인생철학이 나에게 심오한 진리를 귀뜸해주었다.

(만주는 범의 굴로 되였다. 이 굴에서 일본제국주의라는 범을 잡아야 한다. 이제는 무장을 들고 투쟁할 때가 되였다. 이런 때에 싸워서 결판을 짓지 못하면 우리는 영영 사람구실을 못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어서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였다.

일제는 전쟁승리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통치를 강화하고 전쟁물자보급을 위한 경제적수탈에 미쳐날뛸것이다. 민족적모순과 계급적모순은 극한점에 달할것이며 조선민족의 반일기운은 고조될것이다. 우리가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면 인민대중이 물심량면으로 우리를 적극 지지성원해줄것이다.

중국의 수억만 인민대중도 거족적반일항전에 떨쳐나설것이다.

오늘의 만주침공이 래일에는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질것이며 중국대륙은 전면전쟁의 화염속에 휩싸이게 될것이다. 자주정신이 강한 중국인민이 자기 조국앞에 닥쳐온 위험을 수수방관하지 않으리라는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우리의 곁에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용허하지 않으며 민족적자주권을 수호할 일념에 불타는 중국의 수많은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자들,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수억만 중국의 형제들이 있다. 어제날 조선사람들을 망국민이라고 불쌍하게 여기던 그들이 래일은 단순한 동정자로부터 믿음직한 동맹자가 되여 한전호에서 같은 과녁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될것이다.

우리의 익측에는 언제나 중국인민이라는 위대한 동맹자, 동맹군이 있게 될것이다.

일본이 중국관내에로 전쟁을 확대하게 되면 구미렬강들의 리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세계대전에로 가는 도화선으로 될것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일본이 세계대전에 말려들게 되면 인적, 물적자원의 결핍고갈로 곤난을 겪게 될것이다.

일본이 만주를 먹는다는것은 그들이 통치구역을 더 넓힌다는것을 의미한다. 통치구역의 확대는 불피코 통치력의 약화를 가져오게 될것이다. 일본은 식민지를 통치하는데서 종전의 밀도를 보장하지 못할것이다.

온 세계가 일본제국주의를 침략자로 규탄하게 될것이며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될것이다.

나는 이 모든것이 우리 혁명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게 될것이라고 타산하였다.

장학량군이 총퇴각을 시작하고 일제침략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우리 눈앞에서는 놀라운 사태들이 벌어졌다. 관공서의 관리들과 공안국의 경찰들이 업무를 중단하고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버리였다. 며칠사이에 군벌통치의 지방기관들이 모두 문을 닫아걸었다.

장학량군의 패주와 함께 군벌통치체계가 마비된것이다.

일제침략군은 전과를 확대하기에 급급하여 치안유지에 힘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지방에서는 한동안 무정부상태지속되였다. 우리는 일제가 대륙에 자기들의 통치체계를 새로 세울 때까지 얼마간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리라고 타산하였다. 이 공백상태야말로 우리들이 마음놓고 무장대오를 꾸릴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되였다.

혁명은 바야흐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있었다.

조선혁명앞에 부과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자가 무엇을 할것인가 하는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분골쇄신할 때가 온것이다.

9.18사변은 중국인민들에 대한 침략인 동시에 곧 이 일대에서 살고있는 조선인민들과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침공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로서 이에 응당한 대답을 해야 하였다.

나는 무장대오의 조직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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