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잊을수 없는 사람들

나는 언제인가 평양에서 까스뜨로동지를 만났을 때 그와 함께 항일혁명시기의 투쟁경험을 두고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그때 까스뜨로동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는데 그 질문들가운데 하나가 무장투쟁을 하면서 식량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하는것이였다.

나는 그에게 적의 식량을 빼앗아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인민이 시종일관 우리에게 식량을 대주었다고 하였다.

청년학생운동과 지하활동을 할 때에도 인민이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상해림시정부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와 같은 독립군단체들은 저마다 법을 만들어내여 동포들에게서 의연금도 받아내고 군자금도 모집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혁명활동에 돈이 필요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세금을 받아내기 위하여 법을 제정할수 없었다. 인민을 그 어떤 법이나 규정에 얽어매놓고 장부책을 끼고 다니며 누구네 집에서는 얼마, 누구네 집에서는 몇원 하는 식으로 돈을 받아내는것은 원래 우리의 리념에 맞지 않았다. 인민이 주면 먹고 주지 않아도 무방하다는것이 우리의 립장이였다.

하지만 인민은 어떤 정황에서나 생사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도와주었다. 인민이 각성되고 동원되여 언제나 혁명가들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돌보아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인민을 믿었다. 인민이 있는곳에서는 우리가 끼니를 굶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우리가 빈주먹을 들고 령으로부터 투쟁을 시작하여 승리를 거듭할수 있었던것은 전적으로 인민이 우리를 지지하고 성원한데 있었다. 고유수의 현정경, 김보안, 승춘학, 카륜의 류영선, 류춘경, 황순신, 정행정, 오가자의 변대우, 곽상하, 변달환, 문시준, 문조양, 김해산, 리몽린, 최일천 등은 남만과 중부만주지방에서 우리를 충심으로 도와준 잊을수 없는 사람들이다.

인민들은 자기들이 죽을 먹을 때에도 우리에게만은 밥을 해먹이면서 극진하게 대우해주었다.

우리는 인민들에게 페를 끼치는것이 송구스러워 어떤 때에는 일이 바빠 밤을 밝힌다는 핑게를 대고 학교수직실에서 자기도 하였다. 카륜에서 진명학교 교실이 우리의 숙소로 리용되였다면 고유수와 오가자에서는 삼광학교, 삼성학교 교실이 우리의 숙박소구실을 하였다.

내가 삼광학교 교실에서 목침을 베고 잘 때면 현균이 찾아와 성을 내면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ㅌ.ㄷ》성원이며 조선혁명군 대원인 현균은 똑똑하고 대바르고 인정이 깊은 사람이였다.

현균의 형 현화균은 고유수에서 농민동맹사업을 하였는데 우리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두 형제가 다 우리의 조직에 망라되여 일하는 사람들인데다가 아버지까지 독립운동을 하는분이여서 그 집에서는 우리를 각별히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현균의 아버지 현하죽은 독립운동자들속에서 상당한 지위와 권위를 가지고있던 인물이였다. 하죽이란 호이고 그의 본명은 현정경이였다. 고유수사람들은 본명대신 그를 하죽선생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현하죽선생이라고 하면 만주지방에 살고있는 조선동포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현하죽선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였고 또 그와 깊은 친분관계를 가지고있었다. 단순한 친구로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한 동지로서 자주 접촉하고 의사소통을 하였으며 뜨거운 우애심을 가지고 서로 존경하고 받들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현하죽선생은 통의부시절의 중앙법무위원장이였고 정의부시절의 중앙위원이였으며 국민부시절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유일당이라고 부르던 조선혁명당의 정치부책임을 맡고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리해도 깊었고 일상생활에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청년들을 동정하였으며 그들과 잘 어울리였다.

김혁, 차광수, 박소심동무들이 류하지방에서 사회과학연구회를 내오고 곳곳에 반제청년동맹조직을 꾸리고있을 때 그는 청년들의 계몽을 위해 강사로 자주 출연하였다. 왕청문학원시절과 화흥중학교시절에 현하죽선생의 강의를 받아본 사람들이 그후 그를 자주 회상하였다.

