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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석은 정인화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정인화는 현지생활이 무척 보람차며 새롭게 깨닫는것도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편지의 마지막에 꼭 한번 내려와달라는 당부를 한것을 보면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서 적적한 모양이다. 스스로 택한 일이기는 하지만 생소한 로동자들속에서 지내자니 외롭기도 하고 힘겹기도 할것이다. 송금석은 그에게 사서 고생을 하지 말고 인차 돌아오라고 충고도 주고싶었다. 그래서 강의가 없는 어느날 아침에 강선을 향하여 떠났다. 보통강역에서 남포행렬차를 탄 그는 한시간도 채 못되여 강선역에 내렸다. 정인화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감정으로 나를 맞이할가? 제강소를 향해 걸으면서 상상해보았으나 구체적인 표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강소의 접수실에 이른 송금석은 순서가 되자 접수원처녀에게 증명서를 내보이였다.

《어느 직장의 누구를 찾아왔습니까?》

처녀의 물음에 송금석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였다. 정인화를 무역성 부상이라고 해도 일없겠는지 얼른 결심을 하기가 어려웠다.

《저, 무역성에서 내려와 현장에서…》 하고 말을 더듬는데 처녀가 재빨리 반문했다.

《무역성 부상동지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동무가 어떻게 그를 압니까?》

송금석은 출입증을 떼여주는 처녀를 유심히 보았다. 수천명의 종업원을 가진 제강소에서 그가 새로 일하게 된 사람을 알고있다는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졌다.

《부상동지는 매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기때문에 나도 알게 되였답니다. 직급높은 간부인데 보통로동자와 다름없이 소탈하시더군요.》

처녀는 상긋이 웃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정인화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은것이 분명했다.

접수실을 나선 송금석은 압연직장을 찾아갔다. 직장안에 들어선 그는 얼굴에 화끈 뿜겨오는 열기와 우뢰소리처럼 장중히 울리는 기계소리에 위압되여 무춤 서버리였다. 제강소에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대학생활에만 습관된 송금석은 눈앞에 펼쳐진 직장안의 장엄한 전경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용암이 끓듯 이글거리는 가열로의 위용과 분괴압연기와 천정기중기들이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그는 거창한 창조의 모습에 반하여 잠시 자기를 잃고 서있었다.

이윽고 그는 정인화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복차림들이 하나같아서 얼른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한참동안 여러 사람들을 더듬던 끝에야 가열로옆에서 키가 훤칠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정인화를 알아보았다. 무척 달라진 모습이였다. 몸에 잘 맞지 않는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썼는데 얼굴에는 땀발이 흐르고있었다. 한창 일손을 다그치다가 잠시 허리를 펴는상싶었다. 송금석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정인화가 송금석쪽으로 돌아섰다. 그의 눈이 기쁨과 놀라움으로 빛났다. 흰이를 드러내며 방싯 열리는 입술사이에서 가슴을 흔드는 반가운 탄성이 터져나오는듯 했다. 그러나 기대소리에 그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송금석이 다가서자 정인화는 투박한 장갑을 벗고 손등으로 이마의 땀발을 훔치더니 곁에 선 남자를 소개하였다.

《송선생, 인사하세요. 직장장동무예요.》

《안녕하십니까,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송금석입니다.》

송금석은 정중히 자기를 소개했다.

《아, 그렇습니까?》

직장장은 반색을 하고나서 선선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두분이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오늘 아침에도 당위원회에서는 정인화동지가 무리하지 않도록 직장에서 잘 돌보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방금 정인화동지에게 몸에 맞도록 일을 하라는 권고를 하던 참입니다. 그런데 직장장의 권고쯤은 듣지도 않는군요.》

듬직하고도 사람좋게 생긴 직장장이 빙긋이 웃었다. 송금석도 마음이 즐거워져 따라 웃었다. 비록 초면이지만 직장장이 마음에 들었고 롱기어린 그의 말에서 정인화를 아껴주는 제강소의 당조직과 로동자들의 고마운 심정을 엿보았다.

《모처럼 손님이 찾아왔는데 왜 이러고있습니까. 어서 밖에 나가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직장장이 정인화에게 권고했다. 송금석은 정인화를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두사람은 구내길을 천천히 걸었다. 한동안의 침묵끝에 정인화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찾아와주어서 고마워요.》

《처음 하는 로동이겠는데 힘겹지 않습니까?》

《송선생은 내가 해방전에 로동자였다는것을 모르세요?》

정인화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채 짐짓 질책하는듯 한 눈길로 송금석을 쳐다보았다. 송금석은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다. 일제시기 정인화가 로동을 하며 로동자들을 파업에로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송금석은 자기의 실언을 뉘우치며 어줍게 웃었다. 순진한데가 있는 그의 사람됨을 잘 아는 정인화가 즐겁게 소리내여 따라웃었다.

