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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국의 생활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다시는 조직의 비판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생산실습때 자동차사고를 내고 받은 비판은 그의 가슴에 깊은 자각을 안겨주었다. 지금은 어머니의 승용차를 타고다니지 않았다. 외국책들만 읽고 동무들에게 자랑하던 일도 삼가하였다. 시간이 감에 따라 그토록 엄하게 꾸짖던 동무들의 비판도 고맙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렬을 선언하던 선희의 말마디들은 가슴에 박힌채 뽑혀지질 않았다. 선희는 그후에 몇번이나 조용히 할말이 있다고 하였지만 봉국은 내처 거절하였다. 무척 미안해하는 선희의 표정에서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수 있지만 이제 와서 전날의 우정을 회복한다는것은 남자의 존엄을 깎이우는 비굴한 처사로 생각되였다.

이러한 봉국의 내심을 눈치챈 선희도 랭랭하게 이쪽을 대하기 시작했다. 될수록 외면을 하려고 했으며 불가피하게 말을 건늬여야 할 때에는 얼굴을 도고하게 쳐들고 쌀쌀한 어조로 간단명료하게 의사를 전했다. 그런 형편을 모르는 봉국의 어머니만이 딱하게도 선희를 몹시 기다리고있었다. 이즈막엔 드문히 의심쩍은 기색으로 왜 선희가 우리 집에 발길을 끊었는가고 아들에게 묻군 했었다. 그럴 때마다 봉국은 왜그러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그러던 오늘 아침 어머니는 출근하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선희를 집에 데려오라고 다짐을 하였다. 봉국은 전에없이 심각해진 어머니의 얼굴빛에 놀라며 거절을 못했다. 어머니는 어제 밤 웬일인지 잠들지 못하고 쎄브회의에 갈 때 선희가 가방속에 넣어주었다는 당보의 사설을 펼쳐놓고 깊은 회오에 잠겨있었다. 그러는걸 보면 단순히 선희가 보고싶어서 데려오라고 하는것 같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이나 관심을 벗어난 그 어떤 절절한 심정이 있는듯싶었다.

봉국은 이날 강의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가는 선희를 뒤따랐다.

《선희동무.》

운동장을 벗어났을 때 용기를 내여 불렀다. 선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흠칫하며 순간적으로 멈춰서는듯 하다가 다시 걸음을 내짚었다. 하지만 봉국이로서는 그대로 선희를 놓아줄수 없었다. 어머니의 부탁은 뒤로 미룰수 없게 간절한것이였다. 그는 치밀어오르는 자존심을 누르며 총총히 사라지는 선희를 다시 따라잡았다.

《선희동무.》

선희가 걸음을 멈추며 휙 얼굴을 돌리였다. 발깃하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에 원망인지 노여움인지 분간 못할 착잡한 감정이 어려있었다.

《뭣때문에 나를 찾는거예요?》

그렇게 물었지만 그는 봉국이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총알같은 말을 제 먼저 뿌리였다.

《나와 더 할말이 있어요? 나는 진정으로 동무의 결함을 고쳐주려고 비판을 했는데 그것을 마음에 옹이로 새겨두는 옹졸한 동무와 무슨 말을 할수 있겠어요.》

봉국은 일순 무엇이라 대꾸할 용기를 잃었다. 선희의 원망속에서 아직도 가셔지지 않은 애달픈 진정을 읽었던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동물 만나고싶어하오. 함께 가지 않겠소?》

쏘는듯 한 처녀의 눈길을 피하며 봉국은 사정하듯 말했다.

선희는 아래입술을 살며시 사려물더니 잠시후에 되물었다.

《동무의 어머니가 무엇때문에 나를 만나자고 해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그저 동무에게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만 했소.》

《그렇다면 가겠어요.》

선희가 먼저 걸음을 뗐다. 곁에 따라서는 봉국은 안중에 없는듯 머리를 높이 쳐들고 총총히 걷기만 하였다. 봉국은 무시를 당한것 같은 불쾌한 감정이 치밀었으나 참았다. 조금이라도 그의 기분을 건드렸다가는 집으로 데려가지 못할수 있었다.

