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조선혁명군

카륜회의에서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내세운 당조직건설사업은 첫 당조직ㅡ건설동지사의 결성으로 제일보를 내디디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할수 없었다. 우리앞에는 무장투쟁준비를 다그쳐야 할 어려운 과제가 남아있었다.

우리는 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첫 사업으로 고유수에서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

우리가 1년이나 2년이 지난후에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창건할것을 예견하면서도 조선혁명군과 같은 과도적인 정치 및 반군사조직을 내온것은 그 군의 활동을 통하여 대규모의 유격부대를 꾸리기 위한 준비를 해두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우리는 조선혁명군의 정치군사활동을 통하여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축적하려고 하였다.

사실 우리한데는 무장투쟁을 벌리는데 필요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 령토에서 무장투쟁을 해야 하는 조건에서 우리에게는 그에 상응한 경험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만한 군사교범이나 경험은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우리에게 밑천이 있다면 독립군출신의 몇몇 동무들과 화성의숙을 다닌 얼마간의 동무들이 있고 몇자루의 권총이 있을뿐이였다. 그 나머지는 백지상태였다. 무기도 우리 손으로 획득하고 군사적경험도 우리스스로 축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의 과도적조직으로 내온것이 바로 조선혁명군이였다.

고유수에서 처음에는 김원우, 리종락이 혁명군결성을 준비했고 후에는 차광수가 파견되여 그 준비를 완료하였다.

혁명군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사업은 여러 지역에서 다발적으로 진행되였다.

그 준비사업의 기본은 혁명군에 입대시킬 청년들을 선발하는 일과 무기를 마련하는 일이였다.

우리는 독립군들과의 사업을 잘하여 선진사상에 동조하는 똑똑한 군인들을 돌려세워 사람이나 무기를 해결하는것도 하나의 방도로 내세웠다. 혁명군에 군인출신이 많으면 그들이 모체가 되여 군사지식이 없는 청년들도 얼마든지 훈련시킬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동무들이 국민부산하에 있는 독립군과의 사업을 많이 하였다. 우리의 방침은 독립군중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군인들을 교양하여 우리 진영으로 돌려세우며 사상적준비정도에 따라 혁명군에도 받아들이자는것이였다.

국민부는 이 시기에 와서도 국민부파와 반국민부파로 나뉘여 권력싸움을 계속하였다. 그 당시 국민부파는 재만조선인 통수권을 쥐였고 반국민부파는 독립군의 통수권을 쥐였다. 이 조치는 결국 민중과 군대를 분렬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1930년 여름에 들어서면서 두 파의 대립은 서로 상대편 간부들을 암살하는 테로전으로 번져져갔으며 이 테로전을 절정으로 하여 두 파의 세력은 완전한 결렬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 지경이였기때문에 독립군내에서는 대원들뿐아니라 소대장, 중대장들까지도 상층부를 불신하였고 상층이 주는 지시를 잘 받아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들의 말을 더 잘 들었다.

차광수는 통화, 휘남, 관서일대에서 독립군과의 사업을 하였으며 리종락은 고유수에서 자기 휘하에 있는 대원들을 교양하여 혁명군에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다.

리종락은 원래 고유수에서 정의부소속의 독립군 1중대에 있다가 화성의숙에 와서 공부할 때 《ㅌ.ㄷ》에 가입한 사람이다. 그와 같이 화성의숙에 추천되여온 1중대출신의 학생들가운데는 박차석, 박근원, 박병화, 리순호를 비롯하여 여러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리종락은 화성의숙이 페교된후 고유수에 있는 자기 출신중대로 돌아가 부중대장을 거쳐 중대장이 되였다. 지금과는 달리 군력이 얼마 되지 않던 당시에는 중대가 큰 군사력량이였다. 만주에서 세력이 제일 강하다고 하던 국민부도 산하에 겨우 아홉개의 중대를 두고있을뿐이였다. 그러므로 중대장이라면 자연히 독립군들속에서 큰 인물로 떠받들리기마련이였다. 고유수에서 리종락의 위신이 대단했다.

김혁, 차광수, 박소심 동무들이 1928년부터 1929년사이에 류하지방에서 최창걸의 영향하에 있는 독립군의 보호를 받으며 혁명활동을 활발히 전개한것처럼 고유수에 파견된 우리 동무들도 리종락이 지휘하는 독립군부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활동하였다.

리종락은 그때까지만 해도 혁명을 하겠다는 각오와 열의가 대단히 높았다. 그는 화성의숙이 페교된후 출신중대에 돌아가 우리가 화전에서 준 과업대로 독립군대원들과의 사업을 잘하였다. 대담한것, 결단성이 있는것, 판단력이 빠른것, 통솔력이 강한것, 이런 자질이 그의 우점이였다.

