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2월 22일

7. 3부통합

1920년대는 총적으로 볼 때 반일애국력량의 단일전선에로의 통합촉성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민족의 전도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선각자들과 애국지사들은 독립의 기초가 반일력량의 통일단결에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로씨야에서의 사회주의10월혁명과 3.1인민봉기의 영향밑에서 새 사조의 보급과 함께 급속히 태여난 여러개의 로동운동단체들은 1920년대중기에 와서 조선로농총동맹으로 통합되였다. 반일애국세력을 한데 묶어세우기 위한 작업은 민족주의진영에서도 진행되였다.

1927년에는 민족단일당조직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공산주의진영과 민족주의진영의 공동전선기관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여 그 산하에 수만명의 회원들을 집결시키기 시작하였다.

반일애국력량의 통합을 위한 운동은 독립운동의 책원지로 전환된 만주지방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였다. 《한일합병》직후부터 만주지방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군소독립운동단체들은 무수한 리합집산과정을 거쳐 1925년경까지는 대체로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3부로 나뉘여져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자기 단체의 관할구역에 금을 그어놓고 다른 단체와의 협동적련계도 없이 중세기의 소공국들처럼 서로 등을 지고 할거하던 3부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거듭되는 공세앞에서 각개격파당할 위험에 처하여있었다. 훈춘사건과 흥경사건, 고마령사건을 비롯한 일본군의 련속되는 대학살작전과 《미쯔야협정》으로 만주지방의 독립군단체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봉오골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한 후부터 일본군은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병력을 증강하였고 일본군 한명이 죽으면 조선사람 열명을 죽이는 간악한 심리살륙전으로 성장기에 있던 독립군을 피동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사태하에서 패권다툼에 열을 올리던 각 부의 지도자들은 군앞에 조성된 난국해소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모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3부가 태여난 초시기부터 독립운동의 선각자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 당시 3부는 관할구역을 넓히기 위한 경쟁에 쓸데없는 정력을 소모하면서 서로 질시하고 반목하는 상태에 놓여있었다. 3부의 패권싸움은 이따금 가슴아픈 충돌과 류혈도 빚어냈다.

나는 1925년 여름에 이미 3부의 지도자들이 무송에 모여 아버지가 사회하는 큰 규모의 회의를 열고 통합실현의 방도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는것을 목격하였다. 회의는 무송과 말리허, 양지촌 세곳에서 장소를 옮겨가며 열흘동안이나 진행되였다. 이 회의의 결과로 나온것이 바로 민족단체련합촉진회였다.

민족단체련합촉진회에 망라된 인사들은 민족단일당결성을 위한 준비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각파 지도자들과의 끊임없는 련계밑에 재만조선동포의 자치문제와 혁명전선의 통합을 위한 회의를 여러차례에 걸쳐 진행하였다.

장소를 바꿔가며 회의를 거듭하는 과정에 《왕바사건》이라는 소설 같은 사건도 생기였다.

그 당시 김동삼, 최동오, 현묵관, 심룡준, 림병무, 김돈, 리연, 송상하를 비롯한 3부의 지도자들은 신안툰에 모여 통합회의를 하고있었다. 신안툰은 길장철도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되는곳에 자리잡고있는 동네인데 길림, 흥경, 화전과 더불어 만주에서 몇개 안되는 정치운동의 책원지였다.

3부합작회의의 기밀을 내탐한 일본령사관경찰에서는 평민으로 가장한 다섯명의 밀정들을 현지에 파견하였다.

밀정들은 신안툰근처의 동향수구부락까지 와서 자라잡이를 하는척하면서 3부합작회의과정을 탐지하였다. 그러다가 마을청년들에게 정체가 탄로되여 모조리 처단되였다. 청년들은 밀정들을 한끈에 묶어 송화강에 수장하였다.

길림주재 일본령사관경찰에서는 중국 경무청에 이 사건의 전말을 알리고 조선사람들이 일본량민을 살해하였다는 리유하에 사건현장과 신안툰에 대한 공동수사를 강요하였다. 이 사실이 경무청에 통역으로 근무하고있던 오인화라는 사람에 의해 3부합작회의 대표들에게 통보되였다. 대표들은 일단 휴회를 선언하고 신안툰을 떠났다.

이것을 세칭 《왕바사건》이라고 한다. 왕바란 중국의 속어로 자라라는 뜻이다.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3부의 회의는 무수한 난관과 우여곡절을 동반하였다. 3부합작을 두려워하는 일제의 집요미행과 파괴책동이 첫번째 난관이라면 그보다 더 큰 난관은 각 단체 내부에 생긴 파벌들의 대립이였다. 정의부는 촉성회파와 협의회파로 분렬되여있었고 신민부는 군정파와 민정파로 대립되여있었으며 참의부는 촉성회지지파와 협의회지지파로 갈라져 옥신각신하였다. 김동삼, 리청천, 리종건을 비롯한 촉성회측은 정의부에서 탈퇴하였고 김좌진, 황학수를 우두머리로 한 군정파도 신민부와 결별하였다.