내가 고유수에 갈 때마다 현하죽선생은 나를 자기 집에서 재우군하였다.

《큰아버지네 집에 온 셈치구 마음 푹 놓게.》

선생이 나에게 늘하는 말이였다. 선생의 나이가 우리 아버지보다는 여라문살 우였다.

나는 그 집에서 열흘이나 스무날, 지어는 한달이상씩 묵으면서 군중들과의 사업을 하였다. 어느해인가는 고유수에서 현하죽선생의 가족들과 함께 5월단오까지 쇠였다.

사실 그때 형편에서 손님을 하루도 아니고 몇주일씩 재우며 밥을 해먹인다는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농사를 지어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얼마 안되는 식량을 가지고 혁명가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나면 집안사람들은 죽물도 변변히 먹을수 없었다.

현하죽선생의 집에서는 그때 나에게 입맛이 당기는 음식을 만들어주느라고 있는 성의를 다하였다. 어떤 때에는 닭도 잡아주고 두부와 비지도 만들어주고 근대국도 끓여주었다.

그 집안 녀자들이 두부를 앗느라고 망질을 할 때면 나도 팔을 걷어올리고 달려들어 망돌을 돌리였다. 우리가 망돌앞에 앉아 일을 거들어줄 때마다 스물두세살쯤 나보이는 현화균의 안해 김순옥이 몹시 수집어하면서 얼굴을 쳐들지 못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현하죽선생은 민족주의단체인 국민부에 소속되여있으면서도 자기가 국민부내의 혁신파라는것을 숨기지 않았으며 장차 공산주의운동을 하겠다는것까지도 드러내놓고 말하였다.

내가 고유수를 떠난 다음 현하죽선생이 국민부내부에서 벌어진 집안싸움을 피해 서안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장학량의 군대가 그곳으로 가니 선생도 그에게 기대를 걸고 따라간것 같았다. 장학량이 배일감정이 강하였기때문에 그의 우산밑에서 반일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동3성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자들이 상해나 서안, 장사 같은곳으로 활동무대를 옮기였다.

조국이 해방된후 외국방문의 길에 올라 렬차나 비행기를 타고 중국 동북지방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만주의 낯익은 산천을 바라보며 고유수를 생각하고 현하죽선생을 생각하고 선생의 후손들을 생각하였다. 현하죽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선생의 후손들은 다문 한두명이라도 살아있을터인데 왜 종무소식일가, 나는 그들의 주소를 몰라서 속수무책이지만 그들이야 나에게 편지를 할수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사람이 신세를 지기는 쉬워도 갚기는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1990년 봄에 뜻밖에도 현하죽선생의 후손들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다.

현하죽선생의 맏며느리 김순옥녀성은 내가 자기 집에 가서 식사할 때 사용하던 놋그릇과 나에게 두부를 만들어줄 때 돌리던 망돌을 60년동안이나 보관하고있다가 우리 혁명박물관에 보내주었다. 그 사연을 담은 글이 길림에서 조선사람들이 발간하는 《도라지》라는 잡지에 실리였는데 우리《로동신문》이 그 기사를 그대로 전재하였다.

60년동안 소식을 모르던 은인들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으니 나로서는 감회를 억제할수 없었다. 어느때든지 나라가 독립되면 고유수에서 진 빚을 단단히 갚으려고 하였는데 만나서 내 손으로 소박한 음식상도 차리고 회포도 나누고싶은 심정이 간절하였다.

김순옥도 죽기전에 나를 만나봤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1990년 3월에 나의 명의로 김순옥을 초청하였다. 막상 만나고보니 그는 80고령으로 아쉽게도 로환이 심하여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였다.

김순옥이 우리 나라로 나올 때 그의 후손들이 여섯명 따라왔는데 나에게는 다 서름서름한 초면의 얼굴들이였다.

내가 그들을 만나는 자리에는 현균의 아들도 참가하였다. 그의 입모양이 아버지의 입모양과 신통히도 비슷하였다. 입모양이라도 비슷하니 이미 고인이 된 현균이 다시 살아서 나를 찾아온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김순옥일행을 외국귀빈들이 리용할 숙소로 지어놓은 초대소에 들게 하고 한달가량 머무르면서 고국편답을 하게 하였다.