그대신 그에게는 랭철리성과 사고력이 부족하였다. 기분주의가 많고 과격하였으며 개인영웅심이 농후하였다. 이것이 후날 그를 혁명을 배반하는 길로 굴러떨어지게 한 중요한 병집이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군이 지휘체계도 정연하지 못하고 또 그 내부가 뒤죽박죽인데 각 지방에 산재해있는 중대들을 무장해제시켜가지고 국민부반동들을 숙청하자고 하였으며 독립군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공개적으로 활동하면서 무장도 얻고 국민부와도 대결하자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독립군과의 사업에서 좌경적오유를 범하지 않도록 이런 경향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형권삼촌도 두개의 공작조를 편성해가지고 장백지구에 나갔다. 삼촌은 지양개뒤산에 근거지를 정하고 장백의 여러 지역에 백산청년동맹지부와 농민동맹, 반일부녀회, 소년탐험대를 조직하여 무기공작과 의식화활동을 하였으며 지방청년들을 흡수하여 군사훈련도 주었다. 형권삼촌의 노력으로 장백지구에 있는 독립군력량이 우리의 영향하에 들어오게 되였다.

대원들을 선발하고 그 후비를 마련하는 사업과 함께 무기를 얻기 위한 공작도 맹렬하게 진행되였다.

무기를 해결하는데서 제일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 최효일이였다. 최효일은 철령에 있는 일본인무기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사람이였다. 그 당시 일본사람들은 만주에서 총장사를 많이 하였다. 그들은 총을 비적들에게도 팔고 중국인지주들에게도 팔았다. 최효일은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청년이였지만 일본말을 아주 잘하였다. 그가 일어로 대화할 때면 조선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류창하였다. 최효일이 점원으로서는 아깝다고 할만큼 명석하고 일본말도 잘하였기때문에 상점주인은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최효일을 제일먼저 쟁취한 사람은 장소봉이였다. 장소봉은 카륜을 개척할 때 장춘, 철령, 공주령일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우연히 최효일을 알게 되였다. 몇차례의 접촉을 통해 상대가 성실하고 대바른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된 그는 최효일을 반제청년동맹에 흡수하고 그를 리종락에게 소개해주었다. 이때로부터 최효일은 철령에서 적후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는 리종락과 련계를 가지고 독립군중대들에 무기를 살금살금 팔아주었다. 상점주인은 최효일의 손을 거쳐 판매되는 무기가 조선사람들한데 넘어간다는것을 알면서도 매상고를 높이는데만 급급하여 그런것은 아는체하려고 하지 않았다.

최효일은 무기를 처음에 중국인들한테 팔아주다가 다음에는 독립군한데 넘겨주었으며 나중에는 철령의 일본인상점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조달해주는 전용상점처럼 만들어버리였다. 그 과정에 그의 세계관도 몰라보게 발전하였다.

리종락과 장소봉은 나를 만날 때마다 철령에서 멋있는 청년을 한명 흡수하였다고 하면서 최효일의 자랑을 하군하였다. 그래서 나도 최효일에게 은근히 큰 기대를 품게 되였다.

1928년인가 1929년에 최효일은 나를 만나려고 일부러 길림에 찾아왔다. 만나고보니 얼굴이 규방처녀들처럼 해말쑥하고 곱살하게 생긴 사람이였다. 그런데 생김새와는 달리 술을 많이 마시였다. 혁명가의 기준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이 좀 흠이였다. 우리는 그때 려관에서 밥도 같이 먹고 담화도 여러시간 하였다. 그가 간드러진 일본《옥상》의 말을 흉내내면서 천황을 비롯한 일본의 고위급군정인물들과 우리 나라의 매국 5대신을 걸죽하게 욕질하는 바람에 나는 담화도중 여러번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다.

최효일은 남들이 보기 드문 미인이라고 하면서 부러워하는 안해와 함께 살면서도 가정생활의 재미 같은것에 대해서는 꿈만하게 여기는 태평스러운 성미를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새색시같은 얼굴생김새와는 달리 혁명투쟁에서는 놀라울만치 담이 크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였다.

그가 일본인상점의 무기를 여라문정 빼내가지고 안해와 함께 고유수로 탈출해온것은 카륜회의직전이였다. 우리가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건설하기에 앞서 그 과도적단계로 소규모의 군사정치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를 다그치고있을 때여서 최효일의 탈출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우리는 동무들의 보고를 통하여 혁명군을 결성할수 있는 준비가 완료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고유수에 가보니 실지로 대원명단과 무기가 다 마련되여있었고 결성모임장소와 모임참가대상자까지도 확정되여있었다.

조선혁명군결성식은 1930년 7월 6일 삼광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되였다.

무기를 수여하기에 앞서 나는 간단한 연설을 하였는데 이 연설에서 조선혁명군은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준비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정치 및 반군사조직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조선혁명군을 기초로 하여 앞으로 상비적인 혁명무력이 창건될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조선혁명군의 기본사명은 도시와 농촌에 들어가 인민대중을 교양하고 각성시켜 그들을 항일의 기치아래 묶어세우면서 무장투쟁의 경험을 쌓고 장차 본격적인 무장대오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나가는것이였다.