《자, 우리 저 백양나무그늘밑으로 가자요.》

송금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정인화가 구내에 서있는 백양나무를 가리켰다. 키높이 자란 백양나무가 무수한 잎새들을 반짝이며 땅우에 길게 그늘을 던져주고있었다. 두사람은 시원한 바람이 흘러드는 그늘밑에 앉았다.

송금석은 정인화의 풍만한 몸에서 지난날의 향수냄새가 아니라 쇠내나 기계기름내가 풍겨오는것을 비로소 느꼈다. 정인화의 작업복차림을 새삼스레 측은히 바라보던 송금석의 눈길이 그의 오른쪽손등에 멎었다. 무릎우에 놓인 손등이 돈잎만큼 벌겋게 부어있었다.

《어떻게 손을 상했습니까?》

《투박스러운 장갑이 거치장스러워 맨손으로 일하다가 시뻘겋게 단 강괴에서 쇠쩍지가 튕겨나오는통에 좀 데였어요.》

정인화는 대수롭지 않은듯이 무심히 대답했다. 하지만 송금석에게는 그 상처의 아픔이 자신의 피부에 느껴지는듯 하였다.

《가열로에서 일한다는것이 헐치 않겠더군요. 왜 하필이면 힘겨운 일을 합니까?》

《내가 일하는데 바로 우리 로동계급이 자체로 만든 압연롤이 있어요. 내가 수입해오려고 했던 분괴압연롤을 강선의 로동계급은 자체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직접 내려와보니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그것을 기어이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낸 로동계급앞에 머리가 숙어져요. 더구나 가열로를 우리의 독특한 설계와 우리의 자재로 일떠세운 사실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송선생도 여적 그 사실을 모르고있었지요?》

《모릅니다.》

송금석은 놀란 눈길을 쳐들었다.

《그 가열로에 깃든 사연은 우리 기술자들과 로동계급의 지혜와 슬기가 어느덧 앞선 나라 사람들의 수준에 이르렀다는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있어요.》

정인화는 깊은 생각에 잠겨버린 송금석을 마주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해전에 강선제강소의 로동자, 기술자들이 지금의 3단복식가열로를 완공하였는데 그것이 우크라이나의 어느 제강소에 있는 가열로의 설계를 훔쳐다가 건설한것으로 쏘련대사관에 알려졌다. 그런데 그 문제는 두 나라사이에만 국한된것이 아니였다. 우크라이나의 어느 제강소에 있다는 가열로는 쏘련에서 자체로 개발한것이 아니라 2차대전후 서방 어느 나라에서 사온것이였다. 그 로의 기술특허권은 그 나라의 소유였다. 쏘련은 그 가열로를 들여올 때 절대로 기술자료를 제3국에 반출하지 않는다는것을 상대측에 담보하였다. 쏘련에서 여러명의 전문가들이 강선제강소로 왔다. 그들은 강선제강소의 가열로를 며칠동안 돌아보며 기술자료들을 료해했다. 제강소에는 말할수 없이 긴장한 공기가 떠돌았다. 마침내 그들은 강선제강소의 가열로가 자기 나라에 있는 가열로와 그 형태는 비슷하나 기술적제원이 완전히 다르다는것을 인정했다. 과학과 기술앞에서 공정했던 그들은 강선의 로동계급이 만든 가열로의 우월한 성능과 새롭게 개척한 기술적성과들에 경탄하면서 서뿔리 물의를 일으킨 실수를 사죄하였다.…

《참, 놀라운 일이군요!》

이야기를 듣고난 송금석은 표정이 심중해졌다. 누구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정인화의 입을 통하여 듣게 된 사실이여서 자극이 더욱 컸다. 결코 남들보다 못지 않은 우리 인민의 힘과 지혜를 비로소 알게 된듯싶었다.