안타까운것은 김순옥녀성이 귀가 어두워서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것이였다. 발음도 똑똑치 못하고 기억력도 상당한 정도로 나빴다. 그처럼 생사를 몰라 궁금해하던 은인들중 한사람을 60년만에 기적적으로 만났으나 나는 그 은인과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것은 그가 보충해주고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것은 내가 보충해주며 장시간 고유수시절을 회상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대가 허물어지니 아쉬운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후대들도 현하죽선생의 운명과 활동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현하죽선생이 조선독립을 위해 어떻게 싸웠으며 우리의 혁명사업을 어떻게 도와주었는가 하는데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하는것이 선생의 경력을 잘 알고있는 나의 의무이기도 하였다.

같은 피줄을 가지고 태여났다고 해서 선렬들의 위업이 후대들에 의해서 저절로 이어지는것은 아니다. 선렬들의 투쟁업적을 잘 알고 그것을 진심으로 귀중히 여길줄 아는 후대들만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세대들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믿음직하게 이어갈수 있다.

나는 김순옥을 만나는 자리에서 공국옥과 오가자에서 우리의 혁명활동을 많이 도와준 문조양, 문숙곤도 함께 만나보았다.

공국옥은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를 대신하여 3년동안 베감투를 쓰고 몽상을 입은 공영의 딸이다. 어느해였던지 길림육문중학교를 다닐 때였는데 방학이 되여 무송에 들리니 얼굴에 흠집이 생겼다고 남편한데서 소박을 당하던 공영의 안해가 아이를 업고 우리 집에 와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공국옥이다.

나는 해방직후 평양에서 농민동맹회의를 지도하다가 그 회의에 대표로 참가한 벽동사람을 만나 그에게 공영의 유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가고 물었다. 공영이 벽동출신이였기때문에 그의 미망인과 딸이 고향에 있을수 있다는 짐작이 들어서였다.

그 대표는 벽동에 공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것만은 사실이지만 공영의 가족이 살아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몹시 락심하였다. 다른 유가족들은 나타나는데 공영의 유가족만은 행방조차 알수 없으니 마음이 허전했다.

그 당시 우리는 만경대에다가 혁명자유가족학원을 세울 준비를 하고있었다.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시민들과 개선인사를 나누고 20년만에 조부모님들이 기다리고계시는 고향집에 돌아오니 소학교시절의 동창생들이 찾아와서 한때 우리 아버지가 교사로 일하던 순화학교자리에 나의 이름을 띤 중학교를 하나 세우자고 제기하였다. 만경대는 김장군이 태여난 유명한 고장인데 학교를 하나 큼직하게 짓고 장군의 이름을 붙여 《김일성중학교》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면서 나를 설복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의 향촌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지난날 수많은 애국자들이 나와 함께 손에 무장을 잡고 산에서 싸우다 희생되였다, 그들은 눈을 감으면서 앞으로 조선이 독립되면 자기네 아들딸들을 공부시켜 훌륭한 혁명가로 키워달라고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그때부터 그들의 유언대로 조선이 독립되면 꼭 동지들이 남겨놓고 간 자제들을 공부시켜 자기 부모의 뜻을 잇도록 해야겠다고 늘 생각해왔다, 조국을 찾고보니 그 결심이 더욱 굳어진다, 만경대에는 중학교가 아니라 혁명가의 유자녀들을 키우는 학원을 세워야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은 혁명자유가족이 얼마나 되는가, 무슨 유자녀가 그렇게 많아서 학원까지 세우겠는가고 하였다. 당, 행정의 중요직책에서 일하는 간부들가운데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렬사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희생되였는지 가늠조차 못하고있었다.

이국의 산야와 강하에 전우들의 시신을 수없이 묻어온 나로서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토지개혁후 첫 수확을 해서 농민들이 나라에 바친 애국미를 밑천으로 삼아 만경대에 혁명자유자녀학원을 세웠다.

