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밤사이에 도적눈이 내리였다. 어느결에 그렇게 서둘러 내렸는지 룡남산마루는 하얀 눈산이 되여버렸다. 밤하늘을 메우며 쏟아져내리던 눈이 새날이 잡혀들자 어느덧 그치였다. 하얗게 눈벌이 된 대학운동장에 아침해살이 흘러퍼졌다. 흰눈이 어디나 이불처럼 두툼히 덮이여서 그런지 날씨는 봄날처럼 푸근하였다.

어깨에 넉가래와 삽을 멘 대학생들이 대학운동장과 청사앞으로 몰려들었다. 방학이지만 평양에서 사는 학생들은 눈이 온 날이면 련락이 없어도 모두 대학에 나왔다.

선희는 집에 넉가래가 없어서 퍼그나 다스러진 싸리비를 들고 정문에 들어섰다. 인민반에서 정해준 당번이 되면 이른새벽 아빠트주변을 쓸군 하던 비자루였다.

먼저 온 학생들은 벌써 운동장에서 일손을 잡았다. 대여섯명씩 조를 무어 군데군데 큼직한 눈무지들을 만들며 자리를 넓혀나갔다. 선희는 허술한 도구를 들고 나타났을뿐아니라 한발 늦어지기까지 해서 마음이 송구스러웠다. 뒤따라 오는 동무들도 많았지만 이왕이면 먼저 온 동무들처럼 일찌기 나와서 일손을 잡았어야 했다. 그는 가벼운 자책속에 운동장을 둘러보며 학급동무들을 찾았다.

《선희동무!》

저켠 축구꼴문쪽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올리였다. 선희는 그쪽으로 돌아섰다.

김정일동지께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불도젤의 삽날만큼 널직한 넉가래의 채를 잡고 내의바람으로 서계시였다. 이미 무척 힘을 뽑으신 모양 미소어린 존안에 땀발이 돋아있었다. 교실이나 교정을 청소할 때면 언제나 학급에서 제일먼저 걸레나 비자루를 드시는 그이이시였다.

《늦어서 미안해요.》

총총히 다가간 선희는 발깃해진 얼굴에 어줍게 웃음을 그리였다.

《늦은 벌충을 하도록 해줄테니까 걱정마오.》

김정일동지께서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발을 씻으며 소리내여 유쾌히 웃으시였다. 상혈되신 존안에서 흰김이 허옇게 날리였다. 항상 사색의 빛이 떠돌던 그이의 표정에 지금은 로동의 희열만이 넘치였다. 이 시각에는 대학구내의 눈을 치는 일이 제일 기쁘게 생각되시는것 같았다. 그이옆에서 낯이 익은 다른 학급의 두 남학생이 넉가래줄을 잡고있었다. 선희는 응당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봉국이가 보이지 않는다는데 생각이 미치였다.

《봉국동무는 아직 안 나왔어요?》

《나왔소. 그런데 학부지도원선생이 무슨 문건을 정서시킬것이 있다면서 찾아서 갔소.》

봉국은 인쇄를 하듯 글씨를 곱게 썼다. 그래서 교원들이 무슨 문건같은것을 정서할것이 있으면 그를 찾았다. 선희가 어데서 일감을 찾을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그이께서 다시 말씀하시였다.

《선희동무도 우리와 함께 일합시다. 우리가 넉가래로 밀어내면서 흘려버린 눈을 선희동무는 비자루로 쓸어모으시오.》

《알겠어요.》

선희는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상긋이 웃어보이였다. 키가 꺽두룩한 남학생이 손에 쥔 끈을 감아쥐며 미덥지 않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교수님의 손녀가 비질을 제대로 하겠는지 모르겠구만.》

악의없이 건늬는 롱담이지만 선희는 어지간히 볼쾌했다. 왜서 모두들 자기를 귀공녀로 치부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였다. 며칠전에 본 소설에도 학자의 외동딸을 나약하고 감상적인 처녀로 그려놓았다. 문화적으로나 지적으로 세련된 가정환경이 인간의 성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외곡된 편견일것이다. 누구보다 생활에 대한 깊은 리해를 가지고 정신문화를 창조하는 작가가 그러한 편견을 가지는데는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당신의 딸은 그렇게 나약하고 무능한 처녀인지 모르나 력사학자의 손녀인 선희는 억센 처녀예요!)

