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안창호의 시국대강연

1927년 2월 길림의 교포사회는 전례없는 환영일색으로 들끓었다. 상해림시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독립운동의 원로 안창호선생이 베이징을 거쳐 길림에 도착하였던것이다.

길림의 교포들은 안창호를 국가수반 못지 않게 성대히 영접하였다. 우리도 《거국가》를 부르며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거국가》란 안창호가 외국으로 망명할 때 조국을 하직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여 《나 간다고 설워 말아 나의 사랑 한반도야》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거국가》는 《한일합병》후 청년학생들속에서 특별히 애창되였다. 망명가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라고 하여 한때는 《망명자의 노래》라고도 하였다.

조선사람들은 《거국가》를 사랑하듯이 《거국가》의 창작가인 안창호에 대해서도 굉장히 존경하고 숭배하였다.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대통령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표현은 크게 과장된것이 아니였다. 림시정부를 시답지 않게 보는 독립군단체의 지도자들까지도 안창호 개인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의 선배》라고 하면서 떠받들었다.

안창호의 금새를 잘 알고있는 이등박문이 한때 그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일본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도산(안창호의 호)내각을 세워주겠다는 흥정까지 했다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평안남도 강서땅이 지금은 천리마의 발원지로, 대안의 사업체계와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낳은 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고있지만 왜정시대에는 도산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자들을 배출한 고장으로 유명하였다. 안창호가 강서태생이였기때문에 서선지방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자기네 동향인이라고 자랑하였다.

안창호는 우리 나라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먹히운것은 민족의 자질이 낮은데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립협회, 신민회, 청년학우회, 대한인국민총회, 흥사단과 같은 독립운동단체들도 조직하고 점진학교, 대성학교, 태극서관과 같은 교육문화기관들도 설립하였으며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의 계몽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독립운동의 원로들속에 남강 리승훈이라는 이름난 교육자가 있다. 리승훈이라고 하면 누구나 오산학교부터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오산학교는 그가 설립한 학교이고 그의 개인자금에 의해 운영된 이름난 사립학교였다.

리승훈은 후대교육에 바친 공적으로 하여 륭희황제의 접견까지 받은 인물이다. 400년동안 서선지방의 평민들중에서 황제를 알현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는데 리승훈이 그 전례를 깨뜨리고 처음으로 왕을 만나보았으니 그의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것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이처럼 고명하고 인망높은 사람으로 알려졌던 리승훈도 한때는 돈벌이를 해볼 야심을 품고 장돌뱅이가 되여 유기장사를 하였는데 나중에는 50만원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한 거부가 되였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평양에 왔다가 교육을 통한 실력배양이 독립구국의 기초로 된다는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는 거기에 감탄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운동을 시작하였다. 애국애족의 일념에 넘치는 안창호의 웅변술이 대무역상의 인생관에 새로운 돛을 달아준것이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안창호의 영향력과 감화력을 증시해주는 하나의 실례로 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국의 신문들은 안창호의 길림도착소식을 대서특필하였다.

청년학생들은 그가 머무르고있는 삼풍려관에 찾아가서 길림의 교포학생들을 위해 강연을 해줄것을 간청하였다. 독립운동자들도 그의 숙소에 연줄연줄 나타나 강연에 출연해달라고 초청하였다.

안창호는 그 제의를 쾌히 받아들이였다.

독립운동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아무날 어디에서 안창호의 시국대강연을 한다는 소문을 돌리고 상부가, 차루가, 통천가, 하남가, 북대가, 우마항가를 비롯한 시내 여러 거리들에 광고도 큼직큼직하게 써붙이였다.

그 광고를 본 길림의 교포들은 모두 들뜨고 흥분되여 서로 만나기만 하면 《도산선생이 오셨다지요?》하는 말로 인사를 나누기까지 하였다.

강연전날밤에는 나도 오동진과 함께 안창호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이역의 하늘밑에서 장장 17년만에 대성학교시절의 은사를 만난 송암 오동진의 감회는 참으로 류다르고 절절한것이였다. 오동진은 대성학교 사범과에 입학할 때 안창호가 인물심사를 어떻게 하였고 입학한 후에는 자기를 어떻게 사랑해주었는가에 대하여 추억하였다. 나중에는 도산선생이 지은 청년학도가까지 부르며 그가 후대들의 독립정신을 계발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회고하였다. 그는 특히 안창호의 웅변술을 두고 실감있는 회억을 많이 하였다.

