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3월 29일

1. 화성의숙

장례식이 끝난 다음 아버지의 친구들은 무송에 며칠간 머무르면서 나의 장래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들의 보증과 소개를 받아가지고 내가 화성의숙으로 떠난것은 1926년 6월중순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우리 나라에서 6.10만세시위투쟁이 일어난 직후였다.

6.10만세시위투쟁은 3.1인민봉기후 민족해방투쟁무대에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직된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이였다.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이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는데서 3.1인민봉기가 분기점의 역할을 하였다는것은 세상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3.1인민봉기를 통하여 부르죠아민족주의가 더는 민족해방투쟁의 기치로 될수 없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낀 선각자들속에서 새 사조를 따르는 기운이 급속히 자라났으며 그들의 활동에 의하여 맑스ㅡ레닌주의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였다.

3.1인민봉기가 있은 이듬해에 서울에서는 로동공제회라는 로동단체가 출현하였으며 련이어 농민단체, 청년단체, 부녀단체와 같은 대중조직들이 숙출되였다.

이런 조직들의 지도밑에 우리 나라에서는 1920년대초부터 무산민중권익을 옹호하며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 1921년에 부산부두 로동자들이 총파업을 일으켰다. 그후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서울, 평양, 인천과 같은 산업중심지들을 비롯하여 많은 지방들에서 련속적으로 일어났다. 로동운동의 영향밑에 일본인대지주들과 악질적인 조선인지주들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재령나무리벌과 암태도를 휩쓸었으며 식민지노예교육을 반대하고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는 청년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무단통치》의 총검우에 《문화통치》의 비단보자기를 씌워놓고 《중추원》에 친일파들을 몇명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조선사람의 정치참여를 장려하는척하면서 《민의창달》의 허울밑에 조선글로 된 신문, 잡지를 몇종 발간하도록 허가해주고는 마치 그 무슨 복지시대라도 온것처럼 요란스럽게 떠들었지만 우리 민족은 그런 속임수를 용납하지 않고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하였다.

로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발전추세는 이를 통일적으로 령솔할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지도세력을 요구하였으며 이런 력사적요구를 반영하여 1925년 4월 서울에서는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이무렵으로 말하면 구라파 여러 나라들에서도 로동계급의 정당들이 많이 출현하던 때였다.

조선공산당은 창건후 현실에 부합되는 지도사상이 없고 대렬이 통일되지 못하고 대중속에 튼튼히 뿌리박지 못한 근본적인 제한성으로 하여 로동계급의 전위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였으나 그 창건은 신구사조의 교체와 민족해방투쟁의 질적변화를 보여주는 의의있는 사변으로서 로동운동과 농민운동, 청년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을 추동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전국적범위에서 새로운 반일시위를 준비하게 되였다.

이런 때에 리조의 마지막왕이였던 순종이 사망하였다. 순종의 사망은 조선민족의 반일감정을 크게 건드려놓았다. 왕의 부고에 접한 조선사람들은 상복을 차려입고 남녀로소 할것없이 대성통곡하였다. 나라가 망한 다음에도 순종이 마지막왕으로서 리왕조를 상징하고있었는데 그마저 없어지니 쌓이고쌓였던 망국의 설음이 다시금 울음으로 폭발한것이다. 군악을 울리며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소리에 군중은 더욱 슬피 울었다.

잘 있거라 창덕궁아

영원히 무궁히

나는 간다 북망산

쓸쓸한곳으로

인제 가면 언제나

또다시 오려나

2천만의 백의동포

무궁하여라

그 통곡소리가 일본강점자들에게는 폭탄과 같은 자극을 주었다.

조선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우는곳이 있으면 즉시에 일본기마경찰대가 출동하여 총칼과 곤봉을 휘둘러 야수적으로 해산시키였다. 소학교아이들까지도 가차없는 곤봉세례를 받았다. 나라가 망해도 슬퍼하지 말고 왕이 죽어도 울지 말고 입을 다물고있으라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탈바꿈을 한 총독정치의 진면모였다.

