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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는 봉국이와 함께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였다. 하루공부가 끝났으나 어쩐지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가슴속에서는 학과토론 휴식시간에 받아안은 감동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청사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교실에서는 지금 김정일동지의 참석밑에 학급민청초급일군들의 협의회가 진행되고있었다. 만페지책읽기운동을 벌리기 위한 문제를 토의한다고 했다.

협의회에서는 그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이 토론될것이고 궐기모임을 위한 분공들이 조직될것이다. 생각같아서는 협의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토론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듣고싶었다. 자기에게도 어떤 영예로운 분공이 차례질것 같았다. 봉국이가 어서 집으로 가자고 조르지만 않았더라면 교실밖 어데서 협의회가 끝나기를 기다렸을는지도 모른다. 하긴 선희자신이 봉국에게 조용히 하고싶은 말도 없지 않아서 따라섰다. 그는 해토무렵에 질쩍해진 땅을 조심히 골라짚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봉국동무.》

봉국은 그에게 머리를 돌렸다. 신중해진 선희의 표정이 무엇때문인지 알수 없어서 말없이 뒤말을 기다렸다.

《동무는 오늘 생각되는게 없어요?》

선희가 생각깊은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뭘 말이요?》

《오늘 학과토론 휴식시간에 있은 일을 두고 느껴지는바가 없냐 말이예요.》

봉국은 뭘 그렇게 심각히 생각하느냐고 웃어버리며 다정한 화제를 펼치고싶었으나 마주보는 처녀의 눈빛이 진지하게 가슴에 스며드는것이여서 정색을 하고 응대했다.

《오늘 정일동무가 아니였다면 나는 제기한 문제의 뜻을 리해조차 못하는 동무들의 억지스러운 비난만을 받을번 했소.》

《동무가 너무도 명백한 문제에 의혹을 품은것도, 나나 명식동무가 아무런 론거도 없이 엉터리없는 질문이라고 속단했던것도 따지고보면 우리모두가 수령님의 로작을 깊이 학습하지 않았기때문이였어요. 정일동무의 말을 듣고 나는 고전이나 다른 나라의 경제리론을 많이 알아야만 지식의 탑을 훌륭히 쌓을수 있다고 생각했던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깨달았어요.》

《물론 우리 당정책도 연구를 해야지. 그러나 나는 대학기간에 무엇보다 고전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성서를 모르는 그리스도교신자가 있을수 없듯이 고전을 모르는 공산주의자가 있을수 없지 않을가?》

선희는 실망했다. 봉국이가 심각한 반성에 잠기리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와는 달랐다. 그는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가 무엇을 사고와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야 하는가는 물의를 일으켰던 민족문제에 대한 실례가 잘 말해주고있지 않아요. 나는 아직도 동무가 고전이나 다른 나라의 리론만을 숭상하려고 하는것이 리해되지 않아요.》

선희는 힘겹게 말을 마치고나서 머리를 돌려버렸다. 봉국이와 자기와의 사이에 지향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봉국은 태연한 기색이였다.

《민족문제를 놓고 말한다면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 나라의 경우는 세계적인 판도에서 볼 때 일반성을 띠지 못하오. 그렇기때문에 고전가들의 명제로 설명할수가 없었소.》

《설사 그렇다고 하자요. 그러나 우리는 다른 나라의 혁명이 아니라 조선혁명을 위해서 배우고있지 않나요.》

《나도 조선혁명을 위해서 배우지 다른 나라 혁명을 위해서 배우는게 아니요. 동무의 눈에는 내가 타민족사람으로 보이기라도 하오?》

봉국은 빈정거렸으나 선희를 바라보는 크고 검은 눈은 여전히 다정하게 빛나고있었다.

《나는 롱담을 하는게 아니예요. 진심으로 동무에게 권고하는거예요. 내 보기엔 봉국동문 배움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것 같아요. 정치경제학시간에도 최정택선생님의 강의는 흘려들으면서 번역교재만을 숨겨가며 보지요. 그건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고 또… 》

선희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웃음을 가셔버린 봉국의 얼굴이 이지러지며 여태 본적이 없는 괴로운 표정이 떠올랐기때문이였다. 그의 입에서 반발적인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언젠가 동무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모스크바종합대학 연구생으로 류학할것을 희망하오. 그 희망을 실현하자면 그 대학에서 배우는 정치경제학교과서를 미리 학습해야 한단 말이요. 그건 그렇고… 동무도 일전에 총장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나와서 한 말을 들었지?》

《들었어요.》

《총장선생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학습방향을 가리켜준거요. 총장선생님이 강의참관을 하고 돌아간 그 이튿날 부학부장선생님이 재삼 어떤 방향으로 학습계획서를 세워야 하는가를 말하지 않았소.》

그런 일이 있었다. 송금석은 학부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고전독파운동의 모범을 경제학부 학생들이 창조해야 한다면서 그를 위한 학습계획서들을 세우라고 지시했었다.