안창호의 웅변술에 대해서는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여러번 말씀하였다. 나는 만경대에 있을 때 벌써 아버지의 말씀을 통하여 안창호의 독립운동이 웅변으로부터 시작되였고 웅변을 떠나서는 그의 명성도 론할수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안창호가 연설을 하면 려염집아낙네들까지도 그 류창한 웅변술과 리상향론교화되여 가락지와 비녀를 뽑아 헌금을 한다는데 그게 과연 사실일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연설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가? 안창호와 같은 큰 인물이 미주나 상해가 아니라 여기 길림에 노상 와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나라가 독립된 다음 나에게 대통령을 선거할 권리를 준다면 나는 그 첫번째로 안창호선생을 추대할것이다.》

이것은 그날밤 오동진이 나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안창호의 시국대강연에 대한 나의 기대와 호기심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안창호는 조양문밖에 있는 대동공창에서 의사 라석주의 추도회를 열고 겸하여 강연도 하였다. 추도회에 참가하려고 모여온 3부의 대표들과 시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 유지들, 청년학생들은 거의다 강연회장에 모이였다. 바닥자리는 다 차고 모자라 대부분의 청중은 바람벽앞에 서서 강연을 듣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날 안창호는 《조선민족운동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는데 소문처럼 연설을 잘하였다. 그의 류창한 언변은 처음부터 군중의 찬탄을 자아냈다. 안창호가 동서고금의 력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섞어가며 조선민족의 출로에 대한 주장을 력설할 때 장내에서는 요란한 박수소리가 연방 터져올랐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문제였다.

안창호는 강연에서 《민족인격완성론》과 리상향론을 풀어나갔다. 그의 《민족인격완성론》은 《자아인격혁신론》과 《민족경제확립운동론》의 두가지 내용으로 되여있었다.

《자아인격혁신론》이란 우리 민족이 후진국으로서 왜놈들의 식민지가 된것은 인격과 수양이 낮은데 원인이 있는것만큼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일하고 서로 화목해지도록 각자가 자기 인격을 높여야 한다는것이다.

안창호의 주장에는 어딘가 《자아완성론》에서 표현된 똘스또이의 사고방식이나 자기자신을 개조하고 단련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를 얻을수 없다고 본 간디의 견해와 비슷한데가 있었다.

당시로 말하면 세계적인 대경제공황의 징조가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불안공포에 떨게 하던 때였다. 극도로 파쑈화된 제국주의가 대두하여 인간의 자주성을 총칼과 올가미로 참혹하게 교살하고있었다.

소부르죠아지식인들은 철갑으로 무장한 제국주의의 위력앞에서 전률하였다. 이런 시대적분위기속에서 그들이 찾아낸 정신적도피처가 바로 무저항주의였다. 무저항주의는 혁명적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공세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찾아가는 마지막안식처였다. 반혁명에 맞설 힘도 없고 의지도 없으니 결국은 무저항을 부르짖게 되는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저항주의가 개량주의로 표현되였다. 민족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은 3.1인민봉기후 적극적인 항쟁의 방법으로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청산하려는 혁명적인 립장으로부터 리탈하여 교육진흥운동과 민족산업진흥운동을 민족운동의 최대의 기치로 삼고 우리 인민의 정신적자질과 경제생활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민족운동의 중심지도층을 이루고있던 근대지식인들은 토산품애용과 민족기업의 육성으로 민족을 경제적파멸로부터 구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내 살림은 내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제적인 자급자족의 길을 타개하기 위한 범국민적인 물산장려운동을 벌리였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조만식은 토산애용의 상징으로 한평생 무명으로 지은 조선바지저고리와 조선식두루마기를 입고 지냈다. 그는 명함장도 국산한지로 만든것을 사용하였으며 신발도 외국것을 신지 않고 조선것을 신고 다니였다.