학원에서 공부할 유자녀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수많은 일군들이 국내각지와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되였다. 그때 수백명의 유자녀들이 중국에서 나왔다. 지금 우리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국성원으로 사업하고있는 일부 동무들도 그무렵에 림춘추동무를 따라 조국에 나왔다.

어떤 유자녀들은 물감장사나 담배장사 같은것을 하며 살다가 만경대에 혁명학원이 설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제 발로 걸어서 우리를 찾아왔다. 그런 아이들가운데는 독립군의 후손들도 있었고 로조나 농조와 같은 조직들에서 반일투쟁을 하다가 희생된 애국자의 자제들도 있었다.

그런데 공국옥이만은 어데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평안북도지방에 내려갈 때마다 공영의 유가족들의 행처를 수소문하였으며 그곳 일군들에게 그들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원아들과 같이 명절을 쇠려고 학원에 내려가 그들이 명랑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볼 때면 산나물보따리를 이고 짚신을 끌면서 소남문거리의 우리 집으로 찾아오군하던 공영의 안해의 얼굴과 어머니의 등에 업혀 주먹을 빨던 공국옥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짜릿한 심회를 금할수 없었다.

나는 1967년에야 공국옥을 찾아냈다. 그때는 이미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김일성 김성주라는것을 알았더라면 공국옥의 어머니가 인차 나를 찾아왔을것이다. 그 녀인이 김일성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데다가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는데 자기 남편은 독립군이였으니 다르게 보지 않을가 하여 자식들에게도 아버지가 무슨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것 같다.

우리는 공국옥을 찾은 다음 그를 고급당학교에 보냈다. 공국옥은 그 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시당과 철도부사적관에서 일하였는데 지금은 나이가 많아 년로보장을 받으며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있다.

고유수의 김보안도 현하죽선생과 마찬가지로 우리 아버지의 친구였다. 그는 독립군에서 중대장까지 한 사람이다.

김보안은 내가 현하죽선생의 집에만 가고 자기 집에는 한번도 들리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였다. 우리 동무들이 집에 찾아가면 그는 자기와 김형직은 보통사이가 아니고 또 자기도 성주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지 않는데 어째서 그 사람은 자기 집에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부터 나는 고유수에 가면 김보안의 집에 꼭꼭 들리군하였다.

김보안은 약국을 차려놓고 거기에서 나오는 얼마간의 돈을 우리가 운영하는 삼광학교 후원비로 내군하였다. 그는 교육열이 높은 사람으로서 청소년들을 계몽시키는 사업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우리가 삼광학교에 나와 강연을 해달라고 초청하면 그 초청에 기꺼이 응하였다.

김보안은 고유수사람들이 돈계산도 할줄 모르니 이런 까막눈들을 가지고 조선독립을 어떻게 하겠는가고 개탄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어른들이 돈계산을 하지 못했다면 잘 믿지 않겠지만 그 당시 중국사람들과 길림성에서 살고있던 조선의 이주민들중에는 돈계산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에서 발행되는 돈이 다르고 현에서 류통되는 돈이 서로 다른데다가 길림관채니, 봉천다양이니, 길림소다양이니, 은다양이니 하는 여러가지 돈들이 저마끔씩 가치가 달라서 글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들은 장거리에 가도 돈계산을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야학에 농민들을 불러다놓고 산수시간에 돈계산법을 배워주었다.

돈계산도 할줄 모르는 까막눈들이라고 흘겨보던 사람들이 가감승제까지 척척 하는것을 보고 김보안은 《아무렴 그렇겠지. 조선사람이 원래 머리야 명석하지.》하고 흡족해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무식자로부터 유식자로 되는 과정을 보는것이 재미난다.》고 하면서 야학도 참관하고 삼광학교에 나와서 수업참관도 하였다.

삼광학교의 고등과학생들은 하나같이 지혜롭고 총명하였다. 그 학생들중에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인상깊게 남아있는 인물은 류춘경과 황순신이다.

그들은 둘 다 카륜의 혁명조직들에서 추천되여온 학생들이였다. 류춘경의 아버지 류영선은 진명학교 교원으로 일하면서 우리의 혁명사업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 당시 류춘경, 황순신동무들의 나이는 14~15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는 고유수에 왔다가 카륜에서 길림으로 돌아갈 때 그들에게 우리의 무기운반을 부탁하군하였다. 군벌들이 녀자들에 대해서는 단속을 덜하였다.

