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분주하던 하루가 저물어가고있었다. 어설픈 저녁볕이 창가에 어리였다. 학부와 행정부서들에서 제기한 문건들을 깐깐히 훑어보며 비준을 하고난 오빈우는 잠시 머리를 쉬우려고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고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하루일을 돌이켜보았다. 오전에는 행정부서들의 사업정형을 료해했고 오후에는 고등교육성에 다녀왔다.

성에서 돌아오니 여러명의 손님들이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을 만난 다음 문건들을 검토했다.

순 실무적인 일로 또 하루가 흘러갔다. 행정사업에 다몰리지 않고 깊은 사색이나 학문탐구에 조용히 종사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총장이라는 직분이 나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나에게는 드높은 지성과 예리한 판단력이 있으며 명상을 즐기는 성품이 있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사색적인 학자로 살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나의 인생이 더 성공했을는지 모른다.

오빈우는 조는듯이 고요히 눈을 감고 점도록 생각에 잠겨버리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스라쳐놀라며 눈을 떴다. 평온한 탐구의 세계를 갈망하는 자기의 심정이 어쩔수없이 다가오는 로쇠의 표현이 아닐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전에는 이렇게 리기적인 생각에 잠겨본 일이 없었다. 청춘시절에 온넋을 불태우던 혁명적열정은 어데로 갔는가. 험오스럽기 그지없는 소부르죠아인테리의 감상적기분에 휩싸인게 자기로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정의 행복마저 저버리고 프로레타리아혁명의 국제적위업을 위하여 이역의 광야에 몸을 던졌던 내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 개인의 안락과 학술적명예만을 꿈꾸다니… 안될 말이다. 세계혁명이 승리할 날이 아직은 묘연하다고 해서 맥을 놓아서는 안된다. 오빈우는 다시 일거리를 잡으려고 책상앞으로 몸을 기울이였다. 무슨 일인가 시작하면 청춘시절의 열정이 되살아날듯싶었다.

나들문이 조용히 열렸다닫기며 복희가 들어섰다. 처녀는 전혀 소리가 나지 않게 발을 저겨짚으며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에 들고온 잡지를 내밀었다.

《새로 온 〈력사과학〉잡지입니다.》

오빈우는 말없이 받아서 탁상일력옆의 책무지우에 놓았다. 총장앞으로 오는 정기간행물이 많아서 오는족족 한쪽구석에 밀어놓는게 습관으로 되였다. 외국신문들과 잡지들만 보자고 하여도 시간이 모자랐던것이다.

《이번호의 〈력사과학〉잡지에 강명호선생의 론문이 실렸습니다.》

복희가 꼭 보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듯 자세를 바로하고 정색해서 말했다.

오빈우는 범상한 소식이여서 흥미가 없이 흘려들었다. 강명호가 《력사과학》잡지에 론문을 냈다는것은 너무도 례사로운 일이였다. 그런데 복희는 물러가지 않고 주밋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그 론문을 읽어보니까 우리 나라에도 꼭 구석기가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독자들속에서 커다란 반응이 일어날것 같습니다.》

성에서 내려온 문건들을 뒤적이던 오빈우는 손을 멈추고 복희를 쳐다보았다. 처녀는 습관된 단정한 자세였으나 어조에는 흥분이 느껴졌다. 강명호의 론문을 읽고 크게 감동한것이 분명했다. 만일 허락한다면 구석기문제를 두고 론담이라도 나누고싶어하는듯 한 기색이였다.

《돌아가보시오.》

오빈우는 전혀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복희는 무슨 말인가를 할듯 하더니 잠자코 돌아서버리였다. 오빈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마를 찌프렸다. 서기앞에서 참았던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서기의 태도도 불쾌했지만 강명호의 처사는 이를데없이 괘씸했다. 민족의 독자적인 시원을 밝히는 문제가 아무런 의의도 없는 일이라고 알아들으리만큼 설명을 했건만 강명호는 끝내 듣지 않았다. 오빈우는 《력사과학》잡지를 일순 곱지 않은 눈으로 쏘아보다가 천천히 팔을 뻗쳐 집어들었다. 표지를 번지고 얼핏 차례를 보고나서 강명호의 론문이 실린 페지를 찾아 펼치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구석기시대 유적존무문제》라는 제목글이 도전하듯 시야에 안겨왔다.