연설에서는 조선혁명군의 당면과업으로 항일무장대오를 꾸릴수 있는 골간을 육성하는 문제, 혁명군대가 의거할수 있는 대중적지반을 꾸리는 문제, 무장투쟁을 벌리기 위한 군사적준비를 충분히 갖출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우리는 조선혁명군에 제1대, 제2대, 제3대 하는 식으로 여러개의 대를 내왔다.

나의 제의에 의하여 조선혁명군 대장으로는 군사적경험이 많고 통솔력이 강한 리종락이 추천되였다.

어떤 력사가들가운데는 국민부가 만들어낸 조선혁명군과 우리가 고유수에서 조직한 동명의 조선혁명군을 같은 군사조직이 아닌가 하고 혼돈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민부가 만들어낸 조선혁명군 성원들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혁명군에도 망라된것만큼 그렇게 추리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두 군사조직은 명칭이 같으면서도 서로 지도리념도 다르고 사명도 달랐다.

국민부가 만들어낸 조선혁명군이라는것은 국민부자체의 내적모순이 그대로 반영되여 실제활동과정에 대립과 분쟁이 반복되면서 그 명칭과 간부진영도 사흘이 멀다하게 뒤바뀌우군하였기때문에 사실상 실체를 가려보기 힘든 형편이였다.

우리가 만들어낸 조선혁명군은 공산주의리념에 의해서 지도되며 군중정치사업도 하고 군사활동도 하는 정치 및 반군사조직이였다.

조선혁명군을 결성할 때 우리는 명칭을 어떻게 달겠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론의를 하였다. 조선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하는 무장력으로는 처음이기때문에 이름도 새 맛이 나게 달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같이 열을 내여 토론에 참가하였다. 그런 과정에 여러가지 안들이 나왔다.

나는 그때 국민부가 내온 조선혁명군의 명칭을 그대로 리용하여 우리 군의 이름을 조선혁명군으로 해야 한다고 그들을 설복하였다. 《ㅌ.ㄷ》를 결성할 때에도 민족주의자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공산주의냄새가 나는 말은 붙이지 않고 타도제국주의동맹이라고 달았는데 우리가 조직하는 군대도 조선혁명군이라는 외피를 쓰고있으면 민족주의자들의 눈에 거슬리지도 않고 활동상 편리할것이라고 하였다.

조선혁명군이라는 외피를 썼기때문에 그후 우리 군은 실지로 활동에서 많은 덕을 보았다.

조선혁명군은 조직된후 여러 소조로 편성되여 각지에 파견되였다. 국내에도 몇개의 소조가 파견되였다.

그때 우리가 혁명군소조들을 조선에 파견한 목적은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꾸리고 국내혁명투쟁을 앙양시키자는데도 있었지만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할수 있겠는가 하는것을 가늠해보자는데도 있었다.

우리는 조선혁명군결성식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가운데서 리제우, 공영, 박진영을 중심으로 하나의 국내공작소조를 뭇고 그들에게 신갈파로 해서 랑림산맥을 타고 평안북도일대로 뻗어나가면서 광범한 대중속에 혁명조직을 내올 과업을 주기로 하고 그 소조의 조장으로 리제우를 임명했다.

우리는 1928년에 이미 무송주변과 내도산일대에서 활동하고있던 그들에게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장백지구로 활동근거지를 옮기라는 과업을 주었다. 리제우는 그 과업을 받고 장백현일대에 나가 군중을 조직에 묶어세우고 국내깊이까지 들락날락하면서 대중을 의식화하기 위한 활동을 벌리였다.

우리는 형권삼촌을 조장으로 하고 최효일과 박차석 등을 망라한 또 한패의 공작소조를 국내에 내보내기로 하였다. 이 소조에는 장백에서 압록강을 건너 풍산과 단천, 함흥을 거쳐 평양부근에까지 진출할 과업을 주었다.

박차석이 이 조에 망라되게 된것은 형권삼촌과의 우정때문이였다. 그는 길림시주변의 농촌에서 교원의 간판을 가지고 지하사업을 하다가 1928년 겨울에는 계영춘, 고일봉과 함께 무송일대에서 혁명조직을 내오는 사업에 참가하였다. 그때 어떻게 되여서인지 박차석이 형권삼촌과 딱친구가 되였다. 삼촌이 국내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을 듣고 박차석도 같이 가겠다고 하기때문에 우리도 그 심정을 리해하고 그의 제의를 쾌히 받아들이였다.

활동구역으로 떠나간 조선혁명군 대원들은 도처에서 대담무쌍한 활동을 벌렸다.

사평가와 공주령일대를 활동구역으로 삼고 사업하던 조선혁명군 대원들중에 현대홍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평가에서 군중공작을 하던 도중 체포되여 장춘으로 끌려갔는데 체포되는 순간 놈들의 눈을 피해 몸에 품고 다니던 무기를 동지들에게 넘겨주었다.

경찰은 무기를 감춘곳이 어디냐고 하면서 그에게 야수적인 고문을 들이대였다.