《난 제강소에 와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그에 보답하려는 우리 로동계급의 의지가 하나로 결합되여서 그런 놀라운 기적이 창조되였다는것을 깨달았어요. 누가 우리 손으로 그런 훌륭한 가열로를 일떠세울수 있다고 생각할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우리의 로동계급과 기술자자신들도 미처 몰랐던, 그들 내부에 잠재하고있는 힘과 재능을 보시였어요. 정전직후에 이 제강소를 찾아오신 그이께서는 미제를 타승한 우리 인민은 전후복구건설에서도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 동무들은 자체의 힘으로 제강소를 하루빨리 복구하고 강철로 우리 당을 받들어야 한다, 강선의 로동계급은 우리 당중앙위원회를 옹호하는 근위대들이다, 혹심하게 파괴된 제강소를 우리의 손으로 복구한다는것은 말할수 없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로동계급과 기술자들의 충정심과 재능을 믿고있다, 나는 우리 인민을 믿고 오랜 혁명투쟁을 하여오는 과정에 우리 인민처럼 혁명성과 창조적지혜가 높은 인민이 없다는것을 확신하였다, 나의 이 확신은 여태껏 실패를 몰랐다, 두 제국주의를 타승한 투쟁의 력사가, 해방후 새 사회를 건설한 창조의 력사가 그것을 말해주고있다, 나는 오늘의 복구건설에서도 동무들이 영웅적 우리 인민의 기개와 슬기를 남김없이 발휘하리라고 다시금 확신한다고 호소하시였어요.

그 호소에 호응하여 산악처럼 일떠선 강선의 로동계급과 기술자들은 제강소를 복구하는 나날에 자체의 힘과 지혜로 3단복식가열로도 흘륭히 제작했어요. 내가 본 어느 한 책엔 사람들이 보통 자기 잠재력의 15프로 내지 30프로밖에 발휘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된다고 씌여있더군요. 그것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을 띠고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인간은 생애에서 자기 능력의 많은 예비를 남겨두고 생을 마치게 되는것만은 사실인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수령님께서는 크나큰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 인민모두가 자기의 능력을 다 발휘할수 있도록 이끌어주시였어요. 우리 인민이 기적과 위훈의 창조자로 된것은 그때문이지요. 우리 인민의 한 성원으로 살면서 우리 인민의 힘을 잘 몰랐다는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였어요. 그 어리석음때문에 나는 우리의 자립적민족경제발전에 방해와 지장을 주었지요.》

정인화는 말을 마치고나서 손수건을 꺼내 입언저리를 꼼꼼히 닦았다. 그리고는 화석처럼 굳어진채 묵묵히 앉아있는 송금석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열로에 진작 그런 사연이 있은줄 알았으면 아까 좀 유심히 돌아보는걸 그랬습니다.》

송금석은 압연직장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라도 다시 돌아보면서 그들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세요.》

《아닙니다. 난 그들앞에 나설 면목이 없습니다.》

송금석은 허탈이 온 사람처럼 맥없이 대답하였다.

정인화는 내심의 번뇌가 짙게 내배여 암울하게 흐려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였다.

《여기까지 찾아온 송선생을 즐겁게 해드리지 못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낸 내 심정을 리해해주세요. 나나 송선생이나 이제 더 헛걸음을 짚었다간 이 위대한 전변의 흐름밖으로 밀려날수 있어요. 이런 말이 혹시 송선생의 귀에 거슬리지 않겠는지…》

《아닙니다. 나는 그런 충고를 하는 부상동지의 심정을 잘 압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고동이 울리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난 송금석은 정인화의 안내로 압연직장에 다시 들리였다.

송금석은 분괴압연기앞에 섰을 때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시뻘건 강괴에서 뿜겨지는 열기때문만은 아니였다. 강괴를 무서운 힘으로 밀어내며 믿음직하게 돌아가는 압연롤에서 쎄브에 대한 자신의 환상도 산산이 부서지는듯 한 환각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직접 만든 기술자들과 로동자들도 만나보았다. 압연롤의 제작과정만이 아니라 천리마운동의 첫 봉화를 추켜들던 때의 이야기도 들었고 4차당대회를 앞둔 이즈막의 눈부신 투쟁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날 저녁 그는 려관방의 침대에 누웠으나 도무지 잠을 이룰수 없었다. 먼 우뢰의 여운과도 같이 전기로의 동음이 쉼없이 들려왔다. 그 동음속에서 그는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어온 모든것이 송두리채 무너지는듯 한 파괴음을 의식했다.

이튿날 아침 정인화는 번뇌가 짙은 송금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심히 말하였다.

《지나치게 고민하지 말고 우리 함께 모든것을 새롭게 시작하자요.》

《부상동지에게는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때가 늦었나 봅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요?》

《내가 이제 자신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갱신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지식과 내나름의 지향을 통채로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는 어렵습니다.》

송금석은 그렇게 말하며 서글피 웃었다.