적들의 포악무도한 탄압만행은 불길처럼 타번지는 우리 인민의 반일감정에 기름을 쏟아붓는 격이 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의 반일기세에 편승하여 순종의 장례식날을 계기로 전국적범위에서 반일시위투쟁을 벌리기로 계획하고 그 준비를 비밀리에 추진시키였다.

그런데 그 비밀이 시위투쟁준비위원회에 끼여있던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일제에게 알려졌다. 반일시위준비는 무자비한 탄압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애국적인민들은 시위투쟁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나갈 때 수만명의 서울시민들이 《조선독립 만세!》, 《일본군대 물러가라!》, 《조선독립운동자들은 단결하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대중적인 시위를 벌리였다. 《문화통치》 7년간 쌓이고쌓인 원한울분이 마침내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폭발한것이다.

열두어살안팎의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대렬을 짓고 시위에 나섰다. 시위군중은 무장한 적의 군경들과 치렬한 격투를 벌리면서 용감하게 싸웠다.

6.10만세시위투쟁은 종파분자들의 책동으로 하여 일제의 야수적탄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의 사대사상이 3.1인민봉기를 실패하게 한 근본원인의 하나라면 초기공산주의자들의 종파행위는 6.10만세시위투쟁을 말아먹은 기본화근이였다. 화요파는 이 투쟁을 지도하면서 저들의 종파적견지에서 조직사업을 하였고 서울파는 이에 대립하여 방해공작을 하였다.

6.10만세시위투쟁을 발단으로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주요인물들은 대부분 검거되였다.

6.10만세사건을 계기로 《문화통치》의 기만성과 교활성은 만천하에 폭로되였다.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 인민은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반드시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존엄을 고수하려는 불굴의 의지와 투쟁기세를 과시하였다.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파벌관념을 버리고 통일적으로 이 투쟁을 조직하고 지휘하였더라면 6.10만세운동은 거족적인 투쟁으로 확대발전되였을것이며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보다 큰 타격을 주었을것이다.

6.10만세운동은 종파를 극복함이 없이는 공산주의운동의 발전도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승리도 이룩할수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다.

나는 그때 6.10만세운동의 결과를 놓고 제나름대로 분석해보았다. 내가 이상스럽게 생각한것은 이 투쟁의 조직자들이 왜 3.1운동당시의 평화적방법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는가 하는것이였다.

천일양병 일일용병이라는 말도 있지만 인민대중을 한번 싸움마당에 내세우자면 그들을 충분히 교양하고 조직화하며 훈련을 잘 주어야 한다.

그런데 6.10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한 사람들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도 없이 총을 든 군경들앞에 적수공권의 군중을 수만명이나 내세웠으니 그 결과가 비참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어설 때마다 무리죽음을 내고 좌절당하군 하는 반일운동을 생각하면 분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그 실패는 내 피를 끓게 하고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찾아야 하겠다는 나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해주었다.

나는 이런 사상적충동을 안고 아버지의 유훈, 어머니의 념원, 민중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화성의숙시절을 값있게 보내리라고 결심하였다.

화성의숙은 독립군의 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1925년초에 세운 정의부소속의 2년제 군사정치학교였다.

민족재생의 출로를 실력배양에서 찾은 독립운동자들과 애국적인 계몽활동가들은 일반학교의 설립과 함께 군사인재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무관학교의 설립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만주각지에는 신흥강습소(류하현), 십리평사관학교(왕청현), 소사하훈련소(안도현), 화성의숙(화전현)을 비롯한 여러개의 무관학교들이 일어섰다.

이 무관학교설립운동에서는 량기탁, 리시영, 오동진, 리범석, 김규식, 김좌진과 같은 독립운동의 거두들이 중심적역할을 담당하였다.

