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의서도적놈들

7

 

수미는 허모를 믿고서는 의서를 빼오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어떻게 해야 의서의 원고를 빼올것인가 하는 생각이 집요하게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가지 계책이 머리에 떠올랐다. 석구를 찾아간 수미는 자기의 계책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그 집에 들어가야 할것 같군요.》

《그러다가 정체가 탄로되기라도 하면 그땐 빠져나오기 힘들텐데요.》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요. 그러니 사흘후에 내가 기별하면 우리 집에 오세요. 허모에게는 내 사촌오빠라고 하겠어요. 그때쯤이면 내가 급병으로 앓을 때이니 그럼 당신은 나를 업고 허준의 집으로 가야 해요. 그 다음의 일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알겠소이다.》

다음날 수미는 자기의 계책을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작은 지레대를 방불케 하는 깜찍하게 생긴 저울로 대황가루를 정밀하게 달아 물에 푼 다음 진하게 달이고는 눈을 꾹 감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다음날부터 수미는 마치 물소나기와 같은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도 련이어 설사를 하여 기저귀를 차고있어야 할 정도였다. 대황은 설사를 일으키기도 하고 또 설사를 멈추기도 하는 초약이다. 문제는 그 량에 있었다. 약 0.5돈의 대황가루를 먹으면 수미와 같이 설사를 하게 된다. 이때 약 0.02돈(0.08그람정도)의 대황을 쓰면 순식간에 그 설사는 멎게 된다.

수미의 얼굴은 하루사이에 해쓱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날에도 또다시 대황달임물을 마셨다. 또다시 물과 같은 설사가 쏟아져내렸다. 며칠이 지나자 그의 얼굴은 생기를 잃고 훌쭉해졌고 손발은 얼음장같이 싸늘해졌다. 며칠새에 반쪽이 된 수미를 보고난 허모가 깜짝 놀랐다.

《이게 대체 어찌된거냐?》

《나리… 가 없는새에 무슨 몹쓸 병에… 걸렸는지…》

수미는 거의 탈양(탈수)상태까지 들어갔다. 허모가 안절부절하자 수미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찮아요. 나린 어서 관청에 나가세요. 내 병은 내가 알아 조처할테니…》

허모는 불쑥 이 계집이 우정 앓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원고대신 북데기같은 자료를 가져왔다고 앙탈을 부리면서 자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하던 말이 떠올랐던것이다.

《암만봐야 당신은 계집질하는 재간밖엔 없군요. 내 이제 그 의서원고를 빼오는걸 보라요!》

머리맡에 있는 초약가루를 만져보며 허모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제발로 일어난 수미는 조심스럽게 비상가루를 꺼냈다. 그는 모든 경우를 정확히 타산하였으며 세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한홉에 담긴 탕약을 한모금정도 마시면 죽지는 않되 기절할 정도로 비상가루를 준비해야 하는것이다. 수미는 그 량도 정확하게 산출해내였다. 이것도 나고야 겐이에게서 배운것이였다.

저건 또 무슨 약인고? 그러고보면 수미는 의술에 여간 밝지 않았다. 가까스로 무슨 약을 먹고난 수미가 다시 자리에 눕는데 숨소리가 간간한게 숨이 질것 같았다. 허모가 정말 되게 앓는게 아닌가 하고 망설이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허모의 하인이 들어와 아씨의 오빠라면서 웬 사내가 찾아왔다고 하였다. 수미한테 오빠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었다. 처음 자기에게 찾아왔을 땐 이 한성바닥에 자기 혼자뿐이라고 하던 수미가 아닌가. 그리고 여긴 누구도 모르는 곳인데 어떻게 되여 수미의 오빠가 찾아온단 말인가.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서는데 어느새 키꼴이 크고 몸집이 다부진 중년사내가 제 집으로 들어서듯 성큼 발을 들이밀었다. 오른쪽눈밑의 콩알만한 사마귀가 유표하게 눈에 띄였다.

《소인은 수미의 오래비되는 사람이오이다. 내 동생이 몹시 앓는다기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죽은듯이 누워있던 수미가 모기소리를 내며 알은체를 했다.