그들은 대학앞 정류소에서 뻐스를 탔다. 봉국이네 집앞에 이를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들이 방안에 들어서니 또다시 외국출장을 준비하는지 려장을 꾸리고있던 정인화가 황황히 일어섰다. 그는 선희의 어깨를 쓸어안으며 반가움을 이기지 못해하였다.

《왜 그동안 우리 집에 오지 않았나? 먼저번 외국출장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선희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오늘에야 왔구만.》

선희는 말없이 서있었다. 과연 정인화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일가? 정인화는 서둘러 방바닥에 널린 려행용가방이며 옷가지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선희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자, 어서 앉으라구.》

선희는 책가방을 놓고 무릎을 꿇으며 단정히 앉았다. 봉국은 슬며시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정인화가 불러세웠다.

《봉국아, 너도 여기 좀 앉거라. 내 할말이 있다.》

봉국은 어정쩡한 낯색으로 엉거주춤이 앉았다.

얼핏 자기를 겨눈 어머니의 눈빛에서 알수 없는 노기가 풍겨오는것을 의식했다. 정인화는 선희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었다.

《선희, 정말 고마워. 선희가 전번에 날 도왔어. 선희가 가방속에 넣어준 당보가 아니였다면 나는 큰 실수를 할번 했어. 어쩌면 선희는 그런 갸륵한 생각을 했을가?》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그때 어머니의 가방속에 그 신문을 넣어드리고싶었어요.》

선희는 밝게 웃어보이였다. 뜻밖에도 정인화의 허물없는 고백을 듣고보니 그지없이 기뻤다. 정인화를 위해 그런 일을 하여놓고도 외람된 짓이 아닐가싶어 은근히 마음을 조이기도 했던것이다.

한편 어머니의 입귀를 유심히 지켜보던 봉국의 기분도 달라졌다. 어머니가 어찌하여 선희를 그토록 기다렸는지 알게 되였다. 봉국은 선희에 대한 어머니의 고마운 정이 자신에게도 부지중 감염되여오는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았고 선희를 정면으로 마주보지도 않았다. 그저 머리를 수굿하고 계속되는 어머니의 말을 묵묵히 듣고있을뿐이였다.

《나는 이번 출장길에도 그 신문을 가지고가겠어.》

정인화는 정겨운 미소를 지으며 선희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이번엔 어느 나라로 가시나요?》

선희가 물었다.

《외국려행이 아니라 강선제강소에 내려가서 당분간 로동자들과 함께 일하기로 했어.》

정인화는 흔연히 대답했다.

선희는 그의 말뜻을 새길수가 없어서 입술을 반쯤 벌리고 두눈을 깜박거렸다. 무역성 부상이 제강소에 내려가 로동을 하다니, 그의 신상에서 어떤 불길한 변화가 일어난것이 아닐가? 어찌된 일이냐고 선뜻 묻기조차 서슴어졌다.

《어머니, 어찌된 일이예요. 혹시 책벌을 받은게 아니예요?》

봉국이가 굳어진 표정으로 따져물었다. 요 며칠사이 어머니의 흐려진 낯색에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엿보았던지라 번개같이 그런 추측이 떠올랐던것이다. 그는 이 순간에 선희와 시선을 마주쳤다. 선희의 얼굴에도 불안이 어린것을 보았다. 어머니의 불행을 두고 괴로운 심정을 함께 나눌 사람이 다름아닌 선희라는것을 무의식중에 확신하게 되자 전날의 버성겼던 감정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정인화는 온화한 눈빛으로 놀라움에 휩싸인 아들과 선희를 번갈아보았다.