류춘경과 황순신은 언제나 그 부탁을 성실하게 리행하였다. 그들은 치마밑에 무기를 감추고 50메터쯤 떨어져서 우리의 뒤를 따르군하였는데 길가에서 군벌들이 우리에 대해서는 여러번 조사를 하였지만 그들에게는 주의를 돌리지 않고 무심히 통과시켜주군하였다.

황순신은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삼광학교시절의 소년탐험대원답게 일을 본때있게 하여 다수확농민으로 이름을 날리며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속에서 한생을 값있게 살아왔다. 전후시기에는 한동안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류춘경은 만주에서 여러 지방으로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리관린처럼 인생말년을 조국에서 보내고싶다고 하면서 1979년에 귀국하였다.

황순신처럼 젊은 나이에 귀국했더라면 그도 이름있는 녀성활동가가 되여 사회와 인민을 위해 좀더 활력있는 후반생을 보냈을것이다. 삼광학교시절의 류춘경은 녀학생들중에서 글도 제일 잘 쓰고 연설도 제일 잘하고 두뇌도 제일 명석한 전도가 촉망되는 소녀였다.

우리가 안도에서 유격대창건준비사업을 하고있을 때 그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여 내가 있는곳에 와서 투쟁을 계속하고싶다는 의향을 표시하였다. 그때가 무장투쟁을 시작하려고 서두르던 시기이고 또 일단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되면 녀자들이 남자들을 따라다니기 힘들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기때문에 나는 그에게 안도에 오라는 련락을 보내지 못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녀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무장투쟁에는 적합치 않다고 여기였다.

귀국당시 류춘경의 나이가 50살정도만 되여도 우리는 그를 공부시켜 사회활동에 참가시키였을것이다.

우리는 지난날 혁명투쟁에 직접 참가했거나 관여한 사람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이가 좀 들어도 그들을 공부시키고 알맞는 자리에 배치하여 정치활동을 시키는 원칙을 세웠다. 아무리 총명하고 쓸모있는 사람도 오래동안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에 파묻혀있으면 사고능력이 감퇴되고 세상물정에 어두워지며 인생관에 녹이 쓰는 법이다.

해방후 적지 않은 투사들과 혁명투쟁연고자들이 적재적소에 등용되지 못하고 파묻혀있었다. 종파분자들은 항일투사들이 경력은 좋지만 무식해서 쓸모가 없다고 하면서 오래동안 그들을 간부로 등용시키지 않았다. 무식하면 공부를 시켜서라도 제구실을 똑똑히 할수 있도록 강심을 먹고 키워야겠는데 배척하고 외면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혁명자유자녀들이나 혁명투쟁연고자들을 찾아내면 그들을 고급당학교나 인민경제대학 같은데서 공부시켜 그들의 준비정도에 따라 간부로 등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공부를 하지 않고 조직생활을 하지 않으면 혁명을 오래 한 투사들도 시대의 락오자가 되고만다.

수많은 투사들과 그들의 유자녀들, 항일혁명투쟁방조자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당과 국가의 유능한 지휘성원으로, 저명한 사회활동가로 자라났다.

오가자의 문조양도 그런 사람이였다. 문조양은 오가자에서 반제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활동할 때 변달환, 최일천, 리몽린, 김해산과 함께 우리 일을 많이 도와준 사람이다. 그는 우리와 함께 글도 많이 쓰고 연설도 많이 하고 대중조직들을 꾸리는 사업에도 정열적으로 참가하였다. 아마 회의도 그의 집에서 제일 많이 했던것 같다.

나는 오가자에 가있을 때 문조양의 형 문시준과 최일천이네 집신세를 많이 졌다.

문시준은 마음씨가 후한 사람이였다. 그는 몇달씩이나 돈도 받지 않고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었다. 우리가 오가자에서 활동할 때 문시준이 우리 일행을 위해 돼지까지 잡아주며 아무쪼록 나라를 기어이 독립시켜달라고 부탁하던 일이 어제일 같다. 나는 그 집에서도 오래동안 침식을 하였다.