《오… 빠세요? 왜… 이자… 오세요?》

허모가 미처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오빠라는 사내가 수미에게로 다가왔다. 이마를 만져보고 손맥을 짚어보더니 야단을 쳤다.

《나리는 내 동생이 이 꼴이 될 때까지 뭘 하셨소이까? 그저 제볼장만 보면 다라는거지요.》

허모는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가 수미의 오빠라면서 불의에 나무람투로 들이대자 허둥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제 병은 자기가 안다고 하기에…》

《그것두 말이라구 하시우? 아, 내인의 몸으로 사내한테 자기 병을 보이자니 쑥스러워 그런것 같은데 그걸 곧이 믿고 이렇게 될 때까지 속수무책이니 참, 답답하오이다!》

이어 수미를 둘쳐 껴안았다. 그리고는 허모를 돌아보며 명령투로 소리쳤다.

《멍하니 있지 말구 동생의 행장을 준비해주시우!》

허모는 여윈 몸을 엉기적거리며 돌아쳤다.

잠시후 오빠라는 사내가 수미를 옆구리에 껴안고 대문으로 향하였다. 허모는 그 모양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탈양(탈수)상태로 녹초가 된 수미는 석구에게 매달려 비틀거리며 겨우 걸음을 옮겼다. 어느모로 보나 틀림없는 중한 구급병자의 행색이였다. 허준의 집앞에 이른 석구가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하녀가 빠금히 얼굴을 내밀더니 인츰 설유가 황황히 뛰여나왔다.

《부인님! 중한 병자올시다! 저의 마을에 살고있는 랑자인데 부모들은 다 죽고 불쌍하게 혼자서 살고있지요. 그새 며칠째 곽란을 만나 다 죽게 된것을 오늘에야 겨우 발견하였소이다!》

류이태와 허준을 도와 숱한 병자들을 치료한 설유는 웬간한 병은 손쉽게 치료해주군 하였다. 명의로 소문난 허준의 명성에 가리워서 그렇지 설유의 의술은 명의라고 당당히 말할수 있었다. 한입두입 소문이 나다나니 허준이 없을 때에도 사람들은 종종 설유에게 병보이러 오군 하였다. 설유의 눈에도 병자의 상태는 위급해보였다.

《어서 집안에 들어가자요!》

수미의 얼굴은 피기가 없이 창백하였고 입술은 초들초들 마르고 팔다리는 얼음장같이 싸늘하였다. 설유는 급히 수미의 맥을 짚어보았다. 세맥(가는 맥)이였다. 설유의 얼굴이 사색이 되였다.

《아니, 이거 심한 탈양이군요.》

설유가 재빠른 솜씨로 약장에서 오지병을 꺼내 청자고뿌에다 탕약을 붓기 시작했다. 포부자(법제한 부자) 한개, 흰삽주, 포생강(법제한 생강), 목향이 들어있는 탈양치료에 아주 효과가 있는 대고양탕이였다.

수미는 두눈을 간신히 뜨고 청자고뿌에 담겨져있는 탕약량을 가늠해보았다. 예견했던바그대로 정확히 한홉이였다.

《자, 어서 이 탕약을 드세요. 한결 나아질거예요.》

수미가 타들어가는 입술을 추기며 간신히 말하였다.

《저… 목이 몹시 타들어오는데 물을 좀…》

수미는 실지로 심한 갈증을 느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설유가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갔다.

순간 풀어졌던 수미의 두눈이 번쩍 빛을 뿌리였다. 그는 민첩한 솜씨로 괴춤에서 약봉지를 재빨리 꺼냈다. 하얀 가루가 청자고뿌안에 담겨진 검은 탕약물에 떨어져 눈녹듯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부엌에서 들어온 설유가 수미에게 물고뿌를 권하였다.

《자, 어서 물을 드세요. 》

수미는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다. 설유가 재촉하였다.

《이제는 얼른 탕약을 드세요. 지체하면 안돼요.》

고뿌를 입에 대고 우물거리던 수미가 미간을 찌프렸다.

《의원님, 맛이 별났소이다. 막 쓰고 매와서 전혀 먹지 못하겠소이다.》

설유가 머리를 기웃거렸다.