화성의숙의 입학대상은 정의부산하 중대들에서 선발된 현역군인들이였다. 우에서 입학생수를 쪼개여 내려보내면 중대별로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보냈는데 2년동안의 학습과정을 마치면 성적에 따라 새 직급을 주어 출신중대에 되돌려보내였다. 독립군밖에서도 개별적인사들의 소개로 입학하는 청년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뜻을 가진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은 은근히 이 학교에 가고싶어하였다.

지금 화성의숙시절의 나의 동창생들가운데 그 시절을 회고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생존해계실 때만 해도 나는 나의 전도문제와 가정살림에 대하여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나의 장래문제를 비롯하여 가정을 운영해나가는데서 나서는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에 나도 자연히 관심을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서거에서 오는 슬픔과 고뇌때문에 망연자실의 상태에 처해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나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한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일념과 사정이 허락되면 어머니의 부담이 되는한이 있더라도 상급학교에 진학해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자기의 전도문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나를 중학까지 보내주라고 유언하였지만 우리 집 형편을 보면 내가 상급학교에 가고싶어도 가겠다고 말할 형편이 못되였다. 내가 학교에 가면 학비조달의 무거운 부담을 어머니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데 어머니의 삯빨래와 삯바느질에서 얻어지는 보잘것없는 수입으로는 빈한가계를 유지하고 나의 학업을 위해 달마다 학비를 대줄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니 그 조수역을 하던 형권삼촌도 일조에 직업을 잃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약방에는 약이 얼마 없었다.

이런 때에 아버지의 친구들이 나를 화성의숙에 가라고 권고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어머니에게 남긴 유언가운데 나의 진학문제도 포함되여있었다. 내가 상급학교로 갈 때에는 아버지의 친구들에게 서신을 내여 그들의 도움을 받으라는것이 어머니와 삼촌에게 주고 간 아버지의 마지막부탁이였다.

어머니는 그 부탁대로 여러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인정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수 없는 각박한 세월이였으니 어머니로서는 미안한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여 나의 전도문제는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후 무송에 남아있던 독립운동자들속에서 자연히 한개의 의제상정되지 않을수 없었다.

오동진은 의산 최동오선생한테 소개신도 보냈으니 화성의숙에 가라, 화성의숙에 가서 군사를 배우는것이 네 포부에도 맞을것이다, 입씨름으로는 독립을 못한다는거야 너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냐, 학교를 졸업하면 그후의 전도문제는 우리가 책임지고 돌봐줄테니 의숙에 가서 마음껏 공부하라고 하였다.

아버지의 친우들은 장차 나를 자기들의 대를 이을 후비인재로 키우려고 계획하고있었던것 같았다. 독립군지도자들이 후비육성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인재양성을 중시한것은 좋은 일이였다.

나는 오동진의 제의에 쾌히 동의하였다. 나의 전도를 그렇게도 살틀히 걱정해주는 독립운동자들의 진정이 참말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무관학교에 보내여 독립운동인재로 키우려는 그들의 의도는 일생을 조국해방위업에 바치려는 나의 지향에도 부합되는것이였다. 군사적대결에 의해서만 일제를 타승할수 있고 군사를 알아야 독립운동의 전렬에 설수 있다는것이 그 당시의 나의 견해였다. 이제는 그 꿈을 실현할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것이다.

나는 화성의숙을 반일독립투쟁의 활무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화전으로 떠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외국의 어떤 정객이 나보고 주석님은 공산주의자인데 어떻게 되여 민족주의자들이 운영하는 군사학교에 가게 되였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있을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화성의숙에 입학한것은 아직 공산주의운동을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다. 나의 세계관은 맑스ㅡ레닌주의를 자기의 리념으로 완전히 삼을만큼 원숙한 단계에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내가 공산주의를 지식으로 섭취한것이 있었다면 무송에서 《사회주의대의》와 《레닌의 일생기》라는 소책자를 읽은것뿐이고 사회주의리념이 실현된 신생쏘련의 발전모습을 풍문으로 들으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사회를 끝없이 동경하였을뿐이다.