현대홍은 어떤 철도역의 이름을 대면서 그 역근처에 있는 백양나무밑에 파묻었다고 《고백》하였다. 탈출할 기회를 얻으려는것이였다. 그 말에 귀맛이 바싹 당긴 경찰들은 현대홍을 기차에 태워가지고 그가 권총을 파묻었다는곳으로 향하였다.

차가 한창 달리고있을 때 현대홍은 손목에 채워진 수갑으로 호송경찰 두놈을 까눕히고 달리는 기차에서 뛰여내린 다음 혁명조직을 찾아 팔굽과 무릎으로 기여서 카륜에 돌아왔다. 카륜의 동무들은 현대홍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줄칼로 쓸어서 겨우 벗기였다.

그는 이처럼 무서운 시련을 겪고나서도 몸이 회복되자 다시금 공주령에 나가 활동하다가 이번에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였다. 공주령은 일제가 중국에서 빼앗아낸 조차지여서 일본사람들의 관할하에 있었다. 현대홍은 법정투쟁도 잘하였다. 그는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고생하다가 일제의 야수적고문에서 생긴 후탈로 세상을 떠났다.

리제우네 소조력량은 1930년대에 들어와 수십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의 노력에 의해 장백땅에서는 반일조직들이 련이어 태여나고 마을마다 학교와 야학이 생기고 웅변대회, 연예공연, 체육대회같은것이 자주 벌어져 사람들을 혁명적열정으로 끓게 하였다.

일제는 이런 때에 마적단으로 가장한 무장단을 들이밀어 조선인부락을 하나 털어내는 연극을 꾸며가지고 리제우네를 유인해냈다. 그러나 사전에 우리가 마적단을 주의하라고 경고해주었기때문에 그들은 놈들의 꾀임에 말려들어가지 않았다. 크지 않은 싱갱이가 벌어져 얼마간의 부상자를 냈을뿐 사건은 전면적인 전투로까지 확대되지 않았다.

그후 리제우네 무장성원들은 일제의 마적단과 결탁반동군벌군대의 불의적인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박진영은 전투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리제우는 불행하게도 체포되였다.

리제우는 이 수치를 죽음으로 씻으려고 손발을 묶이운 상태에서도 식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현장에서 일본경찰들의 손에 넘어갔으며 서울에 압송된후 사형언도를 받고 옥중에서 인차 희생되였다. 공영은 만주지방의 반일운동자들을 유인랍치하려고 일제가 조작한 가짜공산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하려다가 살해되였다.

우리가 공영, 리제우, 박진영 동무들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한 소식에 접한것은 단천에서 농민들의 대중적인 폭동이 있은 직후였다. 련락원의 말을 들은 나는 한동안 마음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불효막심한 죄를 진것 같아 머리를 들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던 독립군대원들로서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을 맨 처음으로 실현한 사람들이였다.

리제우, 공영, 박진영의 비극적인 최후를 내가 그렇게도 가슴아파한것은 카륜회의결정을 집행할 유력한 국내공작소조 하나가 없어진데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싸우던 방향전환의 선구자들을 억울하게 잃어버렸기때문이였다.

공영과 박진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여도 제일 앞에서 멘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우리 어머니에게 몽상도 자기들이 입겠으니 나에게는 입히지 말라고 하였다. 열네살밖에 안된 내가 몽상을 입으면 애처롭게 보일것 같아서 그런 말을 했을것이다. 그때부터 그 두 사람은 3년동안 베감투를 쓰고 몽상을 입었다.

그 당시 독립군훈련소는 무송시가에서부터 좀 떨어진 말리허라는곳에 있었다. 공영은 한주일에 한두번씩 지게에 나무짐을 지고 우리 집에 찾아와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였다. 그의 안해도 두릅이나 참나물 같은 산나물을 해가지고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다. 때로는 공영이 쌀자루를 메고 올 때도 있었는데 그런 성의가 우리 집 살림에 적지 않은 보탬을 주었다.

어머니도 그들을 만나면 친동생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어떤 때에는 친누이와 같은 위엄을 가지고 그들의 잘못을 따끔히 타일러주기도 하였다.

공영이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만주로 들어온후 그의 안해는 벽동에서 별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해인가 남편을 찾아 무송으로 들어왔다. 공영은 그때 제비국을 끓이다가 덴 안해의 화상자리를 보고 얼굴이 보기 싫게 되였다고 하면서 시쁘둥해가지고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성이 나서 그를 막 꾸짖었다.

《임자, 그게 제 정신을 가지고 하는 소린가. 남편을 만나보겠다고 불원천리 찾아온 안해를 금방석에 앉히지는 못할망정 같이 살지 않겠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망녕된 생각인가.》

공영이란 사람이 원래 우리 어머니가 하는 말은 늘 진지하게 받아들이였다. 그날도 그는 우리 어머니에게 절을 하고나서 잘못하였다고 사죄하였다.

내가 국내에 들어간 형권삼촌네 무장소조의 활동소식을 제일 처음으로 접한것은 신문지상을 통해서였다. 할빈에 있을 때인지 어디에 있을 때인지 똑똑히 기억되지 않으나 동무들이 흥분해서 들고 온 신문을 보니 풍산땅에 4명의 무장단이 나타나 순사부장을 쏴제낀후 북청에서 넘어오는 자동차를 뺏아타고 후치령으로 사라졌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있었다.