《?》

설유가 탕약의 맛이 얼마나 쓴가 확인하려는듯 청자고뿌를 자기의 입으로 가져갔다. 수미의 가느스름한 눈이 그 모습을 예리하게 살폈다. 설유는 고뿌의 탕약을 한모금 마시고나서 입을 다시였다.

《일없어요. 이 약은 대고양탕인데 원체 이렇게 맛이 좀 써요. 맘놓고 어서 들어요.》

《네.》

탕약이 든 고뿌를 입에 가져가는 수미의 눈이 도적고양이마냥 설유를 몰래 훔쳐보고있었다. 병자가 탕약을 마시는 모양을 지켜보던 설유는 갑자기 밸이 꼬이면서 심한 동통이 오는것을 느꼈다.

갑자기 왜 이럴가??

《아- 아유…!》

설유는 저도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배를 그러안고 설유는 서서히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는 순간 설유는 눈밑에 콩알만 한 사마귀가 달려있는 사내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불현듯 갈마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였다. 그리고 당장 죽어갈듯이 누워있던 녀인이 고뿌를 집어던지고 요사스럽게 웃는 모양이 언뜻하였다. 그다음 설유는 정신을 잃었다.

수미의 입에서 병자답지 않은 되알진 소리가 터져나왔다.

《자, 빨리!》

석구가 방안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탁자우에 놓인 종이뭉테기를 한아름 안고와 수미의 앞에 내밀었다. 수미는 재빨리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앞에 《동의보감, 〈외형편〉, 제3권》이라는 글발이 안겨왔다. 그는 얼른 그것을 품속에 넣었다.

《빨리 장농을 뒤져봐요! 의서원고 몇권이 더 있을거예요!》

석구가 도깨비 기와장번지듯 장농안의 하얀 옷가지들을 마구 끄집어내였다. 장농안의 물건이 바닥이 났건만 의서원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수미가 다시금 소리쳤다.

《빨리 부엌으로!》

석구가 눈에 불을 켜고 부엌의 구석구석까지 발칵 뒤졌으나 의서원고는 없었다.

《칙쇼!-》

수미가 후들거리는 몸을 끌고 제가 직접 방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의서원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수미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설유가 깨여날것이다. 품들여 계획하고 벌려놓은 일이 이렇게 수포로 돌아가다니? 악에 받쳐 미칠것만 같았다.

집안에 의서원고가 없다는것이 명백하였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눈앞에서 별찌가 무수히 일었다. 혼신의 힘을 다 내여 뒤졌건만 의서원고의 그림자도 못 찾으니 여직껏 지탱해오던 의지가 사그라지면서 수미는 그자리에 맥없이 스르르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수미는 부르짖었다.

《어서 사라지… 자요!…》

석구가 황급히 수미를 둘쳐업었다. 부리나케 대문으로 달려가는 년놈들을 밖에 있던 하녀가 눈이 올롱해서 바라보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던 하녀가 깜짝 놀라 쓰러진 설유에게로 다가갔다.

《마님! 마님!》

설유가 간신히 눈을 떴다. 눈물로 범벅질한 하녀의 얼굴이 뿌옇게 눈앞에 다가왔다.

《이 어인 일이오이까?》

(어째서 내가 이렇게 누워있을가.)

머리가 뗑하고 온몸이 지끈지끈 쑤셨다. 잠시후 기억을 더듬던 설유는 번쩍 뇌리를 치는것이 있었다.

(의서원고!)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설유는 누운 자리에서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얼른 탁자우부터 훑어보았다. 종이뭉테기들은 다 있었다. 후- 하고 가벼운 안도의 숨을 내쉬던 설유의 가슴은 철렁하였다. 온 구들에 하얀 옷가지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져있었던것이다. 머리아픔과 온몸의 지긋지긋함을 감감 잊고 설유는 머리를 굴리며 추리해보았다.

(아니, 그럼 전번처럼 의서원고를 노리고?!)

다시금 탁자우를 찬찬히 더듬어보던 설유는 그자리에 꺼지듯이 주저앉았다.

《외형편》 3권이 통채로 없어졌던것이다.

(이 무슨 일인가. 어느 놈이 감히 원고를 훔쳐간단 말인가. 어느 놈이?)