그는 소설책을 작가로 여기며 한동안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더 보지 않고 던져버렸다. 선희는 그때의 분이 되살아나서 새침해진 표정으로 키 큰 남학생을 마주보며 쏘아붙였다.

《동무는 언제 내가 눈치는걸 보고 그런 말을 해요?》

《보지는 못했지만 짐작이 가는 일이 아니요. 일반적인 현상이니까.》

남학생은 비죽이 웃으며 즐겁게 빈정거렸다.

《이제 보세요. 그러면 동무의 그 짐작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깨닫게 될거예요.》

선희는 비자루를 움켜잡았다. 싱거운 남학생에게 본때를 보이고싶었다.

《자, 그럼 선희동무가 솜씨를 보이게 또 시작해봅시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헌헌한 표정으로 말씀하시였다.

두 남학생이 넉가래의 량옆에 맨 바줄을 앞에서 끌기 시작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채를 눕혀잡고 뒤에서 미시였다. 혼자서 다루는 넉가래와는 대비도 안될만큼 엄청나게 많은 눈이 한번에 쭉쭉 밀리였다. 선희는 넉가래가 지나며 흘려버린 눈을 처음부터 이악스레 쓸어나갔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비질을 하는데는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기 집에 차례가 오면 도맡아 마당청소를 하며 익힌 솜씨가 있었다. 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로동이지만 비질에도 묘득이 있어야 한다는것을 알고있는 선희였다. 비자루가 땅에 쓸리며 원을 그릴 때 몸을 적당히 돌리며 두팔에 힘을 균형맞게 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힘내기로 휘둘러대면 인차 힘이 진해버린다. 그의 세련된 비질에 눈가루가 물결처럼 파문을 지으며 쓸리였다. 황토빛땅바닥이 비자루밑에서 깨끗이 드러났다.

《좀더 빨리 달립시다!》

김정일동지의 웨침소리가 들리였다. 선희는 피끗 머리를 들었다. 커다란 넉가래가 눈을 북북 긁어 올려 듬뿍 걷어안고 맹렬히 달렸다. 넉가래가녁으로 밀려나는 눈가루가 꽃보라처럼 날렸다. 그이께서는 점점 속도를 높이며 내달리다가 눈무지앞에 이르러 몰고온 눈더미를 재치있게 뒤번져 쏟으시였다. 선희는 엉거주춤 비자루를 잡고선채 그이의 모습을 황홀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든 저렇게 통이 크게 빨리 해제끼시는 김정일동지이시였다.

그러고보면 그이의 특질이 비상한 속도에 있는것 같았다. 한학급에서 공부를 하면서 여러번 목격한바이지만 김정일동지는 우선 정신활동의 속도가 비상하시였다. 감수와 판단이 상상 못할 정도로 빠르시였다. 어떤 사물현상이나 학술문제에 부딪치면 남들이 륜곽적인 리해도 가지기 전에 벌써 본질과 내적련관을 파악하시였다.

그이의 사유가 시작되면 마치 고압전류가 부딪치는 순간 전광이 번뜩이듯이 해답이 이루어졌다. 그 나이에 그렇듯 광범한 지식을 쌓으실수 있은것은 놀랄만치 빠른 속도의 사유능력을 지니셨기때문일것이다.