오빈우는 쓴입을 다시며 읽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지금껏 자기자신이 사대주의적사고방식으로 민족사를 고찰하여왔기때문에 구석기시대문제도 옳게 해명하지 못하였다고 전제하고 우리 나라 경내에 반드시 구석기시대 유적이 있을것이라는 여러가지 론거를 렬거하였다. 그리고는 구석기시대 유적을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시원을 밝히는 중요한 문제인것만큼 누구나 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열렬히 호소하였다. 론문에는 전에 없던 필자의 열정과 통속적인 문체가 엿보였다. 우선 강명호의 론문이라고는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글투가 달라졌다. 그가 습관적으로 즐겨쓰던 한자어휘와 옛날식문장들이 적지 않게 가셔졌다. 글투를 바꾼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렇게 다듬은것만 보아도 강명호가 이 론문의 자자구구에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돌렸는가를 알수 있었다. 론문은 력사학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일반독자들도 쉽게 리해할수 있을것 같았다. 마지막문장에는 감탄부호까지 쳤다. 론리적설득력만을 추구하는 그의 론문들에 감탄부호가 찍힌것은 전에 없는 일이였다. 강명호가 류다른 흥분을 가지고 집필에 달라붙은게 분명했다. 하긴 론문의 성격을 보면 민족주의사학자 강명호가 흥분할만도 했다. 강명호는 이 론문을 통하여 자기의 모습을 적라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시대의 퇴적물로 되여버린 민족주의의 엄페호속에서만 자기의 지혜와 열정을 찾게 되는 사학자이다. 갑자기 몇해전에 그가 고구려력대왕들을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켰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오빈우는 뿌리깊은 강명호의 민족주의적력사관을 고쳐주려고 호된 비판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때의 비판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게 분명했다. 하긴 비판이나 한다고 하여 개변될 강명호가 아니였다. 하다면 유물사관에서 멀리 탈선해버린 그를 두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것인가? 오빈우는 손바닥에 이마를 묻고 생각에 잠기였다. 최정택교수처럼 행정적책벌을 주어버릴가? 아니, 그럴수는 없다. 좋기는 그가 대학에서 조용히 물러나 년로보장으로 넘어가는것이다. 해방직후부터 대학교육에 공헌한바도 크니 인제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편히 보내라고 듣기 좋게 권고해볼가?…

복희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울기가 번진 오빈우의 낯색을 조심히 살피며 주밋거리였다. 적당치 않은 순간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며 바재이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요?》

오빈우가 먼저 물었다.

《웬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학생이?》

오빈우는 다소 놀란 어조로 반문했다. 학생이 총장실을 찾는 일이란 드물었다.

《돌려보낼가요?》

《학생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찾아온 사연은 직접 총장선생님에게만 말씀드릴수 있답니다.》

《들여보내시오.》

복희가 총총히 사라지자 허우대 큰 학생 하나가 방안에 들어섰다. 오빈우는 모자를 벗어들고 성난 눈길로 자기를 쏘아보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학생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억이 났다. 최정택의 강의를 참관하던 날 찌르는듯 한 시선을 보내던 그 학생이였다. 그때 록록치 않게 보이던 학생이여서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를 적의에 찬 눈길로 쏘아보는게 이상스러웠다. 총장방에까지 그런 표정으로 찾아온걸 보면 무슨 맺힌 사연이 있을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총장의 책상앞에 멈춰선 학생이 허리도 굽히지 않은채 무겁게 짓눌린 목소리로 건성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 학생의 낯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뜻모를 증오와 원한이 어려 붉게 달아올랐던 그의 얼굴이 해쓱하니 질려버렸다. 서슬이 번뜩이던 두눈이 홀연 빛을 잃으며 금시 허탈에 빠진듯 컴컴해졌다.

《앉소.》

오빈우는 돌변하는 학생의 표정을 바라보며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은 앉지 않고 그냥 서있었다.

《무슨 일로 왔소?》

오빈우는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보려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리고는 두손을 책상우에 올려놓으며 학생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줄 자세를 보이였다. 학생은 얼른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틀며 입술을 깨물었다.