눈앞에 왕사마귀를 축 늘어뜨린 놈의 험상궂은 상판이 떠올랐다. 분명 어데선가 본 낯익은 상판이였다. 그리고 죽어간다고 아부재기를 치던 년이 자기가 의식을 잃을 때 야릇한 웃음을 짓던 일도 생각났다.

그게 어떤 원고인가. 남편의 온넋이 슴배여있는, 온갖 시련과 고통속에서도 버리지 않고 집필한 피와 땀의 열매였다. 그 원고를 백주에 어떤 놈이 훔쳐간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드는듯싶었다. 온몸의 독기가 아직 채 빠지지 않은데다가 너무도 큰 정신적충격을 받은터라 설유는 다시금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말았다.

수미는 설유의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까지 정확히 타산하였다.

그는 유시(오후5~7시)경에 설유의 집에 들어섰다. 그것은 만일의 경우 설유가 미처 깨나지 못하는 경우에는 저녁에 집에 들어온 허준이 그를 구완하게 하자는것이였다. 어슬녘에는 오가는 사람들과 병보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만일 설유가 죽는다면 큰 정신적타격을 받은 허준이 의서집필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영 단념해버릴수도 있을것이다. 의서가 집필되지 않으면 수미의 목적도 달성할수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집에 들어선 허준과 예영이는 아직도 의식을 잃고 실신상태에 있는 설유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하녀가 두서없이 제가 본것을 증언부언하며 설명해주었다.

허준은 재빨리 설유의 열손가락끝의 십선혈에 침을 찔러 각각 피 한방울씩 뽑아내였다.

《후!-》 하는 긴숨을 내쉬며 설유가 천천히 눈을 떴다. 허준의 모습을 알아본 설유는 안깐힘을 쓰며 일어나려고 하였다.

《좀더 누워있소. 대체 어인 일이요?》

《저 청자고뿌안의 탕약에 독이…》

《뭐요?》

허준은 훌떡 일어나 청자고뿌를 들여다보다가 급히 부엌으로 나가 밥 한술을 떠가지고 들어왔다. 그 밥을 탕약에 담근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가 마당에 휙 집어던지였다. 북슬강아지가 껑충껑충 뛰여오더니 그 밥을 덥석 받아물었다. 허준은 긴장한 눈길로 강아지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가 캥- 캥- 소리를 내지르더니 북슬강아지가 몇걸음 옮기지 못하고 푹 거꾸러졌다.

(아차, 이건 비상독약이로구나!)

저렇게 급사하는것은 비상독약뿐이다. 허준은 다급히 설유에게 생록두즙을 먹인 다음 재차 참기름 한숟가락을 먹이였다. 이어 닭우리로 급히 나간 허준은 닭의 목을 비틀어 피를 반홉정도 받아가지고 다시금 설유에게 먹이였다. 이 모든것은 비상독을 해제하는 효험을 가지고있었다. 물론 해독단(황단, 붉은팥가루, 쪽물감, 망초, 록두가루 각각 같은 량)을 쓰면 더 좋겠으나 언제 그럴 사이가 없었다.

잠시후 설유의 눈이 반짝거리고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한숨을 내쉰 설유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유의 말을 들은 허준은 사태의 진상이 어렴풋이 짐작되였다. 허나 누구들이 한짓인지는 가늠할수 없었다.

《당신생각에는 그들이 누구들인것 같소?》

《글쎄 잘 모르겠어요.》

《분명 의서의 원고를 노리는 놈들이 있는것 같소.》

《관청에서 예영이 아버지와 등진 사람들이 아닐가요?》

이번에는 함치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양례수의 명의술은 그런짓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판관으로 임명되여왔을 때부터 함치우는 허준을 원쑤처럼 대했다. 지금도 뒤에서 허준에 대해 제일 시비를 한다고 한다. 과연 함치우가 한짓일가?

아직 속단하기는 일렀다.

《혹시 시형이 한짓이 아닐가요?》

《그가 설마?》

허준은 턱을 고이고 생각을 몰아갔다. 그럴런지도 모른다. 자기를 모함하여 옥에 처넣은것도 허모라고 언제인가 참군이 몰래 귀띔한 말이 생각났다. 자기가 어의가 된 후로는 길가에서 만나면 별스레 아는체 하던 허모의 실눈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듣자니 함치우와 여간한 사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서로 집을 찾아다니는 정도라고 하였다.