한번은 김정일동지와 함께 대학도서관에서 장편소설 《고난의 길》을 빌린적이 있었다. 부피가 두터운 3부작인것만큼 강의를 받으며 학습의 여가에 읽자면 몇주일은 걸려야 했다. 그런데 김정일동지께서는 한주일만에 세권을 모두 읽으시였다. 선희는 그때 첫권을 겨우 읽었을뿐이였다.

후에 소설을 다 읽고나서 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김정일동지께서는 구체적인 세부까지 다 기억하고계시였다. 선희는 또 하나의 사실을 상기했다. 체육시간들에서 보아왔지만 김정일동지께서는 달리기와 수영을 잘하시였다. 많은 체육종목들에서 속도를 기본으로 하는 그러한 종목들을 즐겨하고 잘하시는것 역시 사색과 활동에서 강렬한 속도를 지향하는 천품의 발현이라고 생각되였다.

잠간사이에 또 하나의 눈무지가 덩실하게 솟았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다른 두 남학생과 함께 새로운 눈무지를 쌓아올리며 여전한 속도로 넉가래를 미시였다.

선희는 더욱 부지런히 비질을 했다. 조금이라도 어물거리다가는 뒤거두매를 따라세울수 없었다. 드세찬 힘의 사품속에 휘말린듯 온몸이 무작정 앞으로 끌려나갔다. 그이께서 옆을 스치실 때마다 휙휙 바람이 일며 눈가루가 날리였다. 그러면 선희의 일손도 곁들어 빨라졌다. 내처 걸싸게 비자루를 휘둘러대도 굼뜨게만 생각되여 안타까웠다. 그러면서도 마냥 솟구쳐오르는 힘이 느껴져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환희였다. 온몸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며 목에서 단김이 뿜겨졌다. 손에 쥐였던 빨간 수갑을 이발끝으로 벗겨서 외투주머니에 넣었다. 맨손으로 해대야 성이 찰것 같았다. 차거운 눈가루가 손등에 덮이였다. 산뜩산뜩한 촉감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허, 정말 짐작과는 다른데.》

앞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피끗 고개를 들어보았다. 방금 일손을 놓은듯 한 남학생이 싱글거리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선희는 그쪽에 대고 할깃 눈을 빨았다. 흥, 이제야 내 솜씨를 알아보았나요 하는 뜻이였다. 그리고는 힘껏 비자루를 휘두르자 그 남학생의 발부리에 눈가루가 날려가 덮이였다.

《하, 이거 비질솜씨만 놀라운게 아니라 복수심도 놀랍구만.》

남학생은 옆으로 비켜서며 발을 굴러 신발의 눈을 탁탁 털었다. 선희는 그러든 말든 따라가며 눈을 끼얹었다.

《제발 이러지 마오. 내 잘못했소.》

남학생은 두손을 들어 휘저었다.

《잘하오, 잘해… 학자가문의 딸들과 손녀들을 대표해서 단단히 혼을 내주오.》

눈무지곁에서 허리를 펴신 김정일동지께서 즐겁게 선희를 부추기시였다. 선희는 터져오르는 웃음을 참고 황황히 뒤걸음치는 남학생에게 련속 눈가루를 퍼부었다.

《선희동무, 항복을 받았으니 이젠 동무도 좀 쉬오.》

김정일동지께서 호탕하게 웃으며 말씀하시였다.

선희는 배를 그러쥐고 따라 웃어댔다. 맑고 청신한 대기속에서 웃음소리가 흩어져 날렸다. 선희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두손으로 쓸어올리였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금시 물에 감은 머리처럼 흥건히 젖어버렸다. 어지간히 팔이 뻐근했으나 기분은 날듯이 유쾌했다.

김정일동지께서도 기분이 좋으신듯 방금 쌓아올린 눈무지에 등을 대고 엇비스듬히 누우시였다.