내 주변에는 공산주의자들보다 민족주의자들이 더 많았으며 고장을 옮길 때마다 내가 다니던 여러 학교의 선생들은 공산주의사상보다 민족주의사상을 더 많이 고취하였다. 우리는 새 사조에 의해 교체될 운명을 지니고있었으나 그 영향력을 무시할수 없는, 반세기이상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민족주의의 포위속에 있었다.

의숙에 끌끌한 청년들이 많고 정치교육과 함께 군사교육을 하며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공부시켜준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화전으로 갈 결심을 내리게 하였다. 학비를 댈 힘이 없으면서도 상급학교에 갈 희망과 아버지의 뜻을 이어 조국광복의 길에 나서려는 포부를 동시에 품고있는 나로서는 그보다 더 리상적인 교육환경과 조건을 생각할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는 화성의숙의 교육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있었다. 2년동안 의숙의 교육을 받느라면 중학과정안은 물론, 군사를 하나 더 배우게 되리라는 흐뭇한 생각도 들었다.

정작 집을 나서고보니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되였다. 아버지의 유해가 묻혀있는 양지촌을 돌아보고 멀리서 나를 바래주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아보니 마음이 산란하여 가볍게 발을 옮길수가 없었다.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고생할 어머니가 걱정스러웠다. 무송과 같은 백사지에서 어머니 혼자 가정을 유지해나간다는것이 그때 형편에서는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길을 떠난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한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무송에서 화전까지는 륙로로 300리가량 되였다.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은 풍을 친 한림차라는것을 타고 쉽게 다니는 길이였지만 로자가 변변치 못한 나는 그런 호강을 할 처지가 못되였다.

화전은 송화강과 휘발하의 합수목으로부터 오륙십리 떨어진곳에 자리잡고있는 길림성관할의 산간도시로서 남만치고도 손꼽히는 독립운동중심지의 하나였다.

내가 길을 떠날 때 무송의 어떤 독립운동자는 나에게 화성의숙의 살림살이가 몹시 가난하니 고생스러울것이라고 걱정해주었다. 독립군의 재정형편이 전반적으로 어려워서 화성의숙의 숙식조건이 변변치 못하겠지만 그런 곤난 같은것은 문제로도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무명옷을 입고 타개죽을 먹으며 자라난 나에게는 화성의숙이 아무리 가난하면 우리 만경대집보다야 더 가난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약간이나마 불안스럽게 생각한것은 나이도 어리고 군인경력도 가지고있지 못한 나를 화성의숙이 어떻게 맞아주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렇지만 화전에 김시우가 있고 화성의숙에 강제하와 같은 아버지의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큰 의지로 되였다.

나는 화전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일러준대로 김시우의 집부터 찾았다. 그는 정의부소속의 화전총관소 총관이였다. 총관소란 관할구역안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사람들의 생활상 편의를 봐주는 자치적인 기구였다. 이런 총관소들이 무송에도 있고 반석에도 있고 관전, 왕청문, 삼원포 같은 고장에도 있었다.

김시우는 자성군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와 련계를 맺고있던 독립운동자였다. 3.1인민봉기후 중국에 들어가 림강과 단동일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4년에 화전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그는 화전시내에 정미소를 하나 꾸려놓고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면서 대중계몽에 힘썼다.

그가 세워놓은것이 남대가에 있는 영풍정미소였다. 김시우는 총관의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그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거기서 돈을 뽑아 독립군에 식량도 대여주고 화성의숙과 그 부근에 있는 조선인모범소학교에 재정적인 후원도 하였다.

나는 림강에 있을 때부터 김총관의 북방사람다운 호방기질강직한 성미에 매혹되여 그를 무척 따르고 존경해왔었다. 김총관도 나를 친아들이나 조카처럼 극진히 사랑해주었다.

뜨락에서 닭장을 손질하던 김시우내외는 내가 나타나자 환성을 지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집 뜨락에는 발에 걸채일 정도로 닭들이 많았다.