신문을 가져온 동무는 국내에서 총성이 울린것이 통쾌하다고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총성때문에 불안을 금할수 없었다. 어떻게 되여 국내진출의 초입이라고 할수 있는 풍산에서 총성을 냈는가?

나는 그때 삼촌의 불같은 성미를 새삼스럽게 생각하였다. 어쩐지 삼촌이 그 불같은 성미를 걷잡지 못하고 총소리를 낸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원래 우리 삼촌은 어려서부터 바람벽도 문이라고 차고나가는 남아다운 기질을 가지고있었다.

형권삼촌 하면 먼저 타개죽사발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내가 만경대에 있을적일이니 삼촌의 그때 나이가 아마 열한살 아니면 열두살쯤 되였을것이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저녁마다 수수타개죽을 먹었다. 수수타개죽이란 수수를 껍질채로 망에 갈아서 끓인것인데 맛도 없었지만 제일 고통스러운것은 삼킬 때마다 수수껍데기가 목구멍을 따끔따끔 찌르는것이였다. 나도 타개죽은 질색이였다.

그런데 하루는 형권삼촌이 밥상앞에 마주앉았다가 할머니가 갖다놓은 뜨거운 타개죽사발을 이마로 받아넘겨 엎질러놓았다. 어떻게나 세게 받아넘겼던지 죽사발은 봉당에 날아가 떨어지고 삼촌의 이마에는 상처가 나서 피가 흘렀다. 아직 철이 다 들지 않은 때이니 죽으로 끼니를 잇지 않으면 안되는 가난에 화가 나서 타개죽사발에 분풀이를 한것이다.

할머니는 《네가 밥타발하는걸 보니 사람구실을 하기 글렀다.》고 하면서 삼촌을 보고 되게 욕하였지만 뒤에 돌아앉아서는 눈물을 지었다.

형권삼촌은 철이 들면서 이마의 허물자리에 신경을 썼는데 중국에 들어와 우리 집에서 생활할 때에는 앞머리를 좀 길러가지고 그 허물자리를 가리우고 다니였다.

형권삼촌이 중국에 들어온것은 우리가 림강에서 살 때였다. 아버지가 삼촌을 우리 집에 와있게 한것은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교육자이기때문에 삼촌이 우리 집에 와있으면 학교에 가지 않고서도 중학과정안까지는 뗄수 있었다. 장차로는 삼촌을 혁명가로 키우자는것이였다.

아버지가 생존해계실 때까지는 형권삼촌이 우리 아버지의 영향과 통제를 받으면서 비교적 건전하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다음부터는 자기를 걷잡지 못하고 마음내키는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마로 타개죽사발을 받아넘기던 어린 시절의 성미가 그대로 되살아나 우리들을 아연케 하였다. 형권삼촌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자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림강이요, 심양이요, 대련이요 하면서 사방으로 떠돌아다니였다.

우리 가정내막을 좀 알고있는 사람들은 삼촌이 고향에 가서 부모들이 정해준 녀자하고 약혼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 약혼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들떠다닌다고 하였다.

물론 그것도 리유라고 할수는 있었다. 그러나 삼촌이 들뜨게 된 중요한 원인은 우리 아버지의 서거에서 받은 절망과 비분을 묵새기지 못하였기때문이였다.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집에 돌아가니 삼촌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들뜬 생활을 계속하고있었다. 그때 가정은 어머니의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생기는 보잘것없는 수입에 의하여 겨우 유지되는 참으로 어려운 형편이였다. 우리 가정형편을 보기가 딱했던지 리관린도 얼마간의 돈과 쌀을 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의 일손을 돕고있었다. 삼촌으로서는 사실 돌아간 우리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장과 같은 구실을 해야 할 처지였다. 가정적으로 삼촌이 할 일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약방이 있었다. 그 약방에 약은 많지 않았지만 잘 운영만 하면 살림에 얼마간의 보탬을 할수 있었다. 그런데 삼촌은 그 약방을 한번도 돌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때 삼촌의 소행을 두고 아주 민망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집에 들어앉아 삼촌에게 남길 장문의 편지를 썼다. 정의감이 제일 강하다고 하는 중학시절이여서 도리에 어긋나는것을 보면 웃사람이고 뭐고 참지 못하였다. 그 편지를 삼촌의 베개밑에 밀어넣고 길림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그때 내가 편지로 삼촌을 비판하는데 대해서 매우 못마땅해하였다.

《삼촌이 지금은 저렇게 어데도 마음을 의탁하지 못하고 구름처럼 떠돌아다니지만 때가 되면 제곬에 들어서느니라. 아무렴, 너의 삼촌이 근본이야 잊겠니. 실컷 돌아다니다가 싫증나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리. 그러니 비판이고 뭐고 다 그만두어라. 조카가 삼촌을 타이르다니.》

어머니는 이런 말로 나를 설복하였다. 참으로 우리 어머니다운 사고방식이였다.