《나는 송선생이 남달리 용기가 있는 남자인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나약하군요.》

정인화는 체념에 빠져버린 송금석을 보는것이 안타까왔다.

이날 송금석은 낮차로 평양에 돌아왔다. 정인화는 하루쯤 더 있다 가라고 권고하였지만 오후에 학부교원들의 학술연구모임이 있어서 지체할수 없었다. 그 모임에서 전날처럼 자신의 견해를 열렬히 주장할 용기도, 의욕도 없었지만 빠질수는 없었다. 정신적혼란과 자기모멸의 감정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업상의무에서 후퇴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학술연구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당위원장이 급히 찾는다는 련락이 왔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필경 물의를 일으킨 무역경제학강의때문일것이였다. 송금석은 조금의 변명도 없이 자기의 과오를 인정할 결심을 가지고 당위원장실에 들어섰다.

당위원장은 무거운 낯빛이였다. 송금석은 자기의 예견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오전에 국제전화가 왔댔습니다. 우즈베끼스딴에 계시는 아버지의 병세가 위급하답니다.》

당위원장이 근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송금석은 예상을 뒤집는 뜻밖의 일에 놀랐다.

《송선생의 아버지가 병석에서 아들을 보고싶어한답니다. 이제 곧 외무성에 가서 려권수속을 하십시오.》

송금석은 당위원장을 말없이 마주보았다. 편지도 아니고 국제전화를 걸어온것을 보면 아버지의 생명이 시간을 다투고있다는것을 말해주었다. 심각한 정신적번민을 겪을 때 아버지의 슬픈 소식까지 겹친것은 얼마나 얄궂은 일인가. 저절로 서글픈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할바는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간절한 부탁이 있습니다. 저는 쏘련으로 떠나기 전에 반드시 매듭을 지어야 할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뭡니까?》

《저는 강선제강소에 가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조직앞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깨끗이 총화하고 떠날수 있도록 하여주십시오.》

《쏘련에 갔다와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비판이 두려워서 쏘련으로 갔다고 비난을 할수도 있습니다. 난 비겁하다는 소리가 싫습니다.》

사실 지금껏 송금석은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거나 비판을 모면하려고 꾀를 부리는 사람들을 경멸해왔었다.

《송선생이 앞으로 자기를 비판할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른 선생들도 오해하지 않을것입니다. 다른 생각말고 어서 떠날 준비를 하시오. 참, 아버지가 조국의 흙내를 맡고싶다고 한다는데 잊지 말고 가지고 가시오.》

당위원장은 인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힘을 주었으나 송금석은 더 말을 못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이제 떠나면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서고있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지난날의 모든 과오를 털어놓고 결산하려 했던것이다. 그러나 피끗 떠오른 그 결심이 너무나 무서운것이여서 서뿔리 고백할수가 없었다.


×


려권수속을 끝냈을 때 송금석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거듭거듭 생각을 해보았으나 이제 대학에서는 자기의 존재가치를 찾을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조국을 위하여 더 무엇을 할수 있으랴. 해방직후 귀국을 할 때 품었던 뜻과 포부가 컸던것만큼 그 모든것이 조국에 손해를 끼쳤다는것이 인정되는 지금에 와서 느끼게 되는 자기 부정의 괴로움은 심각한것이였다. 이제 자기가 조국을 위하여 할수 있는 일은 조용히 사라져서 학생들의 넋을 더는 사대의식에 흐려지지 않게 하는것이였다. 이것은 물론 말할수 없이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어이하랴. 파멸된 넋의 페허우에 이제부터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뿌려서 가꾼다는것은 때늦은 일이다. 그는 림종을 앞둔 아버지의 오늘에서 자신의 래일을 그려보았다. 자기도 처음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처럼 이역땅에서 속절없이 생을 마치게 될것이다. 아버지의 무기였던 화승대가 그러했던것처럼 자기가 신봉했던 리념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처럼 력사의 추억으로만 남을것이다. 바야흐로 력사는 새로운 사상의 시대를 펼쳐가고있다. 문득 강명호선생을 전시대의 퇴적물이라고 비난하던 생각이 났다.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따지고보면 자기야말로 전시대의 퇴적물이다. 생각할수록 자기의 인생이 허무하고 서글펐다.