나는 김시우의 안내로 화성의숙을 찾아갔다.

김시우는 정미업자특유의 쌀겨냄새가 풍기는 옷을 걸치고 나를 화성의숙으로 안내하였다.

화성의숙은 휘발하기슭에 자리잡고있었다. 만주의 어느곳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물매가 급한 초가지붕과 청벽돌로 쌓은 거무스레한 벽체가 스무나무숲사이로 바라보이였다. 교사뒤에는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화성의숙의 기숙사가 자리잡고있었다.

교사도 기숙사도 내가 상상했던것보다는 훨씬 초라했다. 하지만 건물이야 초라한들 뭐라는가, 집이 너절해도 좋은것을 많이 배울수만 있다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서운한 감을 눌러버리였다.

그래도 운동장만은 크고 번듯하였다.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화성의숙의 전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가 팔도구에서 살 때 오동진이 추운 겨울날 털모자도 쓰지 않고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와 함께 화성의숙의 설립문제를 두고 의논하던 일이 생각났다.

이 의숙에 입학생으로 찾아와 교사를 살펴보는 내 마음속에는 뜨거운 감회가 끓어올랐다.

키가 자그마하고 이마가 훌렁 벗어진 중년의 인상좋은 숙장이 자기 방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그가 의산 최동오선생이였다.

의산선생은 33인으로 불리우는 3.1인민봉기 주도자의 한사람인 천도교 3세교주 손병희의 제자였다. 손병희가 설립한 강습소를 나온 후 고향 의주에 내려와 서당을 세우고 천도교인 자녀들을 공부시키는것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사람이였다. 3.1운동에도 참가하였고 그후에는 중국에 망명하여 천도교 종리원을 세우고 망명동포들속에서 애국적인 포교활동을 벌리였다.

숙장은 우리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보지 못한것이 일생의 한이 될것 같다고 하면서 못내 가슴아파하였다. 숙장은 총관과 한참동안 우리 아버지에 대한 회고담을 벌려놓았다.

그날 최동오선생이 나에게 한 훈계가 아주 인상적인것이였다.

《성주는 아주 맞춤한 때에 우리 의숙에 왔소. 독립운동은 수재들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했거든. 홍범도나 류린석식의 주먹구구시대는 이미 지나갔단 말이요. 왜놈의 신식전법이나 신식무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식전법과 신식무장이 필요한데 이것을 누가 해결하겠는가? 바로 성주네와 같은 새 세대가 맡아 해결해야 한단 말이요.…》

숙장선생은 그밖에도 교훈으로 삼을 만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그는 숙식조건이 불편하다는것을 재삼 강조하면서 이런 곤난, 저런 곤난이 있더라도 조선독립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참고 견디라고 격려해주었다. 첫 인상에도 성미가 온화하고 놀라우리만큼 언변이 류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김시우네 집에서는 나를 위해 저녁을 차리였다. 주인내외의 정성이 엿보이는 소박한 식탁앞에 아버지의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과 마주앉으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두리반상 한쪽구석에는 곡주도 한병 놓여있었다. 김시우가 반주를 하려고 내놓은줄로만 알았는데 총관은 뜻밖에도 잔에 술을 부어 나에게 권하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송구스러워 두손을 바삐 내저었다. 난생처음으로 받게 되는 어른대접이여서 여간만 당황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때 내가 너무 슬퍼하는것을 보고 장철호가 술을 권한 일이 한번 있지만 그것은 상제로서 받는 대접이였지 그이상의것은 아니였다.

그런데 김시우는 나를 완전히 어른처럼 대하는것이였다. 그는 말투도 이전날의 《해라》로부터 《하게》조로 바꾸었다.