그래도 나는 기어이 편지를 남기였다.

한해후 길림육문중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이 되여 무송에 돌아와보니 형권삼촌은 놀랍게도 안착된 생활을 하고있었다. 어머니의 예언이 맞아떨어진셈이였다. 삼촌이 내가 써두고 간 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편지가 삼촌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해 겨울에 삼촌은 백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우리가 무송을 떠난후 삼촌은 백산청년동맹을 확대하는 사업에 깊이 빠져들고말았다. 이듬해에는 동무들의 보증으로 공청에도 가맹하였다. 이렇게 되여 삼촌은 혁명대오에 들어서게 되였는데 1928년부터는 공청의 지시를 받아가며 무송, 장백, 림강, 안도지방의 백산청년동맹사업을 지도하였다.

이웃들이 신문을 보고 풍산땅에서 왜놈순사부장을 쏴죽인 사건이 터졌다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만경대고향집에서도 형권삼촌이 체포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이거 또 제 형이 그러더니 동생도 일본놈을 쏴죽이는구나.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지 하긴 잘한다.》고 하였다.

세월이 얼마간 흐른 뒤에야 나는 풍산땅에서 국내공작소조가 벌린 활동전모에 대한 소식을 입수할수 있었다.

압록강을 건는 소조원들은 단천쪽으로 나가다가 1930년 8월 14일 풍산 파발리부근의 황수원들쭉밭에서 잠시 지체하였는데 거기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악질경관 《오빠시》순사부장(본명ㅡ마쯔야마)의 의심을 받게 되였다. 그놈은 1919년부터 풍산지방에 와서 조선사람들의 수족을 얽어맨 악질경관이였다. 그래서 그고장 사람들은 놈에게 《오빠시》라는 별명을 붙이였다. 《오빠시》에 대한 이고장 인민들의 원성이 대단히 높았다.

소조원들이 주재소앞을 지나갈 때 《오빠시》는 일행을 주재소로 불러들이였다.

형권삼촌은 주재소에 들어가자마자 그놈을 단호하게 처단해버린 다음 인민들앞에서 공개적인 반일연설을 하였다. 그날 수십명의 군중이 형권삼촌의 연설을 들었다. 비전향장기수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전 인민군종군기자 리인모도 그때 파발리에서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한다.

소조원들은 적들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농민폭동의 불길이 일어났던 지역들에 접근하려고 시도하였다.

우리는 그 당시 단천농민폭동을 매우 중시하였다. 폭동이 휩쓴 지역들에는 반드시 대중운동의 지도자들이 있기마련이고 정치사상적으로 각성되고 동원된 혁명적군중의 조직된 대부대가 있기마련이였다. 적이 폭동지역에서 주동분자들을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였다면 우리는 폭동군중속에서 왕청의 오중화, 룡정의 김준, 온성의 전장원과 같은 핵심들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런 핵심들과 련계를 가지고 좋은 영향을 주면 국내혁명투쟁을 앙양시킬수 있는 지반을 닦을수 있었다. 단천지구를 개척하는데 성공하면 그 지방을 거쳐 성진, 길주, 청진 방면으로도 뻗칠수 있었고 함흥, 흥남,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도 진출할수 있었다.

우리가 형권삼촌이 인솔하는 국내공작조에 단천농민폭동의 주인공들을 찾아가라는 과업을 준것은 그때문이였다.

파발리에서 총소리를 내고 떠난 무장소조일행은 봉오골어귀에서 풍산경찰서 사법계 주임이 탄 승합차를 억류하고 그자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 주임과 그밖의 승객들에게 반일선전을 하였으며 련이어 리원군 문앙리일대에 진출하여 배덕골과 대바위골을 비롯한 여러 지점에서 숯구이로동자들을 상대로 정치사업을 하였다. 어려운 조건이였으나 투쟁은 항상 적극적이였다.

무장소조는 그후 북청방면으로 진출하다가 대오를 두개 조로 편성하였다. 형권삼촌과 정웅이 한조가 되고 최효일과 박차석이 한조가 되였다. 두조는 홍원읍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다음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출하였다.

형권삼촌은 정웅과 함께 9월초 적수색대가 도사리고있는 북청군 대덕산의 광제사를 습격하고 홍원, 경포방향으로 진출하다가 절부암부근에서 적들과 조우하여 전진경찰관주재소 소장을 사살하였다.

삼촌은 그날로 홍원읍에 들어가 집결장소인 최진용이네 집에 찾아갔다.

최진용이라고 하면 형권삼촌뿐아니라 나도 잘 알고있는 독립군관계자였다. 그가 무송에서 안송총관소의 총관으로 일할 때 우리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원래 조선에서 면장질을 할 때 돈을 떼먹고 그것이 탄로되여 인민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자 동북으로 도주해와서 정의부를 따라다니였다. 한때는 우리 집에 아주 눌러앉아 어머니가 지어주는 밥을 몇달동안 얻어먹은 일도 있었다. 최진용은 일제가 만주로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이제는 나이가 있어 독립군시중을 하기가 힘에 부치다고 하면서 무송을 떠났다. 그때 그는 자그마한 과수원이나 하나 장만해놓고 깨끗하게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홍원으로 나갔는데 거기에 나가자마자 일제의 밀정으로 되였다.