《이건 가벼이 스쳐보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벌써 두번째가 아니예요. 관청의 음모군들이 아니라면 그들말고 또 다른…》

《당신말을 들으니 외부의 작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 당신도 들었지? 전란때 〈의방류취〉가 통채로 없어진걸 말이요. 그걸 누가 훔쳐갔는지 아오? 저 섬나라 왜놈들이요.》

설유가 갑자기 두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생각나요! 생각나요! 분명 그놈이예요. 아까 계집년을 업고왔던 사내는 왜놈이예요!》

허준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설유를 바라보았다. 설유의 눈에 복수의 불길이 황황 일고있었다.

《분명 그놈이예요. 어렸을 때 우리 친부모님들을 죽인 그 왜놈들속에서 난 그놈을 똑똑히 보았어요. 그놈의 눈밑에 콩알같은 사마귀가 있었어요. 아무리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내 어찌 부모님들을 무참히 학살한 그 왜놈들을 잊을수 있겠나요. 오늘 계집년을 데리고왔던 놈이 부모님들을 무참히 죽인 그 왜놈이예요. 그놈이 이 한성바닥에서 버젓이 활개치고다니며 당신의 의서에까지 손을 대다니?!》

허준은 설유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허나 엄연한 사실이였다.

전쟁이 끝나고 왜놈들이 이 땅에서 쫓겨났지만 아직도 팔도각지에는 어중이떠중이 왜놈종자들이 싸다니고있었다.

그렇다면 이놈들은 본토와 련결된 놈들인가 아니면 패잔병무리들인가.

설유의 친부모를 무참히 학살한 왜놈들이 그때에도 그의 친아버지가 쓰던 약초치료법을 적은 의서를 훔쳐갔다고 하였다.

왜놈들이 의서에 왜 이리도 관심이 클가. 허준의 머리로써는 리해할수 없었다.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오늘에는 그 모든것이 석연하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허준도 설유도 그 숨은 내막을 알길 없었고 또 상상치도 못하였다.

허준은 복수에 치를 떠는 설유의 잔등을 다정히 쓸어주었다.

《전란이 비록 끝났다 하더라도 왜놈들이 이러저러한 구실로 이 한성부에까지 드문히 드나들고있소. 속단하긴 이르지만 그 누군가가 왜놈들과 작당한것 같은 생각이 드오. 그렇지 않으면야 어떻게 놈들이 의서를 쓰는것을 알고 우리 집에까지 마수를 뻗치겠소. 사마귀놈이 돌아치는걸 봐서는 놈들이 노리는것이 내가 쓰고있는 〈동의보감〉이란것만은 분명하오. 그러니 원고를 우리 집에 보관해서는 안되겠소.》

《그럼 어디에 간수함이 좋겠어요?》

허준은 눈을 쪼프리고 생각에 잠겼다.

《기동이, 칠성이와 토의해보기요.》

《그게 좋겠군요.》

《예영아, 네가 얼른 갔다오너라!》

《알았소이다.》

허준은 중요한 일은 절대로 하인들을 보내지 않고 딸인 예영이를 시키군 하였다. 약 한식경이 지나자 기별을 받은 기동이와 칠성이가 예영이의 뒤를 따라 당도했다. 일의 전말을 들은 그들은 너무 분격하여 우들우들 두주먹을 떨었다. 기동이가 시원스레 나섰다.

《선생님! 그 원고를 우리 집에 보관하겠소이다.》

설유와 칠성이가 그 의견에 동의하였다. 칠성이는 한팔을 걷어붙이며 다짐하였다.

《의원님! 우리 그 의서를 목숨처럼 보관하겠으니 우리에게 맡겨주사이다.》

허준은 그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임자들한테 맡기면 나도 맘을 놓겠네. 그럼 오늘밤중으로 감쪽같이 의서를 옮겨가도록 하세.》

《알겠소이다!》

바삐 서두르는 칠성이에게 설유가 물었다.