3부통합회의가 제일 자주 소집된곳은 길림이였다.

길림의 상의가에는 조선사람이 경영하는 복흥태라는 정미소가 있었다. 길림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은 그 정미소사무실을 침실과 사무실로 리용하고있었다. 남만과 북만, 동만에서 오가는 독립운동자들까지도 그곳을 단골방으로 자주 리용하였기때문에 복흥태는 어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바로 여기서 3부통합회의가 해를 넘기며 열리고있었다.

복흥태정미소가 육문중학교로 오가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나는 회의에 참가한 대표들과 자주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였다.

그 정미소의 주인은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민족주의자로서 남의 쌀을 찧어주고 도정료를 받아서 밥술이나 먹고 살아가는 소기업가였다.

어느날 그 정미소에 들리니 내가 아는 령감들이 김형직선생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나를 김좌진, 김동삼, 심룡준을 비롯한 3부통합회의 대표들에게 소개하는것이였다. 그렇게 소개해놓고는 롱담삼아 《이 사람은 우리하고 사상이 달라.》하고 꼭지를 달아놓았다.

나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난합니다. 선생님들도 조선독립을 하자는것이고 저도 조선독립을 하자는것인데 사상이 다를리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그들은 자네들이 사회주의운동을 하는것 같아서 그런다고 하였다.

공산주의선전을 하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 청년들이 공산주의운동을 하는것은 하나의 세계적추세이고 그것을 지향하는것이 청년들인데 남들이 다하는 공산주의를 왜 조선청년들이라고 안하겠습니까. 우리가 새것을 보지 않고 계속 낡은것에만 매여달린다면 조선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생님들은 선생님들이고 또 우리는 세대가 다른데 선생님들이 청년들의 심정을 무시하면 곤난합니다.》하고 들이대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령감들은 《자네가 아무것을 하든 우린 상관하지 않겠네. 설마하니 자네들이 우리야 타도하겠나.》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고 우리 청년들이 선생님들을 타도하리라고 생각하는가고 점잖게 말하였다.

이와 비슷한 일은 그후에도 몇번 있었다.

가며오며 이따금씩 들려보아도 3부가 통합했다는 소식은 들을수 없었다. 독립군의 지도자들은 짜증이 날 지경으로 회의를 질질 끌고있었다.

나는 3부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는 과정에 그들의 생활내막을 알게 되였는데 그 생활이라는것이 고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길림성밖 조양문근처에 삼풍잔이라는 간판을 단 려관이 있었다는것은 앞에서도 말한바가 있다. 3부통합회의가 휴회로 들어갈 때마다 독립군의 지도간부들은 이 려관에 모여 다른 파를 견제하기 위한 모의를 하였다.

그 려관 가까이에는 우리가 대중교양장소로 리용하고있던 손정도의 례배당이 있었다. 그러다나니 나도 자연히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같은 때면 이 삼풍잔에 모인 독립군상층의 생활을 엿볼수가 있었다.

그들이 정해놓고 쓰는 방에는 손때가 올라 반질반질한 장기판이 늘 놓여있었다. 독립군들이 심심해한다고 려관주인이 특별히 만들어온 장기판이였다.

독립군령감들은 그 방에서 진종일 입씨름을 하든가 장훈이야 멍훈이야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삼풍려관 주인들은 독립군거두들을 섬기느라고 뽕이 빠질 지경이였다. 그들을 치를 때는 태풍합정미소에서 찧어내는 쌀가운데서 제일 좋은 쌀을 골라 밥을 해먹이군 하였으며 고기나 두부나 물고기 같은 반찬도 떨구지 않았다.

독립군지휘관들은 매일 장기놀이로 밤을 밝히면서도 주인들한테서 밤참으로 메밀국수를 꼭꼭 대접받군 하였다.

그 집 딸이 하는 말이 그것도 다 공짜라는것이였다. 그는 밤마다 담배심부름, 술심부름을 하느라고 잠조차 제대로 잘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한번은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니, 우리가 이 모양으로 저 사람들을 섬기다가는 석달도 못가서 거지가 되겠어요.》라고 하였더니 그의 어머니는 오히려 그를 꾸짖으면서 《나라를 찾자고 싸우는분들인데 무엇을 아끼겠니. 이제 준비가 되면 싸우러 떠날게다. 다시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말아라.》고 하더라는것이였다.