《내스스로가 한동안 제강소에 내려가 로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현실체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우리 로동계급의 지향과 창조적위력이 어떤것인지를 깊이 깨닫기 전에는 대외무역사업을 할수 없기때문에 그런 용단을 내렸다. 며칠전에 강선제강소의 로동계급과 기술자들은 내가 그처럼 애를 쓰며 수입해오려던 분괴압연기의 롤을 자체로 훌륭히 만들었다. 그 사실을 들었을 때 나는 심각히 자신을 검토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당에서는 강선제강소에 나가 그들의 사상과 의지를 따라배우려는 나의 결심을 지지해주었다.》

선희는 정인화에게 전에 없던 존경심을 품었다.

자기를 반성할줄 아는 그의 당적량심을 보았던것이다. 새 출발을 하는 그에게 따뜻한 고무를 보내주고싶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봉국의 얼굴을 얼른 훔쳐보았다. 봉국이도 어머니처럼 그렇게 자기를 깊이 반성할줄 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 순간에는 그도 생각되는것이 많은지 시선을 떨구고 덤덤히 앉아있었다.

《선희.》

정인화의 다정한 목소리에 선희는 머리를 돌리였다. 엷은 미소를 그리는 그의 얼굴에 짙은 회오의 빛이 떠올랐다.

《내 너희들 학급의 한 녀학생을 만나서 그새 이야기를 다 들었어. 선희는 그동안 우리 봉국이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지. 봉국이가 그렇게 그릇된 사상에 물젖어 들뜬 생활을 한것도 이 어머니탓이였어. 외국에 류학을 보낼 꿈만 꾸면서 봉국이가 학습태도를 바로 가지지 못하게 했거던.…》

《류학을 가는것자체가 나쁜 일일수야 없지요 뭐. 외국의 과학기술도 우리 실정에 맞게 받아들여야지요.》

《그야 물론 그렇지. 참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네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라고 할 때 김정일동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고있나?》

《모르고있어요.》

선희는 머리를 저었다. 봉국이도 처음 듣는 말인지 의아해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일동무는 워낙 자신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지요.》

《나는 이번에 자기를 반성하려고 당중앙위원회에 찾아갔다가 감동적인 사실을 알게 되였어. 내가 아들의 장래문제를 두고도 잘못 생각해온 점이 많다고 하자 마주앉았던 일군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정인화의 얼굴에 숭엄한 감동이 어리였다. 선희와 봉국은 숨을 죽이고 그의 뒤말을 기다렸다.

《1959년 1월 하순에 김정일동무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대표단성원들과 함께 쏘련을 방문한 일이 있다더구나. 대표단이 자기 사업을 마치고 모스크바종합대학을 참관할 때였어. 모두들 큰 기대를 가지고 대학을 찾았대. 하기야 수백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데다가 동서방에서 수많은 류학생들이 모여드는 세계 굴지의 대학이니까 그럴만도 하지. 대표단성원들은 최신교육설비들과 과학성과전람관을 돌아보면서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더구나. 참관을 끝낸 일행이 휴계실에 들렸을 때 안내하던 그 나라 일군이 김정일동무에게 자기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할 의향이 없는가고 물었대. 그는 필경 김정일동무가 자기의 초청을 기쁘게 수락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그런데 뜻밖에도 김정일동무는 우리 동무들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대답을 하셨다지 않겠니. 깜짝 놀란 그 나라 일군이 두팔을 쩍 벌려보이며 모스크바종합대학은 력사가 길고 규모가 세계적이라고 자랑을 하였대. 그러자 김정일동무는 〈어찌 력사가 오래고 규모가 커서만 대학의 자랑이 되겠습니까? 우리 나라 종합대학은 비록 력사가 길지 않지만 위대한 수령님의 존귀하신 성함을 모시고있습니다!〉 라고 긍지높이 대답하셨다누나.》

감격에 젖은 선희와 봉국의 눈길이 마주쳤다.