형권삼촌이 그런 사실을 알수 없었다. 최진용은 적의 경계가 심하다는 구실로 삼촌을 뜨락의 구석진곳에 숨겨놓고 경찰서에 달려가 만주에서 나온 무장단이 자기 집에 있다고 밀고하였다.

삼촌이 경찰서에 끌려가니 최효일도 벌써 거기에 와있었다. 최효일을 밀고한것도 물론 최진용이였다.

삼촌은 그때에야 최진용이 일제의 주구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최진용의 변절은 너무나도 뜻밖이였고 돌발적인것이였다. 하루 세끼씩 몇달을 두고 더운밥을 해서 상우에 반주까지 놓아 푸짐하게 대접해주던 성주어머니의 은혜를 백골이 되여서도 잊지 않겠노라고 념불처럼 외우던 그 인간이 그처럼 더러운 배신의 길을 걸을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래서 나도 최진용이 삼촌을 밀고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동안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사람을 믿는것은 좋지만 환상을 가지고 대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환상이란 비과학적인것이기때문에 거기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뛰여난 천리혜안을 가진 사람도 수습하기 어려운 실수를 범할수 있다.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난것은 정웅 한사람뿐이였다. 정웅은 소조가 국내로 나갈 때 삼촌이 길안내자로 인입한 사람이였다. 고향이 리원인 그는 동해안일대의 지리를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도 후에 춘천에서 밀정의 고발로 체포되였다.

형권삼촌은 체포된후 얼마동안 홍원경찰서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그후 함흥감옥에 다시 이송되여 거기서 또 중세기적인 고문을 받았다.

함흥지방법원에서의 법정투쟁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거쳐 우리에게도 전달되였다.

그때 형권삼촌은 법정에서 일제의 죄상을 추상같이 단죄하면서 무장한 강도들과는 무장으로 싸워야 한다고 소리높이 웨치였다고 한다.

삼촌이 이처럼 법정에서 당당하게 처신할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혁명에 대한 신념과 충실성이였다고 생각한다. 삼촌이 죽음보다 더 두려워한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을 정의롭고 용감하게 만들며 이 세상에서 가장 존엄있는 존재로 되게 하는 신념에 대한 배신이였을것이다.

최효일은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삼촌한데는 15년의 징역형이 떨어졌다고 한다.

삼촌과 그 전우들은 재판장에서 혁명가요를 우렁차게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구호를 냅다 불렀다.

소조성원들은 법정투쟁기간을 연장하려고 서울복심법원에 상소하였다.

함흥재판에서 쓴맛을 본 일제는 서울에서 한명의 방청자도 없는 비밀재판을 하였다. 놈들은 그때 함흥지방법원의 판결을 그대로 시인하였다.

최효일에 대한 교수형은 판결이 내린후 얼마 안있어 인차 집행되였다. 최효일은 잘 싸워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사형장으로 태연하게 걸어나갔다.

형권삼촌은 10년이상의 장기형수들만을 주로 가두어두는 서울의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이 감옥에서도 삼촌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놈들이 중형을 진《정치범》들을 전향시키려고 책동할 때 삼촌이 수많은 수감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상전향을 반대하는 열화같은 연설을 하여 군중을 격동시키고 수감자들에 대한 대우개선투쟁의 앞장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투쟁한 사연들은 이미 세상에 많이 소개되였다고 생각한다.

놈들은 전쟁준비를 다그치면서 탄알상자를 만드는 작업에 수인들을 내몰았다. 수인들은 그때 7등밥을 먹으면서 살인적인 로동을 강요당하고있었다.

분격한 형권삼촌은 10월혁명기념일을 계기로 교형리들의 살인적인 강제로동을 반대하는 옥내공장수인들의 파업을 지도하였다. 이 파업에 많은 수인들이 참가하였다.

놈들은 삼촌의 영향력을 어떻게 하든지 막아보려고 캄캄한 독감방에 가두어두는것만으로도 모자라 팔목과 발목에 고랑쇠를 채워 조금만 움직여도 그 고랑쇠가 살을 파고들게 하였다. 식사도 하루에 아이들 주먹만한 콩밥덩어리를 한개씩 들이밀었다.

삼촌이 그처럼 엄혹한 처지에서도 투쟁을 계속하였기때문에 감옥당국자들은 김형권이 마포형무소를 적색화한다고 비명을 질렀다.

어느날 박차석은 감옥안에 있는 공장에 나가 일하다가 우리들이 만주각지에서 무장투쟁을 활발히 벌리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형권삼촌에게 전하였다.