송금석은 저녁녘에 도수높은 술 한병을 사가지고 최정택의 집을 찾아갔다. 조국과 영원한 리별을 하기에 앞서 대중앞에서 자기의 과오를 비판하지 못하는 대신 그에게만이라도 용서를 빌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돌이켜보면 자기와 그중 첨예한 학술상의 대립을 지속해온 사람은 최정택이였다. 이제야 드디여 그 대립의 결판이 난셈이다. 송금석은 서슴없이 자기를 패자로 인정하였다. 자기때문에 마음의 고충을 겪은 최정택에게 사죄를 하지 않고 떠나면 한평생 량심의 가책에 시달릴것 같았다. 물론 견해상대립이 있다고 하여 뒤에서 그를 모해하는것 같은 비렬한짓은 하지 않았다. 그가 새 교과서를 썼을 때에는 지지해주었고 안해때문에 고민을 하고있을 때에는 진심으로 그를 동정하였다. 그것을 내심 고맙게 여겨서인지 다시 가정을 이루고 새집들이를 할 때 최정택은 자기도 초청해주었다. 그러니 오늘 저녁 불쑥 나타나도 그들내외는 자기를 랭대하지 않을것이다.

최정택의 집에 이르러 출입문을 두드리니 저녁밥을 짓던 려순정이 나타났다.

《아니, 부학부장선생님이 오셨군요.》

려순정은 행주치마에 물기묻은 손을 훔치며 송금석을 친절히 전실로 안내했다.

《최선생 계십니까?》

려순정이 대답할 사이도 없이 왼켠방에서 최정택이 실내옷차림으로 나왔다. 그는 뜻밖에 나타난 송금석이 이상스러웠으나 반갑게 맞아들이였다.

《어서 이 방으로 들어오십시오.》

송금석은 최정택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권하고 마주앉은 최정택은 송금석의 무거운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래일 쏘련으로 떠날 준비가 바쁘실텐데 어떻게 이렇게 짬을 내셨습니까?》

《준비할게 뭐 있습니까. 흙봉지 하나면 됩니다. 아버지의 부탁입니다.》

《그래도 중환에 걸린 아버님께 약이라도 구해가야 도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80고령의 로환에 무슨 약이 필요하겠습니까.》 하고 시름겹게 응대한 송금석은 가방속에서 술병을 꺼내며 전에 없이 송구해하는 낯빛으로 최정택을 마주보았다.

《조국을 떠나기에 앞서 최선생과 한잔 나누고싶은 생각이 들어서 불의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최정택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기색이였다. 송금석이 범상치 않은 걸음을 하였다는것이 분명하였으나 그 까닭은 알수 없었다. 그랬으나 짙게 그늘이 덮인 송금석의 얼굴이 너무도 침울하여서 캐여물을수도 없었다. 그는 부엌에 나가 안해에게 얼른 상을 차리라고 이르고 다시 방에 들어왔다. 이미 저녁을 지어놓은 려순정은 곧 상을 들여왔다.

《이렇게 갑자기 오셨으니 변변히 차린게 없습니다.》

려순정은 두리반우에 음식그릇들을 올려놓으며 리해를 바라듯 어줍게 웃었다. 송금석은 자기의 사정을 모를 주부에게 흔연한 기색을 보이려고 하였다.

《갑자기 찾아와 페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그런 말씀마세요.》

방안을 둘러보던 송금석은 문득 생각난듯이 물었다.

《딸애는 어데 갔습니까?》

《이웃에 같은또래의 처녀애가 있는데 그 집에 가서 함께 공부를 하나봅니다. 자, 차린것은 없지만 어서 드세요.》

려순정은 송금석과 남편의 잔에 술을 부었다.

《부인도 한잔 드시지요.》

송금석은 술병을 앗아들고 려순정에게도 한잔 권하려고 하였다.

《아니, 저는 술을 마실줄 모릅니다.》

려순정은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송금석은 더 권하지 않고 최정택에게 우리끼리 어서 들자고 눈짓을 보내며 단숨에 쭉 들이켰다. 불로 지지는듯 한 감각이 목에서부터 위까지 쭉 내리훑었다. 최정택도 잔을 비우고 송금석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서너잔 마시더니 안주를 집으며 송금석에게 권하기만 하였다. 송금석은 주는대로 사양하지 않고 받아마셨다. 빨리 취하고싶었다. 드디여 독한 술기운이 서서히 혈관을 타고 전신에 퍼져나갔다. 그러자 가슴속에 얼어붙었던 번민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것 같았다.