많은 이야기가 그 눈길을 타고 오고갔다. 해를 넘기며 한교실에서 공부하면서도 김정일동지의 높은 뜻을 너무도 적게밖에 알지 못하고있었다는 생각이 일시에 그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봉국이도 심한 자책을 느끼며 곧 선희의 눈길을 피하였다.

《그날 김정일동무는 참관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 일행에게 이렇게 절절히 이야기하셨다누나. 〈오늘 모두 참관을 하면서 부러움을 금치 못하는데 남의것을 부러워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남을 부러워할것이 아니라 따라잡을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큰 나라, 발전된 나라들을 쳐다보지 않고 주체적인 과학기술의 요새를 점령해나갈 새 세대들을 훌륭히 키워내면 이번에 이 나라에서 본것보다 몇배로 더 훌륭한것을 창조해낼수 있습니다.〉

그때 대표단성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더구나. 나도 그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많은것을 생각했어. 참으로 지난날이 부끄러웠어.》

말을 마치고나서 생각깊은 눈길로 창쪽을 바라보던 정인화가 천천히 아들에게 머리를 돌리였다.

《나는 지금까지 잘못한것이 많다. 나의 그릇된 영향이 아니였다면 네가 오늘과 같이 되지 않았을것이다. 이제라도 김정일동무의 그 뜻을 따라배워라.》

《알겠어요, 어머니.》

봉국은 붉어진 얼굴을 깊이 숙이였다.

《그리고 선희한테 용서를 빌어라. 실상 너는 선희처럼 훌륭한 녀동무를 사귈만 한 자격이 없어!》

아들을 꾸짖는 정인화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울리였다. 선희는 그냥 앉아있기가 거북했다. 봉국을 얼핏 바라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벌써 가려나?》

정인화가 황황히 따라 일어섰다.

《강선제강소에 내려가시면 몸성히 지내다가 돌아오십시오.》

선희는 정인화의 눈길을 피하면서 간신히 인사말을 남기고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왔다. 예상밖으로 봉국이가 따라나왔다. 대문을 나서자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내처 걸음만 옮기였다. 긴 침묵끝에 방향없이 옮긴 걸음이 이른 곳은 대동강유보도였다.

불쑥 버들숲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봉국이가 팔을 뻗쳐 선희앞에 드리운 수양버들가지를 젖히며 먼저 입을 열었다.

《선희동무, 용서하오. 같잖은 자존심때문에 내가 너무 옹졸했던가 보오.》

《아니예요. 민청회의가 있은 날 나는 그만 자기를 걷잡지 못하면서 동무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겼댔어요. 그날 회의가 끝났을 때 정일동무한테서 호된 꾸지람을 당했어요.》

봉국은 걸음을 멈추고 우뚝 굳어졌다.

정일동무가?》

《봉국동무는 앞으로 옳은 길에 들어설 좋은 동무인데 결함을 범했다고 해서 그렇게 아픈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준절히 질책했어요.》

《그랬댔구만! 그런것두 모르구 난 동무들한테서 버림을 받은줄로만 알았소.》

봉국은 가슴이 후더워지는것을 느끼며 말끝을 흐리였다. 그리고는 선희앞으로 한걸음 다가들며 격정을 이기지 못해 부르짖었다.

정일동무와 같은 훌륭한 학우가 있다는것은 우리들의 큰 행복이요!》

정일동무는 동무와 같이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류학을 가야 한다고 했어요. 문제는 자기 조국을 빛내이려는 각오밑에 공부를 하는거예요.》

《내 이제부터 정일동무의 뜻을 따라서 하나를 배워도 우리 조국, 우리 인민을 위하여 배우겠소.》

봉국은 새로운 결심이 어려 번뜩이는 눈길을 대동강쪽으로 돌리였다. 선희도 그의 시선을 따라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쳐들었다. 강물우에는 석양빛이 내려덮였다. 반짝이는 물결이 도도히 대해로 흘러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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