문시준네 집에서는 식사를 할 때마다 밥상에 마늘짠지를 놓아주군했는데 그 짠지맛이 별맛이였다.

그 마늘짠지맛이 얼마나 독특했던지 해방후 문시준의 딸 문숙곤을 만나니 그 생각부터 났다. 그래서 그를 집에 초청해다가 마늘짠지만드는 방법을 배워주게 하였다.

내가 지방에 내려갈 때마다 우리 사람들이 마늘짠지를 만들어 밥상에 놓아주지만 어려운 때 오가자에서 조밥을 물에 말아먹으며 달게 먹던 그 짠지맛에는 비길수가 없다.

얼마전에 문조양은 생일 80돐을 쇠였다. 나는 그때 오가자시절을 생각하며 그에게 꽃다발을 보내주고 팔갑상을 차려주었다.

나는 오가자에서 반제청년동맹 위원장이며 《농우》의 주필이였던 최일천의 집에서도 몇주일씩 류숙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를 최천, 최찬선이라고도 불렀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찍혀진 최형우라는 이름은 해방직후 서울에서 저술사업을 할 때 사용한 그의 필명이다.

오가자에서는 그가 제일 개명한 사람이였다. 그는 김혁처럼 시는 짓지 않았지만 뛰여난 산문가의 필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권유로 여러해동안 장춘에 나가 비밀공작원활동을 하면서 《동아일보》지국장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 과정에 우리에 대한 자료도 많이 수집하고 좋은 글을 써서 투고도 자주 하였다.

최일천은 일본정보계통이 주목하는 《요시찰인》이였다. 그가 맡아보는 《동아일보》지국의 출입문밖에는 매일같이 일본헌병들과 밀정들이 와서 그를 감시하느라고 당번을 섰다. 적들이 최일천을 주목하게 된것은 그가 장춘에 나와서도 청년들과의 사업을 계속하였기때문이며 국내애국인사들과의 밀접한 련계밑에 우리에 대한 선전을 많이 하였기때문이다. 우리가 동만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한 다음 그는 반제청년동맹조직을 통하여 직접 육성한 여러명의 핵심청년들을 항일유격대에 보내주었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반영된 재만조선인들의 민족해방투쟁실상과 그것을 유감없이 구사한 활달하고도 격정적인 필치는 바로 이상과 같은 혁명실천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수련된것이라고 평가해야 할것이다.

최일천은 심양과 베이징에 있을 때 여러차례에 걸쳐 서울에 나와 국내의 저명인사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에게 항일무장투쟁의 전과를 소개하였다. 조국광복회가 결성된후에는 그 강령도 해설해주었다. 그의 선동에 따라 리극로선생이 지도한 조선어학회와 민속운동도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전폭적으로 지지찬동하고 그 정신에 따라 민족문화와 민족의 얼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일천은 일본관헌들의 박해와 감시가 심해지자 《동아일보》지국의 일을 할 때 만주각지를 돌아다니며 손수 수집해놓았던 우리의 투쟁자료들과 독립운동자료들을 가지고 서울에까지 나와 당시 조선어학회를 책임지고있던 리극로선생에게 그 자료들을 모조리 넘겨주었다. 그 자료들속에는 우리가 오가자에서 발간한 《농우》잡지 묶음도 있었다.

《이것은 국보적가치를 가지는 자료들입니다. 적의 감시와 추적속에서 사는 나에게는 이 자료들을 간수할 힘이 없습니다. 나라가 독립되면 이 자료들로 력사저술을 하려고 하는데 리선생이 어떻게 하나 그때까지 잘 보관해주기 바랍니다.》

그때 최일천은 이런 부탁을 남기고 만주로 다시 들어갔다.

그는 해방직후 리극로선생이 자기의 부탁을 받고 소중히 보관해온 자료들을 넘겨받아가지고 단숨에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써냈다. 그 책은 파지를 모아 제조한 모래알까지 섞인 재생지에 인쇄된것이였으나 구독자들이 너무 많아 력사와 문학을 전공하는 젊은 지식인들이 백지에 전문을 베껴가지고 다니면서까지 탐독하는 인기도서로 되였다.