《물론 고전이나 다른 나라 책들도 읽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무엇을 기본으로 배우려 하는가 하는거예요. 봉국동무, 난 왜 그런지 동무의 일이 근심돼요. 동문 하루빨리 학습방향을 돌려야 할것 같아요.》

선희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나서 봉국을 쳐다보았다. 애처롭게 떨리는 눈빛이 봉국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난 선희동무의 마음을 알고있소. 난 실수하지 않소. 근심하지 마오.》

봉국은 주먹을 쥐여보이며 결심이라도 다지듯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뻐스정류소에 이르렀다. 손님들이 곁에 있어서 더는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을수 없었다. 인츰 뻐스가 왔다. 줄곧 괴로운 상념에 휩싸였던 선희는 뻐스에 오를 때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렸다. 먼저 오른 봉국이가 날래게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한 정류소를 지났을 때 봉국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집에 들렸다 가오.》

《어째서요?》

《어머니가 최근에는 동무가 왜 우리 집에 오지 않는가고 하면서 데려오라고 했소. 어머니는 오늘 저녁 외국출장을 떠나오.》

《어데로 가나요?》

《쏘련으로 가오.》

선희는 망설였다. 한학급에서 공부를 하는 남학생의 집에 들린다고하여 잘못될것은 없었다.

그래서 봉국의 청대로 몇번 그의 집에 다닌적이 있었다. 정인화는 전쟁시기 돌아간 부모들에 대하여 살뜰히 묻기도 하고 맛나는 음식을 먹이려고 특별히 애쓰기도 하였다. 아들에 대한 사랑을 그의 학우들에게도 베풀고싶어하는 어머니들의 다심하고 정깊은 심정이였다. 그는 선희의 늙은 할머니가 처녀로 성숙한 손녀에게 미처 갖추어주지 못한 화장품이나 소지품들을 갖가지로 갖추어주려고 애를 썼다. 선희는 고맙기도 했지만 지나친듯 한 호의에 난처하기도 하여서 얼굴을 붉히며 사양했다. 자기의 성의가 거절을 당하자 정인화는 몹시 서운해했다. 선희는 그의 표정에서 전쟁시기 돌아가신 어머니를 련상하며 모성의 정애를 읽었다. 그러면서도 이를데없이 거북하고 쑥스러웠다.

《그래 우리 집에 안 들리겠소?》

봉국이가 다우쳐물었다. 선희는 한참이나 바재이던 끝에 들리기로 결심했다. 봉국이 어머니가 먼길을 떠나면서 기다린다니 차마 거절할수 없었다. 그들은 창전동 뻐스정류소에서 내렸다. 만수대언덕쪽으로 뻗은 언덕길을 걸어 봉국의 집에 이르니 뜻밖에 송금석교수가 정인화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정인화는 선희를 보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겨맞았다.

《그동안 왜 놀러오지 않았나?》

정인화는 마치 긴 리별끝에 사랑하는 딸을 만난 어머니처럼 무등 기뻐했다. 하지만 선희는 함께 반가와할 계제가 못되였다. 송금석의 의아한 눈길이 쏠리자 무의식중에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부상동지는 언제부터 선희학생을 그렇게 잘 알고있습니까?》

송금석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인화는 몸둘바를 몰라하는 선희의 손목을 이끌어다 자기의 옆자리에 앉히며 선선히 대답했다.

《우리 봉국이네 학급 학생인데 내가 왜 모르겠어요.》

송금석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기 흥분에 심취되여 젊은이들의 일에 끼여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자기의 론문원고를 가지고 정인화와 론담을 펼치려던 참이였다.

《방금 이야기의 계속인데 론문내용은 이렇습니다.》 하고 송금석은 도로 자리에 앉은 정인화의 주의를 자기에게로 끌었다. 그리고는 원고가 들어있는 큼직한 봉투를 집어들고 론문의 내용을 설명했다. 그는 강의때마다 학생들이 넋을 잃고 매혹되군 하는 그 좋은 웅변으로 비교적 상세히 내용을 개괄하였다.

《훌륭하군요. 참 좋은 론문을 썼어요. 경제일군모두에게 그러하겠지만 우리 무역일군들에겐 특별히 참고가 될것 같아요.…》

정인화는 론문내용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과찬입니다. 하긴 이 글이 발표되면 무역일군들에게 일정하게 참고로 될것 같습니다.》

《옳은 말씀이예요. 선생의 론문에서도 다른 나라들의 경제기술적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지만 사실 그래요. 우리는 58년부터 자동차와 뜨락또르를 생산하는데 기술장비가 미약하다보니 생산원가는 많이 들고 제품의 질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있어요. 발전된 나라들에서 기술적방조를 준다면 우리는 한결 나아질거예요.》

《제가 부상동지한테 진작 원고를 보여드리고 의견을 받았어야 하는건데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송금석은 자기의 실책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한탄을 했다.

《나야 뭐 이젠 실무에 빠져버린 실천가에 불과하지요. 사업에 쫓기다보니 이미 배웠던 지식도 잃어버리면서 머리가 빈곤해졌어요. 나같은 실무일군이 송선생같은 리론가에게 무슨 방조를 줄수 있겠어요.》

정인화는 흰이를 드러내며 상긋이 웃었다.