《요즘 달래는 어떻게 하고있어요?》

《네, 객주집을 차려놓았는데 운영이 잘되는가 보오이다. 요먼저 들렸는데 달래누이와 응규형님이 얼마나 다정한지 이젠 이 동생같은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허준이 그 말에 뒤를 달았다.

《거참 반가운 소식이구만. 아직은 달래네한테 말하지 말게나. 앞으로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이 일은 절대비밀로 되여야 하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괜히 그들한테까지 마음의 부담을 줄게 있겠나. 후에 내가 도움받을 일이 있으면 말해주지.》

《알겠소이다.》

의서가 든 항아리를 상자에 넣어 지게에 진 칠성이와 기동이를 허준과 설유는 대문까지 나와 바래주었다.

자정이 넘은 깊은 밤 의서의 원고가 들어있는 항아리는 기동의 집 앞마당의 땅속에 감쪽같이 숨겨졌다. 아직까지는 허준의 집안과 기동이 그리고 칠성이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였다.

 

석구의 등에 업혀온 수미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녹초가 되여 뻐드러지고말았다. 허모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그렇게 앓는데도(비록 꾸민것이지만) 그 수개같은 자식은 또 어디 기생집으로 갔는지도 모른다. 수미는 사람들의 눈에 띄울가봐 석구를 돌려보내였다.

이제는 탈양이 너무 심해 손발이 후들후들 떨리였고 점차 가드라들고있었다. 초들초들 말라버린 입술사이로는 옥다물린 이발이 보였다. 수미는 배밀이로 간신히 기여가 이미 준비해놓았던 20돈의 생강을 갈아서 술에 달여놓은 탕약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탈양을 해제하려고 수미자신이 제조한 탕약이였다. 이 방법도 역시 나고야 겐이에게서 배운 조선고유의 의술이였다.

다시금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약 0.02돈의 대황가루를 입에다 다급히 넣었다. 그런 후에야 그는 그대로 누워서 잠시 숨을 돌리였다. 그의 품속에는 허준의 집에서 훔쳐온 의서원고 한권이 들어있었다. 약 이각이 지나니 차츰차츰 같증이 덜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일어나앉을 기운조차 없었다. 그럭저럭 삼각이 지나니 물처럼 쏟아지던 설사가 드디여 멎어버렸다. 대황가루가 은을 낸것이였다.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품속에 넣었던 의서의 원고를 탁자우에 올려놓았다. 이 원고 한권을 위해 수미는 자기의 생명을 걸었던것이다. 초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영 빈손은 아니였다. 약 300장은 실히 넘는 두툼한 원고였다. 수미의 머리속에서는 정 부득이한 경우에는 단 한두권의 의서원고만이라도 꼭 훔쳐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나고야 겐이의 말이 피끗 떠올랐다. 300장의 의서이면 결코 작은 량이 아니였다. 이것이면 나고야 겐이의 이름을 붙여 당당하게 우리 일본의 의서로 둔갑시킬수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린 수미는 간신히 앉아 의서원고의 표지에 눈을 주었다.

첫장의 《동의보감〈외형편〉제3권》 이라는 표제가 눈에 띄였다. 그다음장에는 목차(차례)가 있었다.

《목차: 가슴, 젖, 배, 배꼽, 허리, 옆구리, 피부, 살, 맥, 힘줄, 뼈, 주해.》

그다음장을 펼치니 저자의 이름이 있었다.

《어의 호성공신 허준.》

수미는 다음장을 펼쳤다.

《가슴: 흉격이란 명칭을 붙인데는 의의가 있다. 대체 사람의 가슴은 호흡하는 곳이며 음식물이 통과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한번 그 조절이 잘못되면 질병과 사기가 가슴속으로 같이 들어오므로 흉이라고 한다.…

흉격의 치수…

흉격의 부위…

장부의 경맥은 모두 횡격막을 관통하고있다.…

맥보는 법…》

가슴에 대하여 알아야 할 문제들이 자자구구 써있었다. 가슴의 구조와 생리가 수미의 머리속에 훤하게 떠올랐다. 목차에 따르는 다른 항목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미는 난생처음으로 조선의 유명한 어의가 쓴 보물같은 의서의 원고를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된것이였다.