《학생이 강좌나 학부를 뛰여넘어 나한테 직접 왔을 때에는 용건이 범상치 않으리라고 짐작되오. 기탄없이 말하오.》

그러자 학생이 오빈우쪽으로 머리를 돌리였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는듯 두주먹을 꽉 그러쥐고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저는 자신의 문제라면 어떤 경우든지 총장선생님을 찾아오지 않을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용무로 찾아왔소?》

《전 오늘 담임선생님이 책벌을 받았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책벌리유도 알아보았습니다. 전 대학행정이 취한 조치가 너무도 부당하다고 여겨지기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오빈우는 까딱 움직이지 않고 학생을 쏘아보았다. 대학행정의 조치에 일개 학생이 간섭해나서다니?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연했다. 하긴 최정택의 강의를 참관하던 날에도 이 학생은 총장앞에서 감히 락제생을 두둔해나섰었다. 거듭되는 그 무모한 용기가 참으로 놀라왔다. 분별이 없다고 해야 할지, 무엄하다고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학생이였다. 그는 자기가 총장이라는것을 학생이 모르는듯싶어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며 너그럽게 미소를 지었다.

《학생동무, 자기 스승을 존경하고 옹호하는것이 어떤 경우나 다 미덕으로 되는것은 아니요. 스승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과 비호는 공산주의적륜리와 아무런 인연도 없소.》

《그건 옳습니다. 사제간뿐만아니라 지어 부자간이라 하더라도 리념상의 대립이 있을 때에는 가슴아픈 헤여짐도 피할수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전선에서 싸울 때부터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훌륭한분인가를 잘 알고있습니다. 병사시절의 선생님은 혁명전사의 충실성과 량심이 어떤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수령님의 경제사상을 옹호하여 자신의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쳐가고있습니다. 그러한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는것이 잘못일수는 없을것입니다!》

학생은 말마디에 힘을 주며 거침없이 말했다.

《학생은 병사시절부터 최정택선생을 잘 알고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알만 하오.》

오빈우는 눈시울을 내려깔았다. 말하는품으로 보아 무분별하거나 사리가 없는 학생이 아니였다. 그가 최정택을 비호하여나서는것은 포화속에서 맺어진 전투적우정때문이였다. 감히 총장을 찾아와 항변을 하는 학생의 순진한 행동이 리해되였다.

그래서 너그러운 아량을 가지고 타이르려고 하는데 학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총장선생님은 최정택선생님의 사모님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알고계셨겠지요?》

《알고있었소.》

어금이를 옥무는듯 학생의 볼편이 실룩이였다. 동시에 두눈에서 푸른 섬광이 번뜩이였다.

《그랬단 말이지요! 총장선생님은 그들을 갈라놓으려구 그런 부당한 조치를 취했습니까?》

오빈우는 참기 어려웠다. 학생한테서 이런 경우를 당해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는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주먹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학생! 건방지고 불손해도 분수가 있지, 누구앞이라고 그렇게 따지고드는가? 당장 나가시오!》

《물러가기 전에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총장선생님은 가정이 파탄된다는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생각해본 일이 있습니까? 생리별을 당한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의 처지를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말입니다. 흩어진 혈육의 고통이 어떤것인가를… 자식을 저버린 아버지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것인가를…》

리성을 잃은듯이 불같은 말로 항변을 들이대던 학생의 목소리가 꺽 막히더니 끝을 맺지 못하고 잦아들었다. 억제된 통분한 감정때문에 울대뼈가 오르내리고 관자노리의 피줄이 뛰였다. 마주보는 두눈에는 사무친 원한의 눈물이 번뜩였다. 오빈우는 억이 막혀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감히 자기앞에서 한갖 학생이 이렇게 도전을 한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일이였다.

《내 동무같은 학생은 처음 보았소. 당장 퇴학시키겠소! 학생의 이름이 뭐요?》

《저를 퇴학시키는것은 총장선생님의 직권에 속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구인가를 알아볼 권리는 오래전에 상실했습니다.》

그는 할말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홱 돌아서서 출입문쪽을 향해 걸어갔다.

《학생, 서시오!》

오빈우가 소리쳤다. 하지만 학생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오빈우는 문밖으로 나가는 학생의 북받치는 흐느낌소리를 들은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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