《자네가 온다니 자네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지더군. 그래서 내 술을 한병 갖추어놓으라고 했네. 자네 아버지가 화전에 오시면 늘 이 상에서 내가 권하는 잔을 받군 했네. 오늘은 자네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 잔을 받으라구. 자네야 이제부터는 가장이 아닌가.》

총관이 이렇게 말하며 허물없이 잔을 권했지만 나는 가볍게 그 잔을 들수가 없었다. 줌안에도 차지 않는 조그마한 잔이였으나 거기에는 참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무게가 실려있었다.

김시우가 나를 성인으로 대해주는 그자리에서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른처럼 처신을 해야 하리라는 엄숙한 사명감을 느끼게 되였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침실 겸 서재로 리용하는 방을 내주었다. 숙장선생과도 토론이 되였으니 기숙사에 들어가있을 생각은 아예 말고 자기 집에 눌러있으라고 오금을 박았다.

김형직선생이 림종을 앞두고 편지로 성주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신것만큼 자기는 그 부탁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것이였다.

무송에서나 화전에서나 아버지의 친구들은 이처럼 나를 위해 성의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와의 의리를 지키느라고 그렇게 해주었을것이다. 나는 그때 그 성의나 의리를 두고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 의리의 밑바탕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몫할것을 바라는 아버지세대 사람들의 절절한 기대가 깔려있었다. 그 기대는 나로 하여금 조선의 아들로서, 새 세대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장차 아버지의 유훈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학습과 훈련을 잘하여 민중의 기대에 보답할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나는 다음날부터 화성의숙에서 생소한 군관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최동오선생이 나를 교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학생들은 나를 보자 어린 독립군이 왔다고 하면서 신기해하였다. 어느 중대에서 심부름이나 하다가 굴러온 애숭이군대라고 짐작하는것 같았다.

40명 남짓한 학생들가운데 나만큼 어린 학생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20살안팎의 청년들로서 그중에는 수염이 검숭검숭하게 난 아이아버지도 있었다. 모두 내 형이나 삼촌벌쯤 되는 학생들이였다.

숙장이 나를 소개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나는 선생이 정해주는대로 창문쪽 맨 앞줄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내 옆자리에는 1중대출신인 박차석이라고 하는 학생이 앉아있었다. 그는 수업이 시작될 때마다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들의 경력과 개성중에서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귀속말로 간단간단히 튕겨주군 하였다.

그가 제일 존경을 가지고 소개한 교원은 군사교관 리웅이였다. 리웅은 정의부의 군사위원인데 황포군관학교를 다니였다고 한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면 누구나 다 굉장한 존재처럼 우러러 볼 때였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큰 약국을 경영하고있기때문에 그는 인삼을 많이 부쳐다 먹는데 관료기가 좀 있는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박식하고 다재다능하여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하였다.

박차석은 화성의숙에서 조선력사와 지리, 생물, 수학, 체육, 군사학, 세계혁명사와 같은 과목들을 배워준다고 하면서 종이장에 의숙의 일과에 대해서도 적어주었다.

후날 무장투쟁을 할 때 내 가슴속에 아물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 박차석과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그가 후에 길을 잘못들었지만 화성의숙시절에는 나하고 살붙이처럼 각별한 우정을 나누면서 지냈다.

그날 오후 6중대출신의 최창걸이 10여명의 동무들과 함께 나를 만나려고 김시우네 집으로 찾아왔다. 아마 그들이 나에 대해서 첫인상을 좋게 가졌던것 같다. 내가 하도 어린 나이로 입학하다보니 호기심도 생기고 말이라도 나누고싶었던 모양이였다.

최창걸은 머리에 큼직한 허물자리가 있었다. 넓은 앞이마와 시꺼먼 눈섭이 아주 남성적이였다. 키도 크고 몸집도 좋아서 머리의 허물만 아니라면 미남자라고 불리울만큼 잘 생긴 사람이였다. 그의 말투나 몸가짐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서글서글한 멋이 있었다. 첫 대면에서 그는 벌써 내 마음속에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겨놓았다.