그러나 독립군의 지휘관들은 싸우러 떠나기는커녕 무기를 모아다 창고에 감추고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고있었다. 그러다가도 우리가 가면 장부책 같은것을 펴놓고 무슨 일을 하는척하였다. 젊은이들한테 건달군처럼 보이기는 싫어서 눈치놀음을 하는것이였다.

어떤 날은 그들이 주먹이나 목침으로 책상을 꽝꽝 내리치며 서로 입에 담지 못할 상욕들을 퍼붓기도 하였다. 3부가 통합을 한 다음 어느 파가 실권을 쥐겠는가 하는것이 기본문제였다. 그들은 자기 파가 활동년한도 더 오래고 업적도 더 크다거니, 자기 파가 관할하는 구역이 더 넓고 군중도 더 많다느니 하면서 제가끔 자기 파를 내세우고 다른 파를 깎아내리였다. 그러다가도 저녁이 되면 술을 마시고 밤새껏 주정질을 하다가 다음날 한낮때가 되여서야 일어나군 하였다.

어느 일요일 우리는 태풍합정미소에 갔다가 거기서 상해림시정부 재정부장이라는 사람과 론쟁을 하였다.

그는 자기네 동료 몇사람을 데리고 길림에 와서 몇달째 3부통합회의에 참가하고있었다. 그가 청년들과 어울려 장난도 잘하고 진보적인 냄새가 풍기는 말도 자주 하므로 우리도 그를 만나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속에 있는 소리를 꺼리낌없이 터놓군 하였다.

그날 우리는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해림시정부를 좀 비판하였다. 당신네들은 나라도 민족도 안중에 없이 백성이야 어떻게 돼가든 외국에 쫓겨와서까지 제가끔 한자리 해먹겠다고 싸움질만 하며 돌아가는데 그러고도 애국에 대해서 감히 말할수 있는가, 여기서 벼슬을 한대야 촌에 나가서 농사하는 집 몇집을 상대로 군자금을 거두며 이래라저래라 하는것인데 그런 권력다툼은 해서 뭘하겠는가고 우리 청년들 몇이 둘러앉아 막 공격을 들이댔다.

재정부장이라는 사람은 우리의 정당한 충고에 말문이 막혀 쩔쩔매다가 자기를 모욕한다고 노발대발해서 우리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너희들이 나를 반대해? 그래, 옳다. 너희들만 잘나고 우리는 못났다. 그럴바에는 나나 너희들이나 다같이 실컷 망신을 당해보자.》

그는 이렇게 고함을 지르면서 그자리에 앉아 옷을 와락와락 벗어내던지였다. 벌거벗고 거리바닥에 나가 뛰여다니면서 조선사람망신을 시키겠다는것이였다. 자기가 모욕을 당했으니 그대신 민족을 망신시키는것으로 앙갚음을 하겠다는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그런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 간판은 림시정부부장인데 소행을 보면 무뢰한이고 망나니였다. 그가 정미소담장밖으로 나가는 날이면 야단이였다. 재정부장의 망신이자 우리의 망신이고 조선사람의 망신이였다. 그래서 그를 겨우 진정시켜 옷을 주어입혔다.

우리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시는 그런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자고 하였다. 자기네를 비판하였다고 알몸뚱이바람으로 거리바닥에 뛰여나가려는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 배꼽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몰라도 나살이나 먹은 사람이 그 꼴이니 그게 무슨 정치인인가.

이 사람이 상해림시정부 망신을 다 시키였다. 그 당시 만주지방에는 상해림시정부를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쟁을 한다고 곱지 않게 보았고 구걸외교에 매달린다고 곱지 않게 보았으며 군자금을 탕진하며 무위도식한다고 곱지 않게 보았다. 림시정부는 인두세와 구국의무금으로도 모자라 나중에는 공채까지 발행하고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아무개는 어느 도의 관찰사, 아무개는 어느 군의 군수, 아무개는 어느 면의 면장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장》이라는것을 주고 그 직함에 따라 해당한 금품을 받아들이는 매관매직까지 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이 통합을 이룩하지 못하고 파벌싸움을 계속하고있는 사이에 일제는 그들속에 주구들을 박아넣어 반일독립운동자들을 손쉽게 붙잡아갔다. 가장 가슴아픈 손실은 오동진이 체포된것이였다. 일제경찰은 주구 김종원을 시켜 조선의 큰 금광주 최창학이 장춘에 와있으니 그와 교섭하면 막대한 독립운동자금을 해결할수 있을것이라고 하면서 오동진을 유인해내여 장춘부근 흥륭산역에서 체포하였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너무도 분하고 원통하여 얼마동안 밥맛을 잃어버리다싶이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후 오동진의 아들 오경천이 길림영화관에 구경을 갔다가 화재사고로 죽었다. 내가 불속에 뛰여들어가서 업어내오기는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목숨을 건지지 못하였다. 남편이 감옥에 잡혀가고 아들까지 잘못된 후 오동진의 부인은 고민끝에 정신이상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가 가서 위로도 하고 병구완도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부인은 애석하게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오동진이 죽음을 각오하고 법정투쟁을 한창 벌리고있을 때 한쪽에서는 3부통합을 한다고 매일같이 모여앉아 술추렴이나 하면서 세력다툼으로 시간을 보내니 그것을 보는 우리의 심정이 좋을수가 없었다.