《지나친 겸손입니다. 부상동지의 경제학지식이 어떻다는거야 제가 잘 알지 않습니까.》

《아무튼 가는 걸음에 모스크바에 들려서 원고를 등탈없이 전하겠어요.》

《좀 수고를 해주십시오. 그런데 언제쯤 돌아오실것 같습니까?》

송금석은 원고봉투를 정인화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시일이 좀 걸릴것 같아요. 이번 걸음에 강선제강소의 분괴압연롤도 사와야겠는데 이미 계약을 맺은것이 없거던요.》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부상동지가 떠나시는걸 보고갔으면 좋겠는데 대학에서 조직한 회의시간이 박두해옵니다.》

송금석이 섭섭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봉국이와 선희도 따라 일어섰다. 정인화와 봉국은 송금석을 바래우려고 밖으로 나갔다. 선희는 선자리에서 고개를 숙여보였다.

떠들썩하던 방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선희는 빈방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송금석과 정인화가 주고받은 대화를 되새겼다. 그들은 쎄브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있다. 송금석과 정인화는 오늘호 당보사설을 읽지 않았을가? 오늘 아침 학급에서는 《우리 당의 자립적민족경제건설로선을 견결히 옹호하자!》라는 당보의 사설을 독보했다. 김정일동지의 발기에 따라 당보의 주요사론설을 독보하는것이 제도화된지 오랬다. 목청이 곱고 발음이 정확한 선희는 학급의 독보책임자였다. 선희는 자신이 독보한 오늘호 신문의 사설을 정확히 기억하고있었다. 그 사설에 비추어보면 송금석과 정인화는 확실히 생각을 잘못하는것 같았다. 선희는 갑자기 가슴 한귀가 떨리는것을 느끼였다. 여차하면 정인화가 이번의 외국려행에서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저지를것 같아 안타깝고 불안했다.

그에게 충고를 주어야 하지 않을가? 머리를 저었다. 한갖 대학생에 불과한 자기가 무역성 부상인 그에게 충고를 준다는것은 지나치게 외람된 일이다. 어쩌면 좋을가? 선희는 불현듯 자기의 가방속에 오늘호 당보가 들어있다는것을 상기했다. 그러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서둘러 신문을 꺼내서 방구석에 놓여있는 정인화의 려행용가방속에 구겨질세라 조심스레 밀어넣었다. 이제 정인화가 비행기안이나 혹은 려관방에서 가방을 열어보다가 신문을 보면 어차피 읽어보게 될것이다. 그러면 자립적민족경제건설로선을 옹호할데 대한 당의 호소가 그의 심장에 마쳐들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정인화와 봉국이가 돌아왔다. 세사람은 오붓이 둘러앉았다.

《조부모님들은 요사이 건강하신가?》

정인화가 선희에게 물었다.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지만 그를 만날 때마다 깍듯이 조부모님들의 안부를 묻군 하였다.

《네.》

선희는 다시금 불안스러워지는 마음을 걷잡지 못한채 건성 대답했다.

《오늘 이렇게 와주어서 정말 고마워.》

정인화의 애무어린 손길이 선희의 잔등을 쓰다듬었다. 마당에서 자동차경적소리가 울렸다. 정인화를 비행장까지 태워갈 승용차가 도착한것이다. 정인화는 선희와 살틀한 이야기를 더 나누지 못하는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왜 좀더 빨리 오지 않았나?》

나직이 물으며 곱게 치뜨는 눈가에 가벼운 원망이 비꼈다.

《강의가 끝나자 인차 온것이 그래요.》

선희대신 봉국이가 대답했다. 정인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려있는 진회색 봄외투를 벗겨입고 방안을 나섰다. 그의 가방을 맞들고 선희와 봉국이가 뒤따랐다. 봉국은 여느날없이 심란해진 선희의 낯색을 살피며 속삭였다.

《선희동무, 기분나쁜 일이라도 있었소?》

선희는 말없이 머리를 저었다. 단둘이라면 정인화와 송금석이 나눈 이야기를 두고 자기 생각을 터놓았을것이다. 그러나 바로 한걸음앞에 정인화가 있으니 말할수 없었다. 그는 흔연한 기색을 지으며 가방끈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현관앞에 하늘색승용차가 서있었다. 차안에는 젊은 운전사와 몸이 뚱뚱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외국려행을 떠나는 자기네 부상을 바래우려고 떠난 무역성일군인듯싶었다.

정인화가 차에 올랐다. 봉국이도 비행장까지 따라가려고 함께 탔다.

《잘 다녀오십시오.》

선희는 정인화에게 가방을 넘겨주며 머리를 숙였다. 정인화가 정겹게 웃어보였다. 차가 떠났다. 뒤창쪽으로 얼굴을 돌리고앉은 정인화가 손을 저었다. 선희는 몇걸음 따라가며 마주향해 손을 저었다.

《어머니, 제가 가방속에 신문을 넣었으니 꼭 읽어보세요!》

그는 이 순간에 자기가 이렇게 소리친듯이 생각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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