민족개량주의를 류포시키는데서 리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많은 작용을 하였다. 이 론문을 읽으면 개량주의의 본질을 알수 있고 그 위험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쉽사리 판단할수 있다.

내가 《민족개조론》을 읽고 제일 불쾌하게 생각한것은 리광수가 조선민족을 렬등한 민족처럼 여기고있는 점이였다. 나는 우리 나라가 후진국이라는 생각은 해봤지만 조선민족을 렬등한 민족이라고 여긴적은 한번도 없었다.

조선민족은 세계최초의 철갑선과 금속활자를 창조한 문명하고 슬기로운 민족이며 동방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문화의 개척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외적의 침해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강건한 자위정신은 일찌기 아세아만방에 맹위를 떨치였고 백지장처럼 깨끗한 우리 인민의 도덕은 세계의 찬탄을 자아냈다.

우리 인민의 인습이나 풍속가운데는 물론 부족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고 부차적인것이지 본질적인것은 아니였다. 그 부차적인것을 가지고 민족성이라고 할수는 없었다.

리광수는 《민족개조론》에서 마치 조선사람들이 《렬악한 민족성》때문에 망한것처럼 말하였는데 조선이 망한것은 락후한 민족성때문에 아니라 통치배들의 부패무능때문이였다.

조선민족이 《렬등》하다고 개탄하는 리광수의 론조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론조와 일맥상통하였다. 일본사람들은 입만 벌리면 우리 민족을 《렬등한 민족》이라고 비방하였다. 《렬등》하기때문에 일본이 《보호》, 《지도》, 《통제》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민족개조론》은 일본제국주의강점자들에게 보내는 리광수의 공개전향문이나 다름없었다. 이 전향문을 쓴 대가로 그는 지난날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총독부코앞에서 뻐젓이 올방자를 틀고앉아 련애소설들을 써내고있었다.

소설가로서의 리광수는 초기에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대중이 그를 사랑한것은 그가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진보적인 작품을 써왔기때문이다. 그는 우리 나라 현대소설의 개척자라고 불리울만큼 새로운 양상의 소설을 많이 써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으로 하여 리광수에 대한 민중의 애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작품들에서 엿보이던 개량주의적요소가 완전한 자기의 형태를 가지고 이 론문에 등장한것이다.

민족운동을 개량주의의 방향으로 유도한 근대지식인들은 심지어 국채보상운동을 통하여 모은 돈으로 조선사람이 주관하는 민립대학까지 설립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독립인재양성의 온상으로 될수 있는 민립대학의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비폭력적인 물산장려운동도 역시 일제의 저항에 부딪치였다. 조선사람이 일본이 내려먹이는 상품을 쓰지 않고 국산제만 사용하는데 대하여 총독부가 눈을 감아줄리는 만무한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운동을 일화배척의 목적을 가진 반일운동으로 보고 독을 품고 방해하였다.

실력양성의 간판밑에 진행된 개량주의운동은 리념상에서는 애국애족을 표방하였으나 방법상에서는 비폭력을 전제로 하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운동이였다. 총독부가 허용하는 한도에서 민족의 경제력을 육성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침략에 대항하려는 그들의 지향은 사실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이 자기를 매장할 민족산업의 발달용허하지 않으리라는것은 초보의 초보에 속하는 상식인데 기업을 창설하고 국산품을 애용하면 민족의 살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였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개량주의길로 타락한 민족운동자들은 제국주의속성을 옳게 보지 못하였거나 외면하였다. 그들이 무력항쟁으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평화적인 문화운동으로 이행한것은 투쟁방법상에서의 후퇴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식민주의자들과의 평화적공존이나 타협을 전제로 하는 운동이였다. 평화적공존이나 타협속에서는 어차피 변질현상이 생기기마련이다. 실지로 개량주의자들가운데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후날 민족운동대렬에서 도피하든가, 전향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되였다.

자강론의 변형인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준비론이라고도 함)은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의거하고있던 리론적지탱점이였다.