삼촌은 그 소식을 듣고 철창에 끌려온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박차석의 손을 붙잡고 목멘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며칠 가지 못할것 같소. 살아남은 동무들이 끝까지 싸워주오. 형기가 끝나 이곳에서 살아나가면 만경대에 계시는 나의 어머님을 꼭 찾아보고 내 이야기를 해주오. …앞으로 성주를 만나거든 내 소식을 전해주고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싸웠다고 말해주오. 이것이 내 마지막부탁이요.》

삼촌이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아주 누워있을 때의 일이였다.

삼촌이 사경에 처하자 형무소에서는 면회를 와도 좋다는 통지를 만경대에 보냈다.

형록삼촌이 그때 돈으로 40원을 꾸어가지고 친척인 봉주와 함께 서울에 가서 마지막으로 형권삼촌을 만나보았다.

《형무소에 가니 간수가 병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더구나. 다른 〈죄수〉들은 다들 앉아있는데 병신이 되여 다 죽게 된 우리 형권이만은 백골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지 않겠니. 그때 기가 막히던 생각을 하면. … 나를 보자 말소리도 못내고 입만 우물우물하는데 어찌도 참혹해졌는지 그게 내 동생이라고 믿기 어렵더라. 그런 동생이 오히려 나를 보고 웃으면서 〈형님, 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지만 왜놈들은 꼭 망합니다.〉하구 말할 땐 역시 우리 형권이답구나 하는 생각이 나더구나.》

내가 조국에 개선하여 고향집을 찾았을 때 형록삼촌이 나에게 한 말이였다. 나는 그 회고담을 듣고 형권삼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였다. 그리고 어느때인가 편지로 삼촌을 비판한것까지도 후회하였다.

동생의 처참한 형상을 보고 정신까지 잃었던 형록삼촌은 그때 간수들에게 요구했다.

《내 동생 형권이를 집에 데리고 가서 치료하게 해주오.》

간수는 그 말을 듣자 《안돼. 네 동생은 살아도 감옥에서 살아야 하고 죽어도 이곳에서 죽어 감옥귀신이 돼야 해. 집에 데려가지는 못해.》라고 하였다.

《그러면 내가 동생대신 감옥에 들어가있겠소. 동생이 집에서 치료를 받고 몸이 추선 다음 여기에 다시 와있으면 되지 않소.》

《이놈아, 징역을 대신 사는 법이 어디 있어? 》

《법이야 당신네들이 내면 법인데 왜 못하겠소. 그렇게 좀 해주오.》

《이놈, 어디서 이따위 수작질이야. 동생이 나뿐놈이더니 형이란것도 몹쓸놈이구나. 너희네 종자는 다 나쁜놈이다. 어서 당장 나가라! 》

간수들은 이렇게 고함치면서 형록삼촌을 감옥에서 쫓아냈다.

형록삼촌은 생각다 못해 간수에게 돈 16원을 맡기며 《아무쪼록 우리 형권이를 잘 돌봐주시오.》하는 부탁을 남기고 만경대로 돌아왔다. 그 정도의 돈을 먹는다고 교형리들의 마음이 움직일리가 만무하였지만 삼촌은 수중에 있던 돈을 다 털어놓았다.

감옥에서 돌아온 삼촌은 한달동안 잠을 자지 못하였다. 눈만 감으면 동생의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수 없더라는것이다.

그후 석달만에 형권삼촌은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1936년초이니 내가 2차 북만원정을 끝내고 부대와 함께 남호두지방으로 가고있을 때였다. 그때 삼촌의 나이가 서른한살이였다.

아버지도 가고 어머니도 가고 동생도 가고 삼촌마저 가니 혁명을 위해 뼈를 깎고 살을 저미던 나의 혈육들은 다 가고 없는셈이였다. 나는 그때 산에서 삼촌이 사망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든지 나만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망국의 한을 품은채 고국의 이름모를 언덕에 무주고혼이 되여 누워있는 삼촌의 원쑤를 갚고 기어이 나라를 찾으리라고 결심하였다.

사망통지서를 받고서도 로자가 없어 시체를 찾아오지 못해 삼촌이 마포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가슴아픈 이야기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형권삼촌은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에야 수감자들에게 숨기고있던 이야기를 하였다.

김일성 내 조카이다. 그는 지금 만주에서 큰 혁명부대를 이끌고 왜놈들을 족치고있다. 그 부대가 국내에 쳐들어올 날은 멀지 않았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무장으로 싸우라. 무장을 들고 싸워야 왜놈들을 쫓아내고 나라를 해방할수 있다! 》

나는 형권삼촌을 생각할 때마다 카륜회의결정을 관철하는 길에서 청춘을 서슴없이 내던진 수많은 전우들을 눈앞에 그려보군한다.

형권삼촌에게는 영실이라고 부르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해방후 만경대혁명학원에 다니였다. 나는 어떻게 하나 그 애를 잘 키워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일점혈육마저 전쟁시기 폭격에 희생되였다.

우리 혁명의 행군로를 피로써 개척한 조선혁명군 대원들의 업적은 참으로 거룩하고 숭고한것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이들의 영웅적투쟁경험과 교훈에 기초하여 그들이 흘린 성스러운 피의 대가로 이 세상에 상비적인 혁명무장력으로 태여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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