오동진의 체포에서 맛을 들인 일제경찰은 더 많은 반일운동자들을 붙들어가기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돌아쳤다.

그래도 3부의 지도자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말공부질만 계속하였다.

하루는 그 사람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바지가랭이에 모래를 넣고 정미소울타리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달리기훈련을 하는것이였다. 그 광경을 보게 된 나는 답답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눈앞에 박두하고 조국의 운명도 날을 따라 더 암담해만 가는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참다 못해 우리는 오동진사령의 체포를 통해 선생님들이 크게 깨달은바가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왜놈들은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름있는 반일운동자들을 하나하나 체포하여 처형하고있는데 선생님들은 아직도 여기에 모여앉아 회의만 하고있으니 이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우리 청년학생들은 남만과 북만, 동만에 있는 모든 독립운동자들이 서로 힘을 합치고 조선사람모두가 단결을 이룩하도록 하루속히 3부통합을 성사시켜주기 바랍니다 하고 절절하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3부의 지도자들은 그후에도 계속 싸움질과 공리공담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때의 조바심과 안타까움이란 실로 형언할수 없었다.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파벌싸움에만 미쳐돌아가고있는데 그나마 얼마간의 무장력을 쥐고있는 민족주의자들마저 그런 형편이니 참으로 답답하였다.

우리는 생각다못해 그들에게 좀더 큰 자극을 줄 목적으로 민족주의자들의 권력싸움을 풍자한 연극을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있는《3인1당》이다.

준비가 다 된 후 내가 가서 3부의 지도자들을 초대하였다. 회의를 하느라고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을 위해 우리들이 연극을 하나 만들었는데 피곤도 푸실겸 한번 와보라고 하니 그들은 다들 좋아하면서 손정도네 례배당으로 찾아왔다.

노래와 춤을 비롯한 몇가지 종목들이 끝난 다음 맨 마지막으로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처음에는 그 령감들이 연극이 재미난다고 하면서 대단히 좋아하였다. 그러다가 세사람이 서로 자리다툼을 하는 연극의 내용이 자기네들을 풍자한것임을 알아채고는 얼굴들이 시뻘개져서 《나쁜놈들, 우리를 감히 모욕해? 저 성주가 아주 못쓰게 됐다.》고 하면서 달아나버리였다.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찌기 그들한테 찾아가서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어제저녁에 선생님들은 왜 공연도중에 가시였습니까? 연극을 마지막까지 보셔야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령감들은 노발대발하면서 너희들이 어제저녁 우리를 뭐라고 욕했는가고 나에게 대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진심을 이야기하였다.

《선생님들, 무엇이 그렇게 노엽습니까? 선생님들이 서로 싸우기만 하기에 우리도 너무 답답해서 연극을 만들었습니다. 어제저녁 연극은 청년들의 의사를 대변한것인데 청년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대중이 무엇을 원하고있는지 선생님들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사리정연한 말에 자극을 받은 그들은 이제는 저 사람들보기가 부끄러워서라도 무엇이든지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하였다. 그후 3부는 형식상으로나마 국민부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였다. 그것은 정의부의 잔류파와 신민부의 민정파, 참의부의 심룡준파의 련합으로 이루어진 절반짜리 통합이였다.

정의부의 탈퇴파와 참의부 촉성회지지파, 신민부의 군정파는 따로 림시혁신의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국민부와 병립하였다.

각파의 지도자들은 국민부의 지붕밑에 들어와서도 서로 등을 돌려대고앉아 딴꿈을 꾸었다.

민족주의진영의 보수세력은 이처럼 새 사조를 배척하면서 파벌싸움을 하다가 종말을 고하였다. 그들이 전장에 나가서 일제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파쟁과 입씨름으로 세월을 보낸것은 조선민족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광복시킬 확고부동한 결심이 없었기때문이였다.

력사는 바야흐로 민족해방투쟁에서의 세대교체를 미룰수 없는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우리는 청년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이 세대교체를 감당할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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