쪽빛하늘을 바라보시는 그이의 눈길에 티없이 맑은 미소가 어리였다. 그이께서는 누우신채로 눈가루를 한줌 쥐고 동그랗게 빚으시였다. 문득 동심에 빠지신듯 눈덩이를 쳐들고 맞은켠 정원수 우듬지를 향해 던지시였다. 선희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눈덩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였다. 나무가지에 앉았던 비둘기가 황급히 깃을 치며 운동장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비둘기가 노는양이 재미있어서 선희는 손벽을 치며 웃어댔다. 그는 이 환희로운 순간에 김정일동지를 따라 어린시절로 되돌아간듯싶었다. 얼마나 좋았던가. 이렇게 눈이 온 날이면 해종일 밖에서 놀아도 싫증이 안 났었다. 무엇인가 신비롭고 깨끗한것이 느껴져 동무들과 함께 눈속에 뒹굴며 끝없이 어리광을 부리고싶었다. 하얀 눈, 파란 하늘, 눈부신 해빛.… 어린시절에는 그 모든것들이 기쁨의 상징으로 되였었다.

정일동무도 어릴 때 눈우에 누웠다가 일어나서 사진을 찍었다고 좋아했던 일이 있어요?》

《있구말구. 어릴 때 나는 무척 장난이 심했소.》

《그랬을것 같아요.》

선희는 수긍했다. 진취적이고 박진적인 성품과 주위세계를 인식하려는 욕망으로 류달리 활동적이시였을 그이의 어린시절을 련상할수 있었다.

《얼마나 좋은 우리의 겨울이요!》

김정일동지께서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우리의 겨울!》

선희도 따라 속삭이였다.


×


대학구내의 눈을 말끔히 쳐낸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도 뻐스정류소로 향하시였다.

《선희동무, 빨리 갑시다.》

그이께서는 한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선희를 돌아보시였다.

《저…》

선희는 그이의 곁에 다가와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머뭇거리였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하오.》

김정일동지께서는 선희의 낯색이 어두워진것을 보시고 걸음을 늦추시였다.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유적을 발굴하는것이 과연 다른 사회주의나라들과의 통일단결에 지장으로 되고 모든 민족의 조락을 예언한 선행리론에 비추어볼 때 의의없는 일로 될가요?》

김정일동지께서는 그 질문뒤에 심상치 않은 일이 깔려있다는것을 직감하며 우뚝 걸음을 멈추시였다.

《누가 그런 주장을 하고있소?》

《총장선생님이 그렇게 주장을 한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가슴이 답답해오는것을 느끼시였다. 민족의 독자적인 시원을 밝히는것이 선행리론과 다른 사회주의나라들과의 통일단결에 저촉된다고 보는 총장의 주장은 참으로 언어도단이다. 그것은 교조와 사대의 병든 의식이 얼마나 악성적인 후과를 가져오는가를 말해주고있다. 체소하면서도 담차고 리지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오빈우의 외형적인상과 자기것에 대한 허무적인 립장은 너무도 대조적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의 혁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아깝게 생각되시였다.

일순 침중한 사색이 흐르는 그이의 안색을 조심히 살피며 선희가 다시 말했다.

《할아버진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구석기시대유적을 발굴하는 사업에 바치려고 결심하신것 같아요. 그런데 총장선생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고민하고있어요. 요사이 줄곧 번민에 잠겨있는 할아버지를 보기가 딱해요.》

《지금 선생님이 대학에 계시는지 모르겠소?》

《오늘 아침 출근을 하셨으니까 사무실에 계실거예요.》

《동무는 먼저 집으로 가오. 나는 선생님을 만나봐야겠소.》

김정일동지께서는 강명호교수한테서 자초지종을 들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청사쪽으로 다시 되돌아서시였다. 선희는 가슴앞에 두손을 모두어잡고 반달음을 놓다싶이 걸어가시는 그이의 뒤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김정일동지께서 낯익은 사무실에 들어서시니 강명호와 최정택이 마주앉아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참인지 방안의 분위기는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안녕하십니까.》

그이께서는 허리를 굽히며 그들에게 친절한 인사를 보내시였다.