최일천은 해방직후 미군정이 반공반북을 이남땅의 《국책》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총검으로 떠받들어주는 살벌한 환경속에서 반일투쟁만화도 찍어내여 청소년들에게 반제반일정신을 고취시켰다.

해방후 정치적혼잡과 무질서가 지배하던 서울장안에서 그가 온갖 정신력을 다 동원하여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와 같이 무게있는 글을 써냈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최일천은 해방후 남조선정계에 진출하여 조선혁명당 정치부장, 신진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일성장군환영위원회 위원, 민족자주련맹 집행위원 등 중요직책을 력임하면서 려운형, 홍명희, 김규식 등 인물들과 손을 잡고 민주력량의 집결과 남북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는데 조국해방전쟁시기 서울에서 반동들에게 피살되였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는 최일천의 미완성작이다. 그는 원래 2집을 낸 다음 계속하여 다음권을 쓰려고 하였으나 해방후 복잡한 남조선정치무대에 발을 들이민후 시간을 내지 못하여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책의 다음권에서 필자는 우리의 혁명활동을 전면적으로 서술할 계획이였다고 한다.

최일천이 살아있었더라면 분명 그 책이 세상에 나왔을것이고 그렇게 되였더라면 우리의 혁명력사와 관련된 흥미있는 사료들도 더 나왔을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 항일혁명투쟁시기를 회상할수 있는 인물들가운데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의 초기활동을 회상할수 있는 사람들은 더구나 적다. 나의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다. 잊어버린 사연들도 많고 어떤 일은 삭막해서 날자와 인물들을 정확히 회고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남만과 중부만주일대에서 우리의 활동을 도와준 인물들가운데서 김리갑의 애인 전경숙은 특별히 강한 인상을 남기고있다.

김리갑은 《금강관》(《대성관》)사건의 주인공으로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도 소개된 사람이다.

중국사람으로 변장한 일본령사관 경찰들은 1930년 봄 길림시내 복흥가에 있는 오상헌(오춘야)의 집에서 김리갑의 입을 틀어막고 팔다리를 결박하여 그를 장춘으로 련행해갔다.

그후 그는 재판에서 징역 9년이라는 중형을 지고 대련감옥에 끌려갔다.

전경숙의 부모들은 딸이 김리갑과 같은 혁명가와 결혼하는것을 반대하였으나 그 녀자는 부모들의 뜻을 단호히 거역하고 탈가하여 애인을 따라 대련에 갔다. 그때 그의 나이가 열여덟인가 열아홉살이였다. 그는 방직공장에 들어가 공청책임을 지고 활동하면서 김리갑의 옥바라지를 성의있게 하였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동만특위 서기로 사업하던 동장영이였다. 그는 자기가 대련에서 지하당사업을 할 때 전경숙을 만난 일이 있다고 하면서 그의 열렬하고 진실한 사랑에 감동되여 《그 녀자를 만나보고나서 조선녀성의 절개와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하였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전경숙의 고결풍모탄복하였다. 나는 그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만청총대회에 참가하려고 왕청문에 갔을 때 나에게 저녁을 지어주고 국민부의 테로계획까지 귀띔해주던 그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그려보았다. 그리고 김리갑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만주대지를 뛰여다닐 때 우리에게 밥을 지어주고 푼전을 모아 학비와 로자를 쥐여주던 그 많은 은인들의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 은인들중에는 아직도 생사와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제라도 그런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마음속에 맺혀있는 한이 다 풀릴것 같다. 그 사람들에게 밥이라도 한끼 대접하고 한자리에 앉아 수십년동안 쌓이고쌓여온 회포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지난날 그들이 나에게 바친 그 로고지성을 죄다 보상할수 있겠는가.

인민을 더 잘 살게 하고 우리 인민에게 더 큰 복리를 마련해주며 인민의 지지성원속에서 개척한 혁명을 완성하는것이 그들에게 바치는 최대의 보상이며 선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민에게 이런 보상을 하기전에는 어느 누구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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