그는 조선민족을 세계에서 정신적수양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이 적어도 미국이나 영국사람들만큼 때벗이를 해야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수 있을것이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강연장의 분위기를 보니 대부분의 군중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고있는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의 강연내용은 일구일언이 다 애국의 정신으로 관통되여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발언에서 민중의 투쟁의욕을 거세할수 있는 위험한 요소들을 발견하고 실망하였다. 총체적으로 볼 때 그의 주장에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점들이 있었다.

각자가 자기를 수양하고 인격을 높이며 그에 토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안창호의 주장에는 나도 동감이였다. 하지만 우리 민족을 세계적으로 정신적자질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한 그의 견해와 실력양성을 위한 개량주의적방법론에는 도저히 찬성할수 없었다. 실력양성은 어디까지나 독립투쟁을 추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되여야지 그자체가 혁명전체를 대신할수는 없었다.

그런데 안창호는 독립투쟁을 실력양성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실력이 양성된다고 하여 독립투쟁이 저절로 진척되는것은 아닌데 그는 민족의 력량을 어떻게 조직하고 그것을 종국적인 승리의 길로 어떻게 동원시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민족해방투쟁의 기본형태로 되여야 할 폭력투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의 기초로 될수 있는 산업을 진흥시킨다는것도 역시 문제가 있었다. 국권을 잃은 민족에게 발전소를 건설하라고 차관을 줄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온 강토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는데 설사 렬강들이 차관을 준다 하여도 이국땅에서 어떻게 발전소를 세우고 벼농사를 착실하게 할수 있겠는가. 또 일제가 조선사람들이 그렇게 하라고 가만 내버려 두겠는가.

나는 강연을 듣다못해 더 참지 못하고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종이에 써서 들이대였다.

ㅡ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민족의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라를 일제놈들에게 통채로 빼앗긴 조건에서 그것이 이루어질수 있는가?

ㅡ우리 민족을 정신수양이 낮은 민족이라고 했는데 어떤 점이 그러한가?

ㅡ연사가 말하는 렬강이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인데 과연 우리가 그들을 본받아야 하는가? 또 우리가 그들의 《원조》에 의해서 독립을 가져올수 있는가?

질문쪽지는 앞에 앉은 학생들과 사회자를 거쳐 안창호에게 전달되였다. 반발심에 못이겨 단호하게 서면질문을 들이대기는 하였으나 막상 사회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학생들이 앉아있는쪽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사실 그때의 내 심정은 복잡하였다. 그 질문때문에 강연중에 있는 연사가 불쾌한 자극을 받게 된다면 안창호를 숭배하고있는 독립운동자들과 수백명의 청중들에게 큰 실망을 주게 되지 않을가 하는 우려도 생기였다. 안창호의 강연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 그의 강연을 위해 남다른 성의를 보인 오동진도 서면질문의 장본인인 나를 고깝게 생각할수 있었다.

물론 이런 결과는 내가 바라는것이 아니였다. 내가 안창호에게 서면질문을 들이댄것은 그가 우리의 질문을 받고 잠간만이라도 자기의 주장을 검토하여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정신에 배치되는 유해로운 사상을 그이상 더 먹이지 말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있었기때문이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대선배로 존경받는 안창호에게서 그가 청중에게 채 말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침이나 방략을 듣고싶은 욕망을 억누를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사태는 내가 예상한것보다 크게 번지였다.

안창호는 쪽지의 글을 한참동안 내려다보고나서 사회자에게 무엇인가 몇마디 물었다. 후날 손정도에게서 말을 들으니 그날 안창호는 사회자에게 질문쪽지에 김성주라는 서명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아는가고 물었다고 한다.

그처럼 도도한 기상을 가지고 장내를 쥐락펴락하던 안창호의 연설이 그만 김이 빠져버리였다. 안창호는 조금전까지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짓고 연탁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

연사는 매우 심각하게 질문을 받아들인것 같았다. 좀 자극이나 받으라고 그런 질문을 했는데 안창호자신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강연을 중도에서 스스로 포기해버린것이였다.

실망한 청중은 도산선생이 왜 갑자기 저렇게 주접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출입문쪽으로 밀려나갔다.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길림독군서에서 수백명의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가지고 강연회장에 불시에 달려들어 3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체포했던것이다. 연사인 안창호는 물론, 현묵관, 김리대, 리관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자들이 한꺼번에 무리로 붙잡혀 경찰청에 구금되였다.