《아, 정일동무, 어서 이리 와 앉으시오.》

최정택이 얼굴의 그늘을 가시며 자기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강명호는 말없이 반기였다.

《말씀중인데 방해되지 않겠습니까?》

김정일동지께서 흥분을 눅잦히며 나직이 물으시였다.

《아니, 마침 잘 왔소.》

최정택이 선선히 대답하고나서 묵묵히 앉아있는 강명호의 눈치를 살피며 뒤를 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동무의 의견을 좀 알고싶었소. 지금 강선생님한테서 들었는데 구석기시대유적발굴문제가 복잡해졌구만.》

《저도 방금전에 선희동무한테서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서 왔구만!》

강명호가 얼결에 반갑게 부르짖고는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동시에 한탄에 젖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리였다.

정일동무는 우리 민족사의 첫머리를 바로잡을 탁견을 내놓았지만 사학자인 나는 틔워준 길도 걷지 못하고 이렇게 한숨만 토하고있소. 마주 대하기가 부끄럽기 그지없소. 어서 앉으시오.》

강명호는 자리를 권하고나서 무거운 한숨을 내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조용히 의자에 앉으시였다. 로학자의 무거운 한숨소리에 가슴이 저리여서 인츰 말씀을 꺼낼수가 없으시였다. 강명호도 그이의 심정을 알아챈듯 표정을 바꾸어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얼기설기 주름발이 덮인 그의 얼굴에서 번민의 그림자는 가셔지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죄송스럽게 되였습니다. 저의 미숙한 견해를 값높이 사주시면서 깊은 연구를 하시는 선생님을 진작 한번 찾아뵈워야 하는것이 걸음이 늦어졌습니다.》

정일동무의 심정이 그렇다니 내 마음이 더구나 송구하오. 선희한테서 들었다니 짐작이 가겠지만 난 요사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있소. 내 여생에 기어이 구석기시대유적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좀처럼 뜻을 이루기가 어렵구만.》

강명호의 목소리는 절망에 잠겨있었다. 석쉼하게 울리는 그 말속에서 희망없는 여생을 슬퍼하는 심혼의 흐느낌이 느껴졌다.

《선생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일이 제대로 다 잘될겁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아픔을 애써 삼키며 말씀하시였다. 로교수의 심신에 타오르던 활력이 꺼져가는게 아깝기 그지없으시였다.

강명호는 성긴 백발을 매만지며 또다시 탄식을 터뜨리였다.

《내 나이가 젊었더라면 혼자서라도 조국강토를 샅샅이 뒤지며 구석기시대유적을 찾아볼 용기를 가졌을거요. 나도 한창때에는 내 할바를 찾아서 하느라 했소. 그 어려운 시절에 변변히 로자도 갖추지 못하고 동만주와 남만주를 편답하며 고구려의 옛자취를 더듬어보기도 하였지. 그러나 인제는 늙었어. 나한텐 그런 힘이 없소. 그렇다고 민족사가 잘못 엮어졌다는것을 알면서 모르쇠를 할수도 없고 늙음이 원쑤요. 늙음이… 이 아픈 심정을 속시원히 터놓고싶어서 방금 최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였소.》

김정일동지께서는 이지러진 로인의 얼굴을 보기가 괴로와 눈길을 떨구고 묵묵히 앉아계시였다.

여생의 마지막날까지 옳은 길을 걸으려는 이 참된 학자의 마음을 차겁게 외면하는 사람들이 잘 리해되지 않으시였다. 총장이 사대주의에 깊이 오염된 사람일수 있다는것은 짐작하고있었지만 구석기시대유적발굴에 대한 그 정당한 발기까지 이렇듯 무자비하게 꺾어버릴줄은 차마 생각 못하시였다.