《최선생, 나는 이번에 가면 다시 선생을 만날것 같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생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사죄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최정택은 비로소 송금석이 뜻밖에 찾아온 까닭을 알고 그의 팔굽을 덥석 움켜잡았다.

《다시 만나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자신의 리념과 지향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였다는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니 이젠 학계나 대학에서 내가 필요없이 되였습니다. 다시 학생들앞에 나설 면목도 없고 그들에게 그 무엇을 가르칠것도 더는 없게 되였습니다. 난 인생을 실패한 사람입니다. 자신만이 잘못을 저질러도 모르겠는데 선생의 견해를 한사코 반대해나서면서 남까지 괴롭혀왔습니다. 훌 떠나버리기에는 량심이 허락치 않아서 찾아왔으니 나를 용서하시오.》

그 고백의 마디마디에서 진정이 절절하게 울리였다. 취기로 하여 벌겋게 물든 송금석의 눈에도 금시 눈물이 고일상싶었다.

《부학부장선생,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실책을 범한 사람입니까. 정치경제학교과서 하나만 놓고봐도 그게 어디 내 힘으로 된겁니까.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누구나 순탄치 않은 자기 성장의 로정을 거쳤습니다.》

《최선생과 나는 출발점부터 달랐습니다. 선생은 처음부터 주체를 세울데 대한 당의 뜻을 따르려고 했지요. 그러나 나는 교조적으로 선행리론에 의거하고 대국들의 과학과 문화를 이 땅에 이식함으로써만 우리의 사회주의건설을 성과적으로 할수 있다고 믿고있었습니다. 그 신조가 무너져나간 나는 어디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말았습니다.》

《그래 자기를 소생시킬 용기가 없단 말입니까? 그 까닭으로 조국을 떠나다니요. 안될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최정택은 송금석의 팔굽을 흔들며 격렬하게 부르짖었다.

《나에게 그 무엇을 더 권고하지 마십시오. 오직 바라는것은 떠난 후에라도 선생이 나를 원망하지 말아달라는 그것뿐입니다. 조국을 영원히 떠나기로 한 나의 결심이 쉽사리 선것은 아닙니다. 많은 생각끝에 그런 결심을 가졌습니다. 나는 래일 떠나면서 조국앞에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하라고 거듭 속죄를 할것입니다.》

송금석은 최정택앞에 머리를 떨군채 쳐들 엄두를 못냈다. 최정택도 무슨 말로 설득시켜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곁에서 가슴을 조이며 안타까이 듣고있던 려순정이 하는수없이 침묵을 깼다.

《부학부장선생님, 조국을 한번 버리면 다시 돌아오기 힘듭니다. 돌아오는 그 길이 얼마나 먼지 전 압니다. 부디 생각을 달리하세요.》

려순정은 자신의 쓰라린 체험때문에 말끝을 흐리며 눈물을 머금었다.

송금석은 그의 눈물이 절망으로 어두워진 자기의 가슴속에 가을날의 밤비처럼 구슬피 흘러드는듯싶었다.

《부인의 진정어린 충고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긴 부인뿐아니라 최선생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생에게 여러가지로 잘못이 많은 사람인데 두분이 다 나를 이렇게 아껴주시니 정말이지 뭐라고 말씀드렸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이역땅에 가서도 두분의 모습을 언제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하지만 부인의 경우와 나의 경우는 전혀 사정이 다릅니다. 부인이야 한때 몰라서 조국의 품을 떠났댔지요. 그땐 그럴수 있었습니다. 청소한 조국이 세계 〈최강국〉이라 일컫는 미국과 싸울 때니까요. 난 뭡니까. 그 전쟁을 이기고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고있는 오늘의 조국에 살면서도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성을 볼줄 몰랐습니다. 남의 나라 사람들이 쓴 책은 밤낮 들여다보면서도 천리마의 기세로 내닫는 제 나라 현실은 보지 않았습니다. 사대의식은 이렇게 사람을 머저리로 만들었습니다. 자, 안녕히들 계십시오.》

송금석은 자리에서 훌 일어섰다. 더 앉아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비통한 감정때문에 추태라도 부릴것 같은 위태로운 생각이 들었다. 주인내외가 송금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며 따라일어섰다. 송금석은 만류하는 그들을 뿌리치며 복도에 나섰다. 서늘한 밤공기를 마시자 억제했던 술기운이 확 퍼지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최정택부부가 현관까지 따라나오며 거듭 간곡한 말을 하였으나 의식이 흐려진 송금석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휘청거리는 다리가 하자는대로 비틀거리며 밤거리를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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