이 대검거사건을 조종한것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구니도모였다. 안창호의 길림도착과 때를 같이하여 봉천에 나타난 구니도모는 중국헌병사령관 양우정에게 수백명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길림으로 모였으니 이를 체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양우정의 명령에 따라 길림독군서의 경찰들과 헌병들은 구니도모의 조종밑에 조선사람들의 가택을 수색하는 한편 대동공창에 달려들어 류례없는 대검거작전을 벌리였다.

우리는 안창호가 비록 강연은 잘하지 못했지만 적들이 그도 포함하여 수백명의 조선사람들을 붙들어간데 대해서는 치솟는 격분을 누를수 없었다. 더구나 서면질문끝에 강연이 중단되고 강연이 중단되는 동시에 안창호가 체포되여가니 나로서는 이런 련쇄반응의 책임이 마치 서면질문에라도 있는듯 한 느낌까지 들어 괴로운 생각을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중국 동북지방을 통치하고있던 장작림군벌은 《미쯔야협정》으로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반일독립운동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있었다. 이 협정은 만주지방에서 조선민족해방투쟁의 근원을 없애기 위한 악질적인 협정이였다.

이 협정에 의하여 조선인애국자들을 체포하는 졸개들에게는 상금까지 주었다. 중국의 일부 반동관헌들은 상금을 타먹으려고 허위밀고까지 하였다.

대동공창에서 벌어진 집단적인 검거소동도 역시 장작림군벌이 일제의 사촉을 받아서 감행한 반동적인 폭압행위였다.

우리는 즉시에 《ㅌ. ㄷ》성원들의 회의를 열고 붙잡힌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그 걸음으로 독립운동자들을 찾아가 그들과도 체포된 사람들을 빼내올 방법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넋을 잃고 앉아있을뿐 속수무책이였다.

우리는 모두 단결하여 길림독군서에 압력을 가하면 안창호선생은 물론, 체포된 사람들을 다 빼내올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군중의 힘을 동원하는것이 제일 위력하다는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독립운동자들은 맨주먹밖에 없는 자네네가 무슨 재간으로 그 무지막지한 독군서놈들을 굴복시키겠는가, 군중이 나서서 떠드는것보다는 돈이나 뢰물이 더 맥을 추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대중의 힘을 잘 믿지 않는 타성이 그때에도 나타났다.

나는 돈으로 통하지 않는것도 군중의 단결된 힘으로 능히 해결할수 있다고 그들을 꾸준하게 설복하였다. 그런 다음 손정도가 운영하는 길림례배당에서 시내의 독립운동자들과 조선인유지들, 청소년학생들이 참가한 군중집회를 가졌다. 우리는 집회참가자들에게 독군서가 왜놈들과 한짝이 되여 조선의 애국자들과 무고한 동포들을 무리로 붙잡아갔다는것을 설명한 다음 그들이 이제 몇푼의 돈을 받아먹는 대가로 체포해간 사람들을 일본경찰에 모조리 넘겨줄수 있다는것을 경고하였다. 조선의 애국자들이 왜놈들손에 넘어가는 날이면 무자비한 처형을 면할수 없다는것은 자명한 일인데 겨레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조선사람들은 한마음한뜻으로 단결하여 애국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중적석방운동에 떨쳐나서자고 호소도 하였다.

우리가 안창호에 대한 석방운동을 벌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리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지어는 우리의 영향을 받고있는 청년학생들속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안창호의 리론에 대하여 서면질문까지 들이댄 사람들이 왜 이번에는 그를 구원하지 못해 그렇게 애를 쓰느냐는것이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안창호의 사상을 문제시하는것이지 안창호란 인간자체를 반대하는것은 아니다, 안창호도 조선사람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애국지사인데 어떻게 그를 구원하지 않을수 있겠는가고 설복하였다. 나는 그때 수난당한 조선민족은 어려운 때를 당하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에 내세웠다.