강명호가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듣자니 총장은 어저께 대학행정협의회끝에 내가 구석기시대유적문제를 들고다니지 못하게 하라고 력사학부장에게 다짐을 두었다오. 다 늙어가는 내가 또다시 민족주의사학자로 정치적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학부에서 잘 도와줄대신 왜 같이 춤을 추는가고 하면서 학부장을 닦아세웠다니 참 기막힌 일일세.》

김정일동지께서는 갑자기 호흡이 가빠오는듯 한 느낌을 받으시였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우리 민족의 시원을 바로 찾는것이 어찌 민족주의자로 굴러떨어지는 정치적과오로 된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도록 거꾸로 선 론리이다. 사대주의는 총장과 같이 재능과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서조차 정당한 분별과 판단의 능력을 마비시켜버렸다. 사람들의 건전한 의식과 창조적지혜를 병들게 하는 사대주의가 현미경으로 투시된 무서운 세균과 같은 형상으로 눈앞에 그려지시였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그를 찾아가서 안타까운 심정을 비치고싶으시였다. 하지만 우선 당장은 좌절과 체념에 사로잡힌 강명호교수를 도와줄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아야 하셨다. 지금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그의 지향을 실현할수 있을가? 총장의 사상적립장은 옳지 않지만 강명호교수의 뜻대로 력사학부의 교원들과 학생들을 구석기시대의 유적발굴에 동원한다는것도 과녁없이 화살을 날리는것과 같은 일이였다. 아직은 어느 지역에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있을수 있다고 딱히 단정할수 없었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셨던 그이께서는 얼핏 떠오르는 생각을 따르며 강명호를 향해 눈길을 드시였다.

《선생님,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무슨 방도가 있소?》

강명호의 눈에 밝은 빛이 어리였다. 최정택이도 긴장한 눈길로 그이를 바라보았다.

《제 생각에는 먼저 학계와 광범한 대중에게 우리 나라 경내에도 구석기시대유적이 반드시 있다는 신심을 주는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음!…》

강명호는 최정택이와 시선을 마주치며 마른침을 삼켰다.

《선생님이 우선 구석기시대문제를 가지고 론문을 써서 출판물에 발표하는것이 좋을듯싶습니다.

그러면 구석기시대유적발굴에 전인민적인 이목이 돌려질수 있습니다. 외곡된 인식을 가진 일부 사람들은 외면을 하겠지만 우리 인민은 구석기시대유적발굴사업에 큰 관심을 가질것입니다. 애국애족의 사상감정이 드높은 우리 인민이 자기 민족의 시원을 바로 밝히는 문제에 어찌 무관심할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꼭 어느 지방에 있을것이라고 추정할수 없는 조건에서 전국의 광범한 대중이 관심을 가져야 구석기를 찾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이께서는 확신에 넘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강명호와 최정택은 경탄이 어린 눈길로 서로 마주보았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도인가!

김정일동지께서는 문제해결의 방략을 세우는 출발점부터 자기들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구석기시대유적발굴사업을 전문연구소나 해당 학계에만 국한시키는것이 아니라 광범한 인민대중의 사업으로 전환시키는것으로 문제해결의 열쇠를 찾으시였던것이다.

강명호는 눈앞이 확 열리고 가슴을 짓누르던 번뇌와 고민이 순간에 날려가는듯 했다. 중압에 눌리우던 몸이 거뿐해지면서 의욕과 신심이 솟구쳤다. 론문을 쓰는 일이라면 자기로서 얼마든지 할수 있는 일이였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미처 못했을가?

《듣고보니 그렇게도 명백한걸!》

강명호는 입귀를 실룩이였다. 한치앞도 안 보이는 어둠속에서 길을 잃고 절망감에 몸부림치던 일이 방금 깬 꿈처럼 여겨졌다. 그는 어쩔수없는 충동에 팔을 뻗쳐 그이의 손을 그러쥐며 부르짖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김정일동지께서는 한껏 신뢰어린 시선으로 교수를 바라보시였다.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새로운 신심을 보는것이 그지없이 기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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