《성주의 나이가 열다섯살밖에 안된다고 하는데 나이보다는 퍼그나 숙성해보이는구만. 어린 나이로 독립군생활은 어떻게 했고 화성의숙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였소?》

최창걸의 첫 질문이였다. 그는 한지붕밑에서 오랜 세월을 같이 딩굴며 우정을 맺었던 십년지기라도 만난듯이 시종 입가에 웃음을 담고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그가 알고싶어하는 문제에 대해서 사실대로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내가 김형직의 맏아들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한편 놀라기도 하고 한편 선망의 눈길도 보내면서 나를 더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내가 체험한 조국의 현실을 알려고 여러가지 각도에서 많은 질문을 하였다.

조금후에는 내가 반대로 최창걸에게 독립군시절의 생활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자기 머리에 있는 허물자리가 어떻게 생기게 되였는가 하는 래력부터 말해주었다. 우스개를 섞어가며 구수하게 이야기를 엮어댔는데 아주 걸작이였다. 그의 이야기에서 특징은 자기를 항상 3인칭의 위치에 놓는것이였다. 그는 《내가 그랬다.》, 《내가 속았다.》라고 해야 될 말도 《최창걸이 그랬다.》, 《최창걸이 속았다.》고 말하여 대화상대방의 웃음을 자아내군 하였다.

《최창걸이 량세봉의 수하졸병으로 있을 때였소. 한번은 개원쪽에서 밀정을 잡아가지고 가다가 려관에 들렸는데 글쎄 그 펑덩하기 짝이 없는 최창걸은 밀정을 앞에 두고 꺼떡꺼떡 졸지 않았겠소. 수십리길을 걷다나니 피곤했거든. 그사이에 그 밀정은 포승을 풀고 도끼로 최창걸의 머리를 답새기고 꽁무니를 뺐단 말이요. 다행히도 그놈이 정통은 치지 못했지. 최창걸의 머리에 생긴 〈훈장〉은 이런 기막힌 력사를 가지고있소. 사람이 탕개가 풀리면 최창걸이처럼 될수 있소.》

한두시간 마주 앉아 흉금을 터놓고보니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였다. 청년시절에 사귄 동무들이 수백수천명이나 되는데 최창걸이처럼 자기를 항상 3인칭의 위치에 놓고 이야기를 슬슬 엮어나가는 그런 걸작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후 생활을 통해 나는 그의 경력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 그의 아버지는 무순에서 자그마한 려관을 하나 경영하고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를 도와 영업에 종사할것을 원하였지만 최창걸은 나라를 독립시키겠다고 집을 뛰쳐나와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가 독립군생활을 할 때 그의 할머니가 손자의 마음을 돌려세워보려고 여러차례 삼원포에 찾아왔지만 최창걸은 매번 나라가 망한 판에 지금 어디 제 집 려관이나 지키고있을 때인가고 하면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최창걸, 김리갑, 계영춘, 리제우, 박근원, 강병선, 김원우외에도 남만과 국내 여러곳에서 반일운동에 뜻을 두고 화성의숙에 찾아온 수많은 청년들을 알게 되였다.

그들은 매일같이 오후가 되면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김시우네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한두명도 아닌 숱한 학우들이 나를 찾아주는것이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처음부터 동년배가 아닌 나보다 나이가 5~10살이상되는 년장자들과 사귀게 되였다. 청년학생운동과 지하혁명활동시기의 나의 전우들가운데 년장자들이 많은것은 그때문이였다.

나는 화성의숙에서 공부하는 며칠사이에 의숙의 살림살이가 무송의 독립운동자가 말한것보다 더 가난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화성의숙에서 재산이라고 할만 한것은 낡은 책걸상과 몇개의 운동기재뿐이였다.

그러나 나는 포부를 크게 가지였다. 비록 건물은 비좁고 거무칙칙하여 보잘나위없어도 그 고삭은 초가지붕밑에서 자라는 청년들은 얼마나 믿음직한가! 돈은 없지만 끌끌한 청년들을 많이 가지고있다는 측면에서는 화성의숙이 부자라고 할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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