내가 안창호의 강연을 반박한것은 그들이 사대주의적이고 민족허무주의적이며 개량주의적인 립장에서 벗어나 조국을 광복하는 성스러운 싸움에 더 적극적으로 투신해주기를 바랐기때문이였다. 우리가 민족주의자들과 사상투쟁을 한것은 그들을 타도하자는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쳐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반일의 기치아래 묶어세우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안창호석방을 위한 군중집회가 있은 다음 길림의 담벽과 전주대들에는 《중국경찰이 근거없이 조선동포들을 붙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놓고 박해한다.》, 《중국관헌은 일제의 간계에 속지 말라!》, 《감옥에 갇힌 조선동포들을 하루빨리 석방하라!》는 내용의 삐라와 격문들이 나붙었다.

우리는 중국의 각 신문사들에도 글을 써보내여 사회여론을 환기시켰다. 길림시내의 청소년들과 군중들은 매일과 같이 독군서에 몰려가 감금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웨쳤다. 어떤 날에는 독군서앞에서 시위도 벌리였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중국의 반동군벌이 체포해간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을 일제의 손에 넘겨주지 못하게 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다.

독군서는 군중의 압력에 못이겨 20여일만에 안창호를 비롯한 구속자전원을 석방하였다. 긴장된 투쟁끝에 얻어진 안창호의 석방은 나를 몹시 기쁘게 하였다. 우리는 자유로운 몸이 되여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온 안창호를 만나려고 독립운동자들을 찾아갔다. 나는 그가 질문에 담겨진 우리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리해하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감옥에서 나오자바람으로 총총히 길림땅을 떠나가버리였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상해에 돌아갔는지 똑똑히 알수 없지만 나는 그가 정신을 가다듬고 새로운 기분으로 길림을 떠났을것이라고 확신한다. 애국자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시련을 감당해낸 그후의 그의 생활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안창호가 길림을 떠난 후 나는 한번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10여년이 지난 후 우리가 백두산쪽에서 무장투쟁을 할 때 안창호는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최후를 마쳤다.

나는 그때 그 소식을 듣고 평생을 민족의 계몽과 단합에 바쳐온 안창호가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일찌기 떠나간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별스럽게 맺어졌던 안창호와의 인연이 그것으로 완전히 끊어져버린것은 아니였다. 안창호는 갔지만 그의 녀동생 안신호가 해방후 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였다.

해방후 조국에 개선한 나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을 통하여 안창호의 누이동생이 남포방면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 당시 남포지구에서는 김경석동무가 파견원으로 활동하고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안신호를 찾을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며칠후 남포에서 안신호를 찾았다는 통보가 올라왔다. 김경석동무에게 전화로 그 녀자의 경향이 어떤가고 물으니 그는 밤낮 성경책만 끼고다니는 녀자인데 독실한 신자 같다고만 대답하였다.

나는 안신호가 이름난 애국렬사의 동생이기때문에 종교를 믿어도 애국심만은 있을것이니 당적영향을 주면서 잘 이끌어보라고 김경석동무에게 말하였다.

김경석동무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별로 시답지 않아하였다. 신자들이라면 덮어놓고 색안경을 끼고보는 때여서 우리가 그렇게 루루이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경원시하는 페단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있었다.

몇달후 김경석동무는 나에게 안신호가 입당하였다는것과 그가 성경책속에 당증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새조선건설에 헌신분투하고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안창호의 애국혼은 결코 지하에만 있는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안신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독립인사로서의 안창호의 파란많은 일생을 생각했고 생전에 그가 민족을 위해 바친 로고를 더듬어보며 감개무량해지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일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김구는 남북련석회의때 북반부에 들어와 안신호를 만나보고 놀랐다. 공산주의자들이 상해림시정부 거물의 누이동생을 중앙녀맹부위원장으로 등용시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다. 안신호는 그의 젊은 시절의 애인이며 약혼녀였다.

안신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곧 안창호에 대한 믿음이였다. 그것은 또한 리념이나 신앙초월하여 민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속에서 애국애족의 뉴대에 의해 혈연적으로 련결되여있는 독립운동의 모든 선배들에 대한 우리의 례절이며 인사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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