(아! 그래서 나고야 겐이어른께서 그렇게도 의서를 귀히 여기셨구나! 이 의서는 참으로 금은재물에 비기지 못할 천하의 귀물이구나.)

정말 이 의서만 있으면 그 어떤 몸의 형태와 내장들의 구조와 생리 그리고 그것이 내재하고있는 모든 질병들도 다 환하게 안겨오는듯 하였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선의것임을 상징하는 〈동의보감〉이 아니라 일본을 뜻하는 이름으로 돼야 해!》

방금전까지만 해도 녹초가 되고 초절임되였던 수미는 그런 생각으로 제 몸에 생신한 기운이 뻗치는듯 하였다. 더욱더 의서에 심취되여 련이어 책장을 번져나가던 수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이거 빈 종이장뿐이구나!》

이럴수가 있는가. 목숨을 도박장에 내걸고 빼온 의서가 이것뿐이란 말인가. 수미는 다급히 뒤의 책장들을 숨가쁘게 뒤번졌다. 약 서른장정도만이 글이 씌여있었고 그다음부터는 빈 종이장뿐이였다. 《외형편》제3권에 금방 진입한 원고였던것이다.

《칙쇼! 쿠사이나!》

금방까지 희열에 넘쳐있던 수미의 얼굴이 흡사 규슈섬의 원숭이낯짝같이 흉측하게 이그러졌다. 섬나라 쪽발이의 야수성과 조폭성, 잔인성이 그 교태넘치던 회분같이 새하얀 얼굴에 력력히 드러났다.

그는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 죽어가던 병자답지 않게 발로 탁자를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탁자가 통채로 뒤번져졌다. 수미는 그래도 성차지 않아 숨을 씩씩거리며 방안을 오락가락하였다. 또다시 실패한것이다. 한동안 자기를 다잡지 못하던 수미는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 앉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무엇을 타산하지 못했고 무엇을 생각지 못했었는가. 이번 일은 정말 면밀하게 짜고 진행한것이였다.

수미는 모든것을 다 정확하게 타산하였지만 첫번의 시도로서 허준과 설유가 더욱더 각성되게 되였다는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그는 토막자료정도를 잃어버린 그들이 기껏해야 집안의 그 어딘가의 깊숙한 곳에 의서를 감추었으리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너무도 조급하게 덤볐던것이다.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쑤어놓은 죽이였다.

이제 다시 의서원고를 훔치려 시도한다면 그 의서의 원고는 더더욱 깊숙이 감추어져 찾을 방도가 없어질수 있었다. 수미는 인내성있게 기다리는 방향으로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야만 나고야가 준 임무를 수행할수 있다. 오래 기다릴수록 허준내외의 경계심과 우려는 덜어질것이고 그러느라면 그들도 차츰 해이될것이다. 또 그사이에 허준은 의서의 원고를 완성할것이고 그 권수도 많아져 감추기도 헐치 않을것이다. 원고의 권수가 많아진다는것은 그만큼 그 가치가 더 진귀해진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두고보자! 10년이라도 기다릴테다!)

앙다문 입술에선 피가 방울져 떨어졌건만 수미는 까딱하지 않고 어둠속을 집요하게 응시하였다.

(이 나라에 범을 잡으려면 범의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지. 그러자면 내가 허준이에게 직접 접근해야 한다. 네 아무리 어의라고 해도 사내가 분명할텐데 내 네놈을 어떻게 하든지 내 발밑에 꿇어앉히고야말테다.)

수미는 허준의 딸이 혜민서에 다닌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혜민서에 발을 붙여야 한다. 그래서 딸년을 통해 허준에게 접근하자. 의술을 배운다는 구실로 허준을 찾아가면 모른다고 하지 않을것이다. 그다음 적당한 기회를 마련하여 미인계를 써서 그를 흐물흐물하게 삶아놓으면 제아무리 허준이라고 해도 자기의 행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내 요구를 들어줄것이다!

혜민서에 들어가자면 허모를 통해야 했다. 그러자면 그놈을 더 꽉 그러쥐여야 했다. 일이 성사될 때까지는 허모의 그늘밑에 있어